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자가 말하는 성혜인과 반승제가 생각하는 성혜원의 모습은 한데 겹쳐졌다. 지난번 그런 식으로 옷을 벗어 던지던 여자이니 확실히 어리석기 짝이 없기도 했다.“할머니, 앞으로 그 사람이랑 만나지 마요. 그럴 가치도 없으니까요.”반승제의 차가운 말투에 김경자는 시름을 놓은 듯 한숨 돌렸다.“너도 안다니 다행이구나.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으며 나한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 꼴을 보아하니 너한테도 마찬가지겠다 싶어서 전화했다. 아무튼 나는 그 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얼굴에 전부 다 드러내는 것도 말이다.”반승제는 따듯한 물을 들고 성혜인의 앞으로 다가가며 대답했다.“맞아요. 그러니 앞으로는 멀리하세요.”“알겠다. 너도 조심하거라. 예쁘장한 얼굴에 홀리면 절대 안 된다.”예쁘장한 얼굴이라는 말에 반승제는 성혜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도 마침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반승제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천천히 손을 들어 성혜인의 머리카락을 귓등으로 넘겨줬다. 단발의 성혜인은 전보다 인상이 훨씬 날카로워졌다. 그래서인지 야릇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더욱 기대되었다.갑자기 머릿속을 침범하기 시작한 충동에 반승제는 통화를 하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성혜인의 목덜미를 잡고 키스를 퍼부었다. 지나치게 열정적인 키스에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다 차오르기 시작했다.김경자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성혜인은 인간성부터 잘못됐어. 단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해. 이혼하고 나서는 계획대로 단미랑 결혼하거라.”“읏...”입술을 깨물린 성혜인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냈다.전화 건너편에서 김경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승제야, 듣고 있니?”반승제는 드디어 성혜인을 풀어주고 그녀의 입가에 남은 물기를 닦아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이혼은 무조건 할 거예요.”‘내가 미친 것도 아니고 결혼을 유지할 이유는 없지.’성혜인은 반승제와 김경자가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
그날 지하 주차장에서 반승제와 나눴던 대화가 떠오르자, 성혜인은 갑자기 상사와 바람을 피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그 상사는 그녀의 ‘남편’을 다른 곳으로 발령을 보내기까지 했다.‘대표님이 도대체 왜...?’성혜인은 절대 반승제가 자신을 좋아해서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수많은 여자를 만나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건 둘째 치고, 윤단미라는 첫사랑 여자 친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모든 것을 버리고 해외로 떠나버릴 정도로 성혜인을 싫어했던 사람이다.‘그런 사람이 나를 좋아할 리가 있겠어?’성혜인은 피식 웃었다. 만약 반승제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하면 퍽 우스운 꼴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무릎에 상처가 있는 데다가 머리가 어지러웠던 성혜인은 움직임이 느렸다. 그래서 아주 천천히 소파로 가서 앉았다.조용한 집 안에는 두 사람과 베란다에서 코를 골며 자는 겨울이만 있었다. 어쩐지 숨이 막히는 분위기라 성혜인은 TV를 켰다. 하지만 눈치 없는 채널에서는 하필 온수빈의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었다.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성혜인은 후다닥 일어나며 말했다.“전 샤워하러 갈게요.”오후 내내 무릎을 꿇고 있었더니 옷은 땀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것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래서 성혜인은 이를 핑계로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이때 반승제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손이 훅 다가왔다.“상처에 안 닿게 조심해.”반승제는 호텔에서 가져온 잠옷을 성혜인에게 건넸다.성혜인은 잠옷을 받아서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시원하게 씻고 나니 무릎은 더 부어올라 있었다.어정쩡한 걸음걸이로 밖으로 나가자, 노트북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반승제가 보였다. 당연히 떠났을 것으로 여긴 사람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새삼 놀랍기도 했다.성혜인은 핸드폰을 힐끗 봤다. 현재 시각은 다섯 시, 마침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대표님, 배 안 고프세요?”성혜인은 요리할 줄 안다. 하지만 평소에는 귀찮다는 핑계로 주로 배달 음식을 먹고는 한다. 하지만 반승제와 같은 재벌
