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반승제의 감정 변화에 예민했던 심인우는 차 안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 크게 와 닿았다. 차 안의 공기는 조금 전처럼 차갑지 않았고, 심인우는 드디어 조금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기억을 되짚어 보니 반승제에게 뻔뻔하게 들이대던 여자들은 전부 제원에서 사라졌다. 오늘 아침에 만난 여자도 사라지기까지 멀지 않을 것 같았다. 다행히 반승제의 기분이 풀린 덕분에 회사 임원은 고생이 덜할 듯했다.성혜인은 반승제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꿇어앉아 겨울이와 시선을 맞췄다. 겨울이와 함께 보낸 시간이 이렇게나 많은데, 더 자주 보는 강민지에게도 보인 적 없는 열정을 반승제에게 보인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혹시 겨울이가 암컷이라 승제 씨의 얼굴에 반한 건가?’성혜인은 겨울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반승제의 얼굴은 그녀조차도 그림에 담아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으니까.“겨울아, 이런 걸 얼빠라고 하는 거야.”산책을 끝내고 돌아온 성혜인은 마침 포레스트로 들어가는 백연서를 발견했다. 백연서는 같이 살고 있는 반승제와 성혜인이 걱정되는지, 두 사람의 방이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시름을 놓았다.“회장님이 너한테 또 선물을 보냈다며?”반태승은 자신이 한 일을 숨길 생각이 없었기에 집안사람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혜인에게 소식을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그녀를 집안사람으로 여기는 이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백연서는 자기 아들이 바람을 피웠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녀는 한때 윤단미와 윤씨 집안을 결사반대했다. 하지만 성혜인과 결혼한 반승제가 3년이나 집을 떠나고 나니, 차라리 윤단미를 받아들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그래서 백연서는 줄곧 성혜인에게 반승제를 넘보지 말라고 일렀고, 바람을 피웠다는 소식이 희소식으로 느껴졌다. 만약 반승제가 윤단미에게 흥미를 잃었다면 다른 여자를 소개해 줄 수도 있었다. 제원에는 수많은 여자가 있었고, 대부분 성
성혜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녀는 그림을 힐끗 보며 덤덤한 말투로 물었다.“이건 조 사장님의 선물인가요?”조희준은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그의 회사는 금방 2차 융자를 끝낸 SY그룹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조건을 낮춰 합작할 생각을 한 적 없었다. 그리고 그는 성씨 집안과 반씨 집안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다. 이는 반씨 집안과 가까운 사람만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오만한 조희준은 단 한 번도 동창에게 먼저 연락한 적 없었다. 이번에는 경찰 조사로 스트레스를 받던 중, 성혜인을 협박할 거리를 찾기 위해 그녀의 부모를 조사하다 우연히 동창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SY그룹은 작은 페인트 장사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발전해 왔다. 조희준은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니 완벽한 파트너라고 할 수도 있었다. 오늘 조희준은 성혜인과 일적으로 오해가 생겼다면서 선물을 잔뜩 들고 왔고, 성휘는 자신이 좋아하는 명화가 있는 것을 보고 흔쾌히 사과를 받아들였다.“오랜만에 동창을 만나러 왔는데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죠. 페니 씨, 우리 그래도 3년이나 함께 일해 왔는데 작은 오해로 갈라서는 건 너무 아쉽지 않아요? 페니 씨 아버지를 봐서라도 그냥 웃고 넘겨요.”조희준은 60억짜리 그림으로 사건을 무마할 생각이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또 자신을 찾아올 줄 몰랐던 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소윤이 차를 따르며 입을 보탰다.“그래, 혜인아. 조 사장님 말이 맞아. 3년이나 함께 일했다면서 작은 오해로 틀어지는 건 아니지. 오늘 차 한잔하면서 풀고, 앞으로는 좋은 사이로 지내렴.”성휘는 성혜인을 소파로 끌어당겼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뿌리쳤다.“아빠, 조 사장님이 말하는 오해가 뭔지 알기나 해요? 저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 60억짜리 그림에 혹해서 딸을 팔아넘기는 거예요?”오랫동안 참아왔던 분노가 한꺼번에 터졌다. 반씨 집안에 자신을 팔아넘긴 것으로 모자라 또 한 번 같은 짓을 하니 말이다.성휘의 안색은 아주 어
