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전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었잖아요. 우리 진짜 여동생이 아직 살아있다면 설씨 가문의 주식을 모두 여동생에게 넘겨주고 남은 재산을 우리한테 주겠다고요.”최근 몇 년간 설기웅이 회사를 맡았고 게다가 주가가 계속 상승하였으므로 플로리아 상권에서 회사의 명성은 제원에서의 반승제와 비슷했다.설기웅은 회사를 위해 많은 것을 바쳤다. 그럼에도 주식을 하나도 갖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겠는가.그러나 다행히도 설기웅은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깨어있는 사람이었다.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랬지.”설우현이 이어서 말했다.“지금부터 형과 저, 그리고 제 사람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아버지를 뵈러 올 수 없게 해요. 형도 어머니께 말씀 좀 전해주세요.”설기웅이 고개를 끄덕였다.설우현은 가문 사람들을 병원에서 지키게 한 뒤 플로리아의 그레이 지대를 향해 차를 몰았다.그레이 지대는 무법천지인 곳으로 지하 격투장이 있는 곳이다.시 중심과 거리가 꽤 있었기에 그는 세 시간 동안 운전해서야 도착했다.가면을 쓰고 내부로 들어가서야 그는 이곳이 얼마나 어둡고 밑바닥인 곳인지 알게 되었다.전에 한 번 와본 적은 있었다. 당시 많은 내로라 하는 가문들이 이 지역을 놓고 경쟁했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갔지만. 성인이 되었을 때 몰래 들어가 본 이곳은 외부와 아예 다른 세상이었다.그레이 지대는 본디 건달과 깡패들이 날뛰는 곳이므로 소란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누군가 도를 넘는 큰일을 저지르면 이틀 내로 이곳에서 사라지게 된다.그레이 지대는 격투장에서 관할했고, 총격전이 벌어지면 격투장이 앞장서서 파벌을 처리했다.다른 것에 대해서 격투장은 절대 관여하는 일이 없다. 그것은 개인적인 원한이므로 관여할 이유도 없다.하기에 이름난 가문의 자녀들이라면 이곳에는 오지 않았다. 이곳은 사념이 있는 사람들만이 출입하는 곳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책임은 모두 자신에게 있다.문을 열고 들어간 설우현의 눈에 띈 건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었다.장미의 손에는 고대 자
왜 설인아를 구해주지 않느냐 물으려던 그가 멈칫하더니 결국 입술만 몇 번 짓씹었다.어찌 되었든 성혜인에 대한 설인아의 행동은 매우 비열했다. 결국 성혜인의 눈까지 멀게 했었지.결국에 애인을 해친 사람이니 구하든 말든 모두 그의 선택인 것이다. 아무도 탓할 수도 나무랄 수도 없는 것이다.결국 설인아가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닌 운명일지도.설우현의 시선이 느껴진 듯 성혜인이 고개를 들어 몇 초간 그와 눈을 맞추다 생긋 웃었다.“설우현 씨, 오랜만이에요.”설우현의 몸이 저도 모르게 굳었다. 형용할 수 없는 친근감, 익숙함 같은 감정이 또다시 밀려왔다.그는 처음 성혜인을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었다. 지금까지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몇 마디 인사를 나누려고 할 때 성혜인의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아보니 스승 주영훈이었다.주영훈은 영감을 얻기 위해 세상과 담을 쌓고 집 문을 걸어 잠그곤 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작품이 나와서야 외부와 연락을 시작했다.그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제원에서였다. 당시 반승제는 그녀의 신분을 몰랐었다.성혜인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스승님?”“혜인아, 너도 플로리아에 왔더냐?”주영훈의 목소리가 들떠있는 듯했다.“그럼 지금 시간 되느냐?”성혜인은 생각에 잠겼다. 반승제와 함께 그곳으로 출발하려면 적어도 모레가 되어서야 가능했다. 그러니 오늘과 내일은 모두 시간이 넉넉한 셈이다.“네. 오후에 바로 만날 수 있어요.”주영훈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주소를 보냈다.반승제에게 설명한 뒤에야 그는 주영훈이라는 사람을 기억해 냈다.하지만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럼 경호원이랑 같이 가.”“좋아요.”차에 오른 성혜인은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전에 스승님과 만났을 때도 그는 과제 상황을 확인했었다.그러나 최근 반년 이래 일어난 일들이 너무 많았기에 그림에 손을 대지 못한 지 오래였다.주영훈은 밖에서 자신의 마지막 제자가 얼마나 우수한지를 자랑하곤 했다. 그는 성혜인
혼자가 아니라 곁에 경호원 두 명을 거느렸다 한다. 경호원들은 단연 실력이 높은 사람들이다.성혜인이 혼자 외출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그는 두 경호원에게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보호하라고 일러두었다.구사일생하며 많은 일을 겪어온 성혜인 역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레스토랑 1층 로비에 들어서려는데 탐지기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에 웨이터가 두 경호원을 향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손님, 죄송합니다만 무기는 가지고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두 경호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 레스토랑에는 줄곧 이러한 규칙이 존재했다. 