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미안해요. 아까는 당신이 너무 걱정돼서 말이 헛나왔어요.”성휘는 가슴을 움켜잡은 채로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견뎠다. 이번 일은 확실히 그의 실수였다. 그는 2차 융자가 끝난 시점에 찾아온 동창이 합작을 원하는 줄 알았다. 게다가 자신과 아는 사이여서, 성혜인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고 말았다.성휘는 어두운 표정으로 소윤을 향해 말했다.“누가 봐도 진심으로 한 말인데 헛나왔다고?”소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성휘가 진심으로 화난 것은 또 처음이었다.조희준이 한 일에 소윤의 말을 보태자, 이 모든 게 그녀가 원하는 일인 것처럼 들려왔다. 그래서 성휘는 딸을 대하던 자신의 태도를 진심으로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의 수많은 착각이 성혜인에게는 상처가 되었으니 말이다.성휘는 차가운 표정으로 위층에서 내려오는 성혜원을 바라봤다. 그녀는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듯 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휘의 화난 표정을 보고서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말했다.“아빠, 죄송해요. 혹시 저 때문에 언니랑 싸웠어요?”성혜원의 목소리를 듣고 나자, 성휘는 한결 진정되었다.성혜원은 성휘의 친딸이었고, 또 그의 망설임 때문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아픈 손가락이었다. 게다가 성혜원은 착하고 똑똑해서 성혜인과도 잘 지냈다.“너 때문이 아니야, 혜원아.”성혜원은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아래로 내려와 소윤과 팔짱을 꼈다.“아빠, 엄마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 엄마가 아빠 건강이 더 나빠질까 봐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아요? 엄마가 말은 그렇게 해도 마음은 따듯한 사람인 거 잘 아시잖아요.”성혜원은 간단한 말 몇 마디로 단번에 성휘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성휘는 말없이 소윤을 힐끗 노려보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거실에서 성혜원은 소윤을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앞으로는 말조심 좀 해요. 아빠는 바보가 아니에요. 급한 마음을 티 내면 금방 알아차릴 거라고요. 지금까지 잘 참아왔는데, 인제 와서 급해야 할 필요는 없어요.”소윤도 자기 잘못을 잘 알고 있었기
포레스트로 돌아온 성혜인은 밖에 차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반승제가 돌아왔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거의 도망가다시피 부랴부랴 포레스트의 대문을 나섰다.새로 이사한 집에는 수많은 문제가 있지, 성씨 저택에는 성혜인을 이용하지 못해 안달 난 가족이 있지, 포레스트에는 피하기에 급한 남편이 있지... 자신의 처량한 현실에 성혜인은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해 포레스트 근처의 벤치에 가서 앉았다.밤바람은 아주 시원했다. 하지만 성혜인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 그렇게 로즈가든으로 돌아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검은색 구두가 시선에 들어왔다.성혜인은 멈칫하며 머리를 들었다. 그러자 앞에 서서 머리를 숙이고 있는 반승제가 보였다. 그녀는 순간 다른 고민은 뒷전이고 정체를 들킨 건 아닌지부터 걱정했다.“페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본 줄 알았네.”‘페니는 왜 자꾸 포레스트 근처에 나타나는 거지? 저번처럼 강아지 산책하러 왔나?’성혜인은 머리를 굴리며 변명거리를 찾기 시작했다.“그게... 제가 아침에 밥을 사드린다고 했었잖아요. 오늘 마침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지나가다가 대표님한테 전화해 볼 참이었어요. 혹시 지금 시간 있는지 물어보려고요.”이곳의 조명은 분위기 좋게 어두운 편이었다. 그래서 성혜인의 그렁그렁한 눈빛이 더욱 티가 났다. 반승제는 그녀에게 속상한 일이 있겠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하지만 그녀는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듯 애써 숨기고 있었다.‘일 때문인가? 혹은... 가족?’반승제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 만났던 남자가 떠올랐다. 만약 그가 성혜인을 데리러 오지 않았더라면 평생 그런 사람과 성혜인을 엮지 않았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적어도 급은 맞아야 관계를 유지함에 있어서 더욱 편하기 때문이다.남자는 대학을 나오지 못한 데다가 생김새도 평범했고 낮은 월급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반대로 성혜인은 제원대 미대를 나왔을 뿐만 아니라 남다른 외모와 기품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디자인 한 번으로
