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반박하고 싶었다.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그가 돌아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며 한시도 걱정을 늦춘 적이 없다고 얘기하고 싶었으나 마치 딜레마에 빠진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를 사랑하고 싶지만, 머릿속은 무언가에 의해 방해를 받는 듯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순간 속이 울렁거린 성혜인은 연신 헛구역질했으나 전혀 토하지 못했다.머리가 아픈 것이 아니라 단지 두려움이 그녀를 삼켜버렸다. 심지어 반승제와 함께 있는 일분일초 매 순간 불안함을 느꼈다.반승제는 더 이상 그 눈빛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지 넥타이를 풀어 그녀의 눈을 가렸다.어둠이 닥치자 몸의 자극은 수천 배로 증폭되었다.“웁...”반승제는 두 번이나 했지만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성혜인을 품에 안은 채 카펫 위에서 맘껏 욕구를 풀었다.“승제 씨...”성혜인이 넥타이를 풀어달라며 애원할수록 반승제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어떤 느낌인지 잊었지? 내가 널 얼마큼 사랑했는지 다 떠올리게 해줄게.”“안 잊었어요. 기억하고 있다고요.”“혜인아, 너 변했어. 아무도 접근할 수 없던 가시 돋친 모습은 어디 가고... 왜 말 잘 듣는 애완동물처럼 길들여졌나고!”날벼락을 맞은 듯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성혜인은 말문이 막혀 입을 열 수 없었다.반승제의 땀방울은 그녀의 가슴에 떨어졌고, 목소리는 더없이 허스키했다.“네 탓이 아니야. 내가 반드시 다 돌려놓을 거야.” 성혜인은 단지 그의 테크닉이 괜찮다고 생각할 뿐, 별 반응이 없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새벽까지 관계를 나눴고 반승제는 그녀가 힘들지 않게 틈틈이 체력 보충할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를 품에 끌어안은 채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넥타이를 풀자 성혜인은 초점 풀린 눈으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고 머리카락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반승제는 두 볼이 발그레 달아오른 그녀의 모습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그러고선 넥타이를 코끝에 올려 그녀의 향기를 맡았다.그 행동을 본 성혜인은 얼어붙었고 이
그들은 어려서부터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 심지어 친구들과 함께 파티하는 도중에 사람이 바뀐 적도 있었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그들을 길러낸 사람 외에는 이 비밀을 아는 이가 없었고 둘은 늘 같은 이름을 공유하면서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지내왔다.예를 들어 그들 중 한 사람이 제원의 파티에 참석했다면, 모든 걸 상황을 기억한 채 언제 누구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주 자세하게 정보를 주고받았다.하여 두 사람 사이에는 비밀이 없었다.형이 좀 더 온화하고 부드러운 스타일이라면 동생은 그 모습마저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있었다.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형은 담배를 피우지 않고 동생은 담배를 피운다.지난 몇 년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대역을 연기하며 본인들만의 세상에서 모든 사람을 조롱했다.또한 그들은 사석에서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 형은 세운, 동생은 백운이라고 불렀다.“세운아, 설마 성혜인한테 최면 걸었어?”“응.”진백운은 소파에 앉아 자신의 귓불을 문질렀다.“지난번에 시환이가 내 귓불을 뚫어져라 쳐다봤을 때 누군가가 이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어. 반승제 참 대단하지?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고민도 안 하고 바로 날 의심하다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진백운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내 머리카락이 너보다 긴가?”“응. 다듬는 게 좋을 것 같아.”“세운아, 이번 게임은 언제까지 할 거야? 성혜인이 널 사랑하게 만들려고?”진세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됐든 감정을 컨트롤하는 건 매우 골치 아픈 일이기에 그는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최면은 필요한 수단일 뿐이고, 그동안 성혜인에게 잘해줬던 이유는 단지 그에게 적응할 수 있도록 경계심을 풀기 위함이었다.“내가 전에도 얘기했잖아. 사람 감정 가지고 장난 안 친다고.”진백운은 담배 한 대를 꺼내더니 불을 붙이며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 난 또 네가 선을 넘은 줄 알았지.”
