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승제가 자신의 아내를 어떻게 대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단미가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단미라는 청순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그녀는 매우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다.아무 적의가 없는 척, 단미가 물었다.“그 사람은 너랑 이혼하면 아마 시집 못 가지 않을까? 반씨 가문에서 내쫓은 거나 다름없잖아.”승제는 불쾌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바로 밖에 준비된 차에 올라탔다.“나랑 무슨 상관이야.”단미도 서둘러 뒤따라 오르며 승제가 자신의 이런 ‘너그러운 마음씨’를 알아봐 주길 희망했다.“이혼하면 그 사람한테 재산 나눠줄 거야?”그 말을 들은 승제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성씨 가문이 반씨 가문에서 얻은 이득이 얼만데. 굳이 그래야 하나? 포레스트 별장도 그렇고 할아버지가 그 여자를 좋아해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런 조건인 집안에 시집가는 건 꿈도 못 꿨을 거야.’그 여자가 생각나니 승제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해외에 있는 이틀 동안, 반태승은 승제에게 세 번이나 전화를 걸어 왜 혜인이와 같이 가지 않았냐고 물으며 그를 재촉했다.그 전화는 비행기를 타고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혹시 혜인이와 싸운 게냐?”승제는 누군가의 간섭을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반태승의 기침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그는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렸을 것이다.단언컨대, 이 세상 그 누구든 타인에 의해 압박감을 느끼면 모두 반항심리가 생길 것이다.심인우에게 호텔로 차를 몰아달라 부탁하려는데, 또 반태승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승제야, 내일 혜인이 생일인 거 알고 있지? 잊지 말고 꼭 생일 선물 준비하렴.”순간 표정이 어두워진 승제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대답했다.“알겠습니다, 할아버지”승제가 순순히 자신의 말에 따르자 반태승은 매우 흡족해했다. 반태승의 건강은 최근 더욱 악화되어 문밖을 나서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포레스트를 한 바퀴 둘러봤을 텐데 말이다.“어렸을 때 혜인이가 고생을 꽤나 해서... 생일 선물은 꼭
민지는 조금 기분이 언짢았다.“네가 숨긴 왜 숨어, 정작 숨어야 할 사람은 저 두 사람인데!”혜인은 민지를 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승제가 자신을 보지 못했는지 확인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지금은 나도 남편 몰래 남자 만나잖아, 누구도 떳떳하지 않다고.”그러자 민지가 피식하고 가볍게 웃어 보이더니 혜인의 어깨를 잡았다.“맞네, 맞아. 너도 이제 예전의 순진하기만 했던 성혜인이 아니라는 걸 내가 잠시 깜빡하고 있었네. 가자! 내가 룸을 예약해놨어. 오늘 밤 너에게 화려한 이 제원의 밤 생활을 보여주도록 하지.”지난번, 민지는 놀이공원을 통째로 빌려 혜인의 생일을 쇠주었다.어렸을 적 고생스럽게 큰 혜인은 이후 아빠 성휘의 사업이 서서히 일어서게 되면서 생활 여건이 조금 나아졌지만, 기쁨도 잠시 곧 그녀의 엄마가 돌아가시게 되었다.사업이 잘될수록 성휘는 점점 더 바빠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혜인이와 놀아주기보다는 그녀를 데리고 고객을 만나러 다니거나 세운 지 얼마 안 된 자신의 사무실에 데려가거나 하는 일이 훨씬 많았다.그곳은 한 무리의 중년 남성들이 미래를 얘기하며 피운 담배 연기로 가득한 곳이었고, 일찍 철이 들었던 혜인은 어른들을 방해하지 않고 얌전하게 있었다.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혜인이는 대부분 기숙사가 있는 학교를 선택했는데 이래야 성휘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성휘가 소윤과 재혼했고, 두 부녀 사이의 관계는 갈수록 멀어지게 되었다.어렸을 적 성휘는 혜인이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간 적이 있었다. 당시 그곳은 사람으로 붐볐고 혜인은 성휘의 어깨에 올라타 세 식구가 놀이공원을 한참이나 돌아다녔다.하지만 어린 혜인은 알지 못했다. 그때 엄마 임지연이 몸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놀이공원에 가보고 싶다는 딸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힘들게 버텼다는 것을.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안 혜인은 죄책감에 시달렸고 놀이공원에 더는 갈 생각이 사라졌었다. 그래서 여태까지 딱 두 번밖에 가보지 않았다.한 번은 가
