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를 손에 넣으니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던 불안감이 사라졌다. 침대에 누운 성혜인은 반지를 보고 또 보았다.여전히 설레는 감정은 들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마음 편히 잠에 들 수 있다.성혜인은 쉴 새 없이 뒤척였다. 오른쪽으로 누워 반지를 한 번, 왼쪽으로 누워 반지를 또 한 번 바라보았다.반승제가 방으로 들어오며 반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성혜인을 발견했다.그는 이미 샤워를 마치고 몸에서 나는 담배 냄새를 깨끗이 없앤 뒤였다.침대에 누운 뒤 반승제는 한 손으로 성혜인을 안아 침대에서 뒹굴지 못하도록 했다.“늦었으니 얼른 자. 내일 진 선생님 보러도 가야 하잖아.”성혜인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더니 그의 품에 기대었다.“승제 씨, 진 선생님은 좋은 사람이에요.”“응.”“절 구해주기도 하셨고, 저한테 다정하게 대해줘요.”“응.”“그리고 엄청 대단해요. 아, 그거 알고 있었어요? 선생님께 쌍둥이 동생도 있다는 거.”눈을 감고 있던 반승제가 성혜인의 말에 눈을 번쩍 떴다.순간 말실수를 자각한 성혜인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아, 잘못 말한 거예요. 진 선생님은 없다고 했어요.”“없다고 했다고?”“네.”반승제가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본인의 똑똑함이 해가 됐네. 진세운이 실수했어.”성혜인은 급속도로 불안해졌다. 너무 마음을 열어준 듯했다. 반지를 받아서일까? 기분이 너무 좋아서?기분이 좋다고?이제 보니 성혜인은 이런 작은 즐거움 정도는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혜인아, 더 말해봐. 쌍둥이 동생 그 다음은? 혹시 생긴 건 똑같은데 한 사람은 귓불에 점이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없어?”반승제는 천재 소리를 듣는 똑똑한 사람이다. 전에는 진세운이 둘이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이제 알 것 같다. 설의종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BKS에는 두 명의 핵심 인물이 있다. 한 사람은 B, 한 사람은 K라고 불리며 둘은 쌍둥이 형제이다. 두 사람이 늘 신분 교환을 하므로 누구도 그들을 의심하지 않는다.그들은 세
말을 마친 성혜인은 자신의 손가락에 낀 반지를 바라보았다.“저도 제가 이상한 것 같아요. 그런데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 건지 말하지 못하겠어요. 그냥 모든 일이 당황스럽게 다가오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표달하지 못해요. 승제 씨와 함께했던 모든 일들도 기억하고는 있는데 제 마음은 마치 고인 물처럼 아무런 파동도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아요.”그녀가 손가락을 살짝 움츠렸다.“이 반지를 처음 봤을 때 뭔가 달라졌다고 느끼긴 했는데, 뭐가 달라진 건지는 모르겠어요.”반승제가 크게 심호흡한 뒤 성혜인을 꼭 안았다.“혜인아.”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성혜인이 물었다.“그래도 내일 진 선생님 만나게 해주실 거죠?”참 분위기 깨는 발언이다.“응. 그러니까 지금은 얼른 자.”그제야 안도한 성혜인은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할 수 있었다.반승제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맞추고 또 맞추었다. 아무리 입을 맞추어도 더 맞추고 싶은 생각만 들 뿐이었다.그는 한참 후에야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이 순간 그는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성혜인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그녀의 사랑은 반승제의 것에 못지않았다.다만 둘 다 표현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이제 그는 성혜인에게 미안할만한 일을 할 것이다.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 선택밖에는....다음 날 아침, 막 잠에서 깬 성혜인은 거울 앞에서 이것저것 옷을 대보며 고르고 있었다.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반승제는 그녀가 방정을 떠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세 벌을 갈아입어 보았는데도 성혜인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생님을 뵈러 가는 건데 더 예쁘게 입어야 할 것이 마땅했다.반승제도 재촉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가 다른 한 벌을 갈아입으려 할 때 조용히 물었다.“이렇게까지 신경 쓴다고?”성혜인이 미간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는데, 그냥 사람이 좋아서 믿어야 할 사람, 안정감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돼요.”침대 위에 앉은 반승제가 오라고 손짓했다.“이리 와봐.”성혜인
