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습니다. 최면을 건 그 사람보다 더 대단한 최면술사를 찾는 것밖에는요. 지하 격투장에서 오랜 시간 몸을 담갔지만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인상 깊었던 최면술사는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혜인 씨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아마 전 세계 탑 5위안에 드는 실력을 가졌을 겁니다. 이런 분들은 보통 일찍이 나라에 편입되어 저희 같은 사람들은 접근할 수조차 없을 겁니다.”반승제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알겠어요.”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반승제는 문을 열고 성혜인의 곁으로 다가갔다.그 시각 잃어버린 핸드폰 때문에 여전히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성혜인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섰다.“혜인아, 우리 영화 보러 갈까?”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반승제는 그녀를 품에 안고 넓은 거실로 걸어갔다.소파에 앉은 성혜인은 환경이 주는 위압감에 불편함을 느꼈다.“보고 싶은 영화 있어?”성혜인은 대답할 수 없었다. 반승제가 좋아하는 걸 보려고 했지만, 그가 뭘 좋아하는지조차 몰랐고 나아가 두 사람이 영화를 봤던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영화는... 보고 싶지 않아요.”“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모르겠어요.”그녀는 정말로 몰랐다. 마치 혼돈의 방에 갇혀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 자아 인식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그럼 놀러 가자.”반승제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혔다.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가면을 쓴 수많은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고 극소수만이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성혜인은 무의식적으로 반승제에게 바짝 붙은 채로 걷다가 어느새 긴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귓가에 들리는 건 사람들의 열띤 토론과 주사위를 던지는 소리뿐이었다.그녀는 반승제의 다리에 앉게 되었고, 그의 맞은편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칩이 놓여있었다.“혜인아, 예전에 제원에서 텍사스 홀덤 했었는데 기억나?”“기억나요.”당시 놀이꾼이었던 반승제는 성혜인이 자신의 아내인 줄 모르고 있었다.“진
반승제의 품에 안긴 채로 잠이 든 성혜인은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이때 문을 지키던 경호원이 다가왔다.“대표님, 혜인 씨 핸드폰 수리 완료됐습니다.”반승제는 핸드폰은 손에 쥐고선 생각에 잠겼다.“혜인 씨의 핸드폰에는 모든 정보를 삭제하는 프로그램이 깔려 있었고, 해커를 동원했지만 데이터를 복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것저것 삭제하고 나니 그저 평범한 핸드폰이 되었습니다.”“그래.”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반승제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사람을 시켜 배현우를 데려왔다.배현우는 기억을 찾겠다는 핑계로 최근까지 7층 이곳저곳을 배회하고 있었다.이렇게 넓은 아량을 베풀었는데도 아무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더 이상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방으로 들어온 배현우는 그의 곁에 있는 성혜인을 보고선 눈썹을 치켜올렸다.반승제는 소파에 앉아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기억나는 게 있어?”배현우가 자연스레 그의 곁에 앉자 반승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야, 내가 지금 너랑 장난하는 것 같냐? 놀러 왔어?”그 시각 배현우의 시선은 성혜인을 향해 있었다.“혜인이한테 무슨 일 있는 거야?”반승제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네가 묻는 거야? 아니면 우리 형?”배현우는 혼란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그렇게 서로 대치한 상태로 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 반승제가 입을 열었다.“최면에 걸렸어. 날 잊은 건 아니지만 예전 같지 않아.”배현우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앞으로 다가가 상태를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반승제가 얼마나 난폭한 인간인지 잘 알고 있어 성혜인으로부터 1미터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최면?”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답했으나 그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약물 섭취하게끔 유도하면서 동시에 최면을 걸었어. 그 인간들이 자주 쓰는 수법이지.”배현우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반승우가 깨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매번 성혜