하여 이곳은 플로리아의 거물들이 협상을 하는 가장 애용하는 장소이기도 했다.무기는 물론 휴대폰 역시 반입할 수 없으며 따로 보관하는 곳이 존재했다.두 경호원이 성혜인을 가로막고 신중하게 말했다.“아가씨, 스승님과 다른 곳에서 약속을 잡는 건 어떠신지요? 이 레스토랑 규칙이 원래 이러합니다. 어떠한 물건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다른 사람들도요?”“네.”잠시 머뭇거리던 성혜인이 휴대폰을 꺼내 주영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연하게도 주영훈은 받지 않았다.이제 와서 장소를 바꾸기도 어려우니 결국 레스토랑의 규칙을 따를 수밖에.“괜찮아요. 모두가 지키는 규칙이니 저희도 지켜야죠.”성혜인이 자신의 휴대폰을 건넸고, 뒤에 있던 두 경호원도 마지못해 총과 단검, 휴대폰을 건넸다.로비로 들어선 성혜인이 설기웅을 보게 되었을 때, 심리적으로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생겼다.성혜인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섬과 동시에 뒤의 대문이 쾅 큰 소리를 내며 닫혀버렸다.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린 그녀는 설기웅과 불필요한 마찰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다른 쪽의 계단으로 올라가려 했다.그러나 곧이어 주변에서 30여 명의 무장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그녀와 두 경호원을 에워쌌다.그제야 성혜인은 설기웅이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설 대표님,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전에 설인아와 좋지 않은 일이 있긴 했지만,
“지금 당신을 데리고 인아 만나러 갈 거니 무릎 꿇고 직접 사과하세요. 그럼 시체라도 온전히 남겨드리려니까.”성혜인은 웃음을 터뜨리려 하는 찰나 설기웅이 우악스럽게 목을 졸랐다.“인아가 그렇게 됐는데 지금 웃음이 나와? 양심도 없는 미친 년이네, 이거.”성혜인이 그를 차갑게 바라보더니 씩 웃었다.“설 대표님, 저는 당신 친여동생이 참 측은해요. 그래도 당신들을 보러 가지 못해서 참 다행이죠. 이런 악랄한 짓을 하는 당신의 얼굴을 보면 얼마나 역겹겠어요.”설기웅의 손이 저도 모르게 바들바들 떨렸다. 마음이 무언가에 찔린 듯 불편했다.그러나 그는 자신을 위한 변명을 했다. 지금의 불편한 마음은 모두 성혜인 때문이라고. 성혜인이 괜히 이상한 말로 자신의 마음을 후벼파는 것이라고.“이제 죽기 직전에도 이렇게 자신감 넘치나 보자.”그는 성혜인을 홱 놓아주고 한쪽에 조용히 앉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혜인 역시 그를 상대하기 싫기는 마찬가지였다. 말할수록 짜증이 나는 상대였다.차는 곧 설인아가 사는 곳에 멈췄고 몇 명의 경호원이 그녀를 결박한 채 차에서 내렸다. 설기웅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 설인아의 상태를 보려 했다.설기웅이 올 것을 미리 짐작한 설인아는 불쌍해 보이도록 몸을 한껏 움츠려 앉았다. 발갛게 부은 눈과 마구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그녀의 정신상태가 온전치 않아 보이도록 했다.그녀를 본 설기웅이 그녀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인아야!”천천히 고개를 들어 오빠를 확인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오빠, 나 너무 무서워. 눈만 감으면 그 남자들 얼굴이 아른거려. 아버지도 날 보고 싶지 않아 하시는데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집에 가고 싶어... 흑흑. 우리 가족 이제 다시 예전처럼 화목하게 지낼 수는 없는 거야? 오빠...”설인아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경호원들에 의해 끌려오는 성혜인을 발견했다. 그녀는 갑자기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설레서. 너무 기뻐서 떨린 것이었다.줄곧 설기웅이 얼른 성혜인을 처리했으면 좋겠다
설인아가 오빠의 팔을 껴안았다.“역시 오빠가 날 제일 사랑해. 오늘 밤부턴 악몽 안 꾸게 될 거야! 오빠, 고마워.”그녀는 설기웅의 품에 안겨 입꼬리를 올렸다. 뒷마당의 불빛이 설인아의 얼굴을 훤히 비추었다. 성혜인은 그녀가 얼마나 의기양양한지 표정을 두 눈 똑똑히 볼 수 있었다.하지만 상관없다. 오늘 밤 여기서 정말 죽게 된다면 앞으로 평생 이 두 사람의 얼굴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두 경호원은 철장을 잠근 뒤 설기웅의 명령을 기다렸다.설기웅은 조금 망설였다.그는 항상 자신에게 묻곤 했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말이다.그러나 그는 한 가정의 오빠로서 가족을 지킬 의무가 있다. 설인아는 그의 가족이며 성혜인은 남이다.“사장님, 배를 강 중심으로 몰고 내려간 뒤에 밀어버릴까요?”설기웅이 입을 뻐끔거렸다. 차마 그러라는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그의 망설임을 보아낸 설인아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렸다.이 모습에 설기웅은 순간 결심을 굳혔다.“밀어버려.”“예.”경호원 몇 명이 철장을 보트 위로 올렸다. 보트를 타고 수십 미터를 나간 뒤 철장을 밀어버리려 했다.기슭과 인접한 곳은 강물이 너무 얕기 때문에 확실히 죽이려면 강 중심으로 나가야 했다.보트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설기웅은 자신의 심장이 무언가에 의해 끝없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 공포감이 순식간에 설기웅을 덮어버렸다.문득 어렸을 때 설의종이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네 동생은 몸이 안 좋아. 처음 태어났을 때도 고생했으니 앞으로 양보 많이 해야 해. 알겠니?”“아버지, 그럼 여동생이 잘못하면요?”“네 가족인 이상 절대 잘못하지 않을 거야.”“그럼 저와 우현이가 잘못한다면요?”“벌을 받아야지. 너흰 오빠로서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니.”이 철칙은 설기웅의 뼈에 새겨지다시피 했기에 몇 년 동안 그는 무조건 여동생이라면 감싸고 돌고 도왔다.설인아가 밖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든 간에 그는 설인아를 위해서라면 어
