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휘가 먼저 차에 몸을 실었다. 성혜원과 성한은 서로 눈을 한 번 마주치고 뒤따라 함께 차에 올라탔다.창가에 앉은 성혜원은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그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외제차를 발견하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일렁였다.‘반승제의 차다!’“잠시만요, 누구 좀 만나고 올게요!”성혜원은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곳에서 반승제를 만날 줄이야! 성휘와 성한이 반응하기도 전에 성혜원은 차 문을 열고 반승제의 차 앞으로 다가갔다.창문이 닫혀 있어 차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반승제를 몰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성혜원은 그가 타고 다니는 모든 차를 기억했다.이 차는 분명 반승제의 것이다. 그는 병원에 온 듯하다.성혜원은 급히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목소리에서는 간절함이 느껴졌다.“안녕하세요. 승제 씨도 병원에 오신 거예요?”성혜원은 창문을 두드리며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 말했다.그녀는 모르겠지만, 사실 창문을 두드린 그 자리에 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성혜인이었다.성혜인은 목에 무언가 턱 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성혜원이 어째서 반승제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인지 상황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반승제와 성씨 집안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인사차 방문한 적도 없었다. 결혼을 할 때도 반승제는 모습을 감추어 성혜인 혼자 모든 절차를 처리해야 했고, 그렇게 3년이 흘렀다.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성혜원과 엮일 일이 없었다.게다가 성혜원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한다는 건, 성혜원이 이 차를 알아봤다는 것이다.성혜인이 머릿속으로 그들의 관계를 추측하고 있던 그때,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성혜인은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성혜원이 이름을 부르기라도 하면 더 이상 반승제에게 정체를 감출 수 없게 된다.창문이 내려가던 그 순간, 성혜인은 몸을 돌려 반승제를 껴안으며 그의 품속에 머리를 파묻었다.때마침 반승제가 한 여성과 껴안고 있는 장면을 마주하게 된 성혜원은 눈빛이 크게 일렁였다. 그리고 그 놀란 감정은 순식간에
성혜인은 자신을 대하는 성혜원의 태도가 미심쩍었다. 둘이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기에 성혜원은 성휘 앞에서 뒷담화를 하곤 했다. 종종 눈치 없이 말을 꺼냈다가 성휘가 화를 낼 정도로 말이다.그렇지만 사이가 좋지 않다고 말하기에는 매번 성혜인을 다정하게 ‘언니’라고 불렀다. 마치 정말 성혜인을 ‘언니’로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소윤은 대놓고 성혜인을 미워했지만, 성혜원은 달랐다. 늘 성혜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다.성혜인은 순간 깨달았다. 성혜원이 자신을 좋아할 수가 없다. ‘반승제의 아내’라는 그 자리를 성혜인이 차지했기 때문이다.그전에 있던 일을 떠올려 보니, 이제야 뚜렷하게 이해가 됐다. 성혜원이 왜 아픈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오려고 했는지 말이다.성혜원의 목소리가 멀어지자, 성혜인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코끝에서 반승제의 향기가 느껴졌다.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깝게 붙어있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성혜인이 고개를 드는 순간, 반승제 역시 고개를 밑으로 떨구면서 두 사람의 코끝이 서로 부딪쳤다.성혜인은 이마를 짚는 척하며 급히 몸을 뒤로 뺐다. 마치 몸이 좋지 않아 그에게 기댄 것처럼 말이다.반승제는 눈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몸 앞이 갑자기 텅 비자 허전함이 느껴졌지만 금방 마음을 다잡았다.성혜인은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혜원이 타고 있던 차는 이미 이곳을 떠난 상태였다. 그녀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막 차에서 내리려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성휘에게 온 전화였다.성혜인의 표정에서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순간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받기 버튼을 눌렀다.수화기 너머로 성휘의 목소리가 들렸다.“혜인아, 2차 융자 성공했다. 반씨 집안에서 투자해줬어. 퇴원 기념으로 같이 축하하고자 하는데, 승제랑 집으로 오렴. 감사 인사도 전해야 하니 이모에게 저녁 준비시킬게.”말이 좋아 ‘감사 인사’지, 사실 반씨 집안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속셈이었다.성혜인은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