반승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뚫어지라 그녀를 바라봤다.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1층부터 7층까지 전부 다 내 땅인 거 몰라?”성혜인은 정말 몰랐다.반승제가 손뼉을 치자 밖에서 경호원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들어왔다.“나가서 핸드폰 주워 와. 고장 났으면 고쳐서 나한테 가져오고.”성혜인은 무의식적으로 진세운의 비밀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와 마음이 불안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꼭두각시처럼 행동하는 자신의 행동이 답답했지만 왜 이런 감정이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반승제는 손끝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옷을 입혀줬다.성혜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죄책감과 미안함 더불어 가시에 찔린 듯한 고통이 밀려와 가슴이 미어졌다.10분 후, 경호원이 돌아왔다.“대표님, 워낙 멀리 떨어진 탓에 고장이 났습니다. 수리 업체에 맡기고 돌아오는 길입니다.”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담배에 불을 붙이며 개인 주치의를 불렀다.여러 가지 검사를 마친 의사는 성혜은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혜인 씨는 아주 건강합니다. 데이터 수치만 놓고 봤을 때도 전혀 이상 없습니다.”손끝에 담배를 끼운 채 창가에 기댄 반승제는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됐어요. 나가서 정신과 의사 불러와요.”아무리 지하 격투장이 매일 사람들로 붐빈다 한들 그들 중에서 심리학을 아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남자는 성혜인과 1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곧장 반승제에게 가서 보고했다.“혜인 씨가 대표님을 많이 사랑했던 게 사실이라면 지금은 무언가에 통제된 게 틀림없습니다.”남자는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본인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겁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혜인 씨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지시를 내린 그 사람한테 더 많이 의존하게 될 거예요. 끝까지 정신을 붙잡고 있는 간절함이 없었더라면 아마 대표님을 완전히 잊어버렸을 겁니다. 불안함과 공포에 지배당한 이런 상황에서 대표님을 밀어내지 않았다는 건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
“없습니다. 최면을 건 그 사람보다 더 대단한 최면술사를 찾는 것밖에는요. 지하 격투장에서 오랜 시간 몸을 담갔지만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인상 깊었던 최면술사는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혜인 씨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아마 전 세계 탑 5위안에 드는 실력을 가졌을 겁니다. 이런 분들은 보통 일찍이 나라에 편입되어 저희 같은 사람들은 접근할 수조차 없을 겁니다.”반승제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알겠어요.”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반승제는 문을 열고 성혜인의 곁으로 다가갔다.그 시각 잃어버린 핸드폰 때문에 여전히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성혜인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섰다.“혜인아, 우리 영화 보러 갈까?”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반승제는 그녀를 품에 안고 넓은 거실로 걸어갔다.소파에 앉은 성혜인은 환경이 주는 위압감에 불편함을 느꼈다.“보고 싶은 영화 있어?”성혜인은 대답할 수 없었다. 반승제가 좋아하는 걸 보려고 했지만, 그가 뭘 좋아하는지조차 몰랐고 나아가 두 사람이 영화를 봤던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영화는... 보고 싶지 않아요.”“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모르겠어요.”그녀는 정말로 몰랐다. 마치 혼돈의 방에 갇혀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 자아 인식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그럼 놀러 가자.”반승제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혔다.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가면을 쓴 수많은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고 극소수만이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성혜인은 무의식적으로 반승제에게 바짝 붙은 채로 걷다가 어느새 긴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귓가에 들리는 건 사람들의 열띤 토론과 주사위를 던지는 소리뿐이었다.그녀는 반승제의 다리에 앉게 되었고, 그의 맞은편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칩이 놓여있었다.“혜인아, 예전에 제원에서 텍사스 홀덤 했었는데 기억나?”“기억나요.”당시 놀이꾼이었던 반승제는 성혜인이 자신의 아내인 줄 모르고 있었다.“진
