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지하 주차장에서 반승제와 나눴던 대화가 떠오르자, 성혜인은 갑자기 상사와 바람을 피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그 상사는 그녀의 ‘남편’을 다른 곳으로 발령을 보내기까지 했다.‘대표님이 도대체 왜...?’성혜인은 절대 반승제가 자신을 좋아해서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수많은 여자를 만나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건 둘째 치고, 윤단미라는 첫사랑 여자 친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모든 것을 버리고 해외로 떠나버릴 정도로 성혜인을 싫어했던 사람이다.‘그런 사람이 나를 좋아할 리가 있겠어?’성혜인은 피식 웃었다. 만약 반승제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하면 퍽 우스운 꼴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무릎에 상처가 있는 데다가 머리가 어지러웠던 성혜인은 움직임이 느렸다. 그래서 아주 천천히 소파로 가서 앉았다.조용한 집 안에는 두 사람과 베란다에서 코를 골며 자는 겨울이만 있었다. 어쩐지 숨이 막히는 분위기라 성혜인은 TV를 켰다. 하지만 눈치 없는 채널에서는 하필 온수빈의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었다.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성혜인은 후다닥 일어나며 말했다.“전 샤워하러 갈게요.”오후 내내 무릎을 꿇고 있었더니 옷은 땀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것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래서 성혜인은 이를 핑계로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이때 반승제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손이 훅 다가왔다.“상처에 안 닿게 조심해.”반승제는 호텔에서 가져온 잠옷을 성혜인에게 건넸다.성혜인은 잠옷을 받아서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시원하게 씻고 나니 무릎은 더 부어올라 있었다.어정쩡한 걸음걸이로 밖으로 나가자, 노트북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반승제가 보였다. 당연히 떠났을 것으로 여긴 사람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새삼 놀랍기도 했다.성혜인은 핸드폰을 힐끗 봤다. 현재 시각은 다섯 시, 마침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대표님, 배 안 고프세요?”성혜인은 요리할 줄 안다. 하지만 평소에는 귀찮다는 핑계로 주로 배달 음식을 먹고는 한다. 하지만 반승제와 같은 재벌
그 후의 시간 동안 성혜인은 진짜 반승제의 말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몸 떨림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어쩐지 더 수치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초인종이 울렸다. 배달 음식이 도착한 것이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이 몸을 흠칫 떨더니 식은땀을 흘리는 것을 발견했다. 왠지 긴장한 듯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움직임에 힘을 더했다.“남편은 출장 가지 않았나? 뭘 긴장하고 그래.”성혜인은 반승제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끝내달라고 애원할 뿐이었다. 하지만 반승제는 절대 쉽게 끝내줄 사람이 아니었다. 비싼 배달 음식은 그대로 밤새 방치될 게 뻔했다.역시 성혜인의 예상대로 그녀가 중도에 기절할 때까지도 반승제는 멈추지 않았다. 기절하기 전까지만 해도 열이 나고 있었는데 해열제를 먹고 본의 아니게 땀을 흘려서인지 다시 깨어난 다음에는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현재 시각은 저녁 11시. 성혜인은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났으니, 반승제가 그녀를 장장 네 시간 동안이나 괴롭힌 셈이다. 만약 다리가 아프다고 투정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가만히 누워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성혜인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느릿느릿 침대에서 일어났다.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뭐라도 먹어야 계속 잘 수 있을 것 같았다.거실로 나가보니 또다시 반승제가 보였다. 성혜인이 잠들고 난 다음에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함께 눕지 않은 이유는 아무래도 남의 침대에 눕기는 싫어서일 것이다.주방으로 가서 물 한 잔 마시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반승제의 새 슬리퍼와 잠옷이 보였다. 역시나 심인우가 왔다 간 모양이다.이번으로 다섯 번째다. 반승제가 귀국한 다음 다시는 안 만나게 될 줄 알았더니 다섯 번째까지 있을 줄이야... 그동안 너무 외로워서인지 나쁘지만은 않았다.강민지의 말이 맞았다. 성혜인은 어쩌면 복에 겨웠을 수도 있다. 빨리 끝나기를 기대하며 횟수를 세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성혜인은 물 한 컵 더 따라서
