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인아의 눈은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나미선에게 사정하는 것뿐이다.“아버지 좀 말려줘요. 저 정말 나가기 싫어요. 앞으로 효도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쫓아내지 말아요.”애간장을 태우던 나미선은 자비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굳건한 설의종의 모습을 마주하고선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지금 다가가서 인아를 위해 사정하는 순간 어쩌면 본인도 쫓겨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저 한숨만 내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설인아는 꼼짝 못 하는 눈앞의 여자를 보고선 답답함이 밀려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빌게요.”설의종의 말에 충격을 받은 설기웅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말도 안 돼. 인아처럼 착한 애가 어떻게 날 속여... 저렇게 여린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려고 계획했을 리가 없어...’그는 허리를 굳게 세운 채로 자리에 얼어붙었다.이때 거실 문이 열렸다. 밖에서 돌아온 설우현은 어수선한 집안을 보고 어리둥절했다.“무슨 일 있었어요?”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꾹 닫고 있던 그때 설의종이 입을 열었다.“우현아, 이제부터 설씨 가문의 주식은 너한테 넘어갈 거다. 대표직도 당분간은 네가 맡는 게 좋을 것 같구나.”설우현은 환청이 들리는 줄 알고 귀를 의심했다. 패가망신하기로 소문난 그가 지금껏 모든 관리를 잘해온 큰형을 대신해 이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됐는데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는가?‘아버지가 무슨 자극을 받으신 건가?’제원에서 막 돌아온 그는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아버지,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농담치고는 설의종의 표정이 너무 엄숙한 데다가 설인아는 경호원 두 명에게 끌려갔고, 설기웅은 이마에 피를 흘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다.설우현은 곧 터질 듯한 폭탄을 안고 있는 느낌에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이 집안의 실질적인 권력자는 설의종이다. 만약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뜻을 거역한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버지가 말씀하신 게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형, 전 아버지를 믿어요. 제원에 간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을 눈여겨보라고 당부하셨어요. 처음에는 그 말이 이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제원의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서 여동생의 정보를 알아내길 바랐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이 일을 진세운 씨에게도 부탁했어요. 세운 씨도 사고를 당했으니 이번 일은 빼박아닌가요? 두 사람이 똑같이 실수할 리가 없잖아요.”설우현은 설기웅보다 냉정한 사람이다. 이로써 설인아를 싫어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때때로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은 건 사실이다.“형이 가족을 애틋하게 여기는 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제원에 있을 때 인아는 상식에 벗어나는 행동을 많이 했어요. 반 대표님이랑 혜인 씨가 잘 만나고 있는데 굳이 끼어들어서 훼방을 놓고, 심지어 형도 거기에 가담했잖아요.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요. 만약 반 대표님이랑 인아가 만나고 있는데 혜인 씨가 그 관계를 망치고 싶어서 안달 났다면 가만히 있었을 거예요? 우쭈쭈해 주는 건 좋은데 그것도 정도가 있어야죠. 오늘 밤 인아는 형의 손을 빌려서 우리 여동생을 죽인 거예요. 이 모든 사단이 다 형이 오냐오냐해줘서 일어났다는 걸 잊으면 안 돼요.”설기웅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그의 말에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설우현은 의식을 잃은 설인아를 바라봤다.“솔직히 지금 얘 목숨을 살려둔 것도 20년 동안 함께 지낸 세월을 염두에 두고 내린 결정이에요. 형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제 롤모델이었어요.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랄게요.”말을 마친 그는 곧장 자리를 떴다.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돌아왔는데 집안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었다.그는 바보가 아니다. 