“여보, 미안해요. 아까는 당신이 너무 걱정돼서 말이 헛나왔어요.”성휘는 가슴을 움켜잡은 채로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견뎠다. 이번 일은 확실히 그의 실수였다. 그는 2차 융자가 끝난 시점에 찾아온 동창이 합작을 원하는 줄 알았다. 게다가 자신과 아는 사이여서, 성혜인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고 말았다.성휘는 어두운 표정으로 소윤을 향해 말했다.“누가 봐도 진심으로 한 말인데 헛나왔다고?”소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성휘가 진심으로 화난 것은 또 처음이었다.조희준이 한 일에 소윤의 말을 보태자, 이 모든 게 그녀가 원하는 일인 것처럼 들려왔다. 그래서 성휘는 딸을 대하던 자신의 태도를 진심으로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의 수많은 착각이 성혜인에게는 상처가 되었으니 말이다.성휘는 차가운 표정으로 위층에서 내려오는 성혜원을 바라봤다. 그녀는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듯 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휘의 화난 표정을 보고서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말했다.“아빠, 죄송해요. 혹시 저 때문에 언니랑 싸웠어요?”성혜원의 목소리를 듣고 나자, 성휘는 한결 진정되었다.성혜원은 성휘의 친딸이었고, 또 그의 망설임 때문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아픈 손가락이었다. 게다가 성혜원은 착하고 똑똑해서 성혜인과도 잘 지냈다.“너 때문이 아니야, 혜원아.”성혜원은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아래로 내려와 소윤과 팔짱을 꼈다.“아빠, 엄마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 엄마가 아빠 건강이 더 나빠질까 봐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아요? 엄마가 말은 그렇게 해도 마음은 따듯한 사람인 거 잘 아시잖아요.”성혜원은 간단한 말 몇 마디로 단번에 성휘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성휘는 말없이 소윤을 힐끗 노려보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거실에서 성혜원은 소윤을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앞으로는 말조심 좀 해요. 아빠는 바보가 아니에요. 급한 마음을 티 내면 금방 알아차릴 거라고요. 지금까지 잘 참아왔는데, 인제 와서 급해야 할 필요는 없어요.”소윤도 자기 잘못을 잘 알고 있었기
포레스트로 돌아온 성혜인은 밖에 차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반승제가 돌아왔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거의 도망가다시피 부랴부랴 포레스트의 대문을 나섰다.새로 이사한 집에는 수많은 문제가 있지, 성씨 저택에는 성혜인을 이용하지 못해 안달 난 가족이 있지, 포레스트에는 피하기에 급한 남편이 있지... 자신의 처량한 현실에 성혜인은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해 포레스트 근처의 벤치에 가서 앉았다.밤바람은 아주 시원했다. 하지만 성혜인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 그렇게 로즈가든으로 돌아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검은색 구두가 시선에 들어왔다.성혜인은 멈칫하며 머리를 들었다. 그러자 앞에 서서 머리를 숙이고 있는 반승제가 보였다. 그녀는 순간 다른 고민은 뒷전이고 정체를 들킨 건 아닌지부터 걱정했다.“페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본 줄 알았네.”‘페니는 왜 자꾸 포레스트 근처에 나타나는 거지? 저번처럼 강아지 산책하러 왔나?’성혜인은 머리를 굴리며 변명거리를 찾기 시작했다.“그게... 제가 아침에 밥을 사드린다고 했었잖아요. 오늘 마침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지나가다가 대표님한테 전화해 볼 참이었어요. 혹시 지금 시간 있는지 물어보려고요.”이곳의 조명은 분위기 좋게 어두운 편이었다. 그래서 성혜인의 그렁그렁한 눈빛이 더욱 티가 났다. 반승제는 그녀에게 속상한 일이 있겠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하지만 그녀는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듯 애써 숨기고 있었다.‘일 때문인가? 혹은... 가족?’반승제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 만났던 남자가 떠올랐다. 만약 그가 성혜인을 데리러 오지 않았더라면 평생 그런 사람과 성혜인을 엮지 않았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적어도 급은 맞아야 관계를 유지함에 있어서 더욱 편하기 때문이다.남자는 대학을 나오지 못한 데다가 생김새도 평범했고 낮은 월급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반대로 성혜인은 제원대 미대를 나왔을 뿐만 아니라 남다른 외모와 기품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디자인 한 번으로
