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이라고 합니다. 그 아이는 아버님께서 점 찍어준 사람이라 아무리 반씨 가문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굳건히 앉아있을 거예요.”김경자도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피식 웃었다.“그 아이한테 전화해서 내일 한번 오라고 해라. 자세히 좀 봐봐야겠어. 도대체 뭐가 잘나서 승제에게 시집을 갈 수 있는 건지.”김경자는 원래 반태승과 사이가 안 좋은 거에 더해 부처를 모시고 있어서 예전에도 일 년에 한 번 정도밖에 오지 않았다. 그러다 반승우에게 일이 생긴 이후에는 완전히 이사를 가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김경자는 반승우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자라며 끔찍이 여겼었다.그러나 반승제를 대함에 있어서는 항상 엄했다.그녀가 굳이 내일 오라고 한 이유는 다름 아닌 오늘 저녁 반씨 저택에서 반씨 일가가 모두 모여 저녁 식사를 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인즉슨 성혜인 때문에 식사 자리를 망치고 싶지 않다는 얘기다.반씨 가문에 있는 김경자의 아랫사람들은 전부 그녀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한 번씩 얼굴을 비추고 갔지만, 반태승과 반승제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이튿날, 반씨 저택의 부름을 받은 성혜인은 그제야 김경자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았다.그녀는 반씨 가문에 시집온 3년 내내 한 번도 김경자를 보지 못했다.그러나 예전에 반태승이 그녀에게 잘 지내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귀띔해준 기억은 있었다.성혜인은 스승님이 김경자에게 선물하라고 보내주셨던 그림을 꺼냈다.반씨 저택에 도착해 문을 열어준 도우미는 그녀를 보자 화들짝 놀라 눈을 뒤집었다.성혜인이 이곳에 온건 처음이 아니었지만, 매번 올 때마다 백연서에게 꾸중을 듣는 바람에 도우미들도 늘 백연서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도우미의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헐렁한 차림에 손목에 염주를 세 줄이나 찬 노인이 앉아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친절하기보다는 엄격한 사람인 것 같았다.“할머님.”그녀는 공손한 태도로 예의 바르게 김경자를 불렀다
백연서는 성혜인이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모른 듯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쯧쯧, 역시 못 배운 티는 숨겨지지 않네요.”“고생 좀 해야 정신을 차리지. 영감이 예뻐해 주니 우리 집안이 아주 만만해 보이는 모양이야.”두 사람은 별장 안에서 여유 적적하게 차를 즐기는 반대로 성혜인은 마당에서 무릎 꿇고 있었다.태양이 가장 높게 떠 있을 점심 갓 지난 시간, 마당의 바닥은 불에 달궜던 것처럼 뜨거웠다. 얇은 한 층의 천을 사이 두고 성혜인의 무릎은 화상을 입을 지경이었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8월은 여름 중에서도 가장 더울 때이다. 실외 온도는 거의 30도에 달했고, 바닥의 온도는 60도에 가까웠다.마당에 두 시간 동안이나 무릎 꿇고 있던 성혜인의 안색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그녀가 휘청거리는 모습에 혹시라도 사고가 나서 반태승의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던 김경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됐다, 이만 돌아가 보거라. 같은 꼴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 입 조심해야 할 거다.”이는 반태승에게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성혜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던 지라 자칫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이번 일 덕분에 성혜인은 확실히 배운 것이 있었다. 이토록 좋은 그림은 애초에 꺼내는 것이 아니었다.“네, 할머님.”성혜인이 몸을 돌려 떠나려는 순간 김경자는 도우미에게 눈치를 줬다. 그러자 도우미는 곧바로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성혜인의 그림을 빼앗아 들었다.촤락!그림은 단번에 두 조각이 나고 성혜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도우미를 바라봤다.김경자는 여전히 우아한 자태로 찻잔을 들어 올리며 차분하게 말했다.“나한테 잘 보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승제는 너 따위 여자한테 마음에 흔들릴 리가 없으니.”성혜인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돌연 싸늘해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할머님.”성혜인은 도우미의 손에서 두 조각 난 그림을 뺏어왔다. 