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대화를 끝낸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 모두 비교적 차분해 보였다.설의종은 1인용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혜인이 몸은 괜찮아? 전에 입덧이 심했다던데?”“지금은 괜찮아요. 그건 이미 다 지난 일이에요.”설우현이 대답한 후 시선을 사라 박사에게로 돌리며 말했다.“박사님, 앉으세요.”이어진 대화는 최근 함께 겪은 일들에 관한 것이었다. 설의종의 건강 상태와 반승제의 회복 상황에 대한 이야기였다.설씨 가문의 세 남자는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은 언급하지 않았다. 박사가 대화에 끼지 못해 불편해할까 봐 배려한 것이다.그 순간 그들은 서로 뜻이 잘 맞았다.한편, 네이처 빌리지에서는 반승제가 성혜인 옆에서 설우현이 그린 숨겨진 스테이지 그림을 연구하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참다못한 반승제가 성혜인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장인어른께서 곧 오실 텐데, 내가 준비한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실까?”반승제는 명화부터 귀한 술까지 준비했으며 BH그룹 지분만 넘기지 않았을 뿐 온 정성을 쏟았다. 그의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졌다.성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아하실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그러나 반승제는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잠시 후 문지기가 손님이 도착했다고 알려오자 반승제는 바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설우현이 운전하는 마이바흐가 천천히 대문 앞에 도착했다.설의종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성혜인을 바라보며 눈가가 붉어졌다.늘 엄격하고 무뚝뚝했던 그가 몇 번이나 입을 열려다 말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결국 설우현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아버지, 안으로 들어가시죠.”설의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승제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반승제는 그의 불만을 눈치챘다. 특히 재혼 문제는 누구에게나 마음의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반승제는 긴장했지만 여전히 침착하고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애썼다.식탁에 앉은 후 반승제는 먼저 성혜인에게 국을 떠주고 이
그는 아버지를 끌어들여 반승제의 기세를 눌러 앞으로 설씨 집안에서 스스로 한 발 뒤로 물러나게 만들고 싶었다.하지만 앉자마자 설의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현아, 네 앞으로 곧 소개팅을 준비할 거야. 모레 나랑 같이 플로리아로 돌아가자. 네 형은 지금 회사 전체를 관리하느라 바쁘니 시간이 없지만 넌 빈둥거리며 놀기만 하잖아. 네 결혼은 3개월 안에 마무리 짓는 게 좋겠어. 한번 제대로 된 사람 만나봐.”설우현은 순간 머릿속이 윙윙 울리며 멍해졌다.“아니, 아버지. 형도 아직 결혼 안 했는데 내가 왜 이렇게 서둘러야 해요?”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의종이 탁자를 탁, 치며 말했다.“네가 네 형을 언급할 자격이 있어? 네 형이 그동안 회사에서 죽도록 일할 때 넌 밖에서 여자 때문에 돈을 펑펑 쓰고 다녔잖아. 3개월이면 이미 너한테 충분한 시간을 줬어. 얌전히 내 말대로 결혼 준비해.”설우현은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설기웅을 바라봤지만 설기웅은 그의 구조 요청을 못 본 척했다. 설우현이 소개팅에 나가지 않으면 자신이 나가야 할 상황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설우현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고 성혜인에게 음식을 덜어주는 반승제를 노려보았다. 바보라도 이 상황이 반승제의 계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설의종이 말을 꺼낸 이상 설우현은 따라야만 했다.소개팅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날 저녁, 설우현을 제외한 모두가 만족한 상태에서 식사가 끝났다.설의종과 박사는 제원을 구경하겠다며 함께 떠났고 성혜인은 임신 중이라 피곤해져 식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잠 들었다.하지만 설우현은 불안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뜨면 소개팅, 눈을 감아도 소개팅만 떠올랐다. 그는 설기웅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어 아버지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하려 했지만 설기웅은 그 대신 설우현이 소개팅에 나가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해 전화를 받지 않았다.설우현은 성혜인에게도 전화를 걸었지만 반승제가 대신 받았고 성혜인 앞에서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하며 소개팅 이야
