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제 씨, 비록 엄마와 함께 한 시간은 짧았지만 전 어려서 부족했던 모든 사랑을 받았어요. 엄마는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그리고 절 지독히도 사랑하시죠. 만약 제가 이렇게 괴롭힘당하는 것을 봤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으셨을 거예요. 전에 할머니, 할아버지께 맞을 때도 엄마는 항상 제일 먼저 달려들어 절 보호했고, 제가 다른 아이들과 싸울 때도 항상 학부모들과 이치를 따져가며 절 감쌌어요. 엄마는 항상 최선을 다해 절 보호해 주셨어요. 만일 BKS가 정말 엄마랑 연관이 있다면 그곳 사람들은 엄마가 직접 뽑은 후계자를 살갑게 대했어야 해요.”성혜인은 반승제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하지만 전 그곳에서 살가움이나 친절함 따위는 느끼지 못했어요. 그래서 엄마가 BKS와 관련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런데 서천에서 이름을 숨길 것을 선택했으니 혹시 BKS를 탈출했던 건 아닐지 추측 중이에요. 진세운이 절 찾아와 수령으로 만들고 싶었던 이유도 아마 지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지금 진세운에게는 필요한 한 가지 물건이 있어요.”“그게 뭔데?”“해파리 도장이요.”대답하는 성혜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려왔다.“제가 서천에서 발견한 엄마가 숨겨놓은 물건이에요. 만약 BKS가 그때 엄마의 뒤를 봐주었다면 당시의 적수가 누구든 서천에서 그렇게 힘들게 살진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BKS가 도움을 주지 못하니 엄마는 가장 중요한 물건을 가져간 거예요. 게다가 제 외삼촌 일가도 모두 돌아가셨는걸요. 그 사람들이 찾는 건 바로 그 해파리 도장이에요. 그 도장을 가진 사람이 BKS에서 진정한 수령이 될 수 있거든요.”별장을 시원하게 폭파한 뒤 두 사람은 헬기를 타고 함께 돌아갔다.7층에 도착한 두 사람은 입을 맞추었다.숨에 턱에 닿을 듯 반승제는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 반승제가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입을 열었다.“BKS의 현황은 대충 알겠다. 어떤 조직이든 결국 언젠간 분열하게 돼. BKS가 아마 지금 그런 상황 같아. 아마 BKS는 두 파로 나뉘
성혜인이 침대 옆으로 자리를 옮기곤 손끝으로 반승제의 가슴을 더듬었다. 곧이어 그의 숨결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고 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성혜인을 바라보았다.피부를 살짝 꼬집자 그에게서 옅은 신음이 들려왔다.깜짝 놀란 성혜인의 동공이 약하게 흔들렸다.해본 적도 없는 익숙하지 않은 행동이었음에도 너무 흥분했던 탓인지 그는 30분밖에 버티지 못했다.그러나 반승제는 부끄러운 감정 같은 건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온통 땀범벅이 된 그는 성혜인의 손을 다정히 감쌌다.“혜인아, 너 정말… 잘하는 것 같아.”너무 직설적인 평가에 마음이 불편해진 사람은 오히려 성혜인이었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반승제의 손을 뿌리쳤다.“사, 상처가 완전히 나으면 앞으로 진세운을 어떻게 상대할지 생각해 봐요. 지금쯤이면 별장이 파괴된 걸 알게 됐을 거예요.”반승제가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응.”아침 식사 때 격투장의 핵심 인원들이 적지 않게 모였다. 그중에서 단연 제일 중요한 사람은 장미였다.반승제가 다친 이래 장미는 그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성혜인이 이 며칠간 그를 철저히 보호한 탓이었다.그녀는 성혜인과 말을 붙여보려 했으나, 성혜인은 줄곧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다. 누가 봐도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듯했다.비록 반승제와 미리 상의하고 벌인 일이긴 했지만 장미는 확실히 반승제를 향해 총을 쐈고 그를 다치게 했다.하여 성혜인은 반승제의 가슴의 상처가 낫기 전에는 성난 마음을 풀고 싶지 않았다.먼저 주동적으로 말을 걸어온 사람은 장미였다. 아무래도 미래의 사모님이니까.“혜인 씨, 아직 격투장 아래의 세 개 층은 아직 안 가봤죠? 모든 대결은 목숨을 걸고 하는 거예요. 예전에는 승제도 자주 가서 참가했죠.”성혜인이 손을 멈칫하며 미간을 찌푸렸다.“거길 참가해서 뭐 해요?”“아, 모르셨군요? 승제는 격투장 사장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신분이 있죠. 가명은 god이고, 유명한 복서예요.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실제 신분을 알고 있죠. 다른 사람들은 다 목숨까지 내건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잇달아 고개를 숙이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그중 장미 누나만이 미안하다는 듯 와인잔을 들었다.“미안.”오늘의 아침 식사는 격투장 내부 멤버들과의 정식적인 첫 만남으로 나름 중요한 자리였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반승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누나 탓은 아니야.”장미는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많은 부하 앞에서 애인이 홧김에 뿌린 주스에 흠뻑 젖었으니 창피할 만했다.그러나 곧이어 들리는 반승제의 말은 모든 사람을 어이없게 했다.“혜인이가 날 너무 사랑한 탓이지. 내가 아픈 꼴은 못 보겠나 봐.”