반승제가 떠난 후에도 성혜인은 한참이나 거실에 혼자 서 있었다.성혜인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연신 들려오고 나서야 정신 차리고 화끈거리는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아서 가슴을 한참 두드리다가 화장실로 가서 찬물 세수를 했다.이제야 살 것 같았던 성혜인은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어봤다. 냉장고 속에는 메밀면 한 봉지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뜨거운 물에 면을 끓이고 대충 소금을 넣어 끼니를 때웠다.맛없는 대로 반 그릇을 겨우 먹고 나서는 설거지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아무리 뒤척거려도 잠이 오질 않았다. 반승제가 했던 말은 머릿속에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성혜인은 유교걸이다. 이런 상황에서 말하기 약간 우습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나름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절대 연애를 안 한다는 철칙을 가진 사람이었다.반승제와 결혼하기 전에 좋아했던 사람과도 대학에서 만나기로 약속만 해놓은 상태였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성혜인은 서천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그녀의 사상도 꽤 보수적인 편에 속했다. 공부하면 할수록 어떤 생각은 틀렸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릴 적의 환경을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려웠다.강민지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만나고 다니고는 한다. 남자는 밥 먹듯이 피는 바람을 왜 여자는 피면 안 되고, 똑같이 출근하고 돈을 벌면서 왜 여자만 집안일을 하는 등 문제를 처음으로 성혜인에게 가르쳐주기도 했다.그래도 성혜인은 남녀 사이의 관계에서만큼은 자유롭지 못했다. 반승제와 첫날밤을 가진 날에도 상대가 서류상 남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수치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마음이 통해야만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두 사람은 서로 증오했으니 말이다.성혜인은 몸을 돌리며 계속해서 생각했다. 반승제는 조금 전 그녀에게 몸은 솔직하다고 말했다. 확실히 그녀는 입으로는 싫다고 하면서도 몸은
이튿날.성혜인은 아침 일찍부터 유경아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한참 머뭇거리고 나서야 백연서가 포레스트에 있다는 것을 밝혔다.“아침부터 찾아오셔서 불같이 화를 내시더니, 사모님한테 지금 당장 돌아오시라고 하네요.”백연서와 만나서 좋은 일이 일어났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래서 성혜인은 전혀 포레스트로 갈 마음이 없었다. 어차피 찾아가도 욕만 먹을 텐데, 이런 식으로 자해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저 지금 바빠서 못 돌아간다고 전해줘요.”바쁘다는 것은 물론 핑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은 순간 성혜인은 방태주의 영상통화를 받았다. 유창목이 들어왔으니 어떤 것을 원하냐는 전화였다.“페니 씨 진짜 운 좋네. 조금 전 한 고객이 반품한 데다가 창고에 새로 들어온 것들까지 합하면 잔고가 꽤 있어. 품질은 창고에 있는 쪽이 반품한 쪽보다 좋아. 영상으로는 잘 안 보이지?”방태주의 말대로 영상으로는 품질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성혜인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사장님, 저 지금 바로 서천으로 출발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안 돼요?”유창목은 아주 보기 드문 목재이기 때문에 성혜인을 제외하고도 수백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방태주는 지난번의 약속과 반승제를 봐서 일단 그녀를 위해 남겨 놓기로 했다.성혜인은 곧바로 짐을 싸서 서천으로 출발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점심이 되었다.그녀는 유창목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결국 창고에 있는 것을 선택했고 결제에 배달까지 한 번에 완성했다. 그래도 유창목의 일을 해결하고 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웠다.이대로 해가 지기 전에 제원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가 성혜인은 문득 임지연의 친딸을 찾아야 한다는 성휘의 부탁이 떠올랐다. 임지연은 서천에서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그때의 병원으로 가보면 기록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병원의 아카이브에는 수많은 상자와 종이들이 있었다. 더구나 24년 전의 기록은 정리가 되어있지 않아서 성혜인이 직접 하나하나 뒤지면서 찾아야 했다.그렇게 성혜인은 세 시간이나 넘게 기록을
