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예준은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어헤쳤다. 그는 껄렁한 모습으로 담뱃재를 툭툭 털며 테이블에 놓인 돈을 자기 앞으로 끌어왔다.“운이 좋았던 거지.”그가 말하는 ‘운’은 이번 도박판에 대한 답일까, 아니면 남자의 질문에 대한 답일까.신예준의 입술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적당히 훤칠한 외모는 ‘잘생쁨’, 그 자체였다.강민지 앞에서 보여주던 순진하고 깔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카리스마가 넘쳤다.“운 때문이겠어? 저 잘생긴 얼굴 덕이지. 얼굴로 부잣집 딸을 꾀었으니 망정이지, 도박해서 딴 돈으로 의료비에 보탤 수나 있겠어?”테이블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물이 담긴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눌러 버리자 누런 찌꺼기가 새어 나왔다.신예준은 이런 광경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포커가 끝난 후, 돈을 몇 장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뒀다.“덕분에 커피값 생겼네. 나 간다. 병원에서 돈 내라 재촉해서 말이야.”“예준아, 부잣집 딸도 꼬셨으면서 돈이 모자란 게 말이 돼? 병원 가기 전에, 우리 형님도 계속 재촉해서 말이야. 오늘 이긴 돈도 빚진 사채에 비하면 어림도 없지.”“형, 이걸로 담배나 사. 꼭 갚을 테니까 형님 쪽에 잘 얘기해 줘.”‘형’이라는 남자는 돈을 받더니 안색이 한층 밝아졌다.“역시 사람이 됨됨이가 됐어. 언제 한 번 그 부잣집 여자친구 데리고 와. 금수저 아가씨는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사람들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낄낄 웃으며 바닥에 나뒹구는 물병과 쥐포 봉투 껍데기를 발로 찼다.신예준은 픽 웃으며 문을 열고 나갔다. 그때, 그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때마침 강민지에게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며 따뜻한 목소리로 전화 받았다.“응, 민지야.”“예준 씨, 지난번에 만났던 내 친구 기억해? 성혜인이라는 친구. 지금 가짜 남편 역할 해줄 남자를 찾고 있는데, 설명하기에는 좀 복잡해. 아무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남편이라고 말만 해주면 돼. 돈이 꽤 있는 친구라 사례도 넉넉히 할 거
서민규는 더 이상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예준이 꺼낸 제안이 신경 쓰였다.‘600만 원이라고? 그것도 얼굴만 비췄는데?’서민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부잣집 아가씨를 만날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만 신예준 만큼 외모가 뛰어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봐줄 리가 없었다.“예준아, 그 일, 정말이야?”신예준은 계단에 걸터앉으며 긴 다리를 쭉 펴고 뒤로 몸을 기댔다. 남자인 서민규도 질투가 날 정도로 훤칠한 외형이었다. 다이아몬드 회사의 딸을 꼬실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게다가 강민지는 명실상부한 부잣집 외동딸인데, 신예준이 잘만 보이면 강씨 집안의 주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정말이지. 강민지를 속이는 게 얼마나 쉬운지 너도 알잖아.”신예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런데 그 친구는 꼬시기 좀 까다로울 거야. 웬만하면 600만 원만 받고 빠져.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서민규는 돈이 필요하기도 했기 때문에 한참을 고심하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한편, 강민지와 성혜인은 줄곧 카페에 앉아 그들을 기다렸다.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신예준이 서민규와 함께 카페로 들어섰다.성혜인은 서민규의 얼굴을 바라봤다. 평범한 얼굴에 이쪽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계획은 순조롭게 정해졌다. 인색하지 않은 성혜인은 곧바로 600만 원을 이체해 주며 살고 있는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서민규는 ‘로즈가든’이라는 말에 움찔거렸다.그곳은 그의 회사 사장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수십억에 호가하는 집이라고 들었다.‘역시 금수저는 친구도 금수저구나.’서민규는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졌다. 하지만 신예준의 부탁 때문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혜인 씨, 걱정 마요. 제가 남편 역할 잘 해낼게요. 메시지 보내면 바로 찾아오고요.”“혜인 말고 페니라 불러줘요.”성혜인은 서민규의 회사를 물어보았다. 마침 그녀가 협력하고 있는 BK 사였다.하지만 서민규는 일개 직원에 불과했고, 성혜인과 소통하는 사람들은 모두 임원
