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규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이런 사람 앞에서는 그저 고개를 들지도 못한다고 생각했다. 마치 상대방은 감히 넘보지도 못할 엄청난 존재인 것처럼.반승제는 그저 덤덤히 훑어보고는 더 이상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대표와 같이 회사로 들어섰다.서천 쪽 투자는 몇천억이 걸려있기에 BK사에서도 극도로 중시했다.많은 회사에서 반씨 가문쪽에 계획안을 건넸는데 어젯밤 갑자기 BK사와 협상하기로 했었다.오늘 이렇게 반승제가 직접 찾아온 걸 보면, 대표는 이게 네이처 빌리지도 BK사쪽에서 시공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지금 보니 더욱 페니한테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BK사를 선택해서 BK사도 이런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BK사 대표는 반승제를 데리고 회사를 둘러보고는 중간층 복도 쪽에 멈춰 섰다. 이제는 쌍방의 협의를 진행할 차례였다.반승제가 회의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상사가 한 사람을 혼내는 것을 들었다. 혼나고 있는 사람은 마침 방금 성혜인을 데리러 왔던 사람이었다. 오늘은 토요일이었고 BK사는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저녁 9시에 퇴근하고 주 6일 근무하는 제도를 실행하고 있었다.“어떻게 된 거야, 서민규. 이런 데이터도 다 틀리고. 시간이 나면 책이라도 읽으면서 실력 좀 쌓으란 말이야. 너희 부에서 너 빼고 다 인서울 출신이야. 지방대 주제에 내가 한소리 했다고 뭐라 하지 마?” 서민규는 속으로 상사를 욕했다. 이 사람은 학력 차별이 엄청 심했다. 그 때문에 서민규의 학력을 알고는 매일 그를 달달 볶았다.또한 이것 때문에 여러 번의 승진 기회도 다른 사람한테 뺏겼다.그래도 회사에서 주는 월말 보너스가 많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다.반승제는 멀지 않은 곳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그 남자는 대충 177센티미터 정도 돼 보이는 키였고 사회에 나온지 얼마 안 된 직원으로 보였다. 굳이 좋은 점을 말하자면 다른 남자보다 피부가 하얗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조금.이걸 좋은 점이라고 할 수 있나?
반승제는 한 바퀴 쓱 훑어보고는 종이컵을 들고 물을 받기 시작했다.서민규는 종이컵을 들고 있는 반승제의 모습이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의 손은 마치 와인잔을 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았다. 공간은 반승제와 반승제가 아닌 것으로 나뉘어졌다. 반승제가 아닌 것에 시선을 주는 사람은 없었고, 모든 사람이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반승제는 느긋하게 종이컵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입에 대지 않고 손을 내렸다. 그는 넋이 나가버린 눈앞의 두 사람에게 짧은 묵례를 하고는 다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서민규의 곁에 함께 있던 직원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물었다.“저 사람 누구야? 아우라가 장난 아닌데. 우리 회사 대표는 아니지?”서민규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우리 회사 대표님도 저 사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야. 저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다면 최근의 경제 뉴스라도 확인해 봐.”두 사람은 몇 마디 더 주고받다가 사무실로 돌아갔다.반승제가 종이컵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현장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BK의 대표는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제가 준비를 제대로 못 했네요.”그는 또 비서에게 눈치를 줘서 여러 번 소독한 유리컵을 갖고 오게 했다. 하지만 반승제는 물을 입에 대지도 않고 회의에만 집중할 뿐이었다.얼마 후, 두 사람은 악수로 회의를 끝냈다. 그리고 반승제를 선두로 수많은 BK사 임원이 함께 회사 밖으로 나섰다.반승제는 차에 올라탄 후에도 말 한마디 없었다. 심인우는 백미러를 통해 힐끔힐끔 눈치를 볼 뿐이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서류를 훑어보고 있기는 하지만 어딘가 분명히 이상했다. ...로즈가든으로 돌아온 성혜인은 잠깐 쉴 생각이었다. 이때 합작사에서 다시 합작하기로 했다는 전화가 왔고, 성혜인은 드디어 미간을 누르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반승제의 등에 난 상처가 떠올라 반태승에게 말이라도 남겨야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성혜인은 당연히 증손주를 보고 싶어 하는
