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우진은 포스 넘치게 경적을 울렸다.“우리 형이 반승제 씨랑 친한 사이인 건 알죠? 아이러니하게도 한 명은 기억을 잃었고, 다른 한 명은 반역이라는 누명을 쓴 채 도망치고 있네요. 승제 씨를 잡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을수록 위험하니까 경헌 씨 같은 사회 초년생은 일단 본인 소유의 별장이라도 하나 마련하는 게 가장 좋아요. 물론 지금 모은 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죠.”그 말을 들은 임경헌은 풀이 잔뜩 죽은 채로 씁쓸함을 드러냈다.그러자 서우진은 재빨리 다시 그를 위로했다.“하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에 그만큼의 돈을 모았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거예요. 적어도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났으니 반은 성공한 거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밤 술 한잔 어때요?”“좋아요. 전 가장 비싼 술을 마실 거예요.”“제가 살게요.”서우진은 손목에 명문 시계를 찬 채 여유롭게 핸들을 돌렸다.속세의 때를 벗은 임경헌보다 오히려 그가 더 부잣집 도련님 같은 상황이 되었다....그 시각 병원.두 시간 후, 서우혁이 밖으로 나왔다.장하리는 보고 싶은 마음에 재빨리 앞으로 다가갔지만 이내 서수연에게 밀려났다.“어딜 만져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꺼져요.”이진은 장하리를 끌어당기며 비아냥거렸다.“하리 씨, 쟤네랑은 상대하지 말아요. 어차피 오빠 바보니까.”장하리는 두피가 저리는 느낌에 재빨리 그에게서 벗어났다.그 반응에 이진은 흥미로운 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그녀의 턱으로 손이 향했다.장하리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행동 좀 조심해주세요.”“어머, 하리 씨에게 이런 성깔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그는 장하라의 분노가 안중에도 없는지 마치 새기 고양이를 놀리는 듯 철저하게 무시했다.힘이 없을 때는 화가 난 모습조차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이기 마련이다.모든 사람이 서주혁의 병실로 들어가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서수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장하리는 복도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진은 고통으로 인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의 사전에는 여자를 때리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었지만, 장소가 병원이고 바로 앞에 서씨 가문이 있으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 고통이 지나가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싸늘한 시선으로 장하리를 바라봤다.그녀는 눈살을 찌푸린 채 그를 무시하고선 조심스럽게 병실 안을 들여다보았다.그렇게 장하리는 몸 전체 마비될 정도로 두 시간 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안에서는 인기척이 들려왔다.모두의 시선 속에서 서주혁의 눈꺼풀이 움직였고 그걸 알아차린 서수연은 재빨리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오빠!”서주혁은 눈을 뜨고 무심하게 천장을 바라봤다.“오빠, 지금 어때요? 괜찮아요? 뭐 생각나는 건 없어요?”눈물을 펑펑 흘린 서수연과 달리 서주혁은 머리가 아픈지 표정이 일그러졌다.비록 작은 수술이지만 몸이 찌뿌둥한 듯 사라들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남은 가족들의 얼굴에는 불안함이 가득했으나 저마다 위선적인 모습으로 돌변했다.“주혁아, 괜찮다니 다행이구나.”“정말 하느님이 도와준 건가 봐요. 전 솔직히 죽었다고 끝까지 믿지 않았거든요.”번지르르한 말과 달리 그들은 당시 시신에 대한 추가 확인도 없이 서둘러 장례를 치렀다.서수연은 병실 문밖에 장하리를 바라보며 악랄함을 드러냈다.“오빠, 저 여자가 정신을 잃은 틈을 타서 본인이 아내라며 오빠를 속였어요. 정말 역겹지 않아요? 이런 건 절대 용서하면 안 돼요.”서주혁은 이제 막 깨어나서 그런지 모든 게 시끄럽게만 느껴졌다.그러나 서수연의 얼굴에는 흥미로움만 가득했다. 어쩌면 수술을 받은 후에도 장하리를 감싸고 돌지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오빠, 당연히 저 여자한테 따져야죠.”서주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너희들은 다 나가. 그리고 시환이 좀 불러와 봐.”이제 그는 온시환에게 확인해야 할 중요한 일이 떠올랐다.지금까지 장하리를 한순간도 언급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서수연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시환 오빠
