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릴 꼬시려고 이렇게 야하게 입은 거야?”“섹시하네.”증오에 사로잡힌 설인아는 목이 멘 채로 절규했다.“하지 마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혜인 씨, 제가 이렇게 빌 테니까 한 번만 살려줘요.”“전 단지 우리 오빠를 찾으러 온 것뿐인데 도대체 왜 도와주지 않는 거예요.”“오빠, 살려줘요.”제원에 있는 설기웅이 그녀를 구하러 온다는 건 말이 안 된다.그녀는 여러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뒤 사람이 아닌 꼴로 간신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망가진 몸은 더 이상 그 어떤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그 직후 설인아는 길거리에서 성혜인에게 애원하는 영상, 사람들에게 모욕당한 영상, 여러 사람들에게 당하는 영상까지 전부 설기웅에게 보냈다.모든 장면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고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오랜 시간 동안 설인아를 아껴왔던 그는 이제 남은 정마저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영상을 본 순간 충격으로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그는 핏기가 빠진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서주혁과 함께 서천에 온 지 불과 이틀밖에 되지 않았고, 서주혁이 데려온 사람들은 흩어져서 조사에 몰두했다.그 와중에 설기웅은 뭔가 자극을 받은 사람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차 밖에 서 있던 서주혁은 싸늘한 말투로 물었다.“대표님, 어디로 가시려고요?”설기웅은 생각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플로리아에 다녀오려고요. 할 일이 생겨서요.”서주혁은 아마 설인아와 관련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에 굳이 막지 않았다. 어쨌든 오늘 길 내내 수천 통의 전화를 걸어 애원했으니까.설기웅은 액셀을 끝까지 밟으며 설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인아 좀 찾아줘요.”설우현은 아직도 설씨 가문에서 설의종을 돌보고 있었다.설의종은 임수아가 자신의 딸이라는 걸 알게 된 후, 오랜 집착이 무너져 병으로 쓰러졌다.하여 설씨 가문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세력들도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했고, 설우현 혼자만으로 버티기에는 턱없이 힘들었다.이런 와중에 어떻게 설인
오랫동안 아끼던 사람이 그런 일을 당하는 영상을 보게 된다면 괴롭기 마련이다. 심지어 영상 속의 설인아는 성혜인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성혜인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그것 때문에 설인아는 결국...당장 플로리아로 날아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던 설기웅은 최대한 액셀을 밟았다. 그러던 중 여러 개의 문자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협박 문자였다.[지금 이 계좌로 140억을 이체하지 않으면 네 여동생의 영상은 플로리아 전 지역에 퍼질 거야.]끼익!그는 브레이크를 세게 밟더니 곧장 비서에게 그 계좌로 돈을 보내라고 명령하며 위치 추적까지 시켰다.그렇게 10분 후, 비서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대표님, 없는 번호라고 뜹니다. 아마 다른 국가에서 보내온 메시지 같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최근 몇 년간 사기가 만연했습니다.”“그러니까 보이스피싱이라는 거야?”“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대표님, 회사의 경영권이 우현 도련님에게 넘어갔다는 소문이 도는데 사실입니까?”과거에는 설우현은 회사에 얼굴을 드러낸 적이 드물었고, 줄곧 설기웅이 헌신적으로 일에 매진했다.직원들은 대표가 바뀐다는 소식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지만 지금 설기웅의 마음은 회사에 있지 않았다.그 번호로 영상 두 개가 날아왔고 그다음 순간에 설인아와의 연락이 끊겼으니 의심할 수밖에 없다.그는 재빨리 사람을 시켜 영상을 분석했는데, 포토샵이 아닌 실제 동영상이라는 답변을 듣고선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비행기에 올라탄 그는 한시라도 빨리 플로리아로 돌아가 설인아를 구하고 싶었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시차에 적응할 시간도 없이 곧바로 사람을 시켜 설인아를 찾았다.마침내 악명 높은 빈민가에서 발견되었다.이미 제정신이 아닌 설인아는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오빠,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오빠... 엉엉...”정신이 이상한 미친 여자가 이곳에서 어떤 일을 당했을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다.어떤 남자는 자신의 사타구니로 설인아의 머리를 눌렀다.“살려주세요! 싫어요. 혜인
