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층에는 더 이상 살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 이 층에 있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라는 것이다.천장의 조명 때문에 성혜인의 피부가 유독 하얗게 보였다. 눈동자도 어느 때보다 밝게 반짝이고 있었다. 얼마나 여기에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요. 대표님, 저 좀 들어가도 될까요?”반승제은 눈썹을 들썩거렸다. 야밤에 호텔 문 앞까지 찾아와 기다리다니. 예전에는 그림을 그려준 적도 있었고 말이다.그는 거절할 생각이었다. 서로 거리를 두어야만 했으니까.성혜인은 반승제가 거절하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게다가 이번 일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반희월이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제대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반승제는 카드키로 문을 열었다.바로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협력업체에서 온 전화였다.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이었고 미리 공급업체들과도 이야기를 끝내둔 상황이었지만, 거의 모든 공급업체가 협력을 취소했다.회사도 큰 타격을 본 상황이다.반희월은 반씨 집안인 사람인 데다 업계에서 입김이 센 사람이기 때문에 임경헌도 엄하게 관리하고 있었다.성혜인은 보온 도시락을 든 채 소파에 앉았다.반승제는 정장 외투를 벗고 셔츠 윗단추를 풀어헤치자 쇄골이 드러났다.반승제는 언제든 사람을 홀릴 수 있는 외모였다.성혜인은 시선을 피했다. 그때 그 그림이 떠올랐다. 디테일을 더 추가할 수 있을 것 같았다.“무슨 일인지 말해.”반승제는 천천히 셔츠 소매를 접어 올렸다. 골격 잡힌 손목이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성혜인 건너편에 앉았다.가장 밝은 조명을 켜지 않아 노란빛이 맴돌았다. 술 냄새까지 은은하게 퍼지니 성혜인은 눈앞이 아찔했다.마치 성혜인이 술을 마신 것 같은 기분이었다.남자든 여자든 분위기에 취하면 정신을 차리기 어렵다.반승제는 조금 상기된 그녀의 시선을 느꼈다.“페니?”성혜인은 정신을 다잡고 보온 도시락을 티테이블 위에 올려놨다.“대표님, 상처는 다 나으셨어요?”반승제 손에 난 상처에 대해 하
불러보았지만 그녀 앞의 남자는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 잠에 든 것 같았다. 성혜인은 한숨을 돌렸다. 그녀를 무시한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시당한 것이었으면 매우 어색해졌을 것이다. 반승제가 잠에 들었으니 오늘 일을 해결하기는 틀린 것 같았다. 성혜인은 몸을 일으켜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그의 열린 셔츠에 시선이 닿았다. 담요라도 덮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요를 덮어주려 허리를 숙인 순간, 반승제의 속눈썹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두 사람의 거리는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얼굴을 마주한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지금은 느낌이 달랐다. 그러다 뜨거운 감촉이 입술 끝에 닿자 성혜인은 동공이 커지고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입술 끝에 닿았던 감촉이 점점 입술 안쪽을 파고들려고 했다. 곧 이어 반승제가 성혜인의 입술을 완전히 머금었다.마치 촉수가 그녀의 심장을 움켜쥔 것 같았다. 성혜인은 놀라서 허리를 곧게 폈다. 반승제는 소파에 기댄 채 다시 눈을 감았다. 마치 조금 전 일어난 일이 꿈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마도 술기운 때문인지 성혜인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재빨리 담요를 반승제 몸 위에 덮어준 채 황급하게 떠나버렸다. 문이 닫히던 순간, 반승제는 술기운에 약간 풀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꿈속인 줄 알고 다시 눈을 감았다. 성혜인은 호텔 밖으로 뛰쳐나와 차가운 밤바람을 조금 쐬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다. 손을 든 성혜인은 가볍게 입술 끝을 만졌다. 저번에 게임에서 키스를 30초 했었다. 이번에는 그저 4, 5초 정도 였을뿐인데 저번보다 더욱 생생한 감촉이 오래도록 남았다. 성혜인은 이마를 짚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그저 반승제가 내일 깨어났을 때 이 일을 기억하지 말기를 빌었다. 성혜인은 단지 담요를 덮어주고 싶었을 뿐인데 술에 취한 반승제가 성혜인이 자기를 덮쳤다고 생각할까 봐 겁이 났다. 아직