서주혁은 이런 광경에 흥미가 없었는지 곧바로 그녀를 옆을 슥 지나 옆에 있는 룸으로 들어갔다.이런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땅에 떨어진 물건을 줍고 있는 자신이 혜인은 정말 존경스러워질 정도였다.온시환은 원래 그녀를 도와 땅에 떨어진 물건들을 주우려고 했는데 그때, 반승제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었다.“시환아, 먼저 들어가 봐.”시환은 눈썹을 추켜올리며 얄밉게 한마디 했다.“아이고, 재수가 없었네, 재수가.”혜인은 머리가 막 저려나는 것 같았다.‘민지가 정말 나를 결국 골로 보내는구나.’온시환이 자리를 뜨자, 이곳에는 반승제와 성혜인, 단 두 사람이 남게 되었다.한 작은 물건이 마침 승제의 발 옆에 떨어져 혜인이 주우려는데 그가 가죽구두로 그녀의 손을 살짝 짓밟았다.그러고는 몸을 숙여 혜인의 얼굴을 훑어보았다.혜인은 사실 억지로 버텨내는 중이었다. 그녀 역시 민지가 이런 선물을 준비했는지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혜인이 그 물건을 다 줍고 나서도, 반승제는 떠나지 않았다.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말했다.“혹시 이런 거 좋아하시면, 대표님 드릴게요.”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승제가 그녀의 턱을 끌어당겼고, 혜인은 아파 얼굴을 찌푸렸다.“많이도 아니고 단지 이틀을 못 본 것뿐이었는데, 그렇게나 목이 말랐어?”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혜인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다행히 그 물건들은 꼼꼼하게 포장이 된 것들이었다.“누구랑 쓰려고 이러는 건데?”혜인은 울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고 눈꼬리는 빨개져 몹시 불쌍하게 보였다.하지만 하필이면 그때 온수빈이 따라 나오며 외쳤다.“페니 씨.”반승제를 본 온수빈의 눈동자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승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기운은 온수빈으로 하여금 쉽게 건드릴 수 없겠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그러나 혜인이 그에게 턱을 잡혀 있는 심상치 않은 상황이 눈앞에 펼쳐져, 온수빈은 조금 망설이더니 이내 그들에게 다가갔다.승제
그녀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손으로 승제의 목을 감싸고 입술을 갖다 대 그에게 키스했다.그러나 앞선 승제와의 관계에서도 그녀는 늘 리드를 당하는 쪽이었기에 도대체 어떻게 더 깊게 나아가야 할지 알지 못했다.그녀의 갑작스러운 키스에 승제는 놀란 것도 잠시 이내 그녀를 자신의 몸 아래로 눕혀 깔았다.또다시 승제가 리드를 시작했다.그렇게 10분 정도 뜨거운 키스를 하고 나서야 혜인은 그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고 있던 혜인은 승제에게 물었다.“대표님, 괜찮으세요?”조금이나마 남아있었던 화가 깡그리 사라진 듯, 승제는 혜인의 얼굴을 보며 갑자기 입을 열었다.“나 결벽 있어.”“알아요.”“나랑 네 남편 빼고, 또 다른 남자랑 한 적 있어?”“아뇨.”그제야 승제는 만족스러운 듯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뒀고 옆에 있던 문을 열었다.“좋아, 일주일 쉬어.”“감사합니다, 대표님.”승제는 대답도 없이 바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혜인은 그를 따라나서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그는 갑자기 담배가 피고 싶어졌다.혜인이 키스를 하는 순간, 승제는 자신의 심장이 멈췄다가 다시 빠르게 뛰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그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정이었다.승제가 룸에 돌아오자 온시환은 술잔을 들며 얄밉게 말했다.“이렇게 빨리? 반승제 안 되겠네.”빠르다, 안된다는 남자에게 있어서 굴욕적인 단어였다.“꺼져.”온시환이 아래 우로 쓱 훑어보더니 곁에 있던 휴지를 뽑아 건네줬고 승제는 그를 한번 힐끗 바라보았다.그러자 시환이 눈썹을 추켜올리며 말했다.“입에 묻어있는 립스틱을 개의치 않는다면 닦지 않아도 돼.”휴지를 건네받아 승제가 입가를 한번 닦자 정말 빨간 립스틱이 묻어나왔다.‘뭐야, 오늘은 립스틱을 전보다 더 짙게 발랐잖아?’서주혁은 조금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너 진짜 그 디자이너랑 한 거야?”승제는 그 휴지를 손바닥 안에 구겨 넣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혜인은 꼭대기 층에 있으면서 민지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은 먼저 돌아간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다시는 남자를 소개해주지 말라는 말도 잊지 않고 전했다.그러면서 자신이 이곳에 갇혀있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승제가 오지 않으면 청소하는 사람이 와서 어쨌든 발견될 거니까 말이다.혜인은 벽에 기대에 복도에 앉아있었다. 오늘 밤 하이힐을 신고 오래 서 있는 탓에 발이 아팠다.그때 복도에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 혜인이 급히 머리를 들어보니 다름 아닌 승제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혜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러고는 약간 억울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반 대표님.”그녀는 차마 승제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혹시라도 밉보이면 자신도 PW사와 같은 결과를 맞이할지 몰랐기 때문이다.승제는 그녀의 곁에 서더니 몇 초가 지나서야 말을 꺼냈다.“가자.”이번에 혜인은 또다시 여기에 혼자 남겨질까 봐 승제를 바짝 따라나섰고 두 사람은 그 길로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혜인은 지하주차장에 도착하자 지난번의 일이 생각나 뭔가 마음이 불편해졌다.