성혜인의 태연한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치더니 머뭇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아, 네. 한두 번 정도는...”‘이런 레스토랑에 한두 번밖에 못 와봤다는 소리인가?’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남의 집안일이기 때문이다.반승제의 손가락은 자연스레 식탁 위에 놓여 있었고 무심한 듯 흩어져 있는 장미 꽃잎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뤘다. 성혜인은 집안일마저 잊고 그의 손가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얀 손가락과 빨간 꽃잎이 이토록 조화로울 줄은 또 몰랐다. 번뜩 떠오른 영감에 그녀는 자기 전에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반승제는 말없이 자기 손가락을 바라보는 성혜인을 관찰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감탄으로 가득했다. 그가 마침 말을 꺼내려고 할 때,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오는 남녀를 발견했다. 남자는 다름 아닌 서민규였다.서민규는 성혜인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함께 온 여자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가 교태롭게 팔짱을 끼고 작은 스킨십을 하면 그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두 사람은 구석진 곳에 자리 잡았다. 그러고는 서로의 손을 만지작대며 가끔 웃음을 터뜨렸다. 서민규는 발그레한 얼굴로 꽤 즐기는 듯해 보였다.여자는 서민규와 마찬가지로 BK 사의 직원이었다. 서민규는 부서에서 꽤 활발하게 일했지만, 단 한 번도 가정 형편에 대해 말한 적 없었기에 관심을 품고 다가오는 여자가 없었다. 요즘 같은 세월에서는 가정 형편을 우선시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숨기기만 하는 서민규는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졌다.오늘 밤 여자는 택시를 기다리고 있다가 1억짜리 벤츠를 모는 서민규를 발견했다. 한 달에 몇십만 원밖에 못 버는 월급쟁이가 벤츠를 몰고 다는 걸 보면 분명히 가정 형편이 좋을 것이다. 어쩌면 제원에 부동산이 있을지도 몰랐다.여자는 일을 핑계로 서민규와 함께 레스토랑에 왔다. 여자에게 먼저 대시를 받아본 적 없는 서민규는 이게 다 벤츠 덕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평범한 생김새에 돈까지 없는 그를 가
성혜인은 정열적으로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돌렸다.“죄송해요, 대표님. 제가 괜히 이곳으로 와서 대표님의 눈을 더럽혔네요.”이런 곳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다니, 부끄러움은 타인의 몫이었다.성혜인은 꽤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우연한 사고로 반승제와 하룻밤을 보낸 것 외에는 남자와 접촉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눈이 감길 정도로 어색하기만 했다.여자는 서민규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래서 성혜인의 각도에서는 여자의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가려져 있어서 도무지 서민규라는 것을 알아볼 수 없었다.반승제는 드디어 성혜인의 화난 모습을 구경하나 했는데 이런 말을 들은 줄은 몰랐다. 그는 약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성혜인을 바라봤고, 성혜인은 의아할 따름이었다.‘혹시 음식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반승제는 수저를 건드리지도 않고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의 자태는 아주 우아했고, 마침 머리 위에서 떨어진 조명 덕분에 더욱 고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시간이 늦었는데 남편한테 전화 안 해도 돼?”잠시 후, 뒤에서 익숙한 벨 소리가 들려오면 자신의 상황을 알아차리지 않을까 싶어서 한 말이었다.반승제는 다른 사람의 집안일에 관여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하지만 직접 목격한 이상 무시할 수는 없었다. 성혜인의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표정을 보니, 그는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그 냉철한 사람이 사랑 앞에서는 바보같이 행동하니 말이다.“아니에요. 지금쯤이면 아마 야근하고 있을 거예요.”‘그래, 아주 전형적인 핑계지.’이런 일을 처음 겪은 반승제는 말없이 창밖만 바라봤다.“그럼 식사를 시작할까요?”성혜인은 반승제가 한 입도 먹지 않은 것을 보고 입맛에 맞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배가 고팠던 그녀는 이것저것 몇 입 먹고는 바로 계산하러 갔다.서민규와 여자는 카운터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성혜인이 카운터로 가면서 무조건 마주치게 된다. 반승제는 말리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성혜인은
