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버지가 말씀하신 게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형, 전 아버지를 믿어요. 제원에 간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을 눈여겨보라고 당부하셨어요. 처음에는 그 말이 이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제원의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서 여동생의 정보를 알아내길 바랐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이 일을 진세운 씨에게도 부탁했어요. 세운 씨도 사고를 당했으니 이번 일은 빼박아닌가요? 두 사람이 똑같이 실수할 리가 없잖아요.”설우현은 설기웅보다 냉정한 사람이다. 이로써 설인아를 싫어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때때로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은 건 사실이다.“형이 가족을 애틋하게 여기는 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제원에 있을 때 인아는 상식에 벗어나는 행동을 많이 했어요. 반 대표님이랑 혜인 씨가 잘 만나고 있는데 굳이 끼어들어서 훼방을 놓고, 심지어 형도 거기에 가담했잖아요.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요. 만약 반 대표님이랑 인아가 만나고 있는데 혜인 씨가 그 관계를 망치고 싶어서 안달 났다면 가만히 있었을 거예요? 우쭈쭈해 주는 건 좋은데 그것도 정도가 있어야죠. 오늘 밤 인아는 형의 손을 빌려서 우리 여동생을 죽인 거예요. 이 모든 사단이 다 형이 오냐오냐해줘서 일어났다는 걸 잊으면 안 돼요.”설기웅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그의 말에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설우현은 의식을 잃은 설인아를 바라봤다.“솔직히 지금 얘 목숨을 살려둔 것도 20년 동안 함께 지낸 세월을 염두에 두고 내린 결정이에요. 형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제 롤모델이었어요.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랄게요.”말을 마친 그는 곧장 자리를 떴다.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돌아왔는데 집안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었다.그는 바보가 아니다. 설의종이 오랫동안 두 아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누군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뜻했다.어쩌면 아직도 한 차례의 치열한 싸움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반승제는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세운아, 잠깐 만날래?”핸드폰 너머의 진세운은 웃고 있었다.“마침 할 얘기가 있었는데 잘됐네.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돌려 성혜인을 바라봤다.“혜인 씨, 승제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연락왔는데 직접 얘기해요.”옆에서 책을 읽던 성혜인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책을 꽉 움켜쥐었다.그녀는 반승제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왜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어쩌면 집착일 거라고 생각했다.“진 선생님, 전...”진세운은 핸드폰을 그녀의 손에 넘겼다.“제가 이따가 그쪽까지 데려다줄게요. 승제 만나고 싶다면서요.”눈살을 찌푸린 채 그의 말을 듣던 반승제는 담배를 쥐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지?’그러나 성혜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숨 쉬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워졌다.“혜인아?”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담배로 인해 화상을 입을 지경이 되었음에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핸드폰을 귀에 더 가까이 붙였다.“혜인?”성혜인은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밥 먹었어요?”반승제는 10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물었다.“반승우 별장에서 함께 보냈던 그 며칠 밤... 기억해?”반승제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곳까지 몰래 들어갔다. 비록 당시의 성혜인은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매일 밤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기억해요.”성혜인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왜요? 절 찾으러 올 거예요?”반승제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그 며칠 밤은 달콤하면서도 부끄러운 추억이었다.