“인아야, 괜찮아.”설기웅은 그녀를 품에 안고 손을 들어 가볍게 쓰다듬었고 눈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그의 품에 안긴 설기웅은 원망의 불길이 미친 듯이 타오르고 있었다.이게 바로 그녀가 남자들에게 협조한 대가였다. 일을 크게 만들수록 설기웅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편에 서게 될 테니까.지금 그녀의 처지가 매우 비참했기에 설기웅은 그녀를 구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던 성혜인에게 증오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그러니 목표는 달성되었다.설인아는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여전히 혼잣말로 미친 소리를 지껄였다.이번에 희생이 큰 만큼 성혜인이 반드시 대가를 치를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그 영상을 보게 된 나미선은 눈앞이 깜깜해지며 기절 직전이었다.그녀는 재빨리 설의종이 있는 방으로 갔다. 설의종은 지난 며칠 동안 줄곧 침대에 누워있으며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 정신을 차린 후에도 조용히 침대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창밖을 보고 있다가 이따금 헛기침했다.설의종은 젊었을 때 업계에서 뛰어난 도련님이었고 외모나 능력에서 모두 일품이었다.하여 백발이 된 지금도 젊었을 때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여보, 인아 좀 도와줘요. 너무 안쓰러워요...”나미선은 침대 옆에 앉아 심장이 부서질 듯 목 놓아 울부짖었다.“여보, 우리 인아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이런 일을 겪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요. 플로리아 사람들이 다 알게 됐으니 시집도 못 갈 텐데... 잠깐 밖에서 지내고 있으면 의붓딸로 삼을 생각이었어요. 나중에 괜찮은 집에 시집보내면 적어도 먹고살 걱정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나미선은 조심스럽게 영상을 설의종에게 보여줬다. 하나는 성혜인이 모질게 거절하는 영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모욕당하는 영상이었다.순간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 찼다.“성혜인이라는 여자는 우리 인아가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을 것도 모자라 이런 일을 겪게 했어요. 정말 너무하잖아요. 전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줄곧 싸늘한 표정을 짓
‘하늘? 누구지? 설마 예전에 같이 도망갔다던 그 사람인가?’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만약 그가 나미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세 아이를 낳을 수가 있겠는가?“콜록.”설의종은 단기간에 기력이 모두 소진된 듯 여전히 기침하며 흐릿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우현아, 네가 직접 동생에 대해 알아봐. 만약... 운 좋게 아직 살아있다면 설씨 가문의 모든 지분을 그 애한테 넘겨줄 거다. 남은 여생 먹고 살 걱정이 없었으면 좋겠어. 콜록.”“아버지, 일단 진정하세요.”설의종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날 원망하지 않느냐?”그의 말대로라면 두 아들은 지분이 아닌 다른 재산만 얻을 수 있다. 이 사회에서 딸은 대부분 혼인에 이용되는 존재였고, 그만큼 사람들은 딸을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여겼다.어쩌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모든 지분을 물려주려고 하는 거나 다름없다. 설우현도 사람인데 어찌 불만이 없겠는가?“원망 안 해요. 전 아버지가 얼른 건강을 되찾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동생도 마찬가지고요. 비록 살아있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지만...”“반 대표를 한번 만나봐. 진세운이 뭔가 수상하다고 알려준 사람이 반대표거든. 차라리 그게 사실이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친자 확인이 조작됐을 수도 있잖아. 어쩌면 우리 딸이 살아있을 수도 있어.”설우현은 손을 들어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네, 한번 만나보고 올게요.”설의종은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지만 그럼에도 입안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설우현이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찰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설기웅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수신 버튼을 누르자 곧이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현아, 인아가 지금 많이 위태로워. 죽기 전에 꼭 아버지를 뵙고 싶대.” 설우현은 동공이 급격하게 움츠러들었다.“위태롭다뇨?”설기웅은 고통스러워하며 병원 복도에 기대어 있었다. 설인아는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고, 어쩌면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는 게 의사의 소견이었다. 그
