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설인아는 목숨을 잃더라도 무엇이든 시도할 의지가 있었다.“당신 누구야? 어떻게 도와줄 건데?”남자는 일어나서 침대 옆으로 걸어갔다.“설기웅 씨는 당신처럼 모질지 못하거든요. 자신을 좀 더 비참하게 만들고 나서 모든 걸 성혜인에게 떠넘기면 상황은 아직 역전될 가능성이 있어요. 당신 엄마랑 오빠는 얼마든지 성혜인에게 따지려고 할 거예요. 성혜인의 신분이 드러날 때까지 지금처럼 기다리기만 하면 당신은 완전히 제거될 거예요. 그리고 당연히 설씨 가문의 아가씨를 사칭한 사람이라고 낙인찍히겠죠?”설인아는 동공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이 남자 누구지? 어떻게 성혜인의 신분을 알고 있는 거지? 설마 저번에 문자를 보낸 그 사람인가?’설인아가 주먹을 불끈 쥐자 남자는 천천히 몸을 숙여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인아 씨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성혜인 아닌가요? 상황을 악화시킨다면 설기웅 씨는 자연스레 돌아올 거예요.”설인아의 눈빛은 순식간에 사악하게 변했다.“당신이 날 도와준다면 뭐든지 할게요.”남자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좋아요. 어딘가로 데리고 갈 건데 협조만 잘해주면 돼요.”설인아가 주저 없이 동의하자 남자는 만족스러워하며 천천히 그녀를 유혹했다.“설의종 씨도 당신을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동안 친딸을 찾으러 다니면서도 그쪽을 쫓아내지 않았잖아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인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잔인하지 않다는 뜻이고 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마지막에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모질게 인아 씨를 대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어쨌든 신분이 바뀌었을 때는 어린아이였을 뿐이잖아요. 이제부터 철저하게 속이고 독이 든 술을 마시게 한다면 설의종 씨는 바로 죽을 겁니다.”설인아는 두 눈이 반짝 빛났다.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게 성혜인과 설씨 가문이니까.“정말로 제가 계획한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누가 계획했든 이제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어차피 그 사람은 자신의 딸에만 눈이 멀어서
부끄러움에 몸이 후끈해진 성혜인은 닥치는 대로 한쪽 옷을 잡아당겨 그의 얼굴과 눈을 가렸다.그러자 반승제는 옷을 잡고 침대 밑으로 던졌다.“널 보고 싶어.”“혜안아, 이런 건 언제 배웠어?”참다못한 성혜인이 그의 입을 막자, 반승제는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손바닥을 핥았다.그들이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 침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자연스레 두 사람 모두 문 앞에 누군가가 멈춰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배현우는 손끝이 문짝이 닿는 순간 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너무도 선명했기에 그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거름을 옮겼다.방으로 돌아오자, 가슴속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퍼지는 걸 느꼈고 마치 몸 안의 모든 수분이 말라가는 듯 괴로웠다.특히나 성혜인의 아련한 목소리는 마치 심장을 긁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문지르다가 별안간 주먹으로 옆 벽을 내리쳤다.“반승우?”마음속으로 소리쳤지만 반승우는 응답하지 않았다.배현우는 자신의 외투를 벗고 팔에 난 작은 바늘구멍을 바라봤다.“반승우, 아까 들었지? 네가 좋아하는 여자가 네 동생이랑 무슨 짓 하고 있는지 봤어? 네가 최선을 다해 단서를 찾았다 한들 저 사람들이 너한테 고마워할 것 같냐? 넌 정말 멍청해. 내가 너였다면 성혜인이 나라는 존재를 평생 기억하게 했을 거라고!”반승우와 배현우는 완전히 극과 극이다. 반승우가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이라면 배현우는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다.그는 고개를 숙여 팔뚝에 난 촘촘한 바늘 자국을 바라보며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드러냈다.“됐다. 내가 아무리 말해도 넌 어차피 대답 안 할 거잖아. 넌 성혜인이 옆에 있어야만 모습을 드러내는 겁쟁이야.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 날 방해하지 마.”그는 손가락뼈가 부서질 정도로 다시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반승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말했었잖아. 그건 내 감정이 아니라고.”배현우는 방에 있는 테이블을 걷어찼다.“네 감정이 아니면