반승제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며 성혜인을 품에 안았다.배현우가 시끄럽게 떠드는 와중에도 성혜인은 잠에서 깨기는커녕 그의 품을 비비적거리며 더 파고들어 가 색색거렸다.배현우는 씩씩거리며 자신의 다친 손을 거들먹거리며 다그쳤다.“반승제, 너 정말 더 안 물을 거야? 네 형 성혜인을 포기한 게 아니라 분명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라고. 혜인을 볼 때마다 이렇게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나까지 느껴지는데 지금 그런 남자를 옆에 두겠다는 거야? 심지어 반승우는 성혜인의 첫사랑인데? 내가 너였다면 반승우가 사라지게 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거야. 너랑 나는 지금 한배를 탄 거라고!”그의 말을 줄곧 무시하던 반승제가 점점 높아지는 그의 언성에 성혜인이 깰까 봐 화가 났다.그가 고개를 홱 돌려 배현우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 투덜거렸다.“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하지만 배현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구에 대기하던 경호원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끌고 나갔다.안타깝게도 시끄러운 소리에 성혜인은 이미 깬 상태였다. 밖을 내다보니 또 오후다.성혜인을 진세운에게 데려가겠노라 약속했기 때문에 성혜인은 기분이 나쁘지도, 반승제에게 거부감이 생기지도 않았다.시간이 조금 지나 저녁이 되었을 무렵, 반승제는 옥상에서 불꽃 쇼를 준비했다.만찬과 함께 테이블 위를 장식하는 여러 대의 촛불은 옥상을 분위기 있게 했다.불꽃놀이는 한밤중까지 계속되었고, 성혜인은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불꽃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만 했다.턱을 괴고 불꽃놀이를 다 구경하고 나니 또 잠이 몰려왔다.반승제가 그녀의 손을 매너 있게 들어 올렸고 곧이어 네번 째 손가락에 무언가를 끼워주었다.반지였다.성혜인은 어리둥절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반승제는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그저 성대한 불꽃놀이가 막을 내릴 때 그녀에게 반지를 끼워주었을 뿐.성혜인은 반지를 빼내고 싶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왠지 모르게 기쁜 감정이 들었다.“저
그리고 나서는?뭐야? 아무 말도 안 해?성혜인은 그가 붙잡거나 다른 어필을 할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반승제는 아무 말 없었다.그저 “그래”라는 두 글자뿐. 그는 반지 두 개를 낀 손으로 턱을 괴고 조용히 성혜인을 바라보았다.성혜인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왜 화가 난 건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심지어 억울한 감정까지 생겼다.이러면 안 되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성혜인은 포크로 접시 위에 놓인 스테이크를 있는 힘껏 푹 찔렀다. 얼굴빛은 얼음장같이 차갑다.반승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 입맛이 없어?”“내버려둬요.”이 한마디를 내뱉은 그녀는 미간을 찡그린 채 스테이크를 우걱우걱 먹었다.“그래.”가볍게 대답한 그가 성혜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성혜인은 무언가에 짜증 버튼이 눌린 듯 벌떡 실어나 식탁보를 휙 잡아끌었다.테이블 위의 스테이크, 와인, 양초가 쨍그랑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그 소리에 문득 성혜인은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그제야 자각한 듯 했다.그녀는 반승제를 한 번 힐끗 보더니 7층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혼자서 샤워하고 머리를 말렸다.새벽 두 시까지 침대에서 뒤척였지만 반승제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또 짜증이 치밀어오른 성혜인은 이불을 걷어차고 나와 반승제를 찾아다녔다.결국 그를 발견한 곳은 베란다. 반승제는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여러 대나 쌓여 있었다. 그는 팔꿈치를 난간에 걸친 채 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손에 든 담배는 불이 꺼져있었다.뒤에 서서 1분 동안 보고 나서야 성혜인은 그를 향해 다가갔다.“왜 아직도 안 자?”“잠이 안 와서요.”성혜인은 반지가 두 개나 끼워져 있는 그의 왼손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제가 안 받은 반지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줄 거죠?”반승제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아마도.”또 한 번 짜증이 치밀어오른 성혜인은 속이 너무 답답했다. 그러나 요즘 머릿속이
