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내일 서천으로 가야 하니 오늘 어디에서 묵든 다 상관없었다. 굳이 포레스트로 가 반승제의 눈을 피해 다닐 바에는 로즈가든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성혜인은 로즈가든에 도착해 따뜻한 물에 씻고 나와 휴식을 취하려 했다.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가 문을 부실 듯이 두드렸다.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문 앞에 도착해 보니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임남호와 얽힌 그 여자였다.여자는 오늘 민낯이었지만 두툼한 눈썹과 아이라인 문신을 해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야, 이 나쁜 년아! 문 열어!”여자는 있는 힘을 다해 문을 두드렸다. 당장이라도 문을 뚫고 들어올 기세였다.하지만 이 튼튼한 문이 망가지는 것보다 민원 신고를 받는 게 더 빠를 것이다.맞은 편에 살던 최효원은 계속되는 소음에 잠에서 깼다.잠옷을 걸친 채 나온 최효원은 문밖에서 분에 찬 여자를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뭐 하는 거예요?”“이 년이 제 남자를 숨겨서 그래요!”그녀의 말에 최효원은 눈을 반짝였다. 성혜인의 집 현관문을 바라보는 그녀의 입꼬리가 살포시 휘었다.‘경헌이와 대표님으로 모자라 다른 여자의 남자까지 꼬셨어?’최효원은 이 상황을 녹화하면서 여자에게 질문을 던졌다.“그쪽 남자를 뭐 하러 숨겨요?”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여자는 힘껏 문을 두드렸다.“내가 어떻게 알아요! 이 년, 자본주도 있다니까요. 아주 나쁜 년이에요!”여자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들을 서슴치않고 뱉었다.성혜인은 당연히 문을 열지 않았다. ‘적당히’를 모르는 이 여자와 정말 싸운다면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성혜인은 경비실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여자 역시 입주자이기 때문에 경비실에서도 강경한 조치를 취하기 어려웠다.한편, 최효원은 이 상황을 녹화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임경헌에게 반희월의 전화번호를 물었다.“경헌아, 지난번에 어머님 뵈었을 때 좀 당황했던 것 같아. 어머님과 대화해 보고 싶어.”최효원은 임경헌 앞
동영상의 존재를 모르는 성혜인은 말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네. 이 늦은 밤에 옆집에서 리모델링 공사를 하네요. 민원을 넣었는데도 경비실에서 중재를 안해요.」‘리모델링?’페니의 고집 있는 성격을 이미 파악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능청스럽게 말을 지어내리라 생각하지 못했다.반승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굳이 파고들지 않았다.지방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 않았다.성혜인은 그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서운해하지도 않았다.문 밖에서는 여전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을 두드리던 여자는 성혜인이 절대 문을 열지 않을 것이라는 걸 깨닫고 욕을 뱉으며 자리를 떠났다.성혜인은 그제야 손에 있던 자료집을 내려놓고 잠에 들었다.다음 날 아침. 성혜인은 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옷가지를 챙겼다. 이때 또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정말 끈질기네.’성혜인은 눈썹을 찡그렸다. 이전에도 두 번이나 충돌이 있었지만, 정말 막무가내인 사람이다. 경비실에서도 중재가 되지 않으니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30분 후, 경찰이 도착했다.성혜인은 경찰을 보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여자는 성혜인을 보자마자 바로 달려들었지만 경찰에게 저지당했다.“용건 있으면 경찰서 가서 얘기하세요.”성혜인은 얼굴을 구기며 휴대폰을 쳐다봤다.하지만 신고자인 성혜인은 우선 경찰서에 다녀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여자가 또 이런 소란을 피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하지만 여자는 생각보다 적반하장이었다. 온갖 트집을 다 잡는 통에 경찰서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었다.1시간이면 해결될 줄 알았던 일이었지만, 성혜인은 무려 4시간 동안 시달려야 했다.서명을 하고 나온 성혜인은 화가 난 나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바른 사람도 이런 여자를 만나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왜곡된 논리로 끊임없이 비난하기 때문이다.한동안 계속된 여자의 욕설에 참다못한 경찰은 조용히 하라며 책상을 내리치기도 했다.성혜인은 먼저 밖으로 나왔다. 여자는 남편이 올 때까지 안에서 기다려야 하는 신세
