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씨 저택을 나서자 반희월이 반승제를 따라와 한숨을 내쉬었다. “승제야, 네 할아버지가 이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다. 미안해.”“고모, 괜찮아요. 이건 저랑 페니의 일이에요.”페니 얘기를 듣자 반희월의 표정이 식어버렸다.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채찍질도 당했으니 페니 양과는 인제 그만 헤어져라. 아니면 네 할아버지가 더 화가 나면 페니 양한테도 불똥이 튈지도 몰라.”“고모,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반희월을 알고 있었다. 더 얘기했다가는 복잡할 것 같아서 그저 입을 다물었다. 반승제는 차에 올라탔지만 등을 대지 못하고 앉아있었다. 등이 아프긴 했지만 꽤 참을 만했다. 하지만 이때 성혜인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 대표님, 저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오늘 밤 오시나요?”반승제는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잡고 있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삐질삐질 나고 있었고 입술도 창백했다. “응.”담담한 말투로 대답한 그가 전화를 끊었다. 성혜인도 안심하고 호텔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십여 분이 지난 후, 반승제가 엘리베이터 입구에 나타났다. 성혜인은 한숨을 돌리고 그를 향해 인사를 했다. 그리고 찾아온 이유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 “반 대표님, 제가 말하려는 건 반희월 여사님과 관계된 일입니다.”반승제는 그녀 앞에 가서 그녀를 보지도 않고 카드로 문을 열었다. 성혜인은 그를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옅은 피 냄새를 맡은 그녀가 눈썹을 찌푸렸다. '반승제의 상처는 이미 나았을 텐데 피 냄새는 어디서 나는 거지?'반승제가 방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외투를 벗으려다가 성혜인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멈칫하더니 그대로 소파에 앉아버렸다. “고모가 네 계약들을 망쳐놨다?”어젯밤의 일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키스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성혜인은 별로 큰 감흥이 없었다. 그저 반승제가 그녀를 술에 취한 사람을 상대로 키스하는 변태로 볼까 봐 걱정될 뿐이었다. 하지만 반승제가 먼저 얘기하지 않는데 그녀가 먼저 묻기
반승제의 미간이 움찔거렸고 심장이 따끔거렸다.“뭐 하는 거야?”성혜인은 이 소리에 정신을 차렸고 이내 연이어 사과했다.“죄송해요, 전 그저...”그녀는 황급히 구급상자를 열고 쓸만한 물건이 없는지 살펴보았다.의료용 가위를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는 가위를 집어 들고 옷을 자르려 했다.하지만 옷이 살과 붙어버려서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반 대표님, 조금만 참으세요.”“응.”반승제는 그녀를 보지 않으려고 눈앞의 유리에서 시선을 돌렸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성혜인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옷을 잘랐다.반승제는 작게 신음을 내었다.성혜인은 빠르게 옷을 다 잘라냈다. 그리고는 소독을 하고 지혈을 한 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꺼냈다.처음으로, 그것도 반승제의 몸에서 이렇게 큰 상처를 보고 있자니 긴장한 성혜인의 손끝이 떨렸다.붕대를 감으려면 반승제의 가슴 쪽을 지나서 둘러야 하기에 성혜인은 어쩔 수 없이 일어섰다. 그녀는 붕대를 어깨로부터 가슴을 지나 허리 쪽으로 감았다.성혜인은 긴장하면 호흡이 가빠지는 습관이 있는데 그 호흡이 어깨쪽으로 쏟아졌다. 붕대를 여러 번 둘러싸야 했기에 몇 분 동안이나 같은 자세로 꿇고 있으니 다리가 저렸다.