성혜인은 순간 얼어붙었다. 반승제가 무슨 속셈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그녀는 로즈가든으로 돌아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미술 도구들을 갖고 익숙하게 호텔로 향했다.반승제의 호텔 방에 도착하자, 창문 앞 캔버스에 놓인 한 폭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그 그림을 보자마자 성혜인은 단번에 이것이 스승님이 그린 것이라는 걸 알았다.“반 대표님?”그녀는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얼마 안 가, 반승제가 문을 열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왔다.“시환이가 나한테 준 그림이야. 주영훈 선생님께서 절반만 그리고 가셨다지 뭐야, 마저 채워 넣을 수 있겠어?”성혜인은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산수화였는데 스승님 특유의 자유분방한 붓질을 모방하면 채워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올려 반승제를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얼마나 주실 생각이신데요?”그녀의 말에는 아무런 감정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흡사 반승제가 돈을 주지 않으면 바로 자리를 뜰 것처럼 말이다.반승제는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휙 던지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다가갔다.“이런 기회는 잡고 싶어도 못 잡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맞는 말이었다. 그가 이 그림을 세상에 내놓는다면 수많은 화가는 물론이고 업계에서 이름을 떨친 유명한 사람들도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지원할 테니까 말이다.반승제에게 신세를 지게 하는 건 절대 돈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성혜인은 곧바로 다리를 들어 밖으로 나갈 자세를 취했다.“대표님, 죄송하지만 오늘 밤 일이 있는 걸 깜빡했습니다.”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반승제의 표정은 순간 차가워졌다. 그는 소파에 앉으면서 그녀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왜? 오늘 밤 기분이 안 좋아?”그가 성혜인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성혜인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제의 일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그의 얼굴에 손을 날리고 싶을 정도로 확실히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이내 이성
성혜인의 눈매는 매우 아름다웠는데 특히나 빨갛게 번질 때 가련하면서도 불쌍한 그 모습이 어쩐지 보기 좋았다.그녀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이를 꽉 깨물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이런 표정은 정말이지 키스를 부르는 얼굴이었다.하지만 반승제가 80억을 송금한 일이 생각나 그녀는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80억으로 그녀의 억울함을 맞바꾼다면 손해 볼 게 없었기 때문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대표님.”아직 두 사람은 협력상태에 있다. 고객은 혜인에게 있어서 왕 같은 존재였다.그러므로 자신의 ‘왕’에게 다짜고짜 화를 내는 건 정말이지 안될 일이었다.반승제는 자라오면서 처음으로 반태승이 아닌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겪어봤다.그러나 그는 전혀 화는 나지 않았고 오히려 조금은 신기했다.그녀가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때, 그의 피도 함께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굳어버린 반승제는 침을 두 번 꿀꺽 삼키더니 곧장 그녀의 뒤통수를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성혜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살짝 비켰다.“네 번째는 오늘 밤인가요?”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보자 반승제는 어딘가 마음이 답답해 나는 것 같았다.방에 있는 창문을 열지 않아서인지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성혜인은 천천히 그를 밀어내더니 창문 앞에 놓인 그림을 보며 말했다.“60억이면 반 대표님을 도와 마저 완성하겠습니다.”반승제는 침묵했다.성혜인의 생각은 간단했다. 반승제 같은 사람은 돈이 부족한 사람이 아닌 걸 알기 때문에 이왕 가질 수 있으면 많이 가져놓자는 게 그녀의 속셈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도 돈이 부족한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하물며 몇십억은 반승제에게 있어서 큰돈이 아니었다.반승제 역시 오늘 밤 성혜인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네 번째 관계를 갖기에는 안된다고 생각했다.“그래, 60억으로 하자.”그제야 성혜인은 자신이 갖고 온 물감을 하나하나 펼쳐놓더니 욕실에 가서 물을 담아왔다.반승제는 소파에 앉아 그녀가 바쁘게 욕실
