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투부터 벗어!”반태승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반승제는 반태승이 지금 그에게 분을 풀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반태승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그 성혜인이라는 여자를 두고 밖에서 하룻밤을 보낸 여자가 있으니. 집사가 반승제의 외투를 건네받았다. 반승제는 얇은 와이셔츠만 입은 채 꿇어앉아 있었다. 철썩. 채찍이 반승제의 등에 내리꽂혔다. 젊을 때 군인들과 잘 지내던 반태승은 힘이 엄청나게 셌다. 지금은 몸이 성치 않지만 채찍을 휘두르는 힘은 그대로였다. 반승제는 아파서 미간을 확 찌푸렸다. 피부가 벗겨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다른 사람이 밖에서 뭘 하든 상관이 없지만, 넌 혜인이한테 그러면 안 되지! 그렇게 훌륭한 애가 너랑 결혼하다니, 그 아이의 인생을 망쳤어!”채찍은 계속해서 반승제의 등에 찍혔다. 반승제의 등은 채찍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매우 흉측해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던 반희월은 그 모습을 보고 놀라서 반태승을 말리려고 했다. “아버지.”“닥쳐라!”반태승의 얼굴은 시뻘게져서 무섭게 반희월을 노려보았다. “누구라도 이 자식을 용서해 달라는 말을 꺼내기만 해봐라.”반씨 가문에서 반태승의 권력이 가장 셌다. 반씨 집안에 여러 친척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태승은 BH그룹을 반승제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그 정도로 반승제를 아꼈다. 그의 혼인에도 직접 신경 쓸 정도로. 철썩. 철썩. 두 번의 채찍질이 또 반승제의 등에 내리꽂혔다. 흰 와이셔츠는 피로 물들었지만 반승제는 여전히 꼿꼿이 허리를 세웠다. 반태승의 숨소리가 거칠어진 것을 듣고 인제 와서 얘기할 수도 없었다. 예를 들면 반태승이 주선해 준 성혜인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반태승이 성혜인의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하면 지금 당장 이혼을 시키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얘기를 꺼내면 반태승이 그대로 뒷목을 잡고 쓰러질지도 몰랐다. 반승제는 대략 반 시간 정도 채찍질을 당했다. 그제야 반태승은
반씨 저택을 나서자 반희월이 반승제를 따라와 한숨을 내쉬었다. “승제야, 네 할아버지가 이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다. 미안해.”“고모, 괜찮아요. 이건 저랑 페니의 일이에요.”페니 얘기를 듣자 반희월의 표정이 식어버렸다.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채찍질도 당했으니 페니 양과는 인제 그만 헤어져라. 아니면 네 할아버지가 더 화가 나면 페니 양한테도 불똥이 튈지도 몰라.”“고모,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반희월을 알고 있었다. 더 얘기했다가는 복잡할 것 같아서 그저 입을 다물었다. 반승제는 차에 올라탔지만 등을 대지 못하고 앉아있었다. 등이 아프긴 했지만 꽤 참을 만했다. 하지만 이때 성혜인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 대표님, 저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오늘 밤 오시나요?”반승제는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잡고 있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삐질삐질 나고 있었고 입술도 창백했다. “응.”담담한 말투로 대답한 그가 전화를 끊었다. 성혜인도 안심하고 호텔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십여 분이 지난 후, 반승제가 엘리베이터 입구에 나타났다. 성혜인은 한숨을 돌리고 그를 향해 인사를 했다. 그리고 찾아온 이유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 “반 대표님, 제가 말하려는 건 반희월 여사님과 관계된 일입니다.”반승제는 그녀 앞에 가서 그녀를 보지도 않고 카드로 문을 열었다. 성혜인은 그를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옅은 피 냄새를 맡은 그녀가 눈썹을 찌푸렸다. '반승제의 상처는 이미 나았을 텐데 피 냄새는 어디서 나는 거지?'반승제가 방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외투를 벗으려다가 성혜인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멈칫하더니 그대로 소파에 앉아버렸다. “고모가 네 계약들을 망쳐놨다?”어젯밤의 일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키스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성혜인은 별로 큰 감흥이 없었다. 그저 반승제가 그녀를 술에 취한 사람을 상대로 키스하는 변태로 볼까 봐 걱정될 뿐이었다. 하지만 반승제가 먼저 얘기하지 않는데 그녀가 먼저 묻기
