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심장이 바닥에 떨어진 것 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거두려 했다.하지만 반희월은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의심의 눈초리로 최효원을 쳐다봤다.최효원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임경헌과 성혜인을 번갈아 가며 훑었다. 그러다 맞잡은 손에 시선이 멈췄다.그녀는 반희월을 알고 있었다. 어젯밤에도 반희월을 찾아가기 위해 자신의 월급으로 선물까지 준비했었다. 임경헌의 전화 때문에 무산되었지만 말이다.자신의 집안 사정을 생각하면 임경헌과 어울리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임경헌은 최효원에게 잘해주었고, 최효원도 그를 많이 좋아했다.그런데 임경헌의 어머니가 임경헌과 성혜인의 손을 잡고 있다니.이게 무슨 상황인가?‘페니는 이미 결혼했잖아.’반승제와도 미묘한 기류가 있는 성혜인이, 임경헌과도 사귀고 있다고?꼬일 대로 꼬인 관계에 최효원은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이런 여자를 친구라고 생각하다니, 처음부터 날 속인 거였어!’성혜인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반희월도 여자로서 여자에게 까탈스럽게 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말이. 성혜인이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그런 말을 뱉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최효원은 수치심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면서 눈물을 떨궜다.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성혜인의 진짜 모습을 다 폭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최효원은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임경헌의 뺨을 때렸다.“나쁜 새끼!”그녀는 입술을 꽉 물며 소리쳤다. 곧이어 성혜인에게 시선을 돌리며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렸다.성혜인은 그녀의 손을 막아내면서 반희월에게 붙잡혀 있던 손도 풀었다.최효원은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어떻게 욕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성혜인은 최효원의 심정이 이해됐다. 그렇지만 자신도 어쩌다 보니 이 일에 휘말리게 된 것이니 누군가에게 맞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그녀는 임경헌을 쳐다봤다. 최효원은 그의 여자친구다. 당연히 임경헌이 나서서 설명을 해야할 때였다.하지만 임경헌이 나서기도 전에 반희월이 차분한 목소리로
서러워진 최효원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어머님, 정말이에요. 페니와 반 대표님이...”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반희월이 말허리를 잘랐다.“그건 승제가 알아서 할 일이니 나에게 말해도 소용없다. 난 그저 집안 어른일 뿐, 사생활에 끼어들 생각 없어.”반희월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최효원에게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성혜인을 향했다.믿기지 않았다. 반승제를 길들일 능력이 있다니.반승제는 집에 있는 부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밖으로 나돌 애가 아니었다.하지만 병원에서 두 번이나 우연히 마주친 데다, 힘든 데도 꾹 참고 버티는 성혜인의 모습에 자신도 흔들렸었다.‘승제가 그런 술수에 넘어갈 리가 없지.’이 사회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살았는데, 반희월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알아서 하렴.”반희월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반희월이 떠나고 난 뒤, 방 안에는 적막만이 맴돌았다.한참이 지나 성혜인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사장님, 여자친구분 데리고 가세요.”최효원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는 임경헌은 그녀를 달랬다.“자기야, 집에 데려다줄게. 가서 전부 설명할게.”이 상황이 달갑지 않은 최효원은 성혜인을 대놓고 노려봤다.“페니 씨, 이런 사람인 줄 몰랐네요. 친구라 생각해서 어젯밤 열심히 간호도 했는데... 두고 봐요!”임경헌은 계속 최효원을 달래며 끌고 나가려 했다. 최효원은 그제야 잠시 마음을 내려놓았다.성혜인은 현관문을 닫고 나서도 머리가 계속 지끈거렸다.이 건물에는 층마다 가구 수가 두 개뿐이다. 그렇다는 건 같은 층에 성혜인과 최효원, 둘만 산다는 것이다. 최효원과 틀어져 버린 것으로 모자라 임남호와 얽혀 있는 여자도 이 동네에 살고 있었다. 성혜인은 너무나도 괴로웠다.오랫동안 찾고 찾아 전 재산을 털어 구한 집인데, 결국 남은 건 이런 문제뿐이었다.포레스트 펜션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반승제만 피하면 되니까.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 안 좋게 얽히면서 진
