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보겸은 엄마의 생각을 존중했다. 엄마가 가고 싶다면 그냥 가면 되는 일이었다.그 두 장의 혼인관계증명서처럼 엄마가 보고 싶다면 언제든 볼 수 있었다.엄마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그는 언제나 전폭적으로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장하리는 온몸이 굳었다. 올라가서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저항감이 솟아났다.마치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지금의 행복이 금방이라도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서주혁의 통화 내용을 우연히 엿들은 후부터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서주혁 같은 남자가 누구에게 첫눈에 반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분명 굉장히 적극적으로 행동했다.장하리는 어리석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예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였는지 그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지금 서주혁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때도 모든 수단을 다 써서 그녀를 떠나게 했던 걸까?그녀는 차마 그 생각을 깊이 들여다볼 용기가 없었다.장하리는 매우 영리했다. 4년이라는 시간은 그녀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고 서주혁에게 기회를 준 건 그녀였다. 솔직하지 않았던 건 서주혁이었다.반승제도 인내심이 많았다. 그녀가 기억을 되찾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제 서보겸이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한 걸 보니 그녀와 서주혁의 관계가 꽤 진전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지금 이곳에 온 것도 서주혁은 모를 가능성이 컸다.반승제는 서주혁과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기에 그의 성격을 모를 리 없었다. 좋아하지 않을 때는 무정하게 굴다가도 일단 좋아하게 되면 극도로 집착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장하리를 자기만의 공간에 숨긴 것도 그녀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사랑하기 전까지는 세상에 내보내지 않으려는 서주혁다운 행동이었다.지금 장하리는 분명 몰래 나온 것이었다. 그녀도 이미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세 사람은
서수연은 이 근처에서 오래도록 기다렸다. 귀국한 이후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장하리를 찾아 헤맸다.서주혁이 머무는 별장에는 들어갈 수 없으니 회사로 올 수밖에 없었다. 장하리가 언젠가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러 올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성혜인과 장하리는 아주 가까웠으니 말이다.결국 하늘도 서수연의 간절함에 응답해 준 걸까. 서수연은 드디어 이 파렴치한 여자를 찾아냈다.장하리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한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그녀에게 내던졌다.“더러운 년, 감히 숨어있어? 말해두겠는데, 네가 아무리 우리 오빠 애를 낳았다고 한들 서씨 가문에서는 절대 너를 인정하지 않아! 예전에는 한심하게도 우리 오빠 사랑을 구걸하며 개처럼 비굴하게 굴더니 결국 어땠어? 우리 오빠가 너를 감방에 처넣었잖아. 하하! 그때 아주 고통스러웠지? 정말 안됐네, 우리 오빠는 널 사랑하지 않아. 네가 서보겸이라는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진작에 널 잊었을 거야. 지금 오빠가 너한테 돌아온 것 같아? 아니. 넌 단지 서보겸이 엄마로서 남아 있을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야! 너는 그냥 도구야, 도구!”서수연은 숨도 쉬지 않고 독설을 퍼부었다. 눈빛은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장하리의 코끝엔 커피 향만이 가득했다. 머릿속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주변은 온통 혼란스러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장하리는 서수연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서수연의 옆에는 며칠 전 집을 찾아왔던 여사가 서 있었다.명희정은 서수연의 손을 잡아당기며 한숨을 내쉬었다.“수연아, 여긴 왜 또 왔어? 네 오빠가 분명히 말했잖니. 더 이상 저 여자에게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고. 나도 저 여자가 싫긴 하지만 지금 네 상황이 좋지 않잖아. 네 오빠가 또 너를 해외로 보내면 어쩌려고 그래?”“엄마, 뭐가 걱정이에요? 오빠가 날 해외로 보낸다고 해도 거기서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에요. 하지만 이 천
서수연이 장하리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서보겸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이 천한 자식, 당장 비키지 못해?!”서수연은 서보겸을 거칠게 밀어냈다. 아직 키가 작은 서보겸은 그대로 책상에 머리를 부딪쳤고 그 충격으로 이마에서 금세 피가 흘러내렸다.장하리는 처음에는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 장면을 목격하자마자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보겸아?”서수연의 눈가에 한순간 기쁨이 스치더니 그녀는 손을 들어 장하리의 뺨을 후려쳤다.“잘됐네! 원래 이 잡종 같은 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네가 낳은 자식이 서씨 가문의 재산을 이어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당장 꺼져, 너희 둘 다 내 눈앞에서 썩 꺼져 버려!”장하리는 서보겸의 상태가 너무 걱정되어 서수연의 손길을 피할 새도 없이 그대로 뺨을 맞았다. 하지만 서수연은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근처에 있던 의자를 들어 장하리의 머리를 내리쳤다.순간 카페 안의 손님들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이미 누군가 경찰에 신고한 상태였다.쾅!의자가 머리를 강타하자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여러 장면이 스쳐 지나가며 장하리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이 광경을 목격한 명희정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다급히 서수연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너 정말 미쳤어! 이러다 진짜 사람이 죽을 수도 있어! 그냥 뺨 한 대 정도로 끝냈어야지, 이렇게 심하게 때리면 어쩌자는 거야! 네 오빠가 알게 되면 또 널 해외로 보내버릴 거라고!”서수연은 그제야 마음속 분노가 조금 풀린 듯 웃으며 말했다.“보내면 보내라지. 나는 외국에서도 잘만 지낼 수 있어. 차라리 장하리가 이대로 불구가 되거나 바보가 됐으면 좋겠네!”