미간을 꿈틀거리던 반승제가 그녀에게 아직 얼마 남았는지 물어보려고 입을 열던 찰나에 어깨 쪽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다리가 저려 순간 평형을 잃은 성혜인의 입술이 반승제의 어깨에 닿았던 것이었다.반승제의 눈썹이 움찔거렸고 호흡도 점차 가빠졌으며 목소리도 살짝 쉬어서 나왔다.“페니, 너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얼굴이 빨개진 성혜인은 얼른 입술을 떼고 고개 숙여 붕대를 마저 감았다.“반 대표님, 일부러 그런 거 아닙니다.”“그럼 어젯밤은?”그는 유리를 통해 성혜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어젯밤 그 입맞춤도 고의가 아니야?'이 여자. 귀국하자마자 반승제와 잠자리를 가졌고 후에도 몇 번 만났었다.온시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설마 이게 모두 그녀의 계획 인건가?하지만
“바...바람?”이 일이 만약 다른 남자한테 벌어졌다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하지만 많은 사람한테 일편단심이라 알려진 반승제가 누구와 바람을 피웠단 말인가?당연히 성혜인은 이 일이 자신과 연관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자신은 그의 아내였기에 이건 바람으로 속하지 않았다.이는 이미 법적으로 승인된 관계였다.반승제는 놀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응. 바람.”성혜인은 다른 사람 일에 크게 귀를 기울이지 않지만 자기 남편에 관한 스캔들이라면 관심을 보였다.하지만 그는 당분간 그녀의 고객이었기에 그녀를 불쾌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너무 뻔하게 표현하면 안 되었었다.“반 대표님이 넘보는 여자라니.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네요.”이 말을 한 성혜인은 무엇인가 생각이 나서 소름이 돋았다.설마 그 바람 대상이…'나인 건 아니겠지?'반승제가 자기 때문에 저렇게 맞았다고?그녀는 순간 반희월이 떠올랐다. 반승제가 그녀와 함께 본가로 갔으니까.만약 그녀가 반태승 앞에서 입을 뻥긋해서 반승제가 맞았다면 이 상처는 분명 그녀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반승제는 성혜인의 얼굴을 보고 그녀가 알아챘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녀는 다른 일에는 눈치가 백단이었지만 남녀 일에는 눈치가 없었다.성혜인은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했다. 그녀는 어떻게든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이렇게 심각한 상처는 한 달쯤 되어야 다 아무는데 이 상황에 반승제의 바람 대상이 서류상 아내인 자신, 회장님께서 살뜰히 챙기던 그 혜인이라는 것을 알면 발칵 뒤집힐 것이다.아무리 성격이 좋다고 해도 이런 일은 무조건 혼나게 될 것이었다.성혜인은 원래 남아서 그를 돌볼 생각이 없었다. 단둘이, 그것도 호텔에 남녀가 같이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기기 쉬웠기 때문이다.하지만 반승제가 이렇게 다친 게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발걸음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게다가 그날 밤 성씨 가문에서 약을 탄 술을 건넸으니 어떻게 보아도 반승제가 억울한 쪽이었다.“반 대표님
방문이 닫히는 순간에 성혜인은 소파에 드러누웠다.반희월이 한바탕 소동을 낸 것도 그녀를 힘들게 했는데 지금 또 이렇게 상처투성이인 반승제의 등을 보니 더 충격적이었다.이 어색한 거짓말이 도대체 언제 끝날는지.시시각각 경계해야 했다....방에서 야근하고 있던 반승제는 어차피 등이 아파 눕지를 못했기에 그냥 밤을 새기로 했다.한밤중에 방문을 나선 반승제는 소파에 얌전히 기대고 있는 성혜인을 보았다.미간을 찌푸린 그는 그녀와의 밤은 이미 끝났으니 오늘이 지나면 그녀와 거리를 두어야 겠다고 생각했다.고모의 말이 맞았다. 할아버지께서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절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테이블 앞에 서서 곤히 잠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녀의 얼굴은 엄청 작았다. 평소 도도하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없이 얌전해 보였다.