혼란스럽던 정신세계가 한순간에 선명해졌다. 그녀의 말간 눈동자에 온통 핏빛이 비쳤다.성혜인은 반승제의 곁에 꿇고 앉아 총상 부위를 꾹 눌러 지혈하려 했다.“살려주세요!”“빨리 아무나 좀 와주세요! 여기 환자 있어요!”주위를 향해 크게 소리쳤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불길하고 허전한 느낌. 계단 내에 성혜인의 메아리만 울릴 뿐이었다.그녀는 자신이 혼돈의 세계에 갇혔음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반승제의 몸을 흔들며 눈물을 흘렸다.건너편 계단에 서 있던 장미는 한 손에 총을 꽉 쥐고 다른 한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려 했다. 그러나 손가락이 너무 떨려 불을 제대로 붙일 수가 없었다.옆에 있던 경호원이 그녀를 힐끗 보며 다급히 말했다.“장미 누나, 이거...”장미는 답답해져 손으로 그의 뒤통수를 퍽 쳐버렸다.“뭘 쳐다봐. 빨리 병원으로 이송해야지! 우물쭈물하다가 사람 죽게 할 거야?”“아! 예!”장미는 계단을 내려가다 힘이 풀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X발. 다음에 또 나한테 이런 일 시키기만 해봐.’“반승제 씨!”누군가 반승제의 이름을 외치며 데려가려 했다.성혜인은 반승제를 꼭 껴안고 있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품은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절대 내어주지 않았다.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힘을 풀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병원에 데려가세요. 당장.”지하 격투장의 사람들은 반승제라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기에 오히려 그를 부축해야 하는 경호원이 긴장했다.성혜인이 경호원을 밀어내며 말했다.“제가 할게요.”조금 전 당황하던 그녀는 온데간데없는 더없이 확고한 말투였다. 그녀는 반승제의 한 쪽 팔을 자신의 목에 걸치도록 했다.일행이 모두 차에 오른 뒤 경호원은 사이드미러를 통해 성혜인의 눈치를 살폈다.성혜인은 반승제의 손을 꼭 잡은 채 표정은 담담했다.그 전의 막막함, 순진함, 머뭇거림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경호원은 조금 전의 일에 대해 더 생각할 엄두를 내지
병원에서.성혜인은 여전히 복도에 조용히 앉아 있다. 세 시간이 지나서야 반승제가 침대 카트에 실려 나왔다.의사가 마스크를 내리고 말을 전했다. 다행히 총알이 심장과 멀리 떨어져 있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라고.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성혜인은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그녀는 침대 곁에 꿇어앉아 그의 손을 잡고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반승제는 쫓기는 신분이었으므로 더 이상 병원에 있을 수 없었다. 생명의 위협이 사라진 이후 그는 지하 격투장 7층으로 옮겨졌다.성혜인은 방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그의 곁을 지켰다.중간중간 그를 보러 들어오려던 장미는 성혜인의 원한 섞인 눈빛을 보고 물러났다.전에도 아우라가 이렇게 강했던가?장미는 양미간을 찌푸렸지만, 기세에 눌려 들어가지 못했다.성혜인은 반승제의 손을 잡고 자신의 볼에 갖다 댔다.반승제는 마취에서 깨지 못했지만 의식은 있었다.그는 자신의 이러한 결정이 성혜인에게 미안할 짓임을 잘 알고 있었다.정신과 의사의 말에 의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쓰러지는 것은 엄청난 충격을 주는 것이고 이 정신적 자극은 그녀를 최면에서 깨어나게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반승제는 줄곧 도박에 목숨을 내던져온 사람이었다.그리고 지금, 그는 내기에서 이겼다.성혜인의 맑은 눈물이 손등에 톡 떨어졌다. 반승제는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일어날 힘이 없었다.그렇게 이틀간 그는 줄곧 누워있었다. 적지 않은 격투장의 사람들이 병문안을 오려고 했으나 모두 성혜인에 의해 병실에 발 한번 들이지 못했다.성혜인은 문 앞에 떡하니 서서 한 손으로 문을 잡고 눈은 결연히 아무도 들이지 않겠다는 듯 앞을 내다보았다.무어라 말하려던 사람들도 그녀의 기세를 마주하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틀 뒤 아침, 반승제가 드디어 눈을 떴다.다친 상처 부위는 여전히 아팠다. 비록 급소를 피했다 하지만 결국 총에 맞은 것은 사실이었다.다소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성혜인과 눈을 마주쳤을 때,
사흘째 되던 날 밤, 통증이 덜해진 반승제는 드디어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게 되었다.7층 복도 밖에 선 그는 누군가에게서 전기회로 수리를 위해 10분간 정전이 될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다.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멍하니 밖을 내다보았다.곧이어 7층이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문득 성혜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욕실에서 나온 성혜인은 그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반승제는 머릿속이 얼어붙어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얼마 안 되는 베란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그는 당황한 모습으로 캐비닛을 열어보는 성혜인을 발견했다.“승제 씨?”성혜인은 커튼을 젖혀보고 다른 방도 확인했다.“승제 씨!”“반승제 씨!”성혜인의 목소리가 점차 떨려왔다.반승제는 담배꽁초에 손을 데어서야 대답을 안 했음을 자각했다.