이런 말을 꺼냈을 때 예전의 성혜인이라면 반드시 우물쭈물하다가 변태라며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와 너무 다른 반응에 진세운이 수작을 부렸을 거라며 확실했다.반승제는 고개를 푹 숙였다.“응. 데리러 갈게.”성혜인은 미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회전 유리문 안으로 걸어갔다.그 시각 성혜인은 작은 포크로 앞에 놓인 디저트를 한입 베어먹고 있었다.그러다가 눈길을 사로잡는 훤칠한 남자가 다가오자 온몸이 굳어지더니 이내 손에 든 포크를 내려놓고 예의 갖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승제 씨, 왔어요?”반승제는 아무 말로 하지 않고 바로 진세운의 곁으로 가서 그의 멱살을 잡았다.‘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냐고!’진세운은 흥미로운 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가볍게 웃었다.“뭐 하는 짓이야?”반승제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하얀 손이 그를 가로막았다.고개를 돌리자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성혜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진 선생님이 절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죽었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얼마나 난폭한지 알긴 해요?”반승제는 눈빛에는 의아함이 스쳤다.“승제가 널 구했다고?”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내쳤다.“자초지종도 모르면서 화부터 내는 건 진짜 별로네요. 승제 씨,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네요.”잔뜩 실망한 그녀의 모습을 마주하자 반승제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진세운을 뿌리치고 곧장 성혜인의 손을 잡았다.“혜인아, 나랑 가자.”그 시각 성혜인의 시선은 진세운을 향하고 있었다.“진 선생님, 괜찮아요?”진세운은 여유롭게 옷깃을 정리하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반승제의 시선은 그의 귓불에 떨어졌다. 왼쪽이랑 오른쪽 전부 다 확인해 봤지만 그가 찾으려는 붉은 점은 없었다.미간이 절로 찌푸려졌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꿈에 그리던 성혜인을 만났기에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뒀던 수많은 얘기들을 털어놓고 싶었다.넘칠듯한 그리움은 어느새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진세운은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괜찮아요. 승제 만나고 싶었잖아요. 얼른 같이 가요.”성혜인은 망설이고 있었다.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지 스스로도 몰랐으나 그저 진세운과 떨어지면 불안할 것 같은 느낌
반승제는 차에 올라탈 때까지 성혜인의 손목을 꽉 붙잡고 있었다.쾅!그는 있는 힘껏 차 문을 닫더니 곧바로 성혜인의 얼굴을 잡고 키스를 퍼부었다.하지만 성혜은 쭈뼛거리다가 끝내 고개를 돌려 그를 피했다.그 모습에 반승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는 두 손으로 운전대를 꽉 잡은 채 감정을 추스르려고 애를 썼으나 그럴수록 호흡이 점점 더 가빠졌다.반승제는 진세운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왜 갑자기 성혜인을 돌려보내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완벽하게 짜놓은 판에 걸려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조수석에 앉아 있던 성혜인은 앞을 바라보며 안전벨트를 꽉 쥐었다.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약물을 흡입하고 깊은 최면을 받은 성혜인은 안정감을 주는 진세운이 곁에 없자 점점 더 불안해졌다.반승제는 그녀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현재로선 지하 격투장을 가는 게 우선이다.하여 액셀을 끝까지 밟아 불과 3시간 만에 지하 격투장의 정문에 이르렀다.그는 성혜인을 품에 안은 채 조각상 앞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성혜인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목을 세게 껴안았다. 귀청을 찢는 듯한 비명소리와 굉음이 들려오자 불안함이 엄습해 오는지 반승제의 가슴팍에 머리를 파묻었다.반승제는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그렇게 어느새 그의 구역인 7층에 도착했다.성혜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압도되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곳을 옮겨놓은 듯 화려했다.반승제는 그녀를 옆에 있는 큰 소파에 앉히고 주저 없이 그 위로 올라탔다.“웁... 하지 마요.”숨이 막히는 키스에 무의식적으로 몸을 피하고 싶었으나 그럴수록 점점 더 깊은 심연에 빨려 들어갔다.반승제는 그녀를 품에 꼭 안은 채 한 시간 동안 몸 곳곳에 입을 맞췄다.입술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반승제는 그녀의 반응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꼈다.누군가를 사랑하는 때는 그 사람의 눈빛만 봐도 티가 난다. 예전의 성혜인이라면 그의 머리를 밀어내며 괴로워