그가 그녀의 남편과 통화를 할 때는 꿀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인제 보니 확실히 온시환이 잘못 생각한 것 같았다. 그녀가 몇 번이나 남편에 대한 사랑을 보였었다. 아마 그날 밤, 그녀의 마음속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하긴 그녀는 남편과 몇 번이고 그런 밤을 보냈을 거니까.호흡이 또다시 가빠진 반승제는 얼른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물을 다 마시고 나서야 그는 컵 변두리에 옅게 남겨진 핑크색 입술 자국을 보았다.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컵을 내려놓고 황급히 방으로 들어갔다.이튿날 아침, 눈을 뜬 성혜인은 소파 맞은편에 앉아있는 반승제를 발견했다.그녀는 얼른 눈을 비비고 똑바로 앉아 시계를 바라보았다.이제 여섯 시밖에 안 되었는데. 휴일에도 이렇게 빨리 일어난다고?“반 대표님?”방금 일어나 조금 잠긴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움이 섞여 있었다.반승제는 그녀를 보지도 않고 “응”이라고만 대답한 뒤 손에 든 서류를 치웠다.성혜인은 황급히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반 대표님. 아침은 뭐로 드릴까요? 제가 내려가서 가져다 드릴게요. 그리고 등에 상처는 괜
확실히 성혜인은 성휘가 반 회장님께 연락을 드린 것을 몰랐다. 그저 마음만 더욱 힘들어졌다.지금 이 시각, 반승제가 성씨 본가에 가서 성씨 가문에 본때를 보여 줬다는 사실까지 들으니 이 ‘아내'라는 자리가 더 싫게만 느껴졌다.아버지는 항상 그녀를 난감하게 만들었다.하지만 성혜인은 지금 아빠한테 불만을 표출하면 제일 이득을 볼 사람이 성혜원이라는 것을 알았다.“응, 알겠어.”그녀는 성혜원을 지나치고 자리에서 떠났다.성혜원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녀가 성휘와의 관계가 별로 좋지 못한 데다가 성휘가 멋대로 반 회장님과 연락하고 있다는데 왜 원망하지 않는 거지?성혜원은 원래부터 몸이 좋지 못한 데 새벽 네 시부터 두 시간 동안 여기서 기다렸다.게다가 지금 성혜인의 반응을 보니 폭발할 것 같았다.“언니, 반 대표님 어젯밤 다른 여자랑 이 호텔에 있었대.”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성혜인이 반승제랑 같이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내 성혜인이 뱉어낸 말은 그녀로 하여금 속이 뒤집히게 만들었다.“알아, 어젯밤 나랑 같은 방에 있었거든.”담담히 뱉어낸 그 말은 비수처럼 성혜원의 마음에 꽂혔다.성혜원은 순간 반박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성혜인이 자리를 떠나려 하는 것을 보고 성혜원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네가 어떻게!”자신의 말투가 너무 세다는 것을 인식한 그녀는 다시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어떻게 반 대표님이랑 같은 방에 있어? 반 대표님 언니 안 좋아해. 언니, 가문 때문에 자신을 그렇게 혹사시키지 않아도 돼. 언니 그냥 아빠한테 반항하기 싫은 거잖아.”성혜인은 의문스럽게 물었다. “나랑 반승제 씨는 부부 사이야. 같은 방을 쓰는 건 당연한 거 아냐? 그리고 아빠 말대로 제원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앞다투어 반승제랑 결혼하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당연히 그 사람을 내 곁에 오래 머물게 해야지. 안 그래?”성혜원은 그녀가
성혜인은 급히 티슈를 뽑아 우유를 닦아냈다.“죄송합니다, 반 대표님.”“응.”반승제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성혜인은 우유를 다 닦아낸 뒤 반승제의 바지에도 우유가 몇 방울 튄 것을 보고 휴지 몇 장을 더 뽑아 닦았다.서류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는데 순간 새하얀 손이 다리 쪽으로 뻗어졌다.반승제는 그대로 굳어버렸고 손을 들고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이 위치가 어색한 것은 아니지만 이건 그의 다리였다.