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손길은 거침없었다.놀란 혜인이 급히 일어나려는데 승제가 다시 눌러 앉혔다.그녀는 가녀린 손가락으로 승제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아직 축축한 걸 보니 샤워를 마치고 나서 채 말리지도 않고 바로 나온 모양이었다.혜인이 역시 금방 샤워를 하고 나온 것이었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미 거의 마른 상태였다. 어깨 뒤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들 사이로 손바닥만 하게 작은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그제야 그녀는 승제가 왜 경비실에 그렇게 말하라 부탁했는지 알 것 같았다.승제는 혜인이 결혼한 몸인 줄 알기 때문에 이 집에도 분명 서민규와 같이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아까 분명 통화에서 서민규의 목소리도 들었으니까 말이다.그 때문에 승제는 거짓말로 일부러 혜인을 지하주차장으로 유인해 말 그대로 서민규 몰래 은밀하게 사랑을 즐기려는 것이었다.하지만 그때의 시간은 그다지 늦은 시간이 아닌 고작 밤 9시밖에 되지 않아서 언제든지 이웃들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었다.불안했던 혜인이 그에게 무슨 말을 전하려는데, 승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미 그녀의 뒤통수를 잡고는 격렬한 키스를 퍼부어댔다.키스가 너무 격렬해서 숨이 쉬어지지 않아 혜인이 버둥거리던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려 다급히 가서 확인하려 했다.필연인지 우연인지,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서민규였다.민규는 이선의 분부를 받았다. 이선 역시 지난번 민규가 승제의 커프스를 잃어버렸던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혜인과 그가 서로 괜찮은 관계인 것을 알고 민규에게 혜인이와 식사 약속을 잡으라 말했다. 다 같이 혜인을 달래주려고 말이다.사실 이선은 이렇게 하면 혜인이가 반승제네 디자이너이니 자연히 그의 앞에서 BK사에 대한 좋은 얘기를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사회생활은 늘 눈치가 빨라야 하는 법이다.많이 긴장했던 혜인은 벨 소리가 울리자 전화를 받아 이 상황을 잠시 멈추고 싶었다.그러나 더욱 큰 손이 그녀보다 빨리 핸드폰을 잡았고 그대로 꺼버렸다.고요했던 차 안은 두 남녀의 거침 숨소리로
혜인은 옆에 준비된 옷을 입고는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전원이 켜지고, 밤새 서민규의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나 와있었는데 그사이에는 승제의 메시지도 있었다.그가 해외로 출국한다는 말이었다.메시지를 읽은 혜인의 머리가 갑자기 맑아지는 듯했다.‘해외로 간다는 건, 적어도 이틀은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는 소리잖아?’그녀는 세수하고 곧장 로즈가든으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정말 피곤하고, 쑤시고, 아픈 탓에 집에 돌아갈 힘이 남아돌지 않았다.그때, 누군가 조용히 배식카를 밀고 들어오더니 긴말하지 않은 채 약상자를 놓아주고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혜인은 그 안에 있는 약들이 무슨 약들인지 대충 다 알아보았다.왜냐하면 전부 전에 그녀가 병원에서 사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인제 보니 반승제 본인도 어젯밤이 꽤 격렬했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샤워를 마치고 혜인은 상처에 약을 바른 다음 해열제 한 알을 먹고 소파에 기대 그대로 잠들었다.원래 그녀는 그날 밤 바로 로즈가든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휴식과 치료를 반복하다 보니 이 호텔에서 이틀이나 더 머무르게 되었다.이틀이 지나서야 그녀의 체력이 조금 회복되었고 그제야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혹시라도 들킬까 봐 혜인은 몹시 초조해했다.로즈가든으로 돌아와서, 혜인은 곧바로 컴퓨터를 켜 인터넷에 도움을 청했다.「남편 정력이 과도하게 좋으면 어떻게 해야 하죠? 성욕을 억누르게 하는 방법은 없나요?」혜인은 떨리는 손으로 물음을 겨우겨우 작성해냈다.손이 떨리는 이유는 실질적으로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정말 힘에 부쳐 다른 일을 할 정신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이 매우 절실했다.다행히 십여 명의 사람들이 곧 답장을 보내왔다.「자랑하려고 온 거예요?」「복에 겨운 줄 모르네 진짜. 제 남편은 길어봤자 3분이에요. 나는 채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끝난다고요. 울고 싶은데 눈물도 안 나오네.」「없으면 없다고, 있으면 있다고 또 난리네.」「결혼 10년 차가 되니 이제 욕심도 없습니다.