설의종은 또 피를 토했고, 어찌나 허약한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나미선은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안방으로 왔는데, 오자마자 설인아가 곧 죽을 거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동안 많은 사랑을 주었던 아이가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게 된다는데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우현아, 얼른 네 형한테 전화 걸어서 인아랑 같이 오라고 해. 어쩌면 네 아버지를 만나면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도 몰라.”설의종의 입장에서 이 모든 일을 바라보자 설우현은 안타까운 마음에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설인아가 살아남았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다. 진정한 여동생은 행방조차 모르는데...이 집안에서 여동생의 생사를 걱정하는 건 설우현과 설의종 둘 뿐이다.그러나 결국 그는 전화를 걸었다.아니나 다를까 설기웅은 곧바로 설인아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설인아는 걷는 것조차 힘든지 설기웅의 등에 업혀있었다.그녀는 설의종의 침대 옆에 앉게 되었고, 마치 언제라도 눈을 감을 듯 힘겨워 보였다.“아버지랑 단둘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일단 잠깐만 자리를 비켜주세요.”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나갔고, 방문은 굳게 닫혔다.설의종은 침대 옆에 기대어 냉담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설인아는 사악함이 가득 찬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그녀는 지금 당장 설의종을 죽이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설씨 가문은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고 앞으로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설기웅과 나미선은 그녀의 편이니까.설의종은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나 다름없다.솔직히 설인아도 그 남자가 어떻게 했는지 몰랐다. 의사의 거짓 증언을 받아냈을 뿐만 아니라 아주 그럴싸한 핑계를 댔으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그가 준 약을 먹은 게 신의 한 수인 듯싶다. 먹자마자 허약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변했다.죽기는커녕 설인아는 끝까지 살아남겠다고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아버지, 저를 보고 싶지 않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이 일은 꼭 바로 잡
설인아의 연기력은 정말 대단했다. 게다가 언제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은 허약하기 그지없었고 독을 탈 만한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모습이었다.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잠깐 주춤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검사를 맡겼다.설인아는 여전히 설기웅의 품에 안긴 채 눈물을 펑펑 쏟았고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몸마저 덜덜 떨었다.옆에 있던 나미선은 마치 설인아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듯 옆에서 끊임없이 위로 하고 있었다.곧이어 의사가 부랴부랴 달려와 설의종의 병세를 살폈고, 그 와중에도 설우현은 절대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아버지 상태가 좀 어떤가요?”“일시적인 호흡곤란이 온 것 같습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다른 증상은 없나요?”“네, 없습니다.”그 말이 끝나자마자 설인아은 설기웅의 옷깃을 덥석 잡았다.“오빠, 저 이제 그만 갈래요. 아버지는 절 보기만 해도 화가 나나봐요.”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자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듯 처량해 보였다.설기웅은 한숨을 내쉬더니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을 시켜 그녀를 데려다줬다.설의종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지금, 장남인 그가 자리를 비우는 건 파렴치한 행동이니까.설기웅의 별장으로 돌아온 설인아는 만족스러운 듯 눈빛이 사악하게 돌변했다.그녀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남자에게 연락했다.“한 방울만 마셨고 나머지는 전부 피부에 닿았어요. 이래도 효과가 있을까요?”“네, 한 방울도 아주 치명적이어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겁니다.”설의종은 순간 두 눈이 반짝 빛났다. 그 남자가 약을 건네줄 때 아주 독하다고 강조해서 그런지 이런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잘됐네요! 그럼 평생 깨어나지 못한다는 말이죠? 이제 오빠가 성혜인을 상대하는 일만 남았네요? 성혜인이 죽으면 어차피 아무도 설씨 가문의 딸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 거예요. 그때쯤이면 오빠랑 엄마가 저를 설씨 가문으로 데려가겠죠?”여러 사람에게 강간당한 일은 이미 소문이 잔뜩 퍼졌기에 나미선과 설기웅은 그녀를 무척이나