성혜인의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공급업체들과 모두 상의를 마치고 내일 서천으로 가기 위해 막 준비하던 참이었다. 그때, 몇몇 협력사에서 머뭇거리며 전화를 걸어왔다.“페니 씨, 정말 죄송합니다. 페니 씨와 협력하지 말라는 통보가 갑자기 내려와서요. 다른 회사를 찾아봐야 할 것 같네요.”“하지만...”성혜인은 구체적으로 묻고 싶었지만, 상대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네 통이나 다시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성혜인은 제자리에 앉아 미간을 구겼다.신이한 때문에 조희준과의 협력이 파기된 적이 있었다. 조희준이 아직까지 성혜인을 찾아다니고 있지만 그녀는 만날 생각이 없었다. 경찰이 알아서 처리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신이한까지 처리하고 BK 사도 그녀에게 넘어온 상황이니 원래대로라면 순조롭게 잘 흘러가야 할 것이다. 며칠 동안 공급업체와도 대화가 아주 잘 통했는데,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란 말인가?‘어디서 잘못된 거지?’성혜인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회사가 있는 단톡방을 열었다. 양한겸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냐고 물어왔다.성혜인은 답장을 보냈다.「제가요?」그러자 양한겸이 개인톡을 보냈다.「회사에서 주문 철회된 디자이너들이 꽤 있어. 사장님이 무슨 잘못을 했기 때문이라면서 말이야. 우리 회사에서 나가줬으면 좋겠어. 네이처 빌리지 건은 우리에게 넘기고.」신이한 때보다 사안이 더 심각했다. 이미 회사까지 악영향이 끼친 상황이었다.원래 회사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상황에 성혜인 때문에 철회까지 되었으니 이미 볼멘소리가 나오고도 남았을 것이다.「한지은 씨도 해고했어. 경찰에 붙잡혀 들어가서 큰돈을 물어야 한다고 들어서.」그제야 머릿속에 한 사람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반희월이다.최근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 만한 사람은 반희월뿐이다.지금 반희월의 마음속에서 성혜인은 반승제와 임경헌을 갖고 논 여우일 것이다.반희월은 아들에게 늘 엄격하게 대했고, 반승제에게도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니 두 남자가 한 디자이너 손
이 층에는 더 이상 살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 이 층에 있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라는 것이다.천장의 조명 때문에 성혜인의 피부가 유독 하얗게 보였다. 눈동자도 어느 때보다 밝게 반짝이고 있었다. 얼마나 여기에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요. 대표님, 저 좀 들어가도 될까요?”반승제은 눈썹을 들썩거렸다. 야밤에 호텔 문 앞까지 찾아와 기다리다니. 예전에는 그림을 그려준 적도 있었고 말이다.그는 거절할 생각이었다. 서로 거리를 두어야만 했으니까.성혜인은 반승제가 거절하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게다가 이번 일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반희월이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제대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반승제는 카드키로 문을 열었다.바로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협력업체에서 온 전화였다.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이었고 미리 공급업체들과도 이야기를 끝내둔 상황이었지만, 거의 모든 공급업체가 협력을 취소했다.회사도 큰 타격을 본 상황이다.반희월은 반씨 집안인 사람인 데다 업계에서 입김이 센 사람이기 때문에 임경헌도 엄하게 관리하고 있었다.성혜인은 보온 도시락을 든 채 소파에 앉았다.반승제는 정장 외투를 벗고 셔츠 윗단추를 풀어헤치자 쇄골이 드러났다.반승제는 언제든 사람을 홀릴 수 있는 외모였다.성혜인은 시선을 피했다. 그때 그 그림이 떠올랐다. 디테일을 더 추가할 수 있을 것 같았다.“무슨 일인지 말해.”반승제는 천천히 셔츠 소매를 접어 올렸다. 골격 잡힌 손목이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성혜인 건너편에 앉았다.가장 밝은 조명을 켜지 않아 노란빛이 맴돌았다. 술 냄새까지 은은하게 퍼지니 성혜인은 눈앞이 아찔했다.마치 성혜인이 술을 마신 것 같은 기분이었다.남자든 여자든 분위기에 취하면 정신을 차리기 어렵다.반승제는 조금 상기된 그녀의 시선을 느꼈다.“페니?”성혜인은 정신을 다잡고 보온 도시락을 티테이블 위에 올려놨다.“대표님, 상처는 다 나으셨어요?”반승제 손에 난 상처에 대해 하