반지를 손에 넣으니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던 불안감이 사라졌다. 침대에 누운 성혜인은 반지를 보고 또 보았다.여전히 설레는 감정은 들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마음 편히 잠에 들 수 있다.성혜인은 쉴 새 없이 뒤척였다. 오른쪽으로 누워 반지를 한 번, 왼쪽으로 누워 반지를 또 한 번 바라보았다.반승제가 방으로 들어오며 반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성혜인을 발견했다.그는 이미 샤워를 마치고 몸에서 나는 담배 냄새를 깨끗이 없앤 뒤였다.침대에 누운 뒤 반승제는 한 손으로 성혜인을 안아 침대에서 뒹굴지 못하도록 했다.“늦었으니 얼른 자. 내일 진 선생님 보러도 가야 하잖아.”성혜인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더니 그의 품에 기대었다.“승제 씨, 진 선생님은 좋은 사람이에요.”“응.”“절 구해주기도 하셨고, 저한테 다정하게 대해줘요.”“응.”“그리고 엄청 대단해요. 아, 그거 알고 있었어요? 선생님께 쌍둥이 동생도 있다는 거.”눈을 감고 있던 반승제가 성혜인의 말에 눈을 번쩍 떴다.순간 말실수를 자각한 성혜인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아, 잘못 말한 거예요. 진 선생님은 없다고 했어요.”“없다고 했다고?”“네.”반승제가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본인의 똑똑함이 해가 됐네. 진세운이 실수했어.”성혜인은 급속도로 불안해졌다. 너무 마음을 열어준 듯했다. 반지를 받아서일까? 기분이 너무 좋아서?기분이 좋다고?이제 보니 성혜인은 이런 작은 즐거움 정도는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혜인아, 더 말해봐. 쌍둥이 동생 그 다음은? 혹시 생긴 건 똑같은데 한 사람은 귓불에 점이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없어?”반승제는 천재 소리를 듣는 똑똑한 사람이다. 전에는 진세운이 둘이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이제 알 것 같다. 설의종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BKS에는 두 명의 핵심 인물이 있다. 한 사람은 B, 한 사람은 K라고 불리며 둘은 쌍둥이 형제이다. 두 사람이 늘 신분 교환을 하므로 누구도 그들을 의심하지 않는다.그들은 세
말을 마친 성혜인은 자신의 손가락에 낀 반지를 바라보았다.“저도 제가 이상한 것 같아요. 그런데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 건지 말하지 못하겠어요. 그냥 모든 일이 당황스럽게 다가오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표달하지 못해요. 승제 씨와 함께했던 모든 일들도 기억하고는 있는데 제 마음은 마치 고인 물처럼 아무런 파동도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아요.”그녀가 손가락을 살짝 움츠렸다.“이 반지를 처음 봤을 때 뭔가 달라졌다고 느끼긴 했는데, 뭐가 달라진 건지는 모르겠어요.”반승제가 크게 심호흡한 뒤 성혜인을 꼭 안았다.“혜인아.”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성혜인이 물었다.“그래도 내일 진 선생님 만나게 해주실 거죠?”참 분위기 깨는 발언이다.“응. 그러니까 지금은 얼른 자.”그제야 안도한 성혜인은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할 수 있었다.반승제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맞추고 또 맞추었다. 아무리 입을 맞추어도 더 맞추고 싶은 생각만 들 뿐이었다.그는 한참 후에야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이 순간 그는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성혜인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그녀의 사랑은 반승제의 것에 못지않았다.다만 둘 다 표현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이제 그는 성혜인에게 미안할만한 일을 할 것이다.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 선택밖에는....다음 날 아침, 막 잠에서 깬 성혜인은 거울 앞에서 이것저것 옷을 대보며 고르고 있었다.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반승제는 그녀가 방정을 떠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세 벌을 갈아입어 보았는데도 성혜인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생님을 뵈러 가는 건데 더 예쁘게 입어야 할 것이 마땅했다.반승제도 재촉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가 다른 한 벌을 갈아입으려 할 때 조용히 물었다.“이렇게까지 신경 쓴다고?”성혜인이 미간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는데, 그냥 사람이 좋아서 믿어야 할 사람, 안정감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돼요.”침대 위에 앉은 반승제가 오라고 손짓했다.“이리 와봐.”성혜인