실내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가라앉았다. 모두 한바탕 호되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장미는 와인잔을 꼭 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네가 이런 사람일 줄이야.”얼굴을 닦아낸 반승제가 대답했다.“원래 이랬거든.”말을 마친 그는 성혜인이 떠난 방향으로 달려갔다.그러나 반승제는 오히려 조금 안도했다.한바탕 펑펑 울었어도 성혜인은 여전히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애인이 눈앞에서 총상으로 쓰러지는 장면을 본 이상, 지금 상황에선 무엇이든 성혜인에겐 자극이 될 수 있었다.반승제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도 이러한 결말을 예상해 두었다.그는 성혜인을 아끼고 사랑했다. 너무 사랑해서 더 조심스럽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사랑은 이렇게나 사람을 바뀌게 한다.하지만 지금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은 적어도 마음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반승제가 막 모퉁이를 돌았을 때, 뜻밖에도 배현우를 발견했다.안 그래도 짜증 나 죽겠는데. 눈에 거슬리게.그는 짜증이 더 나버렸다.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참으며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멀지 않은 창문 앞에 서 있는 성혜인을 발견했다.반승제는 얼른 주방으로 가 과일 쟁반을 들고 왔다.그러나 성혜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배현우가 성혜인의 곁에 섰다.성혜인은 책장 앞에서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마침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읽고 싶은
진백운은 소파에 앉아 무심코 곁에 누워있는 고양이를 건드렸다.고양이 전용 간식을 든 그는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었다.그런데 고양이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손등을 허빌 줄이야. 손등에 세 줄의 빨갛게 긁힌 자국이 생겨났다.진백운은 인상을 쓰며 간색을 내팽개쳤고 고양이는 간식을 향해 재빨리 달려갔다.반대편에 앉아 있는 진세운은 곰곰이 생각했다.전에는 모든 일이 손바닥 안에 있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지금은 왠지 통제 불능의 느낌이 들었다.그의 휴대전화는 계속 울리고 있었다. 폭파된 별장의 사람들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핵심 멤버들은 부상만 입었을 뿐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교육 중인 사람들 일부가 사망했다.진세운을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하지만 체면을 손상하기엔 충분한 사건이었다.003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미스터 K, 002가 사망했습니다.”002는 발목뼈가 부러져 남들처럼 달릴 수 없었기에 포탄이 떨어졌을 때 제일 먼저 죽은 사람이었다.003 역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녀는 전의 비밀조직을 해친 행동으로 벌을받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진세운이 자비를 베풀어 목숨은 건졌다. 하지만 그래도 거동이 불편했기에 포탄에 의해 중상을 입었다.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대피했고 이미 다른 곳에 정착한 상태였다.하지만 사고 소식은 이미 조직의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진 뒤였다.“미스터 K, 장로 쪽에서 오늘 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연락이 왔습니다.”BKS는 002부터 009까지 차기 수령의 후계자를 키워낸 거대한 조직이다.그리고 이 무리는 모두 진세운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다.진세운은 피곤함에 양미간을 꾹 눌렀다.“장로들이 뭐라고 하던가요?”“직접 나서서 설명하라고 하십니다.”미스터 K는 BKS에서 만인의 위상이었지만 그 아래로는 신망이 두터운 장로들이 10명이나 더 있었다.대부분의 수령들은 모두 진세운의 편에 섰지만 유독 두 명만이 자꾸 시비를 걸고넘어졌다.일단 진세운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기만 하면 이 둘은
진백운의 눈도 함께 반짝 빛났다. 두 사람은 만족스럽게 웃음 지었다.“그러네. 왜 그 사람을 잊었지? 그럼 성혜인은 BKS로 돌려보낼 거야? 사실 우리는 도장만 가지면 돼. 그 도장만 있으면 많은 번거로움을 줄일 수 있어.”진세운이 담담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그럼 재미없지. 성혜인은 성여의 딸인걸? 그 여자가 직접 고른 후계자란 말이야. 성혜인의 최후가 어떨지 궁금하지 않아?”“아니, 난 싫어. 난 그냥 빠르고 정확하게 목적을 달성하고 싶을 뿐이지 사람 목숨 가지고 노는 일은 안 해.”진세운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그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을 아는 진백운은 가볍게 웃었다.“그래도 네가 뭘 하든 난 응원할 거야.”진세운이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보이지 않는다.“지금은 일단 돌아가서 장로들과 회의하러 가야 해. 성혜인이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면 그만이야. 