반승제의 미간이 움찔거렸고 심장이 따끔거렸다.“뭐 하는 거야?”성혜인은 이 소리에 정신을 차렸고 이내 연이어 사과했다.“죄송해요, 전 그저...”그녀는 황급히 구급상자를 열고 쓸만한 물건이 없는지 살펴보았다.의료용 가위를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는 가위를 집어 들고 옷을 자르려 했다.하지만 옷이 살과 붙어버려서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반 대표님, 조금만 참으세요.”“응.”반승제는 그녀를 보지 않으려고 눈앞의 유리에서 시선을 돌렸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성혜인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옷을 잘랐다.반승제는 작게 신음을 내었다.성혜인은 빠르게 옷을 다 잘라냈다. 그리고는 소독을 하고 지혈을 한 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꺼냈다.처음으로, 그것도 반승제의 몸에서 이렇게 큰 상처를 보고 있자니 긴장한 성혜인의 손끝이 떨렸다.붕대를 감으려면 반승제의 가슴 쪽을 지나서 둘러야 하기에 성혜인은 어쩔 수 없이 일어섰다. 그녀는 붕대를 어깨로부터 가슴을 지나 허리 쪽으로 감았다.성혜인은 긴장하면 호흡이 가빠지는 습관이 있는데 그 호흡이 어깨쪽으로 쏟아졌다. 붕대를 여러 번 둘러싸야 했기에 몇 분 동안이나 같은 자세로 꿇고 있으니 다리가 저렸다.미간을 꿈틀거리던 반승제가 그녀에게 아직 얼마 남았는지 물어보려고 입을 열던 찰나에 어깨 쪽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다리가 저려 순간 평형을 잃은 성혜인의 입술이 반승제의 어깨에 닿았던 것이었다.반승제의 눈썹이 움찔거렸고 호흡도 점차 가빠졌으며 목소리도 살짝 쉬어서 나왔다.“페니, 너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얼굴이 빨개진 성혜인은 얼른 입술을 떼고 고개 숙여 붕대를 마저 감았다.“반 대표님, 일부러 그런 거 아닙니다.”“그럼 어젯밤은?”그는 유리를 통해 성혜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어젯밤 그 입맞춤도 고의가 아니야?'이 여자. 귀국하자마자 반승제와 잠자리를 가졌고 후에도 몇 번 만났었다.온시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설마 이게 모두 그녀의 계획 인건가?하지만
“바...바람?”이 일이 만약 다른 남자한테 벌어졌다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하지만 많은 사람한테 일편단심이라 알려진 반승제가 누구와 바람을 피웠단 말인가?당연히 성혜인은 이 일이 자신과 연관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자신은 그의 아내였기에 이건 바람으로 속하지 않았다.이는 이미 법적으로 승인된 관계였다.반승제는 놀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응. 바람.”성혜인은 다른 사람 일에 크게 귀를 기울이지 않지만 자기 남편에 관한 스캔들이라면 관심을 보였다.하지만 그는 당분간 그녀의 고객이었기에 그녀를 불쾌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너무 뻔하게 표현하면 안 되었었다.“반 대표님이 넘보는 여자라니.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네요.”이 말을 한 성혜인은 무엇인가 생각이 나서 소름이 돋았다.설마 그 바람 대상이…'나인 건 아니겠지?'반승제가 자기 때문에 저렇게 맞았다고?그녀는 순간 반희월이 떠올랐다. 반승제가 그녀와 함께 본가로 갔으니까.만약 그녀가 반태승 앞에서 입을 뻥긋해서 반승제가 맞았다면 이 상처는 분명 그녀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반승제는 성혜인의 얼굴을 보고 그녀가 알아챘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녀는 다른 일에는 눈치가 백단이었지만 남녀 일에는 눈치가 없었다.성혜인은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했다. 그녀는 어떻게든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이렇게 심각한 상처는 한 달쯤 되어야 다 아무는데 이 상황에 반승제의 바람 대상이 서류상 아내인 자신, 회장님께서 살뜰히 챙기던 그 혜인이라는 것을 알면 발칵 뒤집힐 것이다.아무리 성격이 좋다고 해도 이런 일은 무조건 혼나게 될 것이었다.성혜인은 원래 남아서 그를 돌볼 생각이 없었다. 단둘이, 그것도 호텔에 남녀가 같이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기기 쉬웠기 때문이다.하지만 반승제가 이렇게 다친 게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발걸음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게다가 그날 밤 성씨 가문에서 약을 탄 술을 건넸으니 어떻게 보아도 반승제가 억울한 쪽이었다.“반 대표님
