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워진 최효원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어머님, 정말이에요. 페니와 반 대표님이...”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반희월이 말허리를 잘랐다.“그건 승제가 알아서 할 일이니 나에게 말해도 소용없다. 난 그저 집안 어른일 뿐, 사생활에 끼어들 생각 없어.”반희월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최효원에게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성혜인을 향했다.믿기지 않았다. 반승제를 길들일 능력이 있다니.반승제는 집에 있는 부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밖으로 나돌 애가 아니었다.하지만 병원에서 두 번이나 우연히 마주친 데다, 힘든 데도 꾹 참고 버티는 성혜인의 모습에 자신도 흔들렸었다.‘승제가 그런 술수에 넘어갈 리가 없지.’이 사회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살았는데, 반희월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알아서 하렴.”반희월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반희월이 떠나고 난 뒤, 방 안에는 적막만이 맴돌았다.한참이 지나 성혜인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사장님, 여자친구분 데리고 가세요.”최효원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는 임경헌은 그녀를 달랬다.“자기야, 집에 데려다줄게. 가서 전부 설명할게.”이 상황이 달갑지 않은 최효원은 성혜인을 대놓고 노려봤다.“페니 씨, 이런 사람인 줄 몰랐네요. 친구라 생각해서 어젯밤 열심히 간호도 했는데... 두고 봐요!”임경헌은 계속 최효원을 달래며 끌고 나가려 했다. 최효원은 그제야 잠시 마음을 내려놓았다.성혜인은 현관문을 닫고 나서도 머리가 계속 지끈거렸다.이 건물에는 층마다 가구 수가 두 개뿐이다. 그렇다는 건 같은 층에 성혜인과 최효원, 둘만 산다는 것이다. 최효원과 틀어져 버린 것으로 모자라 임남호와 얽혀 있는 여자도 이 동네에 살고 있었다. 성혜인은 너무나도 괴로웠다.오랫동안 찾고 찾아 전 재산을 털어 구한 집인데, 결국 남은 건 이런 문제뿐이었다.포레스트 펜션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반승제만 피하면 되니까.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 안 좋게 얽히면서 진
그 짧은 찰나, 성혜인은 차라리 반승제에게 솔직히 털어놓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정체를 밝히고 나면 이렇게 숨을 필요도 없고 임경헌에게 거짓말할 필요도 없으니까.하지만 반승제가 성씨 집안을 대하는 태도가 문득 떠올랐다. 게다가 디자이너로 협력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난감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게다가 반승제도 성혜인을 많이 돕지 않았는가.성혜인은 일을 벌일 자신이 없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력이 끌어당기는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다.마음도, 몸도 다 피곤했다.“아주머니, 몸이 좀 안 좋아서 밥은 건너뛰어야 할 것 같아요. 부르지 않으셔도 돼요.”유경아는 난감했다.“저... 사모님. 지난번에도 그 핑계를 댔었는데 대표님이 화를 내셨어요.”성혜인은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괜찮아요. 어차피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사이인데요, 뭘.”정확히 말하면, 성혜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반승제 ‘부인’과의 관계 말이다.성혜인이 반승제 부인의 신분으로 그에게 다가간다면 분명 싫어할 것이다.반승제는 부인이 자신의 삶에서 멀어지길 바라고 있다. 16억을 빌리던 그날도 반승제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이체를 해주었다. 스스로의 신분이 무엇인지 똑똑히 기억하라는 눈치와 함께.성혜인이 처음부터 반승제 부인의 신분으로 그를 만났다면, 반승제는 절대 그녀와 만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유경아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결국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저녁 무렵. 반승제는 별장으로 들어오면서 정장을 스탠드에 걸었다.방안에 향긋한 밥 냄새가 가득했다. 막 회의를 마치고 온 터라 피로감이 느껴졌다.유경아는 꾸물거리지 않고 급히 마중을 나왔다.“오셨어요?”반승제는 요즘 자신이 오고 싶을 때마다 포레스트에 오고 있다.할아버지도 검사하겠다고 갑자기 포레스트를 찾아오고는 했다. 그때마다 며칠 밤 이곳에 머물며 할아버지를 챙겼다.“저녁 준비해 뒀어요. 식사하세요.”유경아는 도우미들에게 음식을 내오라고 지시했다. 반승제는 자리에
