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신념?성혜인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며 의사의 이러한 말들을 듣고는 더 이상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성혜인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물었다.“그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죠?”나하늘은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거부했기 때문에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소통이었다. 그녀는 살이 닿기만 해도 큰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았다.게다가 말도 듣지 못했다.의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그건 저희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공사팀이 지하실 방어선을 뚫을 수 있는지 봐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감시당하고 있을 거예요.”그가 주위를 가리키자 성혜인이 일어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전기를 끊으면 안 되나요?”공사팀의 사람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섬의 모든 곳은 전기를 끊을 수 있지만 이곳만 유일하게 전기 회로가 단독 회로입니다. 메인 스위치는 견고한 철제 케이스에 있습니다. 총과 폭탄으로 시험해 보았지만 모두 부서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바람과 태양 에너지로 전기를 일으킵니다.”성혜인은 점점 초조해졌다.이때 벽에 기댄 나하늘은 이마에 땀이 맺혀있었다.주변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에 스트레스가 상당했고 이에 따라 온몸이 땀투성이였다.그녀가 침대에서 내려와 걸으려 하자 발목을 감은 쇠사슬이 바닥에 끌리며 소리가 지하실을 메아리쳤다.침대에 앉아 있는 성혜인은 큰 무기력함을 느꼈다.특히나 나하늘이 능숙하게 화장실을 찾아가는 것을 보면 지하실을 샅샅이 뒤지며 도망치려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고 말도 안 될 정도로 흰 피부를 보면 몇 년째 이곳에 갇혀있은 것이 더 잘 느껴졌다.공사팀은 주변을 계속 탐사했고 의사는 종이에 기록된 정보를 되짚고 있었다.몇 분 동안 조용하더니 화장실 문이 열리고 나하늘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그녀와 닿지 않는 한, 나하늘은 주변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성혜인이 또 물었다.“점자는 시도해 보셨어요? 간단한 몇 글자는 알 것 같은데요.”“이미 모두 시도해 봤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얼 하든 전혀 협
대략적인 방향을 향해 달려가던 성혜인은 이쪽이 더 황폐하다는 것을 발견했다.원래의 정원은 이미 사라졌으며 폐허라고 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저 지반의 윤곽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정원이 포탄에 직격당한 것이 분명했다. 만일 정원에 사람이 있었다면 포탄의 위력에 의해 팔다리가 부러질 것도 없이 바로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그녀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이곳에 작은 널빤지를 세워주고는 넋을 잃은 듯 되돌아갔다.헬기가 착륙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설우현은 동생의 안색이 좋지 않자 황급히 산소통을 건넸다.“냄새가 견디기 힘들지?”성혜인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두 사람을 태운 헬기는 저녁이 되어서야 반승제가 있는 병원에 도착했다.성혜인은 복도 의자에 앉아 두통을 느꼈다.안에 있던 의사가 나오자 성혜인이 물었다.“어때요?”“의지가 강하셔서 내일이면 깨어날 겁니다.”성혜인은 안도했다. 그러나 또 섬에서의 광경을 떠올리니 위가 뒤집히는 것 같았다.그녀는 자기 병실의 화장실로 달려가 한참 구역질을 했지만 아무것도 토해낼 수 없었다.설우현이 저녁을 가져다주며 잘 먹으라고 당부했다.“구금섬에서의 일은 국제기구 사람들이 계속 조사하고 있어. 그런데 연구 기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거야.”국제 전문가들이 연구 기지를 조사하고 있다니 반승제와 둘이 고독하게 찾을 필요는 없게 되었다.번거로움을 많이 던 셈이다.“오빠, 연구 기지 위치를 알게 되면 얼른 알려주세요. 아버지의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요. 그리고 배현우는 찾았어요?”구금섬이 폭파되던 날 밤 배현우도 섬에서 죽은 걸까?“못 찾았어. 산산조각 난 시신도 있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니까. 아직은 단서를 찾지 못했어.” 성혜인이 등을 뒤로 젖히자 벽의 찬 기운이 느껴졌다.설우현이 도시락을 열고 숟가락을 성혜인의 손에 쥐여주었다.“먹기 싫어도 조금이라도 먹어. 이따가 건강검진도 받아야 하고.”어쨌든 임산부니까. 이렇게 고생하고도 아이가 멀쩡하다는 건 운이 좋다고
