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자기최면을 거는데 소질이 있었다.‘이 수표를 가져가서 현금으로 바꿔 통장에 넣으면 카드에 순식간에 140억이 생기는 거네!’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걷는 것도 더 힘이 나는 것 같았다.그러나 목에 난 붉은 자국들을 보자 그녀는 또 미간을 찌푸렸다.‘다음부터는 조금만 살살 물라고 말해야 하나, 매번 스카프를 두르고 다니는 것도 이상하잖아.’호텔을 갓 빠져나오는데 경찰서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영진이 성혜원의 이름을 고발했다는 소리였다.그 시각 성혜원은 이미 해외에 도착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증거가 확실했기 때문에 다국적으로 수배를 내릴 수 있었고 일단 그녀가 해외에서 발견되기만 하면 바로 국내로 송환할 수 있었다.그녀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숨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하영진을 비롯해 잡혀 온 몇몇 임원들은 이미 SY그룹에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현재 SY그룹은 이 사람들의 사직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에 부닥쳐있다.그 와중에 다행히 성혜인이 BK사와의 협력 건을 추진해왔고 BK사에서는 서민규에게 파견을 보냈다.사람을 잘 다루는 이선은 서민규와 성혜인의 관계가 괜찮은 것을 파악하고 일부러 서민규를 보냈다. 또 그건 간접적으로 성혜인에게 정을 판다는 소리이기도 했다.성혜인은 곧바로 이선에게 전화를 걸어 거듭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고 서민규와의 거래도 성공적으로 체결했다.“여동생은 어떻게 됐어요?”“그냥 조금 놀랐나 봐요. 상처 꿰매고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서민규는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성혜인과의 거래에서는 확실히 분명히 하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묻지 말아야 할 것은 묻지 않는 것과 지켜야 할 말은 절대 지키는 것.예를 들어 지난번 장석호에게 납치당했을 때와 같이 말이다.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라는 말에 그는 두들겨 맞아 거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음에도 절대 전화를 걸지 않았다.그리고 현재, 분명히 성혜인이 평범한 실내 디자이너라고 알고 있을 텐데 어떻게 내화를 대표로 계약을 체결하는지, 서민규는 궁금할 법도
오늘도 역시 잘 노는 귀공자 차림을 한 신이한이 뻔쩍뻔쩍한 스포츠카를 몰고 와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페니 씨, 우선 사장의 자리를 갖게 된 걸 축하해요. 근데 BK사와는 협력하자 했으면 왜 저는 안 찾아와요?”성혜인도 신이한을 찾아가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단지 매번 신이한을 찾으러 갈 때면 늘 그가 엄청난 일을 만들었기 때문에 꺼렸던 것이었다.신이한은 차 문을 열며 그녀에게 차에 타라 손짓했다.“페니 씨가 저를 찾아오지 않으니 제가 찾아와야죠. 이렇게 적극적으로 협력 건을 제시하는데, 어때요?”그제야 성혜인은 거절하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신이한은 단발머리를 한 성혜인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다.‘미친! 너무 예쁘잖아!’모두가 반승제의 아내는 못난이라고 말했는데, 만약 성혜인이 못난 거면 감히 자신이 예쁘다고 말할 사람은 누구도 없을 것 같았다.“일 때문에 그 아름다운 머리를 자른 거예요?”그는 계속해서 농담을 하다가 문득 그녀의 목에 둘려있는 스카프를 발견했다. 비록 그 모습도 예쁘긴 했지만, 눈치 빠른 신이한은 뭔가 이상함을 감지해냈다.성혜인은 신이한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도 모른 채 단 한마디만을 건넸다.“반승제 씨가 있는 곳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신이한은 핸들을 꽉 잡으며 피식 웃었다.“남편을 그렇게 보기 싫어요? 윤단미 씨한테 한 수 배워야겠네요. 듣기로는 요 며칠 어디 다쳤다나? 그래서 반 대표님한테 하루에도 10통 가까이 전화를 건다고 하던데요.”성혜인은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신 대표님은 많이 한가하신가 보네요? 여자들 사이의 가십거리도 이렇게 잘 알고 있는걸 보면요.”“한가한 게 아니에요. 페니 씨랑 관련된 일에 관심이 있을 뿐이지.”신이한의 말이 끝나자 차 안에는 갑자기 침묵이 돌았다.성혜인도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미간만 구길 뿐이었다.그때, 신이한이 몇 마디 덧붙이며 말했다.“반 대표가 진짜로 윤단미 씨랑 결혼하겠다 하면 어쩔거예요?”그러자 성혜인이 의심