심장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두 시간 내내 무릎 꿇고 있었던 성혜인은 더위를 먹은 것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더 이상 운전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벤치에 앉아 숨이라도 돌려야 했다.또다시 헛구역질이 올라와 머리를 숙이니 문득 무릎이 보였다. 성혜인은 바지를 말아 올려 무릎을 드러냈다. 어쩐지 살짝 움직일 때마다 아프다 했더니, 역시 무릎은 껍질이 한 층 벗겨졌을 뿐만 아니라 빨갛게 부어 있었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두 조각 난 채로 차 안에 있는 주영훈의 그림이 저릿저릿 아픈 무릎과 함께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머리를 숙인 채 무릎에 난 상처만 물끄러미 바라봤다.다른 한쪽에서 우연히 성혜인을 발견한 심인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때마침 빨간불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해서 그는 빠르게 말했다.“대표님, 저쪽에 페니 씨가 있는 것 같은데요.”반승제는 고민하다 못해 결국 심인우에게 길가에 차를 세우라고 했다. 그리고 물과 우산을 챙겨 들고 차에서 내렸다.성혜인은 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날씨가 더운 관계로 그늘이라고 해도 그다지 시원하지 않았다.성혜인의 앞으로 다가간 반승제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을 건넸다. 그리고 바로 그녀의 무릎에 난 상처를 발견하고 미간을 구겼다.갑자기 시선 안으로 들어온 물을 보고 성혜인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반승제의 얼굴을 발견하고서는 물을 받아 드는 것도 잊은 채 넋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반승제가 물을 들고 있는 손을 거두려고 할 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손을 올리며 말했다.“고마워요.”반승제는 깔끔한 정장에 은으로 만든 손잡이를 달고 있는 비싼 우산을 들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그 고귀한 자태에 기가 눌릴 정도였다.그는 한참 가만히 서 있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성혜인을 일으켜 세웠다. 중심을 잃은 성혜인은 그의 품으로 넘어졌고, 순간 차가운 기운이 코안으로 밀려 들어왔다.“나를 욕할 때는 그렇게 팔팔하던 사람이 웬일이래?”반승제의 비꼬는 말투에 그날 일이 떠오른 성혜인은 바로 사과했다.“대표님, 그날은
김경자가 말하는 성혜인과 반승제가 생각하는 성혜원의 모습은 한데 겹쳐졌다. 지난번 그런 식으로 옷을 벗어 던지던 여자이니 확실히 어리석기 짝이 없기도 했다.“할머니, 앞으로 그 사람이랑 만나지 마요. 그럴 가치도 없으니까요.”반승제의 차가운 말투에 김경자는 시름을 놓은 듯 한숨 돌렸다.“너도 안다니 다행이구나.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으며 나한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 꼴을 보아하니 너한테도 마찬가지겠다 싶어서 전화했다. 아무튼 나는 그 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얼굴에 전부 다 드러내는 것도 말이다.”반승제는 따듯한 물을 들고 성혜인의 앞으로 다가가며 대답했다.“맞아요. 그러니 앞으로는 멀리하세요.”“알겠다. 너도 조심하거라. 예쁘장한 얼굴에 홀리면 절대 안 된다.”예쁘장한 얼굴이라는 말에 반승제는 성혜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도 마침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반승제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천천히 손을 들어 성혜인의 머리카락을 귓등으로 넘겨줬다. 단발의 성혜인은 전보다 인상이 훨씬 날카로워졌다. 그래서인지 야릇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더욱 기대되었다.갑자기 머릿속을 침범하기 시작한 충동에 반승제는 통화를 하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성혜인의 목덜미를 잡고 키스를 퍼부었다. 지나치게 열정적인 키스에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다 차오르기 시작했다.김경자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성혜인은 인간성부터 잘못됐어. 단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해. 이혼하고 나서는 계획대로 단미랑 결혼하거라.”“읏...”입술을 깨물린 성혜인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냈다.전화 건너편에서 김경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승제야, 듣고 있니?”반승제는 드디어 성혜인을 풀어주고 그녀의 입가에 남은 물기를 닦아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이혼은 무조건 할 거예요.”‘내가 미친 것도 아니고 결혼을 유지할 이유는 없지.’성혜인은 반승제와 김경자가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