방문이 닫히는 순간에 성혜인은 소파에 드러누웠다.반희월이 한바탕 소동을 낸 것도 그녀를 힘들게 했는데 지금 또 이렇게 상처투성이인 반승제의 등을 보니 더 충격적이었다.이 어색한 거짓말이 도대체 언제 끝날는지.시시각각 경계해야 했다....방에서 야근하고 있던 반승제는 어차피 등이 아파 눕지를 못했기에 그냥 밤을 새기로 했다.한밤중에 방문을 나선 반승제는 소파에 얌전히 기대고 있는 성혜인을 보았다.미간을 찌푸린 그는 그녀와의 밤은 이미 끝났으니 오늘이 지나면 그녀와 거리를 두어야 겠다고 생각했다.고모의 말이 맞았다. 할아버지께서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절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테이블 앞에 서서 곤히 잠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녀의 얼굴은 엄청 작았다. 평소 도도하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없이 얌전해 보였다.그가 그녀의 남편과 통화를 할 때는 꿀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인제 보니 확실히 온시환이 잘못 생각한 것 같았다. 그녀가 몇 번이나 남편에 대한 사랑을 보였었다. 아마 그날 밤, 그녀의 마음속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하긴 그녀는 남편과 몇 번이고 그런 밤을 보냈을 거니까.호흡이 또다시 가빠진 반승제는 얼른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물을 다 마시고 나서야 그는 컵 변두리에 옅게 남겨진 핑크색 입술 자국을 보았다.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컵을 내려놓고 황급히 방으로 들어갔다.이튿날 아침, 눈을 뜬 성혜인은 소파 맞은편에 앉아있는 반승제를 발견했다.그녀는 얼른 눈을 비비고 똑바로 앉아 시계를 바라보았다.이제 여섯 시밖에 안 되었는데. 휴일에도 이렇게 빨리 일어난다고?“반 대표님?”방금 일어나 조금 잠긴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움이 섞여 있었다.반승제는 그녀를 보지도 않고 “응”이라고만 대답한 뒤 손에 든 서류를 치웠다.성혜인은 황급히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반 대표님. 아침은 뭐로 드릴까요? 제가 내려가서 가져다 드릴게요. 그리고 등에 상처는 괜
확실히 성혜인은 성휘가 반 회장님께 연락을 드린 것을 몰랐다. 그저 마음만 더욱 힘들어졌다.지금 이 시각, 반승제가 성씨 본가에 가서 성씨 가문에 본때를 보여 줬다는 사실까지 들으니 이 ‘아내'라는 자리가 더 싫게만 느껴졌다.아버지는 항상 그녀를 난감하게 만들었다.하지만 성혜인은 지금 아빠한테 불만을 표출하면 제일 이득을 볼 사람이 성혜원이라는 것을 알았다.“응, 알겠어.”그녀는 성혜원을 지나치고 자리에서 떠났다.성혜원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녀가 성휘와의 관계가 별로 좋지 못한 데다가 성휘가 멋대로 반 회장님과 연락하고 있다는데 왜 원망하지 않는 거지?성혜원은 원래부터 몸이 좋지 못한 데 새벽 네 시부터 두 시간 동안 여기서 기다렸다.게다가 지금 성혜인의 반응을 보니 폭발할 것 같았다.“언니, 반 대표님 어젯밤 다른 여자랑 이 호텔에 있었대.”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성혜인이 반승제랑 같이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내 성혜인이 뱉어낸 말은 그녀로 하여금 속이 뒤집히게 만들었다.“알아, 어젯밤 나랑 같은 방에 있었거든.”담담히 뱉어낸 그 말은 비수처럼 성혜원의 마음에 꽂혔다.성혜원은 순간 반박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성혜인이 자리를 떠나려 하는 것을 보고 성혜원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네가 어떻게!”자신의 말투가 너무 세다는 것을 인식한 그녀는 다시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어떻게 반 대표님이랑 같은 방에 있어? 반 대표님 언니 안 좋아해. 언니, 가문 때문에 자신을 그렇게 혹사시키지 않아도 돼. 언니 그냥 아빠한테 반항하기 싫은 거잖아.”성혜인은 의문스럽게 물었다. “나랑 반승제 씨는 부부 사이야. 같은 방을 쓰는 건 당연한 거 아냐? 그리고 아빠 말대로 제원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앞다투어 반승제랑 결혼하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당연히 그 사람을 내 곁에 오래 머물게 해야지. 안 그래?”성혜원은 그녀가
성혜인은 급히 티슈를 뽑아 우유를 닦아냈다.“죄송합니다, 반 대표님.”“응.”반승제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성혜인은 우유를 다 닦아낸 뒤 반승제의 바지에도 우유가 몇 방울 튄 것을 보고 휴지 몇 장을 더 뽑아 닦았다.서류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는데 순간 새하얀 손이 다리 쪽으로 뻗어졌다.반승제는 그대로 굳어버렸고 손을 들고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이 위치가 어색한 것은 아니지만 이건 그의 다리였다.성혜인은 고개를 들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반승제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식사부터 하지.”성혜인은 하는 수 없이 손을 거두고 휴지를 쓰레기통에 넣었다.“반 대표님, 등 상처에 약 다시 발라야 하나요?”“아니, 괜찮아.”성혜인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밥을 다 먹은 뒤 반승제와 함께 내려갔다.