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머리가 좋지 않았던 서수연은 다른 사람의 도발을 견디지 못했다.‘친한’ 친구들의 말을 들은 그녀는 더욱 악랄하게 굴며 장하리의 머리채를 잡고 벽에 내리치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누군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매번 이런 식으로 마음껏 괴롭히기도 전에 화장실에 사람이 왔다.서수연은 눈을 흘기며 장하리의 머리채를 놓아주었다.“운 좋은 줄 알아. 다시는 우리 오빠한테 허튼수작 부리지 마. 너같이 천한 년이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말을 마친 서수연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친한’ 친구들을 바라보았다.“가자.”“수연아, 그냥 이렇게 놓아 줄 거야?”“누가 왔잖아.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우리한테도 영향이 안 좋아.”어쨌든 장하리는 지금 S.M을 대표하고 있었으며 이 회사는 업계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기에 그녀와 몇몇 친구들이 장하리를 괴롭히는 일이 들통난다면 사람들 입에 거론될 수밖에 없었다.물론 서씨 가문이 이런 여론을 잠재우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서수연은 오빠가 다시 장하리를 걱정하지 않을까 근심했다. 그렇게 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훨씬 많을 테니까.차라리 지금처럼 매번 화장실로 끌고 가서 장하리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제원을 떠날 때까지 지독하게 괴롭히는 게 더 나았다.생각을 마친 서수연이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녀의 미래 새언니는 당연히 제원에서 제일 잘나가는 여성이어야 하는데 장하리가 가당키나 할까? 이깟 여자가 뭐라고.그녀들이 문을 열고 나갈 때 장하리는 이미 칸막이 안으로 들어왔다. 익숙한 듯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회사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이런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그녀는 가방에 여분의 드레스를 준비해 아무도 흠뻑 젖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없도록 했다.휴지로 목에 묻은 물기를 조금씩 닦아내고 갈아입은 드레스는 쓰레기통에 버린 다음 작은 거울을 꺼내 다시 화장을 고쳤다. 더 이상 얼굴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밖으로 나갔다.하지만
장하리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두 떨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심지어 서주혁을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붓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너 눈이 먼 거 아니냐고. 어디를 봐서 내가 서수연을 건드린 거로 보이냐고.그러나 장하리는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사업 면에서는 여유만만한 그녀였지만 유독 감정 면에서는 서툴렀다.하지만 서주혁은 그녀의 처량한 모습은 보지 못했다. 서주혁의 눈에 비친 장하리는 여전히 자신이 기억 상실한 틈을 타 그를 속여 잠자리를 가진 여자에 불과했다.더는 여기서 무의미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던 서주혁이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장하리를 앞질러 가며 한마디를 남겼다.“더 이상 서씨 가문 사람들을 귀찮게 하지 말고 인간으로서의 품위도 좀 지켜.”이 말에 담긴 의미는 분명, 장하리의 스토킹에 가까웠던 십여 통의 성가신 전화를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장하리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의 모습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다가 천천히 벽에 기댔다.눈물이 또 흘러내려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간 장하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았다.최근 계속 야근하며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고 살도 많이 빠졌다. 뺨을 몇 대 맞은 탓인지 얼굴은 약간 부어 있었고 말할 때 입꼬리도 아팠다.깊은숨을 들이마신 장하리는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몸을 바짝 굳힌 채로 거울에 비친 강민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강민지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의 드레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새 드레스를 갈아입은 거예요?”장하리와 강민지는 사실 친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장하리는 허리를 곧게 펴고 매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 민지 씨.”화장실의 조명은 바깥보다 훨씬 밝았다. 장하리의 얼굴이 부은 걸 단번에 알아본 강민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누가 때렸어요?”성혜인은 강민지에게 장하리를 부탁했었다. 하지만 지금 장하리가 저녁 파티에서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다. 어떤 간 큰 놈이 감히 이딴 짓을 했을까?“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젯밤에 음식을 잘 못 먹어서 알레르기