성혜인은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내일 서천으로 가야 하니 오늘 어디에서 묵든 다 상관없었다. 굳이 포레스트로 가 반승제의 눈을 피해 다닐 바에는 로즈가든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성혜인은 로즈가든에 도착해 따뜻한 물에 씻고 나와 휴식을 취하려 했다.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가 문을 부실 듯이 두드렸다.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문 앞에 도착해 보니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임남호와 얽힌 그 여자였다.여자는 오늘 민낯이었지만 두툼한 눈썹과 아이라인 문신을 해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야, 이 나쁜 년아! 문 열어!”여자는 있는 힘을 다해 문을 두드렸다. 당장이라도 문을 뚫고 들어올 기세였다.하지만 이 튼튼한 문이 망가지는 것보다 민원 신고를 받는 게 더 빠를 것이다.맞은 편에 살던 최효원은 계속되는 소음에 잠에서 깼다.잠옷을 걸친 채 나온 최효원은 문밖에서 분에 찬 여자를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뭐 하는 거예요?”“이 년이 제 남자를 숨겨서 그래요!”그녀의 말에 최효원은 눈을 반짝였다. 성혜인의 집 현관문을 바라보는 그녀의 입꼬리가 살포시 휘었다.‘경헌이와 대표님으로 모자라 다른 여자의 남자까지 꼬셨어?’최효원은 이 상황을 녹화하면서 여자에게 질문을 던졌다.“그쪽 남자를 뭐 하러 숨겨요?”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여자는 힘껏 문을 두드렸다.“내가 어떻게 알아요! 이 년, 자본주도 있다니까요. 아주 나쁜 년이에요!”여자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들을 서슴치않고 뱉었다.성혜인은 당연히 문을 열지 않았다. ‘적당히’를 모르는 이 여자와 정말 싸운다면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성혜인은 경비실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여자 역시 입주자이기 때문에 경비실에서도 강경한 조치를 취하기 어려웠다.한편, 최효원은 이 상황을 녹화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임경헌에게 반희월의 전화번호를 물었다.“경헌아, 지난번에 어머님 뵈었을 때 좀 당황했던 것 같아. 어머님과 대화해 보고 싶어.”최효원은 임경헌 앞
동영상의 존재를 모르는 성혜인은 말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네. 이 늦은 밤에 옆집에서 리모델링 공사를 하네요. 민원을 넣었는데도 경비실에서 중재를 안해요.」‘리모델링?’페니의 고집 있는 성격을 이미 파악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능청스럽게 말을 지어내리라 생각하지 못했다.반승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굳이 파고들지 않았다.지방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 않았다.성혜인은 그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서운해하지도 않았다.문 밖에서는 여전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을 두드리던 여자는 성혜인이 절대 문을 열지 않을 것이라는 걸 깨닫고 욕을 뱉으며 자리를 떠났다.성혜인은 그제야 손에 있던 자료집을 내려놓고 잠에 들었다.다음 날 아침. 성혜인은 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옷가지를 챙겼다. 이때 또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정말 끈질기네.’성혜인은 눈썹을 찡그렸다. 이전에도 두 번이나 충돌이 있었지만, 정말 막무가내인 사람이다. 경비실에서도 중재가 되지 않으니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30분 후, 경찰이 도착했다.성혜인은 경찰을 보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여자는 성혜인을 보자마자 바로 달려들었지만 경찰에게 저지당했다.“용건 있으면 경찰서 가서 얘기하세요.”성혜인은 얼굴을 구기며 휴대폰을 쳐다봤다.하지만 신고자인 성혜인은 우선 경찰서에 다녀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여자가 또 이런 소란을 피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하지만 여자는 생각보다 적반하장이었다. 온갖 트집을 다 잡는 통에 경찰서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었다.1시간이면 해결될 줄 알았던 일이었지만, 성혜인은 무려 4시간 동안 시달려야 했다.서명을 하고 나온 성혜인은 화가 난 나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바른 사람도 이런 여자를 만나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왜곡된 논리로 끊임없이 비난하기 때문이다.한동안 계속된 여자의 욕설에 참다못한 경찰은 조용히 하라며 책상을 내리치기도 했다.성혜인은 먼저 밖으로 나왔다. 여자는 남편이 올 때까지 안에서 기다려야 하는 신세