반승제는 어두운 표정으로 문을 닫으려고 했다. 하지만 성혜원이 손을 뻗어 막아서며 말했다.“승제 씨, 제가 우연히 호텔 매니저가 들고 온 물건을 보고 걱정돼서 그러는데, 혹시 어디 다쳤어요? 다른 뜻은 없고 진짜 그냥 걱정돼서요.”반승제가 지내고 있는 곳을 알아낸 성혜원은 같은 층에 있는 스위트 룸에 묵고 있었다. 비슷한 방 구조에 같은 침구를 쓰고 있으니 공기조차 달콤해진 것 같았다.아침부터 성혜인 때문에 화가 나기는 했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반승제가 성씨 집안에 대한 태도로 봤을 때, 두 사람은 영원히 사이좋게 지낼 리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르다. 그녀는 반승제가 성씨 집안에 대한 태도를 전혀 개의치 않았고, 반승제를 좋아하는 자신이 마음만 중요했다.성혜원은 마른기침을 하며 얼굴을 더욱 붉혔다.“승제 씨, 제가 약 바르는 거 도와줄까요? 혼자서는 손이 안 닿을 거 아니에요.”반승제는 깊게 파인 치마에 투명한 외투를 걸친 성혜원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문을 닫지 못하게 막고 있는 손은 그녀의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반승제만 허락하면 성사될 일이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배달을 보낸 사람이 성혜원이라고 여긴 그는 약을 복도로 던지더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꺼져.”반승제의 말은 마치 비수처럼 성혜원의 심장에 꽂혔다.예고 없이 닫힌 문에 성혜원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냈다. 조금만 늦었어도 문틈에 끼여 다쳤을지도 모른다.처음으로 이토록 매정하게 거절당한 성혜원은 자존심이 짓밟히는 것 같았다. 그는 오늘 메이크업만 두 시간을 했다. 가녀린 매력을 강조한 메이크업 덕분에 위층으로 올라오는 길에만 번호를 몇 번 따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반승제의 반응은 그녀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취급을 당한 것은 뺨을 맞는 것과 다름없었다. 성혜원은 입술을 꼭 깨물고 반승제가 버린 봉투를 바라봤다. 이는 호텔 매니저가 들고 온 것이었는데 약이 아직도 그대로 들어 있었다.배달을 보낸 사람을 확인해 보니 성혜인이라
문자가 발송되고 성휘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하지만 서류를 보고 있던 그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소윤이 따듯한 우유를 들고 왔다가 반짝이는 휴대폰을 보고 서슴없이 들어 올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비밀이 없었기에, 성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보, 문자 왔어요.”성혜인에게서 온 문자를 먼저 확인한 소윤은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성휘의 말투로 답장했다.「혜원이는 네 동생이야. 혜원이 어릴 적부터 몸이 아픈 데에는 내 책임도 있으니, 원하는 게 있다면 그냥 양보해. 동생이랑 네 것 내 것 따질 필요는 없잖니.」이는 성휘가 자주 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소윤은 아무렇지도 않게 보냈다. 그리고 문자 기록을 깨끗하게 지웠다.소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성혜원에게 마음을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일러뒀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성휘는 아직 전처가 남겨 놓은 아이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짓을 하지 않는 한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조심할 것은 조심해야 했다.SY그룹의 2차 융자가 끝난 지금은 회사 운영에만 신경 쓰면 되었다. 다른 투자자는 BH그룹을 봐서라도 끊임없이 몰려올 것이다. BH그룹과의 정략결혼은 사실 누구를 보내든 상관없었다. 예전에는 성혜원의 몸이 편치 못해 성급히 시집 보내지 못했지만, 그녀가 건강을 회복한 이상, 성혜인의 명성만 나락으로 떨어뜨리면 BH그룹의 며느리는 바뀔 수 있었다.“여보, 누가 문자 보냈어?”소윤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스팸 문자에요. 제가 처리했으니 하던 일 마저 해요.”몸이 불편했던 성휘는 기침 몇 번 하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서재에서 나온 소윤은 거실에 앉아 있는 성한을 보고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눈을 반짝이며 걸어갔다.“한아, 혜원이 반승제를 좋아하는 모양인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성한은 성혜원에게 크게 관심 없었다. 그가 관심을 품고 있는 것은 SY그룹밖에 없었다.“한아, 넌 성혜인이 어떤 것 같아?”“어머니, 할 말이 있으면
