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성혜인은 잠옷에 외투만 걸치고 있었다.“스위트룸을 준비해 달라고 할까요?”성혜인은 반승제가 사업에 차질이 생겨서 찾아왔다고 생각했다.“방에 다른 사람 있어?”“아니요.”반승제는 이제야 표정을 풀며 덤덤하게 말했다.“그럼 스위트룸은 됐어.”성혜인은 잠깐 멈칫했다. 어쩐지 늑대를 집안으로 들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반승제는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욕실로 향했다. 자기 전에 이미 씻었던 성혜인은 밖에서 기다리다 말고 그의 잠옷을 준비하러 갔다.하늘에 리조트는 재벌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에 5성급 호텔보다도 훨씬 좋았다. 그래서 리조트 측에서 준비한 잠옷도 비싼 실크 소재였고 리조트에 찾아온 모든 손님에게 제공했다. 만약 마음에 든다면 물론 가져갈 수도 있었다.성혜인은 안내 데스크로 가서 남성 잠옷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금 전 그녀가 반승제를 데리고 들어오던 것을 봤던 직원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는 반승제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재력도 재력이거니와 쉽게 잊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잠옷을 들고 돌아온 성혜인은 욕실 문틈으로 반승제에게 건네줬다. 곧이어 반승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서천에 오기 전에 철저한 준비를 했던 성혜인은 트렁크에서 수건 한 장을 꺼내 반승제에게 건네줬다. 그러자 그는 말없이 받아 들고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았다.반승제가 필요할 만한 물건이 또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머리를 돌렸던 성혜인은 트렁크 속에 수건이 한 장 더 있는 것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그녀가 반승제에게 건넨 것은 머리카락을 닦는 수건이 아닌 몸을 닦는 수건이었던 것이다.“대표님.”성혜인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반승제를 부르더니 말을 이었다.“죄송해요, 그건 제가 몸을 닦던 거예요. 그러니... 이걸 쓰세요.”성혜인은 반승제의 눈치를 살피며 다른 수건을 꺼내왔다.반승제는 자신이 들고 있는 것과 색깔부터 다른 수건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너 일부러 그
“대표님, 저 드라이기 거둬야 해요.”반승제는 이제야 성혜인을 풀어줬다.성혜인은 드라이기를 욕실에 가져다 두고 다시 나왔을 때 우연히 반승제의 손가락에 남은 빨간 자국을 발견했다. 무릎에 아직도 화장 자국을 달고 있는 그녀가 그게 어떻게 생긴 것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다행히 조금 전 병원에 다녀왔기 때문에 성혜인의 가방 속에는 금방 새로 산 화상 연고가 있었다. 연고를 손가락에 짜낸 그녀는 반승제의 손을 덥석 잡고 화상 부위에 바르기 시작했다.반승제가 뒤늦게 성혜인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챘을 때 코끝에는 연고의 씁쓸한 향이 맴돌았다. 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열심히 연고를 바르고 있는 성혜인을 바라봤다.얼마 후 성혜인은 반승제의 손을 놓고 자기 손가락에 남은 연고를 종이로 닦아냈다. 이때 반승제가 돌연 물었다.“그 남자가 그렇게 좋아? 잠깐 만나러 서천으로 내려올 정도로?”성혜인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저 오늘은 유창목 때문에 방 사장님과 만나러 서천에 왔어요. 그 귀한 유창목을 드디어 구할 수 있게 되었는데 당연히 직접 와야죠. 조금 전 이미 가장 좋은 것들로 골라서 제원으로 보냈어요.”이 말을 듣고 난 반승제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올라갔다.“대표님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심 비서님도 없이?”“프로젝트에 급한 문제가 생겨서 책임자를 만나러 왔어.”성혜인은 의심의 눈초리로 반승제를 바라봤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고 해도 그를 이 시간에 부를 만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책임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히 다른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서천에 도착하고부터 목재를 고르느라, 기록을 찾느라 피곤했던 성혜인은 슬금슬금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반승제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멈춰 세웠다.반승제는 성혜인의 무릎을 바라봤다. 아직도 빨간 것을 보아하니 오늘도 긴바지를 입은 모양이다. 참 미련하도록 고집이 센 여자였다.“저는 이미 약 발랐어요.”성혜인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아무튼 윤씨 집안에서 아는 건 없는지도 물어봐 줘. 지금으로서는 단미 씨밖에 안 떠오르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물건으로 여기고 집안사람한테 줬을 수도 있으니까 꼼꼼하게 확인해.”