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누구지? 설마 예전에 같이 도망갔다던 그 사람인가?’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만약 그가 나미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세 아이를 낳을 수가 있겠는가?“콜록.”설의종은 단기간에 기력이 모두 소진된 듯 여전히 기침하며 흐릿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우현아, 네가 직접 동생에 대해 알아봐. 만약... 운 좋게 아직 살아있다면 설씨 가문의 모든 지분을 그 애한테 넘겨줄 거다. 남은 여생 먹고 살 걱정이 없었으면 좋겠어. 콜록.”“아버지, 일단 진정하세요.”설의종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날 원망하지 않느냐?”그의 말대로라면 두 아들은 지분이 아닌 다른 재산만 얻을 수 있다. 이 사회에서 딸은 대부분 혼인에 이용되는 존재였고, 그만큼 사람들은 딸을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여겼다.어쩌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모든 지분을 물려주려고 하는 거나 다름없다. 설우현도 사람인데 어찌 불만이 없겠는가?“원망 안 해요. 전 아버지가 얼른 건강을 되찾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동생도 마찬가지고요. 비록 살아있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지만...”“반 대표를 한번 만나봐. 진세운이 뭔가 수상하다고 알려준 사람이 반대표거든. 차라리 그게 사실이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친자 확인이 조작됐을 수도 있잖아. 어쩌면 우리 딸이 살아있을 수도 있어.”설우현은 손을 들어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네, 한번 만나보고 올게요.”설의종은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지만 그럼에도 입안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설우현이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찰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설기웅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수신 버튼을 누르자 곧이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현아, 인아가 지금 많이 위태로워. 죽기 전에 꼭 아버지를 뵙고 싶대.” 설우현은 동공이 급격하게 움츠러들었다.“위태롭다뇨?”설기웅은 고통스러워하며 병원 복도에 기대어 있었다. 설인아는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고, 어쩌면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는 게 의사의 소견이었다. 그
설의종은 또 피를 토했고, 어찌나 허약한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나미선은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안방으로 왔는데, 오자마자 설인아가 곧 죽을 거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동안 많은 사랑을 주었던 아이가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게 된다는데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우현아, 얼른 네 형한테 전화 걸어서 인아랑 같이 오라고 해. 어쩌면 네 아버지를 만나면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도 몰라.”설의종의 입장에서 이 모든 일을 바라보자 설우현은 안타까운 마음에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설인아가 살아남았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다. 진정한 여동생은 행방조차 모르는데...이 집안에서 여동생의 생사를 걱정하는 건 설우현과 설의종 둘 뿐이다.그러나 결국 그는 전화를 걸었다.아니나 다를까 설기웅은 곧바로 설인아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설인아는 걷는 것조차 힘든지 설기웅의 등에 업혀있었다.그녀는 설의종의 침대 옆에 앉게 되었고, 마치 언제라도 눈을 감을 듯 힘겨워 보였다.“아버지랑 단둘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일단 잠깐만 자리를 비켜주세요.”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나갔고, 방문은 굳게 닫혔다.설의종은 침대 옆에 기대어 냉담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설인아는 사악함이 가득 찬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그녀는 지금 당장 설의종을 죽이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설씨 가문은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고 앞으로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설기웅과 나미선은 그녀의 편이니까.