반승제의 품에 안긴 채로 잠이 든 성혜인은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이때 문을 지키던 경호원이 다가왔다.“대표님, 혜인 씨 핸드폰 수리 완료됐습니다.”반승제는 핸드폰은 손에 쥐고선 생각에 잠겼다.“혜인 씨의 핸드폰에는 모든 정보를 삭제하는 프로그램이 깔려 있었고, 해커를 동원했지만 데이터를 복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것저것 삭제하고 나니 그저 평범한 핸드폰이 되었습니다.”“그래.”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반승제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사람을 시켜 배현우를 데려왔다.배현우는 기억을 찾겠다는 핑계로 최근까지 7층 이곳저곳을 배회하고 있었다.이렇게 넓은 아량을 베풀었는데도 아무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더 이상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방으로 들어온 배현우는 그의 곁에 있는 성혜인을 보고선 눈썹을 치켜올렸다.반승제는 소파에 앉아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기억나는 게 있어?”배현우가 자연스레 그의 곁에 앉자 반승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야, 내가 지금 너랑 장난하는 것 같냐? 놀러 왔어?”그 시각 배현우의 시선은 성혜인을 향해 있었다.“혜인이한테 무슨 일 있는 거야?”반승제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네가 묻는 거야? 아니면 우리 형?”배현우는 혼란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그렇게 서로 대치한 상태로 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 반승제가 입을 열었다.“최면에 걸렸어. 날 잊은 건 아니지만 예전 같지 않아.”배현우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앞으로 다가가 상태를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반승제가 얼마나 난폭한 인간인지 잘 알고 있어 성혜인으로부터 1미터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최면?”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답했으나 그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약물 섭취하게끔 유도하면서 동시에 최면을 걸었어. 그 인간들이 자주 쓰는 수법이지.”배현우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반승우가 깨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매번 성혜
반승제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며 성혜인을 품에 안았다.배현우가 시끄럽게 떠드는 와중에도 성혜인은 잠에서 깨기는커녕 그의 품을 비비적거리며 더 파고들어 가 색색거렸다.배현우는 씩씩거리며 자신의 다친 손을 거들먹거리며 다그쳤다.“반승제, 너 정말 더 안 물을 거야? 네 형 성혜인을 포기한 게 아니라 분명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라고. 혜인을 볼 때마다 이렇게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나까지 느껴지는데 지금 그런 남자를 옆에 두겠다는 거야? 심지어 반승우는 성혜인의 첫사랑인데? 내가 너였다면 반승우가 사라지게 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거야. 너랑 나는 지금 한배를 탄 거라고!”그의 말을 줄곧 무시하던 반승제가 점점 높아지는 그의 언성에 성혜인이 깰까 봐 화가 났다.그가 고개를 홱 돌려 배현우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 투덜거렸다.“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하지만 배현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구에 대기하던 경호원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끌고 나갔다.안타깝게도 시끄러운 소리에 성혜인은 이미 깬 상태였다. 밖을 내다보니 또 오후다.성혜인을 진세운에게 데려가겠노라 약속했기 때문에 성혜인은 기분이 나쁘지도, 반승제에게 거부감이 생기지도 않았다.시간이 조금 지나 저녁이 되었을 무렵, 반승제는 옥상에서 불꽃 쇼를 준비했다.만찬과 함께 테이블 위를 장식하는 여러 대의 촛불은 옥상을 분위기 있게 했다.불꽃놀이는 한밤중까지 계속되었고, 성혜인은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불꽃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만 했다.턱을 괴고 불꽃놀이를 다 구경하고 나니 또 잠이 몰려왔다.반승제가 그녀의 손을 매너 있게 들어 올렸고 곧이어 네번 째 손가락에 무언가를 끼워주었다.반지였다.성혜인은 어리둥절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반승제는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그저 성대한 불꽃놀이가 막을 내릴 때 그녀에게 반지를 끼워주었을 뿐.성혜인은 반지를 빼내고 싶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왠지 모르게 기쁜 감정이 들었다.“저