승제는 문을 열어주며 올라타라고 손짓했다.그러자 혜인이 시선을 피하고 머뭇거리며 말했다.“일주일 쉬어도 된다고 대표님이 얘기하시지 않았나요...?”승제는 눈썹을 추켜올리며 잠깐 피식 웃더니 이내 멈췄다.“너 데려다주려는 거야.”그제야 혜인은 한숨을 돌리며 부담 없이 차에 올라탔고 스스로 안전벨트를 맸다.승제는 운전석에 앉아 능숙하게 후진을 하며 스카이웨어를 떠났다.신호등을 기다리며 승제가 손수건을 건네주자 혜인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립스틱.”오늘 밤 나오며 짙게 발랐던 립스틱이 승제와 10분간 진한 키스를 나누며 엉망이 되어버렸다.혜인은 손수건을 받아들고 고개를 숙여 입술을 닦았다. 얼마 안 지나 그녀의 입술은 다시 자연색을 띠었다.그때 민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혜인아 너 집 돌아간 거 아니었어? 왜 로즈가든에 누구도 문 열어주는 사람이 없어?”혜인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
혜인이와 즐겁게 케이크를 다 먹고 민지는 떠났다.혜인은 홀로 날이 밝을 때까지 잤고 깨어나서는 겨울이를 보러 성씨 별장으로 향했다.사실 혜인은 이미 성휘를 병원에 며칠 동안 더 입원시켰었다. 하지만 오늘 딸과 생일을 함께 보내기 위해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예전에는 아빠인 성휘가 매번 생일을 함께 보내줬었는데, 혜인은 그게 참 즐거웠다.그러나 시간이 많이 지나 나이가 든 다음에는 조금 어색해졌다. 부녀는 마주 앉아 서로 바라보았고 그들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이 침묵만이 흘렀다.오늘 성휘는 요리사에게 맛있는 반찬을 여러 가지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한편, 지난번 혜인에게 쪽을 당한 성훈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그의 두 아들은 취업도 못 한 반면, 자신의 큰 형은 큰 별장에서 살고 있는 사실이 떠오르면 질투가 나 미쳐버릴 것 같았다.성훈은 라정옥에게 말했다.“엄마, 가만 보면 성혜인 그 계집애 형님을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것 같지 않아요? 형님한테서 그런 애가 나왔다기에는 너무 예쁘잖아요. 임지연이 다른 남자랑 놀아나서 생긴 애일 수도 있어요.”그 말을 들은 라정옥이 두 눈을 크게 떴다.“아들, 그게 무슨 말이야?”“나는 성혜인이 큰형 친딸이 아니고 임지연 그 여우 같은 여자랑 다른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애 같아요. 그래서 안 그래도 떠나서 올 때 성혜인 머리카락을 몇 가닥 가지고 와서 형님이랑 친자확인을 맡겨놨어요.”성훈의 얼굴은 음흉하기 그지없었다.“만약 성혜인이 큰형 아이가 아니라면, 소윤이랑 성혜원도 다 잡혀갔지, 성한이라는 애는 식물인간이 됐다잖아요? 제 아들이 당연하게 성씨 집안의 재산을 물려받게 될 거예요.”자기 아들이 이런 심오한 계획을 꾸미고 있을 줄 상상하지 못한 라정옥은 너무 흥분된 나머지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래서, 결과는 나왔어?”“아마 곧 나올 거예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집 문을 두드렸다. 병원에서 친자확인 보고서를 집으로 보내준 것이었다.성훈은 서둘러 보고서를 뜯어보았고 제일
성휘는 최근에 너무 많은 변고를 당했다. 쓰러진 그는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이미 병원 쪽과 얘기를 나눌 때 이제는 약물로밖에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들은 혜인은 더 병원에 있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가장 중요한 건 환자가 흥분시키지 않는 것이다.그러나 지금 성휘는 바로 피를 토하고 있었다.성훈과 라정옥은 득의양양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성휘가 죽고 나면 자신들이 재산을 물려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혜인이 성휘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자 의사에게 전화를 걸며 그녀에게 친자확인서를 보여줬다.라정옥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이만 나가봐도 된다. 성씨 집안 일은 너와 상관이 없어."말이 끝나자마자 혜인은 밖에 있는 보디가드들을 불렀다."이 사람들 빨리 끌고 나가주세요!"화가 난 라정옥은 찻주전자를 들어 그녀에게 던지려고 했다. 그러자 혜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라정옥을 째려보았다."저한테 그거 던지시면 보디가드들더러 당신 머리를 깨라고 할거예요."라정옥은 놀라 굳어버리더니 천천히 찻주전자를 내려놓았다.혜인은 성휘의 가슴을 살며시 두드려주며 의사가 오기를 기다렸다.그리고 세 사람은 이미 보디가드들에 의해 밖에 내보내졌다.성휘는 2층 침실 침대로 옮겨졌고 얼굴색은 더 창백해져 늙어 보였다.의사가 와 그의 상태를 점검해보았지만 별다른 소견 없이 충분히 휴식을 취하라는 말만 전할 뿐이었다.혜인은 자신의 머리카락과 성휘의 머리카락을 의사에게 건네주었다."친자확인 부탁드립니다. 결과가 나오면 수고스러운 대로 저에게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알겠습니다."혜인이 내려가 보니 도우미들이 성휘의 핏자국을 정리하는 중이었고 테이블 위의 음식들은 이미 차가워진 지 오랬다.그때, 누군가 보낸 택배가 도착했다."남편분께서 생일 선물을 보내셨습니다."'남편? 반승제?'지금 혜인의 기분은 말이 아니었다.'내가 아빠 딸이 아니라면, 내 가족들은 어디에 있지.'그러나 택배를 받아든 혜인은 마음