그 짧은 찰나, 성혜인은 차라리 반승제에게 솔직히 털어놓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정체를 밝히고 나면 이렇게 숨을 필요도 없고 임경헌에게 거짓말할 필요도 없으니까.하지만 반승제가 성씨 집안을 대하는 태도가 문득 떠올랐다. 게다가 디자이너로 협력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난감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게다가 반승제도 성혜인을 많이 돕지 않았는가.성혜인은 일을 벌일 자신이 없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력이 끌어당기는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다.마음도, 몸도 다 피곤했다.“아주머니, 몸이 좀 안 좋아서 밥은 건너뛰어야 할 것 같아요. 부르지 않으셔도 돼요.”유경아는 난감했다.“저... 사모님. 지난번에도 그 핑계를 댔었는데 대표님이 화를 내셨어요.”성혜인은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괜찮아요. 어차피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사이인데요, 뭘.”정확히 말하면, 성혜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반승제 ‘부인’과의 관계 말이다.성혜인이 반승제 부인의 신분으로 그에게 다가간다면 분명 싫어할 것이다.반승제는 부인이 자신의 삶에서 멀어지길 바라고 있다. 16억을 빌리던 그날도 반승제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이체를 해주었다. 스스로의 신분이 무엇인지 똑똑히 기억하라는 눈치와 함께.성혜인이 처음부터 반승제 부인의 신분으로 그를 만났다면, 반승제는 절대 그녀와 만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유경아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결국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저녁 무렵. 반승제는 별장으로 들어오면서 정장을 스탠드에 걸었다.방안에 향긋한 밥 냄새가 가득했다. 막 회의를 마치고 온 터라 피로감이 느껴졌다.유경아는 꾸물거리지 않고 급히 마중을 나왔다.“오셨어요?”반승제는 요즘 자신이 오고 싶을 때마다 포레스트에 오고 있다.할아버지도 검사하겠다고 갑자기 포레스트를 찾아오고는 했다. 그때마다 며칠 밤 이곳에 머물며 할아버지를 챙겼다.“저녁 준비해 뒀어요. 식사하세요.”유경아는 도우미들에게 음식을 내오라고 지시했다. 반승제는 자리에
성혜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때 계단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한 사람이 아니었다.곧이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개 키우는 사람이 있어요?”반승제다.성혜인은 급히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다시 닫았다.유경아가 아니라고 말하려던 그때, 그녀의 귀에도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반승제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다른 데로 보내요.”유경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반승제가 방 안으로 들어가고 난 후, 그녀는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했다.때마침 성혜인은 복도로 나와 유경아를 붙잡았다.“아주머니, 겨울이를 풀어뒀어요?”유경아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를 싸맸다.“제가 문을 안 잠갔나 봐요. 겨울이는 워낙 똑똑해서 제가 문을 안 잠그면 스스로 열고 나오더라고요.”유경아는 다급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사모님, 걱정 마세요. 제가 얼른 안에 넣어둘게요.”성혜인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녀는 굳게 닫힌 반승제의 방문을 바라보며 말했다.“어서요. 대표님이 알면 안 돼요.”유경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원으로 향했다.겨울이는 며칠 동안 성혜인이 새로 구입한 집에서 머물렀다. 작지 않은 집이었지만 그래도 이 드넓은 정원만큼 편할 수 없었다.그렇다 보니 포레스트 펜션으로 돌아오자마자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와 정원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던 것이다.유경아는 혹여 들킬세라 혼내지도 못하고 빠른 보폭으로 겨울이에게 다가가 옆으로 끌어당겼다.같은 시각. 반승제는 큰 창문 앞에 섰다. 강아지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개 짖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도우미가 강아지를 키우는 듯했다.그는 별 신경 쓰지 않고 뒤로 돌아 진행하던 회의를 이어갔다.몸을 돌리던 바로 그때, 유경아에게 끌려가는 겨울이가 창문 밖을 지나쳐 갔다.“대표님, 서천 쪽에서 계획안이 나왔습니다. 이전에 있던 몇몇 임원들이 새로운 복지를 제시하였습니다. 저희는 그곳을 관광지로 만들 생각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기획부에서 기존 프로젝트에 몇