당황한 설우현이 곧 그를 따라 나갔다.“반승제 씨, 무슨 일이에요?”반승제는 그를 상대하지 않은 채 헬기에 올라탔다.함께 사다리를 타려던 설우현은 하마터면 반승제의 발에 차일 뻔했다.“반승제 씨! 아니, 매번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인지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그리고 내가 오늘 찾아온 것도 중요한 일 때문인데 이렇게 막 대하면 안 된다고.”말을 마친 그는 고집을 부리며 결국 헬기에 올라탔다.반승제는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설우현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혜인이한테 아무 일 없길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설기웅은 내 손에 죽을 테니까.”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과 함께 설우현은 곧바로 그 영상을 떠올렸다. 설마 형이 복수하려는 건 아니겠지?얼른 설기웅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마음이 불안해진 설우현은 다시 나미선에게 전화를 걸었다.나미선은 전화를 아무렇지 않게 받았다.“엄마, 형님 어디 갔어요?”“네 형 성혜인 데려갔다. 인아를 괴롭혔으면 벌받아야지.”설우현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엄마고 형이고 왜 이렇게 똑똑하지 못한 일들만 하는지.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헬기가 이륙했다.그는 전화를 끊고 반승제에게 말했다.“인아가 사는 곳을 알고 있어. 형 성격상 혜인이 납치했더라도 먼저 인아 쪽에 데려갔을 거야.”헬기는 그곳으로 방향을 틀었다.10분쯤 비행했을 때 서주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거의 5일 동안 서천에 머무른 서주혁은 얻은 단서를 가능한 가장 이른 시일 내에 반승제에게 알려주려고 했다.“주혁아.”휴대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반승제의 목소리에 서주혁이 안도하며 다른 한 손으로 자료를 정리했다.“서천 쪽 병원이 바로 설씨 가문 사모님이 그해에 딸을 낳았던 곳이야. 병원에서 그 시간대에 많은 사람들을 이직시켰고 그 이직한 사람들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모두 1년 내로 죽었어.”“다 죽었다고?”반승제는 조금 놀랐다. 이는 설씨 가문의 아이가 바뀐 배후에 거대한 음
그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칫했다.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서주혁은 여전히 지도 위의 그 주소를 향하고 있었다.“그런데 혜인 씨의 기억과 주위 사람들의 기억이 맞아떨어지지 않아. 이웃의 말에 따르면 임지연과 혜인 씨는 자주 자리를 비웠다고 해. 성휘는 줄곧 밖에서 일하느라 집에 대해 신경 쓸 틈이 없었고… 그래서 난 혜인 씨 기억이 혹시 일부 조작됐거나 사라진 거로 생각해. 혜인 씨는 눈치를 못 챈 거고.”이에 따라 성혜인도 임지연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임지연을 떠올리면 기억하는 것은 오직 그녀가 성혜인을 보호하려 했다는 것과, 엄청난 사랑을 주었다는 것. 그러나 더 디테일한 부분은 기억나지 않았다.할아버지, 할머니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고 그저 자신을 싫어했다는 것만 어슴푸레 기억했다.외삼촌이 엄마를 어떻게 도운 건지도 몰랐으며 고등학생 때 외삼촌 집에 일 년간 머물렀던 곳만 기억했다.반승제의 안색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대답이 없자 전화 건너편의 서주혁이 이름을 불렀다.“반승제?”“응.”“나는 아무래도 혜인 씨가 설씨 가문의 진짜 딸 같아. 임지연은 양어머니가 아닌 친어머니이고. 아까 말랬던 미치광이가 임지연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고 했어. 그때 임지연의 곁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기 때문에 상황이 좀 복잡해서 더 구체적으로 조사하긴 힘들어. 사실 네가 나미선의 사진을 혜인 씨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알 거야. 임지연과 생김새가 똑 닮았으니까. 그리고 설 회장님과 친자확인을 해도 돼.”말을 마친 서주혁이 그제야 안도한 듯 숨을 크게 쉬었다.반승제가 출국하기 전에 맡긴 모든 일을 끝마친 셈이다.목덜미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친 서주혁은 생각했다. 이번 단서를 찾는 일은 정말 어려웠다고. 정신병원 조사를 위해서만 수십만 건의 인적 사항을 꼬박꼬박 추려내야 했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서주혁의 팀이 데이터 처리에 능하다는 것이었다.반승제와 그 뒤에 앉은 설우현 역시 이어폰을 끼고 있었