“혜인아, 나 여기 있어.”그가 베란다 문을 벌컥 열었다. 반승제를 찾아 이곳저곳을 뒤지던 성혜인이 굳은 채 잠깐 서 있더니 성큼성큼 걸어와 그의 몸을 확인했다.“괜찮죠? 깜짝 놀랐네.”병실이 온통 암흑이었으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성혜인은 집요하게 그의 몸을 살폈다.반승제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키가 성혜인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한 품에 안을 수 있었다.그는 성혜인에게 머리를 기대고는 말없이 그저 안고 있을 뿐이었다.성혜인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이윽고 그녀는 자신의 옷이 축축하게 젖는 것을 느꼈다.“혜인아, 미안해. 내가 미안해...”그가 울먹이며 말했다. 손에 힘을 주고 꽉 껴안고 있었으므로 성혜인은 질식할 것만 같았다.그의 힘에 눌려 조금 아팠지만 성혜인은 마음이 놓였다.한순간 필사적으로 짓눌렀던 감정이 이제야 풀린 듯 그녀는 울부짖으며 눈물을 쏟아냈다.반승제는 조용히 흐느꼈고, 성혜인은 대성통곡했다.사랑하는 사람과의 포옹인데 왜인지 가슴의 상처보다 더 아팠다.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서 있었다.얼마 후 방 안의 불이 켜졌다. 환한 불빛은 병실 속의 고요를 깨뜨렸다.반승제는 성혜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마음이 가라앉은 뒤 성혜인은 천천히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요.”“알겠어.”성혜인이 반지를 낀 손가락을 살짝 움츠리더니 입을 열었다.“모든 게 다 끝나면 우리 결혼해요.”반승제는 가슴이 떨려왔다. 그는 성혜인의 품에 머리를 묻었다.“응. 그러자.”성혜인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두 사람의 포개진 손에서 반지가 유난히 돋보였다.“전부 기억이 났어요. 사실 미스터 K를 따라 별장에 간 첫날부터 은연중에 최면 실험을 받았던 것 같아요. 미스터 K는 자신의 실력에 대해 매우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어요.”“진세운 아니었어?”그의 품에 안긴 성혜인이 가까이 다가갔다.“예전에는 그저 미스터 K가 이상하게 친숙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진 선생님에게 쌍둥이 동생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지금은 이 모든 게 드러나게 됐지만 아마 제가 회복된 건 모를 거예요.”성혜인이 그의 손을 잡고 차분하고 조용히 말했다.“별장 위치를 알고 있어요. 갑자기 습격해서 실패를 맛보게 할 수 있어요.”“어떻게 하고 싶어?”성혜인이 살며시 다가와 귀에 대고 몇 번 속삭였다.반승제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고 가볍게 웃었다.“내 생각과 같네.”새벽 두 시.20여 대의 헬기가 일제히 별장을 향해 날아갔다.새벽 3시, 성혜인이 몇 주간 있었던 그 별장 위로 소형 포탄이 떨어졌다.안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연이은 폭발음이 하늘땅을 뒤흔들었다.제원에서의 반승제는 두려울 것 없이 다른 사람의 별장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플로리아에서의 반승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는 더욱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격투장이 워낙 음지에서의 장사인데다 반승제의 지위가 높았으므로 정치인들이 모두 눈감아주었다.“쾅!”“콰광!”높이 날고 있는 20여 대의 헬기 중 한 헬기에서, 성혜인은 공중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느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승제 씨, 비록 엄마와 함께 한 시간은 짧았지만 전 어려서 부족했던 모든 사랑을 받았어요. 엄마는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그리고 절 지독히도 사랑하시죠. 만약 제가 이렇게 괴롭힘당하는 것을 봤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으셨을 거예요. 전에 할머니, 할아버지께 맞을 때도 엄마는 항상 제일 먼저 달려들어 절 보호했고, 제가 다른 아이들과 싸울 때도 항상 학부모들과 이치를 따져가며 절 감쌌어요. 엄마는 항상 최선을 다해 절 보호해 주셨어요. 만일 BKS가 정말 엄마랑 연관이 있다면 그곳 사람들은 엄마가 직접 뽑은 후계자를 살갑게 대했어야 해요.”성혜인은 반승제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하지만 전 그곳에서 살가움이나 친절함 따위는 느끼지 못했어요. 그래서 엄마가 BKS와 관련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런데 서천에서 이름을 숨길 것을 선택했으니 혹시 BKS를 탈출했던 건 아닐지 추측 중이에요. 진세운이 절 찾아와 수령으로 만들고 싶었던 이유도 아마 지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지금 진세운에게는 필요한 한 가지 물건이 있어요.”“그게 뭔데?”“해파리 도장이요.”대답하는 성혜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려왔다.“제가 서천에서 발견한 엄마가 숨겨놓은 물건이에요. 만약 BKS가 그때 엄마의 뒤를 봐주었다면 당시의 적수가 누구든 서천에서 그렇게 힘들게 살진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BKS가 도움을 주지 못하니 엄마는 가장 중요한 물건을 가져간 거예요. 게다가 제 외삼촌 일가도 모두 돌아가셨는걸요. 그 사람들이 찾는 건 바로 그 해파리 도장이에요. 그 도장을 가진 사람이 BKS에서 진정한 수령이 될 수 있거든요.”별장을 시원하게 폭파한 뒤 두 사람은 헬기를 타고 함께 돌아갔다.7층에 도착한 두 사람은 입을 맞추었다.숨에 턱에 닿을 듯 반승제는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 반승제가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입을 열었다.“BKS의 현황은 대충 알겠다. 어떤 조직이든 결국 언젠간 분열하게 돼. BKS가 아마 지금 그런 상황 같아. 아마 BKS는 두 파로 나뉘