말투는 오히려 예전과 똑같았다.마지막 희망이 철저하게 짓밟힌 장하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얼굴이 화끈거렸다.고통스러움과 수치심이 동시에 몰려온 상황에 하필이면 서수연까지 옆에서 부채질했다.“우리 오빠 한 말 들었죠? 그러니까 빨리 꺼져요. 안 그러면 사람 불러서 쫓아낼 거예요.”장하리이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가자 서수연은 조롱 섞인 목소리로 뒤에서 혼잣말했다.“난 주제 파악 못 하는 여자들이 그렇게 한심하더라. 남자 침대에 기어오르면 인생이 바뀐다고 착각한 모양이지? 자기가 얼마나 추잡스러운지도 모르고.”말을 마친 그녀는 심지어 장하리의 모든 일을 친한 친구에게 터놓았다.서수연과 친구들이 속한 그 무리는 꽤 유명했다. 비록 성혜인에게 당한 적이 있어 여전히 그녀를 두려워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장하리인 만큼 무서울 게 없으니 기세가 하늘을 치솟았다.또한 그녀는 성혜인으로 인해 겪은 모든 손실을 장하리에게서 돌려받고 싶었다.서수연은 가볍게 비웃고선 서주혁의 분부대로 온시환을 데려왔다.병실에 들어선 온시환은 주위를 둘러봤지만 장하리가 보이지 않아 조금 이상했다.서주혁은 수술 전에 그녀를 껴안은 채 입을 맞추며 난리를 피웠고, 장하리도 걱정된 모습으로 애간장을 태웠다. 하지만 그가 깨어났는데 장하리가 떠났다니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하리 씨는요?”온시환은 성혜인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되레 장하리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그는 성혜인을 잔꾀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반승제의 아내였지만 바람을 피우며 그를 농락해 완전히 바보로 만들었으니까.하지만 장하리는 다르다. 언뜻 보기에도 매우 정직해 보였고, 심지어 반승제가 사람을 시켜 조사한 적이 있었으니 믿음직했다.“갑자기 그 여자 얘기는 왜 하는 거야?”서주혁은 짜증이 나는 듯 혐오감을 드러내더니 연신 헛구역질했다.그는 이불을 들추고 주저 없이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로 향했다.병실 입구에 서 있던 온시환은 그의 안색을 보고선 고
서주혁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옷을 정리하기 위해 근처 거울 앞에 섰다.“교통사고를 당하기 전에 승제의 부탁을 받았어. 설씨 가문의 아가씨를 조사해달라고 했거든.”온시환은 이 일에 대해 들은 적 있었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환아, 최근에 일어난 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 좀 해줄래? 특히 승제랑 혜인 씨에게 관련된 일은 사소한 것까지 빼놓지 말고 전부 얘기해줘.”그는 장하리의 이름만 떠올려도 속이 불편한 듯 더 이상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서둘러 플로리아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에게 알려줬다.서주혁은 10분이 걸려서야 지금까지 자신이 받았던 모든 정보를 정리했다.“교통사고 당하기 전에 세운이를 만났어. 만약 네가 세운이에게 다른 신분이 있다는 걸 알려주지 않았다면 의심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수상하네. 어떻게 지금까지 숨긴 거지?”서주혁은 신중한 성격을 가졌다. 그들 몇 명은 모두 서로에게 진심이었기에 확실한 증거가 있기 전까지는 섣불리 결단을 내리지 않기로 결심했었다.따라서 반승제가 진세운을 의심하는 제스처를 취했을 때는 그가 정신을 차려야만 뭔가 선택을 내릴 수 있었다.하지만 이제 진세운의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 그다음을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그때 세운이를 만나고 서천으로 향했어. 내가 조사한 바로는 설씨 가문의 아가씨가 서천 병원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거든. 우리의 인식 속에서 의사라는 직업은 철밥통이잖아? 그런데 최근 따라 서천 병원에서 많은 의사를 해고한 거야. 그래서 직접 가보려고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됐어.”“주혁아, 승제 사람들한테서 들었는데 임수아 씨가 설씨 가문의 아가씨래.”서주혁은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 겉모습만 본다면 임수아가 확실했지만, 그는 어딘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이번에는 더 많은 인력을 동원해서 직접 서천에 가볼 거야. 사실 이미 마음속에 막연한 추측이 하나 있는데 괜히 내가 승제의 판단에 영향을 끼칠까 봐 말은 못 하겠어. 일단 한번 현장에 가봐야