성혜인의 태연한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치더니 머뭇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아, 네. 한두 번 정도는...”‘이런 레스토랑에 한두 번밖에 못 와봤다는 소리인가?’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남의 집안일이기 때문이다.반승제의 손가락은 자연스레 식탁 위에 놓여 있었고 무심한 듯 흩어져 있는 장미 꽃잎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뤘다. 성혜인은 집안일마저 잊고 그의 손가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얀 손가락과 빨간 꽃잎이 이토록 조화로울 줄은 또 몰랐다. 번뜩 떠오른 영감에 그녀는 자기 전에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반승제는 말없이 자기 손가락을 바라보는 성혜인을 관찰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감탄으로 가득했다. 그가 마침 말을 꺼내려고 할 때,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오는 남녀를 발견했다. 남자는 다름 아닌 서민규였다.서민규는 성혜인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함께 온 여자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가 교태롭게 팔짱을 끼고 작은 스킨십을 하면 그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두 사람은 구석진 곳에 자리 잡았다. 그러고는 서로의 손을 만지작대며 가끔 웃음을 터뜨렸다. 서민규는 발그레한 얼굴로 꽤 즐기는 듯해 보였다.여자는 서민규와 마찬가지로 BK 사의 직원이었다. 서민규는 부서에서 꽤 활발하게 일했지만, 단 한 번도 가정 형편에 대해 말한 적 없었기에 관심을 품고 다가오는 여자가 없었다. 요즘 같은 세월에서는 가정 형편을 우선시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숨기기만 하는 서민규는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졌다.오늘 밤 여자는 택시를 기다리고 있다가 1억짜리 벤츠를 모는 서민규를 발견했다. 한 달에 몇십만 원밖에 못 버는 월급쟁이가 벤츠를 몰고 다는 걸 보면 분명히 가정 형편이 좋을 것이다. 어쩌면 제원에 부동산이 있을지도 몰랐다.여자는 일을 핑계로 서민규와 함께 레스토랑에 왔다. 여자에게 먼저 대시를 받아본 적 없는 서민규는 이게 다 벤츠 덕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평범한 생김새에 돈까지 없는 그를 가
성혜인은 정열적으로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돌렸다.“죄송해요, 대표님. 제가 괜히 이곳으로 와서 대표님의 눈을 더럽혔네요.”이런 곳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다니, 부끄러움은 타인의 몫이었다.성혜인은 꽤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우연한 사고로 반승제와 하룻밤을 보낸 것 외에는 남자와 접촉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눈이 감길 정도로 어색하기만 했다.여자는 서민규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래서 성혜인의 각도에서는 여자의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가려져 있어서 도무지 서민규라는 것을 알아볼 수 없었다.반승제는 드디어 성혜인의 화난 모습을 구경하나 했는데 이런 말을 들은 줄은 몰랐다. 그는 약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성혜인을 바라봤고, 성혜인은 의아할 따름이었다.‘혹시 음식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반승제는 수저를 건드리지도 않고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의 자태는 아주 우아했고, 마침 머리 위에서 떨어진 조명 덕분에 더욱 고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시간이 늦었는데 남편한테 전화 안 해도 돼?”잠시 후, 뒤에서 익숙한 벨 소리가 들려오면 자신의 상황을 알아차리지 않을까 싶어서 한 말이었다.반승제는 다른 사람의 집안일에 관여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하지만 직접 목격한 이상 무시할 수는 없었다. 성혜인의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표정을 보니, 그는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그 냉철한 사람이 사랑 앞에서는 바보같이 행동하니 말이다.“아니에요. 지금쯤이면 아마 야근하고 있을 거예요.”‘그래, 아주 전형적인 핑계지.’이런 일을 처음 겪은 반승제는 말없이 창밖만 바라봤다.“그럼 식사를 시작할까요?”성혜인은 반승제가 한 입도 먹지 않은 것을 보고 입맛에 맞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배가 고팠던 그녀는 이것저것 몇 입 먹고는 바로 계산하러 갔다.서민규와 여자는 카운터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성혜인이 카운터로 가면서 무조건 마주치게 된다. 반승제는 말리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성혜인은
