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황한 설우현이 곧 그를 따라 나갔다.“반승제 씨, 무슨 일이에요?”반승제는 그를 상대하지 않은 채 헬기에 올라탔다.함께 사다리를 타려던 설우현은 하마터면 반승제의 발에 차일 뻔했다.“반승제 씨! 아니, 매번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인지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그리고 내가 오늘 찾아온 것도 중요한 일 때문인데 이렇게 막 대하면 안 된다고.”말을 마친 그는 고집을 부리며 결국 헬기에 올라탔다.반승제는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설우현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혜인이한테 아무 일 없길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설기웅은 내 손에 죽을 테니까.”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과 함께 설우현은 곧바로 그 영상을 떠올렸다. 설마 형이 복수하려는 건 아니겠지?얼른 설기웅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마음이 불안해진 설우현은 다시 나미선에게 전화를 걸었다.나미선은 전화를 아무렇지 않게 받았다.“엄마, 형님 어디 갔어요?”“네 형 성혜인 데려갔다. 인아를 괴롭혔으면 벌받아야지.”설우현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엄마고 형이고 왜 이렇게 똑똑하지 못한 일들만 하는지.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헬기가 이륙했다.그는 전화를 끊고 반승제에게 말했다.“인아가 사는 곳을 알고 있어. 형 성격상 혜인이 납치했더라도 먼저 인아 쪽에 데려갔을 거야.”헬기는 그곳으로 방향을 틀었다.10분쯤 비행했을 때 서주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거의 5일 동안 서천에 머무른 서주혁은 얻은 단서를 가능한 가장 이른 시일 내에 반승제에게 알려주려고 했다.“주혁아.”휴대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반승제의 목소리에 서주혁이 안도하며 다른 한 손으로 자료를 정리했다.“서천 쪽 병원이 바로 설씨 가문 사모님이 그해에 딸을 낳았던 곳이야. 병원에서 그 시간대에 많은 사람들을 이직시켰고 그 이직한 사람들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모두 1년 내로 죽었어.”“다 죽었다고?”반승제는 조금 놀랐다. 이는 설씨 가문의 아이가 바뀐 배후에 거대한 음
그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칫했다.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서주혁은 여전히 지도 위의 그 주소를 향하고 있었다.“그런데 혜인 씨의 기억과 주위 사람들의 기억이 맞아떨어지지 않아. 이웃의 말에 따르면 임지연과 혜인 씨는 자주 자리를 비웠다고 해. 성휘는 줄곧 밖에서 일하느라 집에 대해 신경 쓸 틈이 없었고… 그래서 난 혜인 씨 기억이 혹시 일부 조작됐거나 사라진 거로 생각해. 혜인 씨는 눈치를 못 챈 거고.”이에 따라 성혜인도 임지연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임지연을 떠올리면 기억하는 것은 오직 그녀가 성혜인을 보호하려 했다는 것과, 엄청난 사랑을 주었다는 것. 그러나 더 디테일한 부분은 기억나지 않았다.할아버지, 할머니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고 그저 자신을 싫어했다는 것만 어슴푸레 기억했다.외삼촌이 엄마를 어떻게 도운 건지도 몰랐으며 고등학생 때 외삼촌 집에 일 년간 머물렀던 곳만 기억했다.반승제의 안색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대답이 없자 전화 건너편의 서주혁이 이름을 불렀다.“반승제?”“응.”“나는 아무래도 혜인 씨가 설씨 가문의 진짜 딸 같아. 임지연은 양어머니가 아닌 친어머니이고. 아까 말랬던 미치광이가 임지연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고 했어. 그때 임지연의 곁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기 때문에 상황이 좀 복잡해서 더 구체적으로 조사하긴 힘들어. 사실 네가 나미선의 사진을 혜인 씨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알 거야. 임지연과 생김새가 똑 닮았으니까. 그리고 설 회장님과 친자확인을 해도 돼.”말을 마친 서주혁이 그제야 안도한 듯 숨을 크게 쉬었다.반승제가 출국하기 전에 맡긴 모든 일을 끝마친 셈이다.목덜미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친 서주혁은 생각했다. 이번 단서를 찾는 일은 정말 어려웠다고. 정신병원 조사를 위해서만 수십만 건의 인적 사항을 꼬박꼬박 추려내야 했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서주혁의 팀이 데이터 처리에 능하다는 것이었다.반승제와 그 뒤에 앉은 설우현 역시 이어폰을 끼고 있었