설의종이 오랫동안 두 아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누군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뜻했다.어쩌면 아직도 한 차례의 치열한 싸움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반승제는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세운아, 잠깐 만날래?”핸드폰 너머의 진세운은 웃고 있었다.“마침 할 얘기가 있었는데 잘됐네.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돌려 성혜인을 바라봤다.“혜인 씨, 승제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연락왔는데 직접 얘기해요.”옆에서 책을 읽던 성혜인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책을 꽉 움켜쥐었다.그녀는 반승제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왜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어쩌면 집착일 거라고 생각했다.“진 선생님, 전...”진세운은 핸드폰을 그녀의 손에 넘겼다.“제가 이따가 그쪽까지 데려다줄게요. 승제 만나고 싶다면서요.”눈살을 찌푸린 채 그의 말을 듣던 반승제는 담배를 쥐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지?’그러나 성혜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숨 쉬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워졌다.“혜인아?”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담배로 인해 화상을 입을 지경이 되었음에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핸드폰을 귀에 더 가까이 붙였다.“혜인?”성혜인은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밥 먹었어요?”반승제는 10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물었다.“반승우 별장에서 함께 보냈던 그 며칠 밤... 기억해?”반승제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곳까지 몰래 들어갔다. 비록 당시의 성혜인은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매일 밤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기억해요.”성혜인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왜요? 절 찾으러 올 거예요?”반승제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그 며칠 밤은 달콤하면서도 부끄러운 추억이었다.이런 말을 꺼냈을 때 예전의 성혜인이라면 반드시 우물쭈물하다가 변태라며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와 너무 다른 반응에 진세운이 수작을 부렸을 거라며 확실했다.반승제는 고개를 푹 숙였다.“응. 데리러 갈게.”성혜인은 미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회전 유리문 안으로 걸어갔다.그 시각 성혜인은 작은 포크로 앞에 놓인 디저트를 한입 베어먹고 있었다.그러다가 눈길을 사로잡는 훤칠한 남자가 다가오자 온몸이 굳어지더니 이내 손에 든 포크를 내려놓고 예의 갖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승제 씨, 왔어요?”반승제는 아무 말로 하지 않고 바로 진세운의 곁으로 가서 그의 멱살을 잡았다.‘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냐고!’진세운은 흥미로운 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가볍게 웃었다.“뭐 하는 짓이야?”반승제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하얀 손이 그를 가로막았다.고개를 돌리자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성혜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진 선생님이 절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죽었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얼마나 난폭한지 알긴 해요?”반승제는 눈빛에는 의아함이 스쳤다.“승제가 널 구했다고?”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내쳤다.“자초지종도 모르면서 화부터 내는 건 진짜 별로네요. 승제 씨,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네요.”잔뜩 실망한 그녀의 모습을 마주하자 반승제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진세운을 뿌리치고 곧장 성혜인의 손을 잡았다.“혜인아, 나랑 가자.”그 시각 성혜인의 시선은 진세운을 향하고 있었다.“진 선생님, 괜찮아요?”진세운은 여유롭게 옷깃을 정리하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반승제의 시선은 그의 귓불에 떨어졌다. 왼쪽이랑 오른쪽 전부 다 확인해 봤지만 그가 찾으려는 붉은 점은 없었다.미간이 절로 찌푸려졌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꿈에 그리던 성혜인을 만났기에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뒀던 수많은 얘기들을 털어놓고 싶었다.넘칠듯한 그리움은 어느새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진세운은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괜찮아요. 승제 만나고 싶었잖아요. 얼른 같이 가요.”성혜인은 망설이고 있었다.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지 스스로도 몰랐으나 그저 진세운과 떨어지면 불안할 것 같은 느낌