죽여서 아무도 성여의 존재를 모르게 하면 돼.”“그럼 해파리 도장은?”“나중에 다시 말하자. 그게 없더라도 이미 대부분의 사람이 우리 편이야.”“그래. 세운이 네 말은 다 맞아.”진백운도 자리에서 일어나 세운의 뒤를 따랐다. 곁에서 알짱대던 고양이도 따라가고 싶은 눈치였으나 진백운은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이윽고 그는 자신의 손등을 힐끗 내려다보았다.이렇게 약한 생물이 자기를 다치게 할 줄이야.성혜인처럼 뜻밖이다....성혜인은 또 한 번 반승제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확실히 나아지고 있음을 확인한 뒤에야 성혜인은 마음을 놓았다.그다음 성혜인은 반승우가 남긴 주소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반승우를 도운 사람이 어머니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측했다.하지만 추측이 맞는지 아닌지는 가봐야 알 일.현재 아무도 BKS의 본거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모르는 것을 붙잡고 있을 바에야 반승우가 남긴 주소를 찾아가 보는 것이 타당했다. 혹시 임지연을 찾게 될지도 모르니. 그렇다면 모두 기뻐할 텐데.임지연은 그들보다 훨씬 아는 것이 많았다.그러나 아직은 반승
“누구세요?”서주혁이 기억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온시환은 당황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일단 나랑 돌아가. 네가 제원이 없는 이상 서씨 가문의 사람들은 빨리 재산을 나누고 싶어 할 거야. 그러니까 네가 전반적인 상황을 주관해야 해. 일단 병원에 가서 검사 좀 받아야 해.”그의 말처럼 이곳에 전문 의료진은 없었다.서주혁이 무의식적으로 다시 장하리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이분도 주혁 씨의 오랜 친구예요. 친구분이 찾아오셨으니 이제 위험한 일은 없을 것 같아요. 갑시다. 함께 돌아가요.”함께 가자는 말을 듣고서야 서주혁은 안색이 밝아졌다.세 사람은 함께 차에 올라탔고 온시환이 앞장섰다.사실 온시환 역시 며칠간 갇혀 있었다. 전에 반승제의 일로 그와 결탁하고 있다고 생각한 윗선의 사람들이 그의 종적에 대해 샅샅이 뒤져보다가 이틀 만에 겨우 혐의를 벗을 수 있게 되었다.서주혁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하마터면 기뻐서 통곡할 뻔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온시환은 서둘러 서주혁을 데리고 검사실로 향했다.서주혁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서씨 가문에 미리 알렸으므로 검사가 끝나기도 전에 가족들이 찾아왔다.대략 십여 명이 모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장하리는 줄곧 서주혁을 따라다니고 있었으나 서씨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좁은 복도에 대기하게 되자 구석으로 밀려났다. 이맘때쯤 검사를 마친 의사가 검사에서 나왔다.“큰 문제 없습니다. 오늘 중으로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서주혁은 회복력이 강했기 때문에 상처에 모두 딱지가 앉아 더 처치할 필요도 없었다.서씨 가문 사람들의 안색은 조금 미묘했다. 서주혁이 남겼을 주식을 놓고 경쟁하던 사람들은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그들 중 서수연이 가장 먼저 울음을 터뜨렸다.“그럼 뭘 기다리고 있어요! 선생님, 얼른 수술 시켜주세요.”의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30분도 안 되어 수술을 집도했다.서수연은 다급한 마음에 구석에 서 있는 장하리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하지만 장하리
서씨 가문의 사람들이 이름을 듣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장하리는 한순간에 받는 스포트라이트에 볼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며 몸이 굳었다.“대표님.”서주혁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둘이 함께 있을 때는 주혁 씨라고 부르더니 갑자기 대표님이라?그는 불만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이리 와봐요.”장하리는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 서씨 가문 사람들의 차가운 혐오와 증오의 눈빛이 모두 여실히 느껴졌다.걸어가는 사람을 보며 서수연은 드디어 그녀가 누구인지 떠올렸다. 전에 주혁 오빠를 꼬셔 차에 탔던 그 천한 사람 아니던가?빌어먹을. 그 천한 년이 감히 오빠가 기억을 잃은 틈을 타 꼬리를 쳐?서수연은 장하리를 매섭게 바라보았으나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이런 일로 날뛸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오빠의 수술이라는 것을.오빠가 빨리 기억을 되찾아야 서씨 가문의 상황이 안정될 것이다.장하리의 손을 마주 잡은 서주혁은 그녀의 불안한 감정을 눈치챘다.“제 걱정 때문에 그래요? 그냥 작은 수술일 뿐이에요. 3시간이면 깨어날 수 있다고 했어요.”장하리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렇게 많은 서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도저히 솔직히 말할 수 없었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굽혀 서주혁의 귓가에 속삭였다.“주혁 씨, 수술이 끝나면 제일 먼저 제 이름을 불러줄래요?”허리를 어정쩡하게 굽힌 모습이 괜히 측은해 보이고 눈을 살며시 감은 모습도 연약해 보였다.