사실 반승제는 진작 윤단미에게 물어봤었다. 하지만 그날 그녀가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던지라 돌아온 것은 반승우에게서 무언가를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기억이 안 난다는 대답밖에 없었다.“그래, 제원으로 가자마자 물어볼게.”이 말을 들은 서주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제원 아니야?”“응, 출장.”출장이라는 말에 서주혁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어느덧 아침 다섯 시가 거의 되었다. 잠을 자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반승제는 침대에 다시 누워서 잠깐 눈만 붙였다가 일어났다.호텔 직원은 반승제가 하늘에 리조트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서천 측 책임자에게 알렸다. 그래서 그들은 아침 다섯 시에 이미 리조트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감히 반승제에게 연락하지는 못하고 말이다.얼마 후 반승제가 밖으로 나온 것을 보고 한 책임자가 부랴부랴 마중하며 물었다.“대표님, 혹시 다른 요구가 있어서 서천으로 오신 건가요? 마침 다들 한자리에 모였으니, 요구가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안 그래도 저희가 먼저 연락하려고 했어요. 이곳에서 반 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해수욕장이 겨울에도 따듯해서 여행 프로젝트에 넣으면 좋을 것 같았거든요. 혹시 관심 있으세요?”반승제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책임자들의 성실함을 봐서라도 해수욕장에 가보기로 했다.그 전에 반승제는 먼저 방으로 돌아가서 성혜인을 깨웠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책임자들의 눈빛은 확 변했다. 그들 중 한 명은 그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기도 했다. 지난번 임남호에게 맞은 아들 때문에 속을 썩인 적 있었으니 말이다.반승제와 성혜인이 함께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방에서 나온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이게 어떤 상황인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작은 도
해수욕장에 도착한 다음 반승제는 먼저 차에서 내려 성혜인의 손을 잡아줬다. 책임자들은 우르르 몰려와서 반승제에게 해수욕장의 특이 사항을 전달하기 시작했다.생각보다 넓은 해수욕장에 성혜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천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낸 그녀지만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또 몰랐다. 이때 한 책임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일대는 가끔 모래바람이 일어나서 문제에요. 서천에는 아직 경보를 할 정도의 기술과 재력이 없거든요. 혹시 경보가 가능하면 이곳도 충분히 여행지로 개발할 수 있어요.”이 말은 반승제가 모래바람 경보에 필요한 도구를 준다면 이 일대를 싸게 팔겠다는 뜻이었다.모래바람 경보에 필요한 도구를 만드는 게 BH그룹에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반승제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러면 전문가를 불러야겠군요. 아마 오후쯤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책임자들은 반승제가 이토록 흔쾌히 승낙할 줄은 모른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전문가가 도착해서 관찰을 끝낼 때까지 반승제는 최종 결정을 위해 기다리고 있어야 하므로 한 책임자는 나무에 가려진 별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대표님, 지금은 잠시 별장에서 쉬고 계시는 게 어떨까요? 제가 잠시 후 차를 가져와서 근방을 구경시켜 드릴게요.”이 주변에는 해수욕장 외에도 볼거리가 아주 많았다. 그래서 반승제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다가 자신의 곁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봤다.성혜인은 지금껏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침묵이 왠지 불만처럼 느껴졌던 반승제는 약간 기분이 나빴다.‘나랑 같이 있는 게 그렇게 싫은가? 남편이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정색은...’반승제는 예고 없이 성혜인의 허리를 확 끌어안았다.“가자, 별장으로.”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시선은 저도 모르게 이 씨에게로 향했다.반승제가 보는 사람 없는 호텔 방 안에서는 무엇을 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시선이 사방에서 느껴졌기 때문에 수치심을 견딜 수가 없었다. 태연한 모습의 반승제와 반대된 그녀는 마치 태양을 피해 하