한편 헬기에서.반승제가 전화를 끊은 후 설우현은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그러나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 결국 내뱉은 한마디는 빨리 운전할 수 없겠냐는 독촉 뿐이었다.반승제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차갑게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설우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동생을 지척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 개보다 못한 놈 같게 느껴졌다.설우현은 여러 가지 감정이 밀려와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반승제는 냉담한 얼굴로 헬기를 조종하여 목적지로 향했다.“혜인이가 죽으면 설기웅도 같이 순장될 줄 알아.”그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지만 설우현은 온몸에 힘이 빠진 듯 나른해졌다.아버지께서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 말씀하셨었다. 친여동생이 살아있다면 설씨 가문의 주식은 모두 여동생에게 물려줄 것이라고.오빠로서의 그 역시도 여동생이 살아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여동생만 살아있다면 가족이 옛날처럼 화목해질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그 여동생이 성혜인이란다.성혜인은 인간관계에 있어 칼과 같은 사람이다.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성혜인은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한없이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지만 누군가 제 눈에 눈물을 내면 피눈물을 내게 했다. 그녀는 강하고 냉정하고 과감하다. 설인아와는 다르게.이런 이성적인 사람이야말로 그의 여동생이다.설우현은 울고 싶었지만 울 수 없었다. 그저 눈물이 핑 돌고 눈앞이 흐려지기만 할 뿐.생전 하나님을 믿지 않던 그는 급기야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제발 여동생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안전하기를...헬기가 별장 위로 날아올랐고 설우현은 망원경 하나를 들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반승제가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어디 있는지 봐요.”아래를 살펴보던 설우현이 눈에 띈 건 성혜인이 철장 속에 갇히는 장면이었다.“헬기 좀 낮춰봐요. 빨리요! 혜인이 강에 빠질 것 같아요!”그는 손바닥이 땀범벅이 돼서는 조급하게 소리쳤다.“헬기 낮춰봐요. 뛰어내려서 구해볼
강민지와 대화를 마친 후, 공지민은 눈에 띄지 않는 한쪽 구석에 앉아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온시환은 이미 누군가에게 끌려가 술을 마시고 있었고 떠나기 전 공지민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주며 자리를 벗어나지 말라고 당부했다.소파에 앉아 있던 공지민의 시야에 원아정과 몇몇 여성이 들어왔다. 원아정은 마치 공지민을 못 본 척 지나치려는 듯했지만 그녀 옆의 몇몇 여자는 공지민이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원아정의 곁을 맴돌던 오예슬이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오예슬은 공지민이 온시환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공지민을 보자마자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어머나, 아정아, 저기 좀 봐. 저 사람 우리 고등학교 때 제일 인기 많았던 공지민 아니야?”오예슬은 거의 뛰다시피 공지민 앞으로 다가가선 위압적인 태도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공지민,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설마 여기 직원으로 지원하려고 온 건 아니겠지?”공지민의 옷차림을 보면 그런 말이 어불성설이었지만 오예슬은 그녀를 비하하고 싶어 일부러 그런 말을 내뱉었다.공지민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예슬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공지민을 괴롭히며 쾌감을 느껴왔고 지금의 무시당하는 태도는 그녀에게 모욕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과거 공지민이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손에 들고 있던 술을 공지민에게 그대로 부어버렸다.공지민은 피할 새도 없이 머리에 술을 뒤집어썼다.“어머, 미안해. 내가 잔을 제대로 못 들었나 봐.”오예슬은 원아정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에 이런 행동을 했고 이는 과거에도 그녀가 원아정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주 하던 짓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공지민을 굴욕 주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원아정에게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려 돌아섰다.하지만 공지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오예슬의 머리채를 잡아끌며 발