그는 일부러 한쪽에 놓여있던 책을 가지고 설기웅 쪽으로 부채질하며 향으로 꼬드겨보려 했다.그러나 설기웅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정직하게 앉은 채 물었다.“국제 사람들은 아직 아무 단서도 못 찾았대?”최용호가 포기하고 눈을 희번덕거렸다.“그 무리에 희망을 품지 마. 그 안에 연구기지 계획에 참여한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야. 지금 구금섬이 폭로되니까 나라마다 무고한 척하고 있잖아. 분명 내부자는 그 안에 있어. 그 작은 섬의 연구기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투입되었는데. 원주민을 가축처럼 기르고도 여태 발견되지 않았다는 건 누군가가 보호하고 있었다는 거야.”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잔인하다.아주 오래전 생체 실험은 국제적으로 시작되었으며 모든 사람들이 인도주의적이지 않다며 비판했다.하지만 인체를 이용한 실험만이 데이터가 가장 정확하다.어떤 나라들은 겉으로는 잘 사는 척, 국민을 위하는 척하면서 몰래 연구기지에 투자했다.일단 실험이 성공하기만 하면 연구한 것은 그들에게 큰 무기가 될 것이며 어느 정도에선 다른 나라보다 20년 이상 앞서게 될 것이니까.그런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그저 아무 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목숨만 앗아갈 뿐이다.실험에 이용되는 사람들의 목숨은 그들에게 개미만도 못한 것이었다.설기웅은 양미간을 꾹꾹 누르며 두통을 느꼈다.“설, 최, 원씨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연구기지를 조사하고 있으니 단서가 나올 거야.”최용호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거하게 차린 테이블 위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가 조사하기만 하면 누군가 무조건 몰래 막을 거야. 그리고 우리는 연구해 낸 약이 뭔지도 몰라. 연구기지에서 잡힌 사람들은 모두 수십 년 동안 연구해 온 의학 천재들인걸.”설기웅이 침묵을 지켰다.한 명의 천재여도 세계를 놀라게 한다. 그런데 한 명이 아닌 수많은 천재들이 모여서 연구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이로운 것이라면 분명 이름을 널리 알릴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들에게 유해한 것이라면 그것은 재앙이었다.최용호가
플로리아의 어느 한 곳에서 남자가 영상을 보고 있다.영상 속에는 나하늘과 외부인들이 있다.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 지 들을 수 없는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그는 여인에게 강한 통제욕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는 호란을 틈타 그녀를 곁으로 데려오려고 했었다.그러나 다른 곳에 어디 지하실이 있겠는가. 저곳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여인을 가두려고 계획한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곳이었다.이만큼 뛰어난 구속 장치는 없었다.영상 속 사람들은 아마 자신들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 소리는 아주 작았으며 휴대폰 문자로 의사소통을 했다.남성은 CCTV를 여유작작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하늘이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통제 범위에 있는 한 그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고오하고 고귀하던 여인이 인간 존엄까지 잃고 말을 잘 듣게 되었다. 이 여인은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작품이었다.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던 그때 밖에서 손님이 찾아왔다며 노크했다.그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방을 나갔다.ㅂ층 거실에 도착한 그는 홀에 앉아 있는 진세운, 그리고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진백운을 발견했다.“무슨 바람이 불어서 둘이 함께 온 겁니까?”진세운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그가 전에 노예찬과 정면충돌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남자 때문이었다.남성의 이름은 여석진으로, 연구기지와 관련 있는 사람이었다.BKS 조직에서 그와 이 남성은 유일하게 그곳과 관련 있는 사람이었다.여석진이 구금섬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간 연구기지에 실험에 필요한 사람들을 제공하여 자리를 잡았다.두 사람 모두 연구기지의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사이가 틀어질 필요는 없었다.그러나 먼저 배신을 한 사람이 노예찬 그 녀석일 줄이야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노예찬은요?”진세운의 얼굴은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하루 종일 고문을 당하다 죽었고 시신이 밖에 버려졌는데 폭탄으로 시신이 훼손됐는지는 그 녀석 운에 달려 있죠.”아이가
