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대체 언제 양보를 한 적이 있단 말인가? 서주혁이 무슨 면목으로 이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있는 거지?말이 통하지 않는 남자와는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하는 거지? 서주혁은 독재적이고, 유아독존적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있다.순간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지만 서보겸이 아직 거실에 있기에 너무 큰 소리로 욕을 하기도 난감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는 감정을 앞세우는 것보다 이성적으로 대해야만 한다.“당신 일부러 보겸이를 위해 강성까지 와서 유치원에 보내놓고 이제 와서 다시 데려가려고요? 보겸이의 기분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서주혁 씨는 인생에서 당신의 감정만이 가장 중요한가요?”장하리의 말에 서주혁은 속눈썹을 늘어뜨리고 차갑게 굳어버린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자포자기한 듯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어차피 내가 뭘 해도 당신은 날 좋아하지 않을 거잖아요.”그녀를 놓아주고 서주혁은 다시 냄비 안의 요리를 볶기 시작했다.그러자 장하리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듯 그의 뒷모습을 보며 협상을 시도했다.“저는 제원에 가고 싶지 않아요. 애초에 저는 서주혁 씨의 마음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당신이 저에게 반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존감이 높은 여자도 아니에요. 당신 같은 신분의 남자라면 원하는 여자도 전부 얻을 수 있겠죠.”서주혁은 빵과 계란 프라이를 접시에 담으며 담담하게 답했다.“하리야, 난 오직 너만을 원해.”그 말 한마디에 장하리는 갑자기 무언가에 물린 듯 심장으로부터 거센 통증이 몰려왔고 심지어 약간의 두려움까지 느껴졌다.낯선 감정에 장하리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고 그녀의 안색은 더욱 차가워졌다.그러자 서주혁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밥 먹으러 나와요. 다 먹고 출발하자.”한편, 서보겸은 의자에 앉아 서주혁과 장하리를 번갈아 보았다.두 사람 사이가 틀어졌음을 금방 눈치챈 서보겸은 눈시울을 붉히며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나이프와
서보겸을 바라보는 표정이 자애로울수록 장하리는 마음속으로 서주혁에게 화가 났다.식사를 마친 그녀는 곧바로 자신을 데리러 온 경호원 몇 명을 발견했다.서주혁은 정말 장하리를 제원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온몸으로 저항하며 서주혁과 얘기해보려 애썼다.“서주혁 씨, 우리 얘기 좀 잘 해보면 안 돼요? 그래요, 당신이 정말 나를 좋아한다 쳐요, 그런데 정말 좋아한다면 제 마음 좀 들여다봐 주면 안되겠어요?”같은 시각, 서주혁은 이미 서보겸을 차에 태웠고 이제 그 자리에는 그와 장하리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하리야, 네 마음속에 내가 있긴 해? 네 미래에 내가 있긴 하냐고. 없으면 듣고 싶지 않아.”그러자 순간 말문이 막혀버린 장하리는 어떻게 반박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었다.그녀는 정말 강성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장하리는 강성이 좋았다. 게다가 제원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온몸이 떨리고 소름이 돋아 장하리는 제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욱 거북했다.다시금 감정이 복받쳐 오르자 장하리는 갑자기 복통을 느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곧 그녀의 이상함을 눈치챈 서주혁이 그녀를 불렀다.“하리야?”그러나 서주혁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장하리는 점점 강해지는 통증에 옆에 천천히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숨을 쉴 수 없었다.“하리야, 왜 그래?”당황한 서주혁이 손을 들어 장하리의 이마를 살폈지만 손에 닿는 것은 식은땀뿐이었다.“병원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장하리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여전히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서주혁은 즉시 차를 몰고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갔다.잠시 후, 의사가 수액을 투여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건강을 잘 챙겨야겠어요. 몸이 너무 허약해요. 아이를 낳은 적 있죠? 그런데 몸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어요. 주의하세요. 그리고 이제 둘째는 갖지 마세요. 안 그래도 몸이 어렸을 적부터 영양실조였던 모양인데 어른이 되어서도 장기간 스트레스