그리고 나서는?뭐야? 아무 말도 안 해?성혜인은 그가 붙잡거나 다른 어필을 할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반승제는 아무 말 없었다.그저 “그래”라는 두 글자뿐. 그는 반지 두 개를 낀 손으로 턱을 괴고 조용히 성혜인을 바라보았다.성혜인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왜 화가 난 건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심지어 억울한 감정까지 생겼다.이러면 안 되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성혜인은 포크로 접시 위에 놓인 스테이크를 있는 힘껏 푹 찔렀다. 얼굴빛은 얼음장같이 차갑다.반승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 입맛이 없어?”“내버려둬요.”이 한마디를 내뱉은 그녀는 미간을 찡그린 채 스테이크를 우걱우걱 먹었다.“그래.”가볍게 대답한 그가 성혜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성혜인은 무언가에 짜증 버튼이 눌린 듯 벌떡 실어나 식탁보를 휙 잡아끌었다.테이블 위의 스테이크, 와인, 양초가 쨍그랑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그 소리에 문득 성혜인은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그제야 자각한 듯 했다.그녀는 반승제를 한 번 힐끗 보더니 7층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혼자서 샤워하고 머리를 말렸다.새벽 두 시까지 침대에서 뒤척였지만 반승제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또 짜증이 치밀어오른 성혜인은 이불을 걷어차고 나와 반승제를 찾아다녔다.결국 그를 발견한 곳은 베란다. 반승제는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여러 대나 쌓여 있었다. 그는 팔꿈치를 난간에 걸친 채 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손에 든 담배는 불이 꺼져있었다.뒤에 서서 1분 동안 보고 나서야 성혜인은 그를 향해 다가갔다.“왜 아직도 안 자?”“잠이 안 와서요.”성혜인은 반지가 두 개나 끼워져 있는 그의 왼손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제가 안 받은 반지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줄 거죠?”반승제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아마도.”또 한 번 짜증이 치밀어오른 성혜인은 속이 너무 답답했다. 그러나 요즘 머릿속이
반지를 손에 넣으니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던 불안감이 사라졌다. 침대에 누운 성혜인은 반지를 보고 또 보았다.여전히 설레는 감정은 들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마음 편히 잠에 들 수 있다.성혜인은 쉴 새 없이 뒤척였다. 오른쪽으로 누워 반지를 한 번, 왼쪽으로 누워 반지를 또 한 번 바라보았다.반승제가 방으로 들어오며 반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성혜인을 발견했다.그는 이미 샤워를 마치고 몸에서 나는 담배 냄새를 깨끗이 없앤 뒤였다.침대에 누운 뒤 반승제는 한 손으로 성혜인을 안아 침대에서 뒹굴지 못하도록 했다.“늦었으니 얼른 자. 내일 진 선생님 보러도 가야 하잖아.”성혜인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더니 그의 품에 기대었다.“승제 씨, 진 선생님은 좋은 사람이에요.”“응.”“절 구해주기도 하셨고, 저한테 다정하게 대해줘요.”“응.”“그리고 엄청 대단해요. 아, 그거 알고 있었어요? 선생님께 쌍둥이 동생도 있다는 거.”눈을 감고 있던 반승제가 성혜인의 말에 눈을 번쩍 떴다.순간 말실수를 자각한 성혜인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아, 잘못 말한 거예요. 진 선생님은 없다고 했어요.”“없다고 했다고?”“네.”반승제가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본인의 똑똑함이 해가 됐네. 진세운이 실수했어.”성혜인은 급속도로 불안해졌다. 너무 마음을 열어준 듯했다. 반지를 받아서일까? 기분이 너무 좋아서?기분이 좋다고?이제 보니 성혜인은 이런 작은 즐거움 정도는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혜인아, 더 말해봐. 쌍둥이 동생 그 다음은? 혹시 생긴 건 똑같은데 한 사람은 귓불에 점이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없어?”반승제는 천재 소리를 듣는 똑똑한 사람이다. 전에는 진세운이 둘이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이제 알 것 같다. 설의종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BKS에는 두 명의 핵심 인물이 있다. 한 사람은 B, 한 사람은 K라고 불리며 둘은 쌍둥이 형제이다. 두 사람이 늘 신분 교환을 하므로 누구도 그들을 의심하지 않는다.그들은 세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가며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지민이 잘 지켜. 괜히 나가서 또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온시환은 속이 상한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결국 술집으로 발길을 옮겨 한잔하려 했고, 그곳에서 뜻밖에도 원아정을 마주쳤다.‘원아정이 제원에 왔다고?’그녀 곁에는 원진이 서 있었다. 원진은 시선을 앞만 향한 채 걸음을 옮기다가 온시환을 보자 발걸음을 멈췄다.온시환도 마침 마음이 복잡한 상태라 옆에 있는 룸의 문을 열며 말했다.“같이 한 잔 할래?”원진은 망설임 없이 룸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원아정도 서둘러 뒤따랐다. 얼굴에는 상류층 특유의 오만함과 자존심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원진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원진이 있는 자리에서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할 정도였다.과거 원진은 원씨 가문을 철저한 강경책으로 정리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은밀한 거래를 했고 가문 내 반대 세력들은 대부분 사라졌다.그런 원진 앞에서 원아정은 잔뜩 움츠린 채 룸 안의 의자에 앉았다. 손을 무릎 위에 얹고 긴장한 듯 움찔거렸다. 