“나는 단미 그 아이가 마음에 들어. 그림 실력도 나날이 나아지고 있고. 오늘은 또 승우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데 둘이 마음이 생긴 건 아닌지, 호호.”김경자는 한때 이런 말을 한 적 있었다.윤단미의 그림 실력은 꽤 좋았다. 동년배 중에서도 재능 있는 축에 속해서 주영훈의 제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렇기에 출신이 부족함에도 김경자의 눈에 들 수 있었다.반승제와 윤단미가 사귄 다음 김경자는 얼마나 난리를 부렸는지 모른다. 반승제에게 형의 아내를 빼앗은 천벌 받을 놈이라고 욕하면서 말이다. 후에 반승우가 세상을 뜨고 나서야 그녀는 잠잠해졌고 가끔 둘이 잘 만나고 있는지 물어봤다.김경자의 관심이 반승제에게는 감시로 다가왔다. 자신이 침 발라 놓은 손주며느리를 어떻게든 집안으로 들이려는 식의 감시 말이다. 그래서 반승제와 김경자 사이의 거리는 좁혀진 적이 없었다.얼마 후 저녁 식사 시간이 되고 식탁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고 온 반승제가 표정이 굳어있자, 김경자는 또 입을 삐죽이며 빈정댔다.“이 할미랑 밥 먹는 게 그렇게 싫니? 누가 보면 집안에 초상 난 줄 알겠구나.”반승제는 예리한 눈빛으로 김경자를 쏘아봤다. 그러자 그녀는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다물었다. 밖으로 내뱉지 못한 화는 전부 얼굴로 올라가서 붉으락푸르락했다.“집에서는 회사 일을 하지 말거라. 영감이 너를 후계자로 정했다고 해서 어디에서나 위세를 떨 건 없지 않니? 그 자리는 원래 네가 아닌 우리 승우 것이었어. 우리 승우가 사고만 당하지 않았어도...”김경자가 거침없이 말을 이어가는 것을 보고 백연서가 당황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어머님, 승제도 노력하고 있어요. 해외에서 승제와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데요.”“쯧쯧, 인터뷰가 무슨 소용이 있니? 우리 승우를 따라 배워 나라를 위해 힘을 써야지.”반승제는 물을 마시다 말고 컵을 내려놓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맞아요, 저는 형을 따라 배웠어야 했어요. 그러면 지금쯤 여섯 살이 되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성혜인은 잠옷에 외투만 걸치고 있었다.“스위트룸을 준비해 달라고 할까요?”성혜인은 반승제가 사업에 차질이 생겨서 찾아왔다고 생각했다.“방에 다른 사람 있어?”“아니요.”반승제는 이제야 표정을 풀며 덤덤하게 말했다.“그럼 스위트룸은 됐어.”성혜인은 잠깐 멈칫했다. 어쩐지 늑대를 집안으로 들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반승제는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욕실로 향했다. 자기 전에 이미 씻었던 성혜인은 밖에서 기다리다 말고 그의 잠옷을 준비하러 갔다.하늘에 리조트는 재벌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에 5성급 호텔보다도 훨씬 좋았다. 그래서 리조트 측에서 준비한 잠옷도 비싼 실크 소재였고 리조트에 찾아온 모든 손님에게 제공했다. 만약 마음에 든다면 물론 가져갈 수도 있었다.성혜인은 안내 데스크로 가서 남성 잠옷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금 전 그녀가 반승제를 데리고 들어오던 것을 봤던 직원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는 반승제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재력도 재력이거니와 쉽게 잊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잠옷을 들고 돌아온 성혜인은 욕실 문틈으로 반승제에게 건네줬다. 곧이어 반승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서천에 오기 전에 철저한 준비를 했던 성혜인은 트렁크에서 수건 한 장을 꺼내 반승제에게 건네줬다. 그러자 그는 말없이 받아 들고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았다.반승제가 필요할 만한 물건이 또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머리를 돌렸던 성혜인은 트렁크 속에 수건이 한 장 더 있는 것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그녀가 반승제에게 건넨 것은 머리카락을 닦는 수건이 아닌 몸을 닦는 수건이었던 것이다.“대표님.”성혜인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반승제를 부르더니 말을 이었다.“죄송해요, 그건 제가 몸을 닦던 거예요. 그러니... 이걸 쓰세요.”성혜인은 반승제의 눈치를 살피며 다른 수건을 꺼내왔다.반승제는 자신이 들고 있는 것과 색깔부터 다른 수건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너 일부러 그
