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온시환의 얼굴이 핏기 없이 창백해졌다. 그럼에도 온시환은 믿어지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반승제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돌아가서 차에 있어. 윗사람들이 곧 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백 할아버지께서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줄거야. 그럼 다음에 보자.”다음을 기약함에도 그 다음이 언제일지 아무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온시환은 온몸이 굳어 그 자리에서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서 있었다.떠나던 반승제가 멀리에서 한마디 보탰다.“나중에 휴대폰 잘 봐봐. 혹시 도청 장치 같은 것이 또 붙어있는지. 진세운 그 자식 생각보다 똑똑한 녀석이야.”온시환은 여전히 아무 말하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보이지 않는 두려운 힘이 자신을 먹어 치우는 듯했다. 마치 자신이 거미줄에 걸린 나방같이 느껴졌다.자신이 거미줄에 걸린 줄도 모르고 발버둥 치는 멍청한 나방 말이다.그는 거미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갖지 못한 채 거미가 군침을 흘리며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만 있다.그 무기력함, 그 상실감은 누구도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반승제가 기선으로 돌아왔을 때 원진은 여전히 의자에 누워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그는 여전히 차가운 무표정의 얼굴이었는데 주변에 있던 경호원들은 그가 또 화를 낼까 두려워 모두 자리를 피해 있었다.반승제가 그에게 다가가 의자 다리를 툭 건드렸다.“다시 보내줘요.”눈을 천천히 뜬 원진이 입을 열었다.“여기가 어디라고. 혹시 당신 집 앞마당 정도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당씨 집안 아가씨 모시고 식사하러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갑자기 느긋해진 거죠? 당신이 전에 눈을 멀게 했던 놈 종적을 알게 되니 아가씨가 위험할까 봐 두려워진 거예요? 그래서 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거죠?”원진이 천천히 똑바로 앉더니 반승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그 새X가 어디에 있는지 안단 말이요?”그 사람은 원진의 둘째 형이며, 유일하게 포탄에서 운 좋게 탈출했던 사람이다.둘째 형은 임시로 다른 임무를 받
별장으로 돌아온 진세운은 소파에서 몸을 웅크리고 자는 성혜인을 발견했다.발걸음을 멈춘 그가 가볍게 성혜인을 흔들어 깨웠다.“혜인 씨?”잠을 자는 순간조차 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분명히 오랜 시간 잠을 잤음에도 성혜인은 잠이 물밀듯이 몰려왔다.“의사 선생님?”“왜 소파에서 자요? 편하게 위층 침대에서 자지.”잠에서 깬 성혜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하품하며 옆에 있는 휴대폰을 가리켰다.“선생님께서 준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는데 계속 받지를 않아서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생각하고 있었어요.”“아무 일 없을 겁니다. 오히려 혜인 씨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아, 그래요? 왜 그런지 잠을 잘수록 졸린 것 같아요.”말을 마친 성혜인은 또 소파에 기대어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잠에 들었다.진세운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용량은 얼마나?”“말씀하신 최대 용량입니다.”진세운이 천천히 손을 들어 성혜인의 눈앞을 휘적거렸다.성혜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더니 웃어 보였다.“왜 그래요?”“혜인 씨, 이것 좀 봐요. 혜인 씨가 이걸 주시하면...”...잠에서 깨어났지만 여전히 피곤했다. 이미 밤새 잠을 잤음에도 피곤함은 가셔지지 않았다.양미간을 꾹꾹 누르며 계단을 내려갈 때 진세운이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선생님, 오늘은 밖에 안 나가요?”“어젯밤에 일 다 해결해서 오늘은 쉬어요 되거든요.”성혜인은 소파 위에 놓였던 휴대폰을 가지고 반승제의 전화번호를 눌렀다.“혜인 씨, 승제 찾으면 무슨 말 하고 싶어요?”“함께 있어야죠.”“탈출 경로는 기억해요? 나중에 승제를 만나면 알려줘야 하니까요. 그래야 혜인 씨를 가뒀던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찾고 응징할 수 있죠.”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기억이 안 나요. 이미 시달리다 못해 정신상태도 말이 아니라서. 일단은 승제 씨와 연락하고 싶네요.”진세운이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신문을