성혜인은 고개를 들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반승제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식사부터 하지.”성혜인은 하는 수 없이 손을 거두고 휴지를 쓰레기통에 넣었다.“반 대표님, 등 상처에 약 다시 발라야 하나요?”“아니, 괜찮아.”성혜인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밥을 다 먹은 뒤 반승제와 함께 내려갔다.이 시각, 성혜원은 이미 없었다. 성혜인은 호텔 문 앞에 서 있었고 반승제는 심인우가 데리러 왔다.그가 차에 올라탈 때 곁눈질로 성혜인이 1억정도 되는 비싼 검은색 벤츠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차에서는 키가 그리 크지 않은 남자가 내렸다. 그는 성혜인과 몇 마디를 나눴고 성혜인은 웃어 보였다.남자의 외모는 다른 사람보다 그렇게 특별한 것도 없이 평범했다.성혜인이 그의 앞에 서 있으니 두 사람은 차원이 달라 보였다.성혜인의 외모가 워낙 출중하여 남자는 마치 하인 같았다.반승제는 시선을 거두고 다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운전석에서 운전하고 있던 심인우도 답답하긴 했지만 비서로서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벤츠 차 안에서 서민규는 흥분되어 얼굴이 빨개졌다.“페니 씨, 저한테 자동차를 선물해 줄 줄은 몰랐어요. 저...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성혜인은 멈칫했다. 그녀는 서민규에게 차를 선물해 준 적이 없다. 그녀 또한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이 벤츠, 가격이 낮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강민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게다가 확실히 이번에는 조금 신경을 쓴 것이 원래 같으면 몇십억
서민규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이런 사람 앞에서는 그저 고개를 들지도 못한다고 생각했다. 마치 상대방은 감히 넘보지도 못할 엄청난 존재인 것처럼.반승제는 그저 덤덤히 훑어보고는 더 이상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대표와 같이 회사로 들어섰다.서천 쪽 투자는 몇천억이 걸려있기에 BK사에서도 극도로 중시했다.많은 회사에서 반씨 가문쪽에 계획안을 건넸는데 어젯밤 갑자기 BK사와 협상하기로 했었다.오늘 이렇게 반승제가 직접 찾아온 걸 보면, 대표는 이게 네이처 빌리지도 BK사쪽에서 시공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지금 보니 더욱 페니한테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BK사를 선택해서 BK사도 이런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BK사 대표는 반승제를 데리고 회사를 둘러보고는 중간층 복도 쪽에 멈춰 섰다. 이제는 쌍방의 협의를 진행할 차례였다.반승제가 회의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상사가 한 사람을 혼내는 것을 들었다. 혼나고 있는 사람은 마침 방금 성혜인을 데리러 왔던 사람이었다. 오늘은 토요일이었고 BK사는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저녁 9시에 퇴근하고 주 6일 근무하는 제도를 실행하고 있었다.“어떻게 된 거야, 서민규. 이런 데이터도 다 틀리고. 시간이 나면 책이라도 읽으면서 실력 좀 쌓으란 말이야. 너희 부에서 너 빼고 다 인서울 출신이야. 지방대 주제에 내가 한소리 했다고 뭐라 하지 마?” 서민규는 속으로 상사를 욕했다. 이 사람은 학력 차별이 엄청 심했다. 그 때문에 서민규의 학력을 알고는 매일 그를 달달 볶았다.또한 이것 때문에 여러 번의 승진 기회도 다른 사람한테 뺏겼다.그래도 회사에서 주는 월말 보너스가 많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다.반승제는 멀지 않은 곳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그 남자는 대충 177센티미터 정도 돼 보이는 키였고 사회에 나온지 얼마 안 된 직원으로 보였다. 굳이 좋은 점을 말하자면 다른 남자보다 피부가 하얗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조금.이걸 좋은 점이라고 할 수 있나?