그날 지하 주차장에서 반승제와 나눴던 대화가 떠오르자, 성혜인은 갑자기 상사와 바람을 피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그 상사는 그녀의 ‘남편’을 다른 곳으로 발령을 보내기까지 했다.‘대표님이 도대체 왜...?’성혜인은 절대 반승제가 자신을 좋아해서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수많은 여자를 만나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건 둘째 치고, 윤단미라는 첫사랑 여자 친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모든 것을 버리고 해외로 떠나버릴 정도로 성혜인을 싫어했던 사람이다.‘그런 사람이 나를 좋아할 리가 있겠어?’성혜인은 피식 웃었다. 만약 반승제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하면 퍽 우스운 꼴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무릎에 상처가 있는 데다가 머리가 어지러웠던 성혜인은 움직임이 느렸다. 그래서 아주 천천히 소파로 가서 앉았다.조용한 집 안에는 두 사람과 베란다에서 코를 골며 자는 겨울이만 있었다. 어쩐지 숨이 막히는 분위기라 성혜인은 TV를 켰다. 하지만 눈치 없는 채널에서는 하필 온수빈의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었다.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성혜인은 후다닥 일어나며 말했다.“전 샤워하러 갈게요.”오후 내내 무릎을 꿇고 있었더니 옷은 땀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것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래서 성혜인은 이를 핑계로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이때 반승제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손이 훅 다가왔다.“상처에 안 닿게 조심해.”반승제는 호텔에서 가져온 잠옷을 성혜인에게 건넸다.성혜인은 잠옷을 받아서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시원하게 씻고 나니 무릎은 더 부어올라 있었다.어정쩡한 걸음걸이로 밖으로 나가자, 노트북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반승제가 보였다. 당연히 떠났을 것으로 여긴 사람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새삼 놀랍기도 했다.성혜인은 핸드폰을 힐끗 봤다. 현재 시각은 다섯 시, 마침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대표님, 배 안 고프세요?”성혜인은 요리할 줄 안다. 하지만 평소에는 귀찮다는 핑계로 주로 배달 음식을 먹고는 한다. 하지만 반승제와 같은 재벌
그 후의 시간 동안 성혜인은 진짜 반승제의 말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몸 떨림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어쩐지 더 수치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초인종이 울렸다. 배달 음식이 도착한 것이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이 몸을 흠칫 떨더니 식은땀을 흘리는 것을 발견했다. 왠지 긴장한 듯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움직임에 힘을 더했다.“남편은 출장 가지 않았나? 뭘 긴장하고 그래.”성혜인은 반승제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끝내달라고 애원할 뿐이었다. 하지만 반승제는 절대 쉽게 끝내줄 사람이 아니었다. 비싼 배달 음식은 그대로 밤새 방치될 게 뻔했다.역시 성혜인의 예상대로 그녀가 중도에 기절할 때까지도 반승제는 멈추지 않았다. 기절하기 전까지만 해도 열이 나고 있었는데 해열제를 먹고 본의 아니게 땀을 흘려서인지 다시 깨어난 다음에는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현재 시각은 저녁 11시. 성혜인은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났으니, 반승제가 그녀를 장장 네 시간 동안이나 괴롭힌 셈이다. 만약 다리가 아프다고 투정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가만히 누워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성혜인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느릿느릿 침대에서 일어났다.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뭐라도 먹어야 계속 잘 수 있을 것 같았다.거실로 나가보니 또다시 반승제가 보였다. 성혜인이 잠들고 난 다음에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함께 눕지 않은 이유는 아무래도 남의 침대에 눕기는 싫어서일 것이다.주방으로 가서 물 한 잔 마시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반승제의 새 슬리퍼와 잠옷이 보였다. 역시나 심인우가 왔다 간 모양이다.이번으로 다섯 번째다. 반승제가 귀국한 다음 다시는 안 만나게 될 줄 알았더니 다섯 번째까지 있을 줄이야... 그동안 너무 외로워서인지 나쁘지만은 않았다.강민지의 말이 맞았다. 성혜인은 어쩌면 복에 겨웠을 수도 있다. 빨리 끝나기를 기대하며 횟수를 세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성혜인은 물 한 컵 더 따라서