어디선가 성혜인을 노려보는 시선은 더욱 원망스럽고 악랄해졌다.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수천 번은 죽이고 남았을 것이다.성혜인이 이상한 느낌을 받던 그때 어디선가 사람들의 야유 소리가 들려왔고 남 일에 참견하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익숙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나 설씨 가문의 아가씨야.”“퉤! 아가씨 같은 소리하네. 여기에 왔다는 건 팔렸다는 뜻이고 넌 앞으로 내 노예가 될 거야. 아이를 다섯 명 낳기 전까지는 떠날 생각도 하지 마.”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벽 너머를 바라봤고 아니나 다를까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은 설인아였다.설인아가 왜 그레이 지대에 나타난 거지?그 와중에 성혜인을 발견한 설인아는 두 눈이 반짝 빛났다.“혜인 씨, 나 좀 꺼내줘요. 안 그러면 우리 큰오빠한테 다 일러바칠 거예요.”성혜인은 그저 이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여전히 거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게다가 그녀는 최근에 일어난 모든 일을 반승제를 통해 이미 전해 들었다. 설인아는 설씨 가문의 아가씨가 아니란 건 이미 확정한 사실이다. 임수아가 맞는지는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설기웅도 움직이지 시작했고 서주혁도 이제 정신을 차렸으니, 사건의 진실은 조만간에 밝혀질 것이다.설인아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때다 싶어 달려들어 성혜인의 다리를 덥석 껴안았다.“큰오빠 찾으러 왔어요. 우리 오빠가 어디에 있는지만 알려주면 찾고 나서 바로 여기를 떠날게요.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도와줘요. 방금 전에는 제가 실수했어요. 그런 말투로 부탁하면 안 되는건 데...”성혜인은 원수에게 덕을 베푸는 사람이 아니다. 하물며 설인아 때문에 죽을뻔했는데 그녀를 굳이 도와야 하는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눈살을 찌푸린 채 서 있던 성혜인은 설인아의 뒤에 있던 남자가 달려와 그녀의 발목을 덥석 잡는 걸 목격했다.“미쳤냐? 돈까지 줬는데 감히 도망쳐?”순간 뺨 한 대가 날아와 설인아의 얼굴을 때렸다.
“우릴 꼬시려고 이렇게 야하게 입은 거야?”“섹시하네.”증오에 사로잡힌 설인아는 목이 멘 채로 절규했다.“하지 마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혜인 씨, 제가 이렇게 빌 테니까 한 번만 살려줘요.”“전 단지 우리 오빠를 찾으러 온 것뿐인데 도대체 왜 도와주지 않는 거예요.”“오빠, 살려줘요.”제원에 있는 설기웅이 그녀를 구하러 온다는 건 말이 안 된다.그녀는 여러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뒤 사람이 아닌 꼴로 간신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망가진 몸은 더 이상 그 어떤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그 직후 설인아는 길거리에서 성혜인에게 애원하는 영상, 사람들에게 모욕당한 영상, 여러 사람들에게 당하는 영상까지 전부 설기웅에게 보냈다.모든 장면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고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오랜 시간 동안 설인아를 아껴왔던 그는 이제 남은 정마저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영상을 본 순간 충격으로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그는 핏기가 빠진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서주혁과 함께 서천에 온 지 불과 이틀밖에 되지 않았고, 서주혁이 데려온 사람들은 흩어져서 조사에 몰두했다.그 와중에 설기웅은 뭔가 자극을 받은 사람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차 밖에 서 있던 서주혁은 싸늘한 말투로 물었다.“대표님, 어디로 가시려고요?”설기웅은 생각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플로리아에 다녀오려고요. 할 일이 생겨서요.”서주혁은 아마 설인아와 관련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에 굳이 막지 않았다. 어쨌든 오늘 길 내내 수천 통의 전화를 걸어 애원했으니까.설기웅은 액셀을 끝까지 밟으며 설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인아 좀 찾아줘요.”설우현은 아직도 설씨 가문에서 설의종을 돌보고 있었다.설의종은 임수아가 자신의 딸이라는 걸 알게 된 후, 오랜 집착이 무너져 병으로 쓰러졌다.하여 설씨 가문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세력들도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했고, 설우현 혼자만으로 버티기에는 턱없이 힘들었다.이런 와중에 어떻게 설인
오랫동안 아끼던 사람이 그런 일을 당하는 영상을 보게 된다면 괴롭기 마련이다. 심지어 영상 속의 설인아는 성혜인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성혜인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그것 때문에 설인아는 결국...당장 플로리아로 날아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던 설기웅은 최대한 액셀을 밟았다. 그러던 중 여러 개의 문자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협박 문자였다.[지금 이 계좌로 140억을 이체하지 않으면 네 여동생의 영상은 플로리아 전 지역에 퍼질 거야.]끼익!그는 브레이크를 세게 밟더니 곧장 비서에게 그 계좌로 돈을 보내라고 명령하며 위치 추적까지 시켰다.그렇게 10분 후, 비서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대표님, 없는 번호라고 뜹니다. 아마 다른 국가에서 보내온 메시지 같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최근 몇 년간 사기가 만연했습니다.”“그러니까 보이스피싱이라는 거야?”“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대표님, 회사의 경영권이 우현 도련님에게 넘어갔다는 소문이 도는데 사실입니까?”