혼란스럽던 정신세계가 한순간에 선명해졌다. 그녀의 말간 눈동자에 온통 핏빛이 비쳤다.성혜인은 반승제의 곁에 꿇고 앉아 총상 부위를 꾹 눌러 지혈하려 했다.“살려주세요!”“빨리 아무나 좀 와주세요! 여기 환자 있어요!”주위를 향해 크게 소리쳤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불길하고 허전한 느낌. 계단 내에 성혜인의 메아리만 울릴 뿐이었다.그녀는 자신이 혼돈의 세계에 갇혔음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반승제의 몸을 흔들며 눈물을 흘렸다.건너편 계단에 서 있던 장미는 한 손에 총을 꽉 쥐고 다른 한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려 했다. 그러나 손가락이 너무 떨려 불을 제대로 붙일 수가 없었다.옆에 있던 경호원이 그녀를 힐끗 보며 다급히 말했다.“장미 누나, 이거...”장미는 답답해져 손으로 그의 뒤통수를 퍽 쳐버렸다.“뭘 쳐다봐. 빨리 병원으로 이송해야지! 우물쭈물하다가 사람 죽게 할 거야?”“아! 예!”장미는 계단을 내려가다 힘이 풀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X발. 다음에 또 나한테 이런 일 시키기만 해봐.’“반승제 씨!”누군가 반승제의 이름을 외치며 데려가려 했다.성혜인은 반승제를 꼭 껴안고 있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품은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절대 내어주지 않았다.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힘을 풀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병원에 데려가세요. 당장.”지하 격투장의 사람들은 반승제라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기에 오히려 그를 부축해야 하는 경호원이 긴장했다.성혜인이 경호원을 밀어내며 말했다.“제가 할게요.”조금 전 당황하던 그녀는 온데간데없는 더없이 확고한 말투였다. 그녀는 반승제의 한 쪽 팔을 자신의 목에 걸치도록 했다.일행이 모두 차에 오른 뒤 경호원은 사이드미러를 통해 성혜인의 눈치를 살폈다.성혜인은 반승제의 손을 꼭 잡은 채 표정은 담담했다.그 전의 막막함, 순진함, 머뭇거림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경호원은 조금 전의 일에 대해 더 생각할 엄두를 내지
병원에서.성혜인은 여전히 복도에 조용히 앉아 있다. 세 시간이 지나서야 반승제가 침대 카트에 실려 나왔다.의사가 마스크를 내리고 말을 전했다. 다행히 총알이 심장과 멀리 떨어져 있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라고.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성혜인은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그녀는 침대 곁에 꿇어앉아 그의 손을 잡고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반승제는 쫓기는 신분이었으므로 더 이상 병원에 있을 수 없었다. 생명의 위협이 사라진 이후 그는 지하 격투장 7층으로 옮겨졌다.성혜인은 방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그의 곁을 지켰다.중간중간 그를 보러 들어오려던 장미는 성혜인의 원한 섞인 눈빛을 보고 물러났다.전에도 아우라가 이렇게 강했던가?장미는 양미간을 찌푸렸지만, 기세에 눌려 들어가지 못했다.성혜인은 반승제의 손을 잡고 자신의 볼에 갖다 댔다.반승제는 마취에서 깨지 못했지만 의식은 있었다.그는 자신의 이러한 결정이 성혜인에게 미안할 짓임을 잘 알고 있었다.정신과 의사의 말에 의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쓰러지는 것은 엄청난 충격을 주는 것이고 이 정신적 자극은 그녀를 최면에서 깨어나게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반승제는 줄곧 도박에 목숨을 내던져온 사람이었다.그리고 지금, 그는 내기에서 이겼다.성혜인의 맑은 눈물이 손등에 톡 떨어졌다. 반승제는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일어날 힘이 없었다.그렇게 이틀간 그는 줄곧 누워있었다. 적지 않은 격투장의 사람들이 병문안을 오려고 했으나 모두 성혜인에 의해 병실에 발 한번 들이지 못했다.성혜인은 문 앞에 떡하니 서서 한 손으로 문을 잡고 눈은 결연히 아무도 들이지 않겠다는 듯 앞을 내다보았다.무어라 말하려던 사람들도 그녀의 기세를 마주하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틀 뒤 아침, 반승제가 드디어 눈을 떴다.다친 상처 부위는 여전히 아팠다. 비록 급소를 피했다 하지만 결국 총에 맞은 것은 사실이었다.다소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성혜인과 눈을 마주쳤을 때,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