그때 원진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연승혁과의 결혼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손을 꽉 움켜쥔 원아정은 연승혁을 떠올리니 눈가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얼마 전 연승혁을 만나러 연씨 가문에 갔다가 그가 사람을 처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상황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익숙해 보였다.겁이 많은 원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깨어나 보니 연씨 가문의 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연승혁, 그 끔찍한 인간!’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연승혁이 비록 잔혹한 수단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 구은우의 존재를 그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원아정은 원씨 가문에서 작은 개미 같은 존재였다. 원진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생활에 지친 지 오래였다.연승혁이 아무리 냉혹하더라도 그의 아내가 된다면 무
‘그래, 공지민. 구은우와 관련된 일만 나오면 이성을 잃고 주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단 말이지.’온시환은 어깨에 박혀 있던 단검을 뽑아내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옆에 있는 경호원들에게 말했다.“일단 지민이 데리고 돌아가.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공지민은 그 순간도 악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난 여기 남고 싶어요.”그녀는 직접 구은우 사건의 진상을, 그리고 그의 가족 중 누가 손을 썼는지 듣고 싶었다. 온시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데려가.”“시환 씨!”공지민은 경호원들에게 양팔이 붙들린 채 억지로 차로 이끌려 갔다.온시환은 곧 사람을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어깨의 부상은 치명적인 부위는 아니었지만, 출혈이 많았다.차 안에서 부하가 온시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이미 확인되었습니다. 일을 꾸민 건 연씨 가문의 둘째입니다.”연씨 가문의 둘째, 바로 현재 가문을 이끄는 인물이었다. 당시 권력을 다투는 상황에서 그는 형과 자신 아래의 모든 남자들을 차례로 제거했다. 연씨 가문은 전통적으로 후계자를 남자에게만 물려주는 규율을 따랐다. 딸은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가문 밖에서 태어난 남자들은 언제든 폭탄이 될 수 있었다. 구은우를 알지도 못했지만 그의 존재만으로도 위험하다고 판단해 제거한 것이다.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연씨 가문의 모든 권력은 연승혁의 손에 집중되었다. 2년 전부터 그는 해외에서 국내로 사업 중심을 옮겼고 해상 운송 사업을 시작해 원씨 가문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현재의 연승혁은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운 존재였다. 구은우를 위해 복수를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연씨 가문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거대 가문이었다. 온시환이라 해도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온시환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연승혁은 방탕한 성격에 수단이 잔혹했다. 그를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결코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는 원씨 가문의 원아정과 약혼한 상태였다. 원아정은 원진의
“당신들 도대체 뭐야!”여자는 분명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얼굴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가 구은우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이 사람 기억나요?”여자는 사진을 보는 순간 얼굴빛이 확 변했다.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모르겠어요, 이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날 풀어줘요!”공지민은 연예계에서 오랫동안 버텨온 사람답게,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었다. 그녀는 한쪽 발로 여자의 손등을 짓밟으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가로막았다.“지민아, 뭐 하는 거야?”그녀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온시환은 한 번도 그녀의 이런 냉혹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늘 부드럽고, 강인하며, 침착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녀의 눈에 번진 살기가 너무나도 선명했다.만약 자신이 막지 않았다면 이 여자의 손뼈는 이미 부서졌을 것이다.‘구은우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거야?’온시환은 속이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겨우 분노를 억누른 그는 낮게 말했다.“심문은 내 사람들이 할 거야. 