과거에는 설우현은 회사에 얼굴을 드러낸 적이 드물었고, 줄곧 설기웅이 헌신적으로 일에 매진했다.직원들은 대표가 바뀐다는 소식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지만 지금 설기웅의 마음은 회사에 있지 않았다.그 번호로 영상 두 개가 날아왔고 그다음 순간에 설인아와의 연락이 끊겼으니 의심할 수밖에 없다.그는 재빨리 사람을 시켜 영상을 분석했는데, 포토샵이 아닌 실제 동영상이라는 답변을 듣고선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비행기에 올라탄 그는 한시라도 빨리 플로리아로 돌아가 설인아를 구하고 싶었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시차에 적응할 시간도 없이 곧바로 사람을 시켜 설인아를 찾았다.마침내 악명 높은 빈민가에서 발견되었다.이미 제정신이 아닌 설인아는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오빠,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오빠... 엉엉...”정신이 이상한 미친 여자가 이곳에서 어떤 일을 당했을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다.어떤 남자는 자신의 사타구니로 설인아의 머리를 눌렀다.“살려주세요! 싫어요. 혜인
“인아야, 괜찮아.”설기웅은 그녀를 품에 안고 손을 들어 가볍게 쓰다듬었고 눈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그의 품에 안긴 설기웅은 원망의 불길이 미친 듯이 타오르고 있었다.이게 바로 그녀가 남자들에게 협조한 대가였다. 일을 크게 만들수록 설기웅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편에 서게 될 테니까.지금 그녀의 처지가 매우 비참했기에 설기웅은 그녀를 구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던 성혜인에게 증오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그러니 목표는 달성되었다.설인아는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여전히 혼잣말로 미친 소리를 지껄였다.이번에 희생이 큰 만큼 성혜인이 반드시 대가를 치를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그 영상을 보게 된 나미선은 눈앞이 깜깜해지며 기절 직전이었다.그녀는 재빨리 설의종이 있는 방으로 갔다. 설의종은 지난 며칠 동안 줄곧 침대에 누워있으며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 정신을 차린 후에도 조용히 침대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창밖을 보고 있다가 이따금 헛기침했다.설의종은 젊었을 때 업계에서 뛰어난 도련님이었고 외모나 능력에서 모두 일품이었다.하여 백발이 된 지금도 젊었을 때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여보, 인아 좀 도와줘요. 너무 안쓰러워요...”나미선은 침대 옆에 앉아 심장이 부서질 듯 목 놓아 울부짖었다.“여보, 우리 인아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이런 일을 겪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요. 플로리아 사람들이 다 알게 됐으니 시집도 못 갈 텐데... 잠깐 밖에서 지내고 있으면 의붓딸로 삼을 생각이었어요. 나중에 괜찮은 집에 시집보내면 적어도 먹고살 걱정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나미선은 조심스럽게 영상을 설의종에게 보여줬다. 하나는 성혜인이 모질게 거절하는 영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모욕당하는 영상이었다.순간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 찼다.“성혜인이라는 여자는 우리 인아가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을 것도 모자라 이런 일을 겪게 했어요. 정말 너무하잖아요. 전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줄곧 싸늘한 표정을 짓
‘하늘? 누구지? 설마 예전에 같이 도망갔다던 그 사람인가?’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만약 그가 나미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세 아이를 낳을 수가 있겠는가?“콜록.”설의종은 단기간에 기력이 모두 소진된 듯 여전히 기침하며 흐릿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우현아, 네가 직접 동생에 대해 알아봐. 만약... 운 좋게 아직 살아있다면 설씨 가문의 모든 지분을 그 애한테 넘겨줄 거다. 남은 여생 먹고 살 걱정이 없었으면 좋겠어. 콜록.”“아버지, 일단 진정하세요.”설의종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날 원망하지 않느냐?”그의 말대로라면 두 아들은 지분이 아닌 다른 재산만 얻을 수 있다. 이 사회에서 딸은 대부분 혼인에 이용되는 존재였고, 그만큼 사람들은 딸을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여겼다.어쩌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모든 지분을 물려주려고 하는 거나 다름없다. 설우현도 사람인데 어찌 불만이 없겠는가?“원망 안 해요. 전 아버지가 얼른 건강을 되찾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동생도 마찬가지고요. 비록 살아있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지만...”“반 대표를 한번 만나봐. 진세운이 뭔가 수상하다고 알려준 사람이 반대표거든. 차라리 그게 사실이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친자 확인이 조작됐을 수도 있잖아. 어쩌면 우리 딸이 살아있을 수도 있어.”설우현은 손을 들어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네, 한번 만나보고 올게요.”