이성을 다잡고 마음을 가라앉힌 반승제는 빠르게 시선을 거두었다.병원으로 들어온 성혜인은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려 벽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약 기운이 여전히 몸을 지배하고 있었고, 뺨을 맞은 얼굴은 여전히 화끈거렸다.따가우면서 화끈거리기까지 하니 하늘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때마침 앞을 지나가던 간호사 덕분에 부축을 받아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성혜인은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러다 정말 구토를 하고 말았다. 결국 창백한 얼굴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수액을 맞았다.하필 그때, 성휘가 또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잊지 말고 반승제를 데리고 오라는 내용이었다.「혜인아, 승제와 결혼했으니 한 번쯤은 집에 데리고 와야지.」성혜인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외부에서 판을 치던 유언비어를 잠재우고자 반승제를 불러들이려는 것이었다.2차 융자도 유치했으니 앞으로 인맥이 넓어질 일만 남았다.하지만 성씨 집안과 반씨 집안이 정략결혼을 하고 난 이후, 사람들이 성씨 집안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사실 반승제, 그리고 반씨 집안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이다.이 무리에 있는 사람들은 자선 단체를 자처하고자 모인 것이 아니다. 체면을 살려줬다면 그만큼의 보답을 원하기 마련이다.성씨 집안과 반씨 집안의 사이가 좋지 않다면, 그건 분명 성씨 집안이 충분히 보답하지 못했다는 뜻이니 어느 누구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씨 집안은 반승제가 그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모습을 반드시 보여주어야 했다.그래야만 그들의 체면을 살려줄 사람들이 계속 곁에 존재할 테니 말이다.성혜인은 홀로 병원에 앉아있으니 쓸쓸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하지만 성휘는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또 메시지를 보내왔다.「나도 너와 다투기 싫어... 하지만 다 너를 위해서라는 걸 잊지 말아라.」병 주고 약 주는 것이 성휘의 특기다.성혜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엄마가 세상을 떠난 이후, 성휘가 그녀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만 했다. 어렸을 때는 돈을
반승제는 어둠이 깔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어떤 표정 변화도 없었다.“할 일 다 끝났어?”3년 전. 백연서는 반승제와 윤단미의 사이를 억지로 갈라놓았다. 반승제가 성혜인과 결혼하자 윤단미는 해외로 떠나버렸다.사실 윤단미에게 ‘할 일’ 같은 건 없었다. 백연서가 둘을 떼어놓으니 속으로 참고 삭이는 일 말고는 더 있겠는가.반승제가 직접 그녀를 찾으러 가거나 수도 없이 전화를 해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동안 반승제는 이상할 만큼 평온했다.그렇다 보니 윤단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제 발로 돌아온다면 백연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돌아오지 않는다면 반승제와 완전히 끝이었다.사실 그 당시 반승제는 그녀를 말렸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했던 그런 설득은 아니었다. 반승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고 싶었다. 자신을 위해 백연서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과 함께 도망가길 바랐던 것이다.윤씨 집안은 적은 재산 정도 가지고 있는 가문일 뿐, 재벌에 속하지는 않았다.윤단미는 제원에서 권력 집단에 속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꽤 부유한 편에 속했다. 어려서부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반승제와 사귄 이후로는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윤단미가 반승제에게 시집 가 그림 같은 한 쌍이 되리라는 것이 모두의 생각이었다.모두가 그렇다 보니 윤단미 역시 자신을 과대평가했다. 반승제가 자신과 화해하고자 고개를 숙이며 들어올 줄 안 것이다.반승제가 붙잡을 때, 윤단미는 거절했다. 그녀가 원하던 건 반승제가 평생 윤단미 없이 살 수 없다고 선포하는 것이었다.하지만 반승제의 행동은 윤단미의 기대에 못 미쳤다. 그렇게 윤단미는 반승제가 결혼할 때까지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당장이라도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결국 해외에서 슬픈 마음을 억누르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늘 반승제가 달래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그 이후로 3년 동안 반승제는 아주 드물게 연락을 하며 회사 업무에 치여 살았고, 그녀