그 후의 시간 동안 성혜인은 진짜 반승제의 말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몸 떨림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어쩐지 더 수치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초인종이 울렸다. 배달 음식이 도착한 것이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이 몸을 흠칫 떨더니 식은땀을 흘리는 것을 발견했다. 왠지 긴장한 듯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움직임에 힘을 더했다.“남편은 출장 가지 않았나? 뭘 긴장하고 그래.”성혜인은 반승제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끝내달라고 애원할 뿐이었다. 하지만 반승제는 절대 쉽게 끝내줄 사람이 아니었다. 비싼 배달 음식은 그대로 밤새 방치될 게 뻔했다.역시 성혜인의 예상대로 그녀가 중도에 기절할 때까지도 반승제는 멈추지 않았다. 기절하기 전까지만 해도 열이 나고 있었는데 해열제를 먹고 본의 아니게 땀을 흘려서인지 다시 깨어난 다음에는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현재 시각은 저녁 11시. 성혜인은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났으니, 반승제가 그녀를 장장 네 시간 동안이나 괴롭힌 셈이다. 만약 다리가 아프다고 투정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가만히 누워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성혜인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느릿느릿 침대에서 일어났다.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뭐라도 먹어야 계속 잘 수 있을 것 같았다.거실로 나가보니 또다시 반승제가 보였다. 성혜인이 잠들고 난 다음에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함께 눕지 않은 이유는 아무래도 남의 침대에 눕기는 싫어서일 것이다.주방으로 가서 물 한 잔 마시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반승제의 새 슬리퍼와 잠옷이 보였다. 역시나 심인우가 왔다 간 모양이다.이번으로 다섯 번째다. 반승제가 귀국한 다음 다시는 안 만나게 될 줄 알았더니 다섯 번째까지 있을 줄이야... 그동안 너무 외로워서인지 나쁘지만은 않았다.강민지의 말이 맞았다. 성혜인은 어쩌면 복에 겨웠을 수도 있다. 빨리 끝나기를 기대하며 횟수를 세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성혜인은 물 한 컵 더 따라서
반승제가 떠난 후에도 성혜인은 한참이나 거실에 혼자 서 있었다.성혜인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연신 들려오고 나서야 정신 차리고 화끈거리는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아서 가슴을 한참 두드리다가 화장실로 가서 찬물 세수를 했다.이제야 살 것 같았던 성혜인은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어봤다. 냉장고 속에는 메밀면 한 봉지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뜨거운 물에 면을 끓이고 대충 소금을 넣어 끼니를 때웠다.맛없는 대로 반 그릇을 겨우 먹고 나서는 설거지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아무리 뒤척거려도 잠이 오질 않았다. 반승제가 했던 말은 머릿속에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성혜인은 유교걸이다. 이런 상황에서 말하기 약간 우습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나름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절대 연애를 안 한다는 철칙을 가진 사람이었다.반승제와 결혼하기 전에 좋아했던 사람과도 대학에서 만나기로 약속만 해놓은 상태였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성혜인은 서천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그녀의 사상도 꽤 보수적인 편에 속했다. 공부하면 할수록 어떤 생각은 틀렸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릴 적의 환경을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려웠다.강민지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만나고 다니고는 한다. 남자는 밥 먹듯이 피는 바람을 왜 여자는 피면 안 되고, 똑같이 출근하고 돈을 벌면서 왜 여자만 집안일을 하는 등 문제를 처음으로 성혜인에게 가르쳐주기도 했다.그래도 성혜인은 남녀 사이의 관계에서만큼은 자유롭지 못했다. 반승제와 첫날밤을 가진 날에도 상대가 서류상 남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수치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마음이 통해야만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두 사람은 서로 증오했으니 말이다.성혜인은 몸을 돌리며 계속해서 생각했다. 반승제는 조금 전 그녀에게 몸은 솔직하다고 말했다. 확실히 그녀는 입으로는 싫다고 하면서도 몸은