불러보았지만 그녀 앞의 남자는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 잠에 든 것 같았다. 성혜인은 한숨을 돌렸다. 그녀를 무시한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시당한 것이었으면 매우 어색해졌을 것이다. 반승제가 잠에 들었으니 오늘 일을 해결하기는 틀린 것 같았다. 성혜인은 몸을 일으켜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그의 열린 셔츠에 시선이 닿았다. 담요라도 덮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요를 덮어주려 허리를 숙인 순간, 반승제의 속눈썹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두 사람의 거리는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얼굴을 마주한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지금은 느낌이 달랐다. 그러다 뜨거운 감촉이 입술 끝에 닿자 성혜인은 동공이 커지고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입술 끝에 닿았던 감촉이 점점 입술 안쪽을 파고들려고 했다. 곧 이어 반승제가 성혜인의 입술을 완전히 머금었다.마치 촉수가 그녀의 심장을 움켜쥔 것 같았다. 성혜인은 놀라서 허리를 곧게 폈다. 반승제는 소파에 기댄 채 다시 눈을 감았다. 마치 조금 전 일어난 일이 꿈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마도 술기운 때문인지 성혜인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재빨리 담요를 반승제 몸 위에 덮어준 채 황급하게 떠나버렸다. 문이 닫히던 순간, 반승제는 술기운에 약간 풀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꿈속인 줄 알고 다시 눈을 감았다. 성혜인은 호텔 밖으로 뛰쳐나와 차가운 밤바람을 조금 쐬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다. 손을 든 성혜인은 가볍게 입술 끝을 만졌다. 저번에 게임에서 키스를 30초 했었다. 이번에는 그저 4, 5초 정도 였을뿐인데 저번보다 더욱 생생한 감촉이 오래도록 남았다. 성혜인은 이마를 짚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그저 반승제가 내일 깨어났을 때 이 일을 기억하지 말기를 빌었다. 성혜인은 단지 담요를 덮어주고 싶었을 뿐인데 술에 취한 반승제가 성혜인이 자기를 덮쳤다고 생각할까 봐 겁이 났다. 아직
“여사님, 이건 제가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반희월을 그대로 휴대폰을 꺼내어 반태승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승제 아내의 번호 좀 주시겠어요? 일이 있어서요.”반희월을 반승제의 아내를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반태승이 그녀에 대해 칭찬을 마다하지 않으니 현명한 여자일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반승제의 옆에서 거슬리는 사람이 나타나면 아내가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페니가 사무실에 들어오게 허락한 반승제도 바람을 인정한 것으로 잘한 것은 아니었다. 반태승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반승제의 행동을 바로잡아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결혼한 사람이니. 반승제가 원나잇을 직접 거론하기 전까지, 반희월은 반승제와 문란함을 연관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문란하더라도 윤단미와 문란하게 놀 줄 알았다. 반희월은 윤단미를 알았기에 윤단미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았다. 어떻던지 여기저기 남자를 홀리고 다니는 디자이너보다 나았다.반태승은 무슨 일인지 몰랐다. 반씨 가문의 그 누구도 성혜인의 번호를 먼저 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반희월이 이런 것을 묻는 것도 처음이었고. '승제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혹시 바람? 반태승의 눈을 가늘게 떴다. 지나온 세월이 있으니 순식간에 머릿속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몇 개 떠올랐다. “희월아, 승제가 밖으로 나돌고 있니?”반희월을 그만 말이 턱 막혔다. 반태승이 이렇게 빨리 눈치챌지 몰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리고 그 짧은 정적에서 반태승도 반승제가 바람을 피우다가 잡혔다는 것을 대강 알 수 있었다. 반희월은 그래도 웃어른으로서 성혜인을 데리고 반승제에게 가서 경고를 해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에 혜인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반태승은 화가 나 얼굴이 벌게져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그 새끼 당장 내 앞으로 데려와. 지금 뭘 하고 있든지 반 시간 안으로 내 앞에 끌고 와! 콜록콜록.”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반태승은 순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반태승이 이렇게 빨
