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머니, 괜찮으세요?”반희월의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운전석에 있던 기사는 아예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들의 상황은 성혜인 쪽보다 훨씬 심각했다.교통 정체가 시작되자 교통경찰이 금방 와서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반희월은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차에서 내려왔다가 성혜인을 발견하고는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닌 걱정부터 하기 시작했다.“페니 양, 괜찮아? 다치지는 않았어?”성혜인은 미안한 마음에 후다닥 달려가서 그녀를 부축했다.“저는 괜찮아요. 죄송해요, 아주머니. 저 일단 119부터 부를게요.”교통경찰은 차 안에 있는 기사를 부축해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다행히 크게 다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병원은 가야 할 것 같았다.성혜인은 사고 차량 운전자로서 당연히 경찰의 의심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녀는 대신 설명하려는 반희월을 막아서며 말했다.“아주머니, 구급차가 금방 도착할 테니까 먼저 병원으로 가세요. 제가 후에 직접 찾아뵙고 사과드릴게요. 이곳 일은 저 혼자 해결할 수 있어요.”성혜인의 차분한 태도는 얼빠진 채로 차 안에 앉아있는 한지은과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한지은은 원래 차에 기스가 남는 정도의 사고로 성혜인에게 겁을 줄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복수에 자신의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급한 마음에 핸들을 잘못 꺾어 건너편 차도로 넘어가고 말았다. 피해 차량이 비싼 외제차인 것을 발견한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차에서 내려가지도 못했다.성혜인은 경찰에게 핸들을 뺏긴 과정을 전부 설명하고 차량 블랙박스가 증거가 되어줄 것이라고 보충했다. 피해 차량이 비교적 비싼 차종이었기 때문에 경찰은 더 상세하게 기록을 남겼고 성혜인과 한지은을 전부 경찰서로 데려갔다.성혜인은 요즘 용한 무당을 찾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경찰서와 병원을 지나치게 많이 드나들었다. 안 그래도 나락을 치는 기분이 정신을 놓고 나불대는 한지은 때문에 더 나락을 치고 있었다.“그러게 운전대를 똑바로 잡고 있어야죠. 이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
임경헌은 넋이 나갔다. 하지만 어머니가 차 사고 났다는 말에 후다닥 일어나 옷을 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스피커 폰으로 해놓고 침대에 놓아둔 휴대폰에서는 기사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사모님 곁에는 제가 있으니, 여자친구분한테 가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분도 다치셨는데 지금 경찰서에 있답니다. 사모님께서 절대 자신한테 오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고 계십니다.”최효원은 원래 임경헌에게 가지 말라고 애교라도 부리려고 했는데 기사 입에서 나온 여자친구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녀는 아직 반희월과 만난 적 없으니, 기사가 말한 사람은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다.임경헌은 최효원의 기분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그는 기사가 말하는 여자친구가 페니라는 것도 뒤늦게 떠올랐다. 그는 최효원에게 설명할 새도 없이 외투를 입고는 그녀의 입술에 짧게 뽀뽀하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난 잠깐 나갔다 올게.”최효원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원래도 성격이 예민했던 그녀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상상을 멈출 수가 있었고 도무지 혼자 있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경헌 씨, 저도 같이 갈래요.”“오늘은 안 돼. 대신 내가 다음에는 꼭 소개해 줄게.”임경헌의 단호한 거절에 최효원은 아무 말도 못 했다.텅 빈 방 안에서 최효원은 자신이 너무나도 작게 느껴졌다. 비록 카운터 직원인 그녀가 임경헌과 만나는 것을 안 좋게 보는 사람이 더 많았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임경헌을 사랑했다. 그래서 하루빨리 반희월을 만나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다.불안감에 휩싸이고 있던 때, 최효원은 갑자기 자신을 위로하던 성혜인이 떠올랐다. 그래서 바로 옷을 걸치고 성혜인의 집 앞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문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성혜인을 찾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지라 최효원은 대문 앞에 앉아서 기다리기 시작했다.약 두 시간 후, 성혜인은 드디어 경찰서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사고의 흔적을 씻어내고 나서 반희월에게 가볼 생각이었