늘 체력단련을 했던 반승제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그는 성혜인을 공중으로 붕 뜨게 안은 뒤 차가운 벽에 밀어붙였다.“대표님, 네 번째예요.”그녀는 비교적 온순한 태도로 시선을 아래도 내렸다.반승제는 그자세로 그녀에게 키스했다. 쏟아지는 뜨거운 물 속에서도 그의 얼굴은 유난히 빛났다.성혜인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그녀가 여태껏 봐온 얼굴 중에 반승제는 제일 잘생긴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생김새는 날카로우면서도 입술은 얇은 게 감정이 격해질 때면 M자 모양이 더욱 선명해져 자신을 절제하려는 듯한 모습이 눈에 확 보였다.늘 시크하고 고고한 그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하는 것은 정말이지 은밀한 만족감을 느끼게 했다. 이건 인간의 나쁜 근성이다.성혜인은 그제야 왜 민지가 늘 반승제와 자서 손해 볼게 없다고 얘기했는지 알 것 같았다.그녀가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아지자 반승제도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욕실 안은 뜨거운 열기로 자욱했고 그들의 소리는 오랫동안 지속 되었다.한참 뒤, 반승제에게 안겨 욕실에서 나온 성혜인은 마치 면발처럼 축 늘어져 있는 상태였다.이불에 눕혀졌을 때 그녀는 반승제가 계속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미간을 구기며 몸을 돌렸다.“아파요.”밤이 기므로 반승제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앞에서 포효하고 있는 남성의 몸이 그녀의 눈에는 아무런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는지, 성혜인은 어느새 깊은 잠이 들고 말았다.그녀에게 있어 열 번은 단지 완수해야 할 임무에 그치지 않았다.반승제는 어려서부터 많은 여자가 그를 쫓아다녔다. 이성을 거절하다 못해 거절하는 게 귀찮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혜인이 자신에게 조금도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는 살짝 불쾌해졌다.“페니야?”그는 혜인의 얼굴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러자 그녀는 잠결에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홱 뿌리쳤다.그래서 반승제는 하는 수없이 침대에 누웠다.성혜인에 대한 반승제의 느낌은 많이 이상했다. 긁고 싶어도 긁을 수 없는 마치 뼈가 간지러운 느낌
반승제가 침대로 돌아오자 성혜인은 몽롱해서 그에게 다가갔다.그러고는 한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그러자 그는 돌아누워 자세히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높은 콧대에 좋은 피부, 또 속눈썹은 길지 않았지만, 숱이 촘촘했다.머리를 잘라서인지 잘 때의 모습도 어딘지 귀여웠다.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꽉 껴안았다. 그러고는 머리를 숙여 숨을 크게 들이쉬었는데 마치 하얀 고양이가 품에 안겨있는 것 같았다.그 바람에 성혜인은 잠깐 깨어났는데 그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웃는 것이었다.“가짜임이 틀림없어.”그녀는 그날 본 편지를 두고 하는 얘기였다. 반승제는 자신의 옆에 누워있으니까 말이다.꿈을 꾸며 잠꼬대를 한 성혜인은 이 말을 끝으로 다시 잠에 빠졌다.그녀의 미소진 얼굴을 본 반승제는 마치 누군가에게 심장을 두들겨 맞은 듯 얼얼해진 느낌이 들었다.“뭐가 가짜라는 거야?”그는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성혜인은 또 몽롱하게 눈을 뜬 채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달콤한 말끝이 약간 길게 늘어져서 마치 반승제의 뼛속으로 퍼져가는 것 같았다.그는 혜인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거기다 온시환이 해준 얘기들이 생각나며 곰곰이 돌이켜보니 확실히 그녀는 말이 안 되는 행동들을 많이 한 것 같았다.결혼한 여자가 남자에게 약을 발라주고 그에게 깔렸을 때 얼굴이 발그레해지며 또 몰래 그를 그리고 전에는 자주 그를 바라보며 멍을 때리고...‘이게 좋아하는 게 아니면 도대체 뭐야? 입으로 절대 인정하지 않는 걸 보면, 무슨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가?’반승제가 남녀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많이 생각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는 윤단미에게서도 이런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다.단지 늘 이성적으로 그녀에게 잘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어려서부터 삶이 순조로웠던 그는 타고난 총명함으로 뭘 하든 성공해냈다.그건 그의 형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반승제는 집안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한때는 금융을 배우고