문을 열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윤이 보였다.“여보!”성휘는 소리치며 다가가 소윤을 일으켰다.위층. 소윤이 쓰려 졌다는 걸 알게 된 성혜원 역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이 장면을 목격한 그녀는 깜짝 놀라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었다.혼비백산한 성휘는 옆에 서 있던 허진을 보고 소리쳤다.“당장 119 불러. 같이 병원으로 가자!”“하지만 주식양도 건은...”“지금이 그걸 따질 때야?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허진의 입술 끝이 미묘하게 위로 휘었다. 허진은 다급한 몸짓으로 소윤을 부축했다.“알겠습니다. 이미 119를 불러 뒀으니 걱정 마세요.”두 사람은 소윤과 성혜원 모두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렇게 주식양도의 일은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소윤은 어지러운 척만 했을 뿐인데 성휘의 말을 들으니 속으로 으쓱해졌다.병원에 도착해 검사를 마쳤지만 아무 문제가 없어 의사는 소견 낼 것이 하나밖에 없었다.“걱정을 많이 해서 피로가 쌓였나 보네요. 푹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원래 병원 단골이었던 성혜인 역시 수액을 맞고 있었다.병상에 걸터앉아 있던 성휘는 정신을 차린 소윤을 보고 나서야 안도했다.“어떻게 된 일이야? 어디 안 좋아?”소윤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여보, 나 때문에 업무에 지장 생겼죠? 미안해요. 잡생각이 많아서 문제네요. 혜인이가 날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회사에 들어가고 나면 한이와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 돼요. 거기다 혜원이의 병까지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져서 그만...”말을 마친 소윤은 돌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성휘는 아직 성한에게 지분을 양도하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게다가 성혜인에게 지분을 넘긴다면 직접 회사로 출근하라고 시켜야 할 것이다.페인트회사인 SY그룹은 인테리어 업체들과 협력을 해야 하는데, 마침 성혜인이 몸을 담고 있는 직종과 겹친다.외부에서 경험을 쌓고 있는 성혜인이야말로 시장 전반 흐름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지분을 손에 쥐는 순간 회
“혜인아, 타렴. 거기 앉아서 뭐 해.”성혜인은 성휘와 말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말해 봤자 소귀에 경 읽기였다.그녀가 차에 오르자, 성휘은 분위기를 빌려 사과의 뜻을 전했다.“어제 일은 내 잘못이다. 조희준이 그런 일을 벌일 줄 몰랐어.”성혜인은 입술을 깨물었다.“그것뿐이에요? 아빠, 이모가 저에게 한 말에 대해서는 사과 안 할 거예요?”성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오늘 이모가 쓰러졌어. 의사 말로는 걱정을 너무 많이 해서 그렇다더라. 원래 너와 사이도 안 좋은데, 너에게 사과하라고 하면 더 힘들어할 거야.”성혜인은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이번에는 소윤이 심했다는 걸 인지하고 있던 성휘는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카드 안에 20억 있어. 아끼지 말고 써.”성혜인은 마치 못 들었다는 듯 카드를 받지 않았다.성휘 역시 난감했다. 이미 사과까지 한 상황에,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소윤이 직접 와서 사과하는 것도 어른으로서 보기 좋지 않은 행동이지 않은가.“혜인아, 넌 가끔 너무 고집부리더라.”이때 성혜인은 눈을 떠 창밖을 바라보았다.“차 세워주세요. 밖에 차를 세워 둔 걸 깜빡했네요. 내일 서천에 다녀와야 해서 차 가져가야 해요.”“또 서천에 가서 뭘 하려고? 또 네 외삼촌이라도 만날 생각이니? 내가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말했지!”성휘는 상체가 흔들릴 정도로 화를 내며 카드를 다시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항상 아빠에게 반항하는구나. 이 카드는 필요 없는 걸로 알겠다.”차가 멈추자, 성혜인은 말없이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혜인아!”소리쳐 이름을 부른 성휘는 기침을 했다.그의 기침 소리에 성혜인은 발걸음을 멈췄다.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일하러 가는 거예요. 몸조심하세요.”말을 마친 성혜인은 자신의 차를 향해 큰 보폭으로 걸어갔다.너무 피곤했다.그녀는 차를 끌고 간신히 로즈가든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문 앞에는 쓰레기들이 쌓여 있었고, 문은 흩뿌려진 잉크로 도배되어 있었다.성혜인의 표정이 빠르게
설우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설연주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그는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 같은 여자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하지만 입가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아팠다. 말만 해도 상처가 당겨져 입술이 따끔거렸다.그는 휴대폰을 넣고 차에 오르려는데 그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늘 밤엔 집에 와서 저녁 먹자.”“네, 형.”설우현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짜증이 피어올랐다.마침 설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설기웅과 설의종은 아직 설연주가 설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다.