서주혁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고 여전히 장하리의 두 발을 움켜쥐고 있지만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도무지 말이 통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장하리는 입술을 깨물며 눈시울을 붉혔다.“정말 백번 양보한다고 쳐요. 정말 저를 좋아한다면 먼저 제 의사부터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전 사과를 원하는데 당신은 저에게 강제로 배를 쥐여주면서 속으로는 제가 주제를 모른다고 욕하고 있잖아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서주혁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장하리의 발을 부드럽게 마사지해주었다.“제원으로 돌아가는 일은 상의할 필요 없어.”장하리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이 남자는 꽉 막혀있어 소통할 수 없다.어쨌든 오늘 제원으로 돌아가는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으니 아직 기회가 있다. 수액 한 병을 다 맞고 나서 장하리는 자신의 배를 감싸며 말을 꺼냈다.“나 죽 먹고 싶은데 밑에 가서 사다 주세요.”그러자 서주혁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죽을 사러 내려갔다.그가 떠나자마자 장하리는 또 문을 열고 입구에 있는 경호원에게 화장실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경호원은 남자이기에 화장실 내부까지 따라갈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성공적으로 화장실에 진입한 장하리는 화장실 안의 큰 창문을 보고는 바로 옆에 있는 테이블을 끌고 가 그 위를 밟고 기어나갔다.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그녀는 일부러 엘리베이터를 피해 곧장 계단으로 내려갔다.맨 아래층에 도착했을 때, 장하리는 우연히 동료 전아영을 만나게 되었다.심지어 정면으로 부딪쳤고 전아영의 눈에는 순간 혐오감이 스쳐 지나갔다.이번에 장하리에게 자리를 빼앗긴 후, 전아영은 며칠 동안 홀로 화를 삭여야만 했다. 서주혁이 매일 유치원에서 아들 서보겸의 곁에 있어 주는 것을 보면 그가 아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만약 그녀가 서보겸의 유치원 선생님이 되었다면, 겸사겸사 그대로 서주혁의 침대로 올라갔다면 앞으로의 인생은 성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두컴컴한 방안을 보며 장하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자기 전에 불을 끈 기억이 없는데 누가 끈 거지?쓱 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자리에 앉은 장하리가 무심코 침대 옆을 바라보았다.침대 옆 1인용 소파에는 웬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바깥의 희미한 불빛을 통해 그녀는 곧바로 그 실루엣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장하리는 마치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마냥 멍해지고 머릿속은 펑 터질 것만 같았다.하루 종일 도망만 다녔는데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서주혁이 옆에 있다고? 말이 돼?허둥지둥 방안의 조명을 켜보자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는 역시나 서주혁이었고 그의 안색은 마냥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장하리는 저도 모르게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었고 말로 이룰 수 없는 공포가 발바닥으로부터 파도처럼 밀려왔다.그러나 서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 사이에 담배를 물고 불도 붙이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물고 있어야 안심이 되는 것 같아 보였다.담배꽁초는 이미 한참 동안 타액에 절여져 잔뜩 찌그러져 있었고 장하리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리는 것을 보고 서주혁은 속눈썹을 늘어뜨리고 자신의 기세를 꺾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죽은 먹을 거예요? 아직 따뜻해요.”그의 손가락이 옆 테이블을 가리켰다.장하리는 그제야 테이블 위의 냄비에 죽 한 그릇이 데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이윽고 서주혁이 몸을 일으켰다. 온갖 고생은 전부 겪은 듯 옷가지와 머리가 헝클어져 있는 것을 보니 도착한 지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다.그는 그릇을 꺼내 숟가락으로 두어 번 젓고는 다시 침대 옆에 앉아 장하리에게 그릇을 건넸다.“잠에서 깼으면 좀 먹어요.”장하리는 갑자기 눈앞의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화를 낼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매우 슬퍼 보였다.누군가의 슬픔은 한바탕 크게 울고 밖으로 토해내면 그만이지만 서주혁의 슬픔은 내성적이었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마음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이다.그러한 모습은 서보겸도 그를 똑 닮았다. 하지만
서주혁의 한마디에 장하리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서주혁의 성격을 극혐하는 건 맞지만 어딘가 처량해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약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게다가 갑자기 그녀에게 잘해주니 장하리는 괜스레 마음이 불안해졌다.그들은 만난 지 일주일도 채 안 되었는데 서주혁은 장하리를 강제로 제원으로 데려가려고 하니 그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그런데 서주혁은 또 하필 소통이 잘되지 않는 꽉 막힌 사람이라 가끔 장하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당장이라도 그녀를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방안은 조용했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밤새도록 실랑이를 벌이다 보니 서주혁도 지쳐버린 것이다. 