“대표님, 저 드라이기 거둬야 해요.”반승제는 이제야 성혜인을 풀어줬다.성혜인은 드라이기를 욕실에 가져다 두고 다시 나왔을 때 우연히 반승제의 손가락에 남은 빨간 자국을 발견했다. 무릎에 아직도 화장 자국을 달고 있는 그녀가 그게 어떻게 생긴 것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다행히 조금 전 병원에 다녀왔기 때문에 성혜인의 가방 속에는 금방 새로 산 화상 연고가 있었다. 연고를 손가락에 짜낸 그녀는 반승제의 손을 덥석 잡고 화상 부위에 바르기 시작했다.반승제가 뒤늦게 성혜인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챘을 때 코끝에는 연고의 씁쓸한 향이 맴돌았다. 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열심히 연고를 바르고 있는 성혜인을 바라봤다.얼마 후 성혜인은 반승제의 손을 놓고 자기 손가락에 남은 연고를 종이로 닦아냈다. 이때 반승제가 돌연 물었다.“그 남자가 그렇게 좋아? 잠깐 만나러 서천으로 내려올 정도로?”성혜인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저 오늘은 유창목 때문에 방 사장님과 만나러 서천에 왔어요. 그 귀한 유창목을 드디어 구할 수 있게 되었는데 당연히 직접 와야죠. 조금 전 이미 가장 좋은 것들로 골라서 제원으로 보냈어요.”이 말을 듣고 난 반승제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올라갔다.“대표님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심 비서님도 없이?”“프로젝트에 급한 문제가 생겨서 책임자를 만나러 왔어.”성혜인은 의심의 눈초리로 반승제를 바라봤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고 해도 그를 이 시간에 부를 만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책임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히 다른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서천에 도착하고부터 목재를 고르느라, 기록을 찾느라 피곤했던 성혜인은 슬금슬금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반승제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멈춰 세웠다.반승제는 성혜인의 무릎을 바라봤다. 아직도 빨간 것을 보아하니 오늘도 긴바지를 입은 모양이다. 참 미련하도록 고집이 센 여자였다.“저는 이미 약 발랐어요.”성혜인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아무튼 윤씨 집안에서 아는 건 없는지도 물어봐 줘. 지금으로서는 단미 씨밖에 안 떠오르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물건으로 여기고 집안사람한테 줬을 수도 있으니까 꼼꼼하게 확인해.”사실 반승제는 진작 윤단미에게 물어봤었다. 하지만 그날 그녀가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던지라 돌아온 것은 반승우에게서 무언가를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기억이 안 난다는 대답밖에 없었다.“그래, 제원으로 가자마자 물어볼게.”이 말을 들은 서주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제원 아니야?”“응, 출장.”출장이라는 말에 서주혁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어느덧 아침 다섯 시가 거의 되었다. 잠을 자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반승제는 침대에 다시 누워서 잠깐 눈만 붙였다가 일어났다.호텔 직원은 반승제가 하늘에 리조트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서천 측 책임자에게 알렸다. 그래서 그들은 아침 다섯 시에 이미 리조트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감히 반승제에게 연락하지는 못하고 말이다.얼마 후 반승제가 밖으로 나온 것을 보고 한 책임자가 부랴부랴 마중하며 물었다.“대표님, 혹시 다른 요구가 있어서 서천으로 오신 건가요? 마침 다들 한자리에 모였으니, 요구가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안 그래도 저희가 먼저 연락하려고 했어요. 이곳에서 반 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해수욕장이 겨울에도 따듯해서 여행 프로젝트에 넣으면 좋을 것 같았거든요. 혹시 관심 있으세요?”반승제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책임자들의 성실함을 봐서라도 해수욕장에 가보기로 했다.그 전에 반승제는 먼저 방으로 돌아가서 성혜인을 깨웠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책임자들의 눈빛은 확 변했다. 그들 중 한 명은 그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기도 했다. 지난번 임남호에게 맞은 아들 때문에 속을 썩인 적 있었으니 말이다.반승제와 성혜인이 함께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방에서 나온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이게 어떤 상황인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작은 도