넌 결과만 들으면 돼.”공지민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발을 세게 내리찍었다.온시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속이 쓰리고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옆 의자에 앉아 차갑게 변한 공지민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여자는 비명을 질렀다.“당신들 신고할 거야! 다 고소할 거라고!”공지민은 여자의 눈앞에 쭈그려 앉아 차갑게 물었다.“그때 누가 돈을 줘서 청부 살인을 사주했나요? 그 사람 얼굴을 기억하나요?”여자는 공지민을 악에 받친 눈으로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지만 두 명의 경호원이 그녀를 바닥에 제압하고 있어 꼼짝할 수 없었다.공지민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단숨에 침대에서 밀어 떨어뜨렸다.그 아이가 구조되었을 당시 대략 여섯, 일곱 살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할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와 함께 거짓말에 동
공지민은 구은우의 부모가 굉장히 화목한 부부라고만 알고 있었지, 그 사이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녀는 구은우와 오랜 친구였다. 그의 부모가 다투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대체 누가 10억을 들여 구은우의 목숨을 노린 걸까.그녀는 하루빨리 이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싶었다.“시환 씨, 신정우 어머니랑 동생은 찾았어요?”신정우의 말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그에게 돈을 요구하며 동생의 치료비를 대라고 했다.그런데 신정우가 이를 거부했으니, 아마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찾았어. 내일 나랑 같이 만나러 가자.”공지민은 온시환과 꽤 오래 알고 지냈지만 그가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문득 그녀는 과거 온씨 가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온시환이 거의 망설임 없이 온씨 가문와 절연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물론 이건 그녀가 들은 단순한 가십에 불과했다. 당시 온씨 가문 사람 중 누군가가 성혜인을 건드려 일이 몹시 커졌다는 이야기였다.온시환은 가족에게도 무척 냉정한 태도를 보였고 사랑에 있어서도 마치 구경꾼처럼 시큰둥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만큼은 진심을 다하는 것 같았다.공지민은 온시환에 대해 깊이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앞으로 그와 함께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에 대해 더 알 수밖에 없을 터였다...다음 날, 그는 정말 그녀를 데리고 그 여자를 만나러 갔다.구은우가 사고를 당했을 당시 공지민은 정신이 없어 그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기억나는 건 구은우가 구조된 후, 그 어머니와 아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그 후에는 구은우가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 치료를 받았다.그 당시 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나중에야 그 모자가 무책임하게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들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공지민은 그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많았다. 인간의 본성이란 원래 복잡하고 때로는 무척 어두운 법이다. 처음에는 구은우가 단지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그는 오래전부터 공지민에게 깊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예전에는 온시환도 잘 몰랐다. 그러다 구은우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 많은 순간, 공지민은 아마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붙잡아 두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녀 자신조차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마치 생기 없는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모습이었다.온시환이 처음 그녀를 싫어했던 이유도 바로 그녀에게서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계속 그녀를 신경 쓰다 보니, 점점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간 후 공지민의 왼쪽에는 강민지, 오른쪽에는 성혜인이 앉았다.사실 그녀는 성혜인을 알고 있었다. 과거 성혜인과 반승제의 사건이 너무나 크게 이슈가 되어 실시간 검색어에서 자주 본 이름이었다.공지민은 성혜인을 굉장히 자존심 강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생각보다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자들은 마당에 앉아 있었으며 방해하지 않고 때때로 과자나 과일을 들고 와 전해 주었다.강민지가 갑자기 공지민의 손을 잡았다.“지민 씨, 시간 될 때 우리랑 자주 만나요. 남자들이랑만 있지 말고. 남자라는 것들은 말이지, 맞춰 주면 맞춰 줄수록 그걸 당연하게 여겨요.”강민지는 아직 공지민과 온시환의 결혼이 단지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공지민에게 남자를 길들이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공지민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만약 내가 시환 씨를 단지 이용하고 있는 거라면요...”앞에 있는 두 여자는 온시환의 친구들이었다. 만약 이 결혼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거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를 몹시 싫어하게 될 것