이 시각, 성혜원은 이미 없었다. 성혜인은 호텔 문 앞에 서 있었고 반승제는 심인우가 데리러 왔다.그가 차에 올라탈 때 곁눈질로 성혜인이 1억정도 되는 비싼 검은색 벤츠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차에서는 키가 그리 크지 않은 남자가 내렸다. 그는 성혜인과 몇 마디를 나눴고 성혜인은 웃어 보였다.남자의 외모는 다른 사람보다 그렇게 특별한 것도 없이 평범했다.성혜인이 그의 앞에 서 있으니 두 사람은 차원이 달라 보였다.성혜인의 외모가 워낙 출중하여 남자는 마치 하인 같았다.반승제는 시선을 거두고 다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운전석에서 운전하고 있던 심인우도 답답하긴 했지만 비서로서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벤츠 차 안에서 서민규는 흥분되어 얼굴이 빨개졌다.“페니 씨, 저한테 자동차를 선물해 줄 줄은 몰랐어요. 저...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성혜인은 멈칫했다. 그녀는 서민규에게 차를 선물해 준 적이 없다. 그녀 또한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이 벤츠, 가격이 낮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강민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게다가 확실히 이번에는 조금 신경을 쓴 것이 원래 같으면 몇십억
서민규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이런 사람 앞에서는 그저 고개를 들지도 못한다고 생각했다. 마치 상대방은 감히 넘보지도 못할 엄청난 존재인 것처럼.반승제는 그저 덤덤히 훑어보고는 더 이상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대표와 같이 회사로 들어섰다.서천 쪽 투자는 몇천억이 걸려있기에 BK사에서도 극도로 중시했다.많은 회사에서 반씨 가문쪽에 계획안을 건넸는데 어젯밤 갑자기 BK사와 협상하기로 했었다.오늘 이렇게 반승제가 직접 찾아온 걸 보면, 대표는 이게 네이처 빌리지도 BK사쪽에서 시공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지금 보니 더욱 페니한테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BK사를 선택해서 BK사도 이런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BK사 대표는 반승제를 데리고 회사를 둘러보고는 중간층 복도 쪽에 멈춰 섰다. 이제는 쌍방의 협의를 진행할 차례였다.반승제가 회의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상사가 한 사람을 혼내는 것을 들었다. 혼나고 있는 사람은 마침 방금 성혜인을 데리러 왔던 사람이었다. 오늘은 토요일이었고 BK사는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저녁 9시에 퇴근하고 주 6일 근무하는 제도를 실행하고 있었다.“어떻게 된 거야, 서민규. 이런 데이터도 다 틀리고. 시간이 나면 책이라도 읽으면서 실력 좀 쌓으란 말이야. 너희 부에서 너 빼고 다 인서울 출신이야. 지방대 주제에 내가 한소리 했다고 뭐라 하지 마?” 서민규는 속으로 상사를 욕했다. 이 사람은 학력 차별이 엄청 심했다. 그 때문에 서민규의 학력을 알고는 매일 그를 달달 볶았다.또한 이것 때문에 여러 번의 승진 기회도 다른 사람한테 뺏겼다.그래도 회사에서 주는 월말 보너스가 많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다.반승제는 멀지 않은 곳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그 남자는 대충 177센티미터 정도 돼 보이는 키였고 사회에 나온지 얼마 안 된 직원으로 보였다. 굳이 좋은 점을 말하자면 다른 남자보다 피부가 하얗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조금.이걸 좋은 점이라고 할 수 있나?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
그러나 성혜인은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도우미에게 꽃병을 건네주고는 다시 설연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난 저녁 비행기를 타고 곧 남편과 함께 제원으로 돌아갈 거야. 다음에 널 만나게 될 땐 친구로 만났으면 좋겠네.”설연주는 당당하게 작별인사 한마디도 못 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당당한 성혜인에 비하면 그녀는 마치 평생 빛을 보지 못하는 도랑 속 쥐와 같았다.설연주는 심지어 성혜인의 말을 통해 자신의 비열함을 느꼈고 그 비열함은 차마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설연주는 성혜인의 눈을 거의 바라보지 못했다.혹여나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을 향한 원망과 역겨움을 눈치챌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솔직히 설연주는 성혜인을 진심으로 숭배하고 있었고 진심으로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미 진실을 알게 된 마당에 이제 와서 친구를 사귄다는 건 사치인 셈이다.