이렇게 직설적으로 마음을 표현했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리가 없다.심지어 귀국한 이후, 반승제가 직접 자신의 아내와 상의해 윤단미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라고 할 것이라는 상상까지 했다.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알고 있으니까.윤단미가 냉전을 끝내기만 하면, 그 자리는 바로 그녀의 것이다.윤단미는 입꼬리를 올리며 휴대폰을 뒤져보다가 반승제와 함께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사진 속의 반승제는 풋풋했다. 오랫동안의 애정이 갑자기 솟아난 돌부리에 부서질 리가 없기에 신경 쓸 가치조차 없다.휴대폰을 막 내려놓자, 벨소리가 울렸다. 윤선미에게 걸려온 전화였다.며칠에 한 번씩 윤선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반승제의 최근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예전에 이미 이 디자이너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윤단미는 불안하지 않았다. 그동안 반승제는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캔들이랄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 디자이너에 대해서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언니, 그래도 빨리 오는 게 좋겠어. 그 여자, 아무래도 형부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내가 지켜보고 있을게.”“선미야. 그렇게까지 의심 안 해도 돼. 승제 마음속에는 나뿐이니까.”윤선미의 머릿속에 성혜인이 떠올랐다. 여전히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성혜인은 정말 예뻤으니까.이렇게까지 안심하는 그녀에게 윤선미는 더 이상 해줄 말이 없었다. 하지만 성혜인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 얼굴이 거슬렸다....성혜인은 홀로 병원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뺨에 남은 손자국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어젯밤 그 남자들이 무자비하게 힘을 휘둘렀던 걸 다시 떠올리니 조금 무서워졌다.그녀는 신고할 생각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때, 경찰에서 먼저 전화가 걸려왔다.순간 흠칫했지만, 반승제가 그들을 신고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납치 수법이 허술해서 경찰이 조사하면 금방 잡힐 것이다.“성혜인 씨, 맞으시죠? 어제 그 사람들 잡았는데 청부업자들이더군요.”“절 해치려 한 사람들을 처벌하고
조희준은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자신이 차단당했다는 걸 알아차렸다.‘이 년이 감히...!’망할.성혜인을 잘 구슬릴 수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이 터지는 순간, 경찰에게 꼬리를 잡히고 말았다.성혜인이 합의를 해주지 않아 경찰로 사건이 넘어간다면 분명 소문이 퍼지게 될 것이고, 회사는 그대로 나락의 길을 걷고 말 것이다.조희준은 속이 뒤틀렸다. 여자 혼자서 두 납치범을 경찰서에 보낸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그는 지금까지도 누군가 성혜인을 도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성혜인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바람에 이렇게 당한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나쁜 년!”그는 욕을 뱉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성혜인을 직접 찾아가 합의해 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큰 일이다.조희준은 성혜인에게 가고자 급히 문밖을 나섰다.하지만 더 이상 이 일에 얽매여 있을 생각이 없던 성혜인은 경찰에게 모든 걸 맡겼다. 어차피 합의도 없으니까.그녀는 퇴원하는 길에 우연히 반희월과 마주쳤다.지난번 병원에서 반희월과 마주쳤을 때도 뺨에 손바닥 자국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성혜인은 최대한 몸을 돌리며 반희월과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반희월은 한눈에 그녀를 알아봤다.“페니 양?”지난번과 똑같았다.이름까지 불렀는데 숨는 건 의미가 없었다. 성혜인은 이렇게 된 거 당당하게 인사했다.반희월의 시선이 성혜인의 얼굴로 향했다.손바닥 자국이 너무 선명해서 무시하기도 애매했다.교양을 갖춘 반희월은 상대방의 상처를 대놓고 들춰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의 여자친구를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게다가 성혜인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잘 청하지 않는 독립적인 성격이라는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경헌이 얘도 참... 여자친구가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데도 가만히 있다니.’“안녕하세요.”성혜인은 공손히 인사했다. 그러자 반희월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왜 또 이렇게 된 거니? 아파?”갑작스러운