성혜인은 반박하고 싶었다.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그가 돌아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며 한시도 걱정을 늦춘 적이 없다고 얘기하고 싶었으나 마치 딜레마에 빠진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를 사랑하고 싶지만, 머릿속은 무언가에 의해 방해를 받는 듯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순간 속이 울렁거린 성혜인은 연신 헛구역질했으나 전혀 토하지 못했다.머리가 아픈 것이 아니라 단지 두려움이 그녀를 삼켜버렸다. 심지어 반승제와 함께 있는 일분일초 매 순간 불안함을 느꼈다.반승제는 더 이상 그 눈빛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지 넥타이를 풀어 그녀의 눈을 가렸다.어둠이 닥치자 몸의 자극은 수천 배로 증폭되었다.“웁...”반승제는 두 번이나 했지만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성혜인을 품에 안은 채 카펫 위에서 맘껏 욕구를 풀었다.“승제 씨...”성혜인이 넥타이를 풀어달라며 애원할수록 반승제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어떤 느낌인지 잊었지? 내가 널 얼마큼 사랑했는지 다 떠올리게 해줄게.”“안 잊었어요. 기억하고 있다고요.”“혜인아, 너 변했어. 아무도 접근할 수 없던 가시 돋친 모습은 어디 가고... 왜 말 잘 듣는 애완동물처럼 길들여졌나고!”날벼락을 맞은 듯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성혜인은 말문이 막혀 입을 열 수 없었다.반승제의 땀방울은 그녀의 가슴에 떨어졌고, 목소리는 더없이 허스키했다.“네 탓이 아니야. 내가 반드시 다 돌려놓을 거야.” 성혜인은 단지 그의 테크닉이 괜찮다고 생각할 뿐, 별 반응이 없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새벽까지 관계를 나눴고 반승제는 그녀가 힘들지 않게 틈틈이 체력 보충할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를 품에 끌어안은 채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넥타이를 풀자 성혜인은 초점 풀린 눈으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고 머리카락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반승제는 두 볼이 발그레 달아오른 그녀의 모습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그러고선 넥타이를 코끝에 올려 그녀의 향기를 맡았다.그 행동을 본 성혜인은 얼어붙었고 이
그들은 어려서부터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 심지어 친구들과 함께 파티하는 도중에 사람이 바뀐 적도 있었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그들을 길러낸 사람 외에는 이 비밀을 아는 이가 없었고 둘은 늘 같은 이름을 공유하면서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지내왔다.예를 들어 그들 중 한 사람이 제원의 파티에 참석했다면, 모든 걸 상황을 기억한 채 언제 누구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주 자세하게 정보를 주고받았다.하여 두 사람 사이에는 비밀이 없었다.형이 좀 더 온화하고 부드러운 스타일이라면 동생은 그 모습마저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있었다.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형은 담배를 피우지 않고 동생은 담배를 피운다.지난 몇 년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대역을 연기하며 본인들만의 세상에서 모든 사람을 조롱했다.또한 그들은 사석에서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 형은 세운, 동생은 백운이라고 불렀다.“세운아, 설마 성혜인한테 최면 걸었어?”“응.”진백운은 소파에 앉아 자신의 귓불을 문질렀다.“지난번에 시환이가 내 귓불을 뚫어져라 쳐다봤을 때 누군가가 이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어. 반승제 참 대단하지?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고민도 안 하고 바로 날 의심하다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진백운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내 머리카락이 너보다 긴가?”“응. 다듬는 게 좋을 것 같아.”“세운아, 이번 게임은 언제까지 할 거야? 성혜인이 널 사랑하게 만들려고?”진세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됐든 감정을 컨트롤하는 건 매우 골치 아픈 일이기에 그는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최면은 필요한 수단일 뿐이고, 그동안 성혜인에게 잘해줬던 이유는 단지 그에게 적응할 수 있도록 경계심을 풀기 위함이었다.“내가 전에도 얘기했잖아. 사람 감정 가지고 장난 안 친다고.”진백운은 담배 한 대를 꺼내더니 불을 붙이며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 난 또 네가 선을 넘은 줄 알았지.”