그는 장하리의 한 손을 잡고는 그녀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해주었다.장하리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피부에 닿은 수염 자국이 쿡쿡 사람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장하리는 그대로 침묵을 지킬 예정이었지만 서주혁이 다시 한번 그녀에게 물었다.“아직도 배가 아파?”장하리는 아직 생리 중인 데다 밤새 너무 많은 고생을 했고 바깥에는 또 비가 내리고 있는데 오는 길에 맞진 않았을까?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지만 서주혁은 장하리가 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조금요.”그 말에 서주혁은 곧바로 이불을 젖히고 침대 위로 올라가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장하리는 서주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두 번 정도 그를 피했고 놀랍게도 서주혁은 계속하여 질척거리는 것이 아닌 침대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걸치고 잠을 청했다.“발은 내가 따뜻하게 녹여줄 테니 얼른 자.”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주혁은 두 다리로 장하리의 발을 걸어 그의 두 다리 사이에 끼워 넣었다.뜬금없어.그러나 장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잠이 들었다.그녀가 잠들고 서주혁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이곳에 오기까지 서주혁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너무나도 많은 생각 속에서 불안에 떨어야 했다.이곳은 장하리의 고향이 아니다. 게다가 제대로 등록되지 않은 불법 차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서주혁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장하리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이 꿈인지 아닌지를 간절히 확인하고 싶었다. 제원은 두 사람의 시작이 담겨있는 곳이었고 서주혁은 장하리를 제원으로 데려가 그녀의 등장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서주혁은 강성이 익숙하지 않았다. 하여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장하리가 언제라도 훨훨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하여 서주혁은 장하리를 곁에 묶어두고 싶었다. 가장 비열한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그녀가 그의 코앞에 머물러있기를 원했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장하리는 낯선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어젯밤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한편, 서주혁은 이미 아침을 사서 옆 침대맡에 두었다.장하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씻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지만 장하리는 서주혁이 큰 꼼수를 숨겨두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 그녀를 괴롭힐 것 같았다.그러나 아침 식사가 끝날 때까지도 서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마치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장하리가 사라져버리기라도 하는 듯 서주혁은 줄곧 장하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자신을 향한 뜨거운 시선에 장하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서주혁에게 물었다.“서주혁 씨, 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그러자 서주혁은 다시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하며 마침내 장하리의 앞에서 두손 두발 전부 들었다.“제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강성에 계속 있고 싶다고 했었죠?”“네.”“그럼 저도 강성에 머물면서 당신 집 맞은편에 살 거예요. 보겸이가 하리 씨를 엄청 좋아해요. 그러니까 앞으로 당신이 매일 와서 보겸이와 함께 저녁 한 끼 먹어줘요. 그래도 돼요?”갑자기 부드러워진 서주혁의 말투에 장하리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아니나 다를까, 서주혁은 줄곧 첫 만남부터 타인의 의사는 거의 묻지 않고 항상 멋대로 결정을 내리곤 했었다.그런데 지금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묻고 있다.갑자기 달라진 서주혁의 모습에