신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나는 지금 페니 씨를 도와주고 있는 거잖아요. 윤단미가 반승제한테 찰싹 붙어있는 저 꼴 못 봤어요?’신이한의 말소리를 들은 윤단미는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별꼴이야 정말. 페니 씨는 결혼도 했으면서 신이한 씨한테 작업을 건 거야? 신이한 씨도 취향 참 독특한가 보네. 남편 없는 틈을 타서 집에까지 몰래 가려고 하다니.”반승제의 마음은 갑자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승제야, 나 데려다줘.”“심 비서한테 데려다주라고 얘기할게.”“근데 나 아직 다친 몸이란 말이야.”윤단미가 다친 거라곤 납치범에게 뺨 두 번 맞은 것과 발을 접질린 것밖엔 없었는데 그마저도 이미 부기가 다 빠진 상태였다.“나 회사 돌아가서 회의에 참석해야 해.”그가 회사로 돌아가 회의를 한다는 말을 듣자 윤단미도 더는 성가시게 굴지 않았다.한편, 성혜인은 신이한과의 통화가 종료된 후에도 당최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하지만 신이한이 그녀를 일깨워준 게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모름지기 결혼한 사람이라면 집안에 반드시 남자 신발 두 켤레쯤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그래서 그녀는 곧바로 집 아래 슈퍼마켓으로 달려가 싸구려 가죽구두와 슬리퍼 몇 켤레, 또 남성 잠옷 몇 벌을 구매했다.그러고는 집으로 올라가 봉지를 뜯고 막 진열을 끝냈는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정말 온 거야?’성혜인은 그 사람이 신이한인 줄 알았다.신이한이라면 이런 일을 할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살며시 열었다.“신 대표님...”그러나 뜻밖에도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신이한이 아닌 반승제였다.그를 본 성혜인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걸음 물러서더니 재빨리 문을 막아섰다. 다른 뜻은 없었고 단지 오늘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안 들여보내 줄 거야?”그는 멋들어진 정장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장이 벗겨지는 순간 반승제는 또다시 그녀의 말은 무시한 채 오히려 입으로 강하게 틀어막을 걸, 성혜인은 잘 알고 있었다.“
인정사정없는 그녀의 행동에 반승제는 하마터면 문에 손이 끼일 뻔했다.그는 문밖에 서서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머릿속이 꽉 막힌 것처럼 말이다.얼마 정도 지나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반승제는 속에서 열불이 끓어올랐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랐다.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은 주변의 모든 사물을 얼어붙게 할 것 같았다.반승제는 화가 날수록 냉정해지기 위해 애를 썼다.단지를 빠져나오는데 그의 눈에 때마침 차에 기대 담배를 피우는 신이한이 들어왔다. 그러자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어? 반 대표님 아니신가요? 어쩜 여기서 다 만나죠?”반승제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바로 자신의 차 문을 열고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제자리에 서 있던 신이한은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자 서서히 미소를 지었다.‘여자를 원해 반 대표? 하지만 어떤 여자도 내가 쳐놓은 그물은 피할 수 없을 거야. 그게 설마 네 아내인 성혜인이라도 말이야.’신이한이 일부러 이런 일을 꾸민 이유는 그저 반승제와 같이 촉망받는 천재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일단 페니가 자신의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반승제는 그녀와 당당하게 사랑을 나누며 침대에서 뒹굴게 될 게 뻔했다.이 점을 납득하게 된 신이한은 참지 못하고 바로 비속어를 내뱉었다.‘멍청한 놈, 이런 일은 하지 말았어야지. 계속 페니 씨가 신분을 속일 수 있도록 도와 두 사람이 빨리 이혼하게 했어야지! 이렇게 일을 벌여놓고 나중에 반승제가 손을 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신이한은 자신을 꾸짖었다.멀어지는 차 위에서 반승제는 이선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선은 그의 전화가 조금은 영광스러웠다. 왜냐하면, 반승제는 한 번도 주동적으로 그에게 전화를 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반 대표님.”침착한 말투와는 달리 반승제는 두 손으로 핸들을 꽉 붙잡고 있었다.“이 대표님, 혹시 BK사가 서천 쪽에 파견한 총책임자가 누군지 좀 알 수 있을까요?”이선은 이유가 궁금했지만 이내