연승혁을 마주했을 때 원아정의 눈가에 잠시 상처받은 기색이 스쳤다.“오빠...”하지만 연승혁은 등을 기대며 차갑게 말했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쓸데없는 감성팔이를 하려는 거라면, 당장 사람 불러서 쫓아낼 테니까.”원아정은 그가 얼마나 냉정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애써 꾸며낸 애잔함도 순식간에 거둬들였다.연승혁이 옆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조용히 자리에 앉은 원아정은 이내 평소의 얼굴빛을 되찾았다.그때 안정숙이 입을 열었다.“마침 승혁이도 있으니, 구은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보거라.”애초에 원아정은 이 일을 말하려고 온 터였다. 그녀는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좋아요. 오늘 저도 그 얘기를 하려고 왔으니까요.”그녀는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 남자의 눈매는 연승혁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안정숙과 연승혁 모두 한눈에 알아챘다. 이 남자는 분명 연씨 가문의 핏줄이었다.이미 벼랑 끝에 선 원아정은 더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만약 공지민을 끌어내리지 못한다면 자신이 해외로 쫓겨날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승혁 오빠, 이 얼굴 잘 보세요. 연씨 가문이 큰 혼란에 휩싸였던 그때, 제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시죠? 아버님께서 밖에 아들을 하나 두셨다고요. 물론 그건 아버님 잘못이 아니었어요. 그 모든 게 누군가가 꾸민 계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머님이 그 일을 평생 떨쳐내지 못하신 이유가 뭔지 아세요? 언니가 실종된 것도 큰 상처였지만 아버님이 다른 여자를 품었다는 사실은 어머님께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었어요. 그 상처가 결국 평생 지워지지 않는 한으로 남은 거죠. 그리고 어머님께서는 그 여자가 임신한 걸 알고도 가만두지 않으셨어요. 그 여자는 목숨을 건져 간신히 도망쳤고, 결국 아이를 낳았어요. 그 아이가 바로 구은우예요. 그러니까 구은우는 승혁 오빠의 이복동생이라는 말이에요.”연승혁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는 담배를 꺼내려다 안정숙의 시선을 의식하고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진 원아정은 불안감에 휩싸여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만약 안정숙이 원진과 상의한다면 그녀는 반드시 해외로 쫓겨날 것이다. 원진은 절대 그녀 편에 서지 않을 터였다.원아정은 서둘러 자신을 위해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공지민 그년 때문에 내 인생은 완전히 끝장났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녀는 곧장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래는 공지민이 숨겨둔 그 사람의 정체를 밝혀내라고 시켰건만 돌아온 보고는 실수로 그 사람을 놓쳤다는 것이었다.“뭐? 놓쳤다고?”원아정은 분노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이렇게 계속 끌려다니면 모든 걸 잃고 말 것이다.그녀는 차를 몰고 공지민이 사는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원아정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지금이라도 공지민을 보기만 하면 망설임 없이 액셀을 밟아 그대로 들이받아 죽여버리겠다고.하지만 공지민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원아정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매일 공지민의 집 근처를 돌며 기회를 엿보았다.차를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숨겨두고 혹시라도 온시환의 사람들이 눈치챌까 멀리서 관찰했다.하지만 사흘이 지나도록 공지민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고 대신 안정숙이 공지민을 만나러 오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그 광경을 보자 원아정의 얼굴에는 질투가 가득 차올랐다.‘고등학교 때 그렇게 짓밟아 놓았던 공지민이 나를 밟고 올라가다니... 이게 말이 돼?’분노를 삭이며 핸들을 꽉 움켜쥔 그녀의 시야에 드디어 공지민이 나타났다.공지민은 안정숙과 함께 나와 있었다. 안정숙은 공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무언가를 이야기했고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그 평온한 광경을 바라보는 원아정은 질투에 사로잡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를 악문 원아정은 다시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사람 정체 아직도 못 밝혀냈어? 공지민이 숨겨둔 그 사람 말이야!”“그 집에 배달을 다녀온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곳에 사는 사람은 여자