디저트를 가지고 온 서주혁은 음식을 장하리의 눈앞에 내려놓았다.순간 미안한 감정이 든 장하리가 우물쭈물하자 서주혁이 먼저 물었다.“먹고 강성으로 돌아갈래? 하리 넌 기억을 잃었을 테니 아직 이곳에 익숙하지 않잖아. 돌아가서 계속 유치원 선생님으로 일하고 매일 보겸이와 저녁만 먹어주면 돼. 너한테는 다른 일을 강요하지 않을게.”장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숟가락을 들어 디저트를 먹기 시작했다.다 먹은 후, 그녀는 서주혁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차에 탄 후 자동차가 슈퍼마켓을 지나자 서주혁은 또 차에서 내려 간식을 사주기도 했다.“네가 배고플까 봐... 차에서 먹어.”장하리는 타인이 그녀에게 잘해주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대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그녀에게 잘해주면 장하리는 항상 배로 돌려주기 위해 노력한다.앞 좌석에서 운전하던 비서가 백미러를 통해 그들을 힐끔 바라보았다. 서주혁은 약간의 결벽이 있는 탓에 특히 차 안에서 음식을 먹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하물며 간식을 먹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어떤 간식이든 냄새가 남기 때문이다.그런데 현재 서주혁은 직접 장하리에게 간식을 먹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순순히 간식을 받아먹는 장하리의 모습을 보다 보니 무언가에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이 심장이 쿡쿡 쑤셨다.그의 기억 속에서 서주혁과 장하리 사이에는 이토록 평화로운 추억이 많지 않았다.4년 전 서주혁은 사사건건 장하리를 모욕하며 괴롭혔고 4년 후 다시 마주쳤을 때는 서로에게 날을 세우며 날카롭게 맞섰다. 그러니 지금처럼 따뜻하게 서로를 대하는 장면은 정말 보기 드물었다.심지어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하지만 그들의 아이는 어느새 이미 네 살이 넘었고 그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실패가 담겨있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남편으로서의 서주혁의 실패이다.한편, 오물오물 간식을 받아먹는 장하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서주혁이 옆에 있던 휴지를 뽑아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장하리는 순간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고 어리둥절한 표
왜 그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꿈속에 나타났던 사람은 분명 서주혁이었다.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입술이 저도 모르게 바들바들 떨려 났다.그때, 마침 서주혁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장하리의 침대 옆에 앉아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이마에 손을 뻗었다.꿈 때문인지 장하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순간 뒤로 물러나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서주혁을 향한 장하리의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했고 그녀는 손에 이불을 꽉 쥐고 있었다.그러자 서주혁은 허공에서 갈 길을 잃은 손끝을 살짝 움츠렸다가 다시 손을 거두어들였다.“악몽 꿨어요?”장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있어 그 꿈은 확실히 악몽이었다.심지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서주혁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여운이 깊은 악몽이었다.장하리는 며칠 전의 서주혁은 이미 충분히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녀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꼭 냉혹하고 무자비한 군주 같았기 때문이다.하지만 꿈속의 서주혁은 차마 말로 이룰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악랄했다. 마치 일부러 그녀를 괴롭히고 모욕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리고 경찰서에서의 대화는 장하리의 존엄을 바닥에 짓밟고 뭉개버리는 것과 다름없었다.장하리의 기억 속에서 그녀와 서주혁은 그렇게 인연이 깊은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남자의 꿈을, 심지어 이토록 무서운 꿈을 꾸게 된 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장하리는 진심으로 꿈속에 다시 들어가 괴롭힘을 당하는 자신의 뺨을 한 대 내리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왜 그렇게 자신을 낮추면서까지 한 남자에게 매달린단 말인가? 대체 남자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자신의 인생을 망칠 필요가 있단 말인가?하지만 아무리 화가 나고 분해도 그건 결국 꿈일 뿐 현실이 아니다. 만약 꿈속의 감정을 현실까지 끌고 온다면 그건 장하리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유치원엔 내일 말해둘게. 내일부터 계속 출근해요. 아
반승제는 순간 멍해졌다. 예전 일을 떠올리려 했지만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저 자신은 성혜인을 선택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뿐이었다.“시환아, 내 충고를 하나 하자면, 진심으로 지민 씨를 감동시키는 데 집중해. 억지로 잡으려고 하다간 너도 서주혁처럼 될 거야.”온시환은 순간 말을 잃었다. 사실 그도 두려웠다.하지만 공지민은 죽은 사람에게 마음이 묶여 있는 데다 자신의 진심 따윈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았다.반승제가 전화를 끊자 온시환은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잠시 후, 그는 자신의 부하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그렇게 공지민은 바로 오하윤을 만나러 갔다.오하윤은 그녀에게 과일 주스를 따라 주며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나 오늘 원아정 만났어. 너도 기억하지? 고등학교 때 널 화장실에 가둬놓고 물을 끼얹으라고 시킨 애 말이야.”공지민이 원아정을 잊을 리 없었다. 원아정은 모든 악몽의 시작이었다.그때 원아정은 화장실로 그녀를 몰아넣고 옷을 벗기라고 명령했으며 사진을 찍어 협박했다. 