반승제는 병원으로 가는 길에 임경헌의 전화를 받았다. 임경헌은 자기 할 말만 한참 하다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 보탰다.“그래도 형을 뮤즈로 여기는 사람이잖아요.”저녁이 되자 길가의 가로등이 전부 켜지고 성혜원의 그림과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는 반승제가 보기에도 훌륭한 그림이었다.반승제의 차는 결국 임경헌이 알려준 주소로 가서 멈춰 섰다. 그는 성혜인이 새로 이사한 동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반승제를 기다리게 할 수 없었던 성혜인은 10분 전부터 내려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목욕을 너무 오래 해서인지 머리가 어지러워 반승제가 차를 세운 지 한참 지나고 나서야 알아차리고 휘청거리며 다가갔다.“대표님, 데리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성혜인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어디 아파?”반승제는 성혜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안색이 비정상적으로 발그레한 것이 누가 봐도 몸이 불편한 것 같았다.성혜인은 뒷좌석에 앉아 눈을 감으며 말했다. 몸이 후끈거리는 걸 봐서는 열이 나는 게 분명했다.“그냥 조금 불편한 정도예요. 이번 사고는 제 불찰이에요. 경찰한테 사실대로 말했으니 곧 결과가 나올 거예요.”성혜인은 원래 병원으로 가는 길에 과일이라도 사려고 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반승제의 차를 얻어타게 되었으니, 그를 기다리게 하고 과일을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빈손으로 가고, 다음번에 다시 제대로 된 선물을 사기로 했다.차 안은 아주 조용했다. 가끔가다 자동차 경적만 들릴 뿐이었다. 한창 퇴근 시간이라 안 막히는 길이 없었고, 반승제의 차도 제자리에 멈춰선 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성혜인은 눈을 꼭 감았다. 그 사이로 열이 더 올랐는지 온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곁에 앉아 있던 반승제도 열기를 느끼고 머리를 돌렸다. 성혜인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페니?”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렸다.이때 반희월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페니가 그와 함께 있는지 묻기 위해 건 전화였다.“승제야, 경헌이한테서 들어보니
반승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성혜인과 엮이는 게 달갑지 않았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움직일 힘이 없었던 성혜인은 얌전히 벤치에 앉아있었다.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녀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을 벤치에 내려놓고 자신의 차 앞으로 돌아왔다. 마침 그가 문을 열려고 할 때,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여기 있었구나?!”여자는 사나운 표정으로 성혜인을 밀쳤다. 안 그래도 몸을 지탱하기 어려웠던 그녀는 저항 없이 뒤로 밀려났고, 벤치 등받이에 등을 찍고는 얼굴을 찡그렸다.머리를 들자 임남호와 함께 있던 여자가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과 짙은 메이크업은 여자의 원래 모습을 완전히 가려버렸다.“말해. 남호 씨 지금 어디 있어?”여자는 성혜인의 힘 빠진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씩 올리며 머리채를 잡으려고 했다. 성혜인은 당연히 피할 힘이 없었다.이때 힘 있는 손이 나타나서 여자의 손목을 잡았다. 머리를 든 여자는 반승제의 얼굴을 보고 잠깐 놀라더니 금세 하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아이고, 스폰서님 오셨어요? 더러운 것들도 끼리끼리 논다더니 참... 퉷!”반승제의 안색은 무섭게 어두워졌다. 누군가에게 목덜미를 잡힌 듯한 오싹한 느낌에 여자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욕설을 다시 삼켰다.“이 여자가 제 남자를 숨겨 놔서 따지러 왔거든요?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갈 길이나 가시죠.”이 말을 들은 성혜인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누가 네 남자라는 거야? 백수 유부남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쫓아다녀?”성혜인은 임남호가 좋다고 쫓아다니는 여자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임남호는 부모와 아내를 버리고 밖에서 질 떨어지는 여자나 만나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혜인의 인지 범위를 벗어난 지 오래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에 도무지 좋은 말을 해줄 수 없었다.여자는 임남호가 유부남이라는 것을 알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
반승제는 성혜인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그녀를 부축하며 걸어갔다. 반승제를 성가시게 하고 싶지 않았던 성혜인은 그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었다.엘리베이터에 들어간 성혜인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댔다. 반승제는 혹시 몰라 그녀의 팔을 잡고 있을 뿐,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다.엘리베이터가 5층에서 열리고 성혜인은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뒤지며 열쇠를 찾아냈다. 하지만 눈앞의 세상이 흔들리는 탓에 도무지 열쇠 구멍에 꽂아넣지를 못했다.반승제는 어쩔 수 없이 열쇠를 받아 들고 대신 꽂아 줬다. 문이 열리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성혜인의 집 안을 보게 되었다. 깔끔한 현관에는 여자 신발 몇 개만 놓여 있을 뿐, 남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반승제는 의아한 표정으로 성혜인을 바라봤다.집안에서는 강아지의 소리가 들려왔다. 진작부터 열쇠 소리를 들은 겨울이는 꼬리를 흔들며 달려 나왔다. 반승제를 발견한 그는 더 신이 나서 재롱을 부렸다. 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겨울이와는 초면이 아니었으니 말이다.“대표님... 죄송하지만 저를 소파로 데려다줄 수 있을까요?”