서주혁은 장하리의 우는 모습을 보자 짜증이 밀려왔다. 이 여자는 왜 시도 때도 없이 계속 눈앞에 나타난단 말인가. 게다가 강민지의 터무니없는 지적을 들으니 인내심이 바닥나 버렸다.“최근 강씨 가문에 무슨 사건이 터지지 않았어요? 민지 씨는 이런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 일에 참견할 마음이 드나 봐요.”강민지는 잠깐 멈칫하더니 더욱 매섭게 서주혁을 쏘아보았다.“전 지금 하리 씨 일에 대해 말하고 있잖아요. 주혁 씨는 쓰레기 같은 짓을 하고도 인정하지 않는 건가요?”살벌한 눈빛과 반대로 강민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제가 하리 씨를 알고 지낸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하리 씨가 감정 표현이 서툰 사람이라는 건 알거든요. 절대 먼저 다가가서 누구를 건드릴 성격이 아니란 말이죠.”그 말속에 담긴 의미는 ‘네가 먼저 건드린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이제 와서 책임을 회피하냐?’라는 말이다. 너무 어처구니없어 웃음만 났다. 서주혁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고 차가웠다.“그렇다고 잤던 여자들을 다 책임질 수는 없잖아요.”서주혁은 익숙하다는 듯이 카드를 꺼내 장하리의 앞에 내밀었다.“6억이야.”이 액수는 정말 굴욕적이었다. 애초에 장하리가 자발적으로 침대에 기어들어 갔을 때 요구한 금액이었다.눈물이 순식간에 멈춘 장하리가 고개를 들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주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가에는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다. 그저 귀찮음과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떨쳐버리고 싶은 조급함뿐이었다.많은 사람이 모인 공개적인 장소에서 서주혁이 불쑥 카드를 내밀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장하리는 손끝이 떨려왔다.너무 기막혀 그 자리에 얼어붙은 강민지가 정신을 차리고 카드를 집어 서주혁의 얼굴에 던지려던 찰나 온시환이 얼른 그녀를 끌어당기더니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자자, 다들 흩어지세요.”이윽고 온시환은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민지 씨도 그 성격 좀 죽여요. 주혁이 말이 틀리지도 않았잖아요. 지금 강씨 가문 일을 해결하려면 당신도 도움이 필요할 때예요.”그 말에
서주혁의 얼굴에는 자국이 남아있었다. 장하리가 힘이 없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맞은 뺨이 아직도 얼얼했다. 온시환의 말을 무시한 채 서주혁은 장하리의 손목을 꽉 움켜잡고 곧바로 연회장 밖으로 끌고 나갔다. 강민지가 뒤쫓아가려 했지만 온시환에게 제지당했다.“민지 씨, 두 사람 일에 끼어들지 마세요.”“지금 뭐 하시는 거죠?”온시환은 이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수년 동안 주혁이가 여자한테 맞는 걸 본 적 있어요? 서씨 가문 어르신들도 감히 주혁이 앞에서는 함부로 못 해요. 지금 하리 씨한테 뺨 맞아서 정말 화났을 거예요. 그래도 선은 지키는 놈이라 적어도 여자를 때리진 않아요.”강민지가 냉소를 흘렸다.“남자는 다 거기서 거기 아니에요. 좋은 놈이 하나도 없어.”말을 마친 강민지는 멈칫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온시환은 쟁반에 담긴 와인을 가져와 한 모금 마셨다.“그건 민지 씨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우리 남자들은 항상 마음 가는 대로 행동 하니까요.”강민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별장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한편 장하리는 서주혁에게 끌려 정원으로 왔다. “놓으라고요!”장하리는 서주혁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벽으로 밀쳐졌다. 허리에 심한 통증이 밀려옴과 동시에 서주혁이 어깨를 짓눌렀다. 급작스레 턱을 잡힌 장하리는 고개가 위로 들려진 채 서주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온 힘을 다해 때린 서주혁의 뺨이 살짝 부어오른 걸 보니 약간의 통쾌함마저 들었다. 아마도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장하리였다.장하리의 얼굴을 응시하던 서주혁은 문득 침대에서 그녀를 괴롭히던 장면이 떠올랐다. 처음에 그녀는 남자와 그렇게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항상 토하기 일쑤였다.하지만 서주혁은 미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그의 숨겨진 비밀이 은근히 빛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또한 여자를 혐오하기 때문에 입술이 살짝만 닿아도 역겨워 미칠 지경이었으니까.그래서 처음에는 장하리와 거의 키스하지 않았지만 기억을 잃은 그 짧은