잠든 성혜인은 꿈속에서 따뜻한 손이 자신을 잡고 있는듯한 느낌을 받았다.새벽에 자기 전, 그녀는 원래 알람을 놓고 일찍 깨려 했다.그런데 한 번 잠들고 대여섯 시간이나 자버렸다.깨어났을 때 병실 안은 이미 햇빛이 가득 비추고 있었다.반승제는 한 손으로 성혜인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은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며 누군가의 메시지에 답하는 것 같았다.그의 얼굴을 본 뒤에도 성혜인은 여전히 멍했다.손에 힘을 주고서야 정신을 차린 성혜인은 반승제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들었다.“오늘 종합검진 해야 하지? 나랑 같이 가. 지금 배 안고파?”“승제 씨, 깼어요?”반승제는 그녀의 손을 놓고 곁에 있는 소독용 물티슈를 가져와 성혜인의 손가락을 닦아주었다.“깬 지 두 시간 됐어. 넌 좀 더 자.”그러나 성혜인은 나하늘과 설기웅의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 잠에 들 수 없었다.반승제는 깨자마자 상황을 모두 전해 들은 상태였다. 그는 손을 들어 성혜인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너무 걱정하지 마. 배현우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거야. 단서는 곧 찾을 수 있어.”그는 얼른 성혜인의 허리 뒤에 베개를 깔고 몸을 일으키도록 도왔다.성혜인은 베개에 기대니 정신이 많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그들 모두 연구 기지의 일이 가능한 한 빨리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전 세계의 사람들이 구금섬에 주목하게 되었지만 아무도 유용한 정보를 찾아내지 못했다.오히려 언론들이 구금섬의 존재를 보도하면서 여론이 들끓게 되었다.구금섬과 연결된 연구 기지는 분명 곧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반승제는 이미 성혜인을 위해 검진 항목을 예약하고 함께 하나하나 검사하려 했다.검진이 금방 끝나자 영양사가 점심을 가져왔다.배가 고팠던 성혜인은 얼른 수저를 들었고 배부를 때쯤, 장하리와 강민지가 연락하여 근황을 물었다.최근 줄곧 구금섬에 갇혀 있으면서 외부와 연락이 차단되었기 때문에 장하리와 강민지는 걱정되어 매일 연락하여 물어보곤 했다. 이제 성혜인의 목소리를 듣
결혼이라니? 강민지가 결혼한다고?잠깐 당황한 성혜인이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너 신예준이랑 안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 진심이야? 아저씨가 허락했어?”성혜인은 전에 강상원을 만난 적이 있었다. 강상원은 말끝마다 결혼은 집안 조건이 맞는 사람끼리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 앞으로의 나날은 고통과 증오로 얼룩질 뿐이라며.그래서 심예준과 사랑에 빠졌을 때 강민지는 강씨 가문에 그 사실을 숨겼다.“혜인아, 나 여기 아직 할 일이 좀 있어서 먼저 끊을게. 나중에 시간 내서 다시 전화할게. 바이, 우리 애기.”여유로워 보이는 강민지의 말투를 들으면 전혀 일이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전화가 끊기자 강민지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바라보았다.오늘 밤 제원에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자선 파티를 개최하며 수많은 사람을 초대했다. S.M 측에서도 초대장을 받았다. 성혜인이 자리를 비워서 장하리가 대신 참석했다.화려하게 차려입은 장하리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창백한 얼굴을 보더니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블러셔를 더 발라달라고 부탁했다.현장에 도착하자 장하리는 손에든 가방을 꼭 쥐고 들어가기를 망설였다. 최근 참석했던 여러 파티에서 매번 서수연을 마주쳤기 때문이다.서주혁이 장하리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로 서수연은 장하리를 미친 듯이 쫓아다니며 괴롭혔다.하지만 서수연이 서씨 가문의 딸이자 서주혁의 친동생이었기에 장하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곳은 S.M뿐이었지만 장하리는 S.M이 저 때문에 피해를 보는 건 원치 않았다.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은 장하리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파티에 입장했다.이런 저녁 파티는 거의 매달 열리는 행사로 여기서 인맥과 자원을 교환하는 것은 회사에 꼭 필요한 기회였다.S.M이 점점 발전해 나가며 매번 그녀가 나타날 때마다 꽤 많은 투자자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그녀는 최근 손잡았던 사람들과 함께 와인을 홀짝이다가 곁눈으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워낙 머리가 좋지 않았던 서수연은 다른 사람의 도발을 견디지 못했다.‘친한’ 친구들의 말을 들은 그녀는 더욱 악랄하게 굴며 장하리의 머리채를 잡고 벽에 내리치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누군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매번 이런 식으로 마음껏 괴롭히기도 전에 화장실에 사람이 왔다.서수연은 눈을 흘기며 장하리의 머리채를 놓아주었다.“운 좋은 줄 알아. 다시는 우리 오빠한테 허튼수작 부리지 마. 