서주혁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진지하게 대답했다.“그럴게요.”그제야 장하리는 안도하며 그의 손을 놓았다.“들어가요.”서주혁은 잠시 생각한 뒤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저는 하리와 이혼할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 이혼하라고 부추기거나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앞으로 하리는 제 아내입니다.”그의 선전포고에 서수연은 마음이 급해졌다. 장하리 이 미친년이 감히 아내라고 속여? 정말 비열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다.“오빠 이 여자한테 속은 거예요! 오빠랑은 아무 상관 없던 천한 여자일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려졌다. 이진이 비아냥거리는 태도로 말을 걸자 서씨 가문 사람들의 얼굴에는 혐오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이진의 목적은 이 사람들이 장하리를 음란한 여자라고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다.장하리는 그 어떤 반박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입술을 깨물었다.이런 환경에서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틀린 것이기에 차라리 서주혁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게 훨씬 낫다.장하리를 뚫어지라 노려보던 서수연은 그녀의 뺨을 한 번 더 때리고 싶었지만, 방금 전 서주혁의 행동이 생각나 그럴 수가 없었다.서주혁이 정신을 차린 후에도 계속 장하리를 감싸고 돌 가능성이 남아 있기에 지금 섣불리 행동하다간 앞으로의 생활이 힘들어질 수도 있다.그러니 반드시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그녀는 장하리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며 이를 갈았다.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 키 크고 늘씬한 남자가 서 있었다.남자의 곁에는 임경헌이 있었는데 한동안 모습이 드러내지 않더니만 바람둥이의 분위기가 거의 씻겨나간 듯했다.그동안 반씨 가문과의 왕래를 끊은 그는 반희월의 전화도 받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의 사업에만 몰두했다. 옆에 있는 남자는 현재 그의 집주인이자 서씨 가문의 일원이었다.단지 어떤 이유에서인지 남자는 서씨 가문에서 쫓겨났고, 지금까지 그의 부모님은 여전히 그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지난번 서씨 가문이 서주혁의 장례를 치를 때 서우진도 사의를 표하려고 참석했으나 서씨 가문 가족들은 그를 들여보내지도 않고 뻔뻔스러운 배신자라며 욕설을 퍼부었다.그 이유에 대해서는 임경헌도 귀찮은지 캐묻지 않았다.서우진은 복도 가장 먼 곳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싶은지 손가락 끝을 비비고 있었다.마침 의사가 나오자 그는 거듭 확인했다.“우리 형 정말 괜찮아요?”의사는 마스크를 벗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을 겁니다. 피가 조금 고여있을 뿐이지 금방 기억을 되찾을 거예요.”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10여 분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임경헌을 보며 말했
반승제는 순간 멍해졌다. 예전 일을 떠올리려 했지만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저 자신은 성혜인을 선택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뿐이었다.“시환아, 내 충고를 하나 하자면, 진심으로 지민 씨를 감동시키는 데 집중해. 억지로 잡으려고 하다간 너도 서주혁처럼 될 거야.”온시환은 순간 말을 잃었다. 사실 그도 두려웠다.하지만 공지민은 죽은 사람에게 마음이 묶여 있는 데다 자신의 진심 따윈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았다.반승제가 전화를 끊자 온시환은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잠시 후, 그는 자신의 부하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그렇게 공지민은 바로 오하윤을 만나러 갔다.오하윤은 그녀에게 과일 주스를 따라 주며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나 오늘 원아정 만났어. 너도 기억하지? 고등학교 때 널 화장실에 가둬놓고 물을 끼얹으라고 시킨 애 말이야.”공지민이 원아정을 잊을 리 없었다. 원아정은 모든 악몽의 시작이었다.그때 원아정은 화장실로 그녀를 몰아넣고 옷을 벗기라고 명령했으며 사진을 찍어 협박했다. 그 이후 괴롭힘은 점점 더 악랄해졌다.공지민은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저 묵묵히 참으면 지나갈 거라 믿었지만 어느 날 원아정은 의자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며 명령했다.“공지민, 너랑 은우가 원래 아는 사이라며? 지금 무릎 꿇고 빌어. 안 그러면 네 사진을 모두에게 뿌려서 네가 어떤 년인지 보여줄 거야.”그녀는 그런 고등학생은 본 적이 없었다. 고고한 척하면서도 잔인했고 사람을 완전히 조롱거리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원아정은 재벌가 출신으로 모두가 그녀를 피했다. 항상 고급 외제차가 그녀를 데리러 왔고 때로는 경호원까지 동원되었다. 그녀와 비슷한 수준의 친구들조차 그녀의 괴롭힘을 부추겼다.만약 구은우가 없었다면 공지민은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그때 원아정 앞에 무릎을 꿇고 개처럼 용서를 구했다.이후 구은우가 원아정에게서 사진