성혜인은 반희월을 처음 봤을 때부터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말투에서부터 따뜻한 게 느껴졌다.임경헌은 자신의 어머니를 ‘호랑이’라 칭했지만 성혜인은 마냥 부러웠다. 성혜인이 만나본 사람 중 그녀의 어머니 다음으로 성격이 좋았기 때문이었다.납치 사건을 겪고 병원에서 지금까지 혼자 있었다 보니 정신력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날이 습했던 지난밤. 얼굴에서는 통증이 느껴지고 약 기운으로 온몸이 불편했다.잠이 든 이후에는 꿈에서 엄마를 만났다.하지만 너무나도 짧은 꿈이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도 몇 년. 엄마의 온기가 이제는 기억 속에서 흐려지고 있다.반희월의 존재는, 온기 그 자체였다.“페니?”성혜인이 넋을 놓고 있자 반희월은 스스로 상처를 준 것으로 생각했다.“저마다 다 힘든 일이 있지. 내가 너희 부모를 만나는 게 불편하다면 가지 않을게. 지난번에 내가 한 말 기억나니? 무슨 일 있으면 경헌이한테 부탁해. 여자친구니까 도와줄 거야.”반희월이 잘해줄수록 성혜인은 죄책감이 더 커졌다.“네, 아주머니. 기억하고 있어요.”성혜인은 이곳을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불편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반희월은 자존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친구의 어머니에게 두 번이나 이런 모습을 보였으니 말이다. 기도 센 성혜인이 이런 일을 경헌에게 알리는 게 난감한 일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반희월은 싱긋 웃어 보였다.“내 번호 갖고 있지? 내 마음은 예전과 변함없으니 편하게 연락해.”성혜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는 겨우 병원 입구를 빠져나왔다.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차에 올라탄 그녀는 포레스트 펜션으로 향했다.반승제가 회사에 있을 시간이니,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숨어 지내는 것도 질렸다. 은행 돈이 어서 나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로비로 들어서자, 성혜인의 얼굴에 난 손바닥 자국을 발견한 유경아가 소스라치게 놀랐다.“사모님, 얼굴이 왜...”유경아는 황급히 계란을 가져와 성혜인의 얼굴을 문질렀다.어젯밤
성혜인이 1층으로 내려왔을 때 마침 로비에 사람이 없었다. 회사 사람들과 저녁 7시로 약속을 잡았기 때문에 현관에 둔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가려 했다. 티테이블에 올려진 선물은 전혀 보지 못한 채 말이다.유경아는 주방에서 성혜인을 위한 보양식을 만들도록 지시를 내리고 있었기에 성혜인이 나가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포레스트 펜션 내 도우미는 많은 편이 아니다. 성혜인은 유경아 외에 다른 도우미들과는 대화해 본 적도 별로 없었다.초반에 반태승에게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그 때문에 반태승은 최소 필요 인원 정도만 고용하도록 지시했었다.포레스트 펜션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던 반승제는 마침 할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반태승의 잔소리에도 건강을 생각해 반박하지 않았다.“할아버지, 저 이미 포레스트에 도착했어요.”반태승은 드디어 걱정을 한결 덜 수 있었다. 아버지가 투병 중이니 성혜인이 우울한 것은 당연했다. 이럴 때 남편으로서 옆에서 위로할 줄도 알아야 했다.전화를 끊은 반승제는 셔츠 단추를 풀며 안으로 들어갔다.회의가 막 끝났을 때 할아버지의 전화를 받아 황급히 포레스트에 와야 했으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명령 하나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졌기 때문이었다.그는 셔츠 소매를 몇 번 접어 올렸다. 그러자 다부진 힘줄이 존재를 한껏 뽐냈다.위로 우뚝 솟은 콧대에 비해 그의 입꼬리는 아래로 쳐져 있었다. 문을 열 때 느껴지는 냉기는 모든 걸 얼려버릴 것만 같았다.반승제를 발견한 유경아는 멈칫하다 이내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대표님.”반승제는 현관 옷걸이에 옷을 걸고 신발을 갈아 신은 뒤 1층을 둘러보았다.어떤 이유에서인지, 유경아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냉기에 뼛속까지 오싹해졌다.“저녁 준비해 두었습니다. 사모님 모셔 올게요.”“네.”반승제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소파에 앉았다.티테이블을 가득 채운 선물을 보는 순간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최고급 식재료에 명품 액세서리까지 있었다.도우미는 차를 내오면서 상황을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