설의종은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지만 그럼에도 입안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설우현이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찰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설기웅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수신 버튼을 누르자 곧이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현아, 인아가 지금 많이 위태로워. 죽기 전에 꼭 아버지를 뵙고 싶대.” 설우현은 동공이 급격하게 움츠러들었다.“위태롭다뇨?”설기웅은 고통스러워하며 병원 복도에 기대어 있었다. 설인아는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고, 어쩌면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는 게 의사의 소견이었다. 그
설의종은 또 피를 토했고, 어찌나 허약한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나미선은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안방으로 왔는데, 오자마자 설인아가 곧 죽을 거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동안 많은 사랑을 주었던 아이가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게 된다는데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우현아, 얼른 네 형한테 전화 걸어서 인아랑 같이 오라고 해. 어쩌면 네 아버지를 만나면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도 몰라.”설의종의 입장에서 이 모든 일을 바라보자 설우현은 안타까운 마음에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설인아가 살아남았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다. 진정한 여동생은 행방조차 모르는데...이 집안에서 여동생의 생사를 걱정하는 건 설우현과 설의종 둘 뿐이다.그러나 결국 그는 전화를 걸었다.아니나 다를까 설기웅은 곧바로 설인아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설인아는 걷는 것조차 힘든지 설기웅의 등에 업혀있었다.그녀는 설의종의 침대 옆에 앉게 되었고, 마치 언제라도 눈을 감을 듯 힘겨워 보였다.“아버지랑 단둘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일단 잠깐만 자리를 비켜주세요.”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나갔고, 방문은 굳게 닫혔다.설의종은 침대 옆에 기대어 냉담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설인아는 사악함이 가득 찬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그녀는 지금 당장 설의종을 죽이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설씨 가문은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고 앞으로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설기웅과 나미선은 그녀의 편이니까.설의종은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나 다름없다.솔직히 설인아도 그 남자가 어떻게 했는지 몰랐다. 의사의 거짓 증언을 받아냈을 뿐만 아니라 아주 그럴싸한 핑계를 댔으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그가 준 약을 먹은 게 신의 한 수인 듯싶다. 먹자마자 허약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변했다.죽기는커녕 설인아는 끝까지 살아남겠다고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아버지, 저를 보고 싶지 않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이 일은 꼭 바로 잡
반승제는 순간 멍해졌다. 예전 일을 떠올리려 했지만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저 자신은 성혜인을 선택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뿐이었다.“시환아, 내 충고를 하나 하자면, 진심으로 지민 씨를 감동시키는 데 집중해. 억지로 잡으려고 하다간 너도 서주혁처럼 될 거야.”온시환은 순간 말을 잃었다. 사실 그도 두려웠다.하지만 공지민은 죽은 사람에게 마음이 묶여 있는 데다 자신의 진심 따윈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았다.반승제가 전화를 끊자 온시환은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잠시 후, 그는 자신의 부하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그렇게 공지민은 바로 오하윤을 만나러 갔다.오하윤은 그녀에게 과일 주스를 따라 주며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나 오늘 원아정 만났어. 너도 기억하지? 고등학교 때 널 화장실에 가둬놓고 물을 끼얹으라고 시킨 애 말이야.”공지민이 원아정을 잊을 리 없었다. 원아정은 모든 악몽의 시작이었다.그때 원아정은 화장실로 그녀를 몰아넣고 옷을 벗기라고 명령했으며 사진을 찍어 협박했다. 그 이후 괴롭힘은 점점 더 악랄해졌다.공지민은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저 묵묵히 참으면 지나갈 거라 믿었지만 어느 날 원아정은 의자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며 명령했다.“공지민, 너랑 은우가 원래 아는 사이라며? 지금 무릎 꿇고 빌어. 안 그러면 네 사진을 모두에게 뿌려서 네가 어떤 년인지 보여줄 거야.”그녀는 그런 고등학생은 본 적이 없었다. 고고한 척하면서도 잔인했고 사람을 완전히 조롱거리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원아정은 재벌가 출신으로 모두가 그녀를 피했다. 항상 고급 외제차가 그녀를 데리러 왔고 때로는 경호원까지 동원되었다. 그녀와 비슷한 수준의 친구들조차 그녀의 괴롭힘을 부추겼다.만약 구은우가 없었다면 공지민은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그때 원아정 앞에 무릎을 꿇고 개처럼 용서를 구했다.이후 구은우가 원아정에게서 사진
