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성혜인은 잠옷에 외투만 걸치고 있었다.“스위트룸을 준비해 달라고 할까요?”성혜인은 반승제가 사업에 차질이 생겨서 찾아왔다고 생각했다.“방에 다른 사람 있어?”“아니요.”반승제는 이제야 표정을 풀며 덤덤하게 말했다.“그럼 스위트룸은 됐어.”성혜인은 잠깐 멈칫했다. 어쩐지 늑대를 집안으로 들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반승제는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욕실로 향했다. 자기 전에 이미 씻었던 성혜인은 밖에서 기다리다 말고 그의 잠옷을 준비하러 갔다.하늘에 리조트는 재벌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에 5성급 호텔보다도 훨씬 좋았다. 그래서 리조트 측에서 준비한 잠옷도 비싼 실크 소재였고 리조트에 찾아온 모든 손님에게 제공했다. 만약 마음에 든다면 물론 가져갈 수도 있었다.성혜인은 안내 데스크로 가서 남성 잠옷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금 전 그녀가 반승제를 데리고 들어오던 것을 봤던 직원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는 반승제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재력도 재력이거니와 쉽게 잊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잠옷을 들고 돌아온 성혜인은 욕실 문틈으로 반승제에게 건네줬다. 곧이어 반승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서천에 오기 전에 철저한 준비를 했던 성혜인은 트렁크에서 수건 한 장을 꺼내 반승제에게 건네줬다. 그러자 그는 말없이 받아 들고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았다.반승제가 필요할 만한 물건이 또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머리를 돌렸던 성혜인은 트렁크 속에 수건이 한 장 더 있는 것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그녀가 반승제에게 건넨 것은 머리카락을 닦는 수건이 아닌 몸을 닦는 수건이었던 것이다.“대표님.”성혜인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반승제를 부르더니 말을 이었다.“죄송해요, 그건 제가 몸을 닦던 거예요. 그러니... 이걸 쓰세요.”성혜인은 반승제의 눈치를 살피며 다른 수건을 꺼내왔다.반승제는 자신이 들고 있는 것과 색깔부터 다른 수건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너 일부러 그
“대표님, 저 드라이기 거둬야 해요.”반승제는 이제야 성혜인을 풀어줬다.성혜인은 드라이기를 욕실에 가져다 두고 다시 나왔을 때 우연히 반승제의 손가락에 남은 빨간 자국을 발견했다. 무릎에 아직도 화장 자국을 달고 있는 그녀가 그게 어떻게 생긴 것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다행히 조금 전 병원에 다녀왔기 때문에 성혜인의 가방 속에는 금방 새로 산 화상 연고가 있었다. 연고를 손가락에 짜낸 그녀는 반승제의 손을 덥석 잡고 화상 부위에 바르기 시작했다.반승제가 뒤늦게 성혜인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챘을 때 코끝에는 연고의 씁쓸한 향이 맴돌았다. 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열심히 연고를 바르고 있는 성혜인을 바라봤다.얼마 후 성혜인은 반승제의 손을 놓고 자기 손가락에 남은 연고를 종이로 닦아냈다. 이때 반승제가 돌연 물었다.“그 남자가 그렇게 좋아? 잠깐 만나러 서천으로 내려올 정도로?”성혜인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저 오늘은 유창목 때문에 방 사장님과 만나러 서천에 왔어요. 그 귀한 유창목을 드디어 구할 수 있게 되었는데 당연히 직접 와야죠. 조금 전 이미 가장 좋은 것들로 골라서 제원으로 보냈어요.”이 말을 듣고 난 반승제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올라갔다.“대표님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심 비서님도 없이?”“프로젝트에 급한 문제가 생겨서 책임자를 만나러 왔어.”성혜인은 의심의 눈초리로 반승제를 바라봤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고 해도 그를 이 시간에 부를 만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책임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히 다른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서천에 도착하고부터 목재를 고르느라, 기록을 찾느라 피곤했던 성혜인은 슬금슬금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반승제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멈춰 세웠다.반승제는 성혜인의 무릎을 바라봤다. 아직도 빨간 것을 보아하니 오늘도 긴바지를 입은 모양이다. 참 미련하도록 고집이 센 여자였다.“저는 이미 약 발랐어요.”성혜인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아무튼 윤씨 집안에서 아는 건 없는지도 물어봐 줘. 지금으로서는 단미 씨밖에 안 떠오르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물건으로 여기고 집안사람한테 줬을 수도 있으니까 꼼꼼하게 확인해.”