“형, 전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었잖아요. 우리 진짜 여동생이 아직 살아있다면 설씨 가문의 주식을 모두 여동생에게 넘겨주고 남은 재산을 우리한테 주겠다고요.”최근 몇 년간 설기웅이 회사를 맡았고 게다가 주가가 계속 상승하였으므로 플로리아 상권에서 회사의 명성은 제원에서의 반승제와 비슷했다.설기웅은 회사를 위해 많은 것을 바쳤다. 그럼에도 주식을 하나도 갖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겠는가.그러나 다행히도 설기웅은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깨어있는 사람이었다.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랬지.”설우현이 이어서 말했다.“지금부터 형과 저, 그리고 제 사람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아버지를 뵈러 올 수 없게 해요. 형도 어머니께 말씀 좀 전해주세요.”설기웅이 고개를 끄덕였다.설우현은 가문 사람들을 병원에서 지키게 한 뒤 플로리아의 그레이 지대를 향해 차를 몰았다.그레이 지대는 무법천지인 곳으로 지하 격투장이 있는 곳이다.시 중심과 거리가 꽤 있었기에 그는 세 시간 동안 운전해서야 도착했다.가면을 쓰고 내부로 들어가서야 그는 이곳이 얼마나 어둡고 밑바닥인 곳인지 알게 되었다.전에 한 번 와본 적은 있었다. 당시 많은 내로라 하는 가문들이 이 지역을 놓고 경쟁했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갔지만. 성인이 되었을 때 몰래 들어가 본 이곳은 외부와 아예 다른 세상이었다.그레이 지대는 본디 건달과 깡패들이 날뛰는 곳이므로 소란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누군가 도를 넘는 큰일을 저지르면 이틀 내로 이곳에서 사라지게 된다.그레이 지대는 격투장에서 관할했고, 총격전이 벌어지면 격투장이 앞장서서 파벌을 처리했다.다른 것에 대해서 격투장은 절대 관여하는 일이 없다. 그것은 개인적인 원한이므로 관여할 이유도 없다.하기에 이름난 가문의 자녀들이라면 이곳에는 오지 않았다. 이곳은 사념이 있는 사람들만이 출입하는 곳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책임은 모두 자신에게 있다.문을 열고 들어간 설우현의 눈에 띈 건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었다.장미의 손에는 고대 자
왜 설인아를 구해주지 않느냐 물으려던 그가 멈칫하더니 결국 입술만 몇 번 짓씹었다.어찌 되었든 성혜인에 대한 설인아의 행동은 매우 비열했다. 결국 성혜인의 눈까지 멀게 했었지.결국에 애인을 해친 사람이니 구하든 말든 모두 그의 선택인 것이다. 아무도 탓할 수도 나무랄 수도 없는 것이다.결국 설인아가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닌 운명일지도.설우현의 시선이 느껴진 듯 성혜인이 고개를 들어 몇 초간 그와 눈을 맞추다 생긋 웃었다.“설우현 씨, 오랜만이에요.”설우현의 몸이 저도 모르게 굳었다. 형용할 수 없는 친근감, 익숙함 같은 감정이 또다시 밀려왔다.그는 처음 성혜인을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었다. 지금까지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몇 마디 인사를 나누려고 할 때 성혜인의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아보니 스승 주영훈이었다.주영훈은 영감을 얻기 위해 세상과 담을 쌓고 집 문을 걸어 잠그곤 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작품이 나와서야 외부와 연락을 시작했다.그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제원에서였다. 당시 반승제는 그녀의 신분을 몰랐었다.성혜인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스승님?”“혜인아, 너도 플로리아에 왔더냐?”주영훈의 목소리가 들떠있는 듯했다.“그럼 지금 시간 되느냐?”성혜인은 생각에 잠겼다. 반승제와 함께 그곳으로 출발하려면 적어도 모레가 되어서야 가능했다. 그러니 오늘과 내일은 모두 시간이 넉넉한 셈이다.“네. 오후에 바로 만날 수 있어요.”주영훈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주소를 보냈다.반승제에게 설명한 뒤에야 그는 주영훈이라는 사람을 기억해 냈다.하지만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럼 경호원이랑 같이 가.”“좋아요.”차에 오른 성혜인은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전에 스승님과 만났을 때도 그는 과제 상황을 확인했었다.그러나 최근 반년 이래 일어난 일들이 너무 많았기에 그림에 손을 대지 못한 지 오래였다.주영훈은 밖에서 자신의 마지막 제자가 얼마나 우수한지를 자랑하곤 했다. 그는 성혜인
공지민은 섬에서 한 달을 푹 쉬었고 그 사이 연승혁의 상처도 조금씩 나아졌다.그녀는 텔레비전에서 염정아의 판결 결과를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염정아는 카메라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분명히 이는 그녀가 선택한 결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운명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으니까.판결 결과를 본 날 공지민은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주변의 바람이 매우 거셌다. 그녀는 자신이 흘리는 눈물이 악어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염정아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칼을 쥐여준 것처럼 느껴졌다.공지민은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소리가 흘러나오지 않게 참았으며 고통에 젖어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고 연승혁이 다가왔다.“지민아, 오늘 밤에 해산물 바비큐 할 건데 저번에 먹었던 킹크랩 또 먹을래? 이따가 나랑 시장에 가서 사 오자.”연승혁은 공지민 앞에 서서 그녀의 붉어진 눈을 보더니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울었어?”최근 며칠 동안 연승혁은 매우 부드러워졌고 이전의 그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의 친구들이 여기 있었다면 아마 그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바람이 너무 세서 눈에 모래가 들어갔어요.”