“외투부터 벗어!”반태승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반승제는 반태승이 지금 그에게 분을 풀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반태승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그 성혜인이라는 여자를 두고 밖에서 하룻밤을 보낸 여자가 있으니. 집사가 반승제의 외투를 건네받았다. 반승제는 얇은 와이셔츠만 입은 채 꿇어앉아 있었다. 철썩. 채찍이 반승제의 등에 내리꽂혔다. 젊을 때 군인들과 잘 지내던 반태승은 힘이 엄청나게 셌다. 지금은 몸이 성치 않지만 채찍을 휘두르는 힘은 그대로였다. 반승제는 아파서 미간을 확 찌푸렸다. 피부가 벗겨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다른 사람이 밖에서 뭘 하든 상관이 없지만, 넌 혜인이한테 그러면 안 되지! 그렇게 훌륭한 애가 너랑 결혼하다니, 그 아이의 인생을 망쳤어!”채찍은 계속해서 반승제의 등에 찍혔다. 반승제의 등은 채찍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매우 흉측해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던 반희월은 그 모습을 보고 놀라서 반태승을 말리려고 했다. “아버지.”“닥쳐라!”반태승의 얼굴은 시뻘게져서 무섭게 반희월을 노려보았다. “누구라도 이 자식을 용서해 달라는 말을 꺼내기만 해봐라.”반씨 가문에서 반태승의 권력이 가장 셌다. 반씨 집안에 여러 친척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태승은 BH그룹을 반승제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그 정도로 반승제를 아꼈다. 그의 혼인에도 직접 신경 쓸 정도로. 철썩. 철썩. 두 번의 채찍질이 또 반승제의 등에 내리꽂혔다. 흰 와이셔츠는 피로 물들었지만 반승제는 여전히 꼿꼿이 허리를 세웠다. 반태승의 숨소리가 거칠어진 것을 듣고 인제 와서 얘기할 수도 없었다. 예를 들면 반태승이 주선해 준 성혜인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반태승이 성혜인의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하면 지금 당장 이혼을 시키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얘기를 꺼내면 반태승이 그대로 뒷목을 잡고 쓰러질지도 몰랐다. 반승제는 대략 반 시간 정도 채찍질을 당했다. 그제야 반태승은
반씨 저택을 나서자 반희월이 반승제를 따라와 한숨을 내쉬었다. “승제야, 네 할아버지가 이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다. 미안해.”“고모, 괜찮아요. 이건 저랑 페니의 일이에요.”페니 얘기를 듣자 반희월의 표정이 식어버렸다.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채찍질도 당했으니 페니 양과는 인제 그만 헤어져라. 아니면 네 할아버지가 더 화가 나면 페니 양한테도 불똥이 튈지도 몰라.”“고모,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반희월을 알고 있었다. 더 얘기했다가는 복잡할 것 같아서 그저 입을 다물었다. 반승제는 차에 올라탔지만 등을 대지 못하고 앉아있었다. 등이 아프긴 했지만 꽤 참을 만했다. 하지만 이때 성혜인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 대표님, 저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오늘 밤 오시나요?”반승제는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잡고 있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삐질삐질 나고 있었고 입술도 창백했다. “응.”담담한 말투로 대답한 그가 전화를 끊었다. 성혜인도 안심하고 호텔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십여 분이 지난 후, 반승제가 엘리베이터 입구에 나타났다. 성혜인은 한숨을 돌리고 그를 향해 인사를 했다. 그리고 찾아온 이유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 “반 대표님, 제가 말하려는 건 반희월 여사님과 관계된 일입니다.”반승제는 그녀 앞에 가서 그녀를 보지도 않고 카드로 문을 열었다. 성혜인은 그를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옅은 피 냄새를 맡은 그녀가 눈썹을 찌푸렸다. '반승제의 상처는 이미 나았을 텐데 피 냄새는 어디서 나는 거지?'반승제가 방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외투를 벗으려다가 성혜인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멈칫하더니 그대로 소파에 앉아버렸다. “고모가 네 계약들을 망쳐놨다?”어젯밤의 일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키스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성혜인은 별로 큰 감흥이 없었다. 그저 반승제가 그녀를 술에 취한 사람을 상대로 키스하는 변태로 볼까 봐 걱정될 뿐이었다. 하지만 반승제가 먼저 얘기하지 않는데 그녀가 먼저 묻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