사실 반승제는 진작 윤단미에게 물어봤었다. 하지만 그날 그녀가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던지라 돌아온 것은 반승우에게서 무언가를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기억이 안 난다는 대답밖에 없었다.“그래, 제원으로 가자마자 물어볼게.”이 말을 들은 서주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제원 아니야?”“응, 출장.”출장이라는 말에 서주혁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어느덧 아침 다섯 시가 거의 되었다. 잠을 자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반승제는 침대에 다시 누워서 잠깐 눈만 붙였다가 일어났다.호텔 직원은 반승제가 하늘에 리조트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서천 측 책임자에게 알렸다. 그래서 그들은 아침 다섯 시에 이미 리조트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감히 반승제에게 연락하지는 못하고 말이다.얼마 후 반승제가 밖으로 나온 것을 보고 한 책임자가 부랴부랴 마중하며 물었다.“대표님, 혹시 다른 요구가 있어서 서천으로 오신 건가요? 마침 다들 한자리에 모였으니, 요구가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안 그래도 저희가 먼저 연락하려고 했어요. 이곳에서 반 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해수욕장이 겨울에도 따듯해서 여행 프로젝트에 넣으면 좋을 것 같았거든요. 혹시 관심 있으세요?”반승제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책임자들의 성실함을 봐서라도 해수욕장에 가보기로 했다.그 전에 반승제는 먼저 방으로 돌아가서 성혜인을 깨웠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책임자들의 눈빛은 확 변했다. 그들 중 한 명은 그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기도 했다. 지난번 임남호에게 맞은 아들 때문에 속을 썩인 적 있었으니 말이다.반승제와 성혜인이 함께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방에서 나온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이게 어떤 상황인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작은 도
해수욕장에 도착한 다음 반승제는 먼저 차에서 내려 성혜인의 손을 잡아줬다. 책임자들은 우르르 몰려와서 반승제에게 해수욕장의 특이 사항을 전달하기 시작했다.생각보다 넓은 해수욕장에 성혜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천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낸 그녀지만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또 몰랐다. 이때 한 책임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일대는 가끔 모래바람이 일어나서 문제에요. 서천에는 아직 경보를 할 정도의 기술과 재력이 없거든요. 혹시 경보가 가능하면 이곳도 충분히 여행지로 개발할 수 있어요.”이 말은 반승제가 모래바람 경보에 필요한 도구를 준다면 이 일대를 싸게 팔겠다는 뜻이었다.모래바람 경보에 필요한 도구를 만드는 게 BH그룹에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반승제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러면 전문가를 불러야겠군요. 아마 오후쯤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책임자들은 반승제가 이토록 흔쾌히 승낙할 줄은 모른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전문가가 도착해서 관찰을 끝낼 때까지 반승제는 최종 결정을 위해 기다리고 있어야 하므로 한 책임자는 나무에 가려진 별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대표님, 지금은 잠시 별장에서 쉬고 계시는 게 어떨까요? 제가 잠시 후 차를 가져와서 근방을 구경시켜 드릴게요.”이 주변에는 해수욕장 외에도 볼거리가 아주 많았다. 그래서 반승제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다가 자신의 곁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봤다.성혜인은 지금껏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침묵이 왠지 불만처럼 느껴졌던 반승제는 약간 기분이 나빴다.‘나랑 같이 있는 게 그렇게 싫은가? 남편이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정색은...’반승제는 예고 없이 성혜인의 허리를 확 끌어안았다.“가자, 별장으로.”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시선은 저도 모르게 이 씨에게로 향했다.반승제가 보는 사람 없는 호텔 방 안에서는 무엇을 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시선이 사방에서 느껴졌기 때문에 수치심을 견딜 수가 없었다. 태연한 모습의 반승제와 반대된 그녀는 마치 태양을 피해 하