지금 공지민은 사실상 온시환에게 감금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온시환은 외부와의 연락을 금지하지는 않았다.오하윤의 전화가 걸려 왔을 때 공지민은 별다른 감정 없이 받았다. 사실 그녀는 이 사람과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오하윤의 첫 마디가 공지민을 놀라게 했다.“지민아, 잠깐 만날 수 있을까? 누가 은우를 죽음으로 몰았는지 알아냈어.”공지민의 눈빛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하지만 문을 열었을 때 문밖에 서 있는 두 명의 경호원을 발견했다.온시환은 그녀가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오하윤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는 전화 속에서도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래, 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널 정말 싫어했어. 왜냐하면 나도 은우를 좋아했거든. 정말 너무너무 좋아했어. 그때 내 계부가 자주 날 때렸고 난 늘 구석에서 몰래 울곤 했어. 그런데 은우는 그런 나를 마치 천사처럼 도와줬어. 먹을 것도 챙겨주고 나를 위로해 줬거든. 신고하자고 말했지만 난 너무 겁쟁이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그 이후로 난 계속 은우를 지켜봤어. 은우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니,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지. 너도 알잖아? 은우는 그 자체로 모든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이었어. 그래서 내가 은우를 찍은 사진이 그렇게 많았던 거야. 예전에 난 계속 널 질투했어. 은우는 언제나 널 지켜줬으니까. 그런데 그동안 난 네가 돈 때문에 온시환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이제야 알았어. 지민아, 오늘 밤 아주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됐어. 이걸 너한테 알려주는 게 내 사과가 될 거야. 잠깐 나올 수 있어?”“알겠어. 주소 보내줘.”전화를 끊은 공지민은 바로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성혜인은 마침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공지민이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 조금 의아했다.“무슨 일이에요, 지민 씨?”“혜인 씨, 나 잠깐 밖에 좀 나가고 싶어요. 시환 씨에게 전화해서 얘기 좀 해줄 수 있어요? 내가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거든요.”성혜인은 두 사람의 관계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원아정의 얼굴에는 잠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지만 오하윤이 옆에 있다는 걸 생각하며 서둘러 표정을 감췄다.오하윤은 아직 구은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문득, 공지민이 왜 그렇게 앨범에 집착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구은우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남겨진 사진이 거의 없어서 더 간절했던 게 아닐까...오하윤은 아무 말 없이 앞에 놓인 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이 원아정은 다시 말을 꺼냈다.“하윤아, 지민이 지금 제원에 있지?”원아정이 평생 가장 싫어했던 사람은 공지민이었다.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의 여자가 어떻게 감히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남자를 빼앗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있어. 근데 내가 따로 만나진 않았어. 너 온시환 알면 금방 만날 수 있을 거야.”‘온시환이라고?’원아정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마 연승혁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조만간 만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원진이 원씨 가문을 장악한 이후 원아정은 늘 눈치를 보며 살았다. 하지만 누려야 할 대접은 빠짐없이 받았다. 원진이 돈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하윤아, 나 곧 결혼해. 상대는 연승혁이야. 넌 잘 모를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람도 온시환과 같은 무리야. 앞으로는 지민이를 만날 일도 많겠지.”고등학교 시절 원아정은 공지민을 괴롭히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구은우가 공지민을 지켜주며 이 괴롭힘은 끝이 났으나 원아정의 마음속 공지민에 대한 증오심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원아정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에는 악의가 서려 있었다.한편 오하윤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한때 그녀도 공지민을 질투했다. 공지민이 구은우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은우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들은 뒤 오하윤은 갑자기 공지민이 안타깝게 느껴졌다.예전의 공지민은 매우 조용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구은우 앞에서는 유일하게 환하게 웃곤 했다.그녀가 지금처럼 타락하고 온시환 같은 남자에게 기대고 있는 이유는 구은
