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세운과의 만남을 거부한 설기웅은 나미선과 함께 설인아를 돌보았다.그러나 설의종은 외출하였다. 그는 진세운이 대체 무엇을 알려주기 위해 만남을 주선한 것인지 궁금했기에 직접 차를 몰았다.차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반승제에게서 연락이 왔다.“회장님, 당분간 진세운과 접촉하지 말아 주세요. 아직 증거 찾고 있어요.”“진세운이 몇 시간 전에 만났을 땐 딸아이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고 사과하더니 금방 갑자기 사실 단서가 있다고 연락이 왔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려고 하는데.”그 말을 들은 반승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기에 의심만 하고 있던 상태였다.그저 진세운을 스파이로 설정했을 때 모든 상황이 설명이 되는 것뿐이었다.진세운이 바로 그 나뭇잎인 것이다.만약 정말 진세운이라면 그의 배후 세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할 것이다.“회장님, 전에 BKS에 중요한 인물이 있다고 하셨죠. 귓불에 작은 붉은 점이 있는. 혹시 진세운과 만났을 때 본적 없으신가요?”“나도 주의해 보았지만 붉은 점은 없었다.”반승제는 한순간에 아연해졌다. 어떻게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혹시 진세운이 그 붉은 점을 가리거나 없앤 건가?“혹시 진세운을 의심하는 거냐? 사실 전에 그 녀석이 내 개인 의사를 맡은 적이 있었다. 만약 그 녀석에게 다른 속셈이 있었다면 내가 알아차렸어야 하지만 진세운은 원체 말을 잘하지 않는 데다가 말투도 온화하다.”이 사건에서 힘든 점은 모든 사람이 진세운을 굳게 믿는다는 것이다.온시환도, 설의종도 그를 굳게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진세운에게는 이 두 사람을 죽일 무수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손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반승제는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모든 일이 이토록 우연의 일치로 맞아떨어질 수는 없다. 그는 여전히 진세운이 의심스러웠다.“회장님, 그럼 만나되 안전에 주의해 주세요. 이번에 플로리아로 돌아가는 길에 유용한 단서를 얻었어요. 진세운은 제 의심 대상 1호예요.”전화를 끊은 설의종은 계속하여
그는 성혜인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사정없이 코를 찔렀다.잠든 그의 어깨를 붙잡고 코끝에서 피비린내가 납니다.이런 자극적이고 긴장되는 환경에서 뇌는 제 역할을 잘 못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진세운이 그녀를 위해 총을 온몸으로 막았기 때문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믿으려 했다.이성이 점차 잠식되고 있을 때, 반지를 돌리는 진세운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그의 반복된 빠른 동작은 마치 성혜인의 뇌 스위치를 켠 듯했다.그녀의 의식이 전적으로 진세운의 손에 맡겨졌고 마치 귀신이 들린 듯 조용히 진세운을 따라다니게 되었다.진세운은 그녀의 손을 잡고 500미터의 거리를 헤엄쳐 뭍으로 올라갔다.그제야 진세운은 비로소 조용히 성혜인을 바라보았다.“이 느낌 기억해 둬요.”“네?”성혜인이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그를 올려다보았다.진세운이 성혜인의 귓가에 늘어뜨려진 잔머리를 정리해 주었다.성혜인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지만 심장 박동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다.“선생님, 어깨는 괜찮으세요?”“괜찮아요.”“아, 다행이네요.”그의 뒤를 따르는 성혜인은 잠깐은 진세운의 어깨부상을 걱정하고, 또 잠깐은 반승제를 생각했다.하지만 성혜인은 그 사랑이 마치 손에 쥔 모래처럼 느껴졌다. 움켜쥘수록 서서히 흘러내리는 모래 말이다.손가락 사이로 사라지는 그 느낌은 성혜인더러 저항하고 싶게 했다.그녀가 걸음을 멈추자 진세운이 입을 열었다.“혜인 씨, 이리와요.”그의 뇌는 무언가에 의해 지배당하듯 바로 그를 향해 걸어갔다.그녀가 모르는 건 이 며칠간 진세운이 그녀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성혜인의 의지력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최면만으로는 부족했고 보조제로 약물을 첨가했다.그녀가 별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들이마신 공기 하나하나에 모두 약재가 들어 있었다.다른 사람들은 모두 해독제를 먹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하기에 잠을 아무리 자도 피곤하다 느낀 것이었다. 성혜인의 이성이 무너지기 직전이며 의식 저항도 점차 낮아지고