한편 헬기에서.반승제가 전화를 끊은 후 설우현은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그러나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 결국 내뱉은 한마디는 빨리 운전할 수 없겠냐는 독촉 뿐이었다.반승제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차갑게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설우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동생을 지척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 개보다 못한 놈 같게 느껴졌다.설우현은 여러 가지 감정이 밀려와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반승제는 냉담한 얼굴로 헬기를 조종하여 목적지로 향했다.“혜인이가 죽으면 설기웅도 같이 순장될 줄 알아.”그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지만 설우현은 온몸에 힘이 빠진 듯 나른해졌다.아버지께서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 말씀하셨었다. 친여동생이 살아있다면 설씨 가문의 주식은 모두 여동생에게 물려줄 것이라고.오빠로서의 그 역시도 여동생이 살아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여동생만 살아있다면 가족이 옛날처럼 화목해질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그 여동생이 성혜인이란다.성혜인은 인간관계에 있어 칼과 같은 사람이다.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성혜인은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한없이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지만 누군가 제 눈에 눈물을 내면 피눈물을 내게 했다. 그녀는 강하고 냉정하고 과감하다. 설인아와는 다르게.이런 이성적인 사람이야말로 그의 여동생이다.설우현은 울고 싶었지만 울 수 없었다. 그저 눈물이 핑 돌고 눈앞이 흐려지기만 할 뿐.생전 하나님을 믿지 않던 그는 급기야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제발 여동생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안전하기를...헬기가 별장 위로 날아올랐고 설우현은 망원경 하나를 들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반승제가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어디 있는지 봐요.”아래를 살펴보던 설우현이 눈에 띈 건 성혜인이 철장 속에 갇히는 장면이었다.“헬기 좀 낮춰봐요. 빨리요! 혜인이 강에 빠질 것 같아요!”그는 손바닥이 땀범벅이 돼서는 조급하게 소리쳤다.“헬기 낮춰봐요. 뛰어내려서 구해볼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던 부하들은 차마 설우현의 미움을 사는 행동을 할 수 없어 철장 문을 열어주었다.설우현은 성혜인을 조심스럽게 끌어안고 깨우기 위해 몸을 흔들었다.“혜인 씨.”“성혜인 씨!”그러나 성혜인은 깨지 못했다. 물속에 잠기면서 숨을 오래 참는 바람에 산소부족으로 기절한 것이었다.설우현은 서둘러 그녀를 보트에 눕히고 인중을 꼬집어 보았다.보트가 아직도 움직이질 않자 그가 고함을 질렀다.“노 저어요! 뭍으로 가라고.”몇 사람이 황급히 노를 젓기 시작했고 배는 뭍으로 향했다.설우현은 곧장 성혜인을 들어 안았다. 당장 병원으로 가려는 요량이었다.반승제의 헬기 역시 뒤뜰에 착륙했다. 헬기의 굉음에 별장 안에 있던 설기웅과 설인아가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밖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설기웅이 먼저 별장에서 걸어 나왔다. 그런 그의 눈에 띈 사람은 뜻밖에도 반승제였다.찾으러 가지도 않았는데 미리 찾아오다니.그러나 반승제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설우현을 향해 걸어갔다.그리고 성혜인을 안아 들고 아무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곧장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설기웅은 당연히 화가 났다. 이곳은 그의 구역이다. 아무도 자신을 이렇게 무시하고 마구 별장 안으로 들어설 수는 없는 것이다.“거기 서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우현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향해 내리쳤다.고통을 느낌과 동시에 입안에서 비린 맛이 났다.설기웅이 인상을 찌푸린 채 조금 전의 가격으로 깨진 이를 뱉었다.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동생이 자신에게 폭력을 쓴 건 처음이었다.줄곧 그가 형으로서 양보해 왔기에 두 형제는 어려서부터 싸운 적 없이 화목하게 지내왔다.게다가 설우현의 눈에 그는 줄곧 어른과 다름없었다.그런 동생이 밑도 끝도 없이 주먹을 휘둘렀으니 설기웅이 황당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그는 반격하지 않았다.설우현은 그의 멱살을 잡고 화를 못 이겨 부들거렸다.“형!”고함을 질렀음에도 울분이 끝까지 차올라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반승제는 성혜인을 안은 채 차에 올랐다. 운전석에 올라탄 설우현은 조심스럽게 차를 몰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백미러를 보니 반승제의 품에 안겨 있는 성혜인이 보였다.콜록콜록.성혜인이 기침하며 깨어나자 반승제가 얼른 등을 두드려주었다.“혜인아, 괜찮아?”눈을 뜬 성혜인은 눈앞이 흐릿하게 보였다. 강에 끝없이 가라앉는듯하던 느낌이 여전히 생생하여 마치 구렁이처럼 심장을 조여왔다.그 어둡고 차가운 느낌에 성혜인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바들바들 떨려왔다.반승제의 숨결을 느껴서야 조금 안도감이 생겼다.그녀는 힘껏 반승제의 품으로 파고들어 온기를 얻으려 했다.“승제 씨...”반승제는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자신의 무능함에 화도 났다. 분명 지켜줄 거라 했는데 또다시 이런 위험한 상황에 빠뜨리다니.“혜인아, 이제 괜찮아. 아무도 널 건드리지 못해.”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일 뿐 지쳐서 말할 힘조차 없었다.차는 곧 병원으로 향했고, 병원으로 옮겨진 성혜인은 정밀검사를 받았다.