일찍이 승제가 자신의 아내를 어떻게 대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단미가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단미라는 청순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그녀는 매우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다.아무 적의가 없는 척, 단미가 물었다.“그 사람은 너랑 이혼하면 아마 시집 못 가지 않을까? 반씨 가문에서 내쫓은 거나 다름없잖아.”승제는 불쾌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바로 밖에 준비된 차에 올라탔다.“나랑 무슨 상관이야.”단미도 서둘러 뒤따라 오르며 승제가 자신의 이런 ‘너그러운 마음씨’를 알아봐 주길 희망했다.“이혼하면 그 사람한테 재산 나눠줄 거야?”그 말을 들은 승제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성씨 가문이 반씨 가문에서 얻은 이득이 얼만데. 굳이 그래야 하나? 포레스트 별장도 그렇고 할아버지가 그 여자를 좋아해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런 조건인 집안에 시집가는 건 꿈도 못 꿨을 거야.’그 여자가 생각나니 승제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해외에 있는 이틀 동안, 반태승은 승제에게 세 번이나 전화를 걸어 왜 혜인이와 같이 가지 않았냐고 물으며 그를 재촉했다.그 전화는 비행기를 타고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혹시 혜인이와 싸운 게냐?”승제는 누군가의 간섭을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반태승의 기침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그는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렸을 것이다.단언컨대, 이 세상 그 누구든 타인에 의해 압박감을 느끼면 모두 반항심리가 생길 것이다.심인우에게 호텔로 차를 몰아달라 부탁하려는데, 또 반태승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승제야, 내일 혜인이 생일인 거 알고 있지? 잊지 말고 꼭 생일 선물 준비하렴.”순간 표정이 어두워진 승제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대답했다.“알겠습니다, 할아버지”승제가 순순히 자신의 말에 따르자 반태승은 매우 흡족해했다. 반태승의 건강은 최근 더욱 악화되어 문밖을 나서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포레스트를 한 바퀴 둘러봤을 텐데 말이다.“어렸을 때 혜인이가 고생을 꽤나 해서... 생일 선물은 꼭
민지는 조금 기분이 언짢았다.“네가 숨긴 왜 숨어, 정작 숨어야 할 사람은 저 두 사람인데!”혜인은 민지를 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승제가 자신을 보지 못했는지 확인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지금은 나도 남편 몰래 남자 만나잖아, 누구도 떳떳하지 않다고.”그러자 민지가 피식하고 가볍게 웃어 보이더니 혜인의 어깨를 잡았다.“맞네, 맞아. 너도 이제 예전의 순진하기만 했던 성혜인이 아니라는 걸 내가 잠시 깜빡하고 있었네. 가자! 내가 룸을 예약해놨어. 오늘 밤 너에게 화려한 이 제원의 밤 생활을 보여주도록 하지.”지난번, 민지는 놀이공원을 통째로 빌려 혜인의 생일을 쇠주었다.어렸을 적 고생스럽게 큰 혜인은 이후 아빠 성휘의 사업이 서서히 일어서게 되면서 생활 여건이 조금 나아졌지만, 기쁨도 잠시 곧 그녀의 엄마가 돌아가시게 되었다.사업이 잘될수록 성휘는 점점 더 바빠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혜인이와 놀아주기보다는 그녀를 데리고 고객을 만나러 다니거나 세운 지 얼마 안 된 자신의 사무실에 데려가거나 하는 일이 훨씬 많았다.그곳은 한 무리의 중년 남성들이 미래를 얘기하며 피운 담배 연기로 가득한 곳이었고, 일찍 철이 들었던 혜인은 어른들을 방해하지 않고 얌전하게 있었다.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혜인이는 대부분 기숙사가 있는 학교를 선택했는데 이래야 성휘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성휘가 소윤과 재혼했고, 두 부녀 사이의 관계는 갈수록 멀어지게 되었다.어렸을 적 성휘는 혜인이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간 적이 있었다. 당시 그곳은 사람으로 붐볐고 혜인은 성휘의 어깨에 올라타 세 식구가 놀이공원을 한참이나 돌아다녔다.하지만 어린 혜인은 알지 못했다. 그때 엄마 임지연이 몸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놀이공원에 가보고 싶다는 딸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힘들게 버텼다는 것을.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안 혜인은 죄책감에 시달렸고 놀이공원에 더는 갈 생각이 사라졌었다. 그래서 여태까지 딱 두 번밖에 가보지 않았다.한 번은 가