연승혁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얼굴을 받쳐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혹시 뉴스 때문에 그래? 봤었어? 사실 무기징역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법정 쪽에 말대로라면 법정에서 자기가 직접 자백하며 죽는 걸 원했대. 아무도 살릴 수 없었어. 지민아,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고 오늘 밤에 뭐 먹을지 생각해 보자.” 공지민의 눈빛에는 조롱이 가득했다. 오늘 밤 뭐 먹을지가 한 생명보다 중요하다고? 마음속에서 조롱이 커질수록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감동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의 목을 감싸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연승혁의 눈빛이 깊어지고 손은 그녀의 허리에 닿아 한껏 힘을 주었다. 공지민은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연승혁은 웃음을 터뜨렸고
온시환은 일어나서 집을 나와 헬기를 타고 염정아의 집에 가기로 했다. 그녀의 집에 아이들이 다섯 명이나 있었으니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옆에는 두 사람이 따라왔고 모두 그의 사람들이었다. 염정아의 집을 알아낸 후 그는 서둘러 그곳으로 갔다.아래층 슈퍼마켓 사장님은 그들을 보고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염정아에게 부탁받고 왔다는 걸 듣고 몇 마디 더 묻고 나서야 방 열쇠를 건넸다. 온시환은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문에는 작은 광고들이 잔뜩 붙어 있었고 집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그렇게 크지도 않아 보였다. 그는 열쇠를 꽂고 들어갔을 때 방 안에 있던 몇 명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 일부는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었고 일부는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었다.온시환은 입을 열려고 하다가 이 아이들이 아마 죽음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아이만이 어느 정도 어른스러워 보였다. “아저씨, 엄마 아빠가 우리 보러 오라고 하신 건가요? 우리는 언제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어요?”온시환은 웃어보려 했지만 어떻게 해도 웃어지지 않았다. 염정아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고 곧 처형될 예정이다. 그는 정말 이 아이들을 모두 복지관에 보내야 할까? 그는 잠깐 망설였다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아이들 챙겨. 제원으로 간다.”만약 아이들을 이곳 복지관에 두면 이곳은 너무 멀어서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해도 알지 못할 수 있다. 차라리 제원 복지관에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온시환은 이 아이들을 직접 돌볼 고민도 했었지만 그들을 보면 염정아의 인생이 떠올랐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고 그걸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했다.그는 제원의 복지관에 기부할 수 있었고 매주 사람을 보내 아이들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이 안정적으로 자라도록 챙기고 학교에 보내어 나중에 직장을 찾아서 스스로 먹고살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그는 늘 자신이 쓴 시나리오가 가장 막장 같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잔을 비우고 또 비웠다. 문득 공지민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속의 쓰라림도 점점 더 커졌다. 그때 VIP룸의 문이 열리고 반승제는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가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이러는 거야? 아니면 우리 다 같이 시간 내서 놀러라도 가자. 마침 혜인이도 요즘 놀러 가고 싶어 하던데.” 한때 온시환은 노는 걸 가장 즐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갈 생각만으로도 힘이 빠졌다. 그는 멍하니 손에 든 술잔을 바라보다가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 반승제가 물었던 적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그 여자가 나를 사랑하게 될까?’ 그때 그는 우습게 느껴졌다. 반승제처럼 완벽한 남자가 여자의 사랑이 부족할 리가 있나? 세상에 여자는 넘쳐나는데 이 여자가 아니면 다른 여자를 찾으면 될 일 아닌가.하지만 세상일은 돌고 도는 법이라더니 그도 결국 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하물며 그 사람은 그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를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른 남자의 감정을 갖고 장난치려 들었다. 그날 경찰서 앞에서 연승혁을 봤을 때 온시환은 공지민의 대략적인 계획을 알 것 같았다. 그때 연승혁이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은 분명히 순수하지 않았고 연승혁도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빠졌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온시환은 질투가 아니라 씁쓸함을 느꼈다. ‘연승혁 너도 참. 평생을 거만하게 살아온 네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가 오히려 네 목숨을 노리다니.” 온시환은 술을 또 한 모금 마시며 자신과 연승혁 중 누가 더 불행한지 가늠할 수 없었다. 옆에 앉아 있던 서주혁은 손을 천천히 내밀어 그가 마시려던 술을 가로챘다. “그만 마셔. 위 출혈 나서 병원에 실려서 가고 싶어?” 온시환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