성혜인은 한순간 감개무량해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식탁 위의 분위기는 여전히 약간 어색했지만 강민지가 공지민에게 그녀가 출연했던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성혜인은 그제야 강민지가 공지민이 출연한 드라마를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지민은 처음엔 다소 긴장해 보였으나 점차 눈에 띄게 여유로워졌고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강민지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강민지가 성혜인에게 눈짓을 보내자 성혜인도 따라 웃음을 지었다.가끔 여자끼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공감하는 특별한 순간이 있다.식사가 끝날 무렵, 강민지는 공지민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지민 씨, 마지막에 출연했던 드라마는 왜 몇 화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 캐릭터가 그렇게 빨리 죽을 캐릭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퇴장하더라고요.”사람의 진심은 상대의 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법이다.공지민은 강민지가 진심으로 자신의 드라마를 좋아하며 각 에피소드까지 꼼꼼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원래 문보영은 공지민의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문보영과 온시환이 키스하는 모습을 본 후 그녀와 연락을 끊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졌고 예전처럼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그동안 공지민은 참 외로웠다. 그런데 강민지가 먼저 다가와 주자 그녀는 묘하게 안도감을 느꼈다.“그땐 회사에서 문제가 있어서 제가 잠시 활동을 중단해야 했어요. 그래서 그 캐릭터도 일찍 하차할 수밖에 없었죠.”“정말 아쉬워요. 그 캐릭터 팬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끝까지 연기했으면 팔로워가 최소 백만 명은 더 늘었을 거예요.”공지민은 웃음을 터뜨리며 눈매가 휘어졌다.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온시환은 혼자 계산을 하러 갔다.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공지민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다시 보았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은 녹아내릴 듯 부드러워졌다.반승제와 신예준이 그의 앞에 있었지만 온시환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공지민은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온시환 앞에서 이렇게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있었는지 떠올렸다.그날 밤 두 사람이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 온시환은 그녀의 그 미소를 떠올리며 뒤척였다.휴대폰은 침대 옆에 놓여 있었고 최근 연락한 친구들로부터 술자리 초대 메시지가 와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공지민과의 결혼을 생각하며 그녀가 이미 동의했으니 내일 당장이라도 혼인신고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는 돌아누워 공지민을 바라보았다.한편 공지민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에 관한 생각, 특히 결혼 상대가 온시환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낯설고 어색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이 없었다.“지민아, 너도 결혼하기로 했으니까 내일 바로 혼인신고하러 가자.”온시환은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은 결혼이 최소 몇 달 후에나 진행될 줄 알았는데 그가 이렇게 서두를 줄은 몰랐다.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온시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공지민이 마음을 바꿀까 두려웠다. 결혼도, 구은우의 죽음에 대한 조사도 그만두겠다고 하면 그가 그녀를 곁에 붙잡아둘 명분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온시환은 새 정장을 꺼내 입으며 추지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혼인신고하러 간다.]추지성은 이 메시지에 놀라 즉시 전화를 걸어왔다.“야, 너 농담하는 거지? 진짜 가는 거야? 지민 씨가 동의했어?”“응, 동의했어.”추지성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눈을 멍하니 뜬 채 온시환이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온시환은 다른 친구들과 있는 단톡방에도 혼인신고 소식을 알렸다. 단톡방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고 곧이어 물음표가 연달아 올라왔다.가장 강렬한 반응을 보인 건 당연히 설우현이었다. 그는 연달아 다섯 개의 놀란 이모티콘을 올리며 반응했다.다른 사람들은 몇 분간 망설이다가 그제야 축하 메시
