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배현우는 결코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또다시 겨울이에게 보내는 선물이 도착했는데 이번에는 목에 걸 수 있는 예쁜 방울이었다.반승제는 얼굴이 여러 번 어두워졌다. 화가 났지만 곧 설의종이 온다는 사실 때문에 더 이상 배현우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설의종의 비행기가 제원 공항에 도착했을 때 설우현과 설기웅이 함께 마중을 나갔다. 설의종은 아직 회복 중이라 얼굴은 여전히 창백해 보였지만 그의 기세는 여전했다.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자기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찾지 못하자 설우현에게 물었다.“사라 박사는 어디 있지?”설우현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박사님은 집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며칠 동안 잠을 잘 못 주무셔서요.”설의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잘생긴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설의종의 시선은 설기웅에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설기웅 뒤에 숨어있는 작은 소녀에게로 향했다. 소녀는 마치 겁먹은 토끼처럼 고개만 살짝 내밀고는 다시 숨으며 설기웅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설기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설의종을 응시했다.설우현은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나섰다.“자, 다들 차에 타세요.”설우현이 운전석에 앉고 설의종은 조수석에, 설기웅과 소녀는 뒷자리에 탔다.차 안에서 설의종은 참다못해 물었다.“저 아이, 학교에 보낼 나이가 됐는데 아직도 제대로 아는 게 없어?”설기웅이 답하려는 찰나 소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알아요. 기웅 오빠를 시원하게 해주는 거 알아요.”차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설우현은 평소 그토록 침착하던 형이 서둘러 해명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마사지예요, 손목 마사지! 말을 끝까지 해야지.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말을 똑바로 하라고!”소녀는 “응”하고 작게 대답했다.설기웅은 백미러로 설의종과 눈을 마주치며 덧붙였다.“아버지, 얘는 성인이 되려면 아직 반년이나 남았어요. 전 그냥 가족처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설의종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겨우 한마
방금 대화를 끝낸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 모두 비교적 차분해 보였다.설의종은 1인용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혜인이 몸은 괜찮아? 전에 입덧이 심했다던데?”“지금은 괜찮아요. 그건 이미 다 지난 일이에요.”설우현이 대답한 후 시선을 사라 박사에게로 돌리며 말했다.“박사님, 앉으세요.”이어진 대화는 최근 함께 겪은 일들에 관한 것이었다. 설의종의 건강 상태와 반승제의 회복 상황에 대한 이야기였다.설씨 가문의 세 남자는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은 언급하지 않았다. 박사가 대화에 끼지 못해 불편해할까 봐 배려한 것이다.그 순간 그들은 서로 뜻이 잘 맞았다.한편, 네이처 빌리지에서는 반승제가 성혜인 옆에서 설우현이 그린 숨겨진 스테이지 그림을 연구하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참다못한 반승제가 성혜인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장인어른께서 곧 오실 텐데, 내가 준비한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실까?”반승제는 명화부터 귀한 술까지 준비했으며 BH그룹 지분만 넘기지 않았을 뿐 온 정성을 쏟았다. 그의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졌다.성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아하실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그러나 반승제는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잠시 후 문지기가 손님이 도착했다고 알려오자 반승제는 바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설우현이 운전하는 마이바흐가 천천히 대문 앞에 도착했다.설의종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성혜인을 바라보며 눈가가 붉어졌다.늘 엄격하고 무뚝뚝했던 그가 몇 번이나 입을 열려다 말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결국 설우현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아버지, 안으로 들어가시죠.”설의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승제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반승제는 그의 불만을 눈치챘다. 특히 재혼 문제는 누구에게나 마음의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반승제는 긴장했지만 여전히 침착하고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애썼다.식탁에 앉은 후 반승제는 먼저 성혜인에게 국을 떠주고 이