그 이후 괴롭힘은 점점 더 악랄해졌다.공지민은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저 묵묵히 참으면 지나갈 거라 믿었지만 어느 날 원아정은 의자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며 명령했다.“공지민, 너랑 은우가 원래 아는 사이라며? 지금 무릎 꿇고 빌어. 안 그러면 네 사진을 모두에게 뿌려서 네가 어떤 년인지 보여줄 거야.”그녀는 그런 고등학생은 본 적이 없었다. 고고한 척하면서도 잔인했고 사람을 완전히 조롱거리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원아정은 재벌가 출신으로 모두가 그녀를 피했다. 항상 고급 외제차가 그녀를 데리러 왔고 때로는 경호원까지 동원되었다. 그녀와 비슷한 수준의 친구들조차 그녀의 괴롭힘을 부추겼다.만약 구은우가 없었다면 공지민은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그때 원아정 앞에 무릎을 꿇고 개처럼 용서를 구했다.이후 구은우가 원아정에게서 사진
지금 공지민은 사실상 온시환에게 감금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온시환은 외부와의 연락을 금지하지는 않았다.오하윤의 전화가 걸려 왔을 때 공지민은 별다른 감정 없이 받았다. 사실 그녀는 이 사람과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오하윤의 첫 마디가 공지민을 놀라게 했다.“지민아, 잠깐 만날 수 있을까? 누가 은우를 죽음으로 몰았는지 알아냈어.”공지민의 눈빛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하지만 문을 열었을 때 문밖에 서 있는 두 명의 경호원을 발견했다.온시환은 그녀가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오하윤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는 전화 속에서도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래, 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널 정말 싫어했어. 왜냐하면 나도 은우를 좋아했거든. 정말 너무너무 좋아했어. 그때 내 계부가 자주 날 때렸고 난 늘 구석에서 몰래 울곤 했어. 그런데 은우는 그런 나를 마치 천사처럼 도와줬어. 먹을 것도 챙겨주고 나를 위로해 줬거든. 신고하자고 말했지만 난 너무 겁쟁이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그 이후로 난 계속 은우를 지켜봤어. 은우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니,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지. 너도 알잖아? 은우는 그 자체로 모든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이었어. 그래서 내가 은우를 찍은 사진이 그렇게 많았던 거야. 예전에 난 계속 널 질투했어. 은우는 언제나 널 지켜줬으니까. 그런데 그동안 난 네가 돈 때문에 온시환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이제야 알았어. 지민아, 오늘 밤 아주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됐어. 이걸 너한테 알려주는 게 내 사과가 될 거야. 잠깐 나올 수 있어?”“알겠어. 주소 보내줘.”전화를 끊은 공지민은 바로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성혜인은 마침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공지민이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 조금 의아했다.“무슨 일이에요, 지민 씨?”“혜인 씨, 나 잠깐 밖에 좀 나가고 싶어요. 시환 씨에게 전화해서 얘기 좀 해줄 수 있어요? 내가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거든요.”성혜인은 두 사람의 관계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원아정의 얼굴에는 잠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지만 오하윤이 옆에 있다는 걸 생각하며 서둘러 표정을 감췄다.오하윤은 아직 구은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문득, 공지민이 왜 그렇게 앨범에 집착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구은우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남겨진 사진이 거의 없어서 더 간절했던 게 아닐까...오하윤은 아무 말 없이 앞에 놓인 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이 원아정은 다시 말을 꺼냈다.“하윤아, 지민이 지금 제원에 있지?”원아정이 평생 가장 싫어했던 사람은 공지민이었다.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의 여자가 어떻게 감히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남자를 빼앗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있어. 근데 내가 따로 만나진 않았어. 너 온시환 알면 금방 만날 수 있을 거야.”‘온시환이라고?’원아정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마 연승혁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조만간 만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원진이 원씨 가문을 장악한 이후 원아정은 늘 눈치를 보며 살았다. 하지만 누려야 할 대접은 빠짐없이 받았다. 원진이 돈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하윤아, 나 곧 결혼해. 상대는 연승혁이야. 넌 잘 모를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람도 온시환과 같은 무리야. 앞으로는 지민이를 만날 일도 많겠지.”