서주혁은 이런 광경에 흥미가 없었는지 곧바로 그녀를 옆을 슥 지나 옆에 있는 룸으로 들어갔다.이런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땅에 떨어진 물건을 줍고 있는 자신이 혜인은 정말 존경스러워질 정도였다.온시환은 원래 그녀를 도와 땅에 떨어진 물건들을 주우려고 했는데 그때, 반승제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었다.“시환아, 먼저 들어가 봐.”시환은 눈썹을 추켜올리며 얄밉게 한마디 했다.“아이고, 재수가 없었네, 재수가.”혜인은 머리가 막 저려나는 것 같았다.‘민지가 정말 나를 결국 골로 보내는구나.’온시환이 자리를 뜨자, 이곳에는 반승제와 성혜인, 단 두 사람이 남게 되었다.한 작은 물건이 마침 승제의 발 옆에 떨어져 혜인이 주우려는데 그가 가죽구두로 그녀의 손을 살짝 짓밟았다.그러고는 몸을 숙여 혜인의 얼굴을 훑어보았다.혜인은 사실 억지로 버텨내는 중이었다. 그녀 역시 민지가 이런 선물을 준비했는지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혜인이 그 물건을 다 줍고 나서도, 반승제는 떠나지 않았다.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말했다.“혹시 이런 거 좋아하시면, 대표님 드릴게요.”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승제가 그녀의 턱을 끌어당겼고, 혜인은 아파 얼굴을 찌푸렸다.“많이도 아니고 단지 이틀을 못 본 것뿐이었는데, 그렇게나 목이 말랐어?”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혜인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다행히 그 물건들은 꼼꼼하게 포장이 된 것들이었다.“누구랑 쓰려고 이러는 건데?”혜인은 울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고 눈꼬리는 빨개져 몹시 불쌍하게 보였다.하지만 하필이면 그때 온수빈이 따라 나오며 외쳤다.“페니 씨.”반승제를 본 온수빈의 눈동자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승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기운은 온수빈으로 하여금 쉽게 건드릴 수 없겠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그러나 혜인이 그에게 턱을 잡혀 있는 심상치 않은 상황이 눈앞에 펼쳐져, 온수빈은 조금 망설이더니 이내 그들에게 다가갔다.승제
그녀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손으로 승제의 목을 감싸고 입술을 갖다 대 그에게 키스했다.그러나 앞선 승제와의 관계에서도 그녀는 늘 리드를 당하는 쪽이었기에 도대체 어떻게 더 깊게 나아가야 할지 알지 못했다.그녀의 갑작스러운 키스에 승제는 놀란 것도 잠시 이내 그녀를 자신의 몸 아래로 눕혀 깔았다.또다시 승제가 리드를 시작했다.그렇게 10분 정도 뜨거운 키스를 하고 나서야 혜인은 그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고 있던 혜인은 승제에게 물었다.“대표님, 괜찮으세요?”조금이나마 남아있었던 화가 깡그리 사라진 듯, 승제는 혜인의 얼굴을 보며 갑자기 입을 열었다.“나 결벽 있어.”“알아요.”“나랑 네 남편 빼고, 또 다른 남자랑 한 적 있어?”“아뇨.”그제야 승제는 만족스러운 듯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뒀고 옆에 있던 문을 열었다.“좋아, 일주일 쉬어.”“감사합니다, 대표님.”승제는 대답도 없이 바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혜인은 그를 따라나서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그는 갑자기 담배가 피고 싶어졌다.혜인이 키스를 하는 순간, 승제는 자신의 심장이 멈췄다가 다시 빠르게 뛰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그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정이었다.승제가 룸에 돌아오자 온시환은 술잔을 들며 얄밉게 말했다.“이렇게 빨리? 반승제 안 되겠네.”빠르다, 안된다는 남자에게 있어서 굴욕적인 단어였다.“꺼져.”온시환이 아래 우로 쓱 훑어보더니 곁에 있던 휴지를 뽑아 건네줬고 승제는 그를 한번 힐끗 바라보았다.그러자 시환이 눈썹을 추켜올리며 말했다.“입에 묻어있는 립스틱을 개의치 않는다면 닦지 않아도 돼.”휴지를 건네받아 승제가 입가를 한번 닦자 정말 빨간 립스틱이 묻어나왔다.‘뭐야, 오늘은 립스틱을 전보다 더 짙게 발랐잖아?’서주혁은 조금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너 진짜 그 디자이너랑 한 거야?”승제는 그 휴지를 손바닥 안에 구겨 넣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혜인은 꼭대기 층에 있으면서 민지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은 먼저 돌아간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다시는 남자를 소개해주지 말라는 말도 잊지 않고 전했다.그러면서 자신이 이곳에 갇혀있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승제가 오지 않으면 청소하는 사람이 와서 어쨌든 발견될 거니까 말이다.혜인은 벽에 기대에 복도에 앉아있었다. 오늘 밤 하이힐을 신고 오래 서 있는 탓에 발이 아팠다.그때 복도에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 혜인이 급히 머리를 들어보니 다름 아닌 승제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혜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러고는 약간 억울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반 대표님.”그녀는 차마 승제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혹시라도 밉보이면 자신도 PW사와 같은 결과를 맞이할지 몰랐기 때문이다.승제는 그녀의 곁에 서더니 몇 초가 지나서야 말을 꺼냈다.“가자.”이번에 혜인은 또다시 여기에 혼자 남겨질까 봐 승제를 바짝 따라나섰고 두 사람은 그 길로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혜인은 지하주차장에 도착하자 지난번의 일이 생각나 뭔가 마음이 불편해졌다.승제는 문을 열어주며 올라타라고 손짓했다.그러자 혜인이 시선을 피하고 머뭇거리며 말했다.