아무리 일개 운전기사라고 해도 평소 사투리를 안 쓰도록 훈련되어 왔기 때문에 임동원의 억양은 아주 이상했다. 사투리도 표준어도 아닌 것이 끔찍한 혼종 같기도 했다.그래도 임동원의 억양은 임남호보다 훨씬 나았다. 임남호는 말을 빨리하는 데다가 여러 지방의 사투리가 섞여 있어서 아예 알아듣지도 못할 정도이니 말이다.“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니? 너도 네가 한 짓이 부끄럽지? 재벌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건 사거리에서 몸 파는 여자들과 뭐가 달라?”임동원은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화가 났다.몸 파는 여자들이 즐비한 사거리라면 성혜인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어릴 적에는 대놓고 밖으로 나와 호객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런 여자들 때문에 가정이 불안정해졌다고 생각한 어떤 유부녀들은 지나가다가 침을 뱉기도 했다.성혜인이 학교에 다니던 시절, 이소애와 함께 사거리를 지나가다가 이런 말을 들은 적 있다.“너 공부를 열심히 안 하면 앞으로 저 여자들처럼 된다?”반대로 성혜인이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임지연과 함께 사거리를 지나가다가는 이런 말을 들었었다.“혜인아, 넌 꼭 공부를 열심히 해서 앞으로 이 사람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그게 바로 공부의 의미야.”어릴 적의 성혜인은 아무것도 몰랐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임지연의 말이 맞는 것 같다.생각에 잠긴 성혜인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임동원이 계속해서 말했다.“넌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니? 우리 남호도 이제는 열심히 일하며 가정에 충실할 줄을 아는데. 진희도 임신하고 나서는 가만히 집에만 있어. 대학까지 나왔다는 애가 불륜이 웬 말이야!”이 말인즉슨 대학까지 나온 성혜인이 공부라고는 아예 한 적 없는 임남호보다도 못하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하진희도 임동원에게는 훌륭한 며느리가 된 듯했다. 단지 임신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성혜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제가 남호 오빠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결했는지는 잊었나 봐요? 그리고 하진희도 만약 제가 없었다면 16
그 후의 시간 동안 반승제는 말없이 책상 앞에 앉아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성혜인도 노트북을 꺼내 들고 일에 집중했고 두 사람 사이에는 말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두 시간 후, 책임자가 노크하며 이제는 출발해야 한다고 알렸다. 반승제는 노트북을 덮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혼자 밖으로 나가버렸다.성혜인은 눈치껏 따라가지 않았다. 마침 움직이기 싫었던 참이라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얼마 후 차에 시동 거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행방을 묻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자 반승제는 덤덤하게 대답했다.“몸이 안 좋아서 쉬고 있어요.”누가 들어도 오해할 만한 멘트에 성혜인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회사 업무를 처리하며 반승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약 3시간 후, 창밖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지만 반승제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창가로 다가가 보니 이는 비정상적인 어둠이었다. 마치 공간 전체가 무언가에 의해 둘러싸인 것처럼 말이다.‘모래바람이다!’성혜인은 방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별장 안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도우미들뿐이었다.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순간 불안한 기분에 휩싸인 성혜인은 책임자에게 들었던 목적지의 이름을 떠올려 직접 운전해 찾아가기 시작했다.같은 시각, 반승제는 이미 돌아가는 길에 있었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진 것을 보고 그도 책임자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곧 모래바람이 시작될 모양이니까 서둘러요.”이 씨는 긴장한 표정으로 속도를 높였다. 성혜인이 운전한 차는 완벽하게 그들과 엇갈렸다.반승제는 이동하는 내내 서류를 보고 있느라 미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다. 성혜인의 부재중 통화 또한 모르고 있었다.한 시간 후, 그들은 드디어 별장 앞에 도착했다. 차 위에는 어느덧 모래가 두둑하게 쌓여있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옷과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모래가 찝찝했던 반승제는 곧바로 방으로 돌아가 샤워하려고 했다. 하지만 기대하던 사람의 얼굴이 보이