문을 열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윤이 보였다.“여보!”성휘는 소리치며 다가가 소윤을 일으켰다.위층. 소윤이 쓰려 졌다는 걸 알게 된 성혜원 역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이 장면을 목격한 그녀는 깜짝 놀라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었다.혼비백산한 성휘는 옆에 서 있던 허진을 보고 소리쳤다.“당장 119 불러. 같이 병원으로 가자!”“하지만 주식양도 건은...”“지금이 그걸 따질 때야?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허진의 입술 끝이 미묘하게 위로 휘었다. 허진은 다급한 몸짓으로 소윤을 부축했다.“알겠습니다. 이미 119를 불러 뒀으니 걱정 마세요.”두 사람은 소윤과 성혜원 모두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렇게 주식양도의 일은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소윤은 어지러운 척만 했을 뿐인데 성휘의 말을 들으니 속으로 으쓱해졌다.병원에 도착해 검사를 마쳤지만 아무 문제가 없어 의사는 소견 낼 것이 하나밖에 없었다.“걱정을 많이 해서 피로가 쌓였나 보네요. 푹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원래 병원 단골이었던 성혜인 역시 수액을 맞고 있었다.병상에 걸터앉아 있던 성휘는 정신을 차린 소윤을 보고 나서야 안도했다.“어떻게 된 일이야? 어디 안 좋아?”소윤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여보, 나 때문에 업무에 지장 생겼죠? 미안해요. 잡생각이 많아서 문제네요. 혜인이가 날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회사에 들어가고 나면 한이와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 돼요. 거기다 혜원이의 병까지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져서 그만...”말을 마친 소윤은 돌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성휘는 아직 성한에게 지분을 양도하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게다가 성혜인에게 지분을 넘긴다면 직접 회사로 출근하라고 시켜야 할 것이다.페인트회사인 SY그룹은 인테리어 업체들과 협력을 해야 하는데, 마침 성혜인이 몸을 담고 있는 직종과 겹친다.외부에서 경험을 쌓고 있는 성혜인이야말로 시장 전반 흐름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지분을 손에 쥐는 순간 회
“혜인아, 타렴. 거기 앉아서 뭐 해.”성혜인은 성휘와 말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말해 봤자 소귀에 경 읽기였다.그녀가 차에 오르자, 성휘은 분위기를 빌려 사과의 뜻을 전했다.“어제 일은 내 잘못이다. 조희준이 그런 일을 벌일 줄 몰랐어.”성혜인은 입술을 깨물었다.“그것뿐이에요? 아빠, 이모가 저에게 한 말에 대해서는 사과 안 할 거예요?”성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오늘 이모가 쓰러졌어. 의사 말로는 걱정을 너무 많이 해서 그렇다더라. 원래 너와 사이도 안 좋은데, 너에게 사과하라고 하면 더 힘들어할 거야.”성혜인은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이번에는 소윤이 심했다는 걸 인지하고 있던 성휘는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카드 안에 20억 있어. 아끼지 말고 써.”성혜인은 마치 못 들었다는 듯 카드를 받지 않았다.성휘 역시 난감했다. 이미 사과까지 한 상황에,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소윤이 직접 와서 사과하는 것도 어른으로서 보기 좋지 않은 행동이지 않은가.“혜인아, 넌 가끔 너무 고집부리더라.”이때 성혜인은 눈을 떠 창밖을 바라보았다.“차 세워주세요. 밖에 차를 세워 둔 걸 깜빡했네요. 내일 서천에 다녀와야 해서 차 가져가야 해요.”“또 서천에 가서 뭘 하려고? 또 네 외삼촌이라도 만날 생각이니? 내가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말했지!”성휘는 상체가 흔들릴 정도로 화를 내며 카드를 다시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항상 아빠에게 반항하는구나. 이 카드는 필요 없는 걸로 알겠다.”차가 멈추자, 성혜인은 말없이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혜인아!”소리쳐 이름을 부른 성휘는 기침을 했다.그의 기침 소리에 성혜인은 발걸음을 멈췄다.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일하러 가는 거예요. 몸조심하세요.”말을 마친 성혜인은 자신의 차를 향해 큰 보폭으로 걸어갔다.너무 피곤했다.그녀는 차를 끌고 간신히 로즈가든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문 앞에는 쓰레기들이 쌓여 있었고, 문은 흩뿌려진 잉크로 도배되어 있었다.성혜인의 표정이 빠르게
