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원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돌연 멈춰 서며 말했다.“이걸 어쩌나? 나는 20%의 지분을 받고 놀 일만 남았는데 너는 딸랑 15%를 받고 일하게 생겼네~ 이제 알겠지? 너는 더 이상 우리 집안사람이 아닌 직원이야. 20년의 세월도 피보다 진하지는 못하거든.”“...”“성혜인, 이제부터는 내 세상이야. 네가 죽든 살든 신경 쓸 사람은 없어. 물론 반승제도 마찬가지야.”성혜인은 말없이 운전해서 멀어져 갔다. 이번만큼은 그녀의 완벽한 패배였다.성혜원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이제 직원일 뿐이다. 임지연에게 갚을 은혜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그녀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로드가든의 주차장으로 들어갈 때 성혜인은 우체국의 전화를 받았다.“안녕하세요, 성혜인 씨. 오늘 배송하기로 등록된 6년 전의 선물이 있는데 현재 거주하시는 주소가 어떻게 되세요? 지금 바로 배송해 드릴게요.”‘선물? 그것도 6년 전에?’성혜인은 의아한 기분으로 로즈가든의 주소를 말하고는 겨울이와 함께 집으로 올라갔다.약 반 시간 후, 우체국에서 진짜로 물건을 보내왔다.성혜인은 사인을 하고 문을 닫았다. ‘선물’이라고 하는 것은 나무 상자였는데 세월의 흔적이 아주 진했다.우체국에서 20년 후의 자신에게 편지 보내기와 같은 활동을 하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성혜인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이런 것을 준비한 적이 없었다.나무 상자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성혜인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생일을 입력했고 뜻밖에도 자물쇠는 단번에 열렸다. 상자 속에는 반지, 편지, 그리고 낡은 노트가 있었다.「안녕, 혜인아.나는 도훈이야, 정도훈.네가 이 편지를 보고 있다는 것은 오늘이 네 생일이라는 뜻이겠네? 생일 축하해. 모든 생일을 함께 하기로 해 놓고 약속을 어겨서 미안해. 설마 요즘도 강가에 가서 몰래 우는 건 아니지?너라면 당연히 제원대학교에 입학했을 거라고 믿어. 학교에서 내 거짓말을 발견하고 욕도 많이 했겠지? 남자 친구가 되어 주겠다던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나는 아마 지금
반승제는 손을 들어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이것 때문에 나를 부른 거야?”“승우 형이 세상을 뜬 지가 언젠데, 윗분들은 아직도 행적을 조사하고 있어. 네 아버지도 마찬가지야. 생전 저택을 떠나 형에 관해 조사한 적 있다고 하더라. 아무래도 형이 엄청 중요한 자료를 남겨 놓은 모양인데, 그게 여자 친구 손에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 게다가 그 여자 친구는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물건을 손에 쥐고 있는지도 모를 거야.”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냈다.“승제야, 너 혹시 승우 형의 이상형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이상형이라도 알면 찾기 쉬울 것 같은데.”서주혁의 질문에도 반승제는 관심 없는 듯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서주혁은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그 자료를 찾으면 승우 형이 죽은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몰라.”반승제는 우뚝 멈춰서더니 미간을 구겼다. 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미 조사해 봤어. 형 주변에는 여자가 없었어.”“그래서 내가 이 노트들을 스캔하는 거 아니냐. 만약 10대 시절 연애를 했었다면 어딘가 흔적을 남겨 뒀을 게 분명해.”“결과 나오면 알려줘.”반승제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서주혁은 또다시 직원들에게 단 한 장의 노트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그는 연구소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반승우의 필체로 남긴 이성의 이름을 찾을 것이다.서주혁이 반승우의 일에 이토록 열정적인 이유는 이게 서씨 집안에서 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반승우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분주해졌는지 모른다.차에 올라탄 반승제는 운전대를 잡고 연구소에서 나섰다. 인적이 드문 시간의 십자로, 그의 곁에는 단 한 대의 차만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쯤 열린 창문 속에서는 성혜인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반승제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창문을 내리며 경적을 울렸다. 가만히 신호등을 주시하고 있던 성혜인은 갑