고등학교 시절 원아정은 공지민을 괴롭히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구은우가 공지민을 지켜주며 이 괴롭힘은 끝이 났으나 원아정의 마음속 공지민에 대한 증오심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원아정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에는 악의가 서려 있었다.한편 오하윤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한때 그녀도 공지민을 질투했다. 공지민이 구은우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은우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들은 뒤 오하윤은 갑자기 공지민이 안타깝게 느껴졌다.예전의 공지민은 매우 조용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구은우 앞에서는 유일하게 환하게 웃곤 했다.그녀가 지금처럼 타락하고 온시환 같은 남자에게 기대고 있는 이유는 구은
룸 안은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원아정은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를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금세 악랄한 표정이 스쳤다.그녀는 얼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대답한 이는 다름 아닌 오하윤이었다.원아정은 고등학교 시절 오하윤을 알게 되었다. 당시 구은우는 학교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오직 공지민만 보였다.이 사실에 분노한 원아정은 연씨 가문 사람을 알게 되면서 구은우의 외모가 연씨 가문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점을 알아차리고 이 정보를 연씨 가문에 흘렸다.‘내가 못 가지는 건, 공지민 그년도 가지지 못하게 할 거야.’“하윤아, 나 제원에 왔어. 나올 수 있어? 얼굴 좀 보자.”오하윤은 원아정이 무서웠다.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겉으로는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척했지만 뒤로는 후배를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렸고 그 일에서도 아무런 손해를 입지 않았다.게다가 구은우를 향한 그녀의 집착은 누구나 알 정도였다. 그러다 갑자기 조용해진 그녀를 보며 모두가 의아했지만 아무도 그녀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랐다.구은우와 공지민이 졸업할 때까지 원아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만나자고 하니 오하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요즘 심심했던 오하윤은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에 곧장 약속 장소를 정했다.약속 장소에서 만났을 때 오하윤은 자신이 너무 화려하게 차려입은 것을 깨달았다. 온몸을 명품으로 둘러싼 그녀와 달리, 원아정은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이었다. 상대적으로 자신이 천박한 졸부처럼 느껴졌다.“하윤아, 오랜만이야.”어색하게 자리에 앉은 오하윤은 학창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모두가 알다시피 원아정은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돈을 아낌없이 쓰며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아정아, 갑자기 제원에 웬일이야? 너희 집 사업은 여기가 아니었잖아.”당시 원아정 집안이 대규모 사업을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고 대학 입시조차 필요 없이 앞길이 보장된 그녀를 부러워하며 줄을 서서 비위를 맞추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가며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지민이 잘 지켜. 괜히 나가서 또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온시환은 속이 상한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결국 술집으로 발길을 옮겨 한잔하려 했고, 그곳에서 뜻밖에도 원아정을 마주쳤다.‘원아정이 제원에 왔다고?’그녀 곁에는 원진이 서 있었다. 원진은 시선을 앞만 향한 채 걸음을 옮기다가 온시환을 보자 발걸음을 멈췄다.온시환도 마침 마음이 복잡한 상태라 옆에 있는 룸의 문을 열며 말했다.“같이 한 잔 할래?”원진은 망설임 없이 룸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원아정도 서둘러 뒤따랐다. 얼굴에는 상류층 특유의 오만함과 자존심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원진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원진이 있는 자리에서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할 정도였다.과거 원진은 원씨 가문을 철저한 강경책으로 정리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은밀한 거래를 했고 가문 내 반대 세력들은 대부분 사라졌다.그런 원진 앞에서 원아정은 잔뜩 움츠린 채 룸 안의 의자에 앉았다. 손을 무릎 위에 얹고 긴장한 듯 움찔거렸다. 그때 원진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연승혁과의 결혼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손을 꽉 움켜쥔 원아정은 연승혁을 떠올리니 눈가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얼마 전 연승혁을 만나러 연씨 가문에 갔다가 그가 사람을 처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상황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익숙해 보였다.겁이 많은 원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깨어나 보니 연씨 가문의 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연승혁, 그 끔찍한 인간!’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연승혁이 비록 잔혹한 수단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 구은우의 존재를 그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원아정은 원씨 가문에서 작은 개미 같은 존재였다. 원진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생활에 지친 지 오래였다.연승혁이 아무리 냉혹하더라도 그의 아내가 된다면 무