그러나 성혜인은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도우미에게 꽃병을 건네주고는 다시 설연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난 저녁 비행기를 타고 곧 남편과 함께 제원으로 돌아갈 거야. 다음에 널 만나게 될 땐 친구로 만났으면 좋겠네.”설연주는 당당하게 작별인사 한마디도 못 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당당한 성혜인에 비하면 그녀는 마치 평생 빛을 보지 못하는 도랑 속 쥐와 같았다.설연주는 심지어 성혜인의 말을 통해 자신의 비열함을 느꼈고 그 비열함은 차마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설연주는 성혜인의 눈을 거의 바라보지 못했다.혹여나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을 향한 원망과 역겨움을 눈치챌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솔직히 설연주는 성혜인을 진심으로 숭배하고 있었고 진심으로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미 진실을 알게 된 마당에 이제 와서 친구를 사귄다는 건 사치인 셈이다.그렇게 설연주는 설우현이 두 사람을 찾아올 때까지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들에게 다가온 설우현은 설연주의 작품을 보며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못생겼어.”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린 설연주가 설우현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고 뺨을 맞기라도 한 듯 통증이 밀려왔다.이렇게 비열하고 음침하기 그지없는 인간일 뿐인데 감히 설우현에게 그런 마음을 품다니.어쩐지 오래 못 살 것 같더라니... 그녀 같은 사람은 지옥에 가야만 한다.하느님은 그녀에게 복수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내 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다시 설우현을 바라보았고 설우현은 그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마디 툭 내던졌다.“이따 밥 먹고 가.”그러자 설연주는 몰래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휴지로 슬쩍 닦아내며 탐욕스럽게 설우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왜 이 타이밍에 설우현 같은 도련님을 만난 거지?’운명은 정말 그녀를 농락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렇게 성혜인의 말대로 그녀는 저녁 비행기를 타고 제원으로 떠났고 설우현은 특별히 그들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연주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녀는 오번과 통화를 하며 문을 열어주기 위해 현관으로 향했다.그 결과 밖에 서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설우현이었고 그는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끼운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설연주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설연주는 순간 마법이라도 걸린 듯 무어라 말해야 할지, 설우현이 갑자기 이곳에는 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우현 오빠...”이어 설연주는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한편, 설우현은 담뱃불을 끄고 시선을 돌려 설연주의 몸을 쓱 바라보았다.긴장한 나머지 설연주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고 설우현이 과연 조금 전의 통화 내용을 들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그렇게 한참 후에야 설우현은 비로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혜인이가 너 보고 싶다네. 오후 비행기야.”설연주도 잇따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묵묵히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차가 설우현의 별장에 도착하고 설연주는 그제야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이 설우현의 여자친구가 아닌 성혜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거실에 도착해 보니 성혜은이 거실에서 게임을 하면서 놀고 있었고 그 옆에는 빈 스위치 하나가 놓여있었다. 설우현 본인이 사용하던 스위치로 보였다.한편, 성혜인은 설연주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말을 건넸다.“연주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설연주는 무의식적으로 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이미 스위치 앞으로 다가가 스스로 게임을 시작했다.결국,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성혜인을 따라 화원으로 들어섰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위해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었다.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처럼 분위기가 매우 화목해 보였지만 사실 설연주는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계속하여 안절부절못했다. 성혜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두