연승혁의 상처가 조금 나아졌을 때 공지민은 그를 데리고 해변을 거닐었다. 마치 그들이 처음 섬에 왔을 때처럼. 연승혁은 체력이 좋아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연인처럼 보였다. 이 섬에 와서 부상을 당한 그날을 제외하고 그는 매일 자신과 공지민이 연인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진실이 무엇인지. 그것은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다. 그날 두 사람이 다시 여기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을 때 연승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지민아, 여기서 돌아가면 나랑 함께할래?” 공지민은 잠시 의아해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우리가 이미 함께 있는 게 아니에요? 전에 우리가 미혼 부부였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긴 한데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네가 나를 선택한다면 그 문제들은 내가 모두 해결할 거야.” 김경자 쪽에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가 한 일이 기존의 규범을 어기는 일이었지만 반대하는 이들을 모두 없애 버리면 그만이었다. 예전처럼 말이다. 어차피 김경자도 그가 하는 방식에는 이미 익숙해졌을 터였다. 그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짓더니 그녀를 품에 안았다. “너만 원하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공지민은 속눈썹을 내렸다. 머릿속에는 연승혁과의 일보다는 염정아가 떠올랐다. ‘염정아가 원아정을 죽인 사건이 그렇게 커졌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온시환은 염정아를 도왔을까?’ 그녀는 심지어 이런 생각도 했다.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온시환은 슬퍼할까?’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예전부터 살고 싶은 의욕이 없었다. 그래서 제원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반드시 방법을 찾아 연승혁이 자신과 함께 여기 남아있게 할 것이다. 마치 그때 구은우가 영원히 바닷가에 남았던 것처럼. 제원 쪽에서 온시환은 더 이상 공지민과 연락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그가 들은 바에 따르면 공지민은 이미 연승혁과 함께 그 섬으로 갔고 그 섬에는 그가 배치해
공지민이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보였는데 연승혁이 말한 대로 안전해진 것 같았다.그녀는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연승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지민은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밖에 서 있던 연승혁의 부하들은 그녀가 나오는 걸 보고 격정스런 눈빛을 지었다. “공지민 씨, 괜찮으신가요?”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오빠는요?”“형님은 아직 의식이 없으십니다.” “오빠 보러 가고 싶어요.”그때 그녀는 일부러 미친 척하며 그를 몇 번 밀쳤고 기억에 의하면 그를 불더미 속에 밀어 넣었다. 그의 등은 아마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하지만 연승혁은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안고 탈출할 수 있었으며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잘 보호했다.공지민은 감동하기보다는 오히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원래는 그와 함께 그곳에서 같이 죽을 생각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무사히 살아남았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연승혁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연승혁은 병상에 누워 있었고 의사가 그의 상처를 살펴보고 있었다.섬의 의료 수준은 제원에 미치지 못했다. 연승혁은 등 부상으로 인해 이미 이틀째 의식을 찾지 못했고 의사는 감염을 우려하며 그의 곁을 이틀 동안 지키고 있었다. 공지민의 눈빛에 조롱의 기색이 스쳤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왜 이 사람은 타 죽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곧 눈가가 붉어진 채 천천히 병상 옆에 앉았다.“오빠는 괜찮아졌나요?”의사는 그녀를 보며 공손하게 답했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이제 깨어나기만 기다리면 됩니다.”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승혁의 손을 잡았고 그대로 병상 옆에 앉아 떠나지 않았다.의사는 곧 방을 떠났고 방 안에는 연승혁과 공지민 두 사람만 남았다.공지민은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이 방에는 카메라가 없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베개를 가져다 이 남자를 질식시켜 죽일 생각도 했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그녀가 그렇게 하려던 찰나