담당 의사가 보고서를 훑더니 말했다.“몸에는 이상이 없습니다만 당분간 몸조리 잘하셔야 할 듯합니다. 임신하셨어요.”갑작스러운 소식에 반승제와 성혜인이 모두 혼란스러워졌다.충격과 놀라움.성혜인은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야 고개를 들며 물었다.“의사 선생님, 정말이에요? 저희 항상 조심해 왔는데 그럴 리가요...”의사가 콧등 위의 안경을 밀어 올리더니 사뭇 진지하게 대답했다.“네. 틀림없습니다. 혹시 두 사람이 콘돔 없이 다른 행위를 하지는 않으셨는지요?”의사의 거침없는 질문에 성혜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성혜인은 당황하며 우물쭈물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반승제는 누군가한테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듯 어리둥절하게 서 있었다. 귓가에 윙윙 소리가 계속 울려 퍼지는 듯했다.의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혹시 아이 원하지 않는 거라면 일찍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이에 반승제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아닙니다! 그게 아니라요...”그가 조심스럽게 성혜인을
방 안이 더욱 조용해졌다.설우현은 당장이라도 성혜인에게 네가 내 여동생이라 알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사실 여동생의 얼굴을 볼 면목조차 없었다.게다가 여동생 얼굴에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남아 있다.“혜인 씨, 누가 때린 거예요?”여동생을 강에 밀어 넣으려던 부하들의 짓이라면 아주 크게 혼내줄 것이다.그러나 성혜인이 퉁퉁 부은 볼을 만지작하며 대꾸했다.“그건 우혁 씨 핏줄에게 직접 물어보세요.”태연하게 대답하는 말 속에 다른 뜻이 있었다.그 말은 수십 개의 비수가 되어 설우현의 가슴에 내리꽂혔다. 그는 마음이 아픔과 동시에 난감함을 느꼈다.형이 한 짓이었구나. 하지만 형은 종래로 여자에게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었는데...그가 손을 바들바들 떨며 성혜인의 뺨을 어루만졌다. 저도 모르게 굵은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성혜인이 깜짝 놀라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부잣집 도련님이 이렇게 우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설우현도 자신의 행동이 과했음을 인지하였다.하여 애써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참으려 했지만 눈물은 그의 마음은 알지 못한 채 하염없이 흘렀다.“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어...”설우현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성혜인이 오히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반승제의 소매를 잡고 끌어당기며 반승제가 중재해 주기를 바랐다.하지만 반승제는 조금 전의 일에 충격을 받아 이쪽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의사의 아이를 낳겠냐는 물음에 성혜인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부정적인 생각이 자꾸 뇌리를 스치니 반승제는 점점 슬퍼졌다. 결국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성혜인이 저를 위해 아이를 낳아주고 싶지 않아 한다.모두 그가 이전에 저지른 잘못 때문이니 이제 와서 만회할 수는 없었다.고개를 든 성혜인의 눈에 띈 것은 반승제의 눈물이었다.고개를 돌리니 또 마주친 것은 설우현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다.성혜인은 당황스러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반승제가 왜 우는 건지 잘 알고 있었다. 아이를 갖기 싫어한다는 사실이 그를 괴
뜬금없이 성을 내는 동생의 반응에 당황한 설기웅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설우현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온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가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물었다.“설인아는 그렇다 치고, 그럼 혜인이는 안 힘들겠어요? 오늘 하마터면 형 때문에 죽을 뻔했어요.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멍청하게 굴 거예요?”설기웅은 침대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동생이 왜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어렸을 때부터 그들은 이렇게 싸워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밤 동생은 말다툼을 넘어 주먹까지 휘둘렀다.성혜인이 대체 그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성혜인은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다. 설우현과 반승제가 중간에 끼어들어 일을 망치지만 않았다면 성혜인의 시체는 영원히 강바닥에 가라앉았을 것이다.한바탕 화를 내니 머리가 지끈했다.“형, 오늘 밤 아버지 뵈러 가요. 아버지께도 형한테도 할 말이 있어요.”전화를 끊은 뒤, 설우현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는 설기웅은 양미간을 찌푸렸다.그가 떠나려 하자 설인아가 잠에서 깨어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오빠, 가려고? 