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과 구급차가 도착해 장하리와 서보겸을 병원으로 이송했다.카페 안의 난동 장면은 성혜인도 CCTV를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 분노에 휩싸여 즉시 병원으로 향했다.한편, 서주혁 역시 그 소식을 듣고 회의 도중 자리를 박차고 병원으로 달려갔다.장하리와 서보겸 모두 응급실에서 치료를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상황이 이렇게 될 수 있단 말이지?’서수연은 미친 사람처럼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지만 몇몇 사람에게 가로막혔다.변호사가 옆에 있던 사람과 대화하는 소리를 들은 서수연은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가중 처벌, 고의 상해, 교도소 이감, 그것도 중범죄자 감옥라니...순간 서수연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마치 무언가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오빠가 날 죽이려는 건가? 중범죄자 감옥에 보내려 한다니. 내가 거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거긴 모두 악랄한 인간들뿐이라 서수연은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다.‘안 돼. 난 절대로 그곳에 갈 수 없어.’“제가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제발 오빠에게 전화 한 통만 하게 해주세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서수연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하지만 변호사와 그가 데려온 사람들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공적인 절차에 따라 경찰과 업무를 처리했다.서수연은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며 그저 멍하니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때 한 쌍의 구두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 구두의 주인은 바로 변호사였다.변호사는 천천히 그녀 앞에 쭈그려 앉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수연 씨, 중범죄자 감옥으로 이송되는 건 서 대표님의 뜻입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당신도 잘 알겠죠. 아무리 버텨도 석 달이면 정신이 붕괴할 겁니다. 1년 뒤에 만약 살아 있다면 그때는 정신병원으로 옮겨드리겠습니다. 이 세상 모든 죄수가 중범죄자 감옥에 들어갈 기회가 있는 건 아니니, 그 시간을 잘 즐기시길 바랍니다.”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마치 애완동물을 다루듯 말했다.서수연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꺼져, 네가 뭔데 감히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당장 오빠한테 전화해! 내가 직접 통화하겠어! 네놈들이 멋대로 한 짓이 틀림없어!”남자는 한숨을 쉬며 일어나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등지고 걸어갔다.“돌아와
의사는 서둘러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괜찮습니다. 하리 씨는 운이 좋으시네요. 한 달 정도만 더 쉬시면 완전히 회복하실 겁니다.”서주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채 그저 입술을 달싹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고맙습니다.”장하리의 병상 곁에 앉은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자신의 볼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손끝은 차갑고 그의 뺨도 차가웠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있어야만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한편 장하리는 그저 긴 꿈을 꾼 듯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참담하고 한치의 미련조차 없는 삶이었다. 그녀는 그저 외부인의 시선으로 아무런 감정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이윽고 갑자기 눈앞에 한 줄기 빛이 나타났고 장하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천장에 있는 불빛이 눈을 날카롭게 찌르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손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무언가에 억눌려 움직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자신의 손을 꽉 잡고 있는 서주혁의 모습이 보였다.서주혁은 구겨진 양복을 입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있었으며 눈이 심하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녀가 눈을 뜬 것을 보자 그의 동공이 순식간에 커졌다.“여보, 깨났어요?”장하리는 그를 한 번 보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서주혁은 곧바로 의사를 불러 검사를 받게 하고 본인은 서둘러 샤워하고 머리를 감은 뒤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병상 앞으로 돌아왔다.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리 씨는 금방 회복하실 거예요. 서 대표님도 잠시 쉬세요. 계속 이렇게 깨어 계시면 쓰러져요. 그러면 하리 씨도 걱정하실 거예요.”그러나 서주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장하리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이렇게 꼭 붙들고 있어야 그녀가 떠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방금 장하리가 그를 쳐다본 그 눈빛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서주혁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혹시 그녀가
장하리는 서주혁의 이런 초췌한 모습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다.서주혁은 늘 오만하고 냉정하며 여자에게는 가차 없던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지금은 고개를 파묻고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장하리는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가 너무 세게 잡고 있었다.“미안해요...”“미안해, 하리야.”“여보, 미안해요.”서주혁은 계속해서 사과하며 그녀의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장하리는 너무 피곤했다. 그가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말했는지, 또 얼마나 오래 울었는지 알 수 없었다.눈이 시려왔다. 아마도 천장 불빛이 너무 강해서일 것이다. 장하리는 다시 눈을 감았고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장하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서주혁은 여전히 그녀 곁에서 고개를 숙인 채 잠들어 있었다.