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손으로 승제의 목을 감싸고 입술을 갖다 대 그에게 키스했다.그러나 앞선 승제와의 관계에서도 그녀는 늘 리드를 당하는 쪽이었기에 도대체 어떻게 더 깊게 나아가야 할지 알지 못했다.그녀의 갑작스러운 키스에 승제는 놀란 것도 잠시 이내 그녀를 자신의 몸 아래로 눕혀 깔았다.또다시 승제가 리드를 시작했다.그렇게 10분 정도 뜨거운 키스를 하고 나서야 혜인은 그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고 있던 혜인은 승제에게 물었다.“대표님, 괜찮으세요?”조금이나마 남아있었던 화가 깡그리 사라진 듯, 승제는 혜인의 얼굴을 보며 갑자기 입을 열었다.“나 결벽 있어.”“알아요.”“나랑 네 남편 빼고, 또 다른 남자랑 한 적 있어?”“아뇨.”그제야 승제는 만족스러운 듯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뒀고 옆에 있던 문을 열었다.“좋아, 일주일 쉬어.”“감사합니다, 대표님.”승제는 대답도 없이 바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혜인은 그를 따라나서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그는 갑자기 담배가 피고 싶어졌다.혜인이 키스를 하는 순간, 승제는 자신의 심장이 멈췄다가 다시 빠르게 뛰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그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정이었다.승제가 룸에 돌아오자 온시환은 술잔을 들며 얄밉게 말했다.“이렇게 빨리? 반승제 안 되겠네.”빠르다, 안된다는 남자에게 있어서 굴욕적인 단어였다.“꺼져.”온시환이 아래 우로 쓱 훑어보더니 곁에 있던 휴지를 뽑아 건네줬고 승제는 그를 한번 힐끗 바라보았다.그러자 시환이 눈썹을 추켜올리며 말했다.“입에 묻어있는 립스틱을 개의치 않는다면 닦지 않아도 돼.”휴지를 건네받아 승제가 입가를 한번 닦자 정말 빨간 립스틱이 묻어나왔다.‘뭐야, 오늘은 립스틱을 전보다 더 짙게 발랐잖아?’서주혁은 조금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너 진짜 그 디자이너랑 한 거야?”승제는 그 휴지를 손바닥 안에 구겨 넣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혜인은 꼭대기 층에 있으면서 민지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은 먼저 돌아간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다시는 남자를 소개해주지 말라는 말도 잊지 않고 전했다.그러면서 자신이 이곳에 갇혀있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승제가 오지 않으면 청소하는 사람이 와서 어쨌든 발견될 거니까 말이다.혜인은 벽에 기대에 복도에 앉아있었다. 오늘 밤 하이힐을 신고 오래 서 있는 탓에 발이 아팠다.그때 복도에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 혜인이 급히 머리를 들어보니 다름 아닌 승제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혜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러고는 약간 억울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반 대표님.”그녀는 차마 승제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혹시라도 밉보이면 자신도 PW사와 같은 결과를 맞이할지 몰랐기 때문이다.승제는 그녀의 곁에 서더니 몇 초가 지나서야 말을 꺼냈다.“가자.”이번에 혜인은 또다시 여기에 혼자 남겨질까 봐 승제를 바짝 따라나섰고 두 사람은 그 길로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혜인은 지하주차장에 도착하자 지난번의 일이 생각나 뭔가 마음이 불편해졌다.승제는 문을 열어주며 올라타라고 손짓했다.그러자 혜인이 시선을 피하고 머뭇거리며 말했다.“일주일 쉬어도 된다고 대표님이 얘기하시지 않았나요...?”승제는 눈썹을 추켜올리며 잠깐 피식 웃더니 이내 멈췄다.“너 데려다주려는 거야.”그제야 혜인은 한숨을 돌리며 부담 없이 차에 올라탔고 스스로 안전벨트를 맸다.승제는 운전석에 앉아 능숙하게 후진을 하며 스카이웨어를 떠났다.신호등을 기다리며 승제가 손수건을 건네주자 혜인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립스틱.”오늘 밤 나오며 짙게 발랐던 립스틱이 승제와 10분간 진한 키스를 나누며 엉망이 되어버렸다.혜인은 손수건을 받아들고 고개를 숙여 입술을 닦았다. 얼마 안 지나 그녀의 입술은 다시 자연색을 띠었다.그때 민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혜인아 너 집 돌아간 거 아니었어? 왜 로즈가든에 누구도 문 열어주는 사람이 없어?”혜인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