남자는 이미 죽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연승혁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옆에 있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옆에 있던 부하들에게 짧게 말했다. “정리해. 난 먼저 간다.” 호텔 쪽에는 이미 그의 부하들을 배치해 두었으니 원래라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방금 그 남자의 말이 자꾸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직접 돌아가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승혁은 자신이 공지민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이걸 단순한 게임으로만 여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만약 공지민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원래는 30분은 걸려야 할 거리였지만 그는 10여 분 만에 도착했다. 그가 머물던 호텔은 이미 짙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고 서둘러 앞으로 나가 자신의 부하를 붙잡고 물었다. “공지민 어디 있어!” “형님, 공지민 씨는 아직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방 안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연승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바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불길은 이미 너무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고 섬의 소방은 아직 빠르지 않아 불은 이미 1층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번져 있었다. 지금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연승혁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밖에서 소식을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어쩌면 공지민이 운 좋게 스스로 탈출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이성을 차릴 수 없었다. 곧바로 옆에 있던 사람들을 밀쳐내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이 자던 방으로 들어갔다. “공지민! 공지민!” 그는 큰 소리로 외쳤고 곧 방 한구석에서 공지민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짙은 연기에 눈을 뜰 수 없었던 연승혁은 최대한 몸을 낮추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공지민은 방구석에 웅
연승혁은 즉시 공지민을 바라보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넌 이 방에 가만히 있어. 내가 가서 그 사람을 처리하고 나서 나랑 같이 제국으로 돌아가자.”공지민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오빠가 위험하진 않겠죠?”“걱정하지 마. 금방 돌아올 테니까 한잠 푹 자고 있어.”연승혁이 묵고 있는 호텔은 이 섬에서 가장 큰 호텔로 매우 호화로운 데다가 그의 부하들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공지민은 안전했다.공지민은 서서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연승혁은 겨우 몇 걸음을 걸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매우 불안했고 심지어 공지민이 그와 함께 움직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건 결코 안전하지 않았고 그 사람이 혹시나 손에 총이 있다면 공지민은 위험할 수 있었다.그는 신이 아니었고 공지민을 100%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약간의 과실로 그녀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는 감히 모험할 수 없었고 그녀를 호텔에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은 차에 올라탔고 차는 30분 동안 달리다가 암초가 있는 곳에 멈췄다.근처의 암초는 크고 새까맣기 때문에 숨어 있기에 좋은 장소였다.연승혁은 옆에 있는 부하한테 물었다.“여기에 있는 게 확실해?”“네. 확실해요. 저희 쪽 사람들이 지금 수색하고 있어요. 늦어도 30분이면 결과가 나올 거예요.”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소매를 입고 있었는데 평소의 옷차림과는 전혀 달랐고 휴가를 온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양측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연승혁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이제 그 사람은 도망칠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하들은 온몸이 새까만 남자를 붙들고 걸어왔다.어쩐지 이 남자가 그렇게 오랫동안 숨어 있더라니 그의 몸에는 검은 물감이 칠해져 있었고 마치 암초와 융합된 것처럼 보였으며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연승혁은 담배에 불을 붙였고 밤바다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그는 심호흡한 뒤 그 남자