성혜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때 계단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한 사람이 아니었다.곧이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개 키우는 사람이 있어요?”반승제다.성혜인은 급히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다시 닫았다.유경아가 아니라고 말하려던 그때, 그녀의 귀에도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반승제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다른 데로 보내요.”유경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반승제가 방 안으로 들어가고 난 후, 그녀는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했다.때마침 성혜인은 복도로 나와 유경아를 붙잡았다.“아주머니, 겨울이를 풀어뒀어요?”유경아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를 싸맸다.“제가 문을 안 잠갔나 봐요. 겨울이는 워낙 똑똑해서 제가 문을 안 잠그면 스스로 열고 나오더라고요.”유경아는 다급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사모님, 걱정 마세요. 제가 얼른 안에 넣어둘게요.”성혜인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녀는 굳게 닫힌 반승제의 방문을 바라보며 말했다.“어서요. 대표님이 알면 안 돼요.”유경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원으로 향했다.겨울이는 며칠 동안 성혜인이 새로 구입한 집에서 머물렀다. 작지 않은 집이었지만 그래도 이 드넓은 정원만큼 편할 수 없었다.그렇다 보니 포레스트 펜션으로 돌아오자마자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와 정원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던 것이다.유경아는 혹여 들킬세라 혼내지도 못하고 빠른 보폭으로 겨울이에게 다가가 옆으로 끌어당겼다.같은 시각. 반승제는 큰 창문 앞에 섰다. 강아지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개 짖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도우미가 강아지를 키우는 듯했다.그는 별 신경 쓰지 않고 뒤로 돌아 진행하던 회의를 이어갔다.몸을 돌리던 바로 그때, 유경아에게 끌려가는 겨울이가 창문 밖을 지나쳐 갔다.“대표님, 서천 쪽에서 계획안이 나왔습니다. 이전에 있던 몇몇 임원들이 새로운 복지를 제시하였습니다. 저희는 그곳을 관광지로 만들 생각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기획부에서 기존 프로젝트에 몇
다음 날 아침. 성혜인은 반승제가 밖에 나가고 나서야 아래층으로 내려왔다.그녀는 강민지와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민지야, 사람 좀 한 명 찾아 줘. 잠깐 내 남편인 척할 사람이 필요해.”마침 커피를 들이키던 강민지는 하마터면 다 뱉을 뻔했다.“콜록콜록...”그녀는 기침을 하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성혜인을 쳐다봤다.“아직까지도 반승제가 네 얼굴을 모르는 거야?”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으로 앞에 있던 커피잔을 쥐었다.그녀에게 반승제는 대표이자 자본주였다.하지만 매일 밤 그와 함께 보냈던 그날 밤이 떠오르는 걸 보면,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너무 격렬해서 조금 다친 것만 빼면 반승제의 테크닉은 사실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게다가 30초 정도의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목구멍에서 뻗어 나온 갈고리처럼 자꾸만 심장을 후벼 팠다.성혜인은 계속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억눌렀기 때문에 반승제의 눈빛을 봐도 아무렇지 않았다.네이처 빌리지의 공사를 끝내고 그 여자도 귀국해 반승제가 반태승에게 제대로 해명하고 나면 성혜인의 임무는 끝이 난다.성혜인은 반승제와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녀의 마음속에도 비밀이 있으니까.강민지는 한동안 놀란 얼굴로 넋이 나가 있었다. 성혜인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닫고 난 후, 머릿속으로 후보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성혜인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고급스러운 강민지를 쳐다봤다. 손톱까지도 매일 전문가의 케어를 받는 데다 비싼 액세서리와 가방까지... 어떻게 봐도 일반 가정의 딸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부잣집 딸처럼 보였다.하지만 신예준은 강민지와 사귀고 나서 지금까지 강민지가 계속 서비스업에서 일하는 직원으로 알고 있다. 너무 순진하다.성혜인과 강민지는 자란 환경이 다르다. 성혜인은 학교에서 그런 어려움을 겪고 난 후 직장을 찾고 나서도 온갖 사람들을 다 마주해야 했다. 그렇다 보니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높은 편이다.이와 반대로 강민지는 상아탑에서 나온 공주 같다.