지금 공지민은 사실상 온시환에게 감금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온시환은 외부와의 연락을 금지하지는 않았다.오하윤의 전화가 걸려 왔을 때 공지민은 별다른 감정 없이 받았다. 사실 그녀는 이 사람과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오하윤의 첫 마디가 공지민을 놀라게 했다.“지민아, 잠깐 만날 수 있을까? 누가 은우를 죽음으로 몰았는지 알아냈어.”공지민의 눈빛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하지만 문을 열었을 때 문밖에 서 있는 두 명의 경호원을 발견했다.온시환은 그녀가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오하윤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는 전화 속에서도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래, 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널 정말 싫어했어. 왜냐하면 나도 은우를 좋아했거든. 정말 너무너무 좋아했어. 그때 내 계부가 자주 날 때렸고 난 늘 구석에서 몰래 울곤 했어. 그런데 은우는 그런 나를 마치 천사처럼 도와줬어. 먹을 것도 챙겨주고 나를 위로해 줬거든. 신고하자고 말했지만 난 너무 겁쟁이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그 이후로 난 계속 은우를 지켜봤어. 은우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니,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지. 너도 알잖아? 은우는 그 자체로 모든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이었어. 그래서 내가 은우를 찍은 사진이 그렇게 많았던 거야. 예전에 난 계속 널 질투했어. 은우는 언제나 널 지켜줬으니까. 그런데 그동안 난 네가 돈 때문에 온시환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이제야 알았어. 지민아, 오늘 밤 아주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됐어. 이걸 너한테 알려주는 게 내 사과가 될 거야. 잠깐 나올 수 있어?”“알겠어. 주소 보내줘.”전화를 끊은 공지민은 바로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성혜인은 마침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공지민이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 조금 의아했다.“무슨 일이에요, 지민 씨?”“혜인 씨, 나 잠깐 밖에 좀 나가고 싶어요. 시환 씨에게 전화해서 얘기 좀 해줄 수 있어요? 내가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거든요.”성혜인은 두 사람의 관계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원아정의 얼굴에는 잠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지만 오하윤이 옆에 있다는 걸 생각하며 서둘러 표정을 감췄다.오하윤은 아직 구은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문득, 공지민이 왜 그렇게 앨범에 집착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구은우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남겨진 사진이 거의 없어서 더 간절했던 게 아닐까...오하윤은 아무 말 없이 앞에 놓인 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이 원아정은 다시 말을 꺼냈다.“하윤아, 지민이 지금 제원에 있지?”원아정이 평생 가장 싫어했던 사람은 공지민이었다.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의 여자가 어떻게 감히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남자를 빼앗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있어. 근데 내가 따로 만나진 않았어. 너 온시환 알면 금방 만날 수 있을 거야.”‘온시환이라고?’원아정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마 연승혁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조만간 만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원진이 원씨 가문을 장악한 이후 원아정은 늘 눈치를 보며 살았다. 하지만 누려야 할 대접은 빠짐없이 받았다. 원진이 돈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하윤아, 나 곧 결혼해. 상대는 연승혁이야. 넌 잘 모를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람도 온시환과 같은 무리야. 앞으로는 지민이를 만날 일도 많겠지.”고등학교 시절 원아정은 공지민을 괴롭히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구은우가 공지민을 지켜주며 이 괴롭힘은 끝이 났으나 원아정의 마음속 공지민에 대한 증오심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원아정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에는 악의가 서려 있었다.한편 오하윤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한때 그녀도 공지민을 질투했다. 공지민이 구은우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은우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들은 뒤 오하윤은 갑자기 공지민이 안타깝게 느껴졌다.예전의 공지민은 매우 조용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구은우 앞에서는 유일하게 환하게 웃곤 했다.그녀가 지금처럼 타락하고 온시환 같은 남자에게 기대고 있는 이유는 구은