반승제는 한 바퀴 쓱 훑어보고는 종이컵을 들고 물을 받기 시작했다.서민규는 종이컵을 들고 있는 반승제의 모습이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의 손은 마치 와인잔을 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았다. 공간은 반승제와 반승제가 아닌 것으로 나뉘어졌다. 반승제가 아닌 것에 시선을 주는 사람은 없었고, 모든 사람이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반승제는 느긋하게 종이컵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입에 대지 않고 손을 내렸다. 그는 넋이 나가버린 눈앞의 두 사람에게 짧은 묵례를 하고는 다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서민규의 곁에 함께 있던 직원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물었다.“저 사람 누구야? 아우라가 장난 아닌데. 우리 회사 대표는 아니지?”서민규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우리 회사 대표님도 저 사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야. 저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다면 최근의 경제 뉴스라도 확인해 봐.”두 사람은 몇 마디 더 주고받다가 사무실로 돌아갔다.반승제가 종이컵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현장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BK의 대표는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제가 준비를 제대로 못 했네요.”그는 또 비서에게 눈치를 줘서 여러 번 소독한 유리컵을 갖고 오게 했다. 하지만 반승제는 물을 입에 대지도 않고 회의에만 집중할 뿐이었다.얼마 후, 두 사람은 악수로 회의를 끝냈다. 그리고 반승제를 선두로 수많은 BK사 임원이 함께 회사 밖으로 나섰다.반승제는 차에 올라탄 후에도 말 한마디 없었다. 심인우는 백미러를 통해 힐끔힐끔 눈치를 볼 뿐이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서류를 훑어보고 있기는 하지만 어딘가 분명히 이상했다. ...로즈가든으로 돌아온 성혜인은 잠깐 쉴 생각이었다. 이때 합작사에서 다시 합작하기로 했다는 전화가 왔고, 성혜인은 드디어 미간을 누르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반승제의 등에 난 상처가 떠올라 반태승에게 말이라도 남겨야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성혜인은 당연히 증손주를 보고 싶어 하는
설우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설연주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그는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 같은 여자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하지만 입가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아팠다. 말만 해도 상처가 당겨져 입술이 따끔거렸다.그는 휴대폰을 넣고 차에 오르려는데 그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늘 밤엔 집에 와서 저녁 먹자.”“네, 형.”설우현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짜증이 피어올랐다.마침 설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설기웅과 설의종은 아직 설연주가 설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다.설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자 그는 우연히 설다연이 담벼락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설다연은 담벼락에 걸터앉아 옆에 있던 꽃을 하나씩 따서 바닥에 던지고 있었다.이전에는 계절의 변화도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몰랐던 그녀는 설씨 가문에 들어온 후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처음 몇 달 동안 설우현이 집에 들를 때마다 그녀가 설기웅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오빠, 이거 뭐야?”“이건?”“그럼 이건 뭐지?”솔직히 설우현이라면 그런 질문에 답할 인내심이 없었을 것이다.설다연은 사람을 죽이는 법 외엔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왜 꽃이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는지, 왜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지, 심지어 물속에 왜 물고기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예전에 그녀의 세상은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과 시험관들뿐이었고 그 안엔 약품 냄새 말고는 다른 냄새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녀는 살인 병기로 길러졌고 잔인한 본능을 깨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생고기를 먹도록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음식을 익혀 먹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다.결국 설기웅이 하나하나 가르치며 그녀의 세계를 재구성해주었다. 설우현 역시 처음으로 형이 그토록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벽 아래 서서 설다연이 여전히 꽃을 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꽃들은 왜 따는 거야?”설다연은 담벼락에서 뛰어내려 설우