그는 아버지를 끌어들여 반승제의 기세를 눌러 앞으로 설씨 집안에서 스스로 한 발 뒤로 물러나게 만들고 싶었다.하지만 앉자마자 설의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현아, 네 앞으로 곧 소개팅을 준비할 거야. 모레 나랑 같이 플로리아로 돌아가자. 네 형은 지금 회사 전체를 관리하느라 바쁘니 시간이 없지만 넌 빈둥거리며 놀기만 하잖아. 네 결혼은 3개월 안에 마무리 짓는 게 좋겠어. 한번 제대로 된 사람 만나봐.”설우현은 순간 머릿속이 윙윙 울리며 멍해졌다.“아니, 아버지. 형도 아직 결혼 안 했는데 내가 왜 이렇게 서둘러야 해요?”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의종이 탁자를 탁, 치며 말했다.“네가 네 형을 언급할 자격이 있어? 네 형이 그동안 회사에서 죽도록 일할 때 넌 밖에서 여자 때문에 돈을 펑펑 쓰고 다녔잖아. 3개월이면 이미 너한테 충분한 시간을 줬어. 얌전히 내 말대로 결혼 준비해.”설우현은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설기웅을 바라봤지만 설기웅은 그의 구조 요청을 못 본 척했다. 설우현이 소개팅에 나가지 않으면 자신이 나가야 할 상황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설우현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고 성혜인에게 음식을 덜어주는 반승제를 노려보았다. 바보라도 이 상황이 반승제의 계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설의종이 말을 꺼낸 이상 설우현은 따라야만 했다.소개팅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날 저녁, 설우현을 제외한 모두가 만족한 상태에서 식사가 끝났다.설의종과 박사는 제원을 구경하겠다며 함께 떠났고 성혜인은 임신 중이라 피곤해져 식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잠 들었다.하지만 설우현은 불안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뜨면 소개팅, 눈을 감아도 소개팅만 떠올랐다. 그는 설기웅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어 아버지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하려 했지만 설기웅은 그 대신 설우현이 소개팅에 나가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해 전화를 받지 않았다.설우현은 성혜인에게도 전화를 걸었지만 반승제가 대신 받았고 성혜인 앞에서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하며 소개팅 이야
최근 한 달 동안 성혜인은 반승제가 매일 밤 몰래 외출하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항상 일이 많아서 야근한다고 했다.오늘 밤도 어김없이 그렇게 나갔다.성혜인은 찜찜한 마음에 심인우에게 전화를 걸어 반승제가 오늘 밤 몇 시에 퇴근할 예정인지 물었다.심인우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사모님, 요즘 대표님께서 업무를 최대한 낮에 다 처리하고 계셔서 밤에 야근하신 적은 없었습니다.”순간 성혜인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반승제와는 워낙 믿음이 두터워 크게 의심하지 않았지만 연이은 며칠 동안 그가 두 시간 넘게 외출하고 돌아올 때마다 야근이라고 둘러대는 것이 수상하게 여겨졌던 터였다.심인우의 말을 듣자마자 성혜인은 그동안 봐왔던 인터넷 뉴스들이 머릿속을 스쳤다.아내가 임신했을 때 남편이 바람날 확률이 높다는 내용의 기사들이었다.임신 중에 바람을 피우는 남자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다.물론 성혜인은 반승제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가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왜 거짓말을 했을까? 의심이 들기엔 충분히 수상했다.그녀는 심인우에게 반승제의 위치를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위치는 고급스러운 한 카페로 나왔다.그곳은 도심 속에서도 꽤 유명한 고급 카페였으며 회원제 운영을 통해 프라이버시를 철저히 지키는 곳이었다.성혜인은 운전기사를 불러 그 카페로 향했다. 그곳은 연예인들도 자주 모이는 곳으로 개인 공간이 철저하게 보호되는 장소였다.반승제가 왜 여기서 사람을 만나는 걸까?성혜인은 프런트 데스크에서 그의 최근 며칠간의 소비 기록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가 연속으로 사흘간 이곳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순간 성혜인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믿고 싶었지만 너무 의심스러웠다.성혜인은 복잡한 심경으로 반승제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이미 배가 많이 불러 있었기 때문에 직원들도 그녀를 조심스레 대했다. 혹시라도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 난리가 나면 임산부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직원들은 불안해했다.