성혜인이 아무 말도 없는 것을 보고 성휘도 덩달아 머리를 숙였다.“내 손에 있는 35%의 지분은 혜원이에게 20%, 너에게 15%를 주마.”성혜인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어디에서나 버림받는 처지였다. 임동원 일가도, 반승제도, 심지어 아버지 성휘도... 그녀를 환영하는 사람은 없었다.그래도 한때는 누군가와 남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줄 알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역시 상대에게 설명 한마디 듣지 못한 채 버림받고 말았다.“혜인아, 지연이는 너를 위해 그림을 포기하고 나서 몸이 나빠졌던 거다.”성휘가 싸늘한 목소리로 뱉은 말에 성혜인은 완전히 제자리에 얼어붙었다.“네가 내 딸이 아니라면 당연히 지연이 딸도 아니겠지. 병원에서 실수로 아이를 바꿨을 수도 있겠구나. 우리의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니 네가 조사를 해내야 할 거다.”성휘는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나는 살 수 있는 날이 별로 없다. 의사의 말대로라면 이번에 퇴원하고 나서 딱 반년 정도 더 살 수 있겠구나.”성휘는 화살 같은 말 한마디 한마디로 성혜인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SY그룹의 운영을 책임지지 않고, 또 성휘와 임지연의 친자식을 찾지 못한다면 성씨 집안에도 임지연에게도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처럼 말이다.서천이라는 곳은 지금도 그렇지만 20년 전에는 남아선호사상이 극도로 심각했다. 딸을 낳든, 아들을 낳든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임지연이 유일했다.서천 교외의 길거리에는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여아를 담기 위한 바구니가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여아들은 길가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었다.만약 간호사의 실수로 아이가 바뀌었다면 임지연의 친딸은 지금쯤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 시절 여아의 생존율은 아주 낮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성휘가 딸을 낳은 임지연을 데리고 서천을 떠나 낯선 제원에 정착했겠는가?성휘와 임지연은 최선을 다해 사업에 몰두하며 성혜인을 모자람 없이 키우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친딸이 아니었다니... 성혜인은
날은 이미 저물었고 조용한 공간엔 선남선녀 둘뿐이라 음침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승혁은 이건 자신이 시작한 게임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공지민이 단순하게 행동 할수록 그녀를 덮치고 싶은 사악한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고 누나라 해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있는 한 아무나 그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연승혁의 시선은 공지민으로 향했고 쇄골로 부터 아래로 내리 훑어보며 얇은 슬리퍼 한 켤레만 신어 은은한 분홍빛을 드러낸 발등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듯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일이 생긴 거 맞아. 나가서 해결해 봐야 할것 같아.”연승혁은 마음속으로 며칠 후에 돌아와서도 공지민이 이대로 사람을 유혹하면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나중에 할머니께 천천히 설명하기로 생각했다.“오빠,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연승혁은 공지민이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붙을 줄은 몰라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말했다.“어딜 따라오겠다는 거야?”“오빠랑 떨어져서 있고 싶지 않아요. 잊고 지낸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오빠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요. 오빠한테 혹시 다른 여자라도 있나요?”“아니, 같이 가도 돼. 근데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필경 해결해야 할 일은 피를 보는 일이라서 걱정되는 듯하였다.“괜찮아요. 저 안 무서워요.”연승혁은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이라 공지민이 이 정도로 말하니 바로 데리고 집에서 나섰다.헬기에 탑승한 후 공지민은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연승혁은 계속 통화만 하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회답이 없자 연승혁은 바로 헬기를 먼저 착륙하게 하고 단번에 공지민을 안아 헬기에서 내렸다.“어떤 상황인지 내가 먼저 가서 상황을 좀 볼 테니 일단 집에 가만히 있어.”“오빠,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공지민의 말에 연승혁은 심장이 무언가에 꽉 잡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제야 자신이