설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자 그는 우연히 설다연이 담벼락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설다연은 담벼락에 걸터앉아 옆에 있던 꽃을 하나씩 따서 바닥에 던지고 있었다.이전에는 계절의 변화도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몰랐던 그녀는 설씨 가문에 들어온 후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처음 몇 달 동안 설우현이 집에 들를 때마다 그녀가 설기웅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오빠, 이거 뭐야?”“이건?”“그럼 이건 뭐지?”솔직히 설우현이라면 그런 질문에 답할 인내심이 없었을 것이다.설다연은 사람을 죽이는 법 외엔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왜 꽃이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는지, 왜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지, 심지어 물속에 왜 물고기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예전에 그녀의 세상은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과 시험관들뿐이었고 그 안엔 약품 냄새 말고는 다른 냄새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녀는 살인 병기로 길러졌고 잔인한 본능을 깨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생고기를 먹도록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음식을 익혀 먹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다.결국 설기웅이 하나하나 가르치며 그녀의 세계를 재구성해주었다. 설우현 역시 처음으로 형이 그토록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벽 아래 서서 설다연이 여전히 꽃을 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꽃들은 왜 따는 거야?”설다연은 담벼락에서 뛰어내려 설우
한편, 설연주는 눈이 가려진 채로 설우현 앞에 끌려왔다.오늘 단지 슈퍼에 가서 음식이나 좀 사려고 했을 뿐인데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했다. 도대체 누가 잡아 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녀는 바닥에 강제로 무릎이 꿇려졌다. 그때 귀 옆에서 라이터 소리가 들려왔다.설우현은 의자에 앉아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설연주의 얼굴이 굳어지며 본능적으로 ‘우현 오빠’라고 부르려다 멈칫했다.하지만 설우현이 입을 떼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네가 사는 그 집 사실 해커가 소유한 거더군. 그런데 그 해커가 혜인이 납치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어. 내가 그놈을 잡았을 때 끝까지 배후를 자백하지 않더니. 알고 보니 네가 바로 그 배후였구나, 설연주.”설연주의 눈에 담긴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설우현이 명확한 증거를 찾았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이제 자신이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설연주는 고개를 푹 떨구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자 설우현은 그녀의 머리채를 단단히 움켜잡고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머리카락이 잡힌 설연주는 두피에 전해지는 고통에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가 이내 그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이제 다 알아낸 거예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우현은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설연주는 바닥에 나뒹굴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통증이 밀려왔다.“설연주, 가족을 건드리는 건 선을 넘었어. 내가 널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우현은 짜증이 치밀어 담배를 꺼냈다. 그는 평소 여자는 절대 때리지 않았지만 설연주가 저지른 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듣자 하니 너 두팔과 어울려 다녔다더라. 마침 그놈도 지금 널 찾고 있더군.”설연주는 몸이 떨리며 순간 얼어붙었다. 혹시 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보내려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널 두팔에게 넘길 거야.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두팔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설강민을 내려놓으라 지시하고 홀로 걸어갔다.