성혜인은 저도 모르게 운전대를 꽉 잡았다. 얼굴은 점점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얼마 후 반승제가 천천히 물러나고, 성혜인은 말없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머리를 숙였다.“페니야.”“네?”“너 언제 이혼할래?”반승제의 목소리가 저녁 바람과 함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반승제의 눈빛은 서서히 식어 갔다.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성혜인은 머리를 돌리며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런 말은 왜 하는 거예요?”키스의 여운으로 홍조를 띠는 얼굴과 달리 너무나도 차분한 말투였다. 그래서인지 반승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페니가 이혼하면 뭐? 내가 책임질 것도 아니잖아.’반승제는 미간을 구겼다. 자신이 성혜인과 하는 것을 서민규는 3년 전부터 시작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말 못 할 언짢음이 들기도 했다.“서민규는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대표님, 저희는 완전히 다른 두 세상에서 살고 있어요. 대표님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얻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죠? 지금 저를 향한 마음도 일시적인 호기심이라는 걸 잘 알아요. 그러니 저는 대표님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지금의 생활을 버릴 수가 없어요. 그거야말로 어리석은 선택이잖아요.”반승제는 조용히 자세를 바로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또다시 정적이 맴돌기 시작했다.이번에는 반승제가 먼저 예리한 시선을 거두며 느긋하게 물었다.“내가 너한테 호기심이 있다고 생각하나?”“아니라면 다행이에요. 그래야 후에 깔끔하게 헤어지죠.”성혜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자 반승제의 얼굴은 보기 좋게 굳어 갔다.반승제의 마음을 알기나 하는지 성혜인은 싱긋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저 오늘 진짜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성혜인은 단호하게 멀어져 갔다. 조금 전 키스를 나눈 사이라고는 보아 낼 수 없을 정도의 단호함이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이 떠난 다음에도 한참이나 제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인
성휘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꼽자면 단연 임지연이었다. 그녀는 성휘가 아는 여자 중에서 가장 지혜롭고 강인한 여자였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다.성휘는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더욱 깊은 외로움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소윤과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임지연에 대한 모든 죄책감을 소윤에게 풀었다.오늘 밤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짧은 수면의 꿈속에서 성휘는 임지연과 만났다. 너무나도 그리웠던 모습이었다. 다정한 성격의 임지연은 꿈속에서도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여보, 혜인이한테 왜 그랬어요? 제가 키웠으면 제 딸이에요.”성휘는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 내며 번쩍 눈을 떴다. 제아무리 남자라고 해도 임지연과 같은 지혜는 없는 것 같았다.만약 임지연이 살아 있었다면 절대로 성혜인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삼지 않을 것이다. 병원에서 아이가 바뀐 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녀는 단 한 번도 성씨 집안에 해를 가한 적이 없었다.성휘는 떨리는 손으로 숨을 헐떡이며 핸드폰을 잡았다. 그리고 변호사에게 지금 당장 만나자고 얘기했다. 시간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호사는 곧바로 출발한다고 했다.아직도 성휘의 방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성혜원은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오자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말했다.“아빠는 회장님이랑 연락한 적도 있잖아요. 아빠만 말을 꺼내면 저는 승제 씨랑 결혼할 수 있어요. 저 진짜 그 사람 좋아한다고요. 성혜인은 더 이상 부귀영화를 누릴 자격이 없어요.”성휘는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억지로 대답을 짜냈다.“알았다, 내가 생각해 보마.”성혜원은 신바람이 나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성휘의 건강 상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반시간 후, 변호사가 성씨 저택에 도착했다. 성혜원 때문에 단단히 열 받은 성휘는 한참 진정하고 나서야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아내며 겨우 말을 꺼냈다.“유서를 만들어야겠어요. 제 앞으로 있는 지분 35%를 전부... 첫째 딸 성혜인에게