반승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뚫어지라 그녀를 바라봤다.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1층부터 7층까지 전부 다 내 땅인 거 몰라?”성혜인은 정말 몰랐다.반승제가 손뼉을 치자 밖에서 경호원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들어왔다.“나가서 핸드폰 주워 와. 고장 났으면 고쳐서 나한테 가져오고.”성혜인은 무의식적으로 진세운의 비밀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와 마음이 불안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꼭두각시처럼 행동하는 자신의 행동이 답답했지만 왜 이런 감정이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반승제는 손끝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옷을 입혀줬다.성혜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죄책감과 미안함 더불어 가시에 찔린 듯한 고통이 밀려와 가슴이 미어졌다.10분 후, 경호원이 돌아왔다.“대표님, 워낙 멀리 떨어진 탓에 고장이 났습니다. 수리 업체에 맡기고 돌아오는 길입니다.”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담배에 불을 붙이며 개인 주치의를 불렀다.여러 가지 검사를 마친 의사는 성혜은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혜인 씨는 아주 건강합니다. 데이터 수치만 놓고 봤을 때도 전혀 이상 없습니다.”손끝에 담배를 끼운 채 창가에 기댄 반승제는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됐어요. 나가서 정신과 의사 불러와요.”아무리 지하 격투장이 매일 사람들로 붐빈다 한들 그들 중에서 심리학을 아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남자는 성혜인과 1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곧장 반승제에게 가서 보고했다.“혜인 씨가 대표님을 많이 사랑했던 게 사실이라면 지금은 무언가에 통제된 게 틀림없습니다.”남자는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본인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겁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혜인 씨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지시를 내린 그 사람한테 더 많이 의존하게 될 거예요. 끝까지 정신을 붙잡고 있는 간절함이 없었더라면 아마 대표님을 완전히 잊어버렸을 겁니다. 불안함과 공포에 지배당한 이런 상황에서 대표님을 밀어내지 않았다는 건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
“없습니다. 최면을 건 그 사람보다 더 대단한 최면술사를 찾는 것밖에는요. 지하 격투장에서 오랜 시간 몸을 담갔지만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인상 깊었던 최면술사는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혜인 씨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아마 전 세계 탑 5위안에 드는 실력을 가졌을 겁니다. 이런 분들은 보통 일찍이 나라에 편입되어 저희 같은 사람들은 접근할 수조차 없을 겁니다.”반승제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알겠어요.”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반승제는 문을 열고 성혜인의 곁으로 다가갔다.그 시각 잃어버린 핸드폰 때문에 여전히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성혜인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섰다.“혜인아, 우리 영화 보러 갈까?”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반승제는 그녀를 품에 안고 넓은 거실로 걸어갔다.소파에 앉은 성혜인은 환경이 주는 위압감에 불편함을 느꼈다.“보고 싶은 영화 있어?”성혜인은 대답할 수 없었다. 반승제가 좋아하는 걸 보려고 했지만, 그가 뭘 좋아하는지조차 몰랐고 나아가 두 사람이 영화를 봤던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영화는... 보고 싶지 않아요.”“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모르겠어요.”그녀는 정말로 몰랐다. 마치 혼돈의 방에 갇혀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 자아 인식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그럼 놀러 가자.”반승제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혔다.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가면을 쓴 수많은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고 극소수만이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성혜인은 무의식적으로 반승제에게 바짝 붙은 채로 걷다가 어느새 긴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귓가에 들리는 건 사람들의 열띤 토론과 주사위를 던지는 소리뿐이었다.그녀는 반승제의 다리에 앉게 되었고, 그의 맞은편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칩이 놓여있었다.“혜인아, 예전에 제원에서 텍사스 홀덤 했었는데 기억나?”“기억나요.”당시 놀이꾼이었던 반승제는 성혜인이 자신의 아내인 줄 모르고 있었다.“진
그는 오래전부터 공지민에게 깊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예전에는 온시환도 잘 몰랐다. 그러다 구은우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 많은 순간, 공지민은 아마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붙잡아 두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녀 자신조차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마치 생기 없는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모습이었다.온시환이 처음 그녀를 싫어했던 이유도 바로 그녀에게서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계속 그녀를 신경 쓰다 보니, 점점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간 후 공지민의 왼쪽에는 강민지, 오른쪽에는 성혜인이 앉았다.사실 그녀는 성혜인을 알고 있었다. 과거 성혜인과 반승제의 사건이 너무나 크게 이슈가 되어 실시간 검색어에서 자주 본 이름이었다.공지민은 성혜인을 굉장히 자존심 강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생각보다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자들은 마당에 앉아 있었으며 방해하지 않고 때때로 과자나 과일을 들고 와 전해 주었다.강민지가 갑자기 공지민의 손을 잡았다.“지민 씨, 시간 될 때 우리랑 자주 만나요. 남자들이랑만 있지 말고. 남자라는 것들은 말이지, 맞춰 주면 맞춰 줄수록 그걸 당연하게 여겨요.”강민지는 아직 공지민과 온시환의 결혼이 단지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공지민에게 남자를 길들이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공지민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만약 내가 시환 씨를 단지 이용하고 있는 거라면요...”앞에 있는 두 여자는 온시환의 친구들이었다. 만약 이 결혼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거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를 몹시 싫어하게 될 것