최근 한 달 동안 성혜인은 반승제가 매일 밤 몰래 외출하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항상 일이 많아서 야근한다고 했다.오늘 밤도 어김없이 그렇게 나갔다.성혜인은 찜찜한 마음에 심인우에게 전화를 걸어 반승제가 오늘 밤 몇 시에 퇴근할 예정인지 물었다.심인우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사모님, 요즘 대표님께서 업무를 최대한 낮에 다 처리하고 계셔서 밤에 야근하신 적은 없었습니다.”순간 성혜인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반승제와는 워낙 믿음이 두터워 크게 의심하지 않았지만 연이은 며칠 동안 그가 두 시간 넘게 외출하고 돌아올 때마다 야근이라고 둘러대는 것이 수상하게 여겨졌던 터였다.심인우의 말을 듣자마자 성혜인은 그동안 봐왔던 인터넷 뉴스들이 머릿속을 스쳤다.아내가 임신했을 때 남편이 바람날 확률이 높다는 내용의 기사들이었다.임신 중에 바람을 피우는 남자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다.물론 성혜인은 반승제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가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왜 거짓말을 했을까? 의심이 들기엔 충분히 수상했다.그녀는 심인우에게 반승제의 위치를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위치는 고급스러운 한 카페로 나왔다.그곳은 도심 속에서도 꽤 유명한 고급 카페였으며 회원제 운영을 통해 프라이버시를 철저히 지키는 곳이었다.성혜인은 운전기사를 불러 그 카페로 향했다. 그곳은 연예인들도 자주 모이는 곳으로 개인 공간이 철저하게 보호되는 장소였다.반승제가 왜 여기서 사람을 만나는 걸까?성혜인은 프런트 데스크에서 그의 최근 며칠간의 소비 기록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가 연속으로 사흘간 이곳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순간 성혜인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믿고 싶었지만 너무 의심스러웠다.성혜인은 복잡한 심경으로 반승제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이미 배가 많이 불러 있었기 때문에 직원들도 그녀를 조심스레 대했다. 혹시라도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 난리가 나면 임산부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직원들은 불안해했다.“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성혜인은 반승제가 왜 신예준을 몰래 만나러 다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강민지와 관련된 문제 때문에 성혜인이 신예준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반승제는 그녀의 감정을 배려한 것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모습에 성혜인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입가에 미소를 띠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 문제를 두고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결심했다.앞으로는 굳이 몰래 만날 필요 없으니, 두 사람은 좋은 아빠가 될 준비를 하며 아이 키우는 얘기나 함께 나누면 될 터였다.성혜인은 다른 출구로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집에 도착한 시간은 반승제보다 10분 정도 늦었다. 그녀가 들어서자마자 반승제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 시간에 혼자 밖에 나갔어? 위험한 거 몰라?”성혜인은 반승제가 신예준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감동적인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 밖에 나오진 않았다. 그녀는 그저 두 팔을 펼치며 그의 품에 안겼다.반승제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배가 불편한 거 아니야?”출산이 가까워지면서 그는 성혜인의 몸 상태가 걱정되어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최근에는 성혜인이 한밤중에 자주 깨면서 반승제 역시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아니요. 아이 때문이 아니라 그냥... 승제 씨, 난 당신을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예전에는 성혜인이 이런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둘이 함께 있고, 심지어 아이까지 생겼지만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반승제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나야말로 운이 좋았지. 혜인아, 예전부터 하고 싶던 말이 있어. 미안해. 내가 널 이렇게 사랑할 줄 알았다면 처음 결혼할 때 도망치지 않았을 거야.”결혼을 확정 짓고 반태승의 명령에 따라 혼인신고를 하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반승제는 도망쳤고 두 사람은 무려 3년 동안이나 엇갈렸었다.성혜인은 그런 반승제의 말을 듣고 웃음이 났다. 감동적인 말도 잠깐이면 충분했다. 너무 오래 이어지면 그녀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분만실 밖에서 반승제는 이마에 땀이 흐를 정도로 초조해하고 있었다.안에서는 성혜인의 고통스러운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는 잔뜩 긴장한 채로 옆에 있던 의사에게 끊임없이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제발 잘 좀 확인해 주세요. 혜인이 목소리가 너무 달라졌어요. 혹시 힘이 다 빠진 거 아닌가요?”“혜인아? 혜인아!”반승제는 밖에서 몇 번이나 소리쳤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의사들이 그를 제지했다.복도에는 설씨 가족들도 앉아 있었다. 설의종, 설기웅, 그리고 최근 소개팅에 지쳐버린 설우현도 있었고 사라도 함께였다.