연승혁은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생각했지만, 공지민이 소파로 이끌어 앉고 나서야 그나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공지민의 휴대전화는 이미 연승혁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는 전부 온시환에게서 걸려 온 것이였다.연승혁은 휴대전화를 다시 공지민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이 번호에 전화 걸어 최근 한 달 동안은 연씨 가문에서 할머님을 보살펴야 한다고 해.”공지민은 부재중으로 적힌 온시환이라는 이름을 보고 물었다.“이건 누구예요?”“네 친구야. 네가 어떻게 된 건지 걱정되어 연락이 온 같으니 내 말대로 문자 한 통 보내줘.”“알겠어요.”공지민은 머리를 끄덕이며 연승혁이 말한 대로 메세지를 작성하여 발송했다.하지만 회답은 바로 오지 않았고 몇분이 지나서야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걱정되니까 전화 좀 받아.”연승혁은 바로 휴대전화를 뺏어가 대충 한 줄로 답장을 보냈다.“걱정하지 말아요.”답장을 받은 온시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공지민이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온시환이 바다에 보낸 사람은 지금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고 오늘 밤 연승혁은 그쪽에서 명령을 받을 것이다.연승혁의 꼬리는 이미 잡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도 증인을 찾지 못한 것이다. 증인은 연승혁에 의해 불 속에 버려진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행방불명이고 이 사람만 찾으면 연승혁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지금 공지민은 혼자 움직이고 있는 듯 하였으나 그녀의 계획을 들은 적 없는 온시환은 매우 불안했다.온시환은 자신이 막지 않으면 공지민은 죽을 길밖에 없고 그녀 역시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럼 난? 단 일 분이라도 날 생각한 적 있었나?’온시환은 공지민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 항상 잘해주고 있는 자신을 거절할 방법이 없어서 함께 지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소파에 드러누운 온시환은 문자로 공지민이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지만, 연승혁한테 들킬까 봐 섣
연승혁은 온시환에게 술을 건네며 말했다.“결혼도 했으니 이제 좀 안심하지 그래? 누나는 연씨 가문의 사람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 태도도 한결 누그러졌잖아. 할머니를 돌보러 간다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돼? 설마 누가 누나를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온시환은 술잔을 비우고 몸을 뒤로 기대며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물었다.“그래서 원아정은 어떻게 처리할 거야?”“원래 해외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쳤어. 지금까지도 행방을 못 찾고 있어.”온시환은 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네 사람들 진짜 무능하네?”이 일은 연승혁 자신도 잘못 처리한 게 분명했기에 그는 드물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곳에 공지민이 없으니 흥미를 잃은 듯 지루해졌다.연승혁 역시 마음이 이곳을 떠나 있었다. 그는 이상우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집에 공지민이 있는데...’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어딘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술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단지 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또다시 선을 넘는 행동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이 게임은 분명 자신이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기분은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생소했다.그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켜고는 옆에 앉은 온시환을 흘깃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해, 온시환의 외모는 인정할 만했다. 여자 친구도 여럿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공지민도 그에게 그런 눈빛을 보냈던 적이 있지 않을까?그녀가 두 다리로 이 남자의 허리를 감싸안은 적은 없었을까?그런 생각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지고 묘한 불쾌감이 밀려왔다.연승혁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집으며 말없이 나갈 준비를 했다.이상우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연승혁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이상우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조금 떨어져서 걸어가며 말했다.“나