원아정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마치 친한 친구인 양 공지민의 팔짱을 끼었다.“그럼 다행이네.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것도 내 생일 파티에서라니 정말 놀랍다. 앞으로 자주 보자. 나도 제원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그래도 우리는 서로 잘 아는 사이잖아.”“좋아.” 공지민은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온시환은 공지민의 허리를 감쌌다. 그녀가 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바랐다. 그래야 그녀가 구은우의 일은 조금이라도 덜 떠올릴 테니 말이다.구은우의 사건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밝혀진 건 연승혁이 배후라는 것뿐이었다. 연승혁은 현재 굉장히 높은 지위에 있었고 그를 건드린다면 필연적으로 원씨 가문까지 적으로 돌리게 될 터였다. 두 가문이 힘을 합친다면 온시환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공지민이 잠시라도 구은우를 내려놓고 평온히 지내기를 바랄 뿐이었다.원아정은 고개를 숙여 공지민의 귀에 속삭였다.“몇 년 못 봤는데, 그새 너 남자 꼬시는 재주가 이렇게 늘었을 줄은 몰랐네. 죽어서 바다에 가라앉은 은우가 이 꼴을 보면 편히 눈을 감을 수나 있을까?”가볍게 상처를 후벼 파는 말이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너도 이제 곧 결혼하잖아. 과거의 남자에게 얽매이는 건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닌 것 같은데?”원아정의 얼굴에 미소가 굳고 입술이 살짝 일그러졌다.공지민은 손에 든 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승혁 씨 같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를 자꾸 떠올리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거야. 넌 원씨 가문에서도 딱히 기댈 곳이 없어 보이던데. 원진 씨가 너에게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더라고.”이 일은 모두가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원진은 철저하고 냉혹한 사람으로,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원진에게 반감을 품은 이들도 많았다.원아정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대신 네가 시환 씨랑 이혼하고 나서 어떻게 살지나 잘 고민해.”그녀는 그
온시환은 단지 그녀가 식견을 넓히려 한다고만 생각할 뿐,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밤이 되어 두 사람이 잠자리에 들 때, 온시환은 그녀를 품에 안고 천천히 그녀의 옷 끈을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지민은 몸을 돌리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싫어요.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온시환의 순간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서두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짧게 대답했다.“알았어.”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에 들었다.원아정의 생일 파티는 초대받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공지민은 몇몇 스타일리스트에게 둘러싸여 오늘 밤을 위한 스타일링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밤 원아정을 만나면 상대가 얼마나 화를 낼지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일 파티인 만큼 원아정이 직접적으로 화를 내지는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위에 원진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공지민은 이 며칠 동안 온시환에게 원진에 대해 물어보며 정보를 얻어냈다. 원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원진을 두려워했고 원아정도 예외는 아니었다.원진이 있는 한 원아정이 함부로 굴 수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오늘 밤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자리라 원진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했다.먼저 스타일링을 마친 온시환은 공지민이 몸에 꼭 맞는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자 순간 눈빛이 반짝이며 숨소리마저 떨렸다. 매끈한 허리선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였다.“지민아, 오늘 정말 아름다워.”온시환은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공지민은 말없이 그와 함께 차에 올랐다.원씨 가문의 저택은 제원에 위치해 있었는데 몇 년 전에 구매한 곳이라고 했다. 오늘 밤의 파티는 바로 그 저택에서 열리고 있었다.공지민은 온시환의 손에 이끌려 차에서 내렸다. 저택 입구에 주차된 화려한 차들을 보니 이 파티의 주최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린 공지민은 온시환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화려한 홀 안에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대화가