“여사님, 이건 제가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반희월을 그대로 휴대폰을 꺼내어 반태승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승제 아내의 번호 좀 주시겠어요? 일이 있어서요.”반희월을 반승제의 아내를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반태승이 그녀에 대해 칭찬을 마다하지 않으니 현명한 여자일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반승제의 옆에서 거슬리는 사람이 나타나면 아내가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페니가 사무실에 들어오게 허락한 반승제도 바람을 인정한 것으로 잘한 것은 아니었다. 반태승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반승제의 행동을 바로잡아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결혼한 사람이니. 반승제가 원나잇을 직접 거론하기 전까지, 반희월은 반승제와 문란함을 연관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문란하더라도 윤단미와 문란하게 놀 줄 알았다. 반희월은 윤단미를 알았기에 윤단미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았다. 어떻던지 여기저기 남자를 홀리고 다니는 디자이너보다 나았다.반태승은 무슨 일인지 몰랐다. 반씨 가문의 그 누구도 성혜인의 번호를 먼저 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반희월이 이런 것을 묻는 것도 처음이었고. '승제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혹시 바람? 반태승의 눈을 가늘게 떴다. 지나온 세월이 있으니 순식간에 머릿속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몇 개 떠올랐다. “희월아, 승제가 밖으로 나돌고 있니?”반희월을 그만 말이 턱 막혔다. 반태승이 이렇게 빨리 눈치챌지 몰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리고 그 짧은 정적에서 반태승도 반승제가 바람을 피우다가 잡혔다는 것을 대강 알 수 있었다. 반희월은 그래도 웃어른으로서 성혜인을 데리고 반승제에게 가서 경고를 해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에 혜인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반태승은 화가 나 얼굴이 벌게져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그 새끼 당장 내 앞으로 데려와. 지금 뭘 하고 있든지 반 시간 안으로 내 앞에 끌고 와! 콜록콜록.”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반태승은 순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반태승이 이렇게 빨
“외투부터 벗어!”반태승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반승제는 반태승이 지금 그에게 분을 풀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반태승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그 성혜인이라는 여자를 두고 밖에서 하룻밤을 보낸 여자가 있으니. 집사가 반승제의 외투를 건네받았다. 반승제는 얇은 와이셔츠만 입은 채 꿇어앉아 있었다. 철썩. 채찍이 반승제의 등에 내리꽂혔다. 젊을 때 군인들과 잘 지내던 반태승은 힘이 엄청나게 셌다. 지금은 몸이 성치 않지만 채찍을 휘두르는 힘은 그대로였다. 반승제는 아파서 미간을 확 찌푸렸다. 피부가 벗겨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다른 사람이 밖에서 뭘 하든 상관이 없지만, 넌 혜인이한테 그러면 안 되지! 그렇게 훌륭한 애가 너랑 결혼하다니, 그 아이의 인생을 망쳤어!”채찍은 계속해서 반승제의 등에 찍혔다. 반승제의 등은 채찍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매우 흉측해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던 반희월은 그 모습을 보고 놀라서 반태승을 말리려고 했다. “아버지.”“닥쳐라!”반태승의 얼굴은 시뻘게져서 무섭게 반희월을 노려보았다. “누구라도 이 자식을 용서해 달라는 말을 꺼내기만 해봐라.”반씨 가문에서 반태승의 권력이 가장 셌다. 반씨 집안에 여러 친척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태승은 BH그룹을 반승제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그 정도로 반승제를 아꼈다. 그의 혼인에도 직접 신경 쓸 정도로. 철썩. 철썩. 두 번의 채찍질이 또 반승제의 등에 내리꽂혔다. 흰 와이셔츠는 피로 물들었지만 반승제는 여전히 꼿꼿이 허리를 세웠다. 반태승의 숨소리가 거칠어진 것을 듣고 인제 와서 얘기할 수도 없었다. 예를 들면 반태승이 주선해 준 성혜인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반태승이 성혜인의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하면 지금 당장 이혼을 시키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얘기를 꺼내면 반태승이 그대로 뒷목을 잡고 쓰러질지도 몰랐다. 반승제는 대략 반 시간 정도 채찍질을 당했다. 그제야 반태승은