의사가 약을 갈아끼우다가 그녀가 손을 빼내려고 하는 걸 보고는 급히 막았다.“서주혁 씨가 나흘간 한숨도 쉬지 못했습니다. 그냥 잠시라도 잘 수 있도록 해주세요.”장하리는 눈을 한 번 깜빡였고 의사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나흘 밤낮으로 잠도 안 자고 버텼어요.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쓰러지고 말 겁니다. 정말로 하리 씨를 걱정하고 있어요.”장하리는 뭐라 말할지 몰랐다. 그녀 자신도 여전히 지쳐 있었고 머리가 아팠다.의사는 조심스럽게 약을 갈아 끼우고 그녀의 상태를 살핀 후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야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의사가 떠나자 병실에는 장하리와 서주혁만 남게 되었다.서주혁은 정말 지쳤는지 여전히 그녀 옆에서 고개를 떨군 채 잠들어 있었다.장하리는 밖을 바라보았다. 저녁노을이 창문 너머로 방을 따스하게 물들였다.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귓가에 서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는 아직 쉬고 계셔. 조금만 기다리자.”“엄마, 괜찮아졌어요?”“아직이야. 병원에 반 달은 더 있어야 해.”장하리는 온몸이 뽀송뽀송한 것을 느꼈다. 누군가 그녀의 몸을 닦아준 것 같았다.그녀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그때 작은
서보겸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바라보자 장하리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이가 이렇게 컸는데 자신이 아이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몇 년을 놓쳤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그녀가 강성에서 평온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아이는 엄마가 가장 필요했던 시기였다.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녀는 도망쳤고 그렇게 하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결국 이렇게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장하리의 시선은 서보겸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많이 울었는지 코끝이 빨개진 채 그녀를 조심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가 눈을 뜨는 순간 다시 어디론가 떠나갈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자 장하리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하지만 장하리는 이 모든 상황과 서주혁이라는 남자를 다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세상이 그녀에게 터무니없는 장난을 치는 것만 같았다. 4년 전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결심했을 때는 그에게 정말 아무런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랑도, 증오도 전부 사라져 버린 줄 알았다.그런데 지금 서주혁이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계속해서‘여보’라고 부를 때마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세상은 끝내 장하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미 잊어버린 것들을 왜 다시 마주하게 하는 걸까.목구멍이 꽉 메어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그때 서주혁이 서보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보겸아, 아빠가 엄마랑 잠깐 이야기 할게. 먼저 나가 있을래?”서주혁은 장하리가 모든 것을 기억해 낸 것임을 알아차렸다. 결국 이날이 오고야 말았다. 그동안 기대했던 모든 행운은 날아가 버렸고 과거의 잘못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그의 가슴에 꽂혔다.서보겸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걱정 가득한 얼굴로 병실을 나섰다. 서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안아 들고 병원 밖에 대기 중이던 검은색 차에 태웠다.서보겸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엄마, 가요?”아이조차도 장하리가 이곳에 머물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서주혁은 가슴 한가운데 큰 구멍이 뚫려 피
“보겸아, 아빠를 도와주기 싫어?”“도와줄래요.”서보겸은 귀여운 목소리로 말하며 작은 손을 들어 서주혁의 어깨를 토닥였다.“아빠, 울지 마세요.”“아빠 안 울어. 하지만 보겸이랑 엄마가 가버리면 아빠는 진짜 울지도 몰라.”“안 갈게요.”서주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에게 남은 유일한 카드는 아이뿐이었다.그는 장하리를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전 그녀가 아이를 바라보던 눈빛에는 진지함과 함께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분명 서보겸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서보겸은 자폐증이 있었다. 한동안 엄마를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고열에 쓰러질 정도로 아파도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다. 장하리는 그 모든 일을 떠올릴 때마다 죄책감이 더 깊어질 것이다.그 죄책감이 남아 있는 한 장하리는 떠나지 못할 것이다.장하리는 서주혁에게는 마음을 독하게 먹을 수 있어도 서보겸에게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서주혁은 손을 들어 서보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아빠가 한 말 기억해. 나중에 많이 울어야 해. 엄마랑 아빠가 화해하면 아빠가 너한테 보상해 줄게.”“네.”서주혁은 다시 한번 숨을 고르고 병실 문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막상 손잡이를 잡자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모든 용기가 한순간에 사라진 듯 그의 손끝은 문손잡이 위에서 망설였다. 한참을 주저한 끝에 그는 천천히 문을 밀었다.문이 열리자마자 그가 본 건 병상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장하리였다.그녀는 평온해 보였다. 고요하고 조용하게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서주혁은 문을 닫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여보.”그는 조심스레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장하리는 그가 그 호칭을 부르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감정을 억눌렀다. 그 어떤 말도 내뱉지 않았다.서주혁은 침대 곁에 앉아 그녀를 꼭 껴안았다.“다 기억해 낸 거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장하리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으며 애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