가드레일이 부서진 다리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어떤 사람은 경찰에 신고했고 기자들이 여럿 몰려와 현장 보도를 시작했다.이 시각, 성혜인은 이미 새 차에 탔고 두 사람의 옷은 모두 젖은 상태였다.진세운은 깨끗한 수건을 가져와 그녀의 머리를 닦았는데, 이때 성혜인은 마치 말을 잘 듣는 꼭두각시처럼 순순히 머리를 내주었다.전 같았더라면 그녀는 사람을 밀어내고 스스로 머릿결을 닦고 정리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성혜인의 머릿속 깊은 곳에는 끊임없이 누군가 최면을 걸었다.‘해치지 않을 거야. 그 사람의 말을 들어봐.’성혜인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진세운은 그녀의 속눈썹 한올 한올을 모두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한참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혹시 승제를 찾는 이유가 사랑해서예요?”눈을 뜬 성혜인이 망설임 없이 그의 깊은 눈과 눈을 마주쳤다.그의 눈은 마치 깊은 바다처럼 사람을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네, 그렇죠. 승제 씨를 사랑해요. 세상에서 제일.”“만약 승제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된다면요?”“누구요? 설씨 집안 그 가짜 딸이랑요? 선생님, 진짜 딸이 누군지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데려왔다면서요. 지금 바로 전화해서 회장님께 알려줘요.”“혜인 씨, 오늘 밤에 총 두 대의 차에 사고가 났어요. 하나는 혜인 씨와 제가 타고 있던 차이고 다른 하나는 그 진짜 딸이 타고 있던 차예요. 저는 이미 번호판을 회장님께 알려드렸고 친자확인증까지 첨부했어요. 회장님께서 지금 그 교통사고 현장에 있을 거예요. 친 딸이 참혹하게 죽은 것을 보고 설인아를 어떻게 할지 궁금하네요. 게다가 이 모든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의 친아들일 텐데.”성혜인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진세운을 빤히 10초간 바라보았다.진세운이 피식 웃더니 손끝으로 그녀의 오똑한 코끝을 톡 쳤다.“왜요? 혜인 씨도 설기웅이 벌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해요?”성혜인은 그의 행동이 갈수록 무례해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진세운은 성혜인을 길들이는 중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과일 따윈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딸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뿐이었다.그러나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왔다.온몸은 뻣뻣하게 굳어진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여보세요?”핸드폰으로 애타게 불렀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고, 무언가에 의해 신호가 끊어진 것 같았다.설의종은 즉시 자신의 차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신호가 잡혔던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길을 따라 쭉 운전하자 곧바로 교통사고가 발생한 장소에 이르게 되었다.현장에는 이미 행인들이 구경하고 있었고 주위는 기자들로 시끌벅적했다.차량 두 대가 부딪혀 불꽃이 치솟는 바람에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는 알 수 없었다.설의종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동공 풀린 눈으로 차에서 내린 그는 자신의 발 옆에 웬 사진 한 장이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사진 속에는 그가 아주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 이제껏 본 적 없는 낯선 환경이 펼쳐졌고 여자는 웃음을 짜내는 듯한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설의종은 뭔가가 심장을 가격한 듯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사진 속의 여자는 그가 사랑하던 그 사람이다.이성을 잃은 설의종은 불타는 차를 향해 달려가려고 애를 썼지만,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고 차는 곧 다시 폭발했다.현재 그의 머릿속에는 방금 통화했던 여자아이의 쾌활한 목소리뿐이었다.“아버지, 어떤 과일을 드시겠어요?”“돌아오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서...”“지금 만나러 가는 길이에요...”설의종은 하늘로 치솟는 불길을 보며 마치 그 속으로 빨려가는 듯 온몸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뭔가 말을 하고 싶어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한참 후, 그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진세운에게 전화를 걸었다.“진 선생, 내 딸이...”전화를 받은 사람은 진세운이 아니라 성혜인이었다.“진 선생님 지금 병원에 계세요.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모자라 총까지 맞았거든요. 무슨 일 있으세요?