혜인이와 즐겁게 케이크를 다 먹고 민지는 떠났다.혜인은 홀로 날이 밝을 때까지 잤고 깨어나서는 겨울이를 보러 성씨 별장으로 향했다.사실 혜인은 이미 성휘를 병원에 며칠 동안 더 입원시켰었다. 하지만 오늘 딸과 생일을 함께 보내기 위해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예전에는 아빠인 성휘가 매번 생일을 함께 보내줬었는데, 혜인은 그게 참 즐거웠다.그러나 시간이 많이 지나 나이가 든 다음에는 조금 어색해졌다. 부녀는 마주 앉아 서로 바라보았고 그들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이 침묵만이 흘렀다.오늘 성휘는 요리사에게 맛있는 반찬을 여러 가지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한편, 지난번 혜인에게 쪽을 당한 성훈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그의 두 아들은 취업도 못 한 반면, 자신의 큰 형은 큰 별장에서 살고 있는 사실이 떠오르면 질투가 나 미쳐버릴 것 같았다.성훈은 라정옥에게 말했다.“엄마, 가만 보면 성혜인 그 계집애 형님을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것 같지 않아요? 형님한테서 그런 애가 나왔다기에는 너무 예쁘잖아요. 임지연이 다른 남자랑 놀아나서 생긴 애일 수도 있어요.”그 말을 들은 라정옥이 두 눈을 크게 떴다.“아들, 그게 무슨 말이야?”“나는 성혜인이 큰형 친딸이 아니고 임지연 그 여우 같은 여자랑 다른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애 같아요. 그래서 안 그래도 떠나서 올 때 성혜인 머리카락을 몇 가닥 가지고 와서 형님이랑 친자확인을 맡겨놨어요.”성훈의 얼굴은 음흉하기 그지없었다.“만약 성혜인이 큰형 아이가 아니라면, 소윤이랑 성혜원도 다 잡혀갔지, 성한이라는 애는 식물인간이 됐다잖아요? 제 아들이 당연하게 성씨 집안의 재산을 물려받게 될 거예요.”자기 아들이 이런 심오한 계획을 꾸미고 있을 줄 상상하지 못한 라정옥은 너무 흥분된 나머지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래서, 결과는 나왔어?”“아마 곧 나올 거예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집 문을 두드렸다. 병원에서 친자확인 보고서를 집으로 보내준 것이었다.성훈은 서둘러 보고서를 뜯어보았고 제일
성휘는 최근에 너무 많은 변고를 당했다. 쓰러진 그는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이미 병원 쪽과 얘기를 나눌 때 이제는 약물로밖에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들은 혜인은 더 병원에 있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가장 중요한 건 환자가 흥분시키지 않는 것이다.그러나 지금 성휘는 바로 피를 토하고 있었다.성훈과 라정옥은 득의양양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성휘가 죽고 나면 자신들이 재산을 물려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혜인이 성휘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자 의사에게 전화를 걸며 그녀에게 친자확인서를 보여줬다.라정옥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이만 나가봐도 된다. 성씨 집안 일은 너와 상관이 없어."말이 끝나자마자 혜인은 밖에 있는 보디가드들을 불렀다."이 사람들 빨리 끌고 나가주세요!"화가 난 라정옥은 찻주전자를 들어 그녀에게 던지려고 했다. 그러자 혜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라정옥을 째려보았다."저한테 그거 던지시면 보디가드들더러 당신 머리를 깨라고 할거예요."라정옥은 놀라 굳어버리더니 천천히 찻주전자를 내려놓았다.혜인은 성휘의 가슴을 살며시 두드려주며 의사가 오기를 기다렸다.그리고 세 사람은 이미 보디가드들에 의해 밖에 내보내졌다.성휘는 2층 침실 침대로 옮겨졌고 얼굴색은 더 창백해져 늙어 보였다.의사가 와 그의 상태를 점검해보았지만 별다른 소견 없이 충분히 휴식을 취하라는 말만 전할 뿐이었다.혜인은 자신의 머리카락과 성휘의 머리카락을 의사에게 건네주었다."친자확인 부탁드립니다. 결과가 나오면 수고스러운 대로 저에게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알겠습니다."혜인이 내려가 보니 도우미들이 성휘의 핏자국을 정리하는 중이었고 테이블 위의 음식들은 이미 차가워진 지 오랬다.그때, 누군가 보낸 택배가 도착했다."남편분께서 생일 선물을 보내셨습니다."'남편? 반승제?'지금 혜인의 기분은 말이 아니었다.'내가 아빠 딸이 아니라면, 내 가족들은 어디에 있지.'그러나 택배를 받아든 혜인은 마음