두 대의 차량이 동시에 서천으로 향했다. 생각이 많아진 서주혁은 똑같은 사고가 반복되지 않게끔 수많은 경호원을 동원했고 앞뒤로 경호하게 했다.그는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은 채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키보드를 내리치고 있었다.설기웅은 다른 차에 타고 있었다. 그의 핸드폰에는 수천 개의 메시지가 쏟아졌는데 그중 대부분은 설인아가 보낸 것이다.설의종은 설인아를 쫓아낸 후 모든 은행 카드를 끊었다.명문가는 기본적으로 강자 앞에서 약하고 약자 앞에서 강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공주님 대접을 받던 설인아가 갑자기 떠났으니 사람들은 단번에 설씨 가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다며 확신했다.설기우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자신의 핸드폰에 담긴 설인아의 구조 메시지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그동안 목숨 걸고 아끼던 설인아가 자신의 친동생이 아닐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어렸을 때부터 설의종은 친동생인 설인아를 많이 사랑해 줘야 한다며 강조했던 말이 뇌리에 박혔다.[오빠, 이 사람들이 날 비웃어. 나 너무 힘들어.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데 이러다가 죽는 건 아니겠지?][임수아 씨의 일은 정말 내가 의도적으로 계획한 게 아니야. 난 혜인 씨가 목표였다고. 그 차에 설인아 씨가 탈출은 아예 몰랐어. 오빠, 이건 누가 일부러 설계한 게 틀림없어. 내가 혜인 씨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누군가 날 이용한 거야. 왜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는 거지? 그렇게 오랫동안 설씨 가문에서 지냈는데 아무리 내가 가족이 아니더라도 믿어줄 수는 있잖아. 솔직히 이건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니잖아.]설기웅은 메시지를 보고선 표정이 일그러졌다.때마침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고, 아니나 다를까 설인아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요즘 따라 전화를 더 자주 했지만 설기웅은 한번도 받지 않았다.하지만 방금 본 메시지에 마음이 흔들렸는지 수신 버튼을 눌렀고 핸드폰 너머로는 설인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오빠, 평생 연락 안 받는 줄 알았잖아. 엉엉... 나 아파. 사람들이 어제 때렸어. 그런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설인아는 목숨을 잃더라도 무엇이든 시도할 의지가 있었다.“당신 누구야? 어떻게 도와줄 건데?”남자는 일어나서 침대 옆으로 걸어갔다.“설기웅 씨는 당신처럼 모질지 못하거든요. 자신을 좀 더 비참하게 만들고 나서 모든 걸 성혜인에게 떠넘기면 상황은 아직 역전될 가능성이 있어요. 당신 엄마랑 오빠는 얼마든지 성혜인에게 따지려고 할 거예요. 성혜인의 신분이 드러날 때까지 지금처럼 기다리기만 하면 당신은 완전히 제거될 거예요. 그리고 당연히 설씨 가문의 아가씨를 사칭한 사람이라고 낙인찍히겠죠?”설인아는 동공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이 남자 누구지? 어떻게 성혜인의 신분을 알고 있는 거지? 설마 저번에 문자를 보낸 그 사람인가?’설인아가 주먹을 불끈 쥐자 남자는 천천히 몸을 숙여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인아 씨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성혜인 아닌가요? 상황을 악화시킨다면 설기웅 씨는 자연스레 돌아올 거예요.”설인아의 눈빛은 순식간에 사악하게 변했다.“당신이 날 도와준다면 뭐든지 할게요.”남자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좋아요. 어딘가로 데리고 갈 건데 협조만 잘해주면 돼요.”설인아가 주저 없이 동의하자 남자는 만족스러워하며 천천히 그녀를 유혹했다.“설의종 씨도 당신을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동안 친딸을 찾으러 다니면서도 그쪽을 쫓아내지 않았잖아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인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잔인하지 않다는 뜻이고 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마지막에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모질게 인아 씨를 대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어쨌든 신분이 바뀌었을 때는 어린아이였을 뿐이잖아요. 이제부터 철저하게 속이고 독이 든 술을 마시게 한다면 설의종 씨는 바로 죽을 겁니다.”설인아는 두 눈이 반짝 빛났다.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게 성혜인과 설씨 가문이니까.“정말로 제가 계획한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누가 계획했든 이제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어차피 그 사람은 자신의 딸에만 눈이 멀어서