진세운이 임수아를 찾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반승제가 그녀에게 대역을 맡긴 적이 있다는 건 그만큼 성혜인과 닮았다는 뜻이고 심지어 자라온 환경까지 아주 흡사했다. 둘 다 서천군에서 자라며 그림을 배웠기에 설의종이 사람을 시켜 조사한들 절대 거짓말인 걸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설의종이 받은 그 사진은 진세운이 사람을 시켜 찍은 사진이다. 임수아가 반승제에 의해 쫓겨나던 날 누군가 일부러 그녀에게 연락해 부잣집 아가씨라는 신분을 귀띔해 줬다. 말만 잘 들으면 앞으로 부귀영화를 누릴수 있다는 얘기에 주저없이 그걸 곧이곧대로 믿었다. 당시 막 반승제를 만났던 임수아는 부자들이 사는 세상을 맛보게 되었고 그 후 반승제를 되찾고 싶다는 욕망이 커질수록 성혜인을 무너뜨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눈이 멀었다.이에 진세운은 일부러 성혜인을 방불케 하는 메이크업을 시켜줬다. 특히나 눈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데 중점을 뒀다.허영심으로 가득 찬 임수아의 눈에서는 지혜로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손을 거치자 이런 단점은 순식간에 보완됐고 스스로 신분을 바꾸려는 절박한 야망을 갖고 있어 그런지 표정 연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그녀는 손쉽게 현재의 정체성을 버렸고 부잣집 아가씨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기에 진세운이 뭐라고 하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믿었다.그를 따라 플로리아로 온 임수아는 이곳의 번화함을 본 후 진세운을 점점 더 신뢰하게 되었다.그러나 임수아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이곳에 발을 딛는 순간 이미 죽을 운명이자 언제든지 버려질 카드가 됐다는 것을.임수아는 아주 평범했다. 다만 의도치 않게 반승제에 의해 상류사회의 맛을 보게 되었고 진세운은 그 맛에 흠뻑 빠진 임수아를 끝까지 철저하게 이용할 생각이었다.이것이 바로 진세운의 수단이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현혹하는 데에 도가 텄고, 이용당하는 사람은 줄곧 희망만 품고 있다가 처참한 결말을 맞이한다.아마 임수아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곧 상류층의 삶을 살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더군다나
한편, 설의종은 이미 병원으로 옮겨졌다.의사들은 그에게 수액을 주입하려고 분주하게 준비하기 시작했으나 바늘이 꽂히자마자 설의종은 의식을 되찾았다.그는 바늘을 뽑더니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설씨 가문은 이제 막 설의종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고 설기웅과 나미선은 부랴부랴 걸음을 옮겼다.그러나 문 앞에 이르자 정원 밖에서 차 한 대가 오더니 곧이어 설의종이 차에서 내렸다.설기웅은 강한 감정에 억눌린 듯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하게 되었다.“여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얼굴은 또 왜 이렇게 초췌한 거예요?”나미선은 여느 때처럼 그가 벗은 정장을 정리하려고 앞으로 다가갔지만, 설의종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그의 온 신경은 설기웅에게 집중되어 있었다.설기웅은 현관에 서서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어조를 보였다.“아버지.”그러나 다음 순간, 설의종은 현관 입구에 놓인 꽃병을 들더니 망설임 없이 설기웅을 향해 던졌다.방심하고 있던 설기웅은 피할 겨를도 없이 정면으로 맞았고 이마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나미선은 겁에 질린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재빨리 앞으로 다가가 설기웅을 감싸안았다.“여보,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래요? 기웅이가 뭘 잘못했어요?”나미선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고 당장이라도 설기웅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싶었다.그러나 설기웅은 꼼짝하지 않은 채 집요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 또한 자신이 무슨 천리에 어긋나는 짓을 해서 아버지가 이토록 화를 내는지 알고 싶었다.설기웅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설의종이 소파 쪽으로 걸어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고 눈빛은 칼날처럼 예리했다.어려서부터 응석받이로 자란 설기웅은 아버지로부터 이토록 미움을 산적이 없었다.그래서인지 마음이 더욱 아팠다.설의종은 소파에 앉자마자 혐오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오늘 밤에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얘기해 봐.”설기웅은 자신이 설인아를 도운 걸 숨기고 싶었
아래층으로 내려온 설인아는 무릎을 꿇고 있는 설기웅과 창백한 얼굴의 나미선을 보고선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아버지.”그녀의 부름에도 설의종의 시선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그 싸늘함이 몸을 꿰뚫는 느낌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굴러온 돌 주제에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 네가 설씨 가문으로 잘못 들어온 바람에 내 딸이 어린 시절을 빼앗겼어.”설의종의 머릿속은 온통 그가 방금 본 불길로 가득 차 있었다. 설인아가 설기웅을 시켜 자신의 딸을 살해했다는 생각만으로 설씨 가문 전체를 엎어버리고 싶었다.단지 딸이 살아 돌아오기를 바랄 뿐,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미련이 없었다.설인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했다.“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뜻인지 정말 모르겠어요.”그녀는 무릎을 꿇고 있는 설기웅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오빠, 아버지 밖에서 무슨 충격이라도 받으셨나 봐. 