“일주일 쉬어도 된다고 대표님이 얘기하시지 않았나요...?”승제는 눈썹을 추켜올리며 잠깐 피식 웃더니 이내 멈췄다.“너 데려다주려는 거야.”그제야 혜인은 한숨을 돌리며 부담 없이 차에 올라탔고 스스로 안전벨트를 맸다.승제는 운전석에 앉아 능숙하게 후진을 하며 스카이웨어를 떠났다.신호등을 기다리며 승제가 손수건을 건네주자 혜인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립스틱.”오늘 밤 나오며 짙게 발랐던 립스틱이 승제와 10분간 진한 키스를 나누며 엉망이 되어버렸다.혜인은 손수건을 받아들고 고개를 숙여 입술을 닦았다. 얼마 안 지나 그녀의 입술은 다시 자연색을 띠었다.그때 민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혜인아 너 집 돌아간 거 아니었어? 왜 로즈가든에 누구도 문 열어주는 사람이 없어?”혜인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
혜인이와 즐겁게 케이크를 다 먹고 민지는 떠났다.혜인은 홀로 날이 밝을 때까지 잤고 깨어나서는 겨울이를 보러 성씨 별장으로 향했다.사실 혜인은 이미 성휘를 병원에 며칠 동안 더 입원시켰었다. 하지만 오늘 딸과 생일을 함께 보내기 위해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예전에는 아빠인 성휘가 매번 생일을 함께 보내줬었는데, 혜인은 그게 참 즐거웠다.그러나 시간이 많이 지나 나이가 든 다음에는 조금 어색해졌다. 부녀는 마주 앉아 서로 바라보았고 그들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이 침묵만이 흘렀다.오늘 성휘는 요리사에게 맛있는 반찬을 여러 가지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한편, 지난번 혜인에게 쪽을 당한 성훈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그의 두 아들은 취업도 못 한 반면, 자신의 큰 형은 큰 별장에서 살고 있는 사실이 떠오르면 질투가 나 미쳐버릴 것 같았다.성훈은 라정옥에게 말했다.“엄마, 가만 보면 성혜인 그 계집애 형님을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것 같지 않아요? 형님한테서 그런 애가 나왔다기에는 너무 예쁘잖아요. 임지연이 다른 남자랑 놀아나서 생긴 애일 수도 있어요.”그 말을 들은 라정옥이 두 눈을 크게 떴다.“아들, 그게 무슨 말이야?”“나는 성혜인이 큰형 친딸이 아니고 임지연 그 여우 같은 여자랑 다른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애 같아요. 그래서 안 그래도 떠나서 올 때 성혜인 머리카락을 몇 가닥 가지고 와서 형님이랑 친자확인을 맡겨놨어요.”성훈의 얼굴은 음흉하기 그지없었다.“만약 성혜인이 큰형 아이가 아니라면, 소윤이랑 성혜원도 다 잡혀갔지, 성한이라는 애는 식물인간이 됐다잖아요? 제 아들이 당연하게 성씨 집안의 재산을 물려받게 될 거예요.”자기 아들이 이런 심오한 계획을 꾸미고 있을 줄 상상하지 못한 라정옥은 너무 흥분된 나머지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래서, 결과는 나왔어?”“아마 곧 나올 거예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집 문을 두드렸다. 병원에서 친자확인 보고서를 집으로 보내준 것이었다.성훈은 서둘러 보고서를 뜯어보았고 제일
공지민은 며칠 동안 별장에서 먹는 것 빼고는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별장 주변 화원을 구경하며 조용하게 있었다.고용인 아줌마는 거의 그림자처럼 공지민을 따라다녔고 매일 있었던 일들을 연승혁에게 보고했다.연승혁은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을거로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은 좀 까다로워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연승혁은 운 좋게 살아남았던 시한폭탄 같은 그 사람을 빨리 찾아 죽여야만 했지만, 부하들의 추적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동쪽에서 신호가 잡혔다가 얼마 안돼서 다시 서쪽에서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부하들이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니었더라면 연승혁은 자신이 지금 그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 먼거 리를 움직일 수 있었을가.이것은 분명 그를 제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 끌려는 작전인 듯했다.연승혁은 원수가 너무 많아 누가 저지른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초조해 지기 시작했지만, 공지민의 일거일동을 보고 받을 때마다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저녁 무렵, 공지민은 직접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어 원망의 말투로 말했다.“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정말 심심해 미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나 좀 데리고 놀라고 하면 안 돼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줄곧 별장에서 연승혁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연승혁은 하루면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며칠을 지체하게 되어 공지민 홀로 집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공지민은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예전에 난 직업도 없이 오빠가 날 먹여 살린 거예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아무런 의욕이 없이 먹기만 했었고 누구도 먼저 연락해 찾은 일도 없어서 자신이 직업도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만약 출근하던 사람이 었으면 며칠 동안이나 사라졌는데 사장님이 직원들더러 연락해보라고 하지 않았을까.연승혁은 사람을 시켜 공지민을 데리고 밖에 나가 바람도 씌우게 하고 싶었지만 온시환이랑 부딪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온시환은 거의 매일 열 몇