온시환은 뒤에서 움직일 만한 세력이 많지 않았기에 드러난 수단만을 써야 했고 그만큼 더 조심해야 했다.무엇보다 이 일에 서주혁이나 반승제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건 그가 자신의 여자를 위해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고 그러기에 자신의 힘만으로 해결해야 했다.물론 만약 상황이 공지민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악화한다면 그때야 비로소 그 둘에게 도움을 청할지도 몰랐다.공지민은 온시환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승혁이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인지 새삼 깨달았다.온시환은 그동안 자신이 알아낸 연씨 가문의 과거와 연승혁이 회색지대 사업을 정리하며 보여준 철저하고도 잔혹한 수완에 대해 천천히 설명했다.공지민은 그저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온시환이 그를 상대하기 어렵다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연승혁이 이토록 잔혹하지 않았다면, 아마 먼 옛날에 태어났어도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으로 불렸을지도 모른다.이어 온시환은 연씨 가문에서 안정숙이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겉보기에는 자애로워 보이는 안정숙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의 품에 몸을 완전히 기댄 채 생각했다.온시환의 눈에 그녀는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해 보였을까?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겠다고 나섰던 그녀가 얼마나 우스웠을까?연씨 가문의 식사 자리에서 온시환의 표정이 단숨에 어두워진 이유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는 아마도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려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온시환이 정말 그녀를 좋아한다면, 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도우려 했을까?공지민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요즘 들어 온시환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그날 저녁, 연씨 가문에서 또다시 값비싼 선물들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안정숙이 직접 방문하기까지 했다.안정숙은 확고한 의지를 보이며 공지민을 받아들이려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태도는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지민아, 이리 와 보렴. 최근에
그날 밤, 온시환의 사람들이 염정아가 머물던 집 주변을 철저히 조사한 결과 원아정의 사람들이 이미 철수했음을 확인했다. 그 즉시 염정아를 온시환의 별장으로 안전하게 옮겼다.염정아는 전과 다름없이 방에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음식을 먹을 때조차도 방에서만 해결했다.공지민은 염정아를 제원으로 불러오기 전까지 그녀가 이렇게 협조적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특히, 이번에는 염정아가 외부인의 이상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원아정이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공지민은 마음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아야, 이번에는 네가 그 배달원의 이상함을 눈치챈 덕분이야.”염정아는 그릇 안의 음식을 먹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너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어.”공지민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니야, 넌 한 번도 내게 폐를 끼친 적이 없어.”염정아는 눈빛이 반짝이며 놀란 듯 공지민을 쳐다보았다. 이내 그녀는 천천히 손에 든 것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지민아, 난 그저 네가 구은우의 복수를 끝낸 뒤엔 평범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 사실 나도 한때 복수심에 사로잡혀 살았어. 그때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곤 했지. 세상과 부모를 원망하며 미친 사람처럼 살았어. 하지만 어느 순간 생각했어. 이렇게 짧은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걸. 그리고 깨달았지. 나는 너무 나약했고, 도망칠 용기도 반항할 용기도 없었어. 괴롭힘을 당해도 그냥 참기만 했고. 사람은 참을수록 더 고통스러워진다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염정아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공지민은 그녀를 천천히 안으며 말했다.“난 모르겠어. 복수가 끝난 후엔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때 가봐야 알 것 같아.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염정아는 별장에 들어오면서 온시환을 보았다.그녀의 눈에 온시환은 매우 훌륭한 남자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그가 공지민을 바라보는 눈에는 온통 사랑이 담겨 있었다.