반승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의 얼굴에서 냉기가 느껴졌다.유경아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불안해하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회장님, 사모님께서는 해열제 먹고 잠에 들었어요.”하지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태승은 성혜인의 방문을 열라고 명령했다.유경아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반태승은 반승제를 매서운 눈초리로 흘겼다.“안 들어가고 뭐 해? 예전에 나한테 열심히 하고 있다는 말, 전부 거짓말인 게냐?”반승제는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반태승이 오늘 누구의 전화를 받고 포레스트까지 찾아온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는 성혜인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입을 떼기도 전에 문이 닫혀버렸다.표정이 어두워진 반승제는 눈빛마저 싸늘해졌다.반태승은 유경아에게 문을 잠그도록 시켰다. 유경아는 차마 말리지 못하고 문을 잠갔다.문을 사이에 두고 반태승은 방안을 향해 말했다.“승제야, 안에서 혜인이를 잘 보살피거라. 너희 각방 쓰고 있는 게 확실한 것 같구나. 혜인이가 머리를 들고 다니지도 못할 정도로 못살게 굴다니! 앞으로 날 속일 생각 마라. 혜인이가 널 위해 거짓말까지 하고, 얼마나 착해! 오늘 밤 밖으로 나올 생각 말고 같이 자!” 방 안. 반승제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굳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당장이라도 베일 것처럼 날카로웠다.침대에 누워있던 성혜인 역시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긴장한 탓에 손바닥이 땀으로 젖었다.반태승이 반승제와 같은 방안에 가둬버리는 방법까지 쓸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성혜인은 조용히 이불로 자신의 머리를 바람 들 틈도 없이 꽁꽁 싸맸다.반승제는 픽 조소를 뱉으며 싱글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침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연기 그만해.”그의 말투에서 혐오감이 느껴졌다.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침대를 응시했다.할아버지가 찾아오도록 일부러 아픈 척하는 것이라 확신했다.이제 반승제까지 온 마당에 머리는 숨겨서 무얼 하겠는가?반승제는 얇은
위층.더위를 느낀 반승제는 단추를 몇 개 푼 것으로도 부족했다.익숙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등에 난 상처도 화끈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문득 반태승이 건네 마셨던 차가 생각났다. 이마의 핏줄도 당장 피부를 뚫고 나올 기세였고, 온몸이 뜨거웠다.자리에서 일어난 반승제는 욕실로 가 찬물로 세수했지만 후끈한 기운이 도통 가시지 않았다.그는 시선을 들어 거울을 보았다. 그때, 욕실에서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 호텔에서 나타난 그 여자에게서 맡은 향수 냄새와 달랐다.약간의 결벽이 있는 그는 평소에 다른 사람과 욕실을 함께 쓰지 않는다. 더럽다는 생각 때문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런 불편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몸이 점점 뜨거워진다는 기분뿐이었다.이번에는 할아버지의 수법에 속수무책이었다. 집에서 체벌까지 받은 마당에 이제는 반승제와 성혜인이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오늘 누구의 전화를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 전화에 자극받아 포레스트까지 온 것이다.반승제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세면대 위에 올려진 물건을 쳐다봤다.폼클렌징 하나뿐이었다.욕실은 물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반승제는 시선을 떨구며 욕실에서 나왔다. 침대에서 미동도 없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픽 웃으며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침대를 건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몸에서 전해지는 열기를 견디기 어려웠다. 특히 욕실 안에서 맡은 익숙한 향수 냄새에 더 참기 어려워졌다.“욕실에 둔 디퓨저, 뭐야?”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났다.성혜인은 그 말에 눈썹을 들썩였다.‘디퓨저?’그녀는 디퓨저를 좋아하지 않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다.이 순간, 반승제가 이불을 들추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이불을 꽁꽁 감쌌다.하지만 반승제는 그 물음을 마지막으로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그는 눈을 감은 채 불편한 느낌을 해소하려 애썼다. 하지만 머릿속까지 뜨거워지고 등에서도 화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지니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았다.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른 뒤.