나 너무 무서워. 엉엉...”말이 끝나자마자 설의종은 친자 확인서를 던졌다.“너랑 나의 친자 확인서다. 넌 내 딸이 아니잖아. 다 알고 있으면서 순진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는 걸 보니 정말 역겹구나.”설인아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지만, 끝까지 모르는 척 하기로 결심했다.“몰랐어요. 전 정말 몰랐다고요. 아버지, 제가 어떻게 친딸이 아닐 수가 있겠어요? 지금 누군가에게 속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승제 오빠가 그런 거죠? 전에 있었던 일로 지금 저한테 복수하는 게 확실해요. 어머니,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저 진짜 너무 무서워요.”소파에 앉아 있던 나미선은 무의식적으로 설인아를 달래려고 움직였으나 곧바로 설의종의 기세에 눌려 끝내 자리에 앉아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여보, 인아 말이 맞아요. 밖에서 헛소문이라도 들은 게 아니에요? 친자 확인은 충분히 조작했을 수도 있죠.”“내가 직접 했고, 내가 보는 앞에서 결과가 나왔는데 이게 가짜라고요?”담담한 말투와는 달리
설의종은 이 모든 것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계획한 일이라는 걸 몰랐다. 늘 그렇듯 진세운은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정보의 격차를 만들어 사실을 왜곡했다.설의종이 알고 있는 건 딸이 자신을 찾으러 온다는 사실뿐이었다.설인아에게 속은 설기웅은 자신이 성혜인과 그녀의 중요한 사람들을 처리한 줄 알았다.오직 설인아만이 성혜인이 진짜 딸인 걸 추측해 냈지만 그녀는 설씨 가문에서 쫓겨나더라도 성혜인이 이런 부귀영화를 누리는 걸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이 사실에 대해 입을 다물기로 결심했다.그리고 성혜인. 그녀는 오늘 밤에 일어난 모든 일이 설기웅의 계획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진세운과 설씨 가문의 아가씨를 제거하기 위해 꾸민 일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 아가씨가 본인이라는 건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그렇게 그들은 서로 다른 정보를 얻었고, 서로 소통할 리가 없는 이러한 관계에서는 정보 격차로 인해 원한이 생긴다.정말 완벽한 계획이다....설기웅은 부하들이 친자 확인서를 가져올 때까지 한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다.[친자 불일치]그는 머리에 총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친자 확인서를 바라봤다.설의종은 일찌감치 이런 결과를 예상했다. 다만 한순간에 10년이 늙은 듯 얼굴이 초췌했고 평소 늘 꼿꼿하던 허리마저도 잔뜩 휘어졌다.갑자기 불안해진 설인아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듯 필사적으로 설기웅의 팔을 붙잡았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엉엉... 내가 친자식이 아니라니...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대로 집에서 쫓겨나는 건가? 오빠, 나 도와줄 거지? 이대로 쫓겨나기 싫단 말이야.”그녀는 울부짖으며 기어가 나미선의 다리를 끌어안았다.“어머니, 절 누구보다도 많이 사랑해 줬잖아요. 제발요. 이렇게 빌 테니까 한 번만 도와줘요. 설마 그 사랑이 다 가짜였던 거예요? 나만 진심이었던 거 아니죠? 엉엉...”강아지도 20년 넘게 기르면 정이 들기 마련이다.나미선은 손을
그는 오래전부터 공지민에게 깊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예전에는 온시환도 잘 몰랐다. 그러다 구은우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 많은 순간, 공지민은 아마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붙잡아 두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녀 자신조차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마치 생기 없는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모습이었다.온시환이 처음 그녀를 싫어했던 이유도 바로 그녀에게서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계속 그녀를 신경 쓰다 보니, 점점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간 후 공지민의 왼쪽에는 강민지, 오른쪽에는 성혜인이 앉았다.사실 그녀는 성혜인을 알고 있었다. 과거 성혜인과 반승제의 사건이 너무나 크게 이슈가 되어 실시간 검색어에서 자주 본 이름이었다.공지민은 성혜인을 굉장히 자존심 강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생각보다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자들은 마당에 앉아 있었으며 방해하지 않고 때때로 과자나 과일을 들고 와 전해 주었다.강민지가 갑자기 공지민의 손을 잡았다.“지민 씨, 시간 될 때 우리랑 자주 만나요. 남자들이랑만 있지 말고. 남자라는 것들은 말이지, 맞춰 주면 맞춰 줄수록 그걸 당연하게 여겨요.”강민지는 아직 공지민과 온시환의 결혼이 단지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공지민에게 남자를 길들이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공지민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만약 내가 시환 씨를 단지 이용하고 있는 거라면요...”앞에 있는 두 여자는 온시환의 친구들이었다. 만약 이 결혼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거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를 몹시 싫어하게 될 것