아무리 일개 운전기사라고 해도 평소 사투리를 안 쓰도록 훈련되어 왔기 때문에 임동원의 억양은 아주 이상했다. 사투리도 표준어도 아닌 것이 끔찍한 혼종 같기도 했다.그래도 임동원의 억양은 임남호보다 훨씬 나았다. 임남호는 말을 빨리하는 데다가 여러 지방의 사투리가 섞여 있어서 아예 알아듣지도 못할 정도이니 말이다.“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니? 너도 네가 한 짓이 부끄럽지? 재벌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건 사거리에서 몸 파는 여자들과 뭐가 달라?”임동원은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화가 났다.몸 파는 여자들이 즐비한 사거리라면 성혜인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어릴 적에는 대놓고 밖으로 나와 호객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런 여자들 때문에 가정이 불안정해졌다고 생각한 어떤 유부녀들은 지나가다가 침을 뱉기도 했다.성혜인이 학교에 다니던 시절, 이소애와 함께 사거리를 지나가다가 이런 말을 들은 적 있다.“너 공부를 열심히 안 하면 앞으로 저 여자들처럼 된다?”반대로 성혜인이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임지연과 함께 사거리를 지나가다가는 이런 말을 들었었다.“혜인아, 넌 꼭 공부를 열심히 해서 앞으로 이 사람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그게 바로 공부의 의미야.”어릴 적의 성혜인은 아무것도 몰랐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임지연의 말이 맞는 것 같다.생각에 잠긴 성혜인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임동원이 계속해서 말했다.“넌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니? 우리 남호도 이제는 열심히 일하며 가정에 충실할 줄을 아는데. 진희도 임신하고 나서는 가만히 집에만 있어. 대학까지 나왔다는 애가 불륜이 웬 말이야!”이 말인즉슨 대학까지 나온 성혜인이 공부라고는 아예 한 적 없는 임남호보다도 못하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하진희도 임동원에게는 훌륭한 며느리가 된 듯했다. 단지 임신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성혜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제가 남호 오빠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결했는지는 잊었나 봐요? 그리고 하진희도 만약 제가 없었다면 16
그 후의 시간 동안 반승제는 말없이 책상 앞에 앉아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성혜인도 노트북을 꺼내 들고 일에 집중했고 두 사람 사이에는 말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두 시간 후, 책임자가 노크하며 이제는 출발해야 한다고 알렸다. 반승제는 노트북을 덮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혼자 밖으로 나가버렸다.성혜인은 눈치껏 따라가지 않았다. 마침 움직이기 싫었던 참이라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얼마 후 차에 시동 거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행방을 묻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자 반승제는 덤덤하게 대답했다.“몸이 안 좋아서 쉬고 있어요.”누가 들어도 오해할 만한 멘트에 성혜인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회사 업무를 처리하며 반승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약 3시간 후, 창밖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지만 반승제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창가로 다가가 보니 이는 비정상적인 어둠이었다. 마치 공간 전체가 무언가에 의해 둘러싸인 것처럼 말이다.‘모래바람이다!’성혜인은 방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별장 안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도우미들뿐이었다.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순간 불안한 기분에 휩싸인 성혜인은 책임자에게 들었던 목적지의 이름을 떠올려 직접 운전해 찾아가기 시작했다.같은 시각, 반승제는 이미 돌아가는 길에 있었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진 것을 보고 그도 책임자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곧 모래바람이 시작될 모양이니까 서둘러요.”이 씨는 긴장한 표정으로 속도를 높였다. 성혜인이 운전한 차는 완벽하게 그들과 엇갈렸다.반승제는 이동하는 내내 서류를 보고 있느라 미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다. 성혜인의 부재중 통화 또한 모르고 있었다.한 시간 후, 그들은 드디어 별장 앞에 도착했다. 차 위에는 어느덧 모래가 두둑하게 쌓여있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옷과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모래가 찝찝했던 반승제는 곧바로 방으로 돌아가 샤워하려고 했다. 하지만 기대하던 사람의 얼굴이 보이