성혜인이 침대 옆으로 자리를 옮기곤 손끝으로 반승제의 가슴을 더듬었다. 곧이어 그의 숨결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고 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성혜인을 바라보았다.피부를 살짝 꼬집자 그에게서 옅은 신음이 들려왔다.깜짝 놀란 성혜인의 동공이 약하게 흔들렸다.해본 적도 없는 익숙하지 않은 행동이었음에도 너무 흥분했던 탓인지 그는 30분밖에 버티지 못했다.그러나 반승제는 부끄러운 감정 같은 건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온통 땀범벅이 된 그는 성혜인의 손을 다정히 감쌌다.“혜인아, 너 정말… 잘하는 것 같아.”너무 직설적인 평가에 마음이 불편해진 사람은 오히려 성혜인이었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반승제의 손을 뿌리쳤다.“사, 상처가 완전히 나으면 앞으로 진세운을 어떻게 상대할지 생각해 봐요. 지금쯤이면 별장이 파괴된 걸 알게 됐을 거예요.”반승제가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응.”아침 식사 때 격투장의 핵심 인원들이 적지 않게 모였다. 그중에서 단연 제일 중요한 사람은 장미였다.반승제가 다친 이래 장미는 그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성혜인이 이 며칠간 그를 철저히 보호한 탓이었다.그녀는 성혜인과 말을 붙여보려 했으나, 성혜인은 줄곧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다. 누가 봐도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듯했다.비록 반승제와 미리 상의하고 벌인 일이긴 했지만 장미는 확실히 반승제를 향해 총을 쐈고 그를 다치게 했다.하여 성혜인은 반승제의 가슴의 상처가 낫기 전에는 성난 마음을 풀고 싶지 않았다.먼저 주동적으로 말을 걸어온 사람은 장미였다. 아무래도 미래의 사모님이니까.“혜인 씨, 아직 격투장 아래의 세 개 층은 아직 안 가봤죠? 모든 대결은 목숨을 걸고 하는 거예요. 예전에는 승제도 자주 가서 참가했죠.”성혜인이 손을 멈칫하며 미간을 찌푸렸다.“거길 참가해서 뭐 해요?”“아, 모르셨군요? 승제는 격투장 사장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신분이 있죠. 가명은 god이고, 유명한 복서예요.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실제 신분을 알고 있죠. 다른 사람들은 다 목숨까지 내건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가며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지민이 잘 지켜. 괜히 나가서 또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온시환은 속이 상한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결국 술집으로 발길을 옮겨 한잔하려 했고, 그곳에서 뜻밖에도 원아정을 마주쳤다.‘원아정이 제원에 왔다고?’그녀 곁에는 원진이 서 있었다. 원진은 시선을 앞만 향한 채 걸음을 옮기다가 온시환을 보자 발걸음을 멈췄다.온시환도 마침 마음이 복잡한 상태라 옆에 있는 룸의 문을 열며 말했다.“같이 한 잔 할래?”원진은 망설임 없이 룸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원아정도 서둘러 뒤따랐다. 얼굴에는 상류층 특유의 오만함과 자존심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원진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원진이 있는 자리에서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할 정도였다.과거 원진은 원씨 가문을 철저한 강경책으로 정리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은밀한 거래를 했고 가문 내 반대 세력들은 대부분 사라졌다.그런 원진 앞에서 원아정은 잔뜩 움츠린 채 룸 안의 의자에 앉았다. 손을 무릎 위에 얹고 긴장한 듯 움찔거렸다. 그때 원진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연승혁과의 결혼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손을 꽉 움켜쥔 원아정은 연승혁을 떠올리니 눈가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얼마 전 연승혁을 만나러 연씨 가문에 갔다가 그가 사람을 처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상황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익숙해 보였다.겁이 많은 원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깨어나 보니 연씨 가문의 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연승혁, 그 끔찍한 인간!’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연승혁이 비록 잔혹한 수단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 구은우의 존재를 그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원아정은 원씨 가문에서 작은 개미 같은 존재였다. 원진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생활에 지친 지 오래였다.연승혁이 아무리 냉혹하더라도 그의 아내가 된다면 무