반승제는 차에 올라탈 때까지 성혜인의 손목을 꽉 붙잡고 있었다.쾅!그는 있는 힘껏 차 문을 닫더니 곧바로 성혜인의 얼굴을 잡고 키스를 퍼부었다.하지만 성혜은 쭈뼛거리다가 끝내 고개를 돌려 그를 피했다.그 모습에 반승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는 두 손으로 운전대를 꽉 잡은 채 감정을 추스르려고 애를 썼으나 그럴수록 호흡이 점점 더 가빠졌다.반승제는 진세운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왜 갑자기 성혜인을 돌려보내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완벽하게 짜놓은 판에 걸려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조수석에 앉아 있던 성혜인은 앞을 바라보며 안전벨트를 꽉 쥐었다.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약물을 흡입하고 깊은 최면을 받은 성혜인은 안정감을 주는 진세운이 곁에 없자 점점 더 불안해졌다.반승제는 그녀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현재로선 지하 격투장을 가는 게 우선이다.하여 액셀을 끝까지 밟아 불과 3시간 만에 지하 격투장의 정문에 이르렀다.그는 성혜인을 품에 안은 채 조각상 앞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성혜인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목을 세게 껴안았다. 귀청을 찢는 듯한 비명소리와 굉음이 들려오자 불안함이 엄습해 오는지 반승제의 가슴팍에 머리를 파묻었다.반승제는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그렇게 어느새 그의 구역인 7층에 도착했다.성혜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압도되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곳을 옮겨놓은 듯 화려했다.반승제는 그녀를 옆에 있는 큰 소파에 앉히고 주저 없이 그 위로 올라탔다.“웁... 하지 마요.”숨이 막히는 키스에 무의식적으로 몸을 피하고 싶었으나 그럴수록 점점 더 깊은 심연에 빨려 들어갔다.반승제는 그녀를 품에 꼭 안은 채 한 시간 동안 몸 곳곳에 입을 맞췄다.입술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반승제는 그녀의 반응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꼈다.누군가를 사랑하는 때는 그 사람의 눈빛만 봐도 티가 난다. 예전의 성혜인이라면 그의 머리를 밀어내며 괴로워
성혜인은 반박하고 싶었다.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그가 돌아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며 한시도 걱정을 늦춘 적이 없다고 얘기하고 싶었으나 마치 딜레마에 빠진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를 사랑하고 싶지만, 머릿속은 무언가에 의해 방해를 받는 듯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순간 속이 울렁거린 성혜인은 연신 헛구역질했으나 전혀 토하지 못했다.머리가 아픈 것이 아니라 단지 두려움이 그녀를 삼켜버렸다. 심지어 반승제와 함께 있는 일분일초 매 순간 불안함을 느꼈다.반승제는 더 이상 그 눈빛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지 넥타이를 풀어 그녀의 눈을 가렸다.어둠이 닥치자 몸의 자극은 수천 배로 증폭되었다.“웁...”반승제는 두 번이나 했지만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성혜인을 품에 안은 채 카펫 위에서 맘껏 욕구를 풀었다.“승제 씨...”성혜인이 넥타이를 풀어달라며 애원할수록 반승제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어떤 느낌인지 잊었지? 내가 널 얼마큼 사랑했는지 다 떠올리게 해줄게.”“안 잊었어요. 기억하고 있다고요.”“혜인아, 너 변했어. 아무도 접근할 수 없던 가시 돋친 모습은 어디 가고... 왜 말 잘 듣는 애완동물처럼 길들여졌나고!”날벼락을 맞은 듯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성혜인은 말문이 막혀 입을 열 수 없었다.반승제의 땀방울은 그녀의 가슴에 떨어졌고, 목소리는 더없이 허스키했다.“네 탓이 아니야. 내가 반드시 다 돌려놓을 거야.” 성혜인은 단지 그의 테크닉이 괜찮다고 생각할 뿐, 별 반응이 없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새벽까지 관계를 나눴고 반승제는 그녀가 힘들지 않게 틈틈이 체력 보충할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를 품에 끌어안은 채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넥타이를 풀자 성혜인은 초점 풀린 눈으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고 머리카락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반승제는 두 볼이 발그레 달아오른 그녀의 모습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그러고선 넥타이를 코끝에 올려 그녀의 향기를 맡았다.그 행동을 본 성혜인은 얼어붙었고 이