그렇게 설연주는 설우현이 두 사람을 찾아올 때까지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들에게 다가온 설우현은 설연주의 작품을 보며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못생겼어.”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린 설연주가 설우현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고 뺨을 맞기라도 한 듯 통증이 밀려왔다.이렇게 비열하고 음침하기 그지없는 인간일 뿐인데 감히 설우현에게 그런 마음을 품다니.어쩐지 오래 못 살 것 같더라니... 그녀 같은 사람은 지옥에 가야만 한다.하느님은 그녀에게 복수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내 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다시 설우현을 바라보았고 설우현은 그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마디 툭 내던졌다.“이따 밥 먹고 가.”그러자 설연주는 몰래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휴지로 슬쩍 닦아내며 탐욕스럽게 설우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왜 이 타이밍에 설우현 같은 도련님을 만난 거지?’운명은 정말 그녀를 농락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렇게 성혜인의 말대로 그녀는 저녁 비행기를 타고 제원으로 떠났고 설우현은 특별히 그들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연주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녀는 오번과 통화를 하며 문을 열어주기 위해 현관으로 향했다.그 결과 밖에 서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설우현이었고 그는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끼운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설연주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설연주는 순간 마법이라도 걸린 듯 무어라 말해야 할지, 설우현이 갑자기 이곳에는 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우현 오빠...”이어 설연주는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한편, 설우현은 담뱃불을 끄고 시선을 돌려 설연주의 몸을 쓱 바라보았다.긴장한 나머지 설연주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고 설우현이 과연 조금 전의 통화 내용을 들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그렇게 한참 후에야 설우현은 비로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혜인이가 너 보고 싶다네. 오후 비행기야.”설연주도 잇따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묵묵히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차가 설우현의 별장에 도착하고 설연주는 그제야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이 설우현의 여자친구가 아닌 성혜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거실에 도착해 보니 성혜은이 거실에서 게임을 하면서 놀고 있었고 그 옆에는 빈 스위치 하나가 놓여있었다. 설우현 본인이 사용하던 스위치로 보였다.한편, 성혜인은 설연주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말을 건넸다.“연주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설연주는 무의식적으로 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이미 스위치 앞으로 다가가 스스로 게임을 시작했다.결국,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성혜인을 따라 화원으로 들어섰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위해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었다.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처럼 분위기가 매우 화목해 보였지만 사실 설연주는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계속하여 안절부절못했다. 성혜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두