신예준은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어헤쳤다. 그는 껄렁한 모습으로 담뱃재를 툭툭 털며 테이블에 놓인 돈을 자기 앞으로 끌어왔다.“운이 좋았던 거지.”그가 말하는 ‘운’은 이번 도박판에 대한 답일까, 아니면 남자의 질문에 대한 답일까.신예준의 입술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적당히 훤칠한 외모는 ‘잘생쁨’, 그 자체였다.강민지 앞에서 보여주던 순진하고 깔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카리스마가 넘쳤다.“운 때문이겠어? 저 잘생긴 얼굴 덕이지. 얼굴로 부잣집 딸을 꾀었으니 망정이지, 도박해서 딴 돈으로 의료비에 보탤 수나 있겠어?”테이블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물이 담긴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눌러 버리자 누런 찌꺼기가 새어 나왔다.신예준은 이런 광경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포커가 끝난 후, 돈을 몇 장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뒀다.“덕분에 커피값 생겼네. 나 간다. 병원에서 돈 내라 재촉해서 말이야.”“예준아, 부잣집 딸도 꼬셨으면서 돈이 모자란 게 말이 돼? 병원 가기 전에, 우리 형님도 계속 재촉해서 말이야. 오늘 이긴 돈도 빚진 사채에 비하면 어림도 없지.”“형, 이걸로 담배나 사. 꼭 갚을 테니까 형님 쪽에 잘 얘기해 줘.”‘형’이라는 남자는 돈을 받더니 안색이 한층 밝아졌다.“역시 사람이 됨됨이가 됐어. 언제 한 번 그 부잣집 여자친구 데리고 와. 금수저 아가씨는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사람들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낄낄 웃으며 바닥에 나뒹구는 물병과 쥐포 봉투 껍데기를 발로 찼다.신예준은 픽 웃으며 문을 열고 나갔다. 그때, 그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때마침 강민지에게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며 따뜻한 목소리로 전화 받았다.“응, 민지야.”“예준 씨, 지난번에 만났던 내 친구 기억해? 성혜인이라는 친구. 지금 가짜 남편 역할 해줄 남자를 찾고 있는데, 설명하기에는 좀 복잡해. 아무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남편이라고 말만 해주면 돼. 돈이 꽤 있는 친구라 사례도 넉넉히 할 거
서민규는 더 이상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예준이 꺼낸 제안이 신경 쓰였다.‘600만 원이라고? 그것도 얼굴만 비췄는데?’서민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부잣집 아가씨를 만날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만 신예준 만큼 외모가 뛰어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봐줄 리가 없었다.“예준아, 그 일, 정말이야?”신예준은 계단에 걸터앉으며 긴 다리를 쭉 펴고 뒤로 몸을 기댔다. 남자인 서민규도 질투가 날 정도로 훤칠한 외형이었다. 다이아몬드 회사의 딸을 꼬실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게다가 강민지는 명실상부한 부잣집 외동딸인데, 신예준이 잘만 보이면 강씨 집안의 주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정말이지. 강민지를 속이는 게 얼마나 쉬운지 너도 알잖아.”신예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런데 그 친구는 꼬시기 좀 까다로울 거야. 웬만하면 600만 원만 받고 빠져.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서민규는 돈이 필요하기도 했기 때문에 한참을 고심하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한편, 강민지와 성혜인은 줄곧 카페에 앉아 그들을 기다렸다.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신예준이 서민규와 함께 카페로 들어섰다.성혜인은 서민규의 얼굴을 바라봤다. 평범한 얼굴에 이쪽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계획은 순조롭게 정해졌다. 인색하지 않은 성혜인은 곧바로 600만 원을 이체해 주며 살고 있는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서민규는 ‘로즈가든’이라는 말에 움찔거렸다.그곳은 그의 회사 사장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수십억에 호가하는 집이라고 들었다.‘역시 금수저는 친구도 금수저구나.’서민규는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졌다. 하지만 신예준의 부탁 때문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혜인 씨, 걱정 마요. 제가 남편 역할 잘 해낼게요. 메시지 보내면 바로 찾아오고요.”“혜인 말고 페니라 불러줘요.”성혜인은 서민규의 회사를 물어보았다. 마침 그녀가 협력하고 있는 BK 사였다.하지만 서민규는 일개 직원에 불과했고, 성혜인과 소통하는 사람들은 모두 임원