공지민의 눈빛은 너무 맑았다. 연승혁은 이런 순수함이 싫었다. 그는 예전부터 너무 깨끗한 것을 보면 망가뜨리고 싶어졌다.마치 과거 드라마 속 공지민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과도 같았다.지금은 상황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공지민은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은 그날 폐공장에서 보여주었던 농염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했다.“오빠, 저녁은 뭐 먹어요?”“네가 먹고 싶은 걸로. 내가 요리사에게 시킬게.”연승혁은 시선을 피하며 어둑한 눈빛을 감추고 소파로 가 앉았다. 공지민은 그의 꽁무니를 따라가 곁에 앉았다.“아무거나요.”그녀는 어느새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버렸다. 그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예전에 오빠를 좋아했던 건 오빠 얼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공지민은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선을 따라 손끝으로 훑더니, 손가락 끝이 그의 목젖을 스치듯 지나갔다.그 순간, 연승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무엇인가 가볍고도 날카로운 것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끝 온기가 은근히 탐이 났다.요리사가 저녁을 가져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공지민은 연승혁에게 같이 앉아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연승혁은 갑자기 나갈 일이 있다며 혼자서 먹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차에 앉은 연승혁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때 친구로부터 술자리에 오라는 연락이 와서 그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마침 그 자리에는 이상우도 나와 있었다.이상우는 여전히 금테 안경을 쓴 채 그를 보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연승혁은 평온한 얼굴로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원아정이 사라졌다는데, 그거 진짜야?”연승혁은 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응, 진짜야
공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진심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군요.”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굴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혼란과 미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려던 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바지를 벗긴 걸 생각하면 그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그날 폐공장에서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농염한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꼬아 올리며 보였던 그 요염한 눈빛은 숲속의 교활한 여우처럼 그를 현혹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공지민은 순수하고 멍한 토끼처럼 덫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장난일 뿐이었는데 어느새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이상우는 커튼을 닫고 손목시계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 연락해.”이상우와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였기에 그 정도의 약속은 자연스러웠다.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의 볼을 꼬집었다.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도톰한 볼은 꼬집을 때마다 화난 햄스터를 연상케 했다.방 안에 둘만 남았을 때 공지민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연승혁은 살짝 힘을 주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귀여워서. 다시 한번 오빠라고 불러볼래?”그날 폐공장에서 불렀던 것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이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평소에 제가 그렇게 불렀어요?”연승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그래.”“정말 오글거리네요.”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오빠.”공지민의 목소리는 지난번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이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지켜주고 싶어지는 느낌이 들었다.연승혁은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트는 걸 느꼈다. 손을 내리고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꽤 재미있다