룸 안은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원아정은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를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금세 악랄한 표정이 스쳤다.그녀는 얼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대답한 이는 다름 아닌 오하윤이었다.원아정은 고등학교 시절 오하윤을 알게 되었다. 당시 구은우는 학교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오직 공지민만 보였다.이 사실에 분노한 원아정은 연씨 가문 사람을 알게 되면서 구은우의 외모가 연씨 가문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점을 알아차리고 이 정보를 연씨 가문에 흘렸다.‘내가 못 가지는 건, 공지민 그년도 가지지 못하게 할 거야.’“하윤아, 나 제원에 왔어. 나올 수 있어? 얼굴 좀 보자.”오하윤은 원아정이 무서웠다.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겉으로는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척했지만 뒤로는 후배를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렸고 그 일에서도 아무런 손해를 입지 않았다.게다가 구은우를 향한 그녀의 집착은 누구나 알 정도였다. 그러다 갑자기 조용해진 그녀를 보며 모두가 의아했지만 아무도 그녀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랐다.구은우와 공지민이 졸업할 때까지 원아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만나자고 하니 오하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요즘 심심했던 오하윤은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에 곧장 약속 장소를 정했다.약속 장소에서 만났을 때 오하윤은 자신이 너무 화려하게 차려입은 것을 깨달았다. 온몸을 명품으로 둘러싼 그녀와 달리, 원아정은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이었다. 상대적으로 자신이 천박한 졸부처럼 느껴졌다.“하윤아, 오랜만이야.”어색하게 자리에 앉은 오하윤은 학창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모두가 알다시피 원아정은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돈을 아낌없이 쓰며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아정아, 갑자기 제원에 웬일이야? 너희 집 사업은 여기가 아니었잖아.”당시 원아정 집안이 대규모 사업을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고 대학 입시조차 필요 없이 앞길이 보장된 그녀를 부러워하며 줄을 서서 비위를 맞추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가며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지민이 잘 지켜. 괜히 나가서 또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온시환은 속이 상한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결국 술집으로 발길을 옮겨 한잔하려 했고, 그곳에서 뜻밖에도 원아정을 마주쳤다.‘원아정이 제원에 왔다고?’그녀 곁에는 원진이 서 있었다. 원진은 시선을 앞만 향한 채 걸음을 옮기다가 온시환을 보자 발걸음을 멈췄다.온시환도 마침 마음이 복잡한 상태라 옆에 있는 룸의 문을 열며 말했다.“같이 한 잔 할래?”원진은 망설임 없이 룸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원아정도 서둘러 뒤따랐다. 얼굴에는 상류층 특유의 오만함과 자존심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원진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원진이 있는 자리에서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할 정도였다.과거 원진은 원씨 가문을 철저한 강경책으로 정리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은밀한 거래를 했고 가문 내 반대 세력들은 대부분 사라졌다.그런 원진 앞에서 원아정은 잔뜩 움츠린 채 룸 안의 의자에 앉았다. 손을 무릎 위에 얹고 긴장한 듯 움찔거렸다. 그때 원진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연승혁과의 결혼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손을 꽉 움켜쥔 원아정은 연승혁을 떠올리니 눈가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얼마 전 연승혁을 만나러 연씨 가문에 갔다가 그가 사람을 처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상황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익숙해 보였다.겁이 많은 원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깨어나 보니 연씨 가문의 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연승혁, 그 끔찍한 인간!’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연승혁이 비록 잔혹한 수단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 구은우의 존재를 그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원아정은 원씨 가문에서 작은 개미 같은 존재였다. 원진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생활에 지친 지 오래였다.연승혁이 아무리 냉혹하더라도 그의 아내가 된다면 무