성혜인은 자기최면을 거는데 소질이 있었다.‘이 수표를 가져가서 현금으로 바꿔 통장에 넣으면 카드에 순식간에 140억이 생기는 거네!’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걷는 것도 더 힘이 나는 것 같았다.그러나 목에 난 붉은 자국들을 보자 그녀는 또 미간을 찌푸렸다.‘다음부터는 조금만 살살 물라고 말해야 하나, 매번 스카프를 두르고 다니는 것도 이상하잖아.’호텔을 갓 빠져나오는데 경찰서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영진이 성혜원의 이름을 고발했다는 소리였다.그 시각 성혜원은 이미 해외에 도착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증거가 확실했기 때문에 다국적으로 수배를 내릴 수 있었고 일단 그녀가 해외에서 발견되기만 하면 바로 국내로 송환할 수 있었다.그녀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숨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하영진을 비롯해 잡혀 온 몇몇 임원들은 이미 SY그룹에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현재 SY그룹은 이 사람들의 사직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에 부닥쳐있다.그 와중에 다행히 성혜인이 BK사와의 협력 건을 추진해왔고 BK사에서는 서민규에게 파견을 보냈다.사람을 잘 다루는 이선은 서민규와 성혜인의 관계가 괜찮은 것을 파악하고 일부러 서민규를 보냈다. 또 그건 간접적으로 성혜인에게 정을 판다는 소리이기도 했다.성혜인은 곧바로 이선에게 전화를 걸어 거듭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고 서민규와의 거래도 성공적으로 체결했다.“여동생은 어떻게 됐어요?”“그냥 조금 놀랐나 봐요. 상처 꿰매고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서민규는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성혜인과의 거래에서는 확실히 분명히 하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묻지 말아야 할 것은 묻지 않는 것과 지켜야 할 말은 절대 지키는 것.예를 들어 지난번 장석호에게 납치당했을 때와 같이 말이다.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라는 말에 그는 두들겨 맞아 거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음에도 절대 전화를 걸지 않았다.그리고 현재, 분명히 성혜인이 평범한 실내 디자이너라고 알고 있을 텐데 어떻게 내화를 대표로 계약을 체결하는지, 서민규는 궁금할 법도
오늘도 역시 잘 노는 귀공자 차림을 한 신이한이 뻔쩍뻔쩍한 스포츠카를 몰고 와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페니 씨, 우선 사장의 자리를 갖게 된 걸 축하해요. 근데 BK사와는 협력하자 했으면 왜 저는 안 찾아와요?”성혜인도 신이한을 찾아가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단지 매번 신이한을 찾으러 갈 때면 늘 그가 엄청난 일을 만들었기 때문에 꺼렸던 것이었다.신이한은 차 문을 열며 그녀에게 차에 타라 손짓했다.“페니 씨가 저를 찾아오지 않으니 제가 찾아와야죠. 이렇게 적극적으로 협력 건을 제시하는데, 어때요?”그제야 성혜인은 거절하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신이한은 단발머리를 한 성혜인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다.‘미친! 너무 예쁘잖아!’모두가 반승제의 아내는 못난이라고 말했는데, 만약 성혜인이 못난 거면 감히 자신이 예쁘다고 말할 사람은 누구도 없을 것 같았다.“일 때문에 그 아름다운 머리를 자른 거예요?”그는 계속해서 농담을 하다가 문득 그녀의 목에 둘려있는 스카프를 발견했다. 비록 그 모습도 예쁘긴 했지만, 눈치 빠른 신이한은 뭔가 이상함을 감지해냈다.성혜인은 신이한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도 모른 채 단 한마디만을 건넸다.“반승제 씨가 있는 곳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신이한은 핸들을 꽉 잡으며 피식 웃었다.“남편을 그렇게 보기 싫어요? 윤단미 씨한테 한 수 배워야겠네요. 듣기로는 요 며칠 어디 다쳤다나? 그래서 반 대표님한테 하루에도 10통 가까이 전화를 건다고 하던데요.”성혜인은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신 대표님은 많이 한가하신가 보네요? 여자들 사이의 가십거리도 이렇게 잘 알고 있는걸 보면요.”“한가한 게 아니에요. 페니 씨랑 관련된 일에 관심이 있을 뿐이지.”신이한의 말이 끝나자 차 안에는 갑자기 침묵이 돌았다.성혜인도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미간만 구길 뿐이었다.그때, 신이한이 몇 마디 덧붙이며 말했다.“반 대표가 진짜로 윤단미 씨랑 결혼하겠다 하면 어쩔거예요?”그러자 성혜인이 의심