한편, 설연주는 눈이 가려진 채로 설우현 앞에 끌려왔다.오늘 단지 슈퍼에 가서 음식이나 좀 사려고 했을 뿐인데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했다. 도대체 누가 잡아 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녀는 바닥에 강제로 무릎이 꿇려졌다. 그때 귀 옆에서 라이터 소리가 들려왔다.설우현은 의자에 앉아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설연주의 얼굴이 굳어지며 본능적으로 ‘우현 오빠’라고 부르려다 멈칫했다.하지만 설우현이 입을 떼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네가 사는 그 집 사실 해커가 소유한 거더군. 그런데 그 해커가 혜인이 납치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어. 내가 그놈을 잡았을 때 끝까지 배후를 자백하지 않더니. 알고 보니 네가 바로 그 배후였구나, 설연주.”설연주의 눈에 담긴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설우현이 명확한 증거를 찾았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이제 자신이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설연주는 고개를 푹 떨구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자 설우현은 그녀의 머리채를 단단히 움켜잡고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머리카락이 잡힌 설연주는 두피에 전해지는 고통에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가 이내 그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이제 다 알아낸 거예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우현은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설연주는 바닥에 나뒹굴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통증이 밀려왔다.“설연주, 가족을 건드리는 건 선을 넘었어. 내가 널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우현은 짜증이 치밀어 담배를 꺼냈다. 그는 평소 여자는 절대 때리지 않았지만 설연주가 저지른 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듣자 하니 너 두팔과 어울려 다녔다더라. 마침 그놈도 지금 널 찾고 있더군.”설연주는 몸이 떨리며 순간 얼어붙었다. 혹시 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보내려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널 두팔에게 넘길 거야.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두팔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설강민을 내려놓으라 지시하고 홀로 걸어갔다.설우현은 이미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설강민이 들어오자 설우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두팔은 설우현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설우현이 혼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그는 설강민 같은 쓰레기 때문에 설우현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 두팔의 부하가 설강민을 거칠게 밀어버렸다. 이미 탈진 상태가 된 설강민은 그대로 바닥에 개처럼 엎드렸고 얼굴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형, 형... 나 구해줘요...”미약한 그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설우현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져온 돈 박스들을 세어보라고 지시했다.두팔은 홀 한가운데 앉아 자신의 공간에 가득 쌓인 박스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박스 앞에서 돈을 세며 확인하고 있었다.“설우현, 듣자 하니 설씨 가문에 새로 들어온 여자가 있더군. 설연주라고 했던가?”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자와는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두팔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그 여자의 원래 이름은 진연주였어. 내 밑에 있을 때 아주 말 잘 듣던 아이였지.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습도 제법이었는데, 내가 맛보기도 전에 설연주가 되어 설씨 가문으로 가버렸지. 너희 설씨 가문에서 그런 여자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만.”두팔은 조롱 섞인 미소를 띠며 다리를 옆 의자에 올려놓았다.“연주는 한때 내 충실한 개였어. 그래서 연주를 위해 특별히 여러 개의 목줄을 맞춰놨지.”두팔이 손뼉을 치자 부하들이 맞춤 제작된 목줄을 가져왔다. 목줄은 검은색, 은색, 금색으로 각각 다른 디자인이었으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설우현은 이를 보며 곧장 주변 몇몇 사람들의 취향이 생각났다. 그들은 이런 조련에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묘한 쾌감을 얻는 사람들이었다. 설연주가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다니 의외였다.이윽고 설우현의 미간이 잔뜩
설우현은 살면서 이토록 파렴치한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여 설연주를 상대하기 싫었던 설우현은 그대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다음 날, 설연주는 그대로 별장에서 쫓겨났고 도우미가 다가와 정중하게 설우현의 말을 전달해주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는 명령이었다.그렇게 일주일 동안 설연주는 설우현을 보지 못했다.오히려 설강민의 소식은 계속하여 들려왔는데 현재 돈을 다 써버려 또 두팔의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겁도 없이 독촉하러 온 사람들까지 때렸다는 것이다.두팔 쪽에서는 당연히 설강민의 행패를 가만히 놔두려 하지 않았고 현재 설강민은 이미 두팔에게 잡혀 끌려갔다고 한다. 이제 그가 어떤 일을 겪을지는 아무도 모른다.설연주는 설준석의 별장에서 지내며 계속하여 그쪽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저녁이 되고 설준석이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별장으로 돌아왔다.