[원진과는 이미 연락했어요. 원진도 원아정을 해외로 보내는 데 동의했어요. 다만 문제는 원아정이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당장은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거예요.][흥, 그 정도는 해줘야지.]연승혁은 이 메시지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공지민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얼굴에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 역력했다.그녀의 시선은 곧장 연승혁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는 금테 안경을 쓴 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첫눈에도 지적이고 세련된 인상을 풍겼다.‘분명 낯익은 얼굴인데... 어디서 봤지?’연승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소개했다.“이쪽은 내 친한 친구, 이상우예요.”순간 공지민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이상우, 이 사람은 과거 그녀가 찾아갔던 유명한 최면술사의 수제자였다.최근 그 대가가 은퇴하고 이제 그의 제자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었었다.공지민은 아무 일도 없는 척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공지민입니다.”하지만 이상우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과거 그녀와 짧은 시간 교류한 적이 있었고 그때 그는 그녀를 최면하려 했지만 실패했었다. 그의 스승은 공지민의 마음속 집착이 너무 깊어 최면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었다.더군다나 스승과 함께 수련하던 한 달 동안, 이상우는 공지민에게 진지하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녀가 마음속 그 사람을 잊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했었다.지금 이 순간, 공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이상우의 손을 잡았다.“안녕하세요.”이상우는 한순간 흔들리는 눈빛을 감췄다. 그리고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승혁이한테서 얘기 들었어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면서요. 오늘 저랑 편하게 얘기 나눠보실래요?”얘기를 나누자는 말은 곧 그녀를 최면에 빠뜨리겠다는 의미였다.공지민은 그제야 연승혁을 흘깃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신경 써줘서 고마워요.”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는 걸 알 리가 없는 연승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앉아요, 누나.”공지민은 자리에 앉
원아정은 팔꿈치로 미친 듯이 차창을 내리치며 동시에 운전대를 잡아당겼다. 게다가 뒤따라오는 경찰도 따돌리지 못하자 운전자는 결국 공항으로 가는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차는 이리저리 우회하며 간신히 경찰들을 따돌렸지만 결국 사람들로 붐비는 번잡한 지역에 들어서고 말았다.원아정은 문을 발로 차며 열고는 곧장 밖으로 내달렸다. 그녀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그녀의 날카로운 비명은 순식간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지나가던 행인들이 달려들어 경호운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경호원들은 이마에 땀이 맺히며 초조하게 멀어져가는 원아정을 바라보았다. 여자 하나를 공항까지 데려가라는 지시였을 뿐인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을까.진작에 마취라도 시킬 걸 싶었지만 마취한 상태로는 공항 보안검색을 통과할 수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결국 운전자는 급히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들은 연승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겨우 이런 일도 제대로 처리 못 해?”경호원들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연승혁은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됐어. 다음 기회에 다시 처리하면 되니까. 우선 원진에게 이 일을 설명해야겠군.”원진만 동의하면 원아정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떠나야 할 운명이었다....원아정은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공지민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다 그년 때문이야. 그년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나는 연승혁과 결혼해서 상류층 생활을 하고 있었을 텐데... 이런 꼴을 당할 필요도 없었어.’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이전의 공지민은 그저 그녀 발밑에 있는 하찮은 존재였는데, 이제 상황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원아정은 허름하고 지저분한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지나가던 노숙자와 옷을 바꿔 입은 뒤, 다시 나왔을 때 그녀는 초라하고 누더기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거리를 전전하며 숨어 지