설연주는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음식을 천천히 먹고 나니 운전기사가 그녀 옆에 다가와 서 있었다. 이는 분명 그녀를 재촉하고 있는 신호였다.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오직 그의 컴퓨터만 바라보고 있었다.설연주가 마음속으로 몰래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한번 설우현을 깊게 쳐다보고 나서야 설연주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기사의 뒤를 따랐다.그녀를 태운 차가 막 별장을 떠나려 할 때, 다른 차가 천천히 별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 순간, 설연주는 원인 모를 충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여자친구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섹시한 연상 스타일일까? 설우현은 그런 여자를 더욱 선호하니까.’설연주는 속눈썹을 드리운 채 창문을 열어보았다.하지만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차는 누가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창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었다.그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괜히 실마리가 드러날까 걱정되었던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차창을 다시 닫아버렸다.“가시죠.”운전기사도 다시 가속 페달을 밟았고 그렇게 설연주는 천천히 별장을 떠났다.오랜만에 다시 설준석의 별장에 돌아와 보니 이상하게 분위기가 어수선하게 느껴지고 무엇을 해도 흥미가 돋지 않았으며 설우현의 얼굴이 계속하여 눈앞에서 아른거렸다.수없이 많은 남자를 꼬시며 이용해 먹었지만 설연주는 단 한 번도 연애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줄곧 설연주의 이용수단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불쌍할 지경으로 적은 감정을 남자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하물며 그 상대는 설우현이다. 그녀와 같은 여자가 설우현에게 어울릴 수가 없는 법이다.설씨 가문의 도련님으로 금수저를 달고 태어나 평생 고생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우스우면서도 씁쓸해졌다.저녁이 되자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설연주 씨, 설강민이 두팔에게 끌려갔다고 합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온몸이 오싹해졌다. 설강민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낭패한 모습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평소 물 쓰듯 돈을 쓰던 술집에서 쫓겨나는 날이 있다니.그 순간, 설강민은 문득 설준석이 이 술집의 지분을 일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강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분명 그의 체면을 짓밟기 위해 아버지가 지시한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설준석에게 가서 사실대로 털어 넣고 돈을 갚아달라며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막상 이 지경이 되니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기며 더더욱 설준석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설강민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조금 전 또 20억 원을 빌렸으니 차라리 이 20억 원으로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게 나았다.다시 마음을 먹고 설강민은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한 채 현금 뭉치를 매니저에게 던져주었다.“지금 당장 가장 좋은 술을 가져오고 5명의 계집애를 데려와.”한 푼도 없을 줄 알았던 설강민이 뜻밖에도 600만을 들고 들어오니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그러자 설강민은 오히려 더욱 으스대며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아무리 초라해도 난 설씨 가문 일원인데 그깟 돈 하나 못 꺼내겠어?”돈을 받은 매니저는 바로 계집 몇 명을 설강민에게 보내주었다.아무리 돌이켜봐도 오늘 밤의 일은 생각할수록 더욱 화가 났다. 하여 설강민은 매니저가 보낸 여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양옆에 여자들을 껴안으며 오늘 밤 겪었던 울분을 풀어냈다.한편, 설연주는 구석에 서서 설강민의 모든 행동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다.룸을 떠나고 화장실에 간 설연주는 그제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최근에 열이 나며 심각하게 살이 많이 빠진 모양이다.그리고 오늘 밤 설강민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웃기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설연주가 쉰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설연주, 봤어? 저게 바로 네가 목숨을 바쳐서 구한 남자야.