성혜인의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공급업체들과 모두 상의를 마치고 내일 서천으로 가기 위해 막 준비하던 참이었다. 그때, 몇몇 협력사에서 머뭇거리며 전화를 걸어왔다.“페니 씨, 정말 죄송합니다. 페니 씨와 협력하지 말라는 통보가 갑자기 내려와서요. 다른 회사를 찾아봐야 할 것 같네요.”“하지만...”성혜인은 구체적으로 묻고 싶었지만, 상대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네 통이나 다시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성혜인은 제자리에 앉아 미간을 구겼다.신이한 때문에 조희준과의 협력이 파기된 적이 있었다. 조희준이 아직까지 성혜인을 찾아다니고 있지만 그녀는 만날 생각이 없었다. 경찰이 알아서 처리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신이한까지 처리하고 BK 사도 그녀에게 넘어온 상황이니 원래대로라면 순조롭게 잘 흘러가야 할 것이다. 며칠 동안 공급업체와도 대화가 아주 잘 통했는데,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란 말인가?‘어디서 잘못된 거지?’성혜인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회사가 있는 단톡방을 열었다. 양한겸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냐고 물어왔다.성혜인은 답장을 보냈다.「제가요?」그러자 양한겸이 개인톡을 보냈다.「회사에서 주문 철회된 디자이너들이 꽤 있어. 사장님이 무슨 잘못을 했기 때문이라면서 말이야. 우리 회사에서 나가줬으면 좋겠어. 네이처 빌리지 건은 우리에게 넘기고.」신이한 때보다 사안이 더 심각했다. 이미 회사까지 악영향이 끼친 상황이었다.원래 회사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상황에 성혜인 때문에 철회까지 되었으니 이미 볼멘소리가 나오고도 남았을 것이다.「한지은 씨도 해고했어. 경찰에 붙잡혀 들어가서 큰돈을 물어야 한다고 들어서.」그제야 머릿속에 한 사람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반희월이다.최근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 만한 사람은 반희월뿐이다.지금 반희월의 마음속에서 성혜인은 반승제와 임경헌을 갖고 논 여우일 것이다.반희월은 아들에게 늘 엄격하게 대했고, 반승제에게도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니 두 남자가 한 디자이너 손
이 층에는 더 이상 살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 이 층에 있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라는 것이다.천장의 조명 때문에 성혜인의 피부가 유독 하얗게 보였다. 눈동자도 어느 때보다 밝게 반짝이고 있었다. 얼마나 여기에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요. 대표님, 저 좀 들어가도 될까요?”반승제은 눈썹을 들썩거렸다. 야밤에 호텔 문 앞까지 찾아와 기다리다니. 예전에는 그림을 그려준 적도 있었고 말이다.그는 거절할 생각이었다. 서로 거리를 두어야만 했으니까.성혜인은 반승제가 거절하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게다가 이번 일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반희월이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제대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반승제는 카드키로 문을 열었다.바로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협력업체에서 온 전화였다.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이었고 미리 공급업체들과도 이야기를 끝내둔 상황이었지만, 거의 모든 공급업체가 협력을 취소했다.회사도 큰 타격을 본 상황이다.반희월은 반씨 집안인 사람인 데다 업계에서 입김이 센 사람이기 때문에 임경헌도 엄하게 관리하고 있었다.성혜인은 보온 도시락을 든 채 소파에 앉았다.반승제는 정장 외투를 벗고 셔츠 윗단추를 풀어헤치자 쇄골이 드러났다.반승제는 언제든 사람을 홀릴 수 있는 외모였다.성혜인은 시선을 피했다. 그때 그 그림이 떠올랐다. 디테일을 더 추가할 수 있을 것 같았다.“무슨 일인지 말해.”반승제는 천천히 셔츠 소매를 접어 올렸다. 골격 잡힌 손목이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성혜인 건너편에 앉았다.가장 밝은 조명을 켜지 않아 노란빛이 맴돌았다. 술 냄새까지 은은하게 퍼지니 성혜인은 눈앞이 아찔했다.마치 성혜인이 술을 마신 것 같은 기분이었다.남자든 여자든 분위기에 취하면 정신을 차리기 어렵다.반승제는 조금 상기된 그녀의 시선을 느꼈다.“페니?”성혜인은 정신을 다잡고 보온 도시락을 티테이블 위에 올려놨다.“대표님, 상처는 다 나으셨어요?”반승제 손에 난 상처에 대해 하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