‘그래, 공지민. 구은우와 관련된 일만 나오면 이성을 잃고 주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단 말이지.’온시환은 어깨에 박혀 있던 단검을 뽑아내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옆에 있는 경호원들에게 말했다.“일단 지민이 데리고 돌아가.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공지민은 그 순간도 악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난 여기 남고 싶어요.”그녀는 직접 구은우 사건의 진상을, 그리고 그의 가족 중 누가 손을 썼는지 듣고 싶었다. 온시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데려가.”“시환 씨!”공지민은 경호원들에게 양팔이 붙들린 채 억지로 차로 이끌려 갔다.온시환은 곧 사람을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어깨의 부상은 치명적인 부위는 아니었지만, 출혈이 많았다.차 안에서 부하가 온시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이미 확인되었습니다. 일을 꾸민 건 연씨 가문의 둘째입니다.”연씨 가문의 둘째, 바로 현재 가문을 이끄는 인물이었다. 당시 권력을 다투는 상황에서 그는 형과 자신 아래의 모든 남자들을 차례로 제거했다. 연씨 가문은 전통적으로 후계자를 남자에게만 물려주는 규율을 따랐다. 딸은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가문 밖에서 태어난 남자들은 언제든 폭탄이 될 수 있었다. 구은우를 알지도 못했지만 그의 존재만으로도 위험하다고 판단해 제거한 것이다.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연씨 가문의 모든 권력은 연승혁의 손에 집중되었다. 2년 전부터 그는 해외에서 국내로 사업 중심을 옮겼고 해상 운송 사업을 시작해 원씨 가문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현재의 연승혁은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운 존재였다. 구은우를 위해 복수를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연씨 가문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거대 가문이었다. 온시환이라 해도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온시환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연승혁은 방탕한 성격에 수단이 잔혹했다. 그를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결코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는 원씨 가문의 원아정과 약혼한 상태였다. 원아정은 원진의
“당신들 도대체 뭐야!”여자는 분명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얼굴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가 구은우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이 사람 기억나요?”여자는 사진을 보는 순간 얼굴빛이 확 변했다.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모르겠어요, 이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날 풀어줘요!”공지민은 연예계에서 오랫동안 버텨온 사람답게,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었다. 그녀는 한쪽 발로 여자의 손등을 짓밟으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가로막았다.“지민아, 뭐 하는 거야?”그녀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온시환은 한 번도 그녀의 이런 냉혹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늘 부드럽고, 강인하며, 침착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녀의 눈에 번진 살기가 너무나도 선명했다.만약 자신이 막지 않았다면 이 여자의 손뼈는 이미 부서졌을 것이다.‘구은우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거야?’온시환은 속이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겨우 분노를 억누른 그는 낮게 말했다.“심문은 내 사람들이 할 거야. 넌 결과만 들으면 돼.”공지민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발을 세게 내리찍었다.온시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속이 쓰리고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옆 의자에 앉아 차갑게 변한 공지민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여자는 비명을 질렀다.“당신들 신고할 거야! 다 고소할 거라고!”공지민은 여자의 눈앞에 쭈그려 앉아 차갑게 물었다.“그때 누가 돈을 줘서 청부 살인을 사주했나요? 그 사람 얼굴을 기억하나요?”여자는 공지민을 악에 받친 눈으로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지만 두 명의 경호원이 그녀를 바닥에 제압하고 있어 꼼짝할 수 없었다.공지민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단숨에 침대에서 밀어 떨어뜨렸다.그 아이가 구조되었을 당시 대략 여섯, 일곱 살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할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와 함께 거짓말에 동