진세운을 따라 차에 오르던 성혜인은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선생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요? 체감상 1분밖에 안 지난 것 같았는데.”알고 보니 벌써 두 시간이 지난 뒤였다.진세운이 안전벨트를 매라고 하곤 말을 보탰다.“혜인 씨는 요즘 푹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설기웅 만나고 돌아오면 좀 더 자요.”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꺼내 설의종에게 전화를 걸었다.“회장님, 사실 딸에 대한 단서는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설기웅 씨가 설인아 씨를 아끼잖아요. 지금 회장님과 함께 설기웅 씨를 만나고 싶어요. 방금 저도 설기웅 씨에게 연락해 두었으니 지금 바로 오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나중에 복수 당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럽니다.”설의종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 진세운을 만난 것이 고작 몇 시간 전이다.그때는 아무런 단서도 없다고 하다가, 이제 와서 이런 전화라니.전화를 끊은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위층에서 내려오는 설기웅을 바라보았다.설기웅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설의종이 입을 열었다.“누가 너더러 가문의 이름으로 반승제를 위협하라 했어?”“아버지, 인아를 그렇게 막 대하는데 오빠로서 당연히 복수해 줘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이제 금방 눈이랑 목이 회복되었는데 여전히 반승제 생각밖에 안 해요. 그러니 이 일의 원흉인 반승제가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 아닌가요?”“인아가 먼저 반승제를 건드렸다고 들었다.”설기웅의 얼굴은 차가웠다.“성혜인은 그런 짓 당해도 싸요.”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인아가 위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설인아는 최근 줄곧 방에 있었으며 종래로 거실로 내려온 적이 없었다. 그녀는 요즘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오늘 새벽 시력도 회복되었고 목도 조금 나아졌기에 말을 할 수 있게되었다.하지만 기뻐할 겨를도 없이 오빠가 진세운에게서 할 말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그 전에 설인아는 한 익명의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은 설의종이 친 딸을 찾기 위해 진세운을 찾았다는 것.설인아는 자
설기웅은 설인아를 안아 들고 위층으로 데려갔고 그 뒤는 나미선이 따랐다.계단 중간쯤 갔을 때, 나미선이 고개를 돌려 설의종을 향해 소리쳤다.“여보, 당신도 같이 올라와 봐요!”설의종의 표정은 매우 차가웠다. 이미 50대가 된 나이였지만 눈에는 늘 호수 같은 고요함과 차분함, 차가움이 공존해 있었다.“아니.”나미선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제가 뭘 잘못했나요? 점점 저한테 냉담한 것 같네요.”“하늘이.”“여보, 하늘이가 누구예요?”의혹투성이던 나미선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문득 여동생의 이름이 나하늘이었던것이 떠올랐던 것이다.“설마 나하늘 좋아하는 건 아니죠? 걘 가난한 작가와 사랑의 도피를 했었잖아요? 여보, 당신은 젊었을 때 그 아이를 좋아했고, 둘의 일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되면 결혼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죠. 하지만 설씨 가문 선조들이 그 아이에 대해 꿰뚫어 보고 당신과 함께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저와 결혼시켰어요. 그 아이가 당신을 포기한 건 걔가 안목이 없고 멍청해서예요.”설의종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그녀는 진실한 표정과 얼굴이었다.“여보, 다시는 그 얘기 안 하기로 약속했잖아요.”설의종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를 다독였다.연기력은 정말이지 여우주연상감이다. 한 치의 허점도 찾을 수 없는 명연기였다.이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설의종은 나미선의 눈빛부터 표정까지 조금의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다.그의 양미간이 찌푸려졌다....위층에서는 설인아가 오빠의 품에 안겨 펑펑 울고 있었다.“오빠, 진세운 씨 만나러 가지 마요. 그 사람은 못된 사람이에요. 이렇게 부탁할게요. 만약 정말 만나러 간다면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 준 약 절대 먹지 않을 거예요.”설인아의 눈에는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절대로 설씨 가문 공주님이라는 신분을 잃어서는 안되었다.성혜인은 가서 죽어버려야 한다.그녀는 꼭 성혜인을 죽게 할 것이다.설인아는 크게 심호흡했다. 이때 휴대폰이 진동했고 메시