정신없었던 성혜인은 겨울이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고 애절한 눈빛으로 반승제를 쳐다봤다. 일부러 그의 곁으로 와서 배를 까기도 했다. 최선을 다해 재롱을 부리는 모습에 반승제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렸다.소파 앞으로 온 성혜인은 그대로 꼬꾸라져 버렸다. 나른한 재질의 소파에 부딪혀도 다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반승제는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말없이 성혜인의 집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취향에 따라 인테리어 된 집안에는 남자의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남편이랑 따로 사는 건가? 아니면 이사를 마저 안했다던가... 그래도 현관에 신발 하나 없는 건 이상한데.’“멍멍멍!”겨울이가 반승제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며 주의를 끌었다. 그러고는 자기 얼굴을 그의 다리에 비비적댔다.반승제는 정장
BH그룹의 직원인 최효원은 당연히 반승제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집안과 반승제를 번갈아 쳐다봤다.‘페니 씨는 결혼했다고 했는데? 그 상대가 대표님일 리는 없잖아. 경헌 씨가 형수가 아닌 친구라고 소개했으니까. 근데 대표님이 왜 페니 씨 집에서 나오는 거지? 그것도 이 시간에...?’반승제가 얼마나 매정한 사람인지는 BH그룹의 직원이 아니라고 해도 다들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절대 사적으로 여자를 만나고 다닐 사람이 아니었다. 성혜인과 디자인적인 얘기를 해야 한다고 해도 집이 아닌 회사에서 만나야 했다.이때 최효원은 갑자기 성혜인이 그렸던 그림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평범한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어쩐지 젊은 나이에 대표님한테 선택받았다 했더니, 역시 페니 씨도 다를 것 없네.’최효원은 더러운 수단을 사용하는 여자라면 딱 질색이었다. 하지만 반승제 앞에서 티를 내지는 못하고 그저 빨리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반승제는 최효원이 초인종을 누르려는 것을 보고 성혜인과 아닌 사이일 것으로 생각했다.“페니가 열이 나고 있는데 집에 사람이 없어서요. 만약 시간 있으면 좀 챙겨줘요.”반승제는 덤덤한 말투로 말하고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최효원은 뒤에서 약간 주저하다가 말했다.“대표님, 저는 임경헌 씨 여자친구예요. 경헌 씨 말로는 페니 씨가 이미 결혼했다고 하던데, 남편이 돌아와서 챙겨주지 않겠어요? 근데 남편분이 엄청 바쁜 모양이에요.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걸 보면...”최효원은 카운터 직원인 자신이 임경헌과 만나게 된 것을 이미 대단한 복으로 여겼다. 하지만 유부녀인 성혜인이 반승제와 만나는 것을 보고 기분이 약간 이상했다. 이건 아마도 질투심일 것이다.반승제에게 시집가고 싶어 하는 여자는 제원에 널리고 널렸다. 그 많은 여자 중에 하필이면 유부녀인 성혜인이 선택받았다는 게 최효원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반승제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곳에서 그를 만났다는 자체만으로도 행운이
하지만 반희월은 임경헌이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임경헌은 어떻게 해야 최효원이 내일 몸을 피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가정이 부유하지 않았던 최효원은 임경헌과 사귀면서 늘 조심스러웠고 멘털도 약한 데다 예민한 편이었다. 그렇다 보니 자신의 말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을까 걱정됐다.임경헌은 한참 고민했지만 도저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렇게 다음 날 아침이 빠르게 찾아왔다.성혜인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열은 다 내렸지만 목이 여전히 불편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따뜻하게 데우며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생각만 해도 미간이 좁아졌다. 올해는 운이 따라주지 않는 것 같았다.곧이어 어제 반희월을 보러 갈 여유가 되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오늘은 꼭 가야지.’막 컵을 집어 들었을 때,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최효원이었다.최효원은 속이 편해지는 아침밥을 챙겨왔다. 성혜인의 안색이 많이 좋아진 것을 보고 안심이 되었다.“어제 열이 많이 났잖아요. 아침에 죽 좀 끓였어요. 드세요.”최효원은 말을 이어가면서 집안 곳곳을 빠르게 훑었다.어젯밤 반승제가 페니의 남편이 일찍 나갔다 늦게 돌아온다는 정보를 알려줬었다. 하지만 남편을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페니 씨, 남편은 아주 바쁜가요? 어제 그렇게 열이 났는데 돌봐주지도 않고요.”성혜인은 남편에 관련된 일을 빨리 해결해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다못해 이 사람들에게 남편이라고 소개할 남자라도 찾아야 한다. 이런 질문을 계속되면 들통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테니까.강민지는 분명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인맥도 넓으니 믿을 만한 사람이 주변에 꽤 있을 것이다.“자주 출장 가야 하는 일이라서요.”최효원은 더 묻지 않고 죽을 권했다.성혜인은 감사 인사를 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그때, 최효원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표정이 한층 밝아지는 것만 봐도 전화를 건 주인공이 임경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임경헌은 최효원에게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다며 문을 열라고 했다.