성혜인은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내일 서천으로 가야 하니 오늘 어디에서 묵든 다 상관없었다. 굳이 포레스트로 가 반승제의 눈을 피해 다닐 바에는 로즈가든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성혜인은 로즈가든에 도착해 따뜻한 물에 씻고 나와 휴식을 취하려 했다.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가 문을 부실 듯이 두드렸다.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문 앞에 도착해 보니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임남호와 얽힌 그 여자였다.여자는 오늘 민낯이었지만 두툼한 눈썹과 아이라인 문신을 해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야, 이 나쁜 년아! 문 열어!”여자는 있는 힘을 다해 문을 두드렸다. 당장이라도 문을 뚫고 들어올 기세였다.하지만 이 튼튼한 문이 망가지는 것보다 민원 신고를 받는 게 더 빠를 것이다.맞은 편에 살던 최효원은 계속되는 소음에 잠에서 깼다.잠옷을 걸친 채 나온 최효원은 문밖에서 분에 찬 여자를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뭐 하는 거예요?”“이 년이 제 남자를 숨겨서 그래요!”그녀의 말에 최효원은 눈을 반짝였다. 성혜인의 집 현관문을 바라보는 그녀의 입꼬리가 살포시 휘었다.‘경헌이와 대표님으로 모자라 다른 여자의 남자까지 꼬셨어?’최효원은 이 상황을 녹화하면서 여자에게 질문을 던졌다.“그쪽 남자를 뭐 하러 숨겨요?”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여자는 힘껏 문을 두드렸다.“내가 어떻게 알아요! 이 년, 자본주도 있다니까요. 아주 나쁜 년이에요!”여자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들을 서슴치않고 뱉었다.성혜인은 당연히 문을 열지 않았다. ‘적당히’를 모르는 이 여자와 정말 싸운다면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성혜인은 경비실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여자 역시 입주자이기 때문에 경비실에서도 강경한 조치를 취하기 어려웠다.한편, 최효원은 이 상황을 녹화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임경헌에게 반희월의 전화번호를 물었다.“경헌아, 지난번에 어머님 뵈었을 때 좀 당황했던 것 같아. 어머님과 대화해 보고 싶어.”최효원은 임경헌 앞
동영상의 존재를 모르는 성혜인은 말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네. 이 늦은 밤에 옆집에서 리모델링 공사를 하네요. 민원을 넣었는데도 경비실에서 중재를 안해요.」‘리모델링?’페니의 고집 있는 성격을 이미 파악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능청스럽게 말을 지어내리라 생각하지 못했다.반승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굳이 파고들지 않았다.지방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 않았다.성혜인은 그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서운해하지도 않았다.문 밖에서는 여전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을 두드리던 여자는 성혜인이 절대 문을 열지 않을 것이라는 걸 깨닫고 욕을 뱉으며 자리를 떠났다.성혜인은 그제야 손에 있던 자료집을 내려놓고 잠에 들었다.다음 날 아침. 성혜인은 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옷가지를 챙겼다. 이때 또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정말 끈질기네.’성혜인은 눈썹을 찡그렸다. 이전에도 두 번이나 충돌이 있었지만, 정말 막무가내인 사람이다. 경비실에서도 중재가 되지 않으니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30분 후, 경찰이 도착했다.성혜인은 경찰을 보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여자는 성혜인을 보자마자 바로 달려들었지만 경찰에게 저지당했다.“용건 있으면 경찰서 가서 얘기하세요.”성혜인은 얼굴을 구기며 휴대폰을 쳐다봤다.하지만 신고자인 성혜인은 우선 경찰서에 다녀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여자가 또 이런 소란을 피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하지만 여자는 생각보다 적반하장이었다. 온갖 트집을 다 잡는 통에 경찰서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었다.1시간이면 해결될 줄 알았던 일이었지만, 성혜인은 무려 4시간 동안 시달려야 했다.서명을 하고 나온 성혜인은 화가 난 나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바른 사람도 이런 여자를 만나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왜곡된 논리로 끊임없이 비난하기 때문이다.한동안 계속된 여자의 욕설에 참다못한 경찰은 조용히 하라며 책상을 내리치기도 했다.성혜인은 먼저 밖으로 나왔다. 여자는 남편이 올 때까지 안에서 기다려야 하는 신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