반씨 저택을 나서자 반희월이 반승제를 따라와 한숨을 내쉬었다. “승제야, 네 할아버지가 이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다. 미안해.”“고모, 괜찮아요. 이건 저랑 페니의 일이에요.”페니 얘기를 듣자 반희월의 표정이 식어버렸다.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채찍질도 당했으니 페니 양과는 인제 그만 헤어져라. 아니면 네 할아버지가 더 화가 나면 페니 양한테도 불똥이 튈지도 몰라.”“고모,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반희월을 알고 있었다. 더 얘기했다가는 복잡할 것 같아서 그저 입을 다물었다. 반승제는 차에 올라탔지만 등을 대지 못하고 앉아있었다. 등이 아프긴 했지만 꽤 참을 만했다. 하지만 이때 성혜인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 대표님, 저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오늘 밤 오시나요?”반승제는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잡고 있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삐질삐질 나고 있었고 입술도 창백했다. “응.”담담한 말투로 대답한 그가 전화를 끊었다. 성혜인도 안심하고 호텔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십여 분이 지난 후, 반승제가 엘리베이터 입구에 나타났다. 성혜인은 한숨을 돌리고 그를 향해 인사를 했다. 그리고 찾아온 이유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 “반 대표님, 제가 말하려는 건 반희월 여사님과 관계된 일입니다.”반승제는 그녀 앞에 가서 그녀를 보지도 않고 카드로 문을 열었다. 성혜인은 그를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옅은 피 냄새를 맡은 그녀가 눈썹을 찌푸렸다. '반승제의 상처는 이미 나았을 텐데 피 냄새는 어디서 나는 거지?'반승제가 방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외투를 벗으려다가 성혜인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멈칫하더니 그대로 소파에 앉아버렸다. “고모가 네 계약들을 망쳐놨다?”어젯밤의 일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키스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성혜인은 별로 큰 감흥이 없었다. 그저 반승제가 그녀를 술에 취한 사람을 상대로 키스하는 변태로 볼까 봐 걱정될 뿐이었다. 하지만 반승제가 먼저 얘기하지 않는데 그녀가 먼저 묻기
반승제의 미간이 움찔거렸고 심장이 따끔거렸다.“뭐 하는 거야?”성혜인은 이 소리에 정신을 차렸고 이내 연이어 사과했다.“죄송해요, 전 그저...”그녀는 황급히 구급상자를 열고 쓸만한 물건이 없는지 살펴보았다.의료용 가위를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는 가위를 집어 들고 옷을 자르려 했다.하지만 옷이 살과 붙어버려서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반 대표님, 조금만 참으세요.”“응.”반승제는 그녀를 보지 않으려고 눈앞의 유리에서 시선을 돌렸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성혜인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옷을 잘랐다.반승제는 작게 신음을 내었다.성혜인은 빠르게 옷을 다 잘라냈다. 그리고는 소독을 하고 지혈을 한 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꺼냈다.처음으로, 그것도 반승제의 몸에서 이렇게 큰 상처를 보고 있자니 긴장한 성혜인의 손끝이 떨렸다.붕대를 감으려면 반승제의 가슴 쪽을 지나서 둘러야 하기에 성혜인은 어쩔 수 없이 일어섰다. 그녀는 붕대를 어깨로부터 가슴을 지나 허리 쪽으로 감았다.성혜인은 긴장하면 호흡이 가빠지는 습관이 있는데 그 호흡이 어깨쪽으로 쏟아졌다. 붕대를 여러 번 둘러싸야 했기에 몇 분 동안이나 같은 자세로 꿇고 있으니 다리가 저렸다.미간을 꿈틀거리던 반승제가 그녀에게 아직 얼마 남았는지 물어보려고 입을 열던 찰나에 어깨 쪽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다리가 저려 순간 평형을 잃은 성혜인의 입술이 반승제의 어깨에 닿았던 것이었다.반승제의 눈썹이 움찔거렸고 호흡도 점차 가빠졌으며 목소리도 살짝 쉬어서 나왔다.“페니, 너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얼굴이 빨개진 성혜인은 얼른 입술을 떼고 고개 숙여 붕대를 마저 감았다.“반 대표님, 일부러 그런 거 아닙니다.”“그럼 어젯밤은?”그는 유리를 통해 성혜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어젯밤 그 입맞춤도 고의가 아니야?'이 여자. 귀국하자마자 반승제와 잠자리를 가졌고 후에도 몇 번 만났었다.온시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설마 이게 모두 그녀의 계획 인건가?하지만