그들은 어려서부터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 심지어 친구들과 함께 파티하는 도중에 사람이 바뀐 적도 있었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그들을 길러낸 사람 외에는 이 비밀을 아는 이가 없었고 둘은 늘 같은 이름을 공유하면서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지내왔다.예를 들어 그들 중 한 사람이 제원의 파티에 참석했다면, 모든 걸 상황을 기억한 채 언제 누구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주 자세하게 정보를 주고받았다.하여 두 사람 사이에는 비밀이 없었다.형이 좀 더 온화하고 부드러운 스타일이라면 동생은 그 모습마저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있었다.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형은 담배를 피우지 않고 동생은 담배를 피운다.지난 몇 년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대역을 연기하며 본인들만의 세상에서 모든 사람을 조롱했다.또한 그들은 사석에서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 형은 세운, 동생은 백운이라고 불렀다.“세운아, 설마 성혜인한테 최면 걸었어?”“응.”진백운은 소파에 앉아 자신의 귓불을 문질렀다.“지난번에 시환이가 내 귓불을 뚫어져라 쳐다봤을 때 누군가가 이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어. 반승제 참 대단하지?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고민도 안 하고 바로 날 의심하다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진백운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내 머리카락이 너보다 긴가?”“응. 다듬는 게 좋을 것 같아.”“세운아, 이번 게임은 언제까지 할 거야? 성혜인이 널 사랑하게 만들려고?”진세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됐든 감정을 컨트롤하는 건 매우 골치 아픈 일이기에 그는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최면은 필요한 수단일 뿐이고, 그동안 성혜인에게 잘해줬던 이유는 단지 그에게 적응할 수 있도록 경계심을 풀기 위함이었다.“내가 전에도 얘기했잖아. 사람 감정 가지고 장난 안 친다고.”진백운은 담배 한 대를 꺼내더니 불을 붙이며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 난 또 네가 선을 넘은 줄 알았지.”
반승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뚫어지라 그녀를 바라봤다.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1층부터 7층까지 전부 다 내 땅인 거 몰라?”성혜인은 정말 몰랐다.반승제가 손뼉을 치자 밖에서 경호원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들어왔다.“나가서 핸드폰 주워 와. 고장 났으면 고쳐서 나한테 가져오고.”성혜인은 무의식적으로 진세운의 비밀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와 마음이 불안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꼭두각시처럼 행동하는 자신의 행동이 답답했지만 왜 이런 감정이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반승제는 손끝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옷을 입혀줬다.성혜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죄책감과 미안함 더불어 가시에 찔린 듯한 고통이 밀려와 가슴이 미어졌다.10분 후, 경호원이 돌아왔다.“대표님, 워낙 멀리 떨어진 탓에 고장이 났습니다. 수리 업체에 맡기고 돌아오는 길입니다.”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담배에 불을 붙이며 개인 주치의를 불렀다.여러 가지 검사를 마친 의사는 성혜은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혜인 씨는 아주 건강합니다. 데이터 수치만 놓고 봤을 때도 전혀 이상 없습니다.”손끝에 담배를 끼운 채 창가에 기댄 반승제는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됐어요. 나가서 정신과 의사 불러와요.”아무리 지하 격투장이 매일 사람들로 붐빈다 한들 그들 중에서 심리학을 아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남자는 성혜인과 1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곧장 반승제에게 가서 보고했다.“혜인 씨가 대표님을 많이 사랑했던 게 사실이라면 지금은 무언가에 통제된 게 틀림없습니다.”남자는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본인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겁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혜인 씨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지시를 내린 그 사람한테 더 많이 의존하게 될 거예요. 끝까지 정신을 붙잡고 있는 간절함이 없었더라면 아마 대표님을 완전히 잊어버렸을 겁니다. 불안함과 공포에 지배당한 이런 상황에서 대표님을 밀어내지 않았다는 건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