성혜인은 심장이 바닥에 떨어진 것 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거두려 했다.하지만 반희월은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의심의 눈초리로 최효원을 쳐다봤다.최효원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임경헌과 성혜인을 번갈아 가며 훑었다. 그러다 맞잡은 손에 시선이 멈췄다.그녀는 반희월을 알고 있었다. 어젯밤에도 반희월을 찾아가기 위해 자신의 월급으로 선물까지 준비했었다. 임경헌의 전화 때문에 무산되었지만 말이다.자신의 집안 사정을 생각하면 임경헌과 어울리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임경헌은 최효원에게 잘해주었고, 최효원도 그를 많이 좋아했다.그런데 임경헌의 어머니가 임경헌과 성혜인의 손을 잡고 있다니.이게 무슨 상황인가?‘페니는 이미 결혼했잖아.’반승제와도 미묘한 기류가 있는 성혜인이, 임경헌과도 사귀고 있다고?꼬일 대로 꼬인 관계에 최효원은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이런 여자를 친구라고 생각하다니, 처음부터 날 속인 거였어!’성혜인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반희월도 여자로서 여자에게 까탈스럽게 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말이. 성혜인이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그런 말을 뱉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최효원은 수치심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면서 눈물을 떨궜다.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성혜인의 진짜 모습을 다 폭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최효원은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임경헌의 뺨을 때렸다.“나쁜 새끼!”그녀는 입술을 꽉 물며 소리쳤다. 곧이어 성혜인에게 시선을 돌리며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렸다.성혜인은 그녀의 손을 막아내면서 반희월에게 붙잡혀 있던 손도 풀었다.최효원은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어떻게 욕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성혜인은 최효원의 심정이 이해됐다. 그렇지만 자신도 어쩌다 보니 이 일에 휘말리게 된 것이니 누군가에게 맞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그녀는 임경헌을 쳐다봤다. 최효원은 그의 여자친구다. 당연히 임경헌이 나서서 설명을 해야할 때였다.하지만 임경헌이 나서기도 전에 반희월이 차분한 목소리로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
그러나 성혜인은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도우미에게 꽃병을 건네주고는 다시 설연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난 저녁 비행기를 타고 곧 남편과 함께 제원으로 돌아갈 거야. 다음에 널 만나게 될 땐 친구로 만났으면 좋겠네.”설연주는 당당하게 작별인사 한마디도 못 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당당한 성혜인에 비하면 그녀는 마치 평생 빛을 보지 못하는 도랑 속 쥐와 같았다.설연주는 심지어 성혜인의 말을 통해 자신의 비열함을 느꼈고 그 비열함은 차마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설연주는 성혜인의 눈을 거의 바라보지 못했다.혹여나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을 향한 원망과 역겨움을 눈치챌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솔직히 설연주는 성혜인을 진심으로 숭배하고 있었고 진심으로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미 진실을 알게 된 마당에 이제 와서 친구를 사귄다는 건 사치인 셈이다.그렇게 설연주는 설우현이 두 사람을 찾아올 때까지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들에게 다가온 설우현은 설연주의 작품을 보며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못생겼어.”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린 설연주가 설우현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고 뺨을 맞기라도 한 듯 통증이 밀려왔다.이렇게 비열하고 음침하기 그지없는 인간일 뿐인데 감히 설우현에게 그런 마음을 품다니.어쩐지 오래 못 살 것 같더라니... 그녀 같은 사람은 지옥에 가야만 한다.하느님은 그녀에게 복수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내 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다시 설우현을 바라보았고 설우현은 그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마디 툭 내던졌다.“이따 밥 먹고 가.”그러자 설연주는 몰래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휴지로 슬쩍 닦아내며 탐욕스럽게 설우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왜 이 타이밍에 설우현 같은 도련님을 만난 거지?’운명은 정말 그녀를 농락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렇게 성혜인의 말대로 그녀는 저녁 비행기를 타고 제원으로 떠났고 설우현은 특별히 그들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연주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녀는 오번과 통화를 하며 문을 열어주기 위해 현관으로 향했다.그 결과 밖에 서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설우현이었고 그는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끼운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설연주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설연주는 순간 마법이라도 걸린 듯 무어라 말해야 할지, 설우현이 갑자기 이곳에는 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우현 오빠...”