‘그래, 공지민. 구은우와 관련된 일만 나오면 이성을 잃고 주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단 말이지.’온시환은 어깨에 박혀 있던 단검을 뽑아내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옆에 있는 경호원들에게 말했다.“일단 지민이 데리고 돌아가.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공지민은 그 순간도 악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난 여기 남고 싶어요.”그녀는 직접 구은우 사건의 진상을, 그리고 그의 가족 중 누가 손을 썼는지 듣고 싶었다. 온시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데려가.”“시환 씨!”공지민은 경호원들에게 양팔이 붙들린 채 억지로 차로 이끌려 갔다.온시환은 곧 사람을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어깨의 부상은 치명적인 부위는 아니었지만, 출혈이 많았다.차 안에서 부하가 온시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이미 확인되었습니다. 일을 꾸민 건 연씨 가문의 둘째입니다.”연씨 가문의 둘째, 바로 현재 가문을 이끄는 인물이었다. 당시 권력을 다투는 상황에서 그는 형과 자신 아래의 모든 남자들을 차례로 제거했다. 연씨 가문은 전통적으로 후계자를 남자에게만 물려주는 규율을 따랐다. 딸은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가문 밖에서 태어난 남자들은 언제든 폭탄이 될 수 있었다. 구은우를 알지도 못했지만 그의 존재만으로도 위험하다고 판단해 제거한 것이다.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연씨 가문의 모든 권력은 연승혁의 손에 집중되었다. 2년 전부터 그는 해외에서 국내로 사업 중심을 옮겼고 해상 운송 사업을 시작해 원씨 가문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현재의 연승혁은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운 존재였다. 구은우를 위해 복수를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연씨 가문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거대 가문이었다. 온시환이라 해도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온시환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연승혁은 방탕한 성격에 수단이 잔혹했다. 그를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결코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는 원씨 가문의 원아정과 약혼한 상태였다. 원아정은 원진의
“당신들 도대체 뭐야!”여자는 분명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얼굴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가 구은우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이 사람 기억나요?”여자는 사진을 보는 순간 얼굴빛이 확 변했다.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모르겠어요, 이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날 풀어줘요!”공지민은 연예계에서 오랫동안 버텨온 사람답게,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었다. 그녀는 한쪽 발로 여자의 손등을 짓밟으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가로막았다.“지민아, 뭐 하는 거야?”그녀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온시환은 한 번도 그녀의 이런 냉혹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늘 부드럽고, 강인하며, 침착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녀의 눈에 번진 살기가 너무나도 선명했다.만약 자신이 막지 않았다면 이 여자의 손뼈는 이미 부서졌을 것이다.‘구은우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거야?’온시환은 속이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겨우 분노를 억누른 그는 낮게 말했다.“심문은 내 사람들이 할 거야. 넌 결과만 들으면 돼.”공지민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발을 세게 내리찍었다.온시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속이 쓰리고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옆 의자에 앉아 차갑게 변한 공지민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여자는 비명을 질렀다.“당신들 신고할 거야! 다 고소할 거라고!”공지민은 여자의 눈앞에 쭈그려 앉아 차갑게 물었다.“그때 누가 돈을 줘서 청부 살인을 사주했나요? 그 사람 얼굴을 기억하나요?”여자는 공지민을 악에 받친 눈으로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지만 두 명의 경호원이 그녀를 바닥에 제압하고 있어 꼼짝할 수 없었다.공지민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단숨에 침대에서 밀어 떨어뜨렸다.그 아이가 구조되었을 당시 대략 여섯, 일곱 살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할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와 함께 거짓말에 동