사라는 반승제보다도 더 긴장한 듯 보였다. 평소 신을 믿지 않던 사람이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안에서 소리가 날 때마다 반승제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그는 복도를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불안감을 느꼈다.“정 힘들면 제왕절개라도 해주세요. 제일 좋은 약을 써서 혜인이가 고통받지 않게 해주세요.”더는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해진 그는 거의 쓰러질 것 같은 상태였다.그때 안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그의 눈에 기쁨이 번졌다. 얼마 후 성혜인이 밖으로 실려 나왔다.성혜인의 머리카락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얼굴은 몹시 창백해 보였다.반승제는 먼저 아이를 보지 않고 성혜인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혜인아, 괜찮아?”성혜인은 말하려 했지만 목이 잠겨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상태는 정말 좋지 않아 보였고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반승제의 눈가가 붉어지며 말했다.“다음엔 절대 애 낳지 마. 미안해.”옆에 있던 간호사가 아기를 안고 와서 말했다.“축하합니다. 쌍둥이, 남매예요.”이미 몇 번의 산전 검사에서 쌍둥이라는 소식을 들었지만 반승제와 성혜인은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몰래 상의한 결과로는, 두 아이가 모두 아들이거나 모두 딸일 거라 예상했지만 남매 쌍둥이라니 예상 밖의 결과였다.반승제는 이미 아빠가 될 준비를 하며 교육을
서주혁은 늘 냉정을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온시환마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상황이 심각한 게 분명했다.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여전히 몸을 회복 중인 성혜인을 힐끗 보았다.이 일은 성혜인에게 절대 알릴 수 없었다. 알게 되면 또 오랫동안 눈물을 흘릴 게 뻔했다. 그녀는 아직 회복 중이었기 때문이다.반승제는 설서율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성혜인의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회사에 문제가 좀 생겼어. 잠깐 나갔다 올게. 몸이 불편하면 바로 나한테 전화해.”“무슨 일인데요?”“회의가 있어서. 별일 아니야. 금방 다녀올게.”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서 자고 있는 남자아이의 이름은 반진율, 여자아이는 설서율이었다.결국 한 아이는 반승제의 성을, 또 다른 한 아이는 설씨 가문의 성을 따르게 됐다.성혜인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출산으로 몸이 많이 상했지만 일주일 동안 잘 쉬었기 때문에 이젠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그동안 반승제는 매일 아이들의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타 주느라 바빴다.한밤중에 아이들이 울 때마다 성혜인이 일어나려 하면 반승제가 그녀를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푹 쉬어. 내가 애들 데리고 옆방에 가서 달래줄게.”성혜인은 잠이 덜 깬 채로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일주일이 지나면서 반승제의 눈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웠지만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성혜인은 옆에 누워 있는 두 아이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은 채 다시 잠들었다.반승제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액셀을 힘껏 밟으며 온시환이 보낸 주소로 향했다.서주혁의 아이는 여전히 위급한 상태였고 아이가 살아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화재가 발생한 현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산 절반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소방관들이 여전히 불을 끄고 있었고 사람과 차량의 접근이 금지된 상태였다.장하리가 머물며 태교하고 있던 곳은 산속에 위치한 작은 집이었다. 그곳에는 오혜수가 보낸 사람들이 그녀를 돌보고 있었다.오혜수는 상부에서 벌을 받아 잠입
목소리가 너무 쉰 탓에 서주혁이 맞는지 한동안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서주혁 말고 누가 이 불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죽으려고 할까.반승제는 그쪽으로 급히 달려가 서주혁의 등 뒤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외쳤다.“서주혁!”반승제는 서주혁을 재빨리 땅에 눕히고 그의 등에 붙은 불을 껐다.서주혁의 등 뒤에 있던 양복은 거의 다 타버렸고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하지만 서주혁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이 불길 속에서 장하리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녀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아이는 어떻게 태어났고 그녀는 어디에 있는 걸까?