“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성혜인은 반승제가 왜 신예준을 몰래 만나러 다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강민지와 관련된 문제 때문에 성혜인이 신예준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반승제는 그녀의 감정을 배려한 것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모습에 성혜인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입가에 미소를 띠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 문제를 두고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결심했다.앞으로는 굳이 몰래 만날 필요 없으니, 두 사람은 좋은 아빠가 될 준비를 하며 아이 키우는 얘기나 함께 나누면 될 터였다.성혜인은 다른 출구로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집에 도착한 시간은 반승제보다 10분 정도 늦었다. 그녀가 들어서자마자 반승제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 시간에 혼자 밖에 나갔어? 위험한 거 몰라?”성혜인은 반승제가 신예준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감동적인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 밖에 나오진 않았다. 그녀는 그저 두 팔을 펼치며 그의 품에 안겼다.반승제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배가 불편한 거 아니야?”출산이 가까워지면서 그는 성혜인의 몸 상태가 걱정되어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최근에는 성혜인이 한밤중에 자주 깨면서 반승제 역시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아니요. 아이 때문이 아니라 그냥... 승제 씨, 난 당신을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예전에는 성혜인이 이런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둘이 함께 있고, 심지어 아이까지 생겼지만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반승제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나야말로 운이 좋았지. 혜인아, 예전부터 하고 싶던 말이 있어. 미안해. 내가 널 이렇게 사랑할 줄 알았다면 처음 결혼할 때 도망치지 않았을 거야.”결혼을 확정 짓고 반태승의 명령에 따라 혼인신고를 하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반승제는 도망쳤고 두 사람은 무려 3년 동안이나 엇갈렸었다.성혜인은 그런 반승제의 말을 듣고 웃음이 났다. 감동적인 말도 잠깐이면 충분했다. 너무 오래 이어지면 그녀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분만실 밖에서 반승제는 이마에 땀이 흐를 정도로 초조해하고 있었다.안에서는 성혜인의 고통스러운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는 잔뜩 긴장한 채로 옆에 있던 의사에게 끊임없이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제발 잘 좀 확인해 주세요. 혜인이 목소리가 너무 달라졌어요. 혹시 힘이 다 빠진 거 아닌가요?”“혜인아? 혜인아!”반승제는 밖에서 몇 번이나 소리쳤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의사들이 그를 제지했다.복도에는 설씨 가족들도 앉아 있었다. 설의종, 설기웅, 그리고 최근 소개팅에 지쳐버린 설우현도 있었고 사라도 함께였다.사라는 반승제보다도 더 긴장한 듯 보였다. 평소 신을 믿지 않던 사람이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안에서 소리가 날 때마다 반승제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그는 복도를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불안감을 느꼈다.“정 힘들면 제왕절개라도 해주세요. 제일 좋은 약을 써서 혜인이가 고통받지 않게 해주세요.”더는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해진 그는 거의 쓰러질 것 같은 상태였다.그때 안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그의 눈에 기쁨이 번졌다. 얼마 후 성혜인이 밖으로 실려 나왔다.성혜인의 머리카락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얼굴은 몹시 창백해 보였다.반승제는 먼저 아이를 보지 않고 성혜인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혜인아, 괜찮아?”성혜인은 말하려 했지만 목이 잠겨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상태는 정말 좋지 않아 보였고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반승제의 눈가가 붉어지며 말했다.“다음엔 절대 애 낳지 마. 미안해.”옆에 있던 간호사가 아기를 안고 와서 말했다.“축하합니다. 쌍둥이, 남매예요.”이미 몇 번의 산전 검사에서 쌍둥이라는 소식을 들었지만 반승제와 성혜인은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몰래 상의한 결과로는, 두 아이가 모두 아들이거나 모두 딸일 거라 예상했지만 남매 쌍둥이라니 예상 밖의 결과였다.반승제는 이미 아빠가 될 준비를 하며 교육을