나는 어쩌고?”“안 돼. 오빠, 가지 마. 나 지금 아프단 말이야. 정말 죽을 것 같은데 날 두고 가는 거야?”설기웅이 다정하게 등을 토닥여주었다.“아버지께서 언제 깨실지 모르니까 한 번 뵈러 가는 거야.”그가 해명해서야 설인아는 안도했다.‘아, 성혜인 보러 가는 줄 알았잖아.’‘하하. 설의종은 앞으로도 영원히 깨어날 수 없을 텐데.’설인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알겠어. 오빠, 그러면 얼른 돌아와야 해.”설기웅은 고개를 끄덕이고 곧 자리를 떴다.설씨 가문으로 향하는 길, 그는 이제 설우현을 만나면 어떻게 교훈하고 야단칠지 생각하고 있었다.형에게도 모자라 여린 여동생에게까지 손을 대다니. 이건 기필코 확실히 교육하고 지나가야 할 문제였다. 반승제를 만나더니 함께 돌아버린 것인가 싶기도 했다.한시간 즘 지나서야 잔뜩 안색이 흐려진 설기웅이 설씨 가문 별장에 도착했
자동차가 지하 격투장에 멈추자 반승제는 성혜인을 업고 7층으로 향했다.그의 어깨에 기댄 성혜인은 그가 유난히 저기압임을 알 수 있었다.침대에 성혜인을 눕힌 후, 반승제는 욕조에 물을 받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그러나 욕조에 온수가 가득 채워진 후에도 그는 옆에 쭈그리고 앉아 무념무상으로 있었다.그가 유난히 욕실에 오래 있는 것 같아 잠시 들어와 본 성혜인은 깜짝 놀랐다.욕조에 물이 넘치도록 반승제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제야 반승제는 꿈에서 깨어난 듯 황급히 일어나 수도꼭지를 잠갔다.욕실 문 앞에 선 성혜인이 입을 열었다.“임신하면 반신욕도 신중히 해야죠. 오늘은 안 할래요.”그가 멈칫하더니 다시 엉거주춤 욕조 물을 뺐다.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이 반승제를 더 긴장하게 했다.그러나 그는 무어라 먼저 말을 꺼낼 자격이 없었다. 그는 성혜인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러나 아이가 찾아온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원했다.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었다.그가 다른 한쪽의 노즐을 열어 물의 온도를 조절했다.“가운은 선반 위에 있어. 먼저 씻고 있어. 난 다른 욕실에서 씻고 올게.”성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반승제가 가고 난 뒤, 성혜인은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그리고 욕조에 발을 담그고 반승우가 남긴 주소, BKS, 그리고 그들에게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는 연구기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그녀는 아직 임지연도 찾지 못했고 해야 할 일도 산더미였다. 그리고 미스터 K가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를 약점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성혜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수도꼭지를 잠갔다.한편 다른 욕실에 있는 반승제는 마음이 복잡했다. 성혜인이 아이를 없애겠다고 선언하면 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막막했다.그가 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오니 성혜인은 이미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손에 책을 들고 대추를 입에 넣었다.“승제 씨, 제가 돌
공지민은 여전히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감정의 흔들림조차 없는 차분한 모습이 오히려 더 사람을 화나게 했다.온시환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소파에 밀어 눕히며 말했다.“너는 침대에 있을 때만 겨우 말을 좀 듣더라.”공지민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고 그저 입가에 조소를 띄웠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네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 정도야?’그녀의 반응에 온시환의 자존심은 철저히 짓밟혔다. 그는 그녀 위에서 몸을 일으켜 서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바닥에는 정성스럽게 준비했던 고급 디저트가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고 거실 테이블은 한쪽으로 넘어가 엉망이었다.온시환은 갑자기 답답한 마음이 몰려왔다. 반승제가 이 집 디저트가 아주 맛있다고 추천했기에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자 사 온 건데, 그녀의 마음을 얻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공지민은 정말 마음이 없는 걸까.그는 아무 말 없이 큰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 표정만 봐도 오늘 밤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그제야 숨어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럽게 나와 어지럽혀진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을 움직이며 공지민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말했다.“지민 씨, 사실 시환 씨가 당신한테 잘하려고 애쓰는 거예요. 조금만 부드럽게 대처하면 덜 힘들 텐데요.”