오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지민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야. 은우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나도 알아. 사실 난 한 번도 잊어본 적 없어. 오늘 밤 원아정을 만나고 은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아? 그런데 넌 이런 세월을 어떻게 견뎌왔을까? 너라는 애는 참으로 밉지만 그래도 넌 진심으로 은우를 좋아했잖아. 은우는 한때 네 사람이었고, 넌 나보다 천 배는 더 괴로웠겠지... 미안해.”그 말을 끝으로 오하윤은 자리를 떠났다. 가슴은 여전히 저릿저릿했다.만약 자신이었다면 그녀는 아마 절망 속에 빠졌을 것이다.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오하윤은 먼 곳을 바라보며 인생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느꼈다. 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는 걸까...한편, 공지민은 자리에 앉아 말없이 주스가 담긴 컵만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공지민은 입술을 감쳐물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온시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지금은 꽤 늦은 시간이었다. 그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온시환과 연승혁이 친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공지민은 그가 왜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그의 친구에게 복수할까 봐 두려운 게 아니겠는가.‘남자는 결국 믿을 게 못 돼.’가슴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다시는 온시환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공지민은 끝내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다.온시환은 한참 기다리다가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냈다.[나 화나게 하지 마. 구은우의 일은 아직 조사 중이니까, 너도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마.]그 메시지를 읽은 공지민은 어이가 없었다. 온시환은 분명 누가 구은우를 해쳤는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녀를 계속 속이려는 것이 뻔했다.공지민은 속눈썹을 지그시
반승제는 순간 멍해졌다. 예전 일을 떠올리려 했지만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저 자신은 성혜인을 선택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뿐이었다.“시환아, 내 충고를 하나 하자면, 진심으로 지민 씨를 감동시키는 데 집중해. 억지로 잡으려고 하다간 너도 서주혁처럼 될 거야.”온시환은 순간 말을 잃었다. 사실 그도 두려웠다.하지만 공지민은 죽은 사람에게 마음이 묶여 있는 데다 자신의 진심 따윈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았다.반승제가 전화를 끊자 온시환은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잠시 후, 그는 자신의 부하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그렇게 공지민은 바로 오하윤을 만나러 갔다.오하윤은 그녀에게 과일 주스를 따라 주며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나 오늘 원아정 만났어. 너도 기억하지? 고등학교 때 널 화장실에 가둬놓고 물을 끼얹으라고 시킨 애 말이야.”공지민이 원아정을 잊을 리 없었다. 원아정은 모든 악몽의 시작이었다.그때 원아정은 화장실로 그녀를 몰아넣고 옷을 벗기라고 명령했으며 사진을 찍어 협박했다. 그 이후 괴롭힘은 점점 더 악랄해졌다.공지민은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저 묵묵히 참으면 지나갈 거라 믿었지만 어느 날 원아정은 의자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며 명령했다.“공지민, 너랑 은우가 원래 아는 사이라며? 지금 무릎 꿇고 빌어. 안 그러면 네 사진을 모두에게 뿌려서 네가 어떤 년인지 보여줄 거야.”그녀는 그런 고등학생은 본 적이 없었다. 고고한 척하면서도 잔인했고 사람을 완전히 조롱거리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원아정은 재벌가 출신으로 모두가 그녀를 피했다. 항상 고급 외제차가 그녀를 데리러 왔고 때로는 경호원까지 동원되었다. 그녀와 비슷한 수준의 친구들조차 그녀의 괴롭힘을 부추겼다.만약 구은우가 없었다면 공지민은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그때 원아정 앞에 무릎을 꿇고 개처럼 용서를 구했다.이후 구은우가 원아정에게서 사진