공지민은 구은우의 부모가 굉장히 화목한 부부라고만 알고 있었지, 그 사이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녀는 구은우와 오랜 친구였다. 그의 부모가 다투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대체 누가 10억을 들여 구은우의 목숨을 노린 걸까.그녀는 하루빨리 이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싶었다.“시환 씨, 신정우 어머니랑 동생은 찾았어요?”신정우의 말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그에게 돈을 요구하며 동생의 치료비를 대라고 했다.그런데 신정우가 이를 거부했으니, 아마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찾았어. 내일 나랑 같이 만나러 가자.”공지민은 온시환과 꽤 오래 알고 지냈지만 그가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문득 그녀는 과거 온씨 가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온시환이 거의 망설임 없이 온씨 가문와 절연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물론 이건 그녀가 들은 단순한 가십에 불과했다. 당시 온씨 가문 사람 중 누군가가 성혜인을 건드려 일이 몹시 커졌다는 이야기였다.온시환은 가족에게도 무척 냉정한 태도를 보였고 사랑에 있어서도 마치 구경꾼처럼 시큰둥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만큼은 진심을 다하는 것 같았다.공지민은 온시환에 대해 깊이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앞으로 그와 함께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에 대해 더 알 수밖에 없을 터였다...다음 날, 그는 정말 그녀를 데리고 그 여자를 만나러 갔다.구은우가 사고를 당했을 당시 공지민은 정신이 없어 그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기억나는 건 구은우가 구조된 후, 그 어머니와 아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그 후에는 구은우가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 치료를 받았다.그 당시 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나중에야 그 모자가 무책임하게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들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공지민은 그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많았다. 인간의 본성이란 원래 복잡하고 때로는 무척 어두운 법이다. 처음에는 구은우가 단지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그는 오래전부터 공지민에게 깊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예전에는 온시환도 잘 몰랐다. 그러다 구은우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 많은 순간, 공지민은 아마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붙잡아 두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녀 자신조차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마치 생기 없는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모습이었다.온시환이 처음 그녀를 싫어했던 이유도 바로 그녀에게서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계속 그녀를 신경 쓰다 보니, 점점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간 후 공지민의 왼쪽에는 강민지, 오른쪽에는 성혜인이 앉았다.사실 그녀는 성혜인을 알고 있었다. 과거 성혜인과 반승제의 사건이 너무나 크게 이슈가 되어 실시간 검색어에서 자주 본 이름이었다.공지민은 성혜인을 굉장히 자존심 강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생각보다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자들은 마당에 앉아 있었으며 방해하지 않고 때때로 과자나 과일을 들고 와 전해 주었다.강민지가 갑자기 공지민의 손을 잡았다.“지민 씨, 시간 될 때 우리랑 자주 만나요. 남자들이랑만 있지 말고. 남자라는 것들은 말이지, 맞춰 주면 맞춰 줄수록 그걸 당연하게 여겨요.”강민지는 아직 공지민과 온시환의 결혼이 단지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공지민에게 남자를 길들이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공지민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만약 내가 시환 씨를 단지 이용하고 있는 거라면요...”앞에 있는 두 여자는 온시환의 친구들이었다. 만약 이 결혼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거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를 몹시 싫어하게 될 것