설우현은 이미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설강민이 들어오자 설우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두팔은 설우현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설우현이 혼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그는 설강민 같은 쓰레기 때문에 설우현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 두팔의 부하가 설강민을 거칠게 밀어버렸다. 이미 탈진 상태가 된 설강민은 그대로 바닥에 개처럼 엎드렸고 얼굴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형, 형... 나 구해줘요...”미약한 그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설우현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져온 돈 박스들을 세어보라고 지시했다.두팔은 홀 한가운데 앉아 자신의 공간에 가득 쌓인 박스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박스 앞에서 돈을 세며 확인하고 있었다.“설우현, 듣자 하니 설씨 가문에 새로 들어온 여자가 있더군. 설연주라고 했던가?”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자와는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두팔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그 여자의 원래 이름은 진연주였어. 내 밑에 있을 때 아주 말 잘 듣던 아이였지.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습도 제법이었는데, 내가 맛보기도 전에 설연주가 되어 설씨 가문으로 가버렸지. 너희 설씨 가문에서 그런 여자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만.”두팔은 조롱 섞인 미소를 띠며 다리를 옆 의자에 올려놓았다.“연주는 한때 내 충실한 개였어. 그래서 연주를 위해 특별히 여러 개의 목줄을 맞춰놨지.”두팔이 손뼉을 치자 부하들이 맞춤 제작된 목줄을 가져왔다. 목줄은 검은색, 은색, 금색으로 각각 다른 디자인이었으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설우현은 이를 보며 곧장 주변 몇몇 사람들의 취향이 생각났다. 그들은 이런 조련에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묘한 쾌감을 얻는 사람들이었다. 설연주가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다니 의외였다.이윽고 설우현의 미간이 잔뜩
설우현은 살면서 이토록 파렴치한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여 설연주를 상대하기 싫었던 설우현은 그대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다음 날, 설연주는 그대로 별장에서 쫓겨났고 도우미가 다가와 정중하게 설우현의 말을 전달해주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는 명령이었다.그렇게 일주일 동안 설연주는 설우현을 보지 못했다.오히려 설강민의 소식은 계속하여 들려왔는데 현재 돈을 다 써버려 또 두팔의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겁도 없이 독촉하러 온 사람들까지 때렸다는 것이다.두팔 쪽에서는 당연히 설강민의 행패를 가만히 놔두려 하지 않았고 현재 설강민은 이미 두팔에게 잡혀 끌려갔다고 한다. 이제 그가 어떤 일을 겪을지는 아무도 모른다.설연주는 설준석의 별장에서 지내며 계속하여 그쪽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저녁이 되고 설준석이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별장으로 돌아왔다.음식이 나오자마자 설준석은 두팔의 전화를 받게 되었고 아들이 100억이나 달하는 빚을 졌으니 당장 돈을 들고 오라는 협박 전화였다.물론 설준석도 두팔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었다. 고리대금업자지만 꽤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플로리아 상층부의 목적지는 주로 지하 도박장으로 하룻밤에 벼락부자가 될 수도 있고 즉석에서 돈을 전부 잃어 취직하게 될 수도 있다.물론 지하 도박장에서도 돈을 빌릴 수 있지만 그곳에는 정해진 조건이 있었다.하지만 두팔이 운영하는 고리대금에는 조건이 없었고 대신 갚지 않으면 손과 발을 모두 잃고 모든 가족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어쨌든 두팔이 운영하는 무리는 전부 극악무도한 양아치들이었다. 한 사람의 목숨이 이천 만 정도로 만약 일가를 독촉하는 데 성공한다면 단번에 몇십억은 벌 수 있다.전화를 받고 화가 치밀어 오른 설준석이 휴대폰을 꽉 움켜쥐며 물었다.“설강민은?”그러자 휴대폰 건너편에서 설강민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요. 저 사람들이 내 팔과 다리를 부러뜨릴 거란 말이에요. 빨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