진세운과의 만남을 거부한 설기웅은 나미선과 함께 설인아를 돌보았다.그러나 설의종은 외출하였다. 그는 진세운이 대체 무엇을 알려주기 위해 만남을 주선한 것인지 궁금했기에 직접 차를 몰았다.차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반승제에게서 연락이 왔다.“회장님, 당분간 진세운과 접촉하지 말아 주세요. 아직 증거 찾고 있어요.”“진세운이 몇 시간 전에 만났을 땐 딸아이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고 사과하더니 금방 갑자기 사실 단서가 있다고 연락이 왔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려고 하는데.”그 말을 들은 반승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기에 의심만 하고 있던 상태였다.그저 진세운을 스파이로 설정했을 때 모든 상황이 설명이 되는 것뿐이었다.진세운이 바로 그 나뭇잎인 것이다.만약 정말 진세운이라면 그의 배후 세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할 것이다.“회장님, 전에 BKS에 중요한 인물이 있다고 하셨죠. 귓불에 작은 붉은 점이 있는. 혹시 진세운과 만났을 때 본적 없으신가요?”“나도 주의해 보았지만 붉은 점은 없었다.”반승제는 한순간에 아연해졌다. 어떻게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혹시 진세운이 그 붉은 점을 가리거나 없앤 건가?“혹시 진세운을 의심하는 거냐? 사실 전에 그 녀석이 내 개인 의사를 맡은 적이 있었다. 만약 그 녀석에게 다른 속셈이 있었다면 내가 알아차렸어야 하지만 진세운은 원체 말을 잘하지 않는 데다가 말투도 온화하다.”이 사건에서 힘든 점은 모든 사람이 진세운을 굳게 믿는다는 것이다.온시환도, 설의종도 그를 굳게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진세운에게는 이 두 사람을 죽일 무수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손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반승제는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모든 일이 이토록 우연의 일치로 맞아떨어질 수는 없다. 그는 여전히 진세운이 의심스러웠다.“회장님, 그럼 만나되 안전에 주의해 주세요. 이번에 플로리아로 돌아가는 길에 유용한 단서를 얻었어요. 진세운은 제 의심 대상 1호예요.”전화를 끊은 설의종은 계속하여
그는 성혜인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사정없이 코를 찔렀다.잠든 그의 어깨를 붙잡고 코끝에서 피비린내가 납니다.이런 자극적이고 긴장되는 환경에서 뇌는 제 역할을 잘 못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진세운이 그녀를 위해 총을 온몸으로 막았기 때문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믿으려 했다.이성이 점차 잠식되고 있을 때, 반지를 돌리는 진세운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그의 반복된 빠른 동작은 마치 성혜인의 뇌 스위치를 켠 듯했다.그녀의 의식이 전적으로 진세운의 손에 맡겨졌고 마치 귀신이 들린 듯 조용히 진세운을 따라다니게 되었다.진세운은 그녀의 손을 잡고 500미터의 거리를 헤엄쳐 뭍으로 올라갔다.그제야 진세운은 비로소 조용히 성혜인을 바라보았다.“이 느낌 기억해 둬요.”“네?”성혜인이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그를 올려다보았다.진세운이 성혜인의 귓가에 늘어뜨려진 잔머리를 정리해 주었다.성혜인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지만 심장 박동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다.“선생님, 어깨는 괜찮으세요?”“괜찮아요.”“아, 다행이네요.”그의 뒤를 따르는 성혜인은 잠깐은 진세운의 어깨부상을 걱정하고, 또 잠깐은 반승제를 생각했다.하지만 성혜인은 그 사랑이 마치 손에 쥔 모래처럼 느껴졌다. 움켜쥘수록 서서히 흘러내리는 모래 말이다.손가락 사이로 사라지는 그 느낌은 성혜인더러 저항하고 싶게 했다.그녀가 걸음을 멈추자 진세운이 입을 열었다.“혜인 씨, 이리와요.”그의 뇌는 무언가에 의해 지배당하듯 바로 그를 향해 걸어갔다.그녀가 모르는 건 이 며칠간 진세운이 그녀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성혜인의 의지력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최면만으로는 부족했고 보조제로 약물을 첨가했다.그녀가 별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들이마신 공기 하나하나에 모두 약재가 들어 있었다.다른 사람들은 모두 해독제를 먹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하기에 잠을 아무리 자도 피곤하다 느낀 것이었다. 성혜인의 이성이 무너지기 직전이며 의식 저항도 점차 낮아지고