성혜인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반지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 반승제가 닥치는 대로 휙 내던지는 바람에 어디로 굴러갔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그녀는 소파도 들어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역시나 찾지 못했다.겨울이가 옆에서 그녀더러 만져달라고 계속 장난을 치며 뛰어다녔으나 성혜인은 못 본 척했다.바닥을 모두 훑어보았지만, 반지는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풀이 죽어 눈시울을 붉혔다.‘오늘 밤 끼는 게 아니었는데...’반지는 마치 공중에서 사라진 것처럼, 자정이 되도록 찾아도 나오지 않았다.초조해진 성혜인은 잠시 소파에 앉아 멍을 때렸다. 왠지 오늘 밤 찾아내지 못하면 잠자리에 들지 못할 것 같았다.그때, 겨울이가 짖는 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뜻밖에도 소파 틈에 반지가 끼어있는 것이었다.그러자 그녀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무엇을 잃었다 다시 찾아낸 기쁨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반지를 꺼내 들어 침실에 있는 상자에 편지와 함께 고이 넣었다. 그러고는 노트도 함께 들어있는 그 상자를 열쇠로 걸어 잠갔다.그제야 성혜인은 한숨을 돌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조금 전 자신이 반승제에게 화를 내고 그를 내쫓은 일이 생각났다.하지만 그녀는 반승제에게 사과할 생각이 없었다.그건 분명히 반승제의 잘못이었으니까 말이다.이번에야말로 성혜인은 머리를 숙이지 않고 그저 내버려 두었다.두 사람 사이의 냉전이 지속한 지 일주일 후, 반승제의 할머니 김경자가 제원으로 돌아왔다.김경자와 관계가 좋았던 백연서는 그녀가 돌아오자 직접 마중을 나갔다. 그러나 반승제와 반태승은 가지 않았다.우아한 한복을 차려입은 김경자의 매 손짓에서는 재벌가의 포스가 물씬 풍겼다.백연서가 따라준 찻잔을 건네받으며 김경자가 물었다.“승제랑 결혼했다는 그 여자는?”“승제 그 아이 참을성이 좋은가 봐요. 3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이혼을 안 했어요.”그녀는 뒤이어 김경자를 타이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제가 이미 그 여자한테 망상 같은 건 꾸지
“성혜인이라고 합니다. 그 아이는 아버님께서 점 찍어준 사람이라 아무리 반씨 가문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굳건히 앉아있을 거예요.”김경자도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피식 웃었다.“그 아이한테 전화해서 내일 한번 오라고 해라. 자세히 좀 봐봐야겠어. 도대체 뭐가 잘나서 승제에게 시집을 갈 수 있는 건지.”김경자는 원래 반태승과 사이가 안 좋은 거에 더해 부처를 모시고 있어서 예전에도 일 년에 한 번 정도밖에 오지 않았다. 그러다 반승우에게 일이 생긴 이후에는 완전히 이사를 가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김경자는 반승우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자라며 끔찍이 여겼었다.그러나 반승제를 대함에 있어서는 항상 엄했다.그녀가 굳이 내일 오라고 한 이유는 다름 아닌 오늘 저녁 반씨 저택에서 반씨 일가가 모두 모여 저녁 식사를 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인즉슨 성혜인 때문에 식사 자리를 망치고 싶지 않다는 얘기다.반씨 가문에 있는 김경자의 아랫사람들은 전부 그녀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한 번씩 얼굴을 비추고 갔지만, 반태승과 반승제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이튿날, 반씨 저택의 부름을 받은 성혜인은 그제야 김경자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았다.그녀는 반씨 가문에 시집온 3년 내내 한 번도 김경자를 보지 못했다.그러나 예전에 반태승이 그녀에게 잘 지내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귀띔해준 기억은 있었다.성혜인은 스승님이 김경자에게 선물하라고 보내주셨던 그림을 꺼냈다.반씨 저택에 도착해 문을 열어준 도우미는 그녀를 보자 화들짝 놀라 눈을 뒤집었다.성혜인이 이곳에 온건 처음이 아니었지만, 매번 올 때마다 백연서에게 꾸중을 듣는 바람에 도우미들도 늘 백연서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도우미의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헐렁한 차림에 손목에 염주를 세 줄이나 찬 노인이 앉아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친절하기보다는 엄격한 사람인 것 같았다.“할머님.”그녀는 공손한 태도로 예의 바르게 김경자를 불렀다