너같이 천한 년이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말을 마친 서수연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친한’ 친구들을 바라보았다.“가자.”“수연아, 그냥 이렇게 놓아 줄 거야?”“누가 왔잖아.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우리한테도 영향이 안 좋아.”어쨌든 장하리는 지금 S.M을 대표하고 있었으며 이 회사는 업계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기에 그녀와 몇몇 친구들이 장하리를 괴롭히는 일이 들통난다면 사람들 입에 거론될 수밖에 없었다.물론 서씨 가문이 이런 여론을 잠재우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서수연은 오빠가 다시 장하리를 걱정하지 않을까 근심했다. 그렇게 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훨씬 많을 테니까.차라리 지금처럼 매번 화장실로 끌고 가서 장하리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제원을 떠날 때까지 지독하게 괴롭히는 게 더 나았다.생각을 마친 서수연이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녀의 미래 새언니는 당연히 제원에서 제일 잘나가는 여성이어야 하는데 장하리가 가당키나 할까? 이깟 여자가 뭐라고.그녀들이 문을 열고 나갈 때 장하리는 이미 칸막이 안으로 들어왔다. 익숙한 듯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회사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이런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그녀는 가방에 여분의 드레스를 준비해 아무도 흠뻑 젖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없도록 했다.휴지로 목에 묻은 물기를 조금씩 닦아내고 갈아입은 드레스는 쓰레기통에 버린 다음 작은 거울을 꺼내 다시 화장을 고쳤다. 더 이상 얼굴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밖으로 나갔다.하지만
장하리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두 떨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심지어 서주혁을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붓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너 눈이 먼 거 아니냐고. 어디를 봐서 내가 서수연을 건드린 거로 보이냐고.그러나 장하리는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사업 면에서는 여유만만한 그녀였지만 유독 감정 면에서는 서툴렀다.하지만 서주혁은 그녀의 처량한 모습은 보지 못했다. 서주혁의 눈에 비친 장하리는 여전히 자신이 기억 상실한 틈을 타 그를 속여 잠자리를 가진 여자에 불과했다.더는 여기서 무의미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던 서주혁이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장하리를 앞질러 가며 한마디를 남겼다.“더 이상 서씨 가문 사람들을 귀찮게 하지 말고 인간으로서의 품위도 좀 지켜.”이 말에 담긴 의미는 분명, 장하리의 스토킹에 가까웠던 십여 통의 성가신 전화를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장하리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의 모습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다가 천천히 벽에 기댔다.눈물이 또 흘러내려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간 장하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았다.최근 계속 야근하며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고 살도 많이 빠졌다. 뺨을 몇 대 맞은 탓인지 얼굴은 약간 부어 있었고 말할 때 입꼬리도 아팠다.깊은숨을 들이마신 장하리는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몸을 바짝 굳힌 채로 거울에 비친 강민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강민지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의 드레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새 드레스를 갈아입은 거예요?”장하리와 강민지는 사실 친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장하리는 허리를 곧게 펴고 매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 민지 씨.”화장실의 조명은 바깥보다 훨씬 밝았다. 장하리의 얼굴이 부은 걸 단번에 알아본 강민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누가 때렸어요?”성혜인은 강민지에게 장하리를 부탁했었다. 하지만 지금 장하리가 저녁 파티에서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다. 어떤 간 큰 놈이 감히 이딴 짓을 했을까?“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젯밤에 음식을 잘 못 먹어서 알레르기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