이튿날.성혜인은 아침 일찍부터 유경아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한참 머뭇거리고 나서야 백연서가 포레스트에 있다는 것을 밝혔다.“아침부터 찾아오셔서 불같이 화를 내시더니, 사모님한테 지금 당장 돌아오시라고 하네요.”백연서와 만나서 좋은 일이 일어났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래서 성혜인은 전혀 포레스트로 갈 마음이 없었다. 어차피 찾아가도 욕만 먹을 텐데, 이런 식으로 자해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저 지금 바빠서 못 돌아간다고 전해줘요.”바쁘다는 것은 물론 핑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은 순간 성혜인은 방태주의 영상통화를 받았다. 유창목이 들어왔으니 어떤 것을 원하냐는 전화였다.“페니 씨 진짜 운 좋네. 조금 전 한 고객이 반품한 데다가 창고에 새로 들어온 것들까지 합하면 잔고가 꽤 있어. 품질은 창고에 있는 쪽이 반품한 쪽보다 좋아. 영상으로는 잘 안 보이지?”방태주의 말대로 영상으로는 품질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성혜인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사장님, 저 지금 바로 서천으로 출발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안 돼요?”유창목은 아주 보기 드문 목재이기 때문에 성혜인을 제외하고도 수백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방태주는 지난번의 약속과 반승제를 봐서 일단 그녀를 위해 남겨 놓기로 했다.성혜인은 곧바로 짐을 싸서 서천으로 출발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점심이 되었다.그녀는 유창목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결국 창고에 있는 것을 선택했고 결제에 배달까지 한 번에 완성했다. 그래도 유창목의 일을 해결하고 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웠다.이대로 해가 지기 전에 제원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가 성혜인은 문득 임지연의 친딸을 찾아야 한다는 성휘의 부탁이 떠올랐다. 임지연은 서천에서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그때의 병원으로 가보면 기록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병원의 아카이브에는 수많은 상자와 종이들이 있었다. 더구나 24년 전의 기록은 정리가 되어있지 않아서 성혜인이 직접 하나하나 뒤지면서 찾아야 했다.그렇게 성혜인은 세 시간이나 넘게 기록을
“나는 단미 그 아이가 마음에 들어. 그림 실력도 나날이 나아지고 있고. 오늘은 또 승우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데 둘이 마음이 생긴 건 아닌지, 호호.”김경자는 한때 이런 말을 한 적 있었다.윤단미의 그림 실력은 꽤 좋았다. 동년배 중에서도 재능 있는 축에 속해서 주영훈의 제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렇기에 출신이 부족함에도 김경자의 눈에 들 수 있었다.반승제와 윤단미가 사귄 다음 김경자는 얼마나 난리를 부렸는지 모른다. 반승제에게 형의 아내를 빼앗은 천벌 받을 놈이라고 욕하면서 말이다. 후에 반승우가 세상을 뜨고 나서야 그녀는 잠잠해졌고 가끔 둘이 잘 만나고 있는지 물어봤다.김경자의 관심이 반승제에게는 감시로 다가왔다. 자신이 침 발라 놓은 손주며느리를 어떻게든 집안으로 들이려는 식의 감시 말이다. 그래서 반승제와 김경자 사이의 거리는 좁혀진 적이 없었다.얼마 후 저녁 식사 시간이 되고 식탁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고 온 반승제가 표정이 굳어있자, 김경자는 또 입을 삐죽이며 빈정댔다.“이 할미랑 밥 먹는 게 그렇게 싫니? 누가 보면 집안에 초상 난 줄 알겠구나.”반승제는 예리한 눈빛으로 김경자를 쏘아봤다. 그러자 그녀는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다물었다. 밖으로 내뱉지 못한 화는 전부 얼굴로 올라가서 붉으락푸르락했다.“집에서는 회사 일을 하지 말거라. 영감이 너를 후계자로 정했다고 해서 어디에서나 위세를 떨 건 없지 않니? 그 자리는 원래 네가 아닌 우리 승우 것이었어. 우리 승우가 사고만 당하지 않았어도...”김경자가 거침없이 말을 이어가는 것을 보고 백연서가 당황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어머님, 승제도 노력하고 있어요. 해외에서 승제와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데요.”“쯧쯧, 인터뷰가 무슨 소용이 있니? 우리 승우를 따라 배워 나라를 위해 힘을 써야지.”반승제는 물을 마시다 말고 컵을 내려놓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맞아요, 저는 형을 따라 배웠어야 했어요. 