성혜인은 한순간 감개무량해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식탁 위의 분위기는 여전히 약간 어색했지만 강민지가 공지민에게 그녀가 출연했던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성혜인은 그제야 강민지가 공지민이 출연한 드라마를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지민은 처음엔 다소 긴장해 보였으나 점차 눈에 띄게 여유로워졌고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강민지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강민지가 성혜인에게 눈짓을 보내자 성혜인도 따라 웃음을 지었다.가끔 여자끼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공감하는 특별한 순간이 있다.식사가 끝날 무렵, 강민지는 공지민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지민 씨, 마지막에 출연했던 드라마는 왜 몇 화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 캐릭터가 그렇게 빨리 죽을 캐릭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퇴장하더라고요.”사람의 진심은 상대의 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법이다.공지민은 강민지가 진심으로 자신의 드라마를 좋아하며 각 에피소드까지 꼼꼼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원래 문보영은 공지민의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문보영과 온시환이 키스하는 모습을 본 후 그녀와 연락을 끊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졌고 예전처럼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그동안 공지민은 참 외로웠다. 그런데 강민지가 먼저 다가와 주자 그녀는 묘하게 안도감을 느꼈다.“그땐 회사에서 문제가 있어서 제가 잠시 활동을 중단해야 했어요. 그래서 그 캐릭터도 일찍 하차할 수밖에 없었죠.”“정말 아쉬워요. 그 캐릭터 팬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끝까지 연기했으면 팔로워가 최소 백만 명은 더 늘었을 거예요.”공지민은 웃음을 터뜨리며 눈매가 휘어졌다.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온시환은 혼자 계산을 하러 갔다.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공지민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다시 보았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은 녹아내릴 듯 부드러워졌다.반승제와 신예준이 그의 앞에 있었지만 온시환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공지민은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온시환 앞에서 이렇게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있었는지 떠올렸다.그날 밤 두 사람이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 온시환은 그녀의 그 미소를 떠올리며 뒤척였다.휴대폰은 침대 옆에 놓여 있었고 최근 연락한 친구들로부터 술자리 초대 메시지가 와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공지민과의 결혼을 생각하며 그녀가 이미 동의했으니 내일 당장이라도 혼인신고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는 돌아누워 공지민을 바라보았다.한편 공지민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에 관한 생각, 특히 결혼 상대가 온시환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낯설고 어색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이 없었다.“지민아, 너도 결혼하기로 했으니까 내일 바로 혼인신고하러 가자.”온시환은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은 결혼이 최소 몇 달 후에나 진행될 줄 알았는데 그가 이렇게 서두를 줄은 몰랐다.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온시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공지민이 마음을 바꿀까 두려웠다. 결혼도, 구은우의 죽음에 대한 조사도 그만두겠다고 하면 그가 그녀를 곁에 붙잡아둘 명분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온시환은 새 정장을 꺼내 입으며 추지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혼인신고하러 간다.]추지성은 이 메시지에 놀라 즉시 전화를 걸어왔다.“야, 너 농담하는 거지? 진짜 가는 거야? 지민 씨가 동의했어?”“응, 동의했어.”추지성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눈을 멍하니 뜬 채 온시환이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온시환은 다른 친구들과 있는 단톡방에도 혼인신고 소식을 알렸다. 단톡방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고 곧이어 물음표가 연달아 올라왔다.가장 강렬한 반응을 보인 건 당연히 설우현이었다. 그는 연달아 다섯 개의 놀란 이모티콘을 올리며 반응했다.다른 사람들은 몇 분간 망설이다가 그제야 축하 메시