“맛있어, 먹고 싶으면 이따 저녁에 나가서 먹자.”동생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런 염정아가 걱정되어 소매를 잡으며 위로하려 했지만, 옷을 더럽힐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누나, 일하는 거 힘들지?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 우리한테 햄버거도 사주고 저녁에도 좋은 거 먹으러 가자고 하겠어.”염정아는 손을 들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번에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사장도 엄청 좋은 사람이고 월급도 많이 줘.”동생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햄버거를 계속해서 허겁지겁 먹어댔다.염정아는 공지민의 계획에 피해라도 줄까 봐 내일 돌아가야 해서 오늘 저녁밖에 시간이 없었다.아이들은 모두 배가 불룩하게 나와서야 밥상에서 일어섰고 동생은 배가 부름에도 토할 정도로 그냥 먹고 있었다.염정아는 동생의 손에 남은 햄버거를 뺏으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배부르면 먹지 말라고, 왜 아직도 그 습관 못 버려?”“오늘 안 먹으면 다음엔 없을가봐...”“이젠 그런 걱정 하지 마. 내 말만 잘 들으면 앞으로 쭉 있을 거야.”“그래, 누나 말 잘 들을게.”염정아는 웃으면서 남은 햄버거를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집에 있던 냉장고는 전에 중고로 샀던 거라 너무 작았고 티비도 화면이 매우 작아 아이들이 한데 모여야만 볼 수 있어서 염정아는 집에 온 틈을 타 냉장고랑 티비를 모두 새것으로 바꾸었다.새 티비는 백 인치라서 화면이 큰 소파에 앉아서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아이들은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췄고 젤 작은 막내 둘까지 신이 나서 소파 위로 기어 올라갔다.염정아는 집 안에 있는 모든것 들을 교환하고 정리 한 다음 몇 시간이 지나 아이들을 데리고 랍스타 먹으러 나섰다.식당에 도착하자 동생은 낯선 환경이라 염정아 곁에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아이들도 처음 보는 주변의 분위기에 큰 소리로 말도 못 하고 있자 염정아는 바로 조용한 방으로 예약해 메뉴판에 있는 음식을 하나씩 전부 주문했
동생의 연락을 받은 염정아는 아이들 생각에 먼저 공지민한테 연락하고 싶었지만, 둘 사이의 약속 때문에 연락도 못하고 결국 온시환에게 연락하게 된 것이였다.염정아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뜸들이며 못하고 있자 온시환은 그녀가 집을 그리워하는 눈치를 채고 말했다.“이틀 정도 지연되여도 괜찮을 거예요. 제가 사람 시켜 집에 데려다줄게요.”염정아는 그 순간 얼굴색이 밝아지며 눈시울을 붉혔다.“네, 고마워요 시환씨.”온시환은 말한 대로 그날 바로 사람 시켜 헬기로 염정아를 집에 데려다주었다.집에 도착한 염정아는 방문을 열고 동생이 아이들을 달래고 있는 것을 보았다.동생의 행동은 아주 서툴렀고 정상적인 사람들하고는 비교가 되지만 아이들이 그의 보살핌에 잘 커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염정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문 여는 소리를 듣고 동생은 바로 뒤돌아보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누나!”염정아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능숙하게 아이들한테 분유를 타 주고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동생은 염정아의 주변만 맴돌면서 금방 통화한 지 얼아도 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눈앞에 있다는 것을 보며 꿈만 같게 생각했다.주방을 보던 염정아는 초라하게 놓인 반찬 몇 가지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너희 요즘 이렇게만 먹은 거야?”동생은 눈빛이 조금 흔들리더니 1분 만에 잘못을 인정하고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시켜줬다고 자백했다.“미안해 누나,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먹고 싶어서 시켰어.”두 남매는 부모님들이 살아 계실 때만 햄버거를 먹어봤었고 지금의 그들에겐 이런 음식들은 사치품이였다.그때 염정아는 집을 나서면서 아래층 마트 아줌마한테 돈을 맡겨뒀는데 동생의 요구에 아줌마가 배달을 시켜준 듯 하였다.염정아는 이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먹고 싶으면 우리 오늘도 시켜 먹자.”4억, 그들은 지금 돈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고 공지민이 후에 또 몇천만을 주었다.동생은 또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너무 기쁜 나머지 바닥까지 밀고 닦기 시작했다.염정아는 빨