설연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샤워를 마치고 다시 한번 세수를 마치고 나서야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러나 설우현은 이미 떠난 모양이었다. 말을 들어보니 아침 일찍 설기웅에게 불려가 두 아이를 돌보러 갔다고 한다.순식간에 할 일이 없어진 설연주는 그저 별장 안에 앉아 바깥에 활짝 피어있는 꽃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저녁, 방금 해열제를 먹고 다시 바라보니 정원에는 설우현의 차가 멈춰 세워져 있었다.그리고 설우현은 품에 꽃다발을 안은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다정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순간,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길이 멈칫하고 설연주는 먹고 있던 과일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설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설우현이 위층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 다시 꽃을 안고 외출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잠깐 고민해보던 설연주는 결국 다시 올라가 설우현에게 인사를 건넸다.“오빠, 데이트하러 나가요?”설우현은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몸은 좀 어때? 괜찮아졌어?”“네, 좀 나아졌어요.”그러자 설우현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액셀을 밟았다.설연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입을 여니 대체 뭘 물어야 할지도 몰랐다.같은 시각, 설우현은 이미 차를 몰고 떠났고 설연주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그녀조차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그때,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설강민이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 어떻게 그 20억을 갚을지 생각 중이라고 한다.“명목상이지만 설연주 씨 친오빠 진짜 너무 멍청한 것 같네요. 이렇게 간단한 사기극에도 속다니... 두팔이 빌려준 20억은 이윤이 이미 30억이 됐어요. 그런데 설준석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안 하고 도리어 두팔에게 또 대출을 받았다니까요. 그러니까 또 20억을 빌렸죠.”오번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웃음이 나왔다.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그럼 설강민은 지
설우현은 자신의 잡혀버린 소매와 설연주의 눈빛을 번갈아 보았다.한 치의 빛깔도 없이 캄캄하기만 했다.당황스러울 정도로 낭패한 그녀의 모습에 설우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나 어디 안 가. 물 따라올게.”“물 안 마셔도 돼요. 목 안 말라요.”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핏발이 보일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잠시 생각에 잠긴 설우현은 이내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설연주의 몸은 여전히 조금씩 떨고 있었고 설우현을 놓아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그때, 도우미 아주머니가 문밖에 찾아왔다. 설연주의 목소리가 워낙 날카로워 집 안에 있던 사람들도 전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러자 설우현은 침대 옆에 앉은 채, 도우미에게 말을 건넸다.“미지근한 물 한 잔과 해열제 한 알 주세요.”설연주의 열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정말 의사의 말대로 너무 긴장한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잠시 후, 도우미는 설우현의 말을 따라 재빨리 물을 가져다 놓고는 약을 설우현의 손바닥 위에 놓아주었다.이윽고 설우현은 설연주의 턱을 치켜들고 약을 먹여주었다.그러나 설연주는 입을 벌리고 있을 뿐 약을 삼키려 하지 않았다.몇 초간 머뭇거리던 설우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손끝을 그녀의 입에 넣고는 목 가장 깊은 곳에 약을 대었다.이에 설연주는 결국 마지못해 약을 삼키게 되었고 설우현은 또다시 물컵을 그녀 앞에 놓아두고 턱을 잡더니 천천히 물을 먹여주었다.물이 목구멍을 따라 흘러내리며 설연주는 저도 모르게 기침을 두 번 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막막하기만 했다.그렇게 물 반 컵을 마신 후에야 설우현은 물컵을 옆에 있는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이제 그만 자.”“오빠, 제발 가지 말아요.”설연주는 마치 가지 말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계속하여 그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하지만 설우현은 그녀의 그런 모습이 그저 웃겼다. 이제 정말 익숙해지기라도 한 걸까. 설우현이 정말 설연주의 오빠인지 아닌지도 아직 확실하