공지민은 구은우의 부모가 굉장히 화목한 부부라고만 알고 있었지, 그 사이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녀는 구은우와 오랜 친구였다. 그의 부모가 다투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대체 누가 10억을 들여 구은우의 목숨을 노린 걸까.그녀는 하루빨리 이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싶었다.“시환 씨, 신정우 어머니랑 동생은 찾았어요?”신정우의 말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그에게 돈을 요구하며 동생의 치료비를 대라고 했다.그런데 신정우가 이를 거부했으니, 아마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찾았어. 내일 나랑 같이 만나러 가자.”공지민은 온시환과 꽤 오래 알고 지냈지만 그가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문득 그녀는 과거 온씨 가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온시환이 거의 망설임 없이 온씨 가문와 절연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물론 이건 그녀가 들은 단순한 가십에 불과했다. 당시 온씨 가문 사람 중 누군가가 성혜인을 건드려 일이 몹시 커졌다는 이야기였다.온시환은 가족에게도 무척 냉정한 태도를 보였고 사랑에 있어서도 마치 구경꾼처럼 시큰둥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만큼은 진심을 다하는 것 같았다.공지민은 온시환에 대해 깊이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앞으로 그와 함께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에 대해 더 알 수밖에 없을 터였다...다음 날, 그는 정말 그녀를 데리고 그 여자를 만나러 갔다.구은우가 사고를 당했을 당시 공지민은 정신이 없어 그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기억나는 건 구은우가 구조된 후, 그 어머니와 아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그 후에는 구은우가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 치료를 받았다.그 당시 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나중에야 그 모자가 무책임하게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들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공지민은 그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많았다. 인간의 본성이란 원래 복잡하고 때로는 무척 어두운 법이다. 처음에는 구은우가 단지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그는 오래전부터 공지민에게 깊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예전에는 온시환도 잘 몰랐다. 그러다 구은우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 많은 순간, 공지민은 아마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붙잡아 두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녀 자신조차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마치 생기 없는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모습이었다.온시환이 처음 그녀를 싫어했던 이유도 바로 그녀에게서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계속 그녀를 신경 쓰다 보니, 점점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간 후 공지민의 왼쪽에는 강민지, 오른쪽에는 성혜인이 앉았다.사실 그녀는 성혜인을 알고 있었다. 과거 성혜인과 반승제의 사건이 너무나 크게 이슈가 되어 실시간 검색어에서 자주 본 이름이었다.공지민은 성혜인을 굉장히 자존심 강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생각보다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자들은 마당에 앉아 있었으며 방해하지 않고 때때로 과자나 과일을 들고 와 전해 주었다.강민지가 갑자기 공지민의 손을 잡았다.“지민 씨, 시간 될 때 우리랑 자주 만나요. 남자들이랑만 있지 말고. 남자라는 것들은 말이지, 맞춰 주면 맞춰 줄수록 그걸 당연하게 여겨요.”강민지는 아직 공지민과 온시환의 결혼이 단지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공지민에게 남자를 길들이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공지민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만약 내가 시환 씨를 단지 이용하고 있는 거라면요...”앞에 있는 두 여자는 온시환의 친구들이었다. 만약 이 결혼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거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를 몹시 싫어하게 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