연승혁은 의자를 찾아 앉아 묵묵히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았고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공격해 온 해커의 추적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시간이 오래 걸리자 연승혁은 귀찮은 어조로 물었다.“얼마나 더 걸려야 되는 거니?”“형님, 이틀은 걸려야 될 듯 해요. 그쪽에서 언제 다시 움직일지 몰라 아직은 추적하기 어려워요. 일단 움직임이 있을 때 추적해 봐야 할것 같네요. 현재 상황에서 보아 신호는 100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잡히고 있으니 아마 해역 부근에 있는 것 같아요.”연승혁은 귀찮다는 듯 눈을 감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래.”연승혁은 제원의 별장에서 나오면서 고용인 아줌마한테 공지민을 잘 돌보라고 지시했다.공지민은 휴대전화를 연승혁에게 빼앗겨 당분간 외부와 연락할 수 없었고 별장에 있는 아줌마는 매일 그녀의 건강 상태를 관찰하며 잘 돌봐주었다.이것 또한 연승혁이 지시한 일이었고 그는 이렇게 감시하며 공지민의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지켜보고 있었다.별장에서 하루 종일 자고 일어난 공지민은 아줌마가 연승혁에게 회보하며 온시환이 정문 밖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회장님, 저 사람 들여보낼까요?”연승혁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지만 아줌마는 알았다는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시간은 벌써 저녁 무렵이 되었고 공지민은 온 하루 별장 안에만 있었다.온시환은 며칠 동안 공지민의 소식이 끊기자 걱정되어 그녀의 집에 찾아갔지만 할머님의 말에 의하면 공지민은 요 며칠 사람도 보이지 않고 통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다.많이 불안해진 온시환은 공지민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지만 역시 받는 사람이 없었다.당연히 온시환은 공지민의 휴대전화가 연승혁의 손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연승혁은 공지민의 휴대전화에 뜬 온시환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왠지 모를 불편한 마음이 또다시 생기게 되었다.그러고는 휴대전화를 옆에 두고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연씨 가문은 외래인 출입 금지라서 들어가지도 못한 온시환은 차에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 시각 염정
날은 이미 저물었고 조용한 공간엔 선남선녀 둘뿐이라 음침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승혁은 이건 자신이 시작한 게임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공지민이 단순하게 행동 할수록 그녀를 덮치고 싶은 사악한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고 누나라 해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있는 한 아무나 그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연승혁의 시선은 공지민으로 향했고 쇄골로 부터 아래로 내리 훑어보며 얇은 슬리퍼 한 켤레만 신어 은은한 분홍빛을 드러낸 발등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듯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일이 생긴 거 맞아. 나가서 해결해 봐야 할것 같아.”연승혁은 마음속으로 며칠 후에 돌아와서도 공지민이 이대로 사람을 유혹하면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나중에 할머니께 천천히 설명하기로 생각했다.“오빠,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연승혁은 공지민이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붙을 줄은 몰라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말했다.“어딜 따라오겠다는 거야?”“오빠랑 떨어져서 있고 싶지 않아요. 잊고 지낸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오빠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요. 오빠한테 혹시 다른 여자라도 있나요?”“아니, 같이 가도 돼. 근데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필경 해결해야 할 일은 피를 보는 일이라서 걱정되는 듯하였다.“괜찮아요. 저 안 무서워요.”연승혁은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이라 공지민이 이 정도로 말하니 바로 데리고 집에서 나섰다.헬기에 탑승한 후 공지민은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연승혁은 계속 통화만 하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회답이 없자 연승혁은 바로 헬기를 먼저 착륙하게 하고 단번에 공지민을 안아 헬기에서 내렸다.“어떤 상황인지 내가 먼저 가서 상황을 좀 볼 테니 일단 집에 가만히 있어.”“오빠,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공지민의 말에 연승혁은 심장이 무언가에 꽉 잡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제야 자신이