공지민의 턱에는 손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방금 온시환이 얼마나 강하게 그녀를 잡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하지만 공지민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정부에게 짧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뒤 차에 올라 고등학교로 향했다.그곳은 제원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녀는 염정아의 집 앞에 서서, 과거의 기억이 더욱 선명해지는 걸 느꼈다. 마치 어둠 속의 작은 틈에서 모든 걸 끄집어내는 듯했다.깊게 숨을 들이쉰 그녀는 문을 두드렸다.염정아가 바로 허벅지 안 쪽에 빨간 꽃 모양의 반점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 번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 묵었을 때 우연히 보게 되었다. 너무나 독특했기에 그
구은우처럼 좋은 사람이 왜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해야 했을까?공지민은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복수심으로 가득 찼고 구은우를 해친 모든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서두를 수 없었고 우선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야 했다.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사찰을 떠난 순간 온시환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어디야?”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퍽 다정했다. 아마 어젯밤의 만족감 때문인지 약간의 웃음기가 깃들어 있었다.공지민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그때의 거래는 여전히 유효한 건지, 구은우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언제쯤 말해줄 건지.그러나 연씨 가문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할 수 없었다.“곧 돌아갈게요.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러야 할 일이 있어요. 친한 친구가 우울증으로 힘들어해서요, 한번 가서 보려고요.”“그래? 그럼 내가 데려다줄게.”“아니요, 이건 제 일이에요. 시환 씨는 그냥 은우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조사해주시면 돼요.”온시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공지민의 눈에 조소가 스쳤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공지민이 찾아가려던 고등학교 친구는 그녀와 함께 괴롭힘을 당했던 사람이었다. 그 친구는 원아정 일당이 공지민을 표적으로 삼기 전까지 주된 괴롭힘의 대상이었다.말하자면 공지민이 그녀를 구한 셈이었지만 그녀의 정신 상태는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있었다.친구의 이름은 염정아였고 삶은 공지민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가족은 극단적으로 남아선호 사상을 따랐고 그녀는 언제나 동생을 위해 모든 것을 양보해야 했다.염정아의 남동생은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항상 입가에 침을 흘리고 있었다. 키는 187cm나 되는 거구의 남자였지만 하루 종일 입을 비죽이며 웅얼거리는 모습이었다.어느 날 그녀의 부모는 염정아에게 충격적인 요구를 했다. 동생의 아이를 가지라는 것이었다.그 충격적인 요청에 염정아은 공지민에게 전화했지만
만반의 준비를 마치기 전까지는 휘말리고 싶지않았지만 구은우의 유골을 돼지에게 먹였다는 말을 듣는 순간 공지민의 눈동자는 크게 흔들렸고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공지민의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자 원아정은 그녀의 반응을 즐기는 듯 더욱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당시 구은우의 유골함이 해외로 옮겨졌다고 하지 않았어? 사실은 그 남자가 구은우를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결국 그건 아내가 자기를 배신한 증거였으니까. 내가 돈 몇 푼 쥐여주니까 곧바로 나한테 유골을 팔더라.”공지민의 입술이 떨리며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그녀는 원아정의 손목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그대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원아정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뺨을 맞았다. 그녀는 분노와 충격으로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너 따위가 감히 날 때려?”고등학교 때 그녀 앞에서 무릎 꿇고 빌었던 걸 벌써 잊은 걸까?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지민은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퍼부었다. 분노에 휩싸인 그녀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보였다.사찰 내부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몰려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정숙도 현장에 도착했다.안정숙은 두 사람을 쏘아보며 차갑게 물었다.“여기서 무슨 짓들을 하는 거야?”