이어 설연주는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한편, 설우현은 담뱃불을 끄고 시선을 돌려 설연주의 몸을 쓱 바라보았다.긴장한 나머지 설연주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고 설우현이 과연 조금 전의 통화 내용을 들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그렇게 한참 후에야 설우현은 비로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혜인이가 너 보고 싶다네. 오후 비행기야.”설연주도 잇따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묵묵히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차가 설우현의 별장에 도착하고 설연주는 그제야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이 설우현의 여자친구가 아닌 성혜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거실에 도착해 보니 성혜은이 거실에서 게임을 하면서 놀고 있었고 그 옆에는 빈 스위치 하나가 놓여있었다. 설우현 본인이 사용하던 스위치로 보였다.한편, 성혜인은 설연주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말을 건넸다.“연주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설연주는 무의식적으로 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이미 스위치 앞으로 다가가 스스로 게임을 시작했다.결국,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성혜인을 따라 화원으로 들어섰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위해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었다.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처럼 분위기가 매우 화목해 보였지만 사실 설연주는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계속하여 안절부절못했다. 성혜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두
설연주는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음식을 천천히 먹고 나니 운전기사가 그녀 옆에 다가와 서 있었다. 이는 분명 그녀를 재촉하고 있는 신호였다.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오직 그의 컴퓨터만 바라보고 있었다.설연주가 마음속으로 몰래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한번 설우현을 깊게 쳐다보고 나서야 설연주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기사의 뒤를 따랐다.그녀를 태운 차가 막 별장을 떠나려 할 때, 다른 차가 천천히 별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 순간, 설연주는 원인 모를 충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여자친구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섹시한 연상 스타일일까? 설우현은 그런 여자를 더욱 선호하니까.’설연주는 속눈썹을 드리운 채 창문을 열어보았다.하지만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차는 누가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창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었다.그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괜히 실마리가 드러날까 걱정되었던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차창을 다시 닫아버렸다.“가시죠.”운전기사도 다시 가속 페달을 밟았고 그렇게 설연주는 천천히 별장을 떠났다.오랜만에 다시 설준석의 별장에 돌아와 보니 이상하게 분위기가 어수선하게 느껴지고 무엇을 해도 흥미가 돋지 않았으며 설우현의 얼굴이 계속하여 눈앞에서 아른거렸다.수없이 많은 남자를 꼬시며 이용해 먹었지만 설연주는 단 한 번도 연애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줄곧 설연주의 이용수단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불쌍할 지경으로 적은 감정을 남자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하물며 그 상대는 설우현이다. 그녀와 같은 여자가 설우현에게 어울릴 수가 없는 법이다.설씨 가문의 도련님으로 금수저를 달고 태어나 평생 고생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우스우면서도 씁쓸해졌다.저녁이 되자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설연주 씨, 설강민이 두팔에게 끌려갔다고 합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온몸이 오싹해졌다. 설강민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낭패한 모습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평소 물 쓰듯 돈을 쓰던 술집에서 쫓겨나는 날이 있다니.그 순간, 설강민은 문득 설준석이 이 술집의 지분을 일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강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분명 그의 체면을 짓밟기 위해 아버지가 지시한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설준석에게 가서 사실대로 털어 넣고 돈을 갚아달라며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막상 이 지경이 되니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기며 더더욱 설준석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설강민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조금 전 또 20억 원을 빌렸으니 차라리 이 20억 원으로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게 나았다.