성혜인은 한순간 감개무량해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식탁 위의 분위기는 여전히 약간 어색했지만 강민지가 공지민에게 그녀가 출연했던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성혜인은 그제야 강민지가 공지민이 출연한 드라마를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지민은 처음엔 다소 긴장해 보였으나 점차 눈에 띄게 여유로워졌고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강민지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강민지가 성혜인에게 눈짓을 보내자 성혜인도 따라 웃음을 지었다.가끔 여자끼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공감하는 특별한 순간이 있다.식사가 끝날 무렵, 강민지는 공지민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지민 씨, 마지막에 출연했던 드라마는 왜 몇 화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 캐릭터가 그렇게 빨리 죽을 캐릭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퇴장하더라고요.”사람의 진심은 상대의 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법이다.공지민은 강민지가 진심으로 자신의 드라마를 좋아하며 각 에피소드까지 꼼꼼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원래 문보영은 공지민의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문보영과 온시환이 키스하는 모습을 본 후 그녀와 연락을 끊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졌고 예전처럼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그동안 공지민은 참 외로웠다. 그런데 강민지가 먼저 다가와 주자 그녀는 묘하게 안도감을 느꼈다.“그땐 회사에서 문제가 있어서 제가 잠시 활동을 중단해야 했어요. 그래서 그 캐릭터도 일찍 하차할 수밖에 없었죠.”“정말 아쉬워요. 그 캐릭터 팬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끝까지 연기했으면 팔로워가 최소 백만 명은 더 늘었을 거예요.”공지민은 웃음을 터뜨리며 눈매가 휘어졌다.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온시환은 혼자 계산을 하러 갔다.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공지민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다시 보았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은 녹아내릴 듯 부드러워졌다.반승제와 신예준이 그의 앞에 있었지만 온시환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공지민은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온시환 앞에서 이렇게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있었는지 떠올렸다.그날 밤 두 사람이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 온시환은 그녀의 그 미소를 떠올리며 뒤척였다.휴대폰은 침대 옆에 놓여 있었고 최근 연락한 친구들로부터 술자리 초대 메시지가 와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공지민과의 결혼을 생각하며 그녀가 이미 동의했으니 내일 당장이라도 혼인신고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는 돌아누워 공지민을 바라보았다.한편 공지민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에 관한 생각, 특히 결혼 상대가 온시환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낯설고 어색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이 없었다.“지민아, 너도 결혼하기로 했으니까 내일 바로 혼인신고하러 가자.”온시환은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은 결혼이 최소 몇 달 후에나 진행될 줄 알았는데 그가 이렇게 서두를 줄은 몰랐다.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온시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공지민이 마음을 바꿀까 두려웠다. 결혼도, 구은우의 죽음에 대한 조사도 그만두겠다고 하면 그가 그녀를 곁에 붙잡아둘 명분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온시환은 새 정장을 꺼내 입으며 추지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혼인신고하러 간다.]추지성은 이 메시지에 놀라 즉시 전화를 걸어왔다.“야, 너 농담하는 거지? 진짜 가는 거야? 지민 씨가 동의했어?”“응, 동의했어.”추지성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눈을 멍하니 뜬 채 온시환이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온시환은 다른 친구들과 있는 단톡방에도 혼인신고 소식을 알렸다. 단톡방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고 곧이어 물음표가 연달아 올라왔다.가장 강렬한 반응을 보인 건 당연히 설우현이었다. 그는 연달아 다섯 개의 놀란 이모티콘을 올리며 반응했다.다른 사람들은 몇 분간 망설이다가 그제야 축하 메시
온시환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추지성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둘은 별다른 말 없이 게임을 시작했다. 온시환은 게임을 하는 중에도 간간이 휴대폰을 확인하며 초조해했다.저녁 7시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공지민이었다.“국 끓였어요. 와서 먹을래요?”우울한 기분에 젖어 있던 온시환은 그 한마디에 바로 게임기를 내려놓고 밖으로 향했다.그러자 추지성이 소파에 앉아 목소리를 높였다.“야, 어디 가냐? 곧 배달 음식 도착하는데, 나 혼자 다 못 먹어!”“집에 가서 지민이가 끓인 국 먹을 거야.”추지성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뭐야, 이 말투에서 자랑하는 느낌이 나는 건 왜지?”온시환은 이내 추지성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반 시간도 안 돼 집에 도착했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국 냄새가 코를 찔렀다.공지민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온시환은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가 원하는 건 많지 않았다.공지민이 그의 곁에 몇 년만 더 있어 준다면 그 뒤로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남기고 떠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깔끔히 정리하고 아무런 짐도 남기지 않을 작정이었다.