그러나 성혜인은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도우미에게 꽃병을 건네주고는 다시 설연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난 저녁 비행기를 타고 곧 남편과 함께 제원으로 돌아갈 거야. 다음에 널 만나게 될 땐 친구로 만났으면 좋겠네.”설연주는 당당하게 작별인사 한마디도 못 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당당한 성혜인에 비하면 그녀는 마치 평생 빛을 보지 못하는 도랑 속 쥐와 같았다.설연주는 심지어 성혜인의 말을 통해 자신의 비열함을 느꼈고 그 비열함은 차마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설연주는 성혜인의 눈을 거의 바라보지 못했다.혹여나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을 향한 원망과 역겨움을 눈치챌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솔직히 설연주는 성혜인을 진심으로 숭배하고 있었고 진심으로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미 진실을 알게 된 마당에 이제 와서 친구를 사귄다는 건 사치인 셈이다.그렇게 설연주는 설우현이 두 사람을 찾아올 때까지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들에게 다가온 설우현은 설연주의 작품을 보며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못생겼어.”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린 설연주가 설우현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고 뺨을 맞기라도 한 듯 통증이 밀려왔다.이렇게 비열하고 음침하기 그지없는 인간일 뿐인데 감히 설우현에게 그런 마음을 품다니.어쩐지 오래 못 살 것 같더라니... 그녀 같은 사람은 지옥에 가야만 한다.하느님은 그녀에게 복수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내 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다시 설우현을 바라보았고 설우현은 그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마디 툭 내던졌다.“이따 밥 먹고 가.”그러자 설연주는 몰래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휴지로 슬쩍 닦아내며 탐욕스럽게 설우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왜 이 타이밍에 설우현 같은 도련님을 만난 거지?’운명은 정말 그녀를 농락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렇게 성혜인의 말대로 그녀는 저녁 비행기를 타고 제원으로 떠났고 설우현은 특별히 그들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연주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녀는 오번과 통화를 하며 문을 열어주기 위해 현관으로 향했다.그 결과 밖에 서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설우현이었고 그는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끼운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설연주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설연주는 순간 마법이라도 걸린 듯 무어라 말해야 할지, 설우현이 갑자기 이곳에는 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우현 오빠...”이어 설연주는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한편, 설우현은 담뱃불을 끄고 시선을 돌려 설연주의 몸을 쓱 바라보았다.긴장한 나머지 설연주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고 설우현이 과연 조금 전의 통화 내용을 들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그렇게 한참 후에야 설우현은 비로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혜인이가 너 보고 싶다네. 오후 비행기야.”설연주도 잇따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묵묵히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차가 설우현의 별장에 도착하고 설연주는 그제야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이 설우현의 여자친구가 아닌 성혜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거실에 도착해 보니 성혜은이 거실에서 게임을 하면서 놀고 있었고 그 옆에는 빈 스위치 하나가 놓여있었다. 설우현 본인이 사용하던 스위치로 보였다.한편, 성혜인은 설연주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말을 건넸다.“연주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설연주는 무의식적으로 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이미 스위치 앞으로 다가가 스스로 게임을 시작했다.결국,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성혜인을 따라 화원으로 들어섰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위해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었다.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처럼 분위기가 매우 화목해 보였지만 사실 설연주는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계속하여 안절부절못했다. 성혜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두