다음 날 아침. 성혜인은 반승제가 밖에 나가고 나서야 아래층으로 내려왔다.그녀는 강민지와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민지야, 사람 좀 한 명 찾아 줘. 잠깐 내 남편인 척할 사람이 필요해.”마침 커피를 들이키던 강민지는 하마터면 다 뱉을 뻔했다.“콜록콜록...”그녀는 기침을 하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성혜인을 쳐다봤다.“아직까지도 반승제가 네 얼굴을 모르는 거야?”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으로 앞에 있던 커피잔을 쥐었다.그녀에게 반승제는 대표이자 자본주였다.하지만 매일 밤 그와 함께 보냈던 그날 밤이 떠오르는 걸 보면,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너무 격렬해서 조금 다친 것만 빼면 반승제의 테크닉은 사실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게다가 30초 정도의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목구멍에서 뻗어 나온 갈고리처럼 자꾸만 심장을 후벼 팠다.성혜인은 계속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억눌렀기 때문에 반승제의 눈빛을 봐도 아무렇지 않았다.네이처 빌리지의 공사를 끝내고 그 여자도 귀국해 반승제가 반태승에게 제대로 해명하고 나면 성혜인의 임무는 끝이 난다.성혜인은 반승제와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녀의 마음속에도 비밀이 있으니까.강민지는 한동안 놀란 얼굴로 넋이 나가 있었다. 성혜인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닫고 난 후, 머릿속으로 후보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성혜인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고급스러운 강민지를 쳐다봤다. 손톱까지도 매일 전문가의 케어를 받는 데다 비싼 액세서리와 가방까지... 어떻게 봐도 일반 가정의 딸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부잣집 딸처럼 보였다.하지만 신예준은 강민지와 사귀고 나서 지금까지 강민지가 계속 서비스업에서 일하는 직원으로 알고 있다. 너무 순진하다.성혜인과 강민지는 자란 환경이 다르다. 성혜인은 학교에서 그런 어려움을 겪고 난 후 직장을 찾고 나서도 온갖 사람들을 다 마주해야 했다. 그렇다 보니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높은 편이다.이와 반대로 강민지는 상아탑에서 나온 공주 같다.
신예준은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어헤쳤다. 그는 껄렁한 모습으로 담뱃재를 툭툭 털며 테이블에 놓인 돈을 자기 앞으로 끌어왔다.“운이 좋았던 거지.”그가 말하는 ‘운’은 이번 도박판에 대한 답일까, 아니면 남자의 질문에 대한 답일까.신예준의 입술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적당히 훤칠한 외모는 ‘잘생쁨’, 그 자체였다.강민지 앞에서 보여주던 순진하고 깔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카리스마가 넘쳤다.“운 때문이겠어? 저 잘생긴 얼굴 덕이지. 얼굴로 부잣집 딸을 꾀었으니 망정이지, 도박해서 딴 돈으로 의료비에 보탤 수나 있겠어?”테이블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물이 담긴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눌러 버리자 누런 찌꺼기가 새어 나왔다.신예준은 이런 광경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포커가 끝난 후, 돈을 몇 장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뒀다.“덕분에 커피값 생겼네. 나 간다. 병원에서 돈 내라 재촉해서 말이야.”“예준아, 부잣집 딸도 꼬셨으면서 돈이 모자란 게 말이 돼? 병원 가기 전에, 우리 형님도 계속 재촉해서 말이야. 오늘 이긴 돈도 빚진 사채에 비하면 어림도 없지.”“형, 이걸로 담배나 사. 꼭 갚을 테니까 형님 쪽에 잘 얘기해 줘.”‘형’이라는 남자는 돈을 받더니 안색이 한층 밝아졌다.“역시 사람이 됨됨이가 됐어. 언제 한 번 그 부잣집 여자친구 데리고 와. 금수저 아가씨는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사람들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낄낄 웃으며 바닥에 나뒹구는 물병과 쥐포 봉투 껍데기를 발로 찼다.신예준은 픽 웃으며 문을 열고 나갔다. 그때, 그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때마침 강민지에게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며 따뜻한 목소리로 전화 받았다.“응, 민지야.”“예준 씨, 지난번에 만났던 내 친구 기억해? 성혜인이라는 친구. 지금 가짜 남편 역할 해줄 남자를 찾고 있는데, 설명하기에는 좀 복잡해. 아무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남편이라고 말만 해주면 돼. 돈이 꽤 있는 친구라 사례도 넉넉히 할 거