원아정은 마치 피해자인 양 금세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할머니, 제가 고등학교 동창이랑 조금 오해가 있었어요. 그런데 얘가 갑자기 저를 때리고 발길질을 했어요.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얼굴이 너무 아파요.”원아정의 뺨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반면 공지민은 겉보기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이 때문에 상황은 자연스레 원아정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안정숙은 눈썹을 찌푸리며 공지민을 바라봤다. 더 이상 이전의 인자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공지민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원아정을 노려보았다. 원아정의 눈빛에는 조소와 함께 승리의 기쁨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사찰을 떠났다.차에 올라서도 원아정이 한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
공지민은 온시환과 함께 차에 올랐다. 의자에 기대앉은 그녀는 머릿속에 온통 연승혁의 실종된 누나에 관한 생각뿐이었다.그 누나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만약 그녀를 찾아낸다면 연씨 가문에 접근할 기회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온시환은 그녀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너 요즘 뭔가 고민이 많은 것 같아.”“아니에요.”온시환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아니라고? 그냥 나한테 말하고 싶지 않은 거 아니야? 네가 파티에 가고 싶다고 해서 데려갔고, 네가 원하는 걸 다 들어줬어. 그런데 내가 얼마나 더 비참하게 굴어야 해? 나한테도 좀 웃어주면 안 돼?”그의 목소리에는 원망이 가득했고 손아귀의 힘이 점점 강해졌다.눈살을 찌푸린 공지민은 그를 달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몸을 기울여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온시환은 그녀의 뒤통수를 잡아 깊은 키스를 이어갔다.둘은 몇 분간 키스한 뒤에야 숨을 고르며 멈췄다.밤이 되자 두 사람은 씻고 난 뒤 자연스럽게 관계를 가졌다. 공지민은 그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온시환의 눈빛에 담긴 진심 어린 애정을 보면서도 그녀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연승혁에 대한 일을 속이며 자신을 기만했던 이 남자를 왜 동정해야 할까?무엇보다 온시환이 동정이 필요한 사람인가? 예전에 그를 위해 눈물 흘렸던 여자가 얼마나 많았던가. 이건 단지 그의 업보일 뿐이었다.다음 날 아침, 공지민이 눈을 떴을 때 온시환은 이미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옆에 남겨진 메모에는 그녀에게 푹 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곧바로 씻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목적은 연씨 가문의 노부인을 우연히 만나는 것이었다.전날 밤, 그녀는 안정숙이 최근 몸 상태가 조금 나아져 근교의 사찰에 들러 기도를 드린다는 정보를 얻어냈다.공지민은 차를 몰고 산길을 따라 사찰에 도착했다. 일부러 안정숙보다
강민지와 대화를 마친 후, 공지민은 눈에 띄지 않는 한쪽 구석에 앉아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온시환은 이미 누군가에게 끌려가 술을 마시고 있었고 떠나기 전 공지민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주며 자리를 벗어나지 말라고 당부했다.소파에 앉아 있던 공지민의 시야에 원아정과 몇몇 여성이 들어왔다. 원아정은 마치 공지민을 못 본 척 지나치려는 듯했지만 그녀 옆의 몇몇 여자는 공지민이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원아정의 곁을 맴돌던 오예슬이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오예슬은 공지민이 온시환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공지민을 보자마자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어머나, 아정아, 저기 좀 봐. 저 사람 우리 고등학교 때 제일 인기 많았던 공지민 아니야?”오예슬은 거의 뛰다시피 공지민 앞으로 다가가선 위압적인 태도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공지민,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설마 여기 직원으로 지원하려고 온 건 아니겠지?”공지민의 옷차림을 보면 그런 말이 어불성설이었지만 오예슬은 그녀를 비하하고 싶어 일부러 그런 말을 내뱉었다.공지민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예슬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공지민을 괴롭히며 쾌감을 느껴왔고 지금의 무시당하는 태도는 그녀에게 모욕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과거 공지민이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손에 들고 있던 술을 공지민에게 그대로 부어버렸다.공지민은 피할 새도 없이 머리에 술을 뒤집어썼다.“어머, 미안해. 내가 잔을 제대로 못 들었나 봐.”오예슬은 원아정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에 이런 행동을 했고 이는 과거에도 그녀가 원아정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주 하던 짓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공지민을 굴욕 주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원아정에게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려 돌아섰다.하지만 공지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오예슬의 머리채를 잡아끌며 발