설연주는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음식을 천천히 먹고 나니 운전기사가 그녀 옆에 다가와 서 있었다. 이는 분명 그녀를 재촉하고 있는 신호였다.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오직 그의 컴퓨터만 바라보고 있었다.설연주가 마음속으로 몰래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한번 설우현을 깊게 쳐다보고 나서야 설연주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기사의 뒤를 따랐다.그녀를 태운 차가 막 별장을 떠나려 할 때, 다른 차가 천천히 별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 순간, 설연주는 원인 모를 충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여자친구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섹시한 연상 스타일일까? 설우현은 그런 여자를 더욱 선호하니까.’설연주는 속눈썹을 드리운 채 창문을 열어보았다.하지만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차는 누가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창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었다.그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괜히 실마리가 드러날까 걱정되었던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차창을 다시 닫아버렸다.“가시죠.”운전기사도 다시 가속 페달을 밟았고 그렇게 설연주는 천천히 별장을 떠났다.오랜만에 다시 설준석의 별장에 돌아와 보니 이상하게 분위기가 어수선하게 느껴지고 무엇을 해도 흥미가 돋지 않았으며 설우현의 얼굴이 계속하여 눈앞에서 아른거렸다.수없이 많은 남자를 꼬시며 이용해 먹었지만 설연주는 단 한 번도 연애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줄곧 설연주의 이용수단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불쌍할 지경으로 적은 감정을 남자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하물며 그 상대는 설우현이다. 그녀와 같은 여자가 설우현에게 어울릴 수가 없는 법이다.설씨 가문의 도련님으로 금수저를 달고 태어나 평생 고생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우스우면서도 씁쓸해졌다.저녁이 되자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설연주 씨, 설강민이 두팔에게 끌려갔다고 합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온몸이 오싹해졌다. 설강민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낭패한 모습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평소 물 쓰듯 돈을 쓰던 술집에서 쫓겨나는 날이 있다니.그 순간, 설강민은 문득 설준석이 이 술집의 지분을 일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강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분명 그의 체면을 짓밟기 위해 아버지가 지시한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설준석에게 가서 사실대로 털어 넣고 돈을 갚아달라며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막상 이 지경이 되니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기며 더더욱 설준석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설강민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조금 전 또 20억 원을 빌렸으니 차라리 이 20억 원으로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게 나았다.다시 마음을 먹고 설강민은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한 채 현금 뭉치를 매니저에게 던져주었다.“지금 당장 가장 좋은 술을 가져오고 5명의 계집애를 데려와.”한 푼도 없을 줄 알았던 설강민이 뜻밖에도 600만을 들고 들어오니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그러자 설강민은 오히려 더욱 으스대며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아무리 초라해도 난 설씨 가문 일원인데 그깟 돈 하나 못 꺼내겠어?”돈을 받은 매니저는 바로 계집 몇 명을 설강민에게 보내주었다.아무리 돌이켜봐도 오늘 밤의 일은 생각할수록 더욱 화가 났다. 하여 설강민은 매니저가 보낸 여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양옆에 여자들을 껴안으며 오늘 밤 겪었던 울분을 풀어냈다.한편, 설연주는 구석에 서서 설강민의 모든 행동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다.룸을 떠나고 화장실에 간 설연주는 그제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최근에 열이 나며 심각하게 살이 많이 빠진 모양이다.그리고 오늘 밤 설강민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웃기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설연주가 쉰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설연주, 봤어? 저게 바로 네가 목숨을 바쳐서 구한 남자야.