부끄러움에 몸이 후끈해진 성혜인은 닥치는 대로 한쪽 옷을 잡아당겨 그의 얼굴과 눈을 가렸다.그러자 반승제는 옷을 잡고 침대 밑으로 던졌다.“널 보고 싶어.”“혜안아, 이런 건 언제 배웠어?”참다못한 성혜인이 그의 입을 막자, 반승제는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손바닥을 핥았다.그들이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 침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자연스레 두 사람 모두 문 앞에 누군가가 멈춰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배현우는 손끝이 문짝이 닿는 순간 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너무도 선명했기에 그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거름을 옮겼다.방으로 돌아오자, 가슴속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퍼지는 걸 느꼈고 마치 몸 안의 모든 수분이 말라가는 듯 괴로웠다.특히나 성혜인의 아련한 목소리는 마치 심장을 긁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문지르다가 별안간 주먹으로 옆 벽을 내리쳤다.“반승우?”마음속으로 소리쳤지만 반승우는 응답하지 않았다.배현우는 자신의 외투를 벗고 팔에 난 작은 바늘구멍을 바라봤다.“반승우, 아까 들었지? 네가 좋아하는 여자가 네 동생이랑 무슨 짓 하고 있는지 봤어? 네가 최선을 다해 단서를 찾았다 한들 저 사람들이 너한테 고마워할 것 같냐? 넌 정말 멍청해. 내가 너였다면 성혜인이 나라는 존재를 평생 기억하게 했을 거라고!”반승우와 배현우는 완전히 극과 극이다. 반승우가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이라면 배현우는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다.그는 고개를 숙여 팔뚝에 난 촘촘한 바늘 자국을 바라보며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드러냈다.“됐다. 내가 아무리 말해도 넌 어차피 대답 안 할 거잖아. 넌 성혜인이 옆에 있어야만 모습을 드러내는 겁쟁이야.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 날 방해하지 마.”그는 손가락뼈가 부서질 정도로 다시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반승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말했었잖아. 그건 내 감정이 아니라고.”배현우는 방에 있는 테이블을 걷어찼다.“네 감정이 아니면
어디선가 성혜인을 노려보는 시선은 더욱 원망스럽고 악랄해졌다.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수천 번은 죽이고 남았을 것이다.성혜인이 이상한 느낌을 받던 그때 어디선가 사람들의 야유 소리가 들려왔고 남 일에 참견하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익숙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나 설씨 가문의 아가씨야.”“퉤! 아가씨 같은 소리하네. 여기에 왔다는 건 팔렸다는 뜻이고 넌 앞으로 내 노예가 될 거야. 아이를 다섯 명 낳기 전까지는 떠날 생각도 하지 마.”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벽 너머를 바라봤고 아니나 다를까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은 설인아였다.설인아가 왜 그레이 지대에 나타난 거지?그 와중에 성혜인을 발견한 설인아는 두 눈이 반짝 빛났다.“혜인 씨, 나 좀 꺼내줘요. 안 그러면 우리 큰오빠한테 다 일러바칠 거예요.”성혜인은 그저 이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여전히 거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게다가 그녀는 최근에 일어난 모든 일을 반승제를 통해 이미 전해 들었다. 설인아는 설씨 가문의 아가씨가 아니란 건 이미 확정한 사실이다. 임수아가 맞는지는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설기웅도 움직이지 시작했고 서주혁도 이제 정신을 차렸으니, 사건의 진실은 조만간에 밝혀질 것이다.설인아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때다 싶어 달려들어 성혜인의 다리를 덥석 껴안았다.“큰오빠 찾으러 왔어요. 우리 오빠가 어디에 있는지만 알려주면 찾고 나서 바로 여기를 떠날게요.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도와줘요. 방금 전에는 제가 실수했어요. 그런 말투로 부탁하면 안 되는건 데...”성혜인은 원수에게 덕을 베푸는 사람이 아니다. 하물며 설인아 때문에 죽을뻔했는데 그녀를 굳이 도와야 하는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눈살을 찌푸린 채 서 있던 성혜인은 설인아의 뒤에 있던 남자가 달려와 그녀의 발목을 덥석 잡는 걸 목격했다.“미쳤냐? 돈까지 줬는데 감히 도망쳐?”순간 뺨 한 대가 날아와 설인아의 얼굴을 때렸다.