‘지민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내가 사라져도 아무렇지도 않겠지...’온시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방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무슨 국 끓인 거야? 냄새가 너무 좋은데.”공지민은 그가 돌아온 걸 보고 작은 그릇에 국을 담아 그에게 내밀었다.“또 지성 씨랑 술 마시러 나갔어요?”온시환은 그녀가 추지성을 싫어한다고 생각해 서둘러 부인했다.“아니야. 다른 사람들이랑 있었어.”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였다.“여자는 없었어.”공지민은 방금 만든 반찬들을 모두 식탁으로 옮기고 밥도 한 그릇 담아 내왔다.둘이 나란히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다. 이렇게 평화롭게 식탁을 마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온시환은 이 고요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국을 천천히 떠먹었다.식사가 끝날 무렵 공지민이 그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바로 문을 나섰다.공지민은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한편 온시환은 집을 나서자마자 추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온시환은 침착하게 옷을 발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거실 한가운데에서 추지성은 한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온시환을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금세 흥미를 잃고 입맞춤을 멈췄다.“시환아?”추지성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온시환은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무시했다.추지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이만 가봐.”여인은 옷이 주워 입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자 추지성은 타올 하나만 걸친 채 태연하게 소파로 와서 앉았다.“야, 너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 좀 하고 와라.”온시환은 담배를 쥔 손이 축 늘어진 채 지쳐 보였다.추지성은 의아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공지민과 화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가 싶었다.“무슨 일이야? 아침에 전화로 자랑질하더니만. 아, 맞다. 너 점 다시 찍었더라? 확실히 점 있는 네가 낫다. 예전에 다른 여자들도 그 점이 좋아서 너한테 홀렸잖아.”온시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구은우의 죽음을 조사하려는 거였어.”추지성은 옆에 놓인 주스를 집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죽은 사람의 일을 왜 조사해? 이게 몇 년 전 일이냐. 다 끝난 거잖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난 가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돼. 남자라면 이미 새로운 연애 몇 번은 했을 텐데.”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봐봐. 주변에 아내 잃은 남자들 있지? 그놈들 지금 얼마나 잘 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근데 남편 잃은 여자들은? 평생 못 벗어나.”추지성의 가족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의 친누나는 난
공지민은 정말 지쳤다. 밤새 몇 번이나 잠들 뻔했지만 온시환이 계속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자신의 위에 엎드린 온시환을 바라봤다. 그의 볼은 붉게 달아올랐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끊임없이 떨어졌다.온시환이라는 이 나쁜 남자 몸매 하나는 참 잘 관리했다.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문득 생각했다. 그녀는 코끝에 점이 있는 온시환이 더 좋았다. 만약 점이 없었다면 그와 대화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온시환은 그녀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자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빌어먹을.’공지민이 이 점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다행히 다시 그 점을 되돌려 놨다.온시환은 그녀의 뒤통수를 붙잡고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속으로 흡수해 버리고 싶어 하는 듯했다.그날 공지민은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다.원래 아침에 일어나 사골국을 끓이려고 했지만 전날 밤 온시환의 끈질긴 괴롭힘에 결국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깨어났을 땐 창밖에 저녁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며 온시환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그래, 점 다시 찍었어. 신경 꺼. 쪽팔려도 내가 쪽팔려. 너랑 무슨 상관인데. 자꾸 그딴 소리하면 화낼 거야.”지난번 온시환이 점을 제거했을 때 많은 사람이 물었다. 그는 그냥 없애고 싶어서 없애는 거라며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말해 왔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점을 다시 찍자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궁금해했다.온시환은 아무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추지성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온시환은 그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다.사실 추지성이 온시환을 부추기지만 않았더라도 그와 공지민이 이렇게까지 어긋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추지성은 여전히 냉철했다.“지난번에 너희가 금방 헤어지고 네가 병원에 실려 갔을 때도 지민 씨는 한 번도 널 보러 오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돌아온 걸 보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나는 너희가 다시 잘되길 반