백연서는 성혜인이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모른 듯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쯧쯧, 역시 못 배운 티는 숨겨지지 않네요.”“고생 좀 해야 정신을 차리지. 영감이 예뻐해 주니 우리 집안이 아주 만만해 보이는 모양이야.”두 사람은 별장 안에서 여유 적적하게 차를 즐기는 반대로 성혜인은 마당에서 무릎 꿇고 있었다.태양이 가장 높게 떠 있을 점심 갓 지난 시간, 마당의 바닥은 불에 달궜던 것처럼 뜨거웠다. 얇은 한 층의 천을 사이 두고 성혜인의 무릎은 화상을 입을 지경이었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8월은 여름 중에서도 가장 더울 때이다. 실외 온도는 거의 30도에 달했고, 바닥의 온도는 60도에 가까웠다.마당에 두 시간 동안이나 무릎 꿇고 있던 성혜인의 안색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그녀가 휘청거리는 모습에 혹시라도 사고가 나서 반태승의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던 김경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됐다, 이만 돌아가 보거라. 같은 꼴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 입 조심해야 할 거다.”이는 반태승에게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성혜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던 지라 자칫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이번 일 덕분에 성혜인은 확실히 배운 것이 있었다. 이토록 좋은 그림은 애초에 꺼내는 것이 아니었다.“네, 할머님.”성혜인이 몸을 돌려 떠나려는 순간 김경자는 도우미에게 눈치를 줬다. 그러자 도우미는 곧바로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성혜인의 그림을 빼앗아 들었다.촤락!그림은 단번에 두 조각이 나고 성혜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도우미를 바라봤다.김경자는 여전히 우아한 자태로 찻잔을 들어 올리며 차분하게 말했다.“나한테 잘 보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승제는 너 따위 여자한테 마음에 흔들릴 리가 없으니.”성혜인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돌연 싸늘해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할머님.”성혜인은 도우미의 손에서 두 조각 난 그림을 뺏어왔다. 심장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두 시간 내내 무릎 꿇고 있었던 성혜인은 더위를 먹은 것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더 이상 운전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벤치에 앉아 숨이라도 돌려야 했다.또다시 헛구역질이 올라와 머리를 숙이니 문득 무릎이 보였다. 성혜인은 바지를 말아 올려 무릎을 드러냈다. 어쩐지 살짝 움직일 때마다 아프다 했더니, 역시 무릎은 껍질이 한 층 벗겨졌을 뿐만 아니라 빨갛게 부어 있었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두 조각 난 채로 차 안에 있는 주영훈의 그림이 저릿저릿 아픈 무릎과 함께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머리를 숙인 채 무릎에 난 상처만 물끄러미 바라봤다.다른 한쪽에서 우연히 성혜인을 발견한 심인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때마침 빨간불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해서 그는 빠르게 말했다.“대표님, 저쪽에 페니 씨가 있는 것 같은데요.”반승제는 고민하다 못해 결국 심인우에게 길가에 차를 세우라고 했다. 그리고 물과 우산을 챙겨 들고 차에서 내렸다.성혜인은 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날씨가 더운 관계로 그늘이라고 해도 그다지 시원하지 않았다.성혜인의 앞으로 다가간 반승제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을 건넸다. 그리고 바로 그녀의 무릎에 난 상처를 발견하고 미간을 구겼다.갑자기 시선 안으로 들어온 물을 보고 성혜인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반승제의 얼굴을 발견하고서는 물을 받아 드는 것도 잊은 채 넋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반승제가 물을 들고 있는 손을 거두려고 할 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손을 올리며 말했다.“고마워요.”반승제는 깔끔한 정장에 은으로 만든 손잡이를 달고 있는 비싼 우산을 들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그 고귀한 자태에 기가 눌릴 정도였다.그는 한참 가만히 서 있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성혜인을 일으켜 세웠다. 중심을 잃은 성혜인은 그의 품으로 넘어졌고, 순간 차가운 기운이 코안으로 밀려 들어왔다.“나를 욕할 때는 그렇게 팔팔하던 사람이 웬일이래?”반승제의 비꼬는 말투에 그날 일이 떠오른 성혜인은 바로 사과했다.“대표님, 그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