성혜인이 아무 말도 없는 것을 보고 성휘도 덩달아 머리를 숙였다.“내 손에 있는 35%의 지분은 혜원이에게 20%, 너에게 15%를 주마.”성혜인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어디에서나 버림받는 처지였다. 임동원 일가도, 반승제도, 심지어 아버지 성휘도... 그녀를 환영하는 사람은 없었다.그래도 한때는 누군가와 남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줄 알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역시 상대에게 설명 한마디 듣지 못한 채 버림받고 말았다.“혜인아, 지연이는 너를 위해 그림을 포기하고 나서 몸이 나빠졌던 거다.”성휘가 싸늘한 목소리로 뱉은 말에 성혜인은 완전히 제자리에 얼어붙었다.“네가 내 딸이 아니라면 당연히 지연이 딸도 아니겠지. 병원에서 실수로 아이를 바꿨을 수도 있겠구나. 우리의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니 네가 조사를 해내야 할 거다.”성휘는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나는 살 수 있는 날이 별로 없다. 의사의 말대로라면 이번에 퇴원하고 나서 딱 반년 정도 더 살 수 있겠구나.”성휘는 화살 같은 말 한마디 한마디로 성혜인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SY그룹의 운영을 책임지지 않고, 또 성휘와 임지연의 친자식을 찾지 못한다면 성씨 집안에도 임지연에게도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처럼 말이다.서천이라는 곳은 지금도 그렇지만 20년 전에는 남아선호사상이 극도로 심각했다. 딸을 낳든, 아들을 낳든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임지연이 유일했다.서천 교외의 길거리에는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여아를 담기 위한 바구니가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여아들은 길가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었다.만약 간호사의 실수로 아이가 바뀌었다면 임지연의 친딸은 지금쯤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 시절 여아의 생존율은 아주 낮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성휘가 딸을 낳은 임지연을 데리고 서천을 떠나 낯선 제원에 정착했겠는가?성휘와 임지연은 최선을 다해 사업에 몰두하며 성혜인을 모자람 없이 키우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친딸이 아니었다니... 성혜인은
성혜원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돌연 멈춰 서며 말했다.“이걸 어쩌나? 나는 20%의 지분을 받고 놀 일만 남았는데 너는 딸랑 15%를 받고 일하게 생겼네~ 이제 알겠지? 너는 더 이상 우리 집안사람이 아닌 직원이야. 20년의 세월도 피보다 진하지는 못하거든.”“...”“성혜인, 이제부터는 내 세상이야. 네가 죽든 살든 신경 쓸 사람은 없어. 물론 반승제도 마찬가지야.”성혜인은 말없이 운전해서 멀어져 갔다. 이번만큼은 그녀의 완벽한 패배였다.성혜원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이제 직원일 뿐이다. 임지연에게 갚을 은혜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그녀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로드가든의 주차장으로 들어갈 때 성혜인은 우체국의 전화를 받았다.“안녕하세요, 성혜인 씨. 오늘 배송하기로 등록된 6년 전의 선물이 있는데 현재 거주하시는 주소가 어떻게 되세요? 지금 바로 배송해 드릴게요.”‘선물? 그것도 6년 전에?’성혜인은 의아한 기분으로 로즈가든의 주소를 말하고는 겨울이와 함께 집으로 올라갔다.약 반 시간 후, 우체국에서 진짜로 물건을 보내왔다.성혜인은 사인을 하고 문을 닫았다. ‘선물’이라고 하는 것은 나무 상자였는데 세월의 흔적이 아주 진했다.우체국에서 20년 후의 자신에게 편지 보내기와 같은 활동을 하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성혜인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이런 것을 준비한 적이 없었다.나무 상자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성혜인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생일을 입력했고 뜻밖에도 자물쇠는 단번에 열렸다. 상자 속에는 반지, 편지, 그리고 낡은 노트가 있었다.「안녕, 혜인아.나는 도훈이야, 정도훈.네가 이 편지를 보고 있다는 것은 오늘이 네 생일이라는 뜻이겠네? 생일 축하해. 모든 생일을 함께 하기로 해 놓고 약속을 어겨서 미안해. 설마 요즘도 강가에 가서 몰래 우는 건 아니지?너라면 당연히 제원대학교에 입학했을 거라고 믿어. 학교에서 내 거짓말을 발견하고 욕도 많이 했겠지? 남자 친구가 되어 주겠다던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나는 아마 지금