‘그래, 공지민. 구은우와 관련된 일만 나오면 이성을 잃고 주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단 말이지.’온시환은 어깨에 박혀 있던 단검을 뽑아내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옆에 있는 경호원들에게 말했다.“일단 지민이 데리고 돌아가.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공지민은 그 순간도 악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난 여기 남고 싶어요.”그녀는 직접 구은우 사건의 진상을, 그리고 그의 가족 중 누가 손을 썼는지 듣고 싶었다. 온시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데려가.”“시환 씨!”공지민은 경호원들에게 양팔이 붙들린 채 억지로 차로 이끌려 갔다.온시환은 곧 사람을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어깨의 부상은 치명적인 부위는 아니었지만, 출혈이 많았다.차 안에서 부하가 온시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이미 확인되었습니다. 일을 꾸민 건 연씨 가문의 둘째입니다.”연씨 가문의 둘째, 바로 현재 가문을 이끄는 인물이었다. 당시 권력을 다투는 상황에서 그는 형과 자신 아래의 모든 남자들을 차례로 제거했다. 연씨 가문은 전통적으로 후계자를 남자에게만 물려주는 규율을 따랐다. 딸은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가문 밖에서 태어난 남자들은 언제든 폭탄이 될 수 있었다. 구은우를 알지도 못했지만 그의 존재만으로도 위험하다고 판단해 제거한 것이다.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연씨 가문의 모든 권력은 연승혁의 손에 집중되었다. 2년 전부터 그는 해외에서 국내로 사업 중심을 옮겼고 해상 운송 사업을 시작해 원씨 가문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현재의 연승혁은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운 존재였다. 구은우를 위해 복수를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연씨 가문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거대 가문이었다. 온시환이라 해도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온시환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연승혁은 방탕한 성격에 수단이 잔혹했다. 그를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결코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는 원씨 가문의 원아정과 약혼한 상태였다. 원아정은 원진의
“당신들 도대체 뭐야!”여자는 분명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얼굴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가 구은우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이 사람 기억나요?”여자는 사진을 보는 순간 얼굴빛이 확 변했다.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모르겠어요, 이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날 풀어줘요!”공지민은 연예계에서 오랫동안 버텨온 사람답게,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었다. 그녀는 한쪽 발로 여자의 손등을 짓밟으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가로막았다.“지민아, 뭐 하는 거야?”그녀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온시환은 한 번도 그녀의 이런 냉혹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늘 부드럽고, 강인하며, 침착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녀의 눈에 번진 살기가 너무나도 선명했다.만약 자신이 막지 않았다면 이 여자의 손뼈는 이미 부서졌을 것이다.‘구은우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거야?’온시환은 속이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겨우 분노를 억누른 그는 낮게 말했다.“심문은 내 사람들이 할 거야. 넌 결과만 들으면 돼.”공지민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발을 세게 내리찍었다.온시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속이 쓰리고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옆 의자에 앉아 차갑게 변한 공지민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여자는 비명을 질렀다.“당신들 신고할 거야! 다 고소할 거라고!”공지민은 여자의 눈앞에 쭈그려 앉아 차갑게 물었다.“그때 누가 돈을 줘서 청부 살인을 사주했나요? 그 사람 얼굴을 기억하나요?”여자는 공지민을 악에 받친 눈으로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지만 두 명의 경호원이 그녀를 바닥에 제압하고 있어 꼼짝할 수 없었다.공지민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단숨에 침대에서 밀어 떨어뜨렸다.그 아이가 구조되었을 당시 대략 여섯, 일곱 살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할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와 함께 거짓말에 동