온시환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추지성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둘은 별다른 말 없이 게임을 시작했다. 온시환은 게임을 하는 중에도 간간이 휴대폰을 확인하며 초조해했다.저녁 7시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공지민이었다.“국 끓였어요. 와서 먹을래요?”우울한 기분에 젖어 있던 온시환은 그 한마디에 바로 게임기를 내려놓고 밖으로 향했다.그러자 추지성이 소파에 앉아 목소리를 높였다.“야, 어디 가냐? 곧 배달 음식 도착하는데, 나 혼자 다 못 먹어!”“집에 가서 지민이가 끓인 국 먹을 거야.”추지성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뭐야, 이 말투에서 자랑하는 느낌이 나는 건 왜지?”온시환은 이내 추지성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반 시간도 안 돼 집에 도착했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국 냄새가 코를 찔렀다.공지민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온시환은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가 원하는 건 많지 않았다.공지민이 그의 곁에 몇 년만 더 있어 준다면 그 뒤로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남기고 떠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깔끔히 정리하고 아무런 짐도 남기지 않을 작정이었다.‘지민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내가 사라져도 아무렇지도 않겠지...’온시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방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무슨 국 끓인 거야? 냄새가 너무 좋은데.”공지민은 그가 돌아온 걸 보고 작은 그릇에 국을 담아 그에게 내밀었다.“또 지성 씨랑 술 마시러 나갔어요?”온시환은 그녀가 추지성을 싫어한다고 생각해 서둘러 부인했다.“아니야. 다른 사람들이랑 있었어.”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였다.“여자는 없었어.”공지민은 방금 만든 반찬들을 모두 식탁으로 옮기고 밥도 한 그릇 담아 내왔다.둘이 나란히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다. 이렇게 평화롭게 식탁을 마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온시환은 이 고요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국을 천천히 떠먹었다.식사가 끝날 무렵 공지민이 그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바로 문을 나섰다.공지민은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한편 온시환은 집을 나서자마자 추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온시환은 침착하게 옷을 발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거실 한가운데에서 추지성은 한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온시환을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금세 흥미를 잃고 입맞춤을 멈췄다.“시환아?”추지성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온시환은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무시했다.추지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이만 가봐.”여인은 옷이 주워 입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자 추지성은 타올 하나만 걸친 채 태연하게 소파로 와서 앉았다.“야, 너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 좀 하고 와라.”온시환은 담배를 쥔 손이 축 늘어진 채 지쳐 보였다.추지성은 의아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공지민과 화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가 싶었다.“무슨 일이야? 아침에 전화로 자랑질하더니만. 아, 맞다. 너 점 다시 찍었더라? 확실히 점 있는 네가 낫다. 예전에 다른 여자들도 그 점이 좋아서 너한테 홀렸잖아.”온시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구은우의 죽음을 조사하려는 거였어.”추지성은 옆에 놓인 주스를 집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죽은 사람의 일을 왜 조사해? 이게 몇 년 전 일이냐. 다 끝난 거잖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난 가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돼. 남자라면 이미 새로운 연애 몇 번은 했을 텐데.”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봐봐. 주변에 아내 잃은 남자들 있지? 그놈들 지금 얼마나 잘 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근데 남편 잃은 여자들은? 평생 못 벗어나.”추지성의 가족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의 친누나는 난
공지민은 정말 지쳤다. 밤새 몇 번이나 잠들 뻔했지만 온시환이 계속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자신의 위에 엎드린 온시환을 바라봤다. 그의 볼은 붉게 달아올랐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끊임없이 떨어졌다.온시환이라는 이 나쁜 남자 몸매 하나는 참 잘 관리했다.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문득 생각했다. 그녀는 코끝에 점이 있는 온시환이 더 좋았다. 만약 점이 없었다면 그와 대화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온시환은 그녀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자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빌어먹을.’공지민이 이 점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다행히 다시 그 점을 되돌려 놨다.온시환은 그녀의 뒤통수를 붙잡고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속으로 흡수해 버리고 싶어 하는 듯했다.그날 공지민은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다.원래 아침에 일어나 사골국을 끓이려고 했지만 전날 밤 온시환의 끈질긴 괴롭힘에 결국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깨어났을 땐 창밖에 저녁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며 온시환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그래, 점 다시 찍었어. 신경 꺼. 쪽팔려도 내가 쪽팔려. 너랑 무슨 상관인데. 자꾸 그딴 소리하면 화낼 거야.”지난번 온시환이 점을 제거했을 때 많은 사람이 물었다. 그는 그냥 없애고 싶어서 없애는 거라며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말해 왔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점을 다시 찍자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궁금해했다.온시환은 아무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추지성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온시환은 그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다.사실 추지성이 온시환을 부추기지만 않았더라도 그와 공지민이 이렇게까지 어긋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추지성은 여전히 냉철했다.“지난번에 너희가 금방 헤어지고 네가 병원에 실려 갔을 때도 지민 씨는 한 번도 널 보러 오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돌아온 걸 보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나는 너희가 다시 잘되길 반