원아정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마치 친한 친구인 양 공지민의 팔짱을 끼었다.“그럼 다행이네.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것도 내 생일 파티에서라니 정말 놀랍다. 앞으로 자주 보자. 나도 제원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그래도 우리는 서로 잘 아는 사이잖아.”“좋아.” 공지민은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온시환은 공지민의 허리를 감쌌다. 그녀가 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바랐다. 그래야 그녀가 구은우의 일은 조금이라도 덜 떠올릴 테니 말이다.구은우의 사건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밝혀진 건 연승혁이 배후라는 것뿐이었다. 연승혁은 현재 굉장히 높은 지위에 있었고 그를 건드린다면 필연적으로 원씨 가문까지 적으로 돌리게 될 터였다. 두 가문이 힘을 합친다면 온시환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공지민이 잠시라도 구은우를 내려놓고 평온히 지내기를 바랄 뿐이었다.원아정은 고개를 숙여 공지민의 귀에 속삭였다.“몇 년 못 봤는데, 그새 너 남자 꼬시는 재주가 이렇게 늘었을 줄은 몰랐네. 죽어서 바다에 가라앉은 은우가 이 꼴을 보면 편히 눈을 감을 수나 있을까?”가볍게 상처를 후벼 파는 말이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너도 이제 곧 결혼하잖아. 과거의 남자에게 얽매이는 건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닌 것 같은데?”원아정의 얼굴에 미소가 굳고 입술이 살짝 일그러졌다.공지민은 손에 든 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승혁 씨 같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를 자꾸 떠올리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거야. 넌 원씨 가문에서도 딱히 기댈 곳이 없어 보이던데. 원진 씨가 너에게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더라고.”이 일은 모두가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원진은 철저하고 냉혹한 사람으로,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원진에게 반감을 품은 이들도 많았다.원아정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대신 네가 시환 씨랑 이혼하고 나서 어떻게 살지나 잘 고민해.”그녀는 그
온시환은 단지 그녀가 식견을 넓히려 한다고만 생각할 뿐,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밤이 되어 두 사람이 잠자리에 들 때, 온시환은 그녀를 품에 안고 천천히 그녀의 옷 끈을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지민은 몸을 돌리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싫어요.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온시환의 순간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서두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짧게 대답했다.“알았어.”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에 들었다.원아정의 생일 파티는 초대받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공지민은 몇몇 스타일리스트에게 둘러싸여 오늘 밤을 위한 스타일링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밤 원아정을 만나면 상대가 얼마나 화를 낼지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일 파티인 만큼 원아정이 직접적으로 화를 내지는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위에 원진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공지민은 이 며칠 동안 온시환에게 원진에 대해 물어보며 정보를 얻어냈다. 원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원진을 두려워했고 원아정도 예외는 아니었다.원진이 있는 한 원아정이 함부로 굴 수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오늘 밤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자리라 원진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했다.먼저 스타일링을 마친 온시환은 공지민이 몸에 꼭 맞는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자 순간 눈빛이 반짝이며 숨소리마저 떨렸다. 매끈한 허리선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였다.“지민아, 오늘 정말 아름다워.”온시환은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공지민은 말없이 그와 함께 차에 올랐다.원씨 가문의 저택은 제원에 위치해 있었는데 몇 년 전에 구매한 곳이라고 했다. 오늘 밤의 파티는 바로 그 저택에서 열리고 있었다.공지민은 온시환의 손에 이끌려 차에서 내렸다. 저택 입구에 주차된 화려한 차들을 보니 이 파티의 주최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린 공지민은 온시환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화려한 홀 안에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대화가