하지만 택시 기사는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공지민이 내리려 할 때까지도 계속 말했다.“내가 보니까 그 남자 친구 참 괜찮아 보이던데. 뒤따라오는 저 차도 그 사람 거죠? 아무리 싸웠어도 아가씨 혼자 차 타고 가는 거 걱정돼서 저렇게 따라오는 거 아니겠어요?”공지민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차를 바라보았다.온시환의 차가 틀림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시급했다.집에 도착한 공지민은 곧장 인터넷에서 그 남자 배우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하지만 검색 결과는 이름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그의 가족에 대한 부분은 아예 생략돼 있었다.하는 수 없이 그녀는 예전에 알던 몇몇 기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혹시라도 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정보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공지민은 연예계에서 활동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인맥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사교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이번 조사가 더욱 쉽지 않았다.소파에 앉아 돈을 송금하며 기자들에게 의뢰했지만 돌아온 정보는 여전히 부족했다.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의 연락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마음이 초조해진 공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분명 실마리를 찾았지만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공지민의 시야에 여전히 아래에 서 있는 온시환의 차가 들어왔다.만약 온시환이의 능력이라면 이런 조사는 금세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고 집 문을 열었다.아래로 내려온 그녀는 온시환의 차 앞으로 걸어갔다.운전석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던 온시환은 공지민을 보자 깜짝 놀란 듯했다.공지민이 창문을 두드리자 그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시환 씨.”온시환은 그녀가 자신을 쫓아내려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코끝에는 예전과 똑같은 점이 다시 자리 잡고 있었다.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공지민은 남자의 말을 들으며 그를 부축했다. 남자는 술이 정말 많이 취했는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해도 다 대답했다.10억...엘리베이터가 한 층에서 멈췄을 때 공지민은 그를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남자는 자신의 방 카드를 꺼냈고 공지민을 향한 시선은 이미 노골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다.공지민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지만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그가 건넨 카드를 받아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손목을 잡아 막았다.뒤를 돌아보니 온시환이었다.온시환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그렇게 공지민은 그의 가슴팍에 부딪혔고 옆에 있던 남자 배우는 누군가 자신을 막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있다가 온시환의 얼굴을 보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온 작가님?”온시환은 공지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원래부터 이 남자와 뭔가 할 생각이 없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얼굴로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그의 감정은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을 때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공지민, 너 그렇게 절박해?”‘절박해’라는 말이 그의 목에서 걸리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려 했지만 너무 떨려 담배는 그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굴러갔다.공지민은 온시환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남자 배우와 관련된 조사에 쏠려 있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반드시 구은우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결심했다.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가자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온시환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아래층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모임 장소는 고급스러워서 촬영을 마친 여러 제작팀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오늘 밤에도 몇몇 팀이 이곳에 모여 회식을 하고 있었다.연예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온시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