공지민은 구은우의 부모가 굉장히 화목한 부부라고만 알고 있었지, 그 사이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녀는 구은우와 오랜 친구였다. 그의 부모가 다투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대체 누가 10억을 들여 구은우의 목숨을 노린 걸까.그녀는 하루빨리 이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싶었다.“시환 씨, 신정우 어머니랑 동생은 찾았어요?”신정우의 말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그에게 돈을 요구하며 동생의 치료비를 대라고 했다.그런데 신정우가 이를 거부했으니, 아마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찾았어. 내일 나랑 같이 만나러 가자.”공지민은 온시환과 꽤 오래 알고 지냈지만 그가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문득 그녀는 과거 온씨 가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온시환이 거의 망설임 없이 온씨 가문와 절연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물론 이건 그녀가 들은 단순한 가십에 불과했다. 당시 온씨 가문 사람 중 누군가가 성혜인을 건드려 일이 몹시 커졌다는 이야기였다.온시환은 가족에게도 무척 냉정한 태도를 보였고 사랑에 있어서도 마치 구경꾼처럼 시큰둥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만큼은 진심을 다하는 것 같았다.공지민은 온시환에 대해 깊이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앞으로 그와 함께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에 대해 더 알 수밖에 없을 터였다...다음 날, 그는 정말 그녀를 데리고 그 여자를 만나러 갔다.구은우가 사고를 당했을 당시 공지민은 정신이 없어 그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기억나는 건 구은우가 구조된 후, 그 어머니와 아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그 후에는 구은우가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 치료를 받았다.그 당시 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나중에야 그 모자가 무책임하게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들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공지민은 그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많았다. 인간의 본성이란 원래 복잡하고 때로는 무척 어두운 법이다. 처음에는 구은우가 단지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그는 오래전부터 공지민에게 깊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예전에는 온시환도 잘 몰랐다. 그러다 구은우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 많은 순간, 공지민은 아마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붙잡아 두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녀 자신조차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마치 생기 없는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모습이었다.온시환이 처음 그녀를 싫어했던 이유도 바로 그녀에게서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계속 그녀를 신경 쓰다 보니, 점점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간 후 공지민의 왼쪽에는 강민지, 오른쪽에는 성혜인이 앉았다.사실 그녀는 성혜인을 알고 있었다. 과거 성혜인과 반승제의 사건이 너무나 크게 이슈가 되어 실시간 검색어에서 자주 본 이름이었다.공지민은 성혜인을 굉장히 자존심 강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생각보다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자들은 마당에 앉아 있었으며 방해하지 않고 때때로 과자나 과일을 들고 와 전해 주었다.강민지가 갑자기 공지민의 손을 잡았다.“지민 씨, 시간 될 때 우리랑 자주 만나요. 남자들이랑만 있지 말고. 남자라는 것들은 말이지, 맞춰 주면 맞춰 줄수록 그걸 당연하게 여겨요.”강민지는 아직 공지민과 온시환의 결혼이 단지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공지민에게 남자를 길들이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공지민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만약 내가 시환 씨를 단지 이용하고 있는 거라면요...”앞에 있는 두 여자는 온시환의 친구들이었다. 만약 이 결혼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거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를 몹시 싫어하게 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