다시 마음을 먹고 설강민은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한 채 현금 뭉치를 매니저에게 던져주었다.“지금 당장 가장 좋은 술을 가져오고 5명의 계집애를 데려와.”한 푼도 없을 줄 알았던 설강민이 뜻밖에도 600만을 들고 들어오니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그러자 설강민은 오히려 더욱 으스대며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아무리 초라해도 난 설씨 가문 일원인데 그깟 돈 하나 못 꺼내겠어?”돈을 받은 매니저는 바로 계집 몇 명을 설강민에게 보내주었다.아무리 돌이켜봐도 오늘 밤의 일은 생각할수록 더욱 화가 났다. 하여 설강민은 매니저가 보낸 여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양옆에 여자들을 껴안으며 오늘 밤 겪었던 울분을 풀어냈다.한편, 설연주는 구석에 서서 설강민의 모든 행동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다.룸을 떠나고 화장실에 간 설연주는 그제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최근에 열이 나며 심각하게 살이 많이 빠진 모양이다.그리고 오늘 밤 설강민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웃기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설연주가 쉰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설연주, 봤어? 저게 바로 네가 목숨을 바쳐서 구한 남자야.
설연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샤워를 마치고 다시 한번 세수를 마치고 나서야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러나 설우현은 이미 떠난 모양이었다. 말을 들어보니 아침 일찍 설기웅에게 불려가 두 아이를 돌보러 갔다고 한다.순식간에 할 일이 없어진 설연주는 그저 별장 안에 앉아 바깥에 활짝 피어있는 꽃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저녁, 방금 해열제를 먹고 다시 바라보니 정원에는 설우현의 차가 멈춰 세워져 있었다.그리고 설우현은 품에 꽃다발을 안은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다정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순간,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길이 멈칫하고 설연주는 먹고 있던 과일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설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설우현이 위층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 다시 꽃을 안고 외출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잠깐 고민해보던 설연주는 결국 다시 올라가 설우현에게 인사를 건넸다.“오빠, 데이트하러 나가요?”설우현은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몸은 좀 어때? 괜찮아졌어?”“네, 좀 나아졌어요.”그러자 설우현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액셀을 밟았다.설연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입을 여니 대체 뭘 물어야 할지도 몰랐다.같은 시각, 설우현은 이미 차를 몰고 떠났고 설연주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그녀조차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그때,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설강민이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 어떻게 그 20억을 갚을지 생각 중이라고 한다.“명목상이지만 설연주 씨 친오빠 진짜 너무 멍청한 것 같네요. 이렇게 간단한 사기극에도 속다니... 두팔이 빌려준 20억은 이윤이 이미 30억이 됐어요. 그런데 설준석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안 하고 도리어 두팔에게 또 대출을 받았다니까요. 그러니까 또 20억을 빌렸죠.”오번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웃음이 나왔다.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그럼 설강민은 지
설우현은 자신의 잡혀버린 소매와 설연주의 눈빛을 번갈아 보았다.한 치의 빛깔도 없이 캄캄하기만 했다.당황스러울 정도로 낭패한 그녀의 모습에 설우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나 어디 안 가. 물 따라올게.”“물 안 마셔도 돼요. 목 안 말라요.”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핏발이 보일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잠시 생각에 잠긴 설우현은 이내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설연주의 몸은 여전히 조금씩 떨고 있었고 설우현을 놓아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그때, 도우미 아주머니가 문밖에 찾아왔다. 설연주의 목소리가 워낙 날카로워 집 안에 있던 사람들도 전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러자 설우현은 침대 옆에 앉은 채, 도우미에게 말을 건넸다.“미지근한 물 한 잔과 해열제 한 알 주세요.”설연주의 열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정말 의사의 말대로 너무 긴장한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잠시 후, 도우미는 설우현의 말을 따라 재빨리 물을 가져다 놓고는 약을 설우현의 손바닥 위에 놓아주었다.이윽고 설우현은 설연주의 턱을 치켜들고 약을 먹여주었다.그러나 설연주는 입을 벌리고 있을 뿐 약을 삼키려 하지 않았다.몇 초간 머뭇거리던 설우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손끝을 그녀의 입에 넣고는 목 가장 깊은 곳에 약을 대었다.이에 설연주는 결국 마지못해 약을 삼키게 되었고 설우현은 또다시 물컵을 그녀 앞에 놓아두고 턱을 잡더니 천천히 물을 먹여주었다.물이 목구멍을 따라 흘러내리며 설연주는 저도 모르게 기침을 두 번 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막막하기만 했다.그렇게 물 반 컵을 마신 후에야 설우현은 물컵을 옆에 있는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이제 그만 자.”“오빠, 제발 가지 말아요.”설연주는 마치 가지 말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계속하여 그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하지만 설우현은 그녀의 그런 모습이 그저 웃겼다. 이제 정말 익숙해지기라도 한 걸까. 설우현이 정말 설연주의 오빠인지 아닌지도 아직 확실하