반승제는 순간 멍해졌다. 예전 일을 떠올리려 했지만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저 자신은 성혜인을 선택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뿐이었다.“시환아, 내 충고를 하나 하자면, 진심으로 지민 씨를 감동시키는 데 집중해. 억지로 잡으려고 하다간 너도 서주혁처럼 될 거야.”온시환은 순간 말을 잃었다. 사실 그도 두려웠다.하지만 공지민은 죽은 사람에게 마음이 묶여 있는 데다 자신의 진심 따윈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았다.반승제가 전화를 끊자 온시환은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잠시 후, 그는 자신의 부하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그렇게 공지민은 바로 오하윤을 만나러 갔다.오하윤은 그녀에게 과일 주스를 따라 주며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나 오늘 원아정 만났어. 너도 기억하지? 고등학교 때 널 화장실에 가둬놓고 물을 끼얹으라고 시킨 애 말이야.”공지민이 원아정을 잊을 리 없었다. 원아정은 모든 악몽의 시작이었다.그때 원아정은 화장실로 그녀를 몰아넣고 옷을 벗기라고 명령했으며 사진을 찍어 협박했다. 그 이후 괴롭힘은 점점 더 악랄해졌다.공지민은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저 묵묵히 참으면 지나갈 거라 믿었지만 어느 날 원아정은 의자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며 명령했다.“공지민, 너랑 은우가 원래 아는 사이라며? 지금 무릎 꿇고 빌어. 안 그러면 네 사진을 모두에게 뿌려서 네가 어떤 년인지 보여줄 거야.”그녀는 그런 고등학생은 본 적이 없었다. 고고한 척하면서도 잔인했고 사람을 완전히 조롱거리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원아정은 재벌가 출신으로 모두가 그녀를 피했다. 항상 고급 외제차가 그녀를 데리러 왔고 때로는 경호원까지 동원되었다. 그녀와 비슷한 수준의 친구들조차 그녀의 괴롭힘을 부추겼다.만약 구은우가 없었다면 공지민은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그때 원아정 앞에 무릎을 꿇고 개처럼 용서를 구했다.이후 구은우가 원아정에게서 사진
지금 공지민은 사실상 온시환에게 감금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온시환은 외부와의 연락을 금지하지는 않았다.오하윤의 전화가 걸려 왔을 때 공지민은 별다른 감정 없이 받았다. 사실 그녀는 이 사람과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오하윤의 첫 마디가 공지민을 놀라게 했다.“지민아, 잠깐 만날 수 있을까? 누가 은우를 죽음으로 몰았는지 알아냈어.”공지민의 눈빛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하지만 문을 열었을 때 문밖에 서 있는 두 명의 경호원을 발견했다.온시환은 그녀가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오하윤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는 전화 속에서도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래, 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널 정말 싫어했어. 왜냐하면 나도 은우를 좋아했거든. 정말 너무너무 좋아했어. 그때 내 계부가 자주 날 때렸고 난 늘 구석에서 몰래 울곤 했어. 그런데 은우는 그런 나를 마치 천사처럼 도와줬어. 먹을 것도 챙겨주고 나를 위로해 줬거든. 신고하자고 말했지만 난 너무 겁쟁이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그 이후로 난 계속 은우를 지켜봤어. 은우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니,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지. 너도 알잖아? 은우는 그 자체로 모든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이었어. 그래서 내가 은우를 찍은 사진이 그렇게 많았던 거야. 예전에 난 계속 널 질투했어. 은우는 언제나 널 지켜줬으니까. 그런데 그동안 난 네가 돈 때문에 온시환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이제야 알았어. 지민아, 오늘 밤 아주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됐어. 이걸 너한테 알려주는 게 내 사과가 될 거야. 잠깐 나올 수 있어?”“알겠어. 주소 보내줘.”전화를 끊은 공지민은 바로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성혜인은 마침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공지민이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 조금 의아했다.“무슨 일이에요, 지민 씨?”“혜인 씨, 나 잠깐 밖에 좀 나가고 싶어요. 시환 씨에게 전화해서 얘기 좀 해줄 수 있어요? 내가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거든요.”성혜인은 두 사람의 관계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원아정의 얼굴에는 잠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지만 오하윤이 옆에 있다는 걸 생각하며 서둘러 표정을 감췄다.오하윤은 아직 구은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문득, 공지민이 왜 그렇게 앨범에 집착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구은우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남겨진 사진이 거의 없어서 더 간절했던 게 아닐까...오하윤은 아무 말 없이 앞에 놓인 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이 원아정은 다시 말을 꺼냈다.“하윤아, 지민이 지금 제원에 있지?”원아정이 평생 가장 싫어했던 사람은 공지민이었다.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의 여자가 어떻게 감히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남자를 빼앗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있어. 