신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나는 지금 페니 씨를 도와주고 있는 거잖아요. 윤단미가 반승제한테 찰싹 붙어있는 저 꼴 못 봤어요?’신이한의 말소리를 들은 윤단미는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별꼴이야 정말. 페니 씨는 결혼도 했으면서 신이한 씨한테 작업을 건 거야? 신이한 씨도 취향 참 독특한가 보네. 남편 없는 틈을 타서 집에까지 몰래 가려고 하다니.”반승제의 마음은 갑자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승제야, 나 데려다줘.”“심 비서한테 데려다주라고 얘기할게.”“근데 나 아직 다친 몸이란 말이야.”윤단미가 다친 거라곤 납치범에게 뺨 두 번 맞은 것과 발을 접질린 것밖엔 없었는데 그마저도 이미 부기가 다 빠진 상태였다.“나 회사 돌아가서 회의에 참석해야 해.”그가 회사로 돌아가 회의를 한다는 말을 듣자 윤단미도 더는 성가시게 굴지 않았다.한편, 성혜인은 신이한과의 통화가 종료된 후에도 당최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하지만 신이한이 그녀를 일깨워준 게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모름지기 결혼한 사람이라면 집안에 반드시 남자 신발 두 켤레쯤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그래서 그녀는 곧바로 집 아래 슈퍼마켓으로 달려가 싸구려 가죽구두와 슬리퍼 몇 켤레, 또 남성 잠옷 몇 벌을 구매했다.그러고는 집으로 올라가 봉지를 뜯고 막 진열을 끝냈는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정말 온 거야?’성혜인은 그 사람이 신이한인 줄 알았다.신이한이라면 이런 일을 할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살며시 열었다.“신 대표님...”그러나 뜻밖에도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신이한이 아닌 반승제였다.그를 본 성혜인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걸음 물러서더니 재빨리 문을 막아섰다. 다른 뜻은 없었고 단지 오늘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안 들여보내 줄 거야?”그는 멋들어진 정장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장이 벗겨지는 순간 반승제는 또다시 그녀의 말은 무시한 채 오히려 입으로 강하게 틀어막을 걸, 성혜인은 잘 알고 있었다.“
인정사정없는 그녀의 행동에 반승제는 하마터면 문에 손이 끼일 뻔했다.그는 문밖에 서서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머릿속이 꽉 막힌 것처럼 말이다.얼마 정도 지나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반승제는 속에서 열불이 끓어올랐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랐다.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은 주변의 모든 사물을 얼어붙게 할 것 같았다.반승제는 화가 날수록 냉정해지기 위해 애를 썼다.단지를 빠져나오는데 그의 눈에 때마침 차에 기대 담배를 피우는 신이한이 들어왔다. 그러자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어? 반 대표님 아니신가요? 어쩜 여기서 다 만나죠?”반승제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바로 자신의 차 문을 열고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제자리에 서 있던 신이한은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자 서서히 미소를 지었다.‘여자를 원해 반 대표? 하지만 어떤 여자도 내가 쳐놓은 그물은 피할 수 없을 거야. 그게 설마 네 아내인 성혜인이라도 말이야.’신이한이 일부러 이런 일을 꾸민 이유는 그저 반승제와 같이 촉망받는 천재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일단 페니가 자신의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반승제는 그녀와 당당하게 사랑을 나누며 침대에서 뒹굴게 될 게 뻔했다.이 점을 납득하게 된 신이한은 참지 못하고 바로 비속어를 내뱉었다.‘멍청한 놈, 이런 일은 하지 말았어야지. 계속 페니 씨가 신분을 속일 수 있도록 도와 두 사람이 빨리 이혼하게 했어야지! 이렇게 일을 벌여놓고 나중에 반승제가 손을 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신이한은 자신을 꾸짖었다.멀어지는 차 위에서 반승제는 이선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선은 그의 전화가 조금은 영광스러웠다. 왜냐하면, 반승제는 한 번도 주동적으로 그에게 전화를 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반 대표님.”침착한 말투와는 달리 반승제는 두 손으로 핸들을 꽉 붙잡고 있었다.“이 대표님, 혹시 BK사가 서천 쪽에 파견한 총책임자가 누군지 좀 알 수 있을까요?”이선은 이유가 궁금했지만 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