오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지민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야. 은우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나도 알아. 사실 난 한 번도 잊어본 적 없어. 오늘 밤 원아정을 만나고 은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아? 그런데 넌 이런 세월을 어떻게 견뎌왔을까? 너라는 애는 참으로 밉지만 그래도 넌 진심으로 은우를 좋아했잖아. 은우는 한때 네 사람이었고, 넌 나보다 천 배는 더 괴로웠겠지... 미안해.”그 말을 끝으로 오하윤은 자리를 떠났다. 가슴은 여전히 저릿저릿했다.만약 자신이었다면 그녀는 아마 절망 속에 빠졌을 것이다.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오하윤은 먼 곳을 바라보며 인생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느꼈다. 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는 걸까...한편, 공지민은 자리에 앉아 말없이 주스가 담긴 컵만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공지민은 입술을 감쳐물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온시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지금은 꽤 늦은 시간이었다. 그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온시환과 연승혁이 친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공지민은 그가 왜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그의 친구에게 복수할까 봐 두려운 게 아니겠는가.‘남자는 결국 믿을 게 못 돼.’가슴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다시는 온시환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공지민은 끝내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다.온시환은 한참 기다리다가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냈다.[나 화나게 하지 마. 구은우의 일은 아직 조사 중이니까, 너도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마.]그 메시지를 읽은 공지민은 어이가 없었다. 온시환은 분명 누가 구은우를 해쳤는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녀를 계속 속이려는 것이 뻔했다.공지민은 속눈썹을 지그시
반승제는 순간 멍해졌다. 예전 일을 떠올리려 했지만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저 자신은 성혜인을 선택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뿐이었다.“시환아, 내 충고를 하나 하자면, 진심으로 지민 씨를 감동시키는 데 집중해. 억지로 잡으려고 하다간 너도 서주혁처럼 될 거야.”온시환은 순간 말을 잃었다. 사실 그도 두려웠다.하지만 공지민은 죽은 사람에게 마음이 묶여 있는 데다 자신의 진심 따윈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았다.반승제가 전화를 끊자 온시환은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잠시 후, 그는 자신의 부하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그렇게 공지민은 바로 오하윤을 만나러 갔다.오하윤은 그녀에게 과일 주스를 따라 주며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나 오늘 원아정 만났어. 너도 기억하지? 고등학교 때 널 화장실에 가둬놓고 물을 끼얹으라고 시킨 애 말이야.”공지민이 원아정을 잊을 리 없었다. 원아정은 모든 악몽의 시작이었다.그때 원아정은 화장실로 그녀를 몰아넣고 옷을 벗기라고 명령했으며 사진을 찍어 협박했다. 그 이후 괴롭힘은 점점 더 악랄해졌다.공지민은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저 묵묵히 참으면 지나갈 거라 믿었지만 어느 날 원아정은 의자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며 명령했다.“공지민, 너랑 은우가 원래 아는 사이라며? 지금 무릎 꿇고 빌어. 안 그러면 네 사진을 모두에게 뿌려서 네가 어떤 년인지 보여줄 거야.”그녀는 그런 고등학생은 본 적이 없었다. 고고한 척하면서도 잔인했고 사람을 완전히 조롱거리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원아정은 재벌가 출신으로 모두가 그녀를 피했다. 항상 고급 외제차가 그녀를 데리러 왔고 때로는 경호원까지 동원되었다. 그녀와 비슷한 수준의 친구들조차 그녀의 괴롭힘을 부추겼다.만약 구은우가 없었다면 공지민은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그때 원아정 앞에 무릎을 꿇고 개처럼 용서를 구했다.이후 구은우가 원아정에게서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