음식이 나오자마자 설준석은 두팔의 전화를 받게 되었고 아들이 100억이나 달하는 빚을 졌으니 당장 돈을 들고 오라는 협박 전화였다.물론 설준석도 두팔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었다. 고리대금업자지만 꽤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플로리아 상층부의 목적지는 주로 지하 도박장으로 하룻밤에 벼락부자가 될 수도 있고 즉석에서 돈을 전부 잃어 취직하게 될 수도 있다.물론 지하 도박장에서도 돈을 빌릴 수 있지만 그곳에는 정해진 조건이 있었다.하지만 두팔이 운영하는 고리대금에는 조건이 없었고 대신 갚지 않으면 손과 발을 모두 잃고 모든 가족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어쨌든 두팔이 운영하는 무리는 전부 극악무도한 양아치들이었다. 한 사람의 목숨이 이천 만 정도로 만약 일가를 독촉하는 데 성공한다면 단번에 몇십억은 벌 수 있다.전화를 받고 화가 치밀어 오른 설준석이 휴대폰을 꽉 움켜쥐며 물었다.“설강민은?”그러자 휴대폰 건너편에서 설강민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요. 저 사람들이 내 팔과 다리를 부러뜨릴 거란 말이에요. 빨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
그러나 성혜인은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도우미에게 꽃병을 건네주고는 다시 설연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난 저녁 비행기를 타고 곧 남편과 함께 제원으로 돌아갈 거야. 다음에 널 만나게 될 땐 친구로 만났으면 좋겠네.”설연주는 당당하게 작별인사 한마디도 못 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당당한 성혜인에 비하면 그녀는 마치 평생 빛을 보지 못하는 도랑 속 쥐와 같았다.설연주는 심지어 성혜인의 말을 통해 자신의 비열함을 느꼈고 그 비열함은 차마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설연주는 성혜인의 눈을 거의 바라보지 못했다.혹여나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을 향한 원망과 역겨움을 눈치챌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솔직히 설연주는 성혜인을 진심으로 숭배하고 있었고 진심으로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미 진실을 알게 된 마당에 이제 와서 친구를 사귄다는 건 사치인 셈이다.그렇게 설연주는 설우현이 두 사람을 찾아올 때까지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들에게 다가온 설우현은 설연주의 작품을 보며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못생겼어.”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린 설연주가 설우현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고 뺨을 맞기라도 한 듯 통증이 밀려왔다.이렇게 비열하고 음침하기 그지없는 인간일 뿐인데 감히 설우현에게 그런 마음을 품다니.어쩐지 오래 못 살 것 같더라니... 그녀 같은 사람은 지옥에 가야만 한다.하느님은 그녀에게 복수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내 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다시 설우현을 바라보았고 설우현은 그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마디 툭 내던졌다.“이따 밥 먹고 가.”그러자 설연주는 몰래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휴지로 슬쩍 닦아내며 탐욕스럽게 설우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왜 이 타이밍에 설우현 같은 도련님을 만난 거지?’운명은 정말 그녀를 농락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렇게 성혜인의 말대로 그녀는 저녁 비행기를 타고 제원으로 떠났고 설우현은 특별히 그들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연주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녀는 오번과 통화를 하며 문을 열어주기 위해 현관으로 향했다.그 결과 밖에 서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설우현이었고 그는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끼운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설연주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설연주는 순간 마법이라도 걸린 듯 무어라 말해야 할지, 설우현이 갑자기 이곳에는 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우현 오빠...”이어 설연주는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한편, 설우현은 담뱃불을 끄고 시선을 돌려 설연주의 몸을 쓱 바라보았다.긴장한 나머지 설연주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고 설우현이 과연 조금 전의 통화 내용을 들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그렇게 한참 후에야 설우현은 비로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혜인이가 너 보고 싶다네. 오후 비행기야.”설연주도 잇따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묵묵히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차가 설우현의 별장에 도착하고 설연주는 그제야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이 설우현의 여자친구가 아닌 성혜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거실에 도착해 보니 성혜은이 거실에서 게임을 하면서 놀고 있었고 그 옆에는 빈 스위치 하나가 놓여있었다. 설우현 본인이 사용하던 스위치로 보였다.한편, 성혜인은 설연주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말을 건넸다.“연주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설연주는 무의식적으로 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이미 스위치 앞으로 다가가 스스로 게임을 시작했다.결국,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성혜인을 따라 화원으로 들어섰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위해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었다.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처럼 분위기가 매우 화목해 보였지만 사실 설연주는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계속하여 안절부절못했다. 성혜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두