설연주는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음식을 천천히 먹고 나니 운전기사가 그녀 옆에 다가와 서 있었다. 이는 분명 그녀를 재촉하고 있는 신호였다.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오직 그의 컴퓨터만 바라보고 있었다.설연주가 마음속으로 몰래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한번 설우현을 깊게 쳐다보고 나서야 설연주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기사의 뒤를 따랐다.그녀를 태운 차가 막 별장을 떠나려 할 때, 다른 차가 천천히 별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 순간, 설연주는 원인 모를 충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여자친구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섹시한 연상 스타일일까? 설우현은 그런 여자를 더욱 선호하니까.’설연주는 속눈썹을 드리운 채 창문을 열어보았다.하지만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차는 누가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창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었다.그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괜히 실마리가 드러날까 걱정되었던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차창을 다시 닫아버렸다.“가시죠.”운전기사도 다시 가속 페달을 밟았고 그렇게 설연주는 천천히 별장을 떠났다.오랜만에 다시 설준석의 별장에 돌아와 보니 이상하게 분위기가 어수선하게 느껴지고 무엇을 해도 흥미가 돋지 않았으며 설우현의 얼굴이 계속하여 눈앞에서 아른거렸다.수없이 많은 남자를 꼬시며 이용해 먹었지만 설연주는 단 한 번도 연애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줄곧 설연주의 이용수단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불쌍할 지경으로 적은 감정을 남자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하물며 그 상대는 설우현이다. 그녀와 같은 여자가 설우현에게 어울릴 수가 없는 법이다.설씨 가문의 도련님으로 금수저를 달고 태어나 평생 고생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우스우면서도 씁쓸해졌다.저녁이 되자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설연주 씨, 설강민이 두팔에게 끌려갔다고 합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온몸이 오싹해졌다. 설강민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낭패한 모습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평소 물 쓰듯 돈을 쓰던 술집에서 쫓겨나는 날이 있다니.그 순간, 설강민은 문득 설준석이 이 술집의 지분을 일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강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분명 그의 체면을 짓밟기 위해 아버지가 지시한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설준석에게 가서 사실대로 털어 넣고 돈을 갚아달라며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막상 이 지경이 되니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기며 더더욱 설준석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설강민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조금 전 또 20억 원을 빌렸으니 차라리 이 20억 원으로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게 나았다.다시 마음을 먹고 설강민은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한 채 현금 뭉치를 매니저에게 던져주었다.“지금 당장 가장 좋은 술을 가져오고 5명의 계집애를 데려와.”한 푼도 없을 줄 알았던 설강민이 뜻밖에도 600만을 들고 들어오니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그러자 설강민은 오히려 더욱 으스대며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아무리 초라해도 난 설씨 가문 일원인데 그깟 돈 하나 못 꺼내겠어?”돈을 받은 매니저는 바로 계집 몇 명을 설강민에게 보내주었다.아무리 돌이켜봐도 오늘 밤의 일은 생각할수록 더욱 화가 났다. 하여 설강민은 매니저가 보낸 여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양옆에 여자들을 껴안으며 오늘 밤 겪었던 울분을 풀어냈다.한편, 설연주는 구석에 서서 설강민의 모든 행동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다.룸을 떠나고 화장실에 간 설연주는 그제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최근에 열이 나며 심각하게 살이 많이 빠진 모양이다.그리고 오늘 밤 설강민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웃기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설연주가 쉰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설연주, 봤어? 저게 바로 네가 목숨을 바쳐서 구한 남자야.