“계속 조사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요즘은 다들 섣부른 행동 하지 말라고.”잠시 후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항상 하는 말이지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목숨을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옆에 서 있던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들었다.연승혁은 옆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공허했다.과거 연씨 가문이 회색지대 사업을 했을 때는 항상 목숨이 위태로웠다. 하지만 사업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전환한 이후 몇 년 동안 연씨 가문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그의 뒤를 캐고 있다는 사실에 불쾌하면서도 묘한 흥미를 느꼈다. 연승혁은 타고난 모험가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그래, 누군지 한번 보자고.’연승혁은 문득 조금 전 할머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떠올렸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며 한 이름을 언급했었다.‘구은우?’하지만 연승혁은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왔기에 그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저 하찮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일 뿐이었다.그는 다시 담배를 피우며 옆 사람에게 말했다.“뭔가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알려.”“알겠습니다, 형님.”배는 여전히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한편, 제원에서 원아정은 연씨 가문을 떠난 뒤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그녀는 공지민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공지민이 더 이상 제원에서 발붙일 수 없게 만들 작정이었다.차에 올라탄 그녀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집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어?”“아가씨, 우리가 10시간 동안 지켜봤지만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밖에서 음식을 배달한 것 같습니다.”원아정은 화를 내며 버럭 소리쳤다.“밖에서 배달 음식이 들어갔다고? 너희들 머리는 장식이야? 배달원으로 위장해서 안을 확인할 생각도 못 해? 도대체 내가 왜 너희들을 고용한 거야!”전화를 끊은 뒤 그들은 그제야 원아정의 말에 따라 배달원으로 위장해 염정아가 머무
안정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게 무슨 뜻이니?”원아정은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차분히 말했다.“아, 할머니. 정말 모르신다면 승혁 오빠를 불러보세요. 저도 그냥 한 번 해본 소리니까요. 어차피 지금은 공지민이라는 친손녀를 얻으셨으니 제 말은 믿지도 않으실 테고요. 제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이만 가볼게요.”“아정아, 너 나를 원망하는 거니?”원아정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안정숙은 지팡이를 꽉 쥐며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어르신, 아정 씨는 아마 결혼식 사건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너무 무례했습니다.”안정숙은 옆에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차분히 말했다.“아정이가 뭘 원망할 자격이 있나. 그날 일을 문제 삼지 않은 것만으로도 내가 충분히 관대했던 거야. 저 아이는 단지 체면만 구긴 거지. 하지만 지민이는 그날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나. 역시나 반성할 줄 모르고, 저 아이를 집안에 들이지 않길 정말 잘했어.”가정부는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위로했다.“어르신, 보시는 눈이 정확하십니다. 아정 씨는 확실히 그런 그릇이 아니죠.”설령 공지민과 관련된 일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원아정이 연씨 가문에 들어오면 결국 문제만 일으키게 될 것이다.최근 공지민과 관련된 일로 안절부절못하던 안정숙은 원아정의 말이 떠올라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 혹시 그 당시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던 건 아닐까?그녀는 즉시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이미 바다에 나가 있었다. 최근 거래에 문제가 생겼고 돌아오려면 사흘이 걸릴 거라고 했다.“할머니, 사흘 후에 찾아뵙겠습니다.”안정숙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다.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안했다.그녀는 결국 직접 공지민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직접 그녀를 만나야만 마음의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았다.한편, 연승혁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원아정은 마치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황급히 액셀을 밟아 한적한 도로 위에 차를 멈췄고 주변 교통경찰이 다가왔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확실한 정보야?”“확실해. 연씨 가문에서 이미 공식적으로 발표했어. 혹시 연승혁이 너를 차단해서 SNS에 올린 글을 못 본 거 아니야?”이 말은 원아정의 정곡을 저대로 찔렀다. 연승혁은 정말 그녀를 차단했다.원아정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전화를 끊고 바로 안정숙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안정숙도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쯤 되니, 이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그녀는 직감했다.그래서 안정숙이 그렇게 공지민을 신경 쓴 거였다. 심지어 내 결혼식도 취소하면서까지...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그래서 그랬던 거구나!’원아정은 마치 하늘이 자신에게 터무니없는 장난을 치는 것만 같았다.