하지만 연승혁은 이 일을 아주 은밀하게 처리했다고 확신했다. 게다가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으니 고작 연예계에서 떠도는 무명 배우에 불과한 공지민이 진실을 알아낼 리 없었다.설령 나중에 공지민이 온시환과 얽혔다 해도, 온시환이 처음부터 그녀를 장난감처럼 여겼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를 위해 이런 일을 조사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연승혁은 지금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는 공지민이 아직 진실을 모르고 진짜 연씨 가문의 딸이며 구은우와의 관계는 그저 악연일 뿐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공지민이 모든 일을 계획해 구은우의 복수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연승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만약 후자라면 이거야말로 정말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최근 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평온했다. 그런데 이렇게 흥미진진한 일이 불쑥 나타나다니.그는 안정숙을 찾아가 당시 진행했던 두 번의 유전자 검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했다.하나는 머리카락을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공지민이 쓰레기통에 버린 이쑤시개를 쓴 결과라는 말을 들은 연승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만약 이 정도까지 속일 수 있다면, 공지민도 참 대단한 사람이겠네.’“승혁아, 난 이제 나이가 많아서 이런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너 솔직히 말해봐. 원아정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있긴 한 거니?”“가능성은 있어요. 하지만 할머니가 진행한 두 번의 친자 검사는 꽤 신뢰할 만한 결과잖아요. 그런 걸 조작하는 건 쉽지 않죠.”“휴,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일인지 원... 난 그저 내 손녀를 찾고 싶었을 뿐인데.”“할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걱정하지 말라니! 내가 어떻게 걱정 안 할 수 있겠니!”안정숙은 화가 난 듯 지팡이를 힘껏 바닥에 내리찍었다.“네가 조사한 구은우에 대한 자료, 나도 봤어. 그 아이 정말 뛰어난 사람이더라. 만약 지민이가 정말 그 아이를 좋아했고, 열여덟이나 열아홉 살에 잃었다면? 너 같으면 그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사람을 잊을 수 있겠니
연승혁을 마주했을 때 원아정의 눈가에 잠시 상처받은 기색이 스쳤다.“오빠...”하지만 연승혁은 등을 기대며 차갑게 말했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쓸데없는 감성팔이를 하려는 거라면, 당장 사람 불러서 쫓아낼 테니까.”원아정은 그가 얼마나 냉정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애써 꾸며낸 애잔함도 순식간에 거둬들였다.연승혁이 옆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조용히 자리에 앉은 원아정은 이내 평소의 얼굴빛을 되찾았다.그때 안정숙이 입을 열었다.“마침 승혁이도 있으니, 구은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보거라.”애초에 원아정은 이 일을 말하려고 온 터였다. 그녀는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좋아요. 오늘 저도 그 얘기를 하려고 왔으니까요.”그녀는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 남자의 눈매는 연승혁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안정숙과 연승혁 모두 한눈에 알아챘다. 이 남자는 분명 연씨 가문의 핏줄이었다.이미 벼랑 끝에 선 원아정은 더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만약 공지민을 끌어내리지 못한다면 자신이 해외로 쫓겨날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승혁 오빠, 이 얼굴 잘 보세요. 연씨 가문이 큰 혼란에 휩싸였던 그때, 제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시죠? 아버님께서 밖에 아들을 하나 두셨다고요. 물론 그건 아버님 잘못이 아니었어요. 그 모든 게 누군가가 꾸민 계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머님이 그 일을 평생 떨쳐내지 못하신 이유가 뭔지 아세요? 언니가 실종된 것도 큰 상처였지만 아버님이 다른 여자를 품었다는 사실은 어머님께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었어요. 그 상처가 결국 평생 지워지지 않는 한으로 남은 거죠. 그리고 어머님께서는 그 여자가 임신한 걸 알고도 가만두지 않으셨어요. 그 여자는 목숨을 건져 간신히 도망쳤고, 결국 아이를 낳았어요. 그 아이가 바로 구은우예요. 그러니까 구은우는 승혁 오빠의 이복동생이라는 말이에요.”연승혁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는 담배를 꺼내려다 안정숙의 시선을 의식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