반승제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새도 없이 가장 빠른 속도로 수기안을 향해 갔다. 지금 느끼는 공포와 불안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모래바람도 반승제의 집념을 이기지는 못했는지, 그는 반 시간 만에 수기안 근처에 도착했다. 이때 뒤에서 쾅 소리가 들리며 땅이 약간 흔들렸다. 백미러를 통해 확인하니 거대한 암석이 떨어져서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을 완전히 막아버린 것이었다.반승제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고 운전을 계속했다. 모래바람으로 인해 시야가 막혀서 그는 거의 내비게이션에만 의지해 이리저리 부딪치며 겨우 오두막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성혜인의 차도 근처에 있었는지라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성혜인은 운전대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아무리 괜찮다고 머릿속에서 되뇌어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때 바람이 강해졌는지 모래가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전보다 훨씬 커졌다. 숨 막히는 공포감에 눈을 꼭 감자 창문의 흔들림은 더욱 강해졌다.“페니!”성혜인의 창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은 바람이 아닌 반승제의 손이었다. 성혜인이 아무런 반응도 없자 그는 큰 소리로 외치며 그녀를 불렀다.성혜인은 문득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를 듣고 머리를 돌렸다. 모래바람 속에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반승제를 발견하고는 띵 하는 환청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순간 휘몰아치기 시작한 모래바람 때문에 말을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입 안에서는 벌써 모래가 씹히기 시작했다.“콜록콜록!”반승제는 성혜인을 확 끌어내리더니 오두막 앞으로 가서 열쇠로 문을 열었다. 튼튼한 문이 쾅 닫히고 나서야 모든 소음이 문밖에 단절되었다.모래바람을 처음 겪어본 성혜인은 아직도 기침하고 있었다. 얼굴은 모래로 인해 누렇게 되었고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먼지와 같은 것이 우수수 떨어질 정도였다. 반승제도 물론 마찬가지다.성혜인은 거의 1분간 기침하고 있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반승제의 팔을 잡고 그를 한
반승제는 그녀의 등에 가슴을 댄 채 같이 창밖을 바라보았다.거리가 너무 가까워 성혜인은 반승제의 심장 소리도 다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사실 어젯밤 반승제의 머리를 말려주며 아무 말 없이 그를 안아줬을 때, 성혜인은 어쩐지 반승제가 슬퍼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여자들이 천성적으로 모성이 넘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 성혜인은 반승제와 일말의 공감대를 형성했다.그녀도 누군가에게 늘 버림받는 사람이었으니까.하지만 반승제에게 그게 가능한 일인가?그와 같이 모든 걸 다 가진 천재에게는 손만 내밀면 그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을 사람이 셀 수도 없을 텐데 말이다.그래서 성혜인은 자신의 마음속에 자라났던 그 착각을 지워버렸다.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지나 반승제도 다시 전의 강한 모습으로 회복했다.그 순간의 연약함이 정말이지 착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반승제는 그녀와 조금 떨어져 자신은 지금 오두막에서 안전하게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BH그룹에서 보낸 전문가가 오기를 기다리면 된다고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어 말을 전했다.내내 안절부절못하던 별장 측 사람들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그때, 별장에서 일하던 도우미가 말했다.“반 대표님 아무래도 그 여자분 찾으러 가신 것 같아요.”“맞아요, 운전하고 어디 나가신 것 같은데...”몇 명의 책임자들은 반승제 같은 사람도 냉철하지 않은 순간이 있을지 몰랐다는 듯 서로 눈을 마주쳤다.왜냐하면 이런 날씨에 문을 나서는 건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그러나 그의 행동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어 보였다.누군가 임동원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가 성혜인과 친척 관계인 걸 알았다.임동원의 얼굴색은 좋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 정말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성혜인이 대학교에 합격했을 당시, 서천에서는 잔치도 열고 현수막도 걸며 난리가 났었다. 모두들 그녀가 멋지게 출세할 줄 알았는데 누가 알았을까, 이 수많은 책임자들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