이 순간을 서수연은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온씨 가문 딸의 자랑을 늘어놓았다.“넌 가엾게도 만날 자격조차 없겠네. 그분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이제 곧 귀국할 거야. 너랑은 완전히 다른 세상 사람이지. 듣기로 너 지잡대 출신이라며. 이 자리까지 올라오느라 몸을 얼마나 함부로 굴렸을지 안 봐도 뻔해. ”자신을 쫓아 온 사람이 서수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장하리는 또다시 조롱당할 것임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절뚝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서수연은 냉소를 흘리며 그녀의 뒷모습을 찍어 단톡방에 보내고 악담을 퍼붓기 시작했다.[이년 꼴 좀 봐. 절뚝거리는 게 꼭 거지 같아.][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 감히 손을 올리다니.][정말 거지 같네. 참, 수연아. 너희 오빠가 온씨 가문 아가씨와 약혼한다며? 설마 온시환 때문은 아니겠지?]막대한 자산을 소유하고 있는 온씨 가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 바로 그 아가씨였다. 최고로 손꼽힐 정도였으며 장하리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서수연은 계속 단통박에 문자를 보냈다.[우리 오빠도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됐지. 집에서도 계속 재촉하시거든. 온씨 가문 그분 귀국한다고 하지 않았어? 아마 양쪽 부모님께서도 얘기를 마치신 것 같아.]단톡방에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사심을 품고 있었다. 누가 서주혁과 결혼하고 싶지 않을까.하지만 온시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서주혁이 기꺼이 온씨 가문 여자와 결혼하려는 이유는 아마도 온시환의 얼굴을 봐서일 것이다.사실 온씨 가문의 딸과 나이대가 비슷한 재벌 집 딸이 꽤 많았다. 서주혁에게 있어 누구와 결혼하든 다 똑같을 텐데 하필이면 온씨 가문을 선택했다.단톡방에 있던 여자들은 축하한다는 말 외에는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한편 차에 올라탄 장하리는 발목이 너무 심하게 부어 운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차에 앉아 멀리에 있는 불빛을 바라보며 자신과 서주혁은 정말 다른 세상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아무리 애를 써서 섞이려고 노력해도 이 업계의
지금은 답장할 기력이 별로 없었지만 협력 업체일까 봐 걱정되었다.[네.][전 온시아라고 해요. 수연이한테서 듣기로 당신이 서주혁한테 매달린다면 서요?]온시아가 누군지 몰랐지만 오늘 서수연이 했던 말이 떠오르며 장하리는 이 여자가 서주혁과 정략 결혼할 여자라는 것을 짐작했다.장하리는 놀라서 손끝이 떨리더니 순간 자신감이 바닥났다.[당신과 서주혁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상관 없지만 서씨 가문에 시집갈 사람은 나예요. 양가 부모님께서도 결혼에 관한 얘기를 마치셨고요. 당신에게 여전히 수치심이 남아있다면 서주혁에게서 떨어지길 바라요. 두 분은 같은 세계 사람이 아니에요.]서주혁을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다들 장하리에게 두 사람이 같은 세계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전에는 믿지 않으려 했지만 이제 서주혁의 진짜 여자 친구까지 찾아오자 그야말로 수치스러웠다.장하리는 답장을 보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신 온시아의 인스타에 들어가 보았다. 다른 재벌 집 딸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진이 해외 유학 시절 찍은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때로는 호텔, 명품 가방 그리고 언뜻 보기에도 매우 부티가 나는 사진들이었다. 일부러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마도 이건 그녀의 일상 같았다.그중에는 온시아가 하버드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사진도 있고,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대회에 참가하는 영상도 있었다.장하리는 마치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조용히 하나씩 아래로 스크롤 했다. 그녀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30분 동안 중독성 있는 스크롤을 한 장하리가 한 사진에서 멈췄다.그날은 방우찬과 헤어진 날이었다. 장하리는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그녀가 산 아파트가 돌연 공사가 중단되자 방우찬이 그녀에게 돈을 갚으라고 해서 애타게 돈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온시아의 그날 게시물 내용은 이러했다.[저를 성에서 살 수 있게 해주신 엄마 아빠께 감사드려요.] 이것은 수천 평에 달하는 면적을 차지하는 해외에 있는 성이었다. 영상에서 보여주는 부는 아