서주혁의 머릿속은 너무 혼란스러워서 어느 순간 주위의 큰 불길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더 깊이, 더 깊이 걸어가면 장하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반승제는 그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그의 등이 심하게 화상을 입은 것을 보고 깊은숨을 내쉬었다.“아무리 죽고 싶어도 지금 인큐베이터에서 간신히 살아 있는 그 아이는 생각해야지.”서주혁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고였다. 마치 혼란 속에서 누군가 그를 끌어낸 것처럼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반승제는 그를 일으키며 더 이상 그의 등 상처를 보지 않으려 했다.“아이를 누가 데리고 나왔는지, 장하리는 어떤 상황에서 아이를 낳았는지부터 알아봐야 하지 않겠어.”서주혁은 목이 잠겨 말할 수 없었고 얼굴은 그을린 연기로 까맣게 변해 있었다.화재 현장에서 연기 속에 타버린 재가 떠다니며 서주혁의 얼굴을 덮었다. 지금은 눈만 간신히 보일 뿐이었다.반승제가 밖을 내다보니 소방관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먼저 병원부터 가자. 감염되면 어쩌려고 그래? 지금 병원에서 아이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데, 네가 무너지면 어떻게 해.”서주혁은 이미 이성을 잃고 제어할 능력을 잃은 상태였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닦았다. 다행히 얼굴은 다치지 않았다. 다만 등은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그는 너무 혼란스러워 아이가 자신에게 넘겨졌을 때의 놀람과 공포조차
그 후 이틀 동안 서주혁은 인큐베이터 옆을 한순간도 떠나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해도 듣지 않았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등에는 심각한 화상이 있었지만 서주혁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온몸이 먼지와 재로 뒤덮여 있었다.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가 미세하게나마 움직일 때만 서주혁의 눈동자가 따라 반응하며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그 외의 시간에는 생기를 잃은 사람 같았다.반승제는 며칠째 병원을 자주 오가며 성혜인에게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계속 일이 많아서 야근한다고 둘러댔다. 그러던 중 여전히 지저분한 모습으로 서 있는 서주혁을 보고 반승제는 망설임 없이 그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내리쳐 기절시켰다.“이 사람 좀 데리고 가서 등의 상처를 치료해 주세요. 이러다 파상풍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이러는지.”의사들은 이미 여러 차례 서주혁에게 치료를 권했지만 서주혁은 무감각한 상태로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반승제가 나서자 서주혁은 마침내 치료를 받게 되었다. 몇몇 사람들이 서주혁을 부축해 화상 치료실로 데려갔다.반승제는 인큐베이터 앞에서 아기를 지켜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숙아인 이 아이는 보통 아이들보다 훨씬 작았고 움직임도 거의 없었다. 의사는 이 아이가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말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이의 심장은 거의 멈출 뻔했다고 한다.반승제는 만약 아이가 잘못되면 서주혁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미간을 문지르며 의사에게 아이가 살아남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의사는 확신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대답했다.반승제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다시 서주혁이 있는 병실로 향했다. 서주혁의 등은 옷과 살이 엉겨 붙어 있었고, 천을 떼어낼 때마다 살점이 함께 벗겨져 나갔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할지 보는 것만으로도 아플 정도였다. 서주혁은 잠결에도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했다.반승제는 서둘러 지시를 내렸다.“좀 더 자게 두세요. 최대한 깨지 않게 하세요.”그렇지 않으면 또 인큐베이터 앞에
공지민은 여전히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감정의 흔들림조차 없는 차분한 모습이 오히려 더 사람을 화나게 했다.온시환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소파에 밀어 눕히며 말했다.“너는 침대에 있을 때만 겨우 말을 좀 듣더라.”공지민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고 그저 입가에 조소를 띄웠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네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 정도야?’그녀의 반응에 온시환의 자존심은 철저히 짓밟혔다. 그는 그녀 위에서 몸을 일으켜 서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바닥에는 정성스럽게 준비했던 고급 디저트가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고 거실 테이블은 한쪽으로 넘어가 엉망이었다.온시환은 갑자기 답답한 마음이 몰려왔다. 반승제가 이 집 디저트가 아주 맛있다고 추천했기에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자 사 온 건데, 그녀의 마음을 얻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공지민은 정말 마음이 없는 걸까.