그러나 성혜인은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도우미에게 꽃병을 건네주고는 다시 설연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난 저녁 비행기를 타고 곧 남편과 함께 제원으로 돌아갈 거야. 다음에 널 만나게 될 땐 친구로 만났으면 좋겠네.”설연주는 당당하게 작별인사 한마디도 못 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당당한 성혜인에 비하면 그녀는 마치 평생 빛을 보지 못하는 도랑 속 쥐와 같았다.설연주는 심지어 성혜인의 말을 통해 자신의 비열함을 느꼈고 그 비열함은 차마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설연주는 성혜인의 눈을 거의 바라보지 못했다.혹여나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을 향한 원망과 역겨움을 눈치챌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솔직히 설연주는 성혜인을 진심으로 숭배하고 있었고 진심으로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미 진실을 알게 된 마당에 이제 와서 친구를 사귄다는 건 사치인 셈이다.그렇게 설연주는 설우현이 두 사람을 찾아올 때까지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들에게 다가온 설우현은 설연주의 작품을 보며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못생겼어.”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린 설연주가 설우현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고 뺨을 맞기라도 한 듯 통증이 밀려왔다.이렇게 비열하고 음침하기 그지없는 인간일 뿐인데 감히 설우현에게 그런 마음을 품다니.어쩐지 오래 못 살 것 같더라니... 그녀 같은 사람은 지옥에 가야만 한다.하느님은 그녀에게 복수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내 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다시 설우현을 바라보았고 설우현은 그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마디 툭 내던졌다.“이따 밥 먹고 가.”그러자 설연주는 몰래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휴지로 슬쩍 닦아내며 탐욕스럽게 설우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왜 이 타이밍에 설우현 같은 도련님을 만난 거지?’운명은 정말 그녀를 농락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렇게 성혜인의 말대로 그녀는 저녁 비행기를 타고 제원으로 떠났고 설우현은 특별히 그들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연주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녀는 오번과 통화를 하며 문을 열어주기 위해 현관으로 향했다.그 결과 밖에 서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설우현이었고 그는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끼운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설연주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설연주는 순간 마법이라도 걸린 듯 무어라 말해야 할지, 설우현이 갑자기 이곳에는 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우현 오빠...”이어 설연주는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한편, 설우현은 담뱃불을 끄고 시선을 돌려 설연주의 몸을 쓱 바라보았다.긴장한 나머지 설연주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고 설우현이 과연 조금 전의 통화 내용을 들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그렇게 한참 후에야 설우현은 비로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혜인이가 너 보고 싶다네. 오후 비행기야.”설연주도 잇따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묵묵히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차가 설우현의 별장에 도착하고 설연주는 그제야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이 설우현의 여자친구가 아닌 성혜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거실에 도착해 보니 성혜은이 거실에서 게임을 하면서 놀고 있었고 그 옆에는 빈 스위치 하나가 놓여있었다. 설우현 본인이 사용하던 스위치로 보였다.한편, 성혜인은 설연주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말을 건넸다.“연주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설연주는 무의식적으로 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이미 스위치 앞으로 다가가 스스로 게임을 시작했다.결국,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성혜인을 따라 화원으로 들어섰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위해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었다.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처럼 분위기가 매우 화목해 보였지만 사실 설연주는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계속하여 안절부절못했다. 성혜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두