룸 안은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원아정은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를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금세 악랄한 표정이 스쳤다.그녀는 얼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대답한 이는 다름 아닌 오하윤이었다.원아정은 고등학교 시절 오하윤을 알게 되었다. 당시 구은우는 학교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오직 공지민만 보였다.이 사실에 분노한 원아정은 연씨 가문 사람을 알게 되면서 구은우의 외모가 연씨 가문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점을 알아차리고 이 정보를 연씨 가문에 흘렸다.‘내가 못 가지는 건, 공지민 그년도 가지지 못하게 할 거야.’“하윤아, 나 제원에 왔어. 나올 수 있어? 얼굴 좀 보자.”오하윤은 원아정이 무서웠다.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겉으로는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척했지만 뒤로는 후배를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렸고 그 일에서도 아무런 손해를 입지 않았다.게다가 구은우를 향한 그녀의 집착은 누구나 알 정도였다. 그러다 갑자기 조용해진 그녀를 보며 모두가 의아했지만 아무도 그녀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랐다.구은우와 공지민이 졸업할 때까지 원아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만나자고 하니 오하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요즘 심심했던 오하윤은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에 곧장 약속 장소를 정했다.약속 장소에서 만났을 때 오하윤은 자신이 너무 화려하게 차려입은 것을 깨달았다. 온몸을 명품으로 둘러싼 그녀와 달리, 원아정은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이었다. 상대적으로 자신이 천박한 졸부처럼 느껴졌다.“하윤아, 오랜만이야.”어색하게 자리에 앉은 오하윤은 학창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모두가 알다시피 원아정은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돈을 아낌없이 쓰며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아정아, 갑자기 제원에 웬일이야? 너희 집 사업은 여기가 아니었잖아.”당시 원아정 집안이 대규모 사업을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고 대학 입시조차 필요 없이 앞길이 보장된 그녀를 부러워하며 줄을 서서 비위를 맞추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가며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지민이 잘 지켜. 괜히 나가서 또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온시환은 속이 상한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결국 술집으로 발길을 옮겨 한잔하려 했고, 그곳에서 뜻밖에도 원아정을 마주쳤다.‘원아정이 제원에 왔다고?’그녀 곁에는 원진이 서 있었다. 원진은 시선을 앞만 향한 채 걸음을 옮기다가 온시환을 보자 발걸음을 멈췄다.온시환도 마침 마음이 복잡한 상태라 옆에 있는 룸의 문을 열며 말했다.“같이 한 잔 할래?”원진은 망설임 없이 룸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원아정도 서둘러 뒤따랐다. 얼굴에는 상류층 특유의 오만함과 자존심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원진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원진이 있는 자리에서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할 정도였다.과거 원진은 원씨 가문을 철저한 강경책으로 정리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은밀한 거래를 했고 가문 내 반대 세력들은 대부분 사라졌다.그런 원진 앞에서 원아정은 잔뜩 움츠린 채 룸 안의 의자에 앉았다. 손을 무릎 위에 얹고 긴장한 듯 움찔거렸다. 그때 원진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연승혁과의 결혼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손을 꽉 움켜쥔 원아정은 연승혁을 떠올리니 눈가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얼마 전 연승혁을 만나러 연씨 가문에 갔다가 그가 사람을 처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상황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익숙해 보였다.겁이 많은 원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깨어나 보니 연씨 가문의 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연승혁, 그 끔찍한 인간!’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연승혁이 비록 잔혹한 수단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 구은우의 존재를 그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원아정은 원씨 가문에서 작은 개미 같은 존재였다. 원진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생활에 지친 지 오래였다.연승혁이 아무리 냉혹하더라도 그의 아내가 된다면 무