반승제가 떠난 후에도 성혜인은 한참이나 거실에 혼자 서 있었다.성혜인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연신 들려오고 나서야 정신 차리고 화끈거리는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아서 가슴을 한참 두드리다가 화장실로 가서 찬물 세수를 했다.이제야 살 것 같았던 성혜인은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어봤다. 냉장고 속에는 메밀면 한 봉지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뜨거운 물에 면을 끓이고 대충 소금을 넣어 끼니를 때웠다.맛없는 대로 반 그릇을 겨우 먹고 나서는 설거지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아무리 뒤척거려도 잠이 오질 않았다. 반승제가 했던 말은 머릿속에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성혜인은 유교걸이다. 이런 상황에서 말하기 약간 우습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나름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절대 연애를 안 한다는 철칙을 가진 사람이었다.반승제와 결혼하기 전에 좋아했던 사람과도 대학에서 만나기로 약속만 해놓은 상태였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성혜인은 서천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그녀의 사상도 꽤 보수적인 편에 속했다. 공부하면 할수록 어떤 생각은 틀렸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릴 적의 환경을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려웠다.강민지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만나고 다니고는 한다. 남자는 밥 먹듯이 피는 바람을 왜 여자는 피면 안 되고, 똑같이 출근하고 돈을 벌면서 왜 여자만 집안일을 하는 등 문제를 처음으로 성혜인에게 가르쳐주기도 했다.그래도 성혜인은 남녀 사이의 관계에서만큼은 자유롭지 못했다. 반승제와 첫날밤을 가진 날에도 상대가 서류상 남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수치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마음이 통해야만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두 사람은 서로 증오했으니 말이다.성혜인은 몸을 돌리며 계속해서 생각했다. 반승제는 조금 전 그녀에게 몸은 솔직하다고 말했다. 확실히 그녀는 입으로는 싫다고 하면서도 몸은
이튿날.성혜인은 아침 일찍부터 유경아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한참 머뭇거리고 나서야 백연서가 포레스트에 있다는 것을 밝혔다.“아침부터 찾아오셔서 불같이 화를 내시더니, 사모님한테 지금 당장 돌아오시라고 하네요.”백연서와 만나서 좋은 일이 일어났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래서 성혜인은 전혀 포레스트로 갈 마음이 없었다. 어차피 찾아가도 욕만 먹을 텐데, 이런 식으로 자해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저 지금 바빠서 못 돌아간다고 전해줘요.”바쁘다는 것은 물론 핑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은 순간 성혜인은 방태주의 영상통화를 받았다. 유창목이 들어왔으니 어떤 것을 원하냐는 전화였다.“페니 씨 진짜 운 좋네. 조금 전 한 고객이 반품한 데다가 창고에 새로 들어온 것들까지 합하면 잔고가 꽤 있어. 품질은 창고에 있는 쪽이 반품한 쪽보다 좋아. 영상으로는 잘 안 보이지?”방태주의 말대로 영상으로는 품질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성혜인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사장님, 저 지금 바로 서천으로 출발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안 돼요?”유창목은 아주 보기 드문 목재이기 때문에 성혜인을 제외하고도 수백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방태주는 지난번의 약속과 반승제를 봐서 일단 그녀를 위해 남겨 놓기로 했다.성혜인은 곧바로 짐을 싸서 서천으로 출발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점심이 되었다.그녀는 유창목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결국 창고에 있는 것을 선택했고 결제에 배달까지 한 번에 완성했다. 그래도 유창목의 일을 해결하고 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웠다.이대로 해가 지기 전에 제원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가 성혜인은 문득 임지연의 친딸을 찾아야 한다는 성휘의 부탁이 떠올랐다. 임지연은 서천에서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그때의 병원으로 가보면 기록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병원의 아카이브에는 수많은 상자와 종이들이 있었다. 더구나 24년 전의 기록은 정리가 되어있지 않아서 성혜인이 직접 하나하나 뒤지면서 찾아야 했다.그렇게 성혜인은 세 시간이나 넘게 기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