지금 공지민은 사실상 온시환에게 감금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온시환은 외부와의 연락을 금지하지는 않았다.오하윤의 전화가 걸려 왔을 때 공지민은 별다른 감정 없이 받았다. 사실 그녀는 이 사람과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오하윤의 첫 마디가 공지민을 놀라게 했다.“지민아, 잠깐 만날 수 있을까? 누가 은우를 죽음으로 몰았는지 알아냈어.”공지민의 눈빛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하지만 문을 열었을 때 문밖에 서 있는 두 명의 경호원을 발견했다.온시환은 그녀가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오하윤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는 전화 속에서도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래, 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널 정말 싫어했어. 왜냐하면 나도 은우를 좋아했거든. 정말 너무너무 좋아했어. 그때 내 계부가 자주 날 때렸고 난 늘 구석에서 몰래 울곤 했어. 그런데 은우는 그런 나를 마치 천사처럼 도와줬어. 먹을 것도 챙겨주고 나를 위로해 줬거든. 신고하자고 말했지만 난 너무 겁쟁이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그 이후로 난 계속 은우를 지켜봤어. 은우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니,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지. 너도 알잖아? 은우는 그 자체로 모든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이었어. 그래서 내가 은우를 찍은 사진이 그렇게 많았던 거야. 예전에 난 계속 널 질투했어. 은우는 언제나 널 지켜줬으니까. 그런데 그동안 난 네가 돈 때문에 온시환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이제야 알았어. 지민아, 오늘 밤 아주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됐어. 이걸 너한테 알려주는 게 내 사과가 될 거야. 잠깐 나올 수 있어?”“알겠어. 주소 보내줘.”전화를 끊은 공지민은 바로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성혜인은 마침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공지민이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 조금 의아했다.“무슨 일이에요, 지민 씨?”“혜인 씨, 나 잠깐 밖에 좀 나가고 싶어요. 시환 씨에게 전화해서 얘기 좀 해줄 수 있어요? 내가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거든요.”성혜인은 두 사람의 관계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원아정의 얼굴에는 잠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지만 오하윤이 옆에 있다는 걸 생각하며 서둘러 표정을 감췄다.오하윤은 아직 구은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문득, 공지민이 왜 그렇게 앨범에 집착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구은우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남겨진 사진이 거의 없어서 더 간절했던 게 아닐까...오하윤은 아무 말 없이 앞에 놓인 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이 원아정은 다시 말을 꺼냈다.“하윤아, 지민이 지금 제원에 있지?”원아정이 평생 가장 싫어했던 사람은 공지민이었다.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의 여자가 어떻게 감히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남자를 빼앗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있어. 근데 내가 따로 만나진 않았어. 너 온시환 알면 금방 만날 수 있을 거야.”‘온시환이라고?’원아정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마 연승혁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조만간 만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원진이 원씨 가문을 장악한 이후 원아정은 늘 눈치를 보며 살았다. 하지만 누려야 할 대접은 빠짐없이 받았다. 원진이 돈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하윤아, 나 곧 결혼해. 상대는 연승혁이야. 넌 잘 모를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람도 온시환과 같은 무리야. 앞으로는 지민이를 만날 일도 많겠지.”고등학교 시절 원아정은 공지민을 괴롭히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구은우가 공지민을 지켜주며 이 괴롭힘은 끝이 났으나 원아정의 마음속 공지민에 대한 증오심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원아정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에는 악의가 서려 있었다.한편 오하윤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한때 그녀도 공지민을 질투했다. 공지민이 구은우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은우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들은 뒤 오하윤은 갑자기 공지민이 안타깝게 느껴졌다.예전의 공지민은 매우 조용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구은우 앞에서는 유일하게 환하게 웃곤 했다.그녀가 지금처럼 타락하고 온시환 같은 남자에게 기대고 있는 이유는 구은