설마 결혼식장에서 안정숙이 공지민을 알아본 걸까?‘망할!’그녀는 속으로 수없이 욕을 퍼부었지만 상황이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연승혁과의 관계는 이제 완전히 끝났고 그녀는 자신이 공지민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공지민이 나에게 복수한다면 어떡하지?’그녀는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안 돼. 내가 먼저 손을 써야 해.’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구은우라는 이름이 떠올랐다.원아정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내가 왜 구은우를 잊고 있었지? 구은우를 죽인 건 연승혁 아니었나? 공지민이 이제 연씨 가문의 사람이 됐다면 당연히 복수를 원하지 않을까?’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너무 우연 아닌가?’공지민이 정말 연씨 가문의 사람일까?혹시 공지민이 연승혁에게 접근해 구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 모든 걸 계획한 건 아닐까?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단순히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결론지었다.원아정은 갑자기 연승혁과 공지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떠올랐다.이 생각이 들자
안정숙은 깊은 한숨을 쉬며 연승혁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자. 네가 지민이를 잘 지켜봐.”연승혁은 안정숙과 함께 밖으로 잠시 산책을 나섰다. 그런데 그때 그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원아정이었다.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전화를 차단해 버렸다.원아정은 화가 치밀었다. 최근 연승혁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는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SNS에 올려 자신과 완전히 연을 끊겠다고 공표하기까지 했다.그녀는 자신이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만 같아 분노와 절망에 휩싸였다.‘이게 다 공지민 때문이야!’원아정은 즉시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고가 들어왔다.“아가씨, 공지민이 오늘 외출해서 쇼핑 중입니다.”“주소를 보내요.”원아정은 바로 차를 몰아 그 장소로 향했다. 그녀는 쇼핑몰에서 공지민을 발견했다.공지민은 아직도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고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강민지가 함께 있었다.강민지는 공지민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기분 전환 겸 바람이라도 쐬게 하려고 그녀를 불러냈다.공지민은 목발을 짚고 느린 걸음으로 걸으며 한 시계 매장을 지나던 중 눈길을 멈췄다. 한정판 시계를 보며 염정아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얼마 전 자신이 가진 40억을 전부 염정아에게 넘겨주고 정작 자신에겐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아침 온시환이 그녀에게 카드를 건넸다. 카드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연씨 가문에서 보낸 선물들에 자극받은 탓인지, 공지민은 보상의 의미로 염정아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매장 직원에게 시계를 꺼내 보여달라고 했다.강민지는 옆에서 시계를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정말 예쁘다! 피부 톤이랑도 잘 어울려요. 게다가 다이아까지 박혀 있어서 완전 고급스럽네요.”공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환 씨가 오늘 아침에
공지민은 연승혁의 말을 듣고 속으로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혈육의 정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연승혁은 그와 상관없이 여전히 친근하고 가볍게 말을 이어갔다.온시환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연승혁은 쉬운 상대가 아니야. 항상 경계해야 해.’공지민은 이 순간에도 그의 말에 따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연승혁은 손에 든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미소를 지었다.“누나, 마음이 바뀌면 나한테 연락해요. 이건 내 전화번호예요.”그는 카드 한 장을 꺼내 옆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개인 번호예요.”공지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가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테이블 위에 놓인 카드를 바라보았다.카드는 별다른 장식 없이 간단했고 확실히 개인적인 물건처럼 보였다.그녀는 카드를 가방에 넣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연승혁의 의도가 도무지 파악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상황을 지켜보며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이 집 밖으로 나가 차에 오르자마자 전화가 걸려 왔다. 상대는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그는 운전석 의자에 등을 기대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최근에 재미있는 걸 발견해서 가끔 들러서 장난 좀 치고 있어.”전화기 너머에서 상대가 흥미로워하며 물었다.“들리는 말로는 누나를 찾았다고 하던데, 그게 진짜야?”“그래, 진짜야.”연승혁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으며 대답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연씨 가문으로 데려올 거야.”상대는 의아한 듯 반문했다.“승혁아, 근데 너 태도가 좀 이상한데? 그동안 네가 누나를 찾은 건 할머니를 위해서였잖아. 설사 누나를 찾았다고 해도 이렇게 적극적일 이유는 없을 텐데, 왜 그렇게 흥미를 보이는 거야?”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정말 흥미로운 여자거든.”상대가 무언가 더 말하자 그는 가볍게 욕을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차를 몰아 연씨 가문 저택에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