그는 아무 말 없이 큰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 표정만 봐도 오늘 밤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그제야 숨어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럽게 나와 어지럽혀진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을 움직이며 공지민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말했다.“지민 씨, 사실 시환 씨가 당신한테 잘하려고 애쓰는 거예요. 조금만 부드럽게 대처하면 덜 힘들 텐데요.”공지민의 턱에는 손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방금 온시환이 얼마나 강하게 그녀를 잡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하지만 공지민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정부에게 짧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뒤 차에 올라 고등학교로 향했다.그곳은 제원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녀는 염정아의 집 앞에 서서, 과거의 기억이 더욱 선명해지는 걸 느꼈다. 마치 어둠 속의 작은 틈에서 모든 걸 끄집어내는 듯했다.깊게 숨을 들이쉰 그녀는 문을 두드렸다.염정아가 바로 허벅지 안 쪽에 빨간 꽃 모양의 반점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 번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 묵었을 때 우연히 보게 되었다. 너무나 독특했기에 그
구은우처럼 좋은 사람이 왜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해야 했을까?공지민은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복수심으로 가득 찼고 구은우를 해친 모든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서두를 수 없었고 우선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야 했다.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사찰을 떠난 순간 온시환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어디야?”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퍽 다정했다. 아마 어젯밤의 만족감 때문인지 약간의 웃음기가 깃들어 있었다.공지민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그때의 거래는 여전히 유효한 건지, 구은우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언제쯤 말해줄 건지.그러나 연씨 가문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할 수 없었다.“곧 돌아갈게요.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러야 할 일이 있어요. 친한 친구가 우울증으로 힘들어해서요, 한번 가서 보려고요.”“그래? 그럼 내가 데려다줄게.”“아니요, 이건 제 일이에요. 시환 씨는 그냥 은우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조사해주시면 돼요.”온시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공지민의 눈에 조소가 스쳤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공지민이 찾아가려던 고등학교 친구는 그녀와 함께 괴롭힘을 당했던 사람이었다. 그 친구는 원아정 일당이 공지민을 표적으로 삼기 전까지 주된 괴롭힘의 대상이었다.말하자면 공지민이 그녀를 구한 셈이었지만 그녀의 정신 상태는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있었다.친구의 이름은 염정아였고 삶은 공지민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가족은 극단적으로 남아선호 사상을 따랐고 그녀는 언제나 동생을 위해 모든 것을 양보해야 했다.염정아의 남동생은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항상 입가에 침을 흘리고 있었다. 키는 187cm나 되는 거구의 남자였지만 하루 종일 입을 비죽이며 웅얼거리는 모습이었다.어느 날 그녀의 부모는 염정아에게 충격적인 요구를 했다. 동생의 아이를 가지라는 것이었다.그 충격적인 요청에 염정아은 공지민에게 전화했지만
만반의 준비를 마치기 전까지는 휘말리고 싶지않았지만 구은우의 유골을 돼지에게 먹였다는 말을 듣는 순간 공지민의 눈동자는 크게 흔들렸고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공지민의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자 원아정은 그녀의 반응을 즐기는 듯 더욱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당시 구은우의 유골함이 해외로 옮겨졌다고 하지 않았어? 사실은 그 남자가 구은우를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결국 그건 아내가 자기를 배신한 증거였으니까. 내가 돈 몇 푼 쥐여주니까 곧바로 나한테 유골을 팔더라.”공지민의 입술이 떨리며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그녀는 원아정의 손목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그대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원아정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뺨을 맞았다. 그녀는 분노와 충격으로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너 따위가 감히 날 때려?”고등학교 때 그녀 앞에서 무릎 꿇고 빌었던 걸 벌써 잊은 걸까?