플로리아. 국내에 전화를 걸고 나서부터 성혜인은 이틀 연속으로 장하리의 꿈을 꿨다. 그 후 장하리에게 두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의 말투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 그제야 성혜인은 마음을 놓고 자기 일에 집중했다.그러나 여전히 배현우는 찾지 못했고, 어젯밤 설씨 가문에서는 몇 명의 의사를 불러 설의종에게 응급조치를 취했다. 설의종의 상황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성혜인과 반승제는 현재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국제 조직에서도 아직 연구 기지의 위치를 찾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혜인은 다소 초조해졌다.“제가 직접 K에게 연락하고 싶어요.”성혜인이 먼저 나서야만 뱀을 구멍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다. “안 돼!”반승제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거절했다. K가 성혜인을 죽이기로 결심했으니 그녀의 위치가 노출되면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른다.성혜인이 막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자신과 굉장히 닮은 여자가 서 있었다. 이건 그냥 닮은 정도가 아니라 완벽하게 복제한 수준이었다. 심장이 심하게 요동치며 경계하던 찰나, 성혜인은 그 여자가 반승제의 앞으로 다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았다.“대표님.”그 여자는 반승제를 부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성혜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승제를 바라보았다. 반승제도 이 여자가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던 터라 급히 성혜인에게 설명했다.“이 사람은 오래전에 내가 훈련 시킨 사람이야. 너와 똑같이 성형해서 메이크업으로 완벽하게 진짜처럼 보이게 할 수 있어.”누구라도 자신과 너무 닮은 사람이 앞에 서 있으면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성혜인은 말하지 않았고, 그 여자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있었다. 성혜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여자는 정말 자신과 닮은 데다 심지어 걷는 자세까지 의도적으로 따라 하고 있었다. 반승제는 성혜인의 손을 가져와 꼭 잡았다.“만약 미끼가 되어야 한다면 이 여자가 너 대신 하면 돼. 혜인아, 설씨 가문에 데려다
그날 밤, 성혜인은 배가 아파서 설우현이 모셔 온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깨어났을 때 그녀의 얼굴은 훨씬 창백해졌다. 제로의 갑작스러운 등장도 그렇고, 반승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깊은숨을 들이마신 성혜인은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설우현을 바라보았다. “오빠, 국제 조직에서 아직도 연구 기지의 위치를 못 찾았어요?”설우현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성혜인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국제 조직에서도 찾지 못했는데 반승제는 어디에서 정보를 얻었을까. 게다가 이미 아리카로 가고 있는 것을 보면 연구 기지가 그곳에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이 된 것만 같았다. 돌연 지하 격투장에 있을 때 한 남자가 ‘실험체, 두 개의 실험체’라고 말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 중 한 사람은 배현우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반승제일까? 하지만 반승제는 10년 동안의 기억만 복제되었을 뿐 다른 실험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성혜인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오빠, 승제 씨 아리카로 갔어요. 나를 꼭 빼 닮은 대역을 데리고.”설우현은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혜인아, 너 혹시 열이 나?”성혜인은 그제야 온몸에 열이 있는 것을 느꼈지만 여전히 반승제를 걱정했다.“승제 씨랑 연락이 되면 저에게 알려줘요, 오빠.”고개를 끄덕인 설우현은 의사더러 그녀에게 주사를 놓아달라고 했다. 성혜인은 금세 잠들었다. 설우현은 티슈로 성혜인의 이마에 땀을 닦아주고는 설기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반승제가 아리카로 갔다면서요. 혹시 연구 기지가 거기 있어요?”설기웅은 여전히 최용호와 함께 이 일을 조사하고 있었다. 불과 2분 전에 최용호가 정보를 입수했다. 연구 기지는 실제로 아리카에 있었지만 최근 국제적으로 아리카에 가지 말라는 긴급 뉴스를 보도했다. 현재 그곳에는 끔찍한 전염병이 돌고 있었는데 특히 칸다는 너무 심각한 상황이라 사람들을 철수시키기에 이르렀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