“바...바람?”이 일이 만약 다른 남자한테 벌어졌다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하지만 많은 사람한테 일편단심이라 알려진 반승제가 누구와 바람을 피웠단 말인가?당연히 성혜인은 이 일이 자신과 연관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자신은 그의 아내였기에 이건 바람으로 속하지 않았다.이는 이미 법적으로 승인된 관계였다.반승제는 놀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응. 바람.”성혜인은 다른 사람 일에 크게 귀를 기울이지 않지만 자기 남편에 관한 스캔들이라면 관심을 보였다.하지만 그는 당분간 그녀의 고객이었기에 그녀를 불쾌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너무 뻔하게 표현하면 안 되었었다.“반 대표님이 넘보는 여자라니.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네요.”이 말을 한 성혜인은 무엇인가 생각이 나서 소름이 돋았다.설마 그 바람 대상이…'나인 건 아니겠지?'반승제가 자기 때문에 저렇게 맞았다고?그녀는 순간 반희월이 떠올랐다. 반승제가 그녀와 함께 본가로 갔으니까.만약 그녀가 반태승 앞에서 입을 뻥긋해서 반승제가 맞았다면 이 상처는 분명 그녀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반승제는 성혜인의 얼굴을 보고 그녀가 알아챘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녀는 다른 일에는 눈치가 백단이었지만 남녀 일에는 눈치가 없었다.성혜인은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했다. 그녀는 어떻게든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이렇게 심각한 상처는 한 달쯤 되어야 다 아무는데 이 상황에 반승제의 바람 대상이 서류상 아내인 자신, 회장님께서 살뜰히 챙기던 그 혜인이라는 것을 알면 발칵 뒤집힐 것이다.아무리 성격이 좋다고 해도 이런 일은 무조건 혼나게 될 것이었다.성혜인은 원래 남아서 그를 돌볼 생각이 없었다. 단둘이, 그것도 호텔에 남녀가 같이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기기 쉬웠기 때문이다.하지만 반승제가 이렇게 다친 게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발걸음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게다가 그날 밤 성씨 가문에서 약을 탄 술을 건넸으니 어떻게 보아도 반승제가 억울한 쪽이었다.“반 대표님
방문이 닫히는 순간에 성혜인은 소파에 드러누웠다.반희월이 한바탕 소동을 낸 것도 그녀를 힘들게 했는데 지금 또 이렇게 상처투성이인 반승제의 등을 보니 더 충격적이었다.이 어색한 거짓말이 도대체 언제 끝날는지.시시각각 경계해야 했다....방에서 야근하고 있던 반승제는 어차피 등이 아파 눕지를 못했기에 그냥 밤을 새기로 했다.한밤중에 방문을 나선 반승제는 소파에 얌전히 기대고 있는 성혜인을 보았다.미간을 찌푸린 그는 그녀와의 밤은 이미 끝났으니 오늘이 지나면 그녀와 거리를 두어야 겠다고 생각했다.고모의 말이 맞았다. 할아버지께서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절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테이블 앞에 서서 곤히 잠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녀의 얼굴은 엄청 작았다. 평소 도도하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없이 얌전해 보였다.그가 그녀의 남편과 통화를 할 때는 꿀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인제 보니 확실히 온시환이 잘못 생각한 것 같았다. 그녀가 몇 번이나 남편에 대한 사랑을 보였었다. 아마 그날 밤, 그녀의 마음속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하긴 그녀는 남편과 몇 번이고 그런 밤을 보냈을 거니까.호흡이 또다시 가빠진 반승제는 얼른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물을 다 마시고 나서야 그는 컵 변두리에 옅게 남겨진 핑크색 입술 자국을 보았다.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컵을 내려놓고 황급히 방으로 들어갔다.이튿날 아침, 눈을 뜬 성혜인은 소파 맞은편에 앉아있는 반승제를 발견했다.그녀는 얼른 눈을 비비고 똑바로 앉아 시계를 바라보았다.이제 여섯 시밖에 안 되었는데. 휴일에도 이렇게 빨리 일어난다고?“반 대표님?”방금 일어나 조금 잠긴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움이 섞여 있었다.반승제는 그녀를 보지도 않고 “응”이라고만 대답한 뒤 손에 든 서류를 치웠다.성혜인은 황급히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반 대표님. 아침은 뭐로 드릴까요? 제가 내려가서 가져다 드릴게요. 그리고 등에 상처는 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