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지민은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퍼부었다. 분노에 휩싸인 그녀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보였다.사찰 내부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몰려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정숙도 현장에 도착했다.안정숙은 두 사람을 쏘아보며 차갑게 물었다.“여기서 무슨 짓들을 하는 거야?”원아정은 마치 피해자인 양 금세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할머니, 제가 고등학교 동창이랑 조금 오해가 있었어요. 그런데 얘가 갑자기 저를 때리고 발길질을 했어요.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얼굴이 너무 아파요.”원아정의 뺨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반면 공지민은 겉보기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이 때문에 상황은 자연스레 원아정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안정숙은 눈썹을 찌푸리며 공지민을 바라봤다. 더 이상 이전의 인자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공지민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원아정을 노려보았다. 원아정의 눈빛에는 조소와 함께 승리의 기쁨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사찰을 떠났다.차에 올라서도 원아정이 한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
공지민은 온시환과 함께 차에 올랐다. 의자에 기대앉은 그녀는 머릿속에 온통 연승혁의 실종된 누나에 관한 생각뿐이었다.그 누나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만약 그녀를 찾아낸다면 연씨 가문에 접근할 기회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온시환은 그녀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너 요즘 뭔가 고민이 많은 것 같아.”“아니에요.”온시환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아니라고? 그냥 나한테 말하고 싶지 않은 거 아니야? 네가 파티에 가고 싶다고 해서 데려갔고, 네가 원하는 걸 다 들어줬어. 그런데 내가 얼마나 더 비참하게 굴어야 해? 나한테도 좀 웃어주면 안 돼?”그의 목소리에는 원망이 가득했고 손아귀의 힘이 점점 강해졌다.눈살을 찌푸린 공지민은 그를 달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몸을 기울여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온시환은 그녀의 뒤통수를 잡아 깊은 키스를 이어갔다.둘은 몇 분간 키스한 뒤에야 숨을 고르며 멈췄다.밤이 되자 두 사람은 씻고 난 뒤 자연스럽게 관계를 가졌다. 공지민은 그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온시환의 눈빛에 담긴 진심 어린 애정을 보면서도 그녀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연승혁에 대한 일을 속이며 자신을 기만했던 이 남자를 왜 동정해야 할까?무엇보다 온시환이 동정이 필요한 사람인가? 예전에 그를 위해 눈물 흘렸던 여자가 얼마나 많았던가. 이건 단지 그의 업보일 뿐이었다.다음 날 아침, 공지민이 눈을 떴을 때 온시환은 이미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옆에 남겨진 메모에는 그녀에게 푹 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곧바로 씻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목적은 연씨 가문의 노부인을 우연히 만나는 것이었다.전날 밤, 그녀는 안정숙이 최근 몸 상태가 조금 나아져 근교의 사찰에 들러 기도를 드린다는 정보를 얻어냈다.공지민은 차를 몰고 산길을 따라 사찰에 도착했다. 일부러 안정숙보다
강민지와 대화를 마친 후, 공지민은 눈에 띄지 않는 한쪽 구석에 앉아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온시환은 이미 누군가에게 끌려가 술을 마시고 있었고 떠나기 전 공지민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주며 자리를 벗어나지 말라고 당부했다.소파에 앉아 있던 공지민의 시야에 원아정과 몇몇 여성이 들어왔다. 원아정은 마치 공지민을 못 본 척 지나치려는 듯했지만 그녀 옆의 몇몇 여자는 공지민이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원아정의 곁을 맴돌던 오예슬이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오예슬은 공지민이 온시환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공지민을 보자마자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어머나, 아정아, 저기 좀 봐. 저 사람 우리 고등학교 때 제일 인기 많았던 공지민 아니야?”오예슬은 거의 뛰다시피 공지민 앞으로 다가가선 위압적인 태도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공지민,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설마 여기 직원으로 지원하려고 온 건 아니겠지?”공지민의 옷차림을 보면 그런 말이 어불성설이었지만 오예슬은 그녀를 비하하고 싶어 일부러 그런 말을 내뱉었다.공지민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예슬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공지민을 괴롭히며 쾌감을 느껴왔고 지금의 무시당하는 태도는 그녀에게 모욕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과거 공지민이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손에 들고 있던 술을 공지민에게 그대로 부어버렸다.