설연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샤워를 마치고 다시 한번 세수를 마치고 나서야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러나 설우현은 이미 떠난 모양이었다. 말을 들어보니 아침 일찍 설기웅에게 불려가 두 아이를 돌보러 갔다고 한다.순식간에 할 일이 없어진 설연주는 그저 별장 안에 앉아 바깥에 활짝 피어있는 꽃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저녁, 방금 해열제를 먹고 다시 바라보니 정원에는 설우현의 차가 멈춰 세워져 있었다.그리고 설우현은 품에 꽃다발을 안은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다정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순간,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길이 멈칫하고 설연주는 먹고 있던 과일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설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설우현이 위층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 다시 꽃을 안고 외출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잠깐 고민해보던 설연주는 결국 다시 올라가 설우현에게 인사를 건넸다.“오빠, 데이트하러 나가요?”설우현은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몸은 좀 어때? 괜찮아졌어?”“네, 좀 나아졌어요.”그러자 설우현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액셀을 밟았다.설연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입을 여니 대체 뭘 물어야 할지도 몰랐다.같은 시각, 설우현은 이미 차를 몰고 떠났고 설연주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그녀조차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그때,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설강민이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 어떻게 그 20억을 갚을지 생각 중이라고 한다.“명목상이지만 설연주 씨 친오빠 진짜 너무 멍청한 것 같네요. 이렇게 간단한 사기극에도 속다니... 두팔이 빌려준 20억은 이윤이 이미 30억이 됐어요. 그런데 설준석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안 하고 도리어 두팔에게 또 대출을 받았다니까요. 그러니까 또 20억을 빌렸죠.”오번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웃음이 나왔다.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그럼 설강민은 지
설우현은 자신의 잡혀버린 소매와 설연주의 눈빛을 번갈아 보았다.한 치의 빛깔도 없이 캄캄하기만 했다.당황스러울 정도로 낭패한 그녀의 모습에 설우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나 어디 안 가. 물 따라올게.”“물 안 마셔도 돼요. 목 안 말라요.”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핏발이 보일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잠시 생각에 잠긴 설우현은 이내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설연주의 몸은 여전히 조금씩 떨고 있었고 설우현을 놓아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그때, 도우미 아주머니가 문밖에 찾아왔다. 설연주의 목소리가 워낙 날카로워 집 안에 있던 사람들도 전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러자 설우현은 침대 옆에 앉은 채, 도우미에게 말을 건넸다.“미지근한 물 한 잔과 해열제 한 알 주세요.”설연주의 열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정말 의사의 말대로 너무 긴장한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잠시 후, 도우미는 설우현의 말을 따라 재빨리 물을 가져다 놓고는 약을 설우현의 손바닥 위에 놓아주었다.이윽고 설우현은 설연주의 턱을 치켜들고 약을 먹여주었다.그러나 설연주는 입을 벌리고 있을 뿐 약을 삼키려 하지 않았다.몇 초간 머뭇거리던 설우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손끝을 그녀의 입에 넣고는 목 가장 깊은 곳에 약을 대었다.이에 설연주는 결국 마지못해 약을 삼키게 되었고 설우현은 또다시 물컵을 그녀 앞에 놓아두고 턱을 잡더니 천천히 물을 먹여주었다.물이 목구멍을 따라 흘러내리며 설연주는 저도 모르게 기침을 두 번 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막막하기만 했다.그렇게 물 반 컵을 마신 후에야 설우현은 물컵을 옆에 있는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이제 그만 자.”“오빠, 제발 가지 말아요.”설연주는 마치 가지 말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계속하여 그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하지만 설우현은 그녀의 그런 모습이 그저 웃겼다. 이제 정말 익숙해지기라도 한 걸까. 설우현이 정말 설연주의 오빠인지 아닌지도 아직 확실하