성휘의 답장을 받은 성혜인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이틀 후, 성혜원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반승제의 호텔 방 앞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반승제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고 드나드는 사람이라고는 그의 비서밖에 없었다.성혜원은 오늘 아침도 호텔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월요일이기 때문에 반승제가 분명히 출근하러 나오겠다고 생각하고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반승제가 정장을 입고 심인우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성혜원은 두 사람이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가 닫히기 직전 후다닥 달려가 막아섰다. 지난번 반승제의 태도로 생각해 봤을 때, 그녀는 우연인 척 가까이할 수밖에 없었다.“승제 씨, 출근하는 거예요?”반승제의 안색은 성혜원을 만나자마자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녀는 반승제가 한평생 만나본 사람 중에서 가장 뻔뻔한 사람이었고, 반태승이 왜 좋게 평가하는지 이해가 안 될 따름이었다.반승제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차가운 기운을 뿜어냈다. 성혜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용기가 없었다. 반승제의 아우라로 가득한 좁은 공간에서는 멀쩡히 숨을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반승제가 차에 올라타자, 성혜원은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반대로 반승제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십자로에서 우연히 마주친 강아지와 산책하고 있는 여자를 본 후에야 약간 풀렸다.겨울이를 포레스트에서 데리고 나온 성혜인은 아침부터 산책하고 있었다. 드디어 합작사의 일을 해결하고, 내일 서천으로 가서 유창목 장판을 찾기 시작하면 한 달 정도 걸릴지도 몰랐다. 그래서 시간이 있을 때, 겨울이와 많이 산책해야 했다.성혜인은 신호등을 기다리며 겨울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다. 하지만 겨울이는 반승제에게만 반응하는 레이더라도 탑재한 듯 귀신같이 그의 차를 발견하고는 따라가려고 했다. 덕분에 성혜인도 그의 차를 발견하고 짧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겨울이는 이미 벌떡 일어나 창문으로 머리를 들이밀었
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반승제의 감정 변화에 예민했던 심인우는 차 안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 크게 와 닿았다. 차 안의 공기는 조금 전처럼 차갑지 않았고, 심인우는 드디어 조금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기억을 되짚어 보니 반승제에게 뻔뻔하게 들이대던 여자들은 전부 제원에서 사라졌다. 오늘 아침에 만난 여자도 사라지기까지 멀지 않을 것 같았다. 다행히 반승제의 기분이 풀린 덕분에 회사 임원은 고생이 덜할 듯했다.성혜인은 반승제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꿇어앉아 겨울이와 시선을 맞췄다. 겨울이와 함께 보낸 시간이 이렇게나 많은데, 더 자주 보는 강민지에게도 보인 적 없는 열정을 반승제에게 보인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혹시 겨울이가 암컷이라 승제 씨의 얼굴에 반한 건가?’성혜인은 겨울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반승제의 얼굴은 그녀조차도 그림에 담아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으니까.“겨울아, 이런 걸 얼빠라고 하는 거야.”산책을 끝내고 돌아온 성혜인은 마침 포레스트로 들어가는 백연서를 발견했다. 백연서는 같이 살고 있는 반승제와 성혜인이 걱정되는지, 두 사람의 방이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시름을 놓았다.“회장님이 너한테 또 선물을 보냈다며?”반태승은 자신이 한 일을 숨길 생각이 없었기에 집안사람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혜인에게 소식을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그녀를 집안사람으로 여기는 이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백연서는 자기 아들이 바람을 피웠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녀는 한때 윤단미와 윤씨 집안을 결사반대했다. 하지만 성혜인과 결혼한 반승제가 3년이나 집을 떠나고 나니, 차라리 윤단미를 받아들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그래서 백연서는 줄곧 성혜인에게 반승제를 넘보지 말라고 일렀고, 바람을 피웠다는 소식이 희소식으로 느껴졌다. 만약 반승제가 윤단미에게 흥미를 잃었다면 다른 여자를 소개해 줄 수도 있었다. 제원에는 수많은 여자가 있었고, 대부분 성