공지민은 피할 새도 없이 머리에 술을 뒤집어썼다.“어머, 미안해. 내가 잔을 제대로 못 들었나 봐.”오예슬은 원아정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에 이런 행동을 했고 이는 과거에도 그녀가 원아정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주 하던 짓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공지민을 굴욕 주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원아정에게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려 돌아섰다.하지만 공지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오예슬의 머리채를 잡아끌며 발
원아정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마치 친한 친구인 양 공지민의 팔짱을 끼었다.“그럼 다행이네.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것도 내 생일 파티에서라니 정말 놀랍다. 앞으로 자주 보자. 나도 제원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그래도 우리는 서로 잘 아는 사이잖아.”“좋아.” 공지민은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온시환은 공지민의 허리를 감쌌다. 그녀가 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바랐다. 그래야 그녀가 구은우의 일은 조금이라도 덜 떠올릴 테니 말이다.구은우의 사건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밝혀진 건 연승혁이 배후라는 것뿐이었다. 연승혁은 현재 굉장히 높은 지위에 있었고 그를 건드린다면 필연적으로 원씨 가문까지 적으로 돌리게 될 터였다. 두 가문이 힘을 합친다면 온시환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공지민이 잠시라도 구은우를 내려놓고 평온히 지내기를 바랄 뿐이었다.원아정은 고개를 숙여 공지민의 귀에 속삭였다.“몇 년 못 봤는데, 그새 너 남자 꼬시는 재주가 이렇게 늘었을 줄은 몰랐네. 죽어서 바다에 가라앉은 은우가 이 꼴을 보면 편히 눈을 감을 수나 있을까?”가볍게 상처를 후벼 파는 말이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너도 이제 곧 결혼하잖아. 과거의 남자에게 얽매이는 건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닌 것 같은데?”원아정의 얼굴에 미소가 굳고 입술이 살짝 일그러졌다.공지민은 손에 든 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승혁 씨 같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를 자꾸 떠올리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거야. 넌 원씨 가문에서도 딱히 기댈 곳이 없어 보이던데. 원진 씨가 너에게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더라고.”이 일은 모두가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원진은 철저하고 냉혹한 사람으로,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원진에게 반감을 품은 이들도 많았다.원아정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대신 네가 시환 씨랑 이혼하고 나서 어떻게 살지나 잘 고민해.”그녀는 그
온시환은 단지 그녀가 식견을 넓히려 한다고만 생각할 뿐,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밤이 되어 두 사람이 잠자리에 들 때, 온시환은 그녀를 품에 안고 천천히 그녀의 옷 끈을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지민은 몸을 돌리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싫어요.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온시환의 순간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서두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짧게 대답했다.“알았어.”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에 들었다.원아정의 생일 파티는 초대받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공지민은 몇몇 스타일리스트에게 둘러싸여 오늘 밤을 위한 스타일링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밤 원아정을 만나면 상대가 얼마나 화를 낼지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일 파티인 만큼 원아정이 직접적으로 화를 내지는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위에 원진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공지민은 이 며칠 동안 온시환에게 원진에 대해 물어보며 정보를 얻어냈다. 원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원진을 두려워했고 원아정도 예외는 아니었다.원진이 있는 한 원아정이 함부로 굴 수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오늘 밤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자리라 원진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했다.먼저 스타일링을 마친 온시환은 공지민이 몸에 꼭 맞는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자 순간 눈빛이 반짝이며 숨소리마저 떨렸다. 매끈한 허리선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였다.“지민아, 오늘 정말 아름다워.”온시환은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공지민은 말없이 그와 함께 차에 올랐다.원씨 가문의 저택은 제원에 위치해 있었는데 몇 년 전에 구매한 곳이라고 했다. 오늘 밤의 파티는 바로 그 저택에서 열리고 있었다.공지민은 온시환의 손에 이끌려 차에서 내렸다. 저택 입구에 주차된 화려한 차들을 보니 이 파티의 주최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린 공지민은 온시환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화려한 홀 안에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대화가