서민규는 더 이상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예준이 꺼낸 제안이 신경 쓰였다.‘600만 원이라고? 그것도 얼굴만 비췄는데?’서민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부잣집 아가씨를 만날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만 신예준 만큼 외모가 뛰어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봐줄 리가 없었다.“예준아, 그 일, 정말이야?”신예준은 계단에 걸터앉으며 긴 다리를 쭉 펴고 뒤로 몸을 기댔다. 남자인 서민규도 질투가 날 정도로 훤칠한 외형이었다. 다이아몬드 회사의 딸을 꼬실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게다가 강민지는 명실상부한 부잣집 외동딸인데, 신예준이 잘만 보이면 강씨 집안의 주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정말이지. 강민지를 속이는 게 얼마나 쉬운지 너도 알잖아.”신예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런데 그 친구는 꼬시기 좀 까다로울 거야. 웬만하면 600만 원만 받고 빠져.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서민규는 돈이 필요하기도 했기 때문에 한참을 고심하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한편, 강민지와 성혜인은 줄곧 카페에 앉아 그들을 기다렸다.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신예준이 서민규와 함께 카페로 들어섰다.성혜인은 서민규의 얼굴을 바라봤다. 평범한 얼굴에 이쪽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계획은 순조롭게 정해졌다. 인색하지 않은 성혜인은 곧바로 600만 원을 이체해 주며 살고 있는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서민규는 ‘로즈가든’이라는 말에 움찔거렸다.그곳은 그의 회사 사장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수십억에 호가하는 집이라고 들었다.‘역시 금수저는 친구도 금수저구나.’서민규는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졌다. 하지만 신예준의 부탁 때문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혜인 씨, 걱정 마요. 제가 남편 역할 잘 해낼게요. 메시지 보내면 바로 찾아오고요.”“혜인 말고 페니라 불러줘요.”성혜인은 서민규의 회사를 물어보았다. 마침 그녀가 협력하고 있는 BK 사였다.하지만 서민규는 일개 직원에 불과했고, 성혜인과 소통하는 사람들은 모두 임원
성혜인의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공급업체들과 모두 상의를 마치고 내일 서천으로 가기 위해 막 준비하던 참이었다. 그때, 몇몇 협력사에서 머뭇거리며 전화를 걸어왔다.“페니 씨, 정말 죄송합니다. 페니 씨와 협력하지 말라는 통보가 갑자기 내려와서요. 다른 회사를 찾아봐야 할 것 같네요.”“하지만...”성혜인은 구체적으로 묻고 싶었지만, 상대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네 통이나 다시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성혜인은 제자리에 앉아 미간을 구겼다.신이한 때문에 조희준과의 협력이 파기된 적이 있었다. 조희준이 아직까지 성혜인을 찾아다니고 있지만 그녀는 만날 생각이 없었다. 경찰이 알아서 처리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신이한까지 처리하고 BK 사도 그녀에게 넘어온 상황이니 원래대로라면 순조롭게 잘 흘러가야 할 것이다. 며칠 동안 공급업체와도 대화가 아주 잘 통했는데,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란 말인가?‘어디서 잘못된 거지?’성혜인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회사가 있는 단톡방을 열었다. 양한겸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냐고 물어왔다.성혜인은 답장을 보냈다.「제가요?」그러자 양한겸이 개인톡을 보냈다.「회사에서 주문 철회된 디자이너들이 꽤 있어. 사장님이 무슨 잘못을 했기 때문이라면서 말이야. 우리 회사에서 나가줬으면 좋겠어. 네이처 빌리지 건은 우리에게 넘기고.」신이한 때보다 사안이 더 심각했다. 이미 회사까지 악영향이 끼친 상황이었다.원래 회사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상황에 성혜인 때문에 철회까지 되었으니 이미 볼멘소리가 나오고도 남았을 것이다.「한지은 씨도 해고했어. 경찰에 붙잡혀 들어가서 큰돈을 물어야 한다고 들어서.」그제야 머릿속에 한 사람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반희월이다.최근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 만한 사람은 반희월뿐이다.지금 반희월의 마음속에서 성혜인은 반승제와 임경헌을 갖고 논 여우일 것이다.반희월은 아들에게 늘 엄격하게 대했고, 반승제에게도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니 두 남자가 한 디자이너 손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