성혜인은 한순간 감개무량해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식탁 위의 분위기는 여전히 약간 어색했지만 강민지가 공지민에게 그녀가 출연했던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성혜인은 그제야 강민지가 공지민이 출연한 드라마를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지민은 처음엔 다소 긴장해 보였으나 점차 눈에 띄게 여유로워졌고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강민지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강민지가 성혜인에게 눈짓을 보내자 성혜인도 따라 웃음을 지었다.가끔 여자끼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공감하는 특별한 순간이 있다.식사가 끝날 무렵, 강민지는 공지민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지민 씨, 마지막에 출연했던 드라마는 왜 몇 화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 캐릭터가 그렇게 빨리 죽을 캐릭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퇴장하더라고요.”사람의 진심은 상대의 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법이다.공지민은 강민지가 진심으로 자신의 드라마를 좋아하며 각 에피소드까지 꼼꼼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원래 문보영은 공지민의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문보영과 온시환이 키스하는 모습을 본 후 그녀와 연락을 끊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졌고 예전처럼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그동안 공지민은 참 외로웠다. 그런데 강민지가 먼저 다가와 주자 그녀는 묘하게 안도감을 느꼈다.“그땐 회사에서 문제가 있어서 제가 잠시 활동을 중단해야 했어요. 그래서 그 캐릭터도 일찍 하차할 수밖에 없었죠.”“정말 아쉬워요. 그 캐릭터 팬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끝까지 연기했으면 팔로워가 최소 백만 명은 더 늘었을 거예요.”공지민은 웃음을 터뜨리며 눈매가 휘어졌다.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온시환은 혼자 계산을 하러 갔다.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공지민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다시 보았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은 녹아내릴 듯 부드러워졌다.반승제와 신예준이 그의 앞에 있었지만 온시환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공지민은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온시환 앞에서 이렇게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있었는지 떠올렸다.그날 밤 두 사람이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 온시환은 그녀의 그 미소를 떠올리며 뒤척였다.휴대폰은 침대 옆에 놓여 있었고 최근 연락한 친구들로부터 술자리 초대 메시지가 와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공지민과의 결혼을 생각하며 그녀가 이미 동의했으니 내일 당장이라도 혼인신고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는 돌아누워 공지민을 바라보았다.한편 공지민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에 관한 생각, 특히 결혼 상대가 온시환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낯설고 어색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이 없었다.“지민아, 너도 결혼하기로 했으니까 내일 바로 혼인신고하러 가자.”온시환은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은 결혼이 최소 몇 달 후에나 진행될 줄 알았는데 그가 이렇게 서두를 줄은 몰랐다.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온시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공지민이 마음을 바꿀까 두려웠다. 결혼도, 구은우의 죽음에 대한 조사도 그만두겠다고 하면 그가 그녀를 곁에 붙잡아둘 명분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온시환은 새 정장을 꺼내 입으며 추지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혼인신고하러 간다.]추지성은 이 메시지에 놀라 즉시 전화를 걸어왔다.“야, 너 농담하는 거지? 진짜 가는 거야? 지민 씨가 동의했어?”“응, 동의했어.”추지성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눈을 멍하니 뜬 채 온시환이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온시환은 다른 친구들과 있는 단톡방에도 혼인신고 소식을 알렸다. 단톡방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고 곧이어 물음표가 연달아 올라왔다.가장 강렬한 반응을 보인 건 당연히 설우현이었다. 그는 연달아 다섯 개의 놀란 이모티콘을 올리며 반응했다.다른 사람들은 몇 분간 망설이다가 그제야 축하 메시