연승혁은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생각했지만, 공지민이 소파로 이끌어 앉고 나서야 그나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공지민의 휴대전화는 이미 연승혁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는 전부 온시환에게서 걸려 온 것이였다.연승혁은 휴대전화를 다시 공지민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이 번호에 전화 걸어 최근 한 달 동안은 연씨 가문에서 할머님을 보살펴야 한다고 해.”공지민은 부재중으로 적힌 온시환이라는 이름을 보고 물었다.“이건 누구예요?”“네 친구야. 네가 어떻게 된 건지 걱정되어 연락이 온 같으니 내 말대로 문자 한 통 보내줘.”“알겠어요.”공지민은 머리를 끄덕이며 연승혁이 말한 대로 메세지를 작성하여 발송했다.하지만 회답은 바로 오지 않았고 몇분이 지나서야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걱정되니까 전화 좀 받아.”연승혁은 바로 휴대전화를 뺏어가 대충 한 줄로 답장을 보냈다.“걱정하지 말아요.”답장을 받은 온시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공지민이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온시환이 바다에 보낸 사람은 지금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고 오늘 밤 연승혁은 그쪽에서 명령을 받을 것이다.연승혁의 꼬리는 이미 잡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도 증인을 찾지 못한 것이다. 증인은 연승혁에 의해 불 속에 버려진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행방불명이고 이 사람만 찾으면 연승혁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지금 공지민은 혼자 움직이고 있는 듯 하였으나 그녀의 계획을 들은 적 없는 온시환은 매우 불안했다.온시환은 자신이 막지 않으면 공지민은 죽을 길밖에 없고 그녀 역시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럼 난? 단 일 분이라도 날 생각한 적 있었나?’온시환은 공지민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 항상 잘해주고 있는 자신을 거절할 방법이 없어서 함께 지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소파에 드러누운 온시환은 문자로 공지민이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지만, 연승혁한테 들킬까 봐 섣
연승혁은 온시환에게 술을 건네며 말했다.“결혼도 했으니 이제 좀 안심하지 그래? 누나는 연씨 가문의 사람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 태도도 한결 누그러졌잖아. 할머니를 돌보러 간다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돼? 설마 누가 누나를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온시환은 술잔을 비우고 몸을 뒤로 기대며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물었다.“그래서 원아정은 어떻게 처리할 거야?”“원래 해외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쳤어. 지금까지도 행방을 못 찾고 있어.”온시환은 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네 사람들 진짜 무능하네?”이 일은 연승혁 자신도 잘못 처리한 게 분명했기에 그는 드물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곳에 공지민이 없으니 흥미를 잃은 듯 지루해졌다.연승혁 역시 마음이 이곳을 떠나 있었다. 그는 이상우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집에 공지민이 있는데...’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어딘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술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단지 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또다시 선을 넘는 행동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이 게임은 분명 자신이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기분은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생소했다.그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켜고는 옆에 앉은 온시환을 흘깃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해, 온시환의 외모는 인정할 만했다. 여자 친구도 여럿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공지민도 그에게 그런 눈빛을 보냈던 적이 있지 않을까?그녀가 두 다리로 이 남자의 허리를 감싸안은 적은 없었을까?그런 생각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지고 묘한 불쾌감이 밀려왔다.연승혁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집으며 말없이 나갈 준비를 했다.이상우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연승혁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이상우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조금 떨어져서 걸어가며 말했다.“나