설의종은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나 다름없다.솔직히 설인아도 그 남자가 어떻게 했는지 몰랐다. 의사의 거짓 증언을 받아냈을 뿐만 아니라 아주 그럴싸한 핑계를 댔으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그가 준 약을 먹은 게 신의 한 수인 듯싶다. 먹자마자 허약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변했다.죽기는커녕 설인아는 끝까지 살아남겠다고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아버지, 저를 보고 싶지 않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이 일은 꼭 바로 잡
설인아의 연기력은 정말 대단했다. 게다가 언제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은 허약하기 그지없었고 독을 탈 만한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모습이었다.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잠깐 주춤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검사를 맡겼다.설인아는 여전히 설기웅의 품에 안긴 채 눈물을 펑펑 쏟았고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몸마저 덜덜 떨었다.옆에 있던 나미선은 마치 설인아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듯 옆에서 끊임없이 위로 하고 있었다.곧이어 의사가 부랴부랴 달려와 설의종의 병세를 살폈고, 그 와중에도 설우현은 절대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아버지 상태가 좀 어떤가요?”“일시적인 호흡곤란이 온 것 같습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다른 증상은 없나요?”“네, 없습니다.”그 말이 끝나자마자 설인아은 설기웅의 옷깃을 덥석 잡았다.“오빠, 저 이제 그만 갈래요. 아버지는 절 보기만 해도 화가 나나봐요.”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자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듯 처량해 보였다.설기웅은 한숨을 내쉬더니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을 시켜 그녀를 데려다줬다.설의종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지금, 장남인 그가 자리를 비우는 건 파렴치한 행동이니까.설기웅의 별장으로 돌아온 설인아는 만족스러운 듯 눈빛이 사악하게 돌변했다.그녀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남자에게 연락했다.“한 방울만 마셨고 나머지는 전부 피부에 닿았어요. 이래도 효과가 있을까요?”“네, 한 방울도 아주 치명적이어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겁니다.”설의종은 순간 두 눈이 반짝 빛났다. 그 남자가 약을 건네줄 때 아주 독하다고 강조해서 그런지 이런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잘됐네요! 그럼 평생 깨어나지 못한다는 말이죠? 이제 오빠가 성혜인을 상대하는 일만 남았네요? 성혜인이 죽으면 어차피 아무도 설씨 가문의 딸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 거예요. 그때쯤이면 오빠랑 엄마가 저를 설씨 가문으로 데려가겠죠?”여러 사람에게 강간당한 일은 이미 소문이 잔뜩 퍼졌기에 나미선과 설기웅은 그녀를 무척이나
“형, 전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었잖아요. 우리 진짜 여동생이 아직 살아있다면 설씨 가문의 주식을 모두 여동생에게 넘겨주고 남은 재산을 우리한테 주겠다고요.”최근 몇 년간 설기웅이 회사를 맡았고 게다가 주가가 계속 상승하였으므로 플로리아 상권에서 회사의 명성은 제원에서의 반승제와 비슷했다.설기웅은 회사를 위해 많은 것을 바쳤다. 그럼에도 주식을 하나도 갖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겠는가.그러나 다행히도 설기웅은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깨어있는 사람이었다.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랬지.”설우현이 이어서 말했다.“지금부터 형과 저, 그리고 제 사람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아버지를 뵈러 올 수 없게 해요. 형도 어머니께 말씀 좀 전해주세요.”설기웅이 고개를 끄덕였다.설우현은 가문 사람들을 병원에서 지키게 한 뒤 플로리아의 그레이 지대를 향해 차를 몰았다.그레이 지대는 무법천지인 곳으로 지하 격투장이 있는 곳이다.시 중심과 거리가 꽤 있었기에 그는 세 시간 동안 운전해서야 도착했다.가면을 쓰고 내부로 들어가서야 그는 이곳이 얼마나 어둡고 밑바닥인 곳인지 알게 되었다.전에 한 번 와본 적은 있었다. 당시 많은 내로라 하는 가문들이 이 지역을 놓고 경쟁했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갔지만. 성인이 되었을 때 몰래 들어가 본 이곳은 외부와 아예 다른 세상이었다.그레이 지대는 본디 건달과 깡패들이 날뛰는 곳이므로 소란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누군가 도를 넘는 큰일을 저지르면 이틀 내로 이곳에서 사라지게 된다.그레이 지대는 격투장에서 관할했고, 총격전이 벌어지면 격투장이 앞장서서 파벌을 처리했다.다른 것에 대해서 격투장은 절대 관여하는 일이 없다. 그것은 개인적인 원한이므로 관여할 이유도 없다.하기에 이름난 가문의 자녀들이라면 이곳에는 오지 않았다. 이곳은 사념이 있는 사람들만이 출입하는 곳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책임은 모두 자신에게 있다.문을 열고 들어간 설우현의 눈에 띈 건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었다.장미의 손에는 고대 자