오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지민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야. 은우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나도 알아. 사실 난 한 번도 잊어본 적 없어. 오늘 밤 원아정을 만나고 은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아? 그런데 넌 이런 세월을 어떻게 견뎌왔을까? 너라는 애는 참으로 밉지만 그래도 넌 진심으로 은우를 좋아했잖아. 은우는 한때 네 사람이었고, 넌 나보다 천 배는 더 괴로웠겠지... 미안해.”그 말을 끝으로 오하윤은 자리를 떠났다. 가슴은 여전히 저릿저릿했다.만약 자신이었다면 그녀는 아마 절망 속에 빠졌을 것이다.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오하윤은 먼 곳을 바라보며 인생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느꼈다. 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는 걸까...한편, 공지민은 자리에 앉아 말없이 주스가 담긴 컵만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공지민은 입술을 감쳐물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온시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지금은 꽤 늦은 시간이었다. 그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온시환과 연승혁이 친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공지민은 그가 왜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그의 친구에게 복수할까 봐 두려운 게 아니겠는가.‘남자는 결국 믿을 게 못 돼.’가슴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다시는 온시환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공지민은 끝내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다.온시환은 한참 기다리다가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냈다.[나 화나게 하지 마. 구은우의 일은 아직 조사 중이니까, 너도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마.]그 메시지를 읽은 공지민은 어이가 없었다. 온시환은 분명 누가 구은우를 해쳤는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녀를 계속 속이려는 것이 뻔했다.공지민은 속눈썹을 지그시
반승제는 순간 멍해졌다. 예전 일을 떠올리려 했지만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저 자신은 성혜인을 선택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뿐이었다.“시환아, 내 충고를 하나 하자면, 진심으로 지민 씨를 감동시키는 데 집중해. 억지로 잡으려고 하다간 너도 서주혁처럼 될 거야.”온시환은 순간 말을 잃었다. 사실 그도 두려웠다.하지만 공지민은 죽은 사람에게 마음이 묶여 있는 데다 자신의 진심 따윈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았다.반승제가 전화를 끊자 온시환은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잠시 후, 그는 자신의 부하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그렇게 공지민은 바로 오하윤을 만나러 갔다.오하윤은 그녀에게 과일 주스를 따라 주며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나 오늘 원아정 만났어. 너도 기억하지? 고등학교 때 널 화장실에 가둬놓고 물을 끼얹으라고 시킨 애 말이야.”공지민이 원아정을 잊을 리 없었다. 원아정은 모든 악몽의 시작이었다.그때 원아정은 화장실로 그녀를 몰아넣고 옷을 벗기라고 명령했으며 사진을 찍어 협박했다. 그 이후 괴롭힘은 점점 더 악랄해졌다.공지민은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저 묵묵히 참으면 지나갈 거라 믿었지만 어느 날 원아정은 의자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며 명령했다.“공지민, 너랑 은우가 원래 아는 사이라며? 지금 무릎 꿇고 빌어. 안 그러면 네 사진을 모두에게 뿌려서 네가 어떤 년인지 보여줄 거야.”그녀는 그런 고등학생은 본 적이 없었다. 고고한 척하면서도 잔인했고 사람을 완전히 조롱거리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원아정은 재벌가 출신으로 모두가 그녀를 피했다. 항상 고급 외제차가 그녀를 데리러 왔고 때로는 경호원까지 동원되었다. 그녀와 비슷한 수준의 친구들조차 그녀의 괴롭힘을 부추겼다.만약 구은우가 없었다면 공지민은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그때 원아정 앞에 무릎을 꿇고 개처럼 용서를 구했다.이후 구은우가 원아정에게서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