공지민의 눈빛은 너무 맑았다. 연승혁은 이런 순수함이 싫었다. 그는 예전부터 너무 깨끗한 것을 보면 망가뜨리고 싶어졌다.마치 과거 드라마 속 공지민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과도 같았다.지금은 상황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공지민은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은 그날 폐공장에서 보여주었던 농염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했다.“오빠, 저녁은 뭐 먹어요?”“네가 먹고 싶은 걸로. 내가 요리사에게 시킬게.”연승혁은 시선을 피하며 어둑한 눈빛을 감추고 소파로 가 앉았다. 공지민은 그의 꽁무니를 따라가 곁에 앉았다.“아무거나요.”그녀는 어느새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버렸다. 그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예전에 오빠를 좋아했던 건 오빠 얼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공지민은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선을 따라 손끝으로 훑더니, 손가락 끝이 그의 목젖을 스치듯 지나갔다.그 순간, 연승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무엇인가 가볍고도 날카로운 것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끝 온기가 은근히 탐이 났다.요리사가 저녁을 가져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공지민은 연승혁에게 같이 앉아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연승혁은 갑자기 나갈 일이 있다며 혼자서 먹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차에 앉은 연승혁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때 친구로부터 술자리에 오라는 연락이 와서 그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마침 그 자리에는 이상우도 나와 있었다.이상우는 여전히 금테 안경을 쓴 채 그를 보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연승혁은 평온한 얼굴로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원아정이 사라졌다는데, 그거 진짜야?”연승혁은 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응, 진짜야
공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진심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군요.”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굴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혼란과 미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려던 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바지를 벗긴 걸 생각하면 그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그날 폐공장에서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농염한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꼬아 올리며 보였던 그 요염한 눈빛은 숲속의 교활한 여우처럼 그를 현혹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공지민은 순수하고 멍한 토끼처럼 덫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장난일 뿐이었는데 어느새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이상우는 커튼을 닫고 손목시계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 연락해.”이상우와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였기에 그 정도의 약속은 자연스러웠다.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의 볼을 꼬집었다.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도톰한 볼은 꼬집을 때마다 화난 햄스터를 연상케 했다.방 안에 둘만 남았을 때 공지민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연승혁은 살짝 힘을 주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귀여워서. 다시 한번 오빠라고 불러볼래?”그날 폐공장에서 불렀던 것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이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평소에 제가 그렇게 불렀어요?”연승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그래.”“정말 오글거리네요.”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오빠.”공지민의 목소리는 지난번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이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지켜주고 싶어지는 느낌이 들었다.연승혁은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트는 걸 느꼈다. 손을 내리고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