‘그래, 공지민. 구은우와 관련된 일만 나오면 이성을 잃고 주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단 말이지.’온시환은 어깨에 박혀 있던 단검을 뽑아내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옆에 있는 경호원들에게 말했다.“일단 지민이 데리고 돌아가.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공지민은 그 순간도 악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난 여기 남고 싶어요.”그녀는 직접 구은우 사건의 진상을, 그리고 그의 가족 중 누가 손을 썼는지 듣고 싶었다. 온시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데려가.”“시환 씨!”공지민은 경호원들에게 양팔이 붙들린 채 억지로 차로 이끌려 갔다.온시환은 곧 사람을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어깨의 부상은 치명적인 부위는 아니었지만, 출혈이 많았다.차 안에서 부하가 온시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이미 확인되었습니다. 일을 꾸민 건 연씨 가문의 둘째입니다.”연씨 가문의 둘째, 바로 현재 가문을 이끄는 인물이었다. 당시 권력을 다투는 상황에서 그는 형과 자신 아래의 모든 남자들을 차례로 제거했다. 연씨 가문은 전통적으로 후계자를 남자에게만 물려주는 규율을 따랐다. 딸은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가문 밖에서 태어난 남자들은 언제든 폭탄이 될 수 있었다. 구은우를 알지도 못했지만 그의 존재만으로도 위험하다고 판단해 제거한 것이다.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연씨 가문의 모든 권력은 연승혁의 손에 집중되었다. 2년 전부터 그는 해외에서 국내로 사업 중심을 옮겼고 해상 운송 사업을 시작해 원씨 가문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현재의 연승혁은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운 존재였다. 구은우를 위해 복수를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연씨 가문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거대 가문이었다. 온시환이라 해도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온시환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연승혁은 방탕한 성격에 수단이 잔혹했다. 그를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결코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는 원씨 가문의 원아정과 약혼한 상태였다. 원아정은 원진의
“당신들 도대체 뭐야!”여자는 분명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얼굴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가 구은우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이 사람 기억나요?”여자는 사진을 보는 순간 얼굴빛이 확 변했다.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모르겠어요, 이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날 풀어줘요!”공지민은 연예계에서 오랫동안 버텨온 사람답게,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었다. 그녀는 한쪽 발로 여자의 손등을 짓밟으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가로막았다.“지민아, 뭐 하는 거야?”그녀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온시환은 한 번도 그녀의 이런 냉혹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늘 부드럽고, 강인하며, 침착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녀의 눈에 번진 살기가 너무나도 선명했다.만약 자신이 막지 않았다면 이 여자의 손뼈는 이미 부서졌을 것이다.‘구은우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거야?’온시환은 속이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겨우 분노를 억누른 그는 낮게 말했다.“심문은 내 사람들이 할 거야. 넌 결과만 들으면 돼.”공지민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발을 세게 내리찍었다.온시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속이 쓰리고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옆 의자에 앉아 차갑게 변한 공지민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여자는 비명을 질렀다.“당신들 신고할 거야! 다 고소할 거라고!”공지민은 여자의 눈앞에 쭈그려 앉아 차갑게 물었다.“그때 누가 돈을 줘서 청부 살인을 사주했나요? 그 사람 얼굴을 기억하나요?”여자는 공지민을 악에 받친 눈으로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지만 두 명의 경호원이 그녀를 바닥에 제압하고 있어 꼼짝할 수 없었다.공지민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단숨에 침대에서 밀어 떨어뜨렸다.그 아이가 구조되었을 당시 대략 여섯, 일곱 살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할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와 함께 거짓말에 동