현재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과거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병에 걸린 적이 몇 번 없었는데 이젠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건강은 점점 악화하여가기만 했다.그저 평생 행복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가?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남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덩달아 마음이 약해진 오번도 다시 한번 그녀에게 당부해주었다.“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 하면 안 돼요. 이번에 설우현이 날 놓아준 건 전부 서주혁의 얼굴을 봐서였다고요. 다음부터는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까 가만히 있자고요. 어차피 지금 김현서는 두팔 쪽에 있고 설강민은 사채업자들한테 걸렸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빚은 졌다는 사실이 설준석의 귀에 들어갈 거예요.”찌릿찌릿 쑤시는듯한 통증에 설연주가 손을 들어 태양혈을 주물렀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설연주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오번 씨, 그거 알아요? 요즘 계속 꿈을 꾸는데 꿈만 꾸면 비싼 카펫 위에서 기어 다니는 내 모습이 보여요. 그래서 가끔 생각해요.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생활이 과연 현실일까? 갖은 노력을 다해 설씨 가문에 들어온 게 정말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였을까?”“설연주 씨...”“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아요. 전 저를 괴롭혔던 사람들이 모두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정승후는 이미 무너졌으니 다음은 설강민, 그리고 다음은 김현서, 마지막은 두팔까지...”오번이 미간을 찌푸렸다. 두팔을 상대한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두팔의 세력은 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강대했으니까.“이번에는 고마웠어요. 끝까지 저 지켜줬잖아요. 앞으로 다시는 설씨 가문에 손을 대지 않을 거니까 오번 씨도 계속 저한테 소식만 전해줘요.”“그래요.”전화가 끊기고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아무리 뒤척여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설우현도 언젠가 성혜인에게 생길뻔한 일이 그녀와 관련
남자가 전화를 한 상대는 오혜수였다. 지금 그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의 보스뿐이니까.전화를 받은 오혜수는 여전히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오번? 너 퇴직한 거 아니니? 왜 아직도 전화해.”오번은 남자의 암호명 순위일 뿐이다. 전에 오혜수의 곁을 따라다닐 때 해킹을 담당하며 얻은 암호명이다.그 후 제원시에서 미움을 사는 바람에 플로리아로 건너와 자신의 기술로 용돈 벌이를 하는 것이다.비록 전에 충분히 많은 돈을 벌어두었지만 돈이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으니 더 벌면 안될 것도 없었다.“보스, 이번에 저를 구하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주혁과 장하리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설우현 도련님께 잡혀 왔는데 번거로우시겠지만 도련님께 전화 좀 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오늘 당장 두 다리를 잃을 것 같습니다.”오번이 서주혁의 이름을 내뱉은 순간 설우현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 일이 서주혁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아하니 남자는 그저 서주혁이 대신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한편, 오혜수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서주혁을 알고 있는 건 맞지만 서주혁도 아직 장하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체면을 세워줄 이유가 없었다.“보스, 저를 구하지 않으면 오늘 정말 다리가 부러질 겁니다.”“닥쳐. 그러게 멀쩡히 잘 있는 설씨 가문을 왜 건드려?”오혜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 부잣집 자제들과 접점이 생기는 것이었다.그러나 오번 역시 상황이 급한지라 또 몇 번이나 거짓 울음을 터뜨리면서 꼭 구해주러 오라고 몇 번이고 당부한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전에 제원에 있을 때 장하리의 행방을 감추는 것을 도운 적이 있기에 지금 오번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장하리와 서주혁뿐이었다.설우현은 휴대폰을 낚아챈 뒤 바로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이 아닌 유심히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겁에 질린 오번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감히 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5분 후, 누군가가 설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