설연주는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음식을 천천히 먹고 나니 운전기사가 그녀 옆에 다가와 서 있었다. 이는 분명 그녀를 재촉하고 있는 신호였다.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오직 그의 컴퓨터만 바라보고 있었다.설연주가 마음속으로 몰래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한번 설우현을 깊게 쳐다보고 나서야 설연주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기사의 뒤를 따랐다.그녀를 태운 차가 막 별장을 떠나려 할 때, 다른 차가 천천히 별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 순간, 설연주는 원인 모를 충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여자친구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섹시한 연상 스타일일까? 설우현은 그런 여자를 더욱 선호하니까.’설연주는 속눈썹을 드리운 채 창문을 열어보았다.하지만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차는 누가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창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었다.그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괜히 실마리가 드러날까 걱정되었던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차창을 다시 닫아버렸다.“가시죠.”운전기사도 다시 가속 페달을 밟았고 그렇게 설연주는 천천히 별장을 떠났다.오랜만에 다시 설준석의 별장에 돌아와 보니 이상하게 분위기가 어수선하게 느껴지고 무엇을 해도 흥미가 돋지 않았으며 설우현의 얼굴이 계속하여 눈앞에서 아른거렸다.수없이 많은 남자를 꼬시며 이용해 먹었지만 설연주는 단 한 번도 연애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줄곧 설연주의 이용수단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불쌍할 지경으로 적은 감정을 남자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하물며 그 상대는 설우현이다. 그녀와 같은 여자가 설우현에게 어울릴 수가 없는 법이다.설씨 가문의 도련님으로 금수저를 달고 태어나 평생 고생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우스우면서도 씁쓸해졌다.저녁이 되자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설연주 씨, 설강민이 두팔에게 끌려갔다고 합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온몸이 오싹해졌다. 설강민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낭패한 모습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평소 물 쓰듯 돈을 쓰던 술집에서 쫓겨나는 날이 있다니.그 순간, 설강민은 문득 설준석이 이 술집의 지분을 일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강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분명 그의 체면을 짓밟기 위해 아버지가 지시한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설준석에게 가서 사실대로 털어 넣고 돈을 갚아달라며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막상 이 지경이 되니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기며 더더욱 설준석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설강민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조금 전 또 20억 원을 빌렸으니 차라리 이 20억 원으로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게 나았다.다시 마음을 먹고 설강민은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한 채 현금 뭉치를 매니저에게 던져주었다.“지금 당장 가장 좋은 술을 가져오고 5명의 계집애를 데려와.”한 푼도 없을 줄 알았던 설강민이 뜻밖에도 600만을 들고 들어오니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그러자 설강민은 오히려 더욱 으스대며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아무리 초라해도 난 설씨 가문 일원인데 그깟 돈 하나 못 꺼내겠어?”돈을 받은 매니저는 바로 계집 몇 명을 설강민에게 보내주었다.아무리 돌이켜봐도 오늘 밤의 일은 생각할수록 더욱 화가 났다. 하여 설강민은 매니저가 보낸 여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양옆에 여자들을 껴안으며 오늘 밤 겪었던 울분을 풀어냈다.한편, 설연주는 구석에 서서 설강민의 모든 행동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다.룸을 떠나고 화장실에 간 설연주는 그제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최근에 열이 나며 심각하게 살이 많이 빠진 모양이다.그리고 오늘 밤 설강민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웃기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설연주가 쉰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설연주, 봤어? 저게 바로 네가 목숨을 바쳐서 구한 남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