공지민은 구은우의 부모가 굉장히 화목한 부부라고만 알고 있었지, 그 사이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녀는 구은우와 오랜 친구였다. 그의 부모가 다투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대체 누가 10억을 들여 구은우의 목숨을 노린 걸까.그녀는 하루빨리 이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싶었다.“시환 씨, 신정우 어머니랑 동생은 찾았어요?”신정우의 말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그에게 돈을 요구하며 동생의 치료비를 대라고 했다.그런데 신정우가 이를 거부했으니, 아마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찾았어. 내일 나랑 같이 만나러 가자.”공지민은 온시환과 꽤 오래 알고 지냈지만 그가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문득 그녀는 과거 온씨 가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온시환이 거의 망설임 없이 온씨 가문와 절연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물론 이건 그녀가 들은 단순한 가십에 불과했다. 당시 온씨 가문 사람 중 누군가가 성혜인을 건드려 일이 몹시 커졌다는 이야기였다.온시환은 가족에게도 무척 냉정한 태도를 보였고 사랑에 있어서도 마치 구경꾼처럼 시큰둥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만큼은 진심을 다하는 것 같았다.공지민은 온시환에 대해 깊이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앞으로 그와 함께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에 대해 더 알 수밖에 없을 터였다...다음 날, 그는 정말 그녀를 데리고 그 여자를 만나러 갔다.구은우가 사고를 당했을 당시 공지민은 정신이 없어 그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기억나는 건 구은우가 구조된 후, 그 어머니와 아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그 후에는 구은우가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 치료를 받았다.그 당시 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나중에야 그 모자가 무책임하게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들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공지민은 그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많았다. 인간의 본성이란 원래 복잡하고 때로는 무척 어두운 법이다. 처음에는 구은우가 단지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그는 오래전부터 공지민에게 깊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예전에는 온시환도 잘 몰랐다. 그러다 구은우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 많은 순간, 공지민은 아마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붙잡아 두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녀 자신조차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마치 생기 없는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모습이었다.온시환이 처음 그녀를 싫어했던 이유도 바로 그녀에게서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계속 그녀를 신경 쓰다 보니, 점점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간 후 공지민의 왼쪽에는 강민지, 오른쪽에는 성혜인이 앉았다.사실 그녀는 성혜인을 알고 있었다. 과거 성혜인과 반승제의 사건이 너무나 크게 이슈가 되어 실시간 검색어에서 자주 본 이름이었다.공지민은 성혜인을 굉장히 자존심 강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생각보다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자들은 마당에 앉아 있었으며 방해하지 않고 때때로 과자나 과일을 들고 와 전해 주었다.강민지가 갑자기 공지민의 손을 잡았다.“지민 씨, 시간 될 때 우리랑 자주 만나요. 남자들이랑만 있지 말고. 남자라는 것들은 말이지, 맞춰 주면 맞춰 줄수록 그걸 당연하게 여겨요.”강민지는 아직 공지민과 온시환의 결혼이 단지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공지민에게 남자를 길들이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공지민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만약 내가 시환 씨를 단지 이용하고 있는 거라면요...”앞에 있는 두 여자는 온시환의 친구들이었다. 만약 이 결혼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거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를 몹시 싫어하게 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