근데 내가 따로 만나진 않았어. 너 온시환 알면 금방 만날 수 있을 거야.”‘온시환이라고?’원아정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마 연승혁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조만간 만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원진이 원씨 가문을 장악한 이후 원아정은 늘 눈치를 보며 살았다. 하지만 누려야 할 대접은 빠짐없이 받았다. 원진이 돈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하윤아, 나 곧 결혼해. 상대는 연승혁이야. 넌 잘 모를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람도 온시환과 같은 무리야. 앞으로는 지민이를 만날 일도 많겠지.”고등학교 시절 원아정은 공지민을 괴롭히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구은우가 공지민을 지켜주며 이 괴롭힘은 끝이 났으나 원아정의 마음속 공지민에 대한 증오심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원아정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에는 악의가 서려 있었다.한편 오하윤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한때 그녀도 공지민을 질투했다. 공지민이 구은우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은우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들은 뒤 오하윤은 갑자기 공지민이 안타깝게 느껴졌다.예전의 공지민은 매우 조용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구은우 앞에서는 유일하게 환하게 웃곤 했다.그녀가 지금처럼 타락하고 온시환 같은 남자에게 기대고 있는 이유는 구은
룸 안은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원아정은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를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금세 악랄한 표정이 스쳤다.그녀는 얼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대답한 이는 다름 아닌 오하윤이었다.원아정은 고등학교 시절 오하윤을 알게 되었다. 당시 구은우는 학교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오직 공지민만 보였다.이 사실에 분노한 원아정은 연씨 가문 사람을 알게 되면서 구은우의 외모가 연씨 가문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점을 알아차리고 이 정보를 연씨 가문에 흘렸다.‘내가 못 가지는 건, 공지민 그년도 가지지 못하게 할 거야.’“하윤아, 나 제원에 왔어. 나올 수 있어? 얼굴 좀 보자.”오하윤은 원아정이 무서웠다.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겉으로는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척했지만 뒤로는 후배를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렸고 그 일에서도 아무런 손해를 입지 않았다.게다가 구은우를 향한 그녀의 집착은 누구나 알 정도였다. 그러다 갑자기 조용해진 그녀를 보며 모두가 의아했지만 아무도 그녀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랐다.구은우와 공지민이 졸업할 때까지 원아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만나자고 하니 오하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요즘 심심했던 오하윤은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에 곧장 약속 장소를 정했다.약속 장소에서 만났을 때 오하윤은 자신이 너무 화려하게 차려입은 것을 깨달았다. 온몸을 명품으로 둘러싼 그녀와 달리, 원아정은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이었다. 상대적으로 자신이 천박한 졸부처럼 느껴졌다.“하윤아, 오랜만이야.”어색하게 자리에 앉은 오하윤은 학창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모두가 알다시피 원아정은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돈을 아낌없이 쓰며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아정아, 갑자기 제원에 웬일이야? 너희 집 사업은 여기가 아니었잖아.”당시 원아정 집안이 대규모 사업을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고 대학 입시조차 필요 없이 앞길이 보장된 그녀를 부러워하며 줄을 서서 비위를 맞추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가며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지민이 잘 지켜. 괜히 나가서 또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온시환은 속이 상한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결국 술집으로 발길을 옮겨 한잔하려 했고, 그곳에서 뜻밖에도 원아정을 마주쳤다.‘원아정이 제원에 왔다고?’그녀 곁에는 원진이 서 있었다. 원진은 시선을 앞만 향한 채 걸음을 옮기다가 온시환을 보자 발걸음을 멈췄다.온시환도 마침 마음이 복잡한 상태라 옆에 있는 룸의 문을 열며 말했다.“같이 한 잔 할래?”원진은 망설임 없이 룸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원아정도 서둘러 뒤따랐다. 얼굴에는 상류층 특유의 오만함과 자존심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원진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원진이 있는 자리에서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할 정도였다.과거 원진은 원씨 가문을 철저한 강경책으로 정리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은밀한 거래를 했고 가문 내 반대 세력들은 대부분 사라졌다.