성혜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녀는 그림을 힐끗 보며 덤덤한 말투로 물었다.“이건 조 사장님의 선물인가요?”조희준은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그의 회사는 금방 2차 융자를 끝낸 SY그룹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조건을 낮춰 합작할 생각을 한 적 없었다. 그리고 그는 성씨 집안과 반씨 집안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다. 이는 반씨 집안과 가까운 사람만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오만한 조희준은 단 한 번도 동창에게 먼저 연락한 적 없었다. 이번에는 경찰 조사로 스트레스를 받던 중, 성혜인을 협박할 거리를 찾기 위해 그녀의 부모를 조사하다 우연히 동창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SY그룹은 작은 페인트 장사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발전해 왔다. 조희준은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니 완벽한 파트너라고 할 수도 있었다. 오늘 조희준은 성혜인과 일적으로 오해가 생겼다면서 선물을 잔뜩 들고 왔고, 성휘는 자신이 좋아하는 명화가 있는 것을 보고 흔쾌히 사과를 받아들였다.“오랜만에 동창을 만나러 왔는데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죠. 페니 씨, 우리 그래도 3년이나 함께 일해 왔는데 작은 오해로 갈라서는 건 너무 아쉽지 않아요? 페니 씨 아버지를 봐서라도 그냥 웃고 넘겨요.”조희준은 60억짜리 그림으로 사건을 무마할 생각이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또 자신을 찾아올 줄 몰랐던 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소윤이 차를 따르며 입을 보탰다.“그래, 혜인아. 조 사장님 말이 맞아. 3년이나 함께 일했다면서 작은 오해로 틀어지는 건 아니지. 오늘 차 한잔하면서 풀고, 앞으로는 좋은 사이로 지내렴.”성휘는 성혜인을 소파로 끌어당겼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뿌리쳤다.“아빠, 조 사장님이 말하는 오해가 뭔지 알기나 해요? 저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 60억짜리 그림에 혹해서 딸을 팔아넘기는 거예요?”오랫동안 참아왔던 분노가 한꺼번에 터졌다. 반씨 집안에 자신을 팔아넘긴 것으로 모자라 또 한 번 같은 짓을 하니 말이다.성휘의 안색은 아주 어
“여보, 미안해요. 아까는 당신이 너무 걱정돼서 말이 헛나왔어요.”성휘는 가슴을 움켜잡은 채로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견뎠다. 이번 일은 확실히 그의 실수였다. 그는 2차 융자가 끝난 시점에 찾아온 동창이 합작을 원하는 줄 알았다. 게다가 자신과 아는 사이여서, 성혜인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고 말았다.성휘는 어두운 표정으로 소윤을 향해 말했다.“누가 봐도 진심으로 한 말인데 헛나왔다고?”소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성휘가 진심으로 화난 것은 또 처음이었다.조희준이 한 일에 소윤의 말을 보태자, 이 모든 게 그녀가 원하는 일인 것처럼 들려왔다. 그래서 성휘는 딸을 대하던 자신의 태도를 진심으로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의 수많은 착각이 성혜인에게는 상처가 되었으니 말이다.성휘는 차가운 표정으로 위층에서 내려오는 성혜원을 바라봤다. 그녀는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듯 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휘의 화난 표정을 보고서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말했다.“아빠, 죄송해요. 혹시 저 때문에 언니랑 싸웠어요?”성혜원의 목소리를 듣고 나자, 성휘는 한결 진정되었다.성혜원은 성휘의 친딸이었고, 또 그의 망설임 때문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아픈 손가락이었다. 게다가 성혜원은 착하고 똑똑해서 성혜인과도 잘 지냈다.“너 때문이 아니야, 혜원아.”성혜원은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아래로 내려와 소윤과 팔짱을 꼈다.“아빠, 엄마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 엄마가 아빠 건강이 더 나빠질까 봐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아요? 엄마가 말은 그렇게 해도 마음은 따듯한 사람인 거 잘 아시잖아요.”성혜원은 간단한 말 몇 마디로 단번에 성휘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성휘는 말없이 소윤을 힐끗 노려보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거실에서 성혜원은 소윤을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앞으로는 말조심 좀 해요. 아빠는 바보가 아니에요. 급한 마음을 티 내면 금방 알아차릴 거라고요. 지금까지 잘 참아왔는데, 인제 와서 급해야 할 필요는 없어요.”소윤도 자기 잘못을 잘 알고 있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