가드레일이 부서진 다리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어떤 사람은 경찰에 신고했고 기자들이 여럿 몰려와 현장 보도를 시작했다.이 시각, 성혜인은 이미 새 차에 탔고 두 사람의 옷은 모두 젖은 상태였다.진세운은 깨끗한 수건을 가져와 그녀의 머리를 닦았는데, 이때 성혜인은 마치 말을 잘 듣는 꼭두각시처럼 순순히 머리를 내주었다.전 같았더라면 그녀는 사람을 밀어내고 스스로 머릿결을 닦고 정리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성혜인의 머릿속 깊은 곳에는 끊임없이 누군가 최면을 걸었다.‘해치지 않을 거야. 그 사람의 말을 들어봐.’성혜인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진세운은 그녀의 속눈썹 한올 한올을 모두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한참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혹시 승제를 찾는 이유가 사랑해서예요?”눈을 뜬 성혜인이 망설임 없이 그의 깊은 눈과 눈을 마주쳤다.그의 눈은 마치 깊은 바다처럼 사람을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네, 그렇죠. 승제 씨를 사랑해요. 세상에서 제일.”“만약 승제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된다면요?”“누구요? 설씨 집안 그 가짜 딸이랑요? 선생님, 진짜 딸이 누군지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데려왔다면서요. 지금 바로 전화해서 회장님께 알려줘요.”“혜인 씨, 오늘 밤에 총 두 대의 차에 사고가 났어요. 하나는 혜인 씨와 제가 타고 있던 차이고 다른 하나는 그 진짜 딸이 타고 있던 차예요. 저는 이미 번호판을 회장님께 알려드렸고 친자확인증까지 첨부했어요. 회장님께서 지금 그 교통사고 현장에 있을 거예요. 친 딸이 참혹하게 죽은 것을 보고 설인아를 어떻게 할지 궁금하네요. 게다가 이 모든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의 친아들일 텐데.”성혜인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진세운을 빤히 10초간 바라보았다.진세운이 피식 웃더니 손끝으로 그녀의 오똑한 코끝을 톡 쳤다.“왜요? 혜인 씨도 설기웅이 벌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해요?”성혜인은 그의 행동이 갈수록 무례해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진세운은 성혜인을 길들이는 중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과일 따윈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딸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뿐이었다.그러나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왔다.온몸은 뻣뻣하게 굳어진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여보세요?”핸드폰으로 애타게 불렀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고, 무언가에 의해 신호가 끊어진 것 같았다.설의종은 즉시 자신의 차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신호가 잡혔던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길을 따라 쭉 운전하자 곧바로 교통사고가 발생한 장소에 이르게 되었다.현장에는 이미 행인들이 구경하고 있었고 주위는 기자들로 시끌벅적했다.차량 두 대가 부딪혀 불꽃이 치솟는 바람에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는 알 수 없었다.설의종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동공 풀린 눈으로 차에서 내린 그는 자신의 발 옆에 웬 사진 한 장이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사진 속에는 그가 아주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 이제껏 본 적 없는 낯선 환경이 펼쳐졌고 여자는 웃음을 짜내는 듯한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설의종은 뭔가가 심장을 가격한 듯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사진 속의 여자는 그가 사랑하던 그 사람이다.이성을 잃은 설의종은 불타는 차를 향해 달려가려고 애를 썼지만,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고 차는 곧 다시 폭발했다.현재 그의 머릿속에는 방금 통화했던 여자아이의 쾌활한 목소리뿐이었다.“아버지, 어떤 과일을 드시겠어요?”“돌아오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서...”“지금 만나러 가는 길이에요...”설의종은 하늘로 치솟는 불길을 보며 마치 그 속으로 빨려가는 듯 온몸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뭔가 말을 하고 싶어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한참 후, 그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진세운에게 전화를 걸었다.“진 선생, 내 딸이...”전화를 받은 사람은 진세운이 아니라 성혜인이었다.“진 선생님 지금 병원에 계세요.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모자라 총까지 맞았거든요. 무슨 일 있으세요?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