온시환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추지성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둘은 별다른 말 없이 게임을 시작했다. 온시환은 게임을 하는 중에도 간간이 휴대폰을 확인하며 초조해했다.저녁 7시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공지민이었다.“국 끓였어요. 와서 먹을래요?”우울한 기분에 젖어 있던 온시환은 그 한마디에 바로 게임기를 내려놓고 밖으로 향했다.그러자 추지성이 소파에 앉아 목소리를 높였다.“야, 어디 가냐? 곧 배달 음식 도착하는데, 나 혼자 다 못 먹어!”“집에 가서 지민이가 끓인 국 먹을 거야.”추지성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뭐야, 이 말투에서 자랑하는 느낌이 나는 건 왜지?”온시환은 이내 추지성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반 시간도 안 돼 집에 도착했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국 냄새가 코를 찔렀다.공지민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온시환은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가 원하는 건 많지 않았다.공지민이 그의 곁에 몇 년만 더 있어 준다면 그 뒤로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남기고 떠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깔끔히 정리하고 아무런 짐도 남기지 않을 작정이었다.‘지민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내가 사라져도 아무렇지도 않겠지...’온시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방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무슨 국 끓인 거야? 냄새가 너무 좋은데.”공지민은 그가 돌아온 걸 보고 작은 그릇에 국을 담아 그에게 내밀었다.“또 지성 씨랑 술 마시러 나갔어요?”온시환은 그녀가 추지성을 싫어한다고 생각해 서둘러 부인했다.“아니야. 다른 사람들이랑 있었어.”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였다.“여자는 없었어.”공지민은 방금 만든 반찬들을 모두 식탁으로 옮기고 밥도 한 그릇 담아 내왔다.둘이 나란히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다. 이렇게 평화롭게 식탁을 마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온시환은 이 고요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국을 천천히 떠먹었다.식사가 끝날 무렵 공지민이 그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바로 문을 나섰다.공지민은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한편 온시환은 집을 나서자마자 추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온시환은 침착하게 옷을 발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거실 한가운데에서 추지성은 한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온시환을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금세 흥미를 잃고 입맞춤을 멈췄다.“시환아?”추지성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온시환은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무시했다.추지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이만 가봐.”여인은 옷이 주워 입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자 추지성은 타올 하나만 걸친 채 태연하게 소파로 와서 앉았다.“야, 너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 좀 하고 와라.”온시환은 담배를 쥔 손이 축 늘어진 채 지쳐 보였다.추지성은 의아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공지민과 화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가 싶었다.“무슨 일이야? 아침에 전화로 자랑질하더니만. 아, 맞다. 너 점 다시 찍었더라? 확실히 점 있는 네가 낫다. 예전에 다른 여자들도 그 점이 좋아서 너한테 홀렸잖아.”온시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구은우의 죽음을 조사하려는 거였어.”추지성은 옆에 놓인 주스를 집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죽은 사람의 일을 왜 조사해? 이게 몇 년 전 일이냐. 다 끝난 거잖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난 가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돼. 남자라면 이미 새로운 연애 몇 번은 했을 텐데.”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봐봐. 주변에 아내 잃은 남자들 있지? 그놈들 지금 얼마나 잘 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근데 남편 잃은 여자들은? 평생 못 벗어나.”추지성의 가족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의 친누나는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