설연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샤워를 마치고 다시 한번 세수를 마치고 나서야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러나 설우현은 이미 떠난 모양이었다. 말을 들어보니 아침 일찍 설기웅에게 불려가 두 아이를 돌보러 갔다고 한다.순식간에 할 일이 없어진 설연주는 그저 별장 안에 앉아 바깥에 활짝 피어있는 꽃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저녁, 방금 해열제를 먹고 다시 바라보니 정원에는 설우현의 차가 멈춰 세워져 있었다.그리고 설우현은 품에 꽃다발을 안은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다정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순간,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길이 멈칫하고 설연주는 먹고 있던 과일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설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설우현이 위층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 다시 꽃을 안고 외출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잠깐 고민해보던 설연주는 결국 다시 올라가 설우현에게 인사를 건넸다.“오빠, 데이트하러 나가요?”설우현은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몸은 좀 어때? 괜찮아졌어?”“네, 좀 나아졌어요.”그러자 설우현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액셀을 밟았다.설연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입을 여니 대체 뭘 물어야 할지도 몰랐다.같은 시각, 설우현은 이미 차를 몰고 떠났고 설연주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그녀조차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그때,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설강민이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 어떻게 그 20억을 갚을지 생각 중이라고 한다.“명목상이지만 설연주 씨 친오빠 진짜 너무 멍청한 것 같네요. 이렇게 간단한 사기극에도 속다니... 두팔이 빌려준 20억은 이윤이 이미 30억이 됐어요. 그런데 설준석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안 하고 도리어 두팔에게 또 대출을 받았다니까요. 그러니까 또 20억을 빌렸죠.”오번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웃음이 나왔다.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그럼 설강민은 지
설우현은 자신의 잡혀버린 소매와 설연주의 눈빛을 번갈아 보았다.한 치의 빛깔도 없이 캄캄하기만 했다.당황스러울 정도로 낭패한 그녀의 모습에 설우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나 어디 안 가. 물 따라올게.”“물 안 마셔도 돼요. 목 안 말라요.”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핏발이 보일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잠시 생각에 잠긴 설우현은 이내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설연주의 몸은 여전히 조금씩 떨고 있었고 설우현을 놓아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그때, 도우미 아주머니가 문밖에 찾아왔다. 설연주의 목소리가 워낙 날카로워 집 안에 있던 사람들도 전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러자 설우현은 침대 옆에 앉은 채, 도우미에게 말을 건넸다.“미지근한 물 한 잔과 해열제 한 알 주세요.”설연주의 열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정말 의사의 말대로 너무 긴장한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잠시 후, 도우미는 설우현의 말을 따라 재빨리 물을 가져다 놓고는 약을 설우현의 손바닥 위에 놓아주었다.이윽고 설우현은 설연주의 턱을 치켜들고 약을 먹여주었다.그러나 설연주는 입을 벌리고 있을 뿐 약을 삼키려 하지 않았다.몇 초간 머뭇거리던 설우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손끝을 그녀의 입에 넣고는 목 가장 깊은 곳에 약을 대었다.이에 설연주는 결국 마지못해 약을 삼키게 되었고 설우현은 또다시 물컵을 그녀 앞에 놓아두고 턱을 잡더니 천천히 물을 먹여주었다.물이 목구멍을 따라 흘러내리며 설연주는 저도 모르게 기침을 두 번 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막막하기만 했다.그렇게 물 반 컵을 마신 후에야 설우현은 물컵을 옆에 있는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이제 그만 자.”“오빠, 제발 가지 말아요.”설연주는 마치 가지 말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계속하여 그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하지만 설우현은 그녀의 그런 모습이 그저 웃겼다. 이제 정말 익숙해지기라도 한 걸까. 설우현이 정말 설연주의 오빠인지 아닌지도 아직 확실하