현재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과거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병에 걸린 적이 몇 번 없었는데 이젠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건강은 점점 악화하여가기만 했다.그저 평생 행복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가?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남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덩달아 마음이 약해진 오번도 다시 한번 그녀에게 당부해주었다.“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 하면 안 돼요. 이번에 설우현이 날 놓아준 건 전부 서주혁의 얼굴을 봐서였다고요. 다음부터는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까 가만히 있자고요. 어차피 지금 김현서는 두팔 쪽에 있고 설강민은 사채업자들한테 걸렸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빚은 졌다는 사실이 설준석의 귀에 들어갈 거예요.”찌릿찌릿 쑤시는듯한 통증에 설연주가 손을 들어 태양혈을 주물렀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설연주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오번 씨, 그거 알아요? 요즘 계속 꿈을 꾸는데 꿈만 꾸면 비싼 카펫 위에서 기어 다니는 내 모습이 보여요. 그래서 가끔 생각해요.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생활이 과연 현실일까? 갖은 노력을 다해 설씨 가문에 들어온 게 정말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였을까?”“설연주 씨...”“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아요. 전 저를 괴롭혔던 사람들이 모두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정승후는 이미 무너졌으니 다음은 설강민, 그리고 다음은 김현서, 마지막은 두팔까지...”오번이 미간을 찌푸렸다. 두팔을 상대한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두팔의 세력은 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강대했으니까.“이번에는 고마웠어요. 끝까지 저 지켜줬잖아요. 앞으로 다시는 설씨 가문에 손을 대지 않을 거니까 오번 씨도 계속 저한테 소식만 전해줘요.”“그래요.”전화가 끊기고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아무리 뒤척여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설우현도 언젠가 성혜인에게 생길뻔한 일이 그녀와 관련
남자가 전화를 한 상대는 오혜수였다. 지금 그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의 보스뿐이니까.전화를 받은 오혜수는 여전히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오번? 너 퇴직한 거 아니니? 왜 아직도 전화해.”오번은 남자의 암호명 순위일 뿐이다. 전에 오혜수의 곁을 따라다닐 때 해킹을 담당하며 얻은 암호명이다.그 후 제원시에서 미움을 사는 바람에 플로리아로 건너와 자신의 기술로 용돈 벌이를 하는 것이다.비록 전에 충분히 많은 돈을 벌어두었지만 돈이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으니 더 벌면 안될 것도 없었다.“보스, 이번에 저를 구하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주혁과 장하리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설우현 도련님께 잡혀 왔는데 번거로우시겠지만 도련님께 전화 좀 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오늘 당장 두 다리를 잃을 것 같습니다.”오번이 서주혁의 이름을 내뱉은 순간 설우현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 일이 서주혁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아하니 남자는 그저 서주혁이 대신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한편, 오혜수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서주혁을 알고 있는 건 맞지만 서주혁도 아직 장하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체면을 세워줄 이유가 없었다.“보스, 저를 구하지 않으면 오늘 정말 다리가 부러질 겁니다.”“닥쳐. 그러게 멀쩡히 잘 있는 설씨 가문을 왜 건드려?”오혜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 부잣집 자제들과 접점이 생기는 것이었다.그러나 오번 역시 상황이 급한지라 또 몇 번이나 거짓 울음을 터뜨리면서 꼭 구해주러 오라고 몇 번이고 당부한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전에 제원에 있을 때 장하리의 행방을 감추는 것을 도운 적이 있기에 지금 오번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장하리와 서주혁뿐이었다.설우현은 휴대폰을 낚아챈 뒤 바로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이 아닌 유심히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겁에 질린 오번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감히 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5분 후, 누군가가 설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