왜 설인아를 구해주지 않느냐 물으려던 그가 멈칫하더니 결국 입술만 몇 번 짓씹었다.어찌 되었든 성혜인에 대한 설인아의 행동은 매우 비열했다. 결국 성혜인의 눈까지 멀게 했었지.결국에 애인을 해친 사람이니 구하든 말든 모두 그의 선택인 것이다. 아무도 탓할 수도 나무랄 수도 없는 것이다.결국 설인아가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닌 운명일지도.설우현의 시선이 느껴진 듯 성혜인이 고개를 들어 몇 초간 그와 눈을 맞추다 생긋 웃었다.“설우현 씨, 오랜만이에요.”설우현의 몸이 저도 모르게 굳었다. 형용할 수 없는 친근감, 익숙함 같은 감정이 또다시 밀려왔다.그는 처음 성혜인을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었다. 지금까지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몇 마디 인사를 나누려고 할 때 성혜인의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아보니 스승 주영훈이었다.주영훈은 영감을 얻기 위해 세상과 담을 쌓고 집 문을 걸어 잠그곤 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작품이 나와서야 외부와 연락을 시작했다.그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제원에서였다. 당시 반승제는 그녀의 신분을 몰랐었다.성혜인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스승님?”“혜인아, 너도 플로리아에 왔더냐?”주영훈의 목소리가 들떠있는 듯했다.“그럼 지금 시간 되느냐?”성혜인은 생각에 잠겼다. 반승제와 함께 그곳으로 출발하려면 적어도 모레가 되어서야 가능했다. 그러니 오늘과 내일은 모두 시간이 넉넉한 셈이다.“네. 오후에 바로 만날 수 있어요.”주영훈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주소를 보냈다.반승제에게 설명한 뒤에야 그는 주영훈이라는 사람을 기억해 냈다.하지만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럼 경호원이랑 같이 가.”“좋아요.”차에 오른 성혜인은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전에 스승님과 만났을 때도 그는 과제 상황을 확인했었다.그러나 최근 반년 이래 일어난 일들이 너무 많았기에 그림에 손을 대지 못한 지 오래였다.주영훈은 밖에서 자신의 마지막 제자가 얼마나 우수한지를 자랑하곤 했다. 그는 성혜인
혼자가 아니라 곁에 경호원 두 명을 거느렸다 한다. 경호원들은 단연 실력이 높은 사람들이다.성혜인이 혼자 외출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그는 두 경호원에게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보호하라고 일러두었다.구사일생하며 많은 일을 겪어온 성혜인 역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레스토랑 1층 로비에 들어서려는데 탐지기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에 웨이터가 두 경호원을 향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손님, 죄송합니다만 무기는 가지고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두 경호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 레스토랑에는 줄곧 이러한 규칙이 존재했다. 하여 이곳은 플로리아의 거물들이 협상을 하는 가장 애용하는 장소이기도 했다.무기는 물론 휴대폰 역시 반입할 수 없으며 따로 보관하는 곳이 존재했다.두 경호원이 성혜인을 가로막고 신중하게 말했다.“아가씨, 스승님과 다른 곳에서 약속을 잡는 건 어떠신지요? 이 레스토랑 규칙이 원래 이러합니다. 어떠한 물건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다른 사람들도요?”“네.”잠시 머뭇거리던 성혜인이 휴대폰을 꺼내 주영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연하게도 주영훈은 받지 않았다.이제 와서 장소를 바꾸기도 어려우니 결국 레스토랑의 규칙을 따를 수밖에.“괜찮아요. 모두가 지키는 규칙이니 저희도 지켜야죠.”성혜인이 자신의 휴대폰을 건넸고, 뒤에 있던 두 경호원도 마지못해 총과 단검, 휴대폰을 건넸다.로비로 들어선 성혜인이 설기웅을 보게 되었을 때, 심리적으로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생겼다.성혜인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섬과 동시에 뒤의 대문이 쾅 큰 소리를 내며 닫혀버렸다.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린 그녀는 설기웅과 불필요한 마찰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다른 쪽의 계단으로 올라가려 했다.그러나 곧이어 주변에서 30여 명의 무장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그녀와 두 경호원을 에워쌌다.그제야 성혜인은 설기웅이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설 대표님,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전에 설인아와 좋지 않은 일이 있긴 했지만,