서주혁은 늘 냉정을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온시환마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상황이 심각한 게 분명했다.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여전히 몸을 회복 중인 성혜인을 힐끗 보았다.이 일은 성혜인에게 절대 알릴 수 없었다. 알게 되면 또 오랫동안 눈물을 흘릴 게 뻔했다. 그녀는 아직 회복 중이었기 때문이다.반승제는 설서율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성혜인의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회사에 문제가 좀 생겼어. 잠깐 나갔다 올게. 몸이 불편하면 바로 나한테 전화해.”“무슨 일인데요?”“회의가 있어서. 별일 아니야. 금방 다녀올게.”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서 자고 있는 남자아이의 이름은 반진율, 여자아이는 설서율이었다.결국 한 아이는 반승제의 성을, 또 다른 한 아이는 설씨 가문의 성을 따르게 됐다.성혜인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출산으로 몸이 많이 상했지만 일주일 동안 잘 쉬었기 때문에 이젠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그동안 반승제는 매일 아이들의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타 주느라 바빴다.한밤중에 아이들이 울 때마다 성혜인이 일어나려 하면 반승제가 그녀를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푹 쉬어. 내가 애들 데리고 옆방에 가서 달래줄게.”성혜인은 잠이 덜 깬 채로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일주일이 지나면서 반승제의 눈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웠지만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성혜인은 옆에 누워 있는 두 아이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은 채 다시 잠들었다.반승제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액셀을 힘껏 밟으며 온시환이 보낸 주소로 향했다.서주혁의 아이는 여전히 위급한 상태였고 아이가 살아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화재가 발생한 현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산 절반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소방관들이 여전히 불을 끄고 있었고 사람과 차량의 접근이 금지된 상태였다.장하리가 머물며 태교하고 있던 곳은 산속에 위치한 작은 집이었다. 그곳에는 오혜수가 보낸 사람들이 그녀를 돌보고 있었다.오혜수는 상부에서 벌을 받아 잠입
목소리가 너무 쉰 탓에 서주혁이 맞는지 한동안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서주혁 말고 누가 이 불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죽으려고 할까.반승제는 그쪽으로 급히 달려가 서주혁의 등 뒤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외쳤다.“서주혁!”반승제는 서주혁을 재빨리 땅에 눕히고 그의 등에 붙은 불을 껐다.서주혁의 등 뒤에 있던 양복은 거의 다 타버렸고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하지만 서주혁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이 불길 속에서 장하리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녀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아이는 어떻게 태어났고 그녀는 어디에 있는 걸까?서주혁의 머릿속은 너무 혼란스러워서 어느 순간 주위의 큰 불길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더 깊이, 더 깊이 걸어가면 장하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반승제는 그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그의 등이 심하게 화상을 입은 것을 보고 깊은숨을 내쉬었다.“아무리 죽고 싶어도 지금 인큐베이터에서 간신히 살아 있는 그 아이는 생각해야지.”서주혁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고였다. 마치 혼란 속에서 누군가 그를 끌어낸 것처럼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반승제는 그를 일으키며 더 이상 그의 등 상처를 보지 않으려 했다.“아이를 누가 데리고 나왔는지, 장하리는 어떤 상황에서 아이를 낳았는지부터 알아봐야 하지 않겠어.”서주혁은 목이 잠겨 말할 수 없었고 얼굴은 그을린 연기로 까맣게 변해 있었다.화재 현장에서 연기 속에 타버린 재가 떠다니며 서주혁의 얼굴을 덮었다. 지금은 눈만 간신히 보일 뿐이었다.반승제가 밖을 내다보니 소방관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먼저 병원부터 가자. 감염되면 어쩌려고 그래? 지금 병원에서 아이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데, 네가 무너지면 어떻게 해.”서주혁은 이미 이성을 잃고 제어할 능력을 잃은 상태였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닦았다. 다행히 얼굴은 다치지 않았다. 다만 등은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그는 너무 혼란스러워 아이가 자신에게 넘겨졌을 때의 놀람과 공포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