반승제는 손을 들어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이것 때문에 나를 부른 거야?”“승우 형이 세상을 뜬 지가 언젠데, 윗분들은 아직도 행적을 조사하고 있어. 네 아버지도 마찬가지야. 생전 저택을 떠나 형에 관해 조사한 적 있다고 하더라. 아무래도 형이 엄청 중요한 자료를 남겨 놓은 모양인데, 그게 여자 친구 손에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 게다가 그 여자 친구는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물건을 손에 쥐고 있는지도 모를 거야.”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냈다.“승제야, 너 혹시 승우 형의 이상형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이상형이라도 알면 찾기 쉬울 것 같은데.”서주혁의 질문에도 반승제는 관심 없는 듯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서주혁은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그 자료를 찾으면 승우 형이 죽은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몰라.”반승제는 우뚝 멈춰서더니 미간을 구겼다. 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미 조사해 봤어. 형 주변에는 여자가 없었어.”“그래서 내가 이 노트들을 스캔하는 거 아니냐. 만약 10대 시절 연애를 했었다면 어딘가 흔적을 남겨 뒀을 게 분명해.”“결과 나오면 알려줘.”반승제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서주혁은 또다시 직원들에게 단 한 장의 노트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그는 연구소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반승우의 필체로 남긴 이성의 이름을 찾을 것이다.서주혁이 반승우의 일에 이토록 열정적인 이유는 이게 서씨 집안에서 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반승우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분주해졌는지 모른다.차에 올라탄 반승제는 운전대를 잡고 연구소에서 나섰다. 인적이 드문 시간의 십자로, 그의 곁에는 단 한 대의 차만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쯤 열린 창문 속에서는 성혜인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반승제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창문을 내리며 경적을 울렸다. 가만히 신호등을 주시하고 있던 성혜인은 갑
성혜인은 저도 모르게 운전대를 꽉 잡았다. 얼굴은 점점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얼마 후 반승제가 천천히 물러나고, 성혜인은 말없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머리를 숙였다.“페니야.”“네?”“너 언제 이혼할래?”반승제의 목소리가 저녁 바람과 함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반승제의 눈빛은 서서히 식어 갔다.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성혜인은 머리를 돌리며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런 말은 왜 하는 거예요?”키스의 여운으로 홍조를 띠는 얼굴과 달리 너무나도 차분한 말투였다. 그래서인지 반승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페니가 이혼하면 뭐? 내가 책임질 것도 아니잖아.’반승제는 미간을 구겼다. 자신이 성혜인과 하는 것을 서민규는 3년 전부터 시작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말 못 할 언짢음이 들기도 했다.“서민규는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대표님, 저희는 완전히 다른 두 세상에서 살고 있어요. 대표님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얻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죠? 지금 저를 향한 마음도 일시적인 호기심이라는 걸 잘 알아요. 그러니 저는 대표님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지금의 생활을 버릴 수가 없어요. 그거야말로 어리석은 선택이잖아요.”반승제는 조용히 자세를 바로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또다시 정적이 맴돌기 시작했다.이번에는 반승제가 먼저 예리한 시선을 거두며 느긋하게 물었다.“내가 너한테 호기심이 있다고 생각하나?”“아니라면 다행이에요. 그래야 후에 깔끔하게 헤어지죠.”성혜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자 반승제의 얼굴은 보기 좋게 굳어 갔다.반승제의 마음을 알기나 하는지 성혜인은 싱긋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저 오늘 진짜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성혜인은 단호하게 멀어져 갔다. 조금 전 키스를 나눈 사이라고는 보아 낼 수 없을 정도의 단호함이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이 떠난 다음에도 한참이나 제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인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