그런 원진 앞에서 원아정은 잔뜩 움츠린 채 룸 안의 의자에 앉았다. 손을 무릎 위에 얹고 긴장한 듯 움찔거렸다. 그때 원진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연승혁과의 결혼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손을 꽉 움켜쥔 원아정은 연승혁을 떠올리니 눈가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얼마 전 연승혁을 만나러 연씨 가문에 갔다가 그가 사람을 처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상황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익숙해 보였다.겁이 많은 원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깨어나 보니 연씨 가문의 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연승혁, 그 끔찍한 인간!’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연승혁이 비록 잔혹한 수단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 구은우의 존재를 그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원아정은 원씨 가문에서 작은 개미 같은 존재였다. 원진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생활에 지친 지 오래였다.연승혁이 아무리 냉혹하더라도 그의 아내가 된다면 무
‘그래, 공지민. 구은우와 관련된 일만 나오면 이성을 잃고 주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단 말이지.’온시환은 어깨에 박혀 있던 단검을 뽑아내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옆에 있는 경호원들에게 말했다.“일단 지민이 데리고 돌아가.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공지민은 그 순간도 악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난 여기 남고 싶어요.”그녀는 직접 구은우 사건의 진상을, 그리고 그의 가족 중 누가 손을 썼는지 듣고 싶었다. 온시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데려가.”“시환 씨!”공지민은 경호원들에게 양팔이 붙들린 채 억지로 차로 이끌려 갔다.온시환은 곧 사람을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어깨의 부상은 치명적인 부위는 아니었지만, 출혈이 많았다.차 안에서 부하가 온시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이미 확인되었습니다. 일을 꾸민 건 연씨 가문의 둘째입니다.”연씨 가문의 둘째, 바로 현재 가문을 이끄는 인물이었다. 당시 권력을 다투는 상황에서 그는 형과 자신 아래의 모든 남자들을 차례로 제거했다. 연씨 가문은 전통적으로 후계자를 남자에게만 물려주는 규율을 따랐다. 딸은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가문 밖에서 태어난 남자들은 언제든 폭탄이 될 수 있었다. 구은우를 알지도 못했지만 그의 존재만으로도 위험하다고 판단해 제거한 것이다.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연씨 가문의 모든 권력은 연승혁의 손에 집중되었다. 2년 전부터 그는 해외에서 국내로 사업 중심을 옮겼고 해상 운송 사업을 시작해 원씨 가문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현재의 연승혁은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운 존재였다. 구은우를 위해 복수를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연씨 가문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거대 가문이었다. 온시환이라 해도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온시환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연승혁은 방탕한 성격에 수단이 잔혹했다. 그를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결코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는 원씨 가문의 원아정과 약혼한 상태였다. 원아정은 원진의
“당신들 도대체 뭐야!”여자는 분명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얼굴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가 구은우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이 사람 기억나요?”여자는 사진을 보는 순간 얼굴빛이 확 변했다.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모르겠어요, 이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날 풀어줘요!”공지민은 연예계에서 오랫동안 버텨온 사람답게,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었다. 그녀는 한쪽 발로 여자의 손등을 짓밟으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가로막았다.“지민아, 뭐 하는 거야?”그녀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온시환은 한 번도 그녀의 이런 냉혹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늘 부드럽고, 강인하며, 침착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녀의 눈에 번진 살기가 너무나도 선명했다.만약 자신이 막지 않았다면 이 여자의 손뼈는 이미 부서졌을 것이다.‘구은우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거야?’온시환은 속이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겨우 분노를 억누른 그는 낮게 말했다.“심문은 내 사람들이 할 거야. 넌 결과만 들으면 돼.”공지민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발을 세게 내리찍었다.