그러면 지금쯤 여섯 살이 되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성혜인은 잠옷에 외투만 걸치고 있었다.“스위트룸을 준비해 달라고 할까요?”성혜인은 반승제가 사업에 차질이 생겨서 찾아왔다고 생각했다.“방에 다른 사람 있어?”“아니요.”반승제는 이제야 표정을 풀며 덤덤하게 말했다.“그럼 스위트룸은 됐어.”성혜인은 잠깐 멈칫했다. 어쩐지 늑대를 집안으로 들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반승제는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욕실로 향했다. 자기 전에 이미 씻었던 성혜인은 밖에서 기다리다 말고 그의 잠옷을 준비하러 갔다.하늘에 리조트는 재벌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에 5성급 호텔보다도 훨씬 좋았다. 그래서 리조트 측에서 준비한 잠옷도 비싼 실크 소재였고 리조트에 찾아온 모든 손님에게 제공했다. 만약 마음에 든다면 물론 가져갈 수도 있었다.성혜인은 안내 데스크로 가서 남성 잠옷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금 전 그녀가 반승제를 데리고 들어오던 것을 봤던 직원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는 반승제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재력도 재력이거니와 쉽게 잊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잠옷을 들고 돌아온 성혜인은 욕실 문틈으로 반승제에게 건네줬다. 곧이어 반승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서천에 오기 전에 철저한 준비를 했던 성혜인은 트렁크에서 수건 한 장을 꺼내 반승제에게 건네줬다. 그러자 그는 말없이 받아 들고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았다.반승제가 필요할 만한 물건이 또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머리를 돌렸던 성혜인은 트렁크 속에 수건이 한 장 더 있는 것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그녀가 반승제에게 건넨 것은 머리카락을 닦는 수건이 아닌 몸을 닦는 수건이었던 것이다.“대표님.”성혜인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반승제를 부르더니 말을 이었다.“죄송해요, 그건 제가 몸을 닦던 거예요. 그러니... 이걸 쓰세요.”성혜인은 반승제의 눈치를 살피며 다른 수건을 꺼내왔다.반승제는 자신이 들고 있는 것과 색깔부터 다른 수건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너 일부러 그
“대표님, 저 드라이기 거둬야 해요.”반승제는 이제야 성혜인을 풀어줬다.성혜인은 드라이기를 욕실에 가져다 두고 다시 나왔을 때 우연히 반승제의 손가락에 남은 빨간 자국을 발견했다. 무릎에 아직도 화장 자국을 달고 있는 그녀가 그게 어떻게 생긴 것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다행히 조금 전 병원에 다녀왔기 때문에 성혜인의 가방 속에는 금방 새로 산 화상 연고가 있었다. 연고를 손가락에 짜낸 그녀는 반승제의 손을 덥석 잡고 화상 부위에 바르기 시작했다.반승제가 뒤늦게 성혜인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챘을 때 코끝에는 연고의 씁쓸한 향이 맴돌았다. 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열심히 연고를 바르고 있는 성혜인을 바라봤다.얼마 후 성혜인은 반승제의 손을 놓고 자기 손가락에 남은 연고를 종이로 닦아냈다. 이때 반승제가 돌연 물었다.“그 남자가 그렇게 좋아? 잠깐 만나러 서천으로 내려올 정도로?”성혜인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저 오늘은 유창목 때문에 방 사장님과 만나러 서천에 왔어요. 그 귀한 유창목을 드디어 구할 수 있게 되었는데 당연히 직접 와야죠. 조금 전 이미 가장 좋은 것들로 골라서 제원으로 보냈어요.”이 말을 듣고 난 반승제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올라갔다.“대표님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심 비서님도 없이?”“프로젝트에 급한 문제가 생겨서 책임자를 만나러 왔어.”성혜인은 의심의 눈초리로 반승제를 바라봤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고 해도 그를 이 시간에 부를 만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책임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히 다른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서천에 도착하고부터 목재를 고르느라, 기록을 찾느라 피곤했던 성혜인은 슬금슬금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반승제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멈춰 세웠다.반승제는 성혜인의 무릎을 바라봤다. 아직도 빨간 것을 보아하니 오늘도 긴바지를 입은 모양이다. 참 미련하도록 고집이 센 여자였다.“저는 이미 약 발랐어요.”성혜인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