온시환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추지성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둘은 별다른 말 없이 게임을 시작했다. 온시환은 게임을 하는 중에도 간간이 휴대폰을 확인하며 초조해했다.저녁 7시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공지민이었다.“국 끓였어요. 와서 먹을래요?”우울한 기분에 젖어 있던 온시환은 그 한마디에 바로 게임기를 내려놓고 밖으로 향했다.그러자 추지성이 소파에 앉아 목소리를 높였다.“야, 어디 가냐? 곧 배달 음식 도착하는데, 나 혼자 다 못 먹어!”“집에 가서 지민이가 끓인 국 먹을 거야.”추지성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뭐야, 이 말투에서 자랑하는 느낌이 나는 건 왜지?”온시환은 이내 추지성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반 시간도 안 돼 집에 도착했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국 냄새가 코를 찔렀다.공지민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온시환은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가 원하는 건 많지 않았다.공지민이 그의 곁에 몇 년만 더 있어 준다면 그 뒤로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남기고 떠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깔끔히 정리하고 아무런 짐도 남기지 않을 작정이었다.‘지민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내가 사라져도 아무렇지도 않겠지...’온시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방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무슨 국 끓인 거야? 냄새가 너무 좋은데.”공지민은 그가 돌아온 걸 보고 작은 그릇에 국을 담아 그에게 내밀었다.“또 지성 씨랑 술 마시러 나갔어요?”온시환은 그녀가 추지성을 싫어한다고 생각해 서둘러 부인했다.“아니야. 다른 사람들이랑 있었어.”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였다.“여자는 없었어.”공지민은 방금 만든 반찬들을 모두 식탁으로 옮기고 밥도 한 그릇 담아 내왔다.둘이 나란히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다. 이렇게 평화롭게 식탁을 마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온시환은 이 고요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국을 천천히 떠먹었다.식사가 끝날 무렵 공지민이 그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바로 문을 나섰다.공지민은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한편 온시환은 집을 나서자마자 추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온시환은 침착하게 옷을 발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거실 한가운데에서 추지성은 한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온시환을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금세 흥미를 잃고 입맞춤을 멈췄다.“시환아?”추지성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온시환은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무시했다.추지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이만 가봐.”여인은 옷이 주워 입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자 추지성은 타올 하나만 걸친 채 태연하게 소파로 와서 앉았다.“야, 너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 좀 하고 와라.”온시환은 담배를 쥔 손이 축 늘어진 채 지쳐 보였다.추지성은 의아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공지민과 화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가 싶었다.“무슨 일이야? 아침에 전화로 자랑질하더니만. 아, 맞다. 너 점 다시 찍었더라? 확실히 점 있는 네가 낫다. 예전에 다른 여자들도 그 점이 좋아서 너한테 홀렸잖아.”온시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구은우의 죽음을 조사하려는 거였어.”추지성은 옆에 놓인 주스를 집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죽은 사람의 일을 왜 조사해? 이게 몇 년 전 일이냐. 다 끝난 거잖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난 가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돼. 남자라면 이미 새로운 연애 몇 번은 했을 텐데.”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봐봐. 주변에 아내 잃은 남자들 있지? 그놈들 지금 얼마나 잘 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근데 남편 잃은 여자들은? 평생 못 벗어나.”추지성의 가족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의 친누나는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