“지금 당신을 데리고 인아 만나러 갈 거니 무릎 꿇고 직접 사과하세요. 그럼 시체라도 온전히 남겨드리려니까.”성혜인은 웃음을 터뜨리려 하는 찰나 설기웅이 우악스럽게 목을 졸랐다.“인아가 그렇게 됐는데 지금 웃음이 나와? 양심도 없는 미친 년이네, 이거.”성혜인이 그를 차갑게 바라보더니 씩 웃었다.“설 대표님, 저는 당신 친여동생이 참 측은해요. 그래도 당신들을 보러 가지 못해서 참 다행이죠. 이런 악랄한 짓을 하는 당신의 얼굴을 보면 얼마나 역겹겠어요.”설기웅의 손이 저도 모르게 바들바들 떨렸다. 마음이 무언가에 찔린 듯 불편했다.그러나 그는 자신을 위한 변명을 했다. 지금의 불편한 마음은 모두 성혜인 때문이라고. 성혜인이 괜히 이상한 말로 자신의 마음을 후벼파는 것이라고.“이제 죽기 직전에도 이렇게 자신감 넘치나 보자.”그는 성혜인을 홱 놓아주고 한쪽에 조용히 앉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혜인 역시 그를 상대하기 싫기는 마찬가지였다. 말할수록 짜증이 나는 상대였다.차는 곧 설인아가 사는 곳에 멈췄고 몇 명의 경호원이 그녀를 결박한 채 차에서 내렸다. 설기웅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 설인아의 상태를 보려 했다.설기웅이 올 것을 미리 짐작한 설인아는 불쌍해 보이도록 몸을 한껏 움츠려 앉았다. 발갛게 부은 눈과 마구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그녀의 정신상태가 온전치 않아 보이도록 했다.그녀를 본 설기웅이 그녀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인아야!”천천히 고개를 들어 오빠를 확인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오빠, 나 너무 무서워. 눈만 감으면 그 남자들 얼굴이 아른거려. 아버지도 날 보고 싶지 않아 하시는데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집에 가고 싶어... 흑흑. 우리 가족 이제 다시 예전처럼 화목하게 지낼 수는 없는 거야? 오빠...”설인아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경호원들에 의해 끌려오는 성혜인을 발견했다. 그녀는 갑자기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설레서. 너무 기뻐서 떨린 것이었다.줄곧 설기웅이 얼른 성혜인을 처리했으면 좋겠다
설인아가 오빠의 팔을 껴안았다.“역시 오빠가 날 제일 사랑해. 오늘 밤부턴 악몽 안 꾸게 될 거야! 오빠, 고마워.”그녀는 설기웅의 품에 안겨 입꼬리를 올렸다. 뒷마당의 불빛이 설인아의 얼굴을 훤히 비추었다. 성혜인은 그녀가 얼마나 의기양양한지 표정을 두 눈 똑똑히 볼 수 있었다.하지만 상관없다. 오늘 밤 여기서 정말 죽게 된다면 앞으로 평생 이 두 사람의 얼굴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두 경호원은 철장을 잠근 뒤 설기웅의 명령을 기다렸다.설기웅은 조금 망설였다.그는 항상 자신에게 묻곤 했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말이다.그러나 그는 한 가정의 오빠로서 가족을 지킬 의무가 있다. 설인아는 그의 가족이며 성혜인은 남이다.“사장님, 배를 강 중심으로 몰고 내려간 뒤에 밀어버릴까요?”설기웅이 입을 뻐끔거렸다. 차마 그러라는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그의 망설임을 보아낸 설인아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렸다.이 모습에 설기웅은 순간 결심을 굳혔다.“밀어버려.”“예.”경호원 몇 명이 철장을 보트 위로 올렸다. 보트를 타고 수십 미터를 나간 뒤 철장을 밀어버리려 했다.기슭과 인접한 곳은 강물이 너무 얕기 때문에 확실히 죽이려면 강 중심으로 나가야 했다.보트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설기웅은 자신의 심장이 무언가에 의해 끝없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 공포감이 순식간에 설기웅을 덮어버렸다.문득 어렸을 때 설의종이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네 동생은 몸이 안 좋아. 처음 태어났을 때도 고생했으니 앞으로 양보 많이 해야 해. 알겠니?”“아버지, 그럼 여동생이 잘못하면요?”“네 가족인 이상 절대 잘못하지 않을 거야.”“그럼 저와 우현이가 잘못한다면요?”“벌을 받아야지. 너흰 오빠로서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니.”이 철칙은 설기웅의 뼈에 새겨지다시피 했기에 몇 년 동안 그는 무조건 여동생이라면 감싸고 돌고 도왔다.설인아가 밖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든 간에 그는 설인아를 위해서라면 어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