현재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과거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병에 걸린 적이 몇 번 없었는데 이젠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건강은 점점 악화하여가기만 했다.그저 평생 행복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가?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남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덩달아 마음이 약해진 오번도 다시 한번 그녀에게 당부해주었다.“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 하면 안 돼요. 이번에 설우현이 날 놓아준 건 전부 서주혁의 얼굴을 봐서였다고요. 다음부터는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까 가만히 있자고요. 어차피 지금 김현서는 두팔 쪽에 있고 설강민은 사채업자들한테 걸렸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빚은 졌다는 사실이 설준석의 귀에 들어갈 거예요.”찌릿찌릿 쑤시는듯한 통증에 설연주가 손을 들어 태양혈을 주물렀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설연주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오번 씨, 그거 알아요? 요즘 계속 꿈을 꾸는데 꿈만 꾸면 비싼 카펫 위에서 기어 다니는 내 모습이 보여요. 그래서 가끔 생각해요.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생활이 과연 현실일까? 갖은 노력을 다해 설씨 가문에 들어온 게 정말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였을까?”“설연주 씨...”“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아요. 전 저를 괴롭혔던 사람들이 모두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정승후는 이미 무너졌으니 다음은 설강민, 그리고 다음은 김현서, 마지막은 두팔까지...”오번이 미간을 찌푸렸다. 두팔을 상대한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두팔의 세력은 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강대했으니까.“이번에는 고마웠어요. 끝까지 저 지켜줬잖아요. 앞으로 다시는 설씨 가문에 손을 대지 않을 거니까 오번 씨도 계속 저한테 소식만 전해줘요.”“그래요.”전화가 끊기고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아무리 뒤척여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설우현도 언젠가 성혜인에게 생길뻔한 일이 그녀와 관련
남자가 전화를 한 상대는 오혜수였다. 지금 그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의 보스뿐이니까.전화를 받은 오혜수는 여전히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오번? 너 퇴직한 거 아니니? 왜 아직도 전화해.”오번은 남자의 암호명 순위일 뿐이다. 전에 오혜수의 곁을 따라다닐 때 해킹을 담당하며 얻은 암호명이다.그 후 제원시에서 미움을 사는 바람에 플로리아로 건너와 자신의 기술로 용돈 벌이를 하는 것이다.비록 전에 충분히 많은 돈을 벌어두었지만 돈이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으니 더 벌면 안될 것도 없었다.“보스, 이번에 저를 구하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주혁과 장하리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설우현 도련님께 잡혀 왔는데 번거로우시겠지만 도련님께 전화 좀 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오늘 당장 두 다리를 잃을 것 같습니다.”오번이 서주혁의 이름을 내뱉은 순간 설우현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 일이 서주혁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아하니 남자는 그저 서주혁이 대신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한편, 오혜수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서주혁을 알고 있는 건 맞지만 서주혁도 아직 장하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체면을 세워줄 이유가 없었다.“보스, 저를 구하지 않으면 오늘 정말 다리가 부러질 겁니다.”“닥쳐. 그러게 멀쩡히 잘 있는 설씨 가문을 왜 건드려?”오혜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 부잣집 자제들과 접점이 생기는 것이었다.그러나 오번 역시 상황이 급한지라 또 몇 번이나 거짓 울음을 터뜨리면서 꼭 구해주러 오라고 몇 번이고 당부한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전에 제원에 있을 때 장하리의 행방을 감추는 것을 도운 적이 있기에 지금 오번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장하리와 서주혁뿐이었다.설우현은 휴대폰을 낚아챈 뒤 바로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이 아닌 유심히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겁에 질린 오번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감히 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5분 후, 누군가가 설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