설연주는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음식을 천천히 먹고 나니 운전기사가 그녀 옆에 다가와 서 있었다. 이는 분명 그녀를 재촉하고 있는 신호였다.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오직 그의 컴퓨터만 바라보고 있었다.설연주가 마음속으로 몰래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한번 설우현을 깊게 쳐다보고 나서야 설연주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기사의 뒤를 따랐다.그녀를 태운 차가 막 별장을 떠나려 할 때, 다른 차가 천천히 별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 순간, 설연주는 원인 모를 충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여자친구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섹시한 연상 스타일일까? 설우현은 그런 여자를 더욱 선호하니까.’설연주는 속눈썹을 드리운 채 창문을 열어보았다.하지만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차는 누가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창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었다.그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괜히 실마리가 드러날까 걱정되었던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차창을 다시 닫아버렸다.“가시죠.”운전기사도 다시 가속 페달을 밟았고 그렇게 설연주는 천천히 별장을 떠났다.오랜만에 다시 설준석의 별장에 돌아와 보니 이상하게 분위기가 어수선하게 느껴지고 무엇을 해도 흥미가 돋지 않았으며 설우현의 얼굴이 계속하여 눈앞에서 아른거렸다.수없이 많은 남자를 꼬시며 이용해 먹었지만 설연주는 단 한 번도 연애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줄곧 설연주의 이용수단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불쌍할 지경으로 적은 감정을 남자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하물며 그 상대는 설우현이다. 그녀와 같은 여자가 설우현에게 어울릴 수가 없는 법이다.설씨 가문의 도련님으로 금수저를 달고 태어나 평생 고생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우스우면서도 씁쓸해졌다.저녁이 되자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설연주 씨, 설강민이 두팔에게 끌려갔다고 합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온몸이 오싹해졌다. 설강민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낭패한 모습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평소 물 쓰듯 돈을 쓰던 술집에서 쫓겨나는 날이 있다니.그 순간, 설강민은 문득 설준석이 이 술집의 지분을 일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강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분명 그의 체면을 짓밟기 위해 아버지가 지시한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설준석에게 가서 사실대로 털어 넣고 돈을 갚아달라며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막상 이 지경이 되니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기며 더더욱 설준석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설강민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조금 전 또 20억 원을 빌렸으니 차라리 이 20억 원으로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게 나았다.다시 마음을 먹고 설강민은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한 채 현금 뭉치를 매니저에게 던져주었다.“지금 당장 가장 좋은 술을 가져오고 5명의 계집애를 데려와.”한 푼도 없을 줄 알았던 설강민이 뜻밖에도 600만을 들고 들어오니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그러자 설강민은 오히려 더욱 으스대며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아무리 초라해도 난 설씨 가문 일원인데 그깟 돈 하나 못 꺼내겠어?”돈을 받은 매니저는 바로 계집 몇 명을 설강민에게 보내주었다.아무리 돌이켜봐도 오늘 밤의 일은 생각할수록 더욱 화가 났다. 하여 설강민은 매니저가 보낸 여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양옆에 여자들을 껴안으며 오늘 밤 겪었던 울분을 풀어냈다.한편, 설연주는 구석에 서서 설강민의 모든 행동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다.룸을 떠나고 화장실에 간 설연주는 그제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최근에 열이 나며 심각하게 살이 많이 빠진 모양이다.그리고 오늘 밤 설강민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웃기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설연주가 쉰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설연주, 봤어? 저게 바로 네가 목숨을 바쳐서 구한 남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