현재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과거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병에 걸린 적이 몇 번 없었는데 이젠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건강은 점점 악화하여가기만 했다.그저 평생 행복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가?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남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덩달아 마음이 약해진 오번도 다시 한번 그녀에게 당부해주었다.“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 하면 안 돼요. 이번에 설우현이 날 놓아준 건 전부 서주혁의 얼굴을 봐서였다고요. 다음부터는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까 가만히 있자고요. 어차피 지금 김현서는 두팔 쪽에 있고 설강민은 사채업자들한테 걸렸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빚은 졌다는 사실이 설준석의 귀에 들어갈 거예요.”찌릿찌릿 쑤시는듯한 통증에 설연주가 손을 들어 태양혈을 주물렀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설연주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오번 씨, 그거 알아요? 요즘 계속 꿈을 꾸는데 꿈만 꾸면 비싼 카펫 위에서 기어 다니는 내 모습이 보여요. 그래서 가끔 생각해요.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생활이 과연 현실일까? 갖은 노력을 다해 설씨 가문에 들어온 게 정말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였을까?”“설연주 씨...”“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아요. 전 저를 괴롭혔던 사람들이 모두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정승후는 이미 무너졌으니 다음은 설강민, 그리고 다음은 김현서, 마지막은 두팔까지...”오번이 미간을 찌푸렸다. 두팔을 상대한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두팔의 세력은 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강대했으니까.“이번에는 고마웠어요. 끝까지 저 지켜줬잖아요. 앞으로 다시는 설씨 가문에 손을 대지 않을 거니까 오번 씨도 계속 저한테 소식만 전해줘요.”“그래요.”전화가 끊기고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아무리 뒤척여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설우현도 언젠가 성혜인에게 생길뻔한 일이 그녀와 관련
남자가 전화를 한 상대는 오혜수였다. 지금 그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의 보스뿐이니까.전화를 받은 오혜수는 여전히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오번? 너 퇴직한 거 아니니? 왜 아직도 전화해.”오번은 남자의 암호명 순위일 뿐이다. 전에 오혜수의 곁을 따라다닐 때 해킹을 담당하며 얻은 암호명이다.그 후 제원시에서 미움을 사는 바람에 플로리아로 건너와 자신의 기술로 용돈 벌이를 하는 것이다.비록 전에 충분히 많은 돈을 벌어두었지만 돈이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으니 더 벌면 안될 것도 없었다.“보스, 이번에 저를 구하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주혁과 장하리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설우현 도련님께 잡혀 왔는데 번거로우시겠지만 도련님께 전화 좀 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오늘 당장 두 다리를 잃을 것 같습니다.”오번이 서주혁의 이름을 내뱉은 순간 설우현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 일이 서주혁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아하니 남자는 그저 서주혁이 대신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한편, 오혜수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서주혁을 알고 있는 건 맞지만 서주혁도 아직 장하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체면을 세워줄 이유가 없었다.“보스, 저를 구하지 않으면 오늘 정말 다리가 부러질 겁니다.”“닥쳐. 그러게 멀쩡히 잘 있는 설씨 가문을 왜 건드려?”오혜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 부잣집 자제들과 접점이 생기는 것이었다.그러나 오번 역시 상황이 급한지라 또 몇 번이나 거짓 울음을 터뜨리면서 꼭 구해주러 오라고 몇 번이고 당부한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전에 제원에 있을 때 장하리의 행방을 감추는 것을 도운 적이 있기에 지금 오번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장하리와 서주혁뿐이었다.설우현은 휴대폰을 낚아챈 뒤 바로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이 아닌 유심히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겁에 질린 오번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감히 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5분 후, 누군가가 설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