룸 안은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원아정은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를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금세 악랄한 표정이 스쳤다.그녀는 얼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대답한 이는 다름 아닌 오하윤이었다.원아정은 고등학교 시절 오하윤을 알게 되었다. 당시 구은우는 학교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오직 공지민만 보였다.이 사실에 분노한 원아정은 연씨 가문 사람을 알게 되면서 구은우의 외모가 연씨 가문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점을 알아차리고 이 정보를 연씨 가문에 흘렸다.‘내가 못 가지는 건, 공지민 그년도 가지지 못하게 할 거야.’“하윤아, 나 제원에 왔어. 나올 수 있어? 얼굴 좀 보자.”오하윤은 원아정이 무서웠다.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겉으로는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척했지만 뒤로는 후배를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렸고 그 일에서도 아무런 손해를 입지 않았다.게다가 구은우를 향한 그녀의 집착은 누구나 알 정도였다. 그러다 갑자기 조용해진 그녀를 보며 모두가 의아했지만 아무도 그녀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랐다.구은우와 공지민이 졸업할 때까지 원아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만나자고 하니 오하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요즘 심심했던 오하윤은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에 곧장 약속 장소를 정했다.약속 장소에서 만났을 때 오하윤은 자신이 너무 화려하게 차려입은 것을 깨달았다. 온몸을 명품으로 둘러싼 그녀와 달리, 원아정은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이었다. 상대적으로 자신이 천박한 졸부처럼 느껴졌다.“하윤아, 오랜만이야.”어색하게 자리에 앉은 오하윤은 학창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모두가 알다시피 원아정은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돈을 아낌없이 쓰며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아정아, 갑자기 제원에 웬일이야? 너희 집 사업은 여기가 아니었잖아.”당시 원아정 집안이 대규모 사업을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고 대학 입시조차 필요 없이 앞길이 보장된 그녀를 부러워하며 줄을 서서 비위를 맞추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가며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지민이 잘 지켜. 괜히 나가서 또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온시환은 속이 상한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결국 술집으로 발길을 옮겨 한잔하려 했고, 그곳에서 뜻밖에도 원아정을 마주쳤다.‘원아정이 제원에 왔다고?’그녀 곁에는 원진이 서 있었다. 원진은 시선을 앞만 향한 채 걸음을 옮기다가 온시환을 보자 발걸음을 멈췄다.온시환도 마침 마음이 복잡한 상태라 옆에 있는 룸의 문을 열며 말했다.“같이 한 잔 할래?”원진은 망설임 없이 룸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원아정도 서둘러 뒤따랐다. 얼굴에는 상류층 특유의 오만함과 자존심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원진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원진이 있는 자리에서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할 정도였다.과거 원진은 원씨 가문을 철저한 강경책으로 정리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은밀한 거래를 했고 가문 내 반대 세력들은 대부분 사라졌다.그런 원진 앞에서 원아정은 잔뜩 움츠린 채 룸 안의 의자에 앉았다. 손을 무릎 위에 얹고 긴장한 듯 움찔거렸다. 그때 원진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연승혁과의 결혼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손을 꽉 움켜쥔 원아정은 연승혁을 떠올리니 눈가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얼마 전 연승혁을 만나러 연씨 가문에 갔다가 그가 사람을 처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상황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익숙해 보였다.겁이 많은 원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깨어나 보니 연씨 가문의 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연승혁, 그 끔찍한 인간!’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연승혁이 비록 잔혹한 수단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 구은우의 존재를 그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원아정은 원씨 가문에서 작은 개미 같은 존재였다. 원진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생활에 지친 지 오래였다.연승혁이 아무리 냉혹하더라도 그의 아내가 된다면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