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호사가 떠나고 출입문이 닫힌 다음에야 그녀는 시큰거리는 눈을 깜빡였다. 극한에 다다른 슬픔은 생리적인 통증을 동반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이는 마치 누군가가 목을 조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어젯밤 성휘가 말했던 요구들은 확실히 듣기 좋지 않았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성혜인은 성휘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탓하거나 미워하지도 않았다.한 집안에 남은 게 남보다도 못한 부모, 세상을 떠난 아내가 남긴 피 안 섞인 딸, 그리고 욕망에 찌든 친딸이라니... 도무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리가 없는 상황이었다.성혜인은 성휘가 자신에게 욕설을 퍼붓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고마웠다. 하지만 자신이 힘들게 가꾼 SY그룹을 결국 성혜원에게 넘기지는 않을까, 그녀는 또 성혜원의 득의양양한 얼굴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는 했다.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성휘는 자신의 회사를 갉아먹는 임원들도 해고하지 못할 정도로 우유부단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 착한 마음씨를 성혜인에게 줬다. 덕분에 그녀는 SY그룹을 위해 최선을 다할 마음이 생겼다.성혜인은 핸드폰을 꺼내 성휘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아빠, 저 무조건 SY그룹을 성공시킬게요.」같은 시각, 성휘는 침실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간암 말기의 몸으로는 잠도 편히 잘 수 없었다.성혜인에게서 문자가 온 것을 보고 성휘는 기침을 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휴지를 뽑아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아냈다. 답장을 하고 싶기는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저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성혜인은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했다. 실핏줄이 터진 눈은 누가 봐도 하룻밤을 꼬박 새운 눈이었다. 잠깐 눈 찜질을 하고 나니 시간은 어느덧 점심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분 양도 준비를 끝낸 변호사와 다시 잠깐 만나고 나서 모든 자료를 들고 SY그룹으로 출발했다.지난번 잠깐 만난 적 있기 때문에 SY그룹의 임원진은 모두
성혜인은 의자에 기대어 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준비는 되었겠죠?”하영진은 일전에 준비한 자료를 황급히 들어 올리더니 한 글자 한 글자 읽기 시작했다. 그는 올해로 50대에 들어섰다. 하지만 지식수준은 오래전에 멈춰 있었다.회의실에 있는 대부분 임원이 다 그랬다. 그들의 지식수준과 관리 방식은 아직도 SY그룹의 창업 초기와 변함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에 적용 안 되는 건 물론이고 반작용까지 일으킬 수 있었다.성혜인은 조용히 발표를 듣고 있다가 머리를 들며 물었다.“그러면 회사에 반년 가까이 새로운 계약이 없었다는 건데... 인맥을 이용해서 고객을 끌어 볼 생각은 안 한 건가요?”회사를 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임원들은 응당 아무리 작은 계약이라고 해도 따냈어야 했다. 하지만 회의실에 맴도는 것은 정적뿐이었다.성혜인은 덕분에 임원진에 대해 또다시 알게 되었다. 그들은 두 번의 융자를 손쉽게 끝내면서 회사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변해 버렸다. 그러고는 세상만사 다 자기 손바닥 안에 있다는 듯이 젊은이들의 혁신적인 방안을 기각했다.성휘도 임원진과 같은 편에 있었다. 그래서 SY그룹은 줄곧 소극적이고 구시대적인 운영 방식을 고집해 왔다.성혜인은 심호흡하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하 이사님, 공 이사님...”그녀는 차가운 말투로 연이어 여덟 명의 임원을 불렀다. 그러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인사부로 가서 남은 월급을 받고 정리하세요. 여러분이 회사에 대한 공헌을 생각해서 다른 회사보다 두 배 높은 퇴직위로금을 드릴게요.”하영진은 눈을 크게 떴다.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정신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그게 무슨 뜻이에요?”성혜인은 회의실 밖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들어오세요.”