한밤중이 되어서야 수액 주입이 끝났다. 성혜인은 바늘을 뽑았다.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정신이 든 반승제가 눈을 떠 성혜인을 바라봤다.“대표님, 깨셨어요?”반승제는 목소리가 잠긴 느낌이 들었다. 천장을 한 번 쳐다보고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병원이야?”“네. 열이 났어요.”“넌 왜 여기에 있어?”“가족이 여기에 입원해 있어서요. 마침 대표님을 봐서 와봤어요. 좀 괜찮아요?”약 기운이 떨어져서인지 등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도 이제 몸이 참을 수 없이 뜨거운 것은 아니었다.그 덕에 마음은 한결 가벼웠지만 할아버지가 한 행동을 떠올리는 순간 표정이 어두워졌다.BH그룹의 바쁜 업무라는 핑계는 이미 효력을 상실했다. 할아버지는 어떻게든 그 여자와 아이를 가지도록 요구할 것이다.반승제은 차가운 콧방귀를 뱉었다.그의 웃음소리만으로 성혜인은 할아버지가 반승제를 제대로 건드렸다는 것이 느껴졌다.반승제는 휴대폰으로 심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씨 집안에서 오늘 할아버지께 연락한 적이 있는지 좀 알아봐 줘요.”지난번에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도 이런 일을 벌인 거라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이다.5분도 채 되지 않아 심인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대표님, 회장님께 전화한 이력이 있습니다.”반승제의 안색이 무서울 만큼 어둡게 변했다.“당분간 SY그룹 운영 못 하게 해요.”지난번에는 정을 생각해서 봐줬는데, 너무나도 뻔뻔한 성씨 집안이다.성혜인은 그의 옆에 앉아 차갑다 못해 증오심이 느껴지는 그의 지시를 듣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런 해명도 할 수 없었다.성휘는 반태승에게 전화를 하기 전에 이런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미리 예상했어야 했다.반승제는 성씨 집안이 갖고 놀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전화를 끊은 반승제가 성혜인에게 시선을 돌렸다.성혜인은 무표정으로 그에게 물음을 던졌다.“물 드실래요?”그녀의 눈빛이 맑게 반짝였다. 반승제의 가정사에 전혀 관심 없는 모습처럼 보였다.“응.”성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반승제에게 물을 가져다주
조용한 방 안. 반승제는 성혜인에게 진심 어린 대답을 들었다.“감사해요, 대표님.”반승제가 증오하도록 싫어하는 그 여자가 성혜인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전제하에, 반승제는 성혜인을 좋게 평가하고 있었다.두 사람에게 결혼이란 필요 없는 것이었다. 결혼에 대해 어떻게 할 수 없는 입장이니 누구 한쪽을 나무랄 필요도 없었다.성씨 집안은 이 혼례로 이미 득을 봤기 때문에 반승제에게 부인을 존중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모든 걸 그 여자에게 맞출 수는 없는 거니까.반승제는 말없이 눈꺼풀을 닫았다.쉬고 싶어 하는 그의 모습에 성혜인 역시 입을 닫았다.오전 여섯 시.심인우의 목소리가 들렸다.“페니 씨, 여기 아침 식사입니다. 대표님을 간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아니에요. 비서님 오셨으니 전 가볼게요.”“네. 다음에 정식으로 감사 인사드릴게요.”병실 문이 조심스럽게 닫혔다. 그제야 반승제는 눈을 떴다.깨어난 반승제를 발견한 심인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테이블을 폈다.“대표님, 식사부터 하시겠어요?”하룻밤 내내 열에 시달린 반승제는 입맛이 없었다.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성씨 집안의 일은 처리했나요?”“운영 중단시켰습니다. 성씨 집안은 아마 오늘부터 패닉 상태에 빠질 겁니다. 성휘가 회장님께 연락하지 못하도록 지시해 두기도 했습니다. 이제 회장님께서 그쪽 번호로 걸려 오는 전화는 받지 못하실 겁니다.”이제 귀찮을 일이 없을 것이다.성씨 집안에서 일이 터져 성휘가 반태승에게 연락한다고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게다가 반태승은 건강상의 이유로 집 밖을 잘 나가지 않기 때문에 성휘와 마주칠 일도 없다.이것으로 SY그룹이 파산하지는 않겠지만, 성휘에게는 고난의 시간이 될 것이다.반승제는 몸을 일으켰다. 심인우가 가져온 세면용품으로 샤워를 마친 뒤 호텔로 향했다.포레스트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한편, 성혜인은 포레스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오늘 서천으로 가려 했지만 밤사이 반승제의 곁을 지켰더니 눈도 뜨지 못할 만큼 피곤했다.포레스트에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