연승혁은 한동안 그녀와 꽁냥꽁냥하다가 해변의 경치를 구경하러 가자고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공지민은 바다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구은우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후 그녀는 평생 악몽 속에서 살았다.그녀는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며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리기 시작했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연승혁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모래 위를 걸었다.“지민아, 어때? 여기 달이 특별히 예쁜 것 같지 않아?”공지민은 얼굴에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뻐요. 이렇게 예쁜 달은 처음 봐요.”연승혁의 입꼬리는 올라갔고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말없이 서 있었다.그는 정말로 여기의 달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와 함께 경치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뭔가 더 특별했고 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공지민은 내내 연승혁한테 맞춰줬고 그가 바닷물을 만지고 싶다고 해서 그녀도 따라나섰다.바닷물에 발을 담그면서 연승혁이 물었다.“이런 해변을 보고 있으면 뭔가 떠오르는 게 있어?”공지민의 눈에는 의문으로 가득 찼고 그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연승혁은 구은우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다. 그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공지민은 그때 구은우를 매우 사랑했고 그들이 서로를 가장 열정적으로 사랑할 때 구은우가 사망했는데 그녀가 그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이상우가 최면술을 사용했음에 불구하고 연승혁은 그녀가 갑자기 기억해 낼까 봐서 걱정이었다.하지만 공지민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연승혁은 안도감을 느꼈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기억 안 나면 됐어. 손 줘봐. 우리 여기 좀 둘러보다가 돌아가자.”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오빠가 잡으려는 그 사람은요?” “아마 일주일 안에 잡힐 거야. 이 섬이 제국만큼 크지는 않지만 숨을 수 있는 동굴이 많아. 그 사람이 이곳에 들어온 후 바로 숨어버렸어. 그래서 내 부하들이 그를 찾아내려면 구석구석을 돌아다녀야 해.”그들이 며
공지민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저 연승혁한테 기대어 있기만 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누군가가 그녀를 들어 올려 따뜻한 침대에 눕혔다.이곳은 작은 섬으로 보였고 원주민들도 꽤 많아서 야시장은 매우 북적거렸다.공지민은 안겨서 이동하는 동안 많은 노점상들의 외침 소리를 들었다.또 30분이 지났을 때 음식의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연승혁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왜 이렇게 많이 자는 거야? 너 하루 종일 잠만 잤어. 얼른 일어나서 뭐라도 좀 먹어. 이따가 야시장 구경하러 가보자.”“사람 잡으러 왔다면서 야시장을 구경할 기분은 나요?”“그 사람이 지금 이 원주민들 사이에 있어. 멀리 도망가지 못할 거야. 이곳의 출입구는 이미 부하들이 지키고 있어서 그 사람이 함정에 빠뜨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돼.”공지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기울여 그의 뺨에 뽀뽀했다.“역시 오빠는 대단해요.” 연승혁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그는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듯했다.“네 약혼자가 될 수 있는 걸 봐서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그러고 보니 네가 보는 눈이 있네.”“그럼요. 내가 안목이 높긴 하죠.” 그녀의 말을 들은 연승혁은 기분이 더 좋아졌고 그녀를 품에 껴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야시장에서 파는 것들인데 먹고 싶은 게 있나 봐봐.”연승혁은 많은 음식을 사 왔고 그녀는 확실히 배가 고파서 그의 품에 안겨 마음껏 먹기 시작했다.연승혁은 여자가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전부다 네 거니까 천천히 먹어.” “오빠가 뺏어 먹을까 봐 그러죠.”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는 연승혁의 눈이 깊어졌다.공지민은 눈치채지 못한 듯 모든 음식을 다 먹고 나서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야시장 구경하러 간다면서요? 얼른 가요. 나도 너무 구경하고 싶고 이곳의 풍습이 궁금해요. 여기 국내는 아니겠죠?”연승혁은 그녀가 어린아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