반승제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새도 없이 가장 빠른 속도로 수기안을 향해 갔다. 지금 느끼는 공포와 불안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모래바람도 반승제의 집념을 이기지는 못했는지, 그는 반 시간 만에 수기안 근처에 도착했다. 이때 뒤에서 쾅 소리가 들리며 땅이 약간 흔들렸다. 백미러를 통해 확인하니 거대한 암석이 떨어져서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을 완전히 막아버린 것이었다.반승제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고 운전을 계속했다. 모래바람으로 인해 시야가 막혀서 그는 거의 내비게이션에만 의지해 이리저리 부딪치며 겨우 오두막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성혜인의 차도 근처에 있었는지라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성혜인은 운전대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아무리 괜찮다고 머릿속에서 되뇌어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때 바람이 강해졌는지 모래가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전보다 훨씬 커졌다. 숨 막히는 공포감에 눈을 꼭 감자 창문의 흔들림은 더욱 강해졌다.“페니!”성혜인의 창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은 바람이 아닌 반승제의 손이었다. 성혜인이 아무런 반응도 없자 그는 큰 소리로 외치며 그녀를 불렀다.성혜인은 문득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를 듣고 머리를 돌렸다. 모래바람 속에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반승제를 발견하고는 띵 하는 환청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순간 휘몰아치기 시작한 모래바람 때문에 말을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입 안에서는 벌써 모래가 씹히기 시작했다.“콜록콜록!”반승제는 성혜인을 확 끌어내리더니 오두막 앞으로 가서 열쇠로 문을 열었다. 튼튼한 문이 쾅 닫히고 나서야 모든 소음이 문밖에 단절되었다.모래바람을 처음 겪어본 성혜인은 아직도 기침하고 있었다. 얼굴은 모래로 인해 누렇게 되었고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먼지와 같은 것이 우수수 떨어질 정도였다. 반승제도 물론 마찬가지다.성혜인은 거의 1분간 기침하고 있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반승제의 팔을 잡고 그를 한
반승제는 그녀의 등에 가슴을 댄 채 같이 창밖을 바라보았다.거리가 너무 가까워 성혜인은 반승제의 심장 소리도 다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사실 어젯밤 반승제의 머리를 말려주며 아무 말 없이 그를 안아줬을 때, 성혜인은 어쩐지 반승제가 슬퍼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여자들이 천성적으로 모성이 넘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 성혜인은 반승제와 일말의 공감대를 형성했다.그녀도 누군가에게 늘 버림받는 사람이었으니까.하지만 반승제에게 그게 가능한 일인가?그와 같이 모든 걸 다 가진 천재에게는 손만 내밀면 그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을 사람이 셀 수도 없을 텐데 말이다.그래서 성혜인은 자신의 마음속에 자라났던 그 착각을 지워버렸다.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지나 반승제도 다시 전의 강한 모습으로 회복했다.그 순간의 연약함이 정말이지 착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반승제는 그녀와 조금 떨어져 자신은 지금 오두막에서 안전하게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BH그룹에서 보낸 전문가가 오기를 기다리면 된다고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어 말을 전했다.내내 안절부절못하던 별장 측 사람들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그때, 별장에서 일하던 도우미가 말했다.“반 대표님 아무래도 그 여자분 찾으러 가신 것 같아요.”“맞아요, 운전하고 어디 나가신 것 같은데...”몇 명의 책임자들은 반승제 같은 사람도 냉철하지 않은 순간이 있을지 몰랐다는 듯 서로 눈을 마주쳤다.왜냐하면 이런 날씨에 문을 나서는 건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그러나 그의 행동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어 보였다.누군가 임동원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가 성혜인과 친척 관계인 걸 알았다.임동원의 얼굴색은 좋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 정말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성혜인이 대학교에 합격했을 당시, 서천에서는 잔치도 열고 현수막도 걸며 난리가 났었다. 모두들 그녀가 멋지게 출세할 줄 알았는데 누가 알았을까, 이 수많은 책임자들 앞에서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