하지만 택시 기사는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공지민이 내리려 할 때까지도 계속 말했다.“내가 보니까 그 남자 친구 참 괜찮아 보이던데. 뒤따라오는 저 차도 그 사람 거죠? 아무리 싸웠어도 아가씨 혼자 차 타고 가는 거 걱정돼서 저렇게 따라오는 거 아니겠어요?”공지민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차를 바라보았다.온시환의 차가 틀림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시급했다.집에 도착한 공지민은 곧장 인터넷에서 그 남자 배우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하지만 검색 결과는 이름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그의 가족에 대한 부분은 아예 생략돼 있었다.하는 수 없이 그녀는 예전에 알던 몇몇 기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혹시라도 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정보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공지민은 연예계에서 활동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인맥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사교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이번 조사가 더욱 쉽지 않았다.소파에 앉아 돈을 송금하며 기자들에게 의뢰했지만 돌아온 정보는 여전히 부족했다.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의 연락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마음이 초조해진 공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분명 실마리를 찾았지만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공지민의 시야에 여전히 아래에 서 있는 온시환의 차가 들어왔다.만약 온시환이의 능력이라면 이런 조사는 금세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고 집 문을 열었다.아래로 내려온 그녀는 온시환의 차 앞으로 걸어갔다.운전석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던 온시환은 공지민을 보자 깜짝 놀란 듯했다.공지민이 창문을 두드리자 그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시환 씨.”온시환은 그녀가 자신을 쫓아내려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코끝에는 예전과 똑같은 점이 다시 자리 잡고 있었다.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공지민은 남자의 말을 들으며 그를 부축했다. 남자는 술이 정말 많이 취했는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해도 다 대답했다.10억...엘리베이터가 한 층에서 멈췄을 때 공지민은 그를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남자는 자신의 방 카드를 꺼냈고 공지민을 향한 시선은 이미 노골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다.공지민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지만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그가 건넨 카드를 받아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손목을 잡아 막았다.뒤를 돌아보니 온시환이었다.온시환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그렇게 공지민은 그의 가슴팍에 부딪혔고 옆에 있던 남자 배우는 누군가 자신을 막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있다가 온시환의 얼굴을 보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온 작가님?”온시환은 공지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원래부터 이 남자와 뭔가 할 생각이 없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얼굴로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그의 감정은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을 때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공지민, 너 그렇게 절박해?”‘절박해’라는 말이 그의 목에서 걸리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려 했지만 너무 떨려 담배는 그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굴러갔다.공지민은 온시환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남자 배우와 관련된 조사에 쏠려 있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반드시 구은우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결심했다.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가자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온시환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아래층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모임 장소는 고급스러워서 촬영을 마친 여러 제작팀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오늘 밤에도 몇몇 팀이 이곳에 모여 회식을 하고 있었다.연예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온시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