곧바로 두 명의 변호사가 회의실 안에 들어섰다.“이 두 분은 제 대리인이에요. 혹시 의견이나 불만이 있으면 이 두 분한테 말하면 돼요. 다시 한번 강조 하지만 퇴직위로금은 섭섭지 않게 드릴게요.”성혜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반승제에게 잘 보여야 했던 이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도 물론 좋게 보고 있어요. 우리 회사 마케팅부 직원한테 내화의 페인트를 살펴보라고 해야겠네요. 페인트 질만 문제없다면 올해부터 계약을 시작할 수 있어요.”BK사와 같은 큰 회사와 협력한다면 SY그룹은 다른 계약 없이도 적자가 나지 않을 정도의 상황을 유지할 수 있었다.성혜인은 약간 시름 놓은 듯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어 올렸다.“한잔하시죠, 대표님. 저도 반 대표님한테 얘기를 잘 해볼게요.”이신도 싱긋 웃으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페니 씨 덕분에 제가 반 대표님과 함께 서천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어요. 고마워요.”두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술잔을 부딪쳤다.식사가 끝난 다음 성혜인은 서민규에게 이선을 집까지 데려다주라고 당부했다. 오늘 밤 기분이 좋았던 이선은 술을 꽤 많이 마셨다.“그러면 페니 씨는요?”서민규는 이선을 부축하며 물었다. 그러자 성혜인은 의자에 앉은 채로 대답했다.“저는 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이 대표님부터 신경 써 줘요.”이선은 SY그룹의 중요한 고객이었기 때문에 성혜인은 그를 먼저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민규는 이선을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성혜인도 오늘 밤 기분이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평소와 달리 꽤 많이 마셨다. 마신 술에 비해 얼굴이 너무 빨갛게 달아올라서 그녀는 또렷한 정신과 반대로 취객처럼 보이기도 했다.성혜인은 가방을 들고 복도 끝의 화장실로 향했다. 찬물로 세수라도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출근 첫날부터 엄청난 계약을 성사시켰으니, 그녀는 나름 뿌듯했다. 반승제의 이름을 빌린 덕분에 얻은 계약이기는 하지만 말이다.화장실로 향하는 길에 코너를 돌자 마침 프라이빗 룸에서 걸어 나오는 정장 차림의 남자가 성혜인의 시선에 들어왔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그래서 성혜인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천천히 멈춰 섰다.“반 대표님?”반승제는 프라이빗 룸의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룸 안에는 BH그룹
제원에는 반승제를 원하는 여자가 수두룩했다. 성혜인은 아마 유일하게 그의 왕성한 체력을 귀찮게 여기는 여자일 것이다.반승제는 성혜인이 끝까지 반항하려는 것을 보고 정장 외투를 벗어 세면대에 폈다. 그리고 그녀를 외투 위로 다시 안아 올렸다.이번에 성혜인은 그저 잠자코 있었다. 반승제의 비싼 정장을 깔고 앉았다니 얼떨떨하기도 하고, 조금 전 알게 모르게 도움받은 일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다.성혜인의 심경 변화를 발견한 반승제는 머리를 숙여 키스했다.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한데 어우러지다가 반승제의 핸드폰 벨 소리 때문에 멈추게 되었다. 아무래도 나간 지 한참 된 그를 찾는 전화인 듯했다.반승제가 몸을 일으키자, 성혜인은 그의 어깨에 기대 숨을 돌렸다. 그의 몸에서는 옅은 나무 향이 나고 있었다. 마치 영혼까지 빨리는 듯한 향기였다.반승제는 성혜인과 기대어 있는 채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통화했다.“네, 금방 돌아갈게요.”전화를 끊은 반승제는 성혜인의 등을 토닥였다. 얇은 천을 사이 두고 맞닿은 살결을 통해 말할 때의 울림이 생생하게 전해졌다.“오늘은 누구랑 왔어?”“혼자 왔어요.”반승제가 다시 가봐야 하는 것 같기에 성혜인은 몸을 바로 하고 세면대 아래로 내려갔다.정장 외투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몇천만 원짜리 물건을 반승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버렸다.“단발도 잘 어울려.”반승제는 덤덤하게 한마디 했다. 성혜인은 가방을 챙겨 들다 말고 부끄러운 듯 귀가 빨개지면서 말했다.“고마워요.”반승제는 셔츠만 입은 채로 밖으로 나갔다. 그는 심인우에게 부탁해 성혜인을 집까지 데려다주려고 했지만, 이때 마침 서민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페니 씨.”서민규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아무래도 성혜인이 걱정되어서 이선을 데려다주자마자 부랴부랴 다시 돌아온 듯했다.반승제도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한 서민규는 공손한 말투로 인사했다.“안녕하세요, 대표님.”반승제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었다. 가슴을 움직이던 작은 떨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