온시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속이 쓰리고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옆 의자에 앉아 차갑게 변한 공지민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여자는 비명을 질렀다.“당신들 신고할 거야! 다 고소할 거라고!”공지민은 여자의 눈앞에 쭈그려 앉아 차갑게 물었다.“그때 누가 돈을 줘서 청부 살인을 사주했나요? 그 사람 얼굴을 기억하나요?”여자는 공지민을 악에 받친 눈으로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지만 두 명의 경호원이 그녀를 바닥에 제압하고 있어 꼼짝할 수 없었다.공지민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단숨에 침대에서 밀어 떨어뜨렸다.그 아이가 구조되었을 당시 대략 여섯, 일곱 살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할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와 함께 거짓말에 동
공지민은 구은우의 부모가 굉장히 화목한 부부라고만 알고 있었지, 그 사이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녀는 구은우와 오랜 친구였다. 그의 부모가 다투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대체 누가 10억을 들여 구은우의 목숨을 노린 걸까.그녀는 하루빨리 이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싶었다.“시환 씨, 신정우 어머니랑 동생은 찾았어요?”신정우의 말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그에게 돈을 요구하며 동생의 치료비를 대라고 했다.그런데 신정우가 이를 거부했으니, 아마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찾았어. 내일 나랑 같이 만나러 가자.”공지민은 온시환과 꽤 오래 알고 지냈지만 그가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문득 그녀는 과거 온씨 가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온시환이 거의 망설임 없이 온씨 가문와 절연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물론 이건 그녀가 들은 단순한 가십에 불과했다. 당시 온씨 가문 사람 중 누군가가 성혜인을 건드려 일이 몹시 커졌다는 이야기였다.온시환은 가족에게도 무척 냉정한 태도를 보였고 사랑에 있어서도 마치 구경꾼처럼 시큰둥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만큼은 진심을 다하는 것 같았다.공지민은 온시환에 대해 깊이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앞으로 그와 함께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에 대해 더 알 수밖에 없을 터였다...다음 날, 그는 정말 그녀를 데리고 그 여자를 만나러 갔다.구은우가 사고를 당했을 당시 공지민은 정신이 없어 그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기억나는 건 구은우가 구조된 후, 그 어머니와 아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그 후에는 구은우가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 치료를 받았다.그 당시 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나중에야 그 모자가 무책임하게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들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공지민은 그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많았다. 인간의 본성이란 원래 복잡하고 때로는 무척 어두운 법이다. 처음에는 구은우가 단지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그는 오래전부터 공지민에게 깊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예전에는 온시환도 잘 몰랐다. 그러다 구은우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 많은 순간, 공지민은 아마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붙잡아 두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녀 자신조차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마치 생기 없는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모습이었다.온시환이 처음 그녀를 싫어했던 이유도 바로 그녀에게서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계속 그녀를 신경 쓰다 보니, 점점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간 후 공지민의 왼쪽에는 강민지, 오른쪽에는 성혜인이 앉았다.사실 그녀는 성혜인을 알고 있었다. 과거 성혜인과 반승제의 사건이 너무나 크게 이슈가 되어 실시간 검색어에서 자주 본 이름이었다.공지민은 성혜인을 굉장히 자존심 강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생각보다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자들은 마당에 앉아 있었으며 방해하지 않고 때때로 과자나 과일을 들고 와 전해 주었다.강민지가 갑자기 공지민의 손을 잡았다.“지민 씨, 시간 될 때 우리랑 자주 만나요. 남자들이랑만 있지 말고. 남자라는 것들은 말이지, 맞춰 주면 맞춰 줄수록 그걸 당연하게 여겨요.”강민지는 아직 공지민과 온시환의 결혼이 단지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공지민에게 남자를 길들이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공지민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만약 내가 시환 씨를 단지 이용하고 있는 거라면요...”앞에 있는 두 여자는 온시환의 친구들이었다. 만약 이 결혼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거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를 몹시 싫어하게 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