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층으로 내려온 설인아는 무릎을 꿇고 있는 설기웅과 창백한 얼굴의 나미선을 보고선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아버지.”그녀의 부름에도 설의종의 시선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그 싸늘함이 몸을 꿰뚫는 느낌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굴러온 돌 주제에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 네가 설씨 가문으로 잘못 들어온 바람에 내 딸이 어린 시절을 빼앗겼어.”설의종의 머릿속은 온통 그가 방금 본 불길로 가득 차 있었다. 설인아가 설기웅을 시켜 자신의 딸을 살해했다는 생각만으로 설씨 가문 전체를 엎어버리고 싶었다.단지 딸이 살아 돌아오기를 바랄 뿐,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미련이 없었다.설인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했다.“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뜻인지 정말 모르겠어요.”그녀는 무릎을 꿇고 있는 설기웅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오빠, 아버지 밖에서 무슨 충격이라도 받으셨나 봐. 나 너무 무서워. 엉엉...”말이 끝나자마자 설의종은 친자 확인서를 던졌다.“너랑 나의 친자 확인서다. 넌 내 딸이 아니잖아. 다 알고 있으면서 순진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는 걸 보니 정말 역겹구나.”설인아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지만, 끝까지 모르는 척 하기로 결심했다.“몰랐어요. 전 정말 몰랐다고요. 아버지, 제가 어떻게 친딸이 아닐 수가 있겠어요? 지금 누군가에게 속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승제 오빠가 그런 거죠? 전에 있었던 일로 지금 저한테 복수하는 게 확실해요. 어머니,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저 진짜 너무 무서워요.”소파에 앉아 있던 나미선은 무의식적으로 설인아를 달래려고 움직였으나 곧바로 설의종의 기세에 눌려 끝내 자리에 앉아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여보, 인아 말이 맞아요. 밖에서 헛소문이라도 들은 게 아니에요? 친자 확인은 충분히 조작했을 수도 있죠.”“내가 직접 했고, 내가 보는 앞에서 결과가 나왔는데 이게 가짜라고요?”담담한 말투와는 달리
설의종은 이 모든 것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계획한 일이라는 걸 몰랐다. 늘 그렇듯 진세운은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정보의 격차를 만들어 사실을 왜곡했다.설의종이 알고 있는 건 딸이 자신을 찾으러 온다는 사실뿐이었다.설인아에게 속은 설기웅은 자신이 성혜인과 그녀의 중요한 사람들을 처리한 줄 알았다.오직 설인아만이 성혜인이 진짜 딸인 걸 추측해 냈지만 그녀는 설씨 가문에서 쫓겨나더라도 성혜인이 이런 부귀영화를 누리는 걸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이 사실에 대해 입을 다물기로 결심했다.그리고 성혜인. 그녀는 오늘 밤에 일어난 모든 일이 설기웅의 계획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진세운과 설씨 가문의 아가씨를 제거하기 위해 꾸민 일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 아가씨가 본인이라는 건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그렇게 그들은 서로 다른 정보를 얻었고, 서로 소통할 리가 없는 이러한 관계에서는 정보 격차로 인해 원한이 생긴다.정말 완벽한 계획이다....설기웅은 부하들이 친자 확인서를 가져올 때까지 한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다.[친자 불일치]그는 머리에 총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친자 확인서를 바라봤다.설의종은 일찌감치 이런 결과를 예상했다. 다만 한순간에 10년이 늙은 듯 얼굴이 초췌했고 평소 늘 꼿꼿하던 허리마저도 잔뜩 휘어졌다.갑자기 불안해진 설인아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듯 필사적으로 설기웅의 팔을 붙잡았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엉엉... 내가 친자식이 아니라니...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대로 집에서 쫓겨나는 건가? 오빠, 나 도와줄 거지? 이대로 쫓겨나기 싫단 말이야.”그녀는 울부짖으며 기어가 나미선의 다리를 끌어안았다.“어머니, 절 누구보다도 많이 사랑해 줬잖아요. 제발요. 이렇게 빌 테니까 한 번만 도와줘요. 설마 그 사랑이 다 가짜였던 거예요? 나만 진심이었던 거 아니죠? 엉엉...”강아지도 20년 넘게 기르면 정이 들기 마련이다.나미선은 손을
설인아의 눈은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나미선에게 사정하는 것뿐이다.“아버지 좀 말려줘요. 저 정말 나가기 싫어요. 앞으로 효도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쫓아내지 말아요.”애간장을 태우던 나미선은 자비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굳건한 설의종의 모습을 마주하고선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지금 다가가서 인아를 위해 사정하는 순간 어쩌면 본인도 쫓겨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저 한숨만 내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설인아는 꼼짝 못 하는 눈앞의 여자를 보고선 답답함이 밀려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빌게요.”설의종의 말에 충격을 받은 설기웅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말도 안 돼. 인아처럼 착한 애가 어떻게 날 속여... 저렇게 여린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려고 계획했을 리가 없어...’그는 허리를 굳게 세운 채로 자리에 얼어붙었다.이때 거실 문이 열렸다. 밖에서 돌아온 설우현은 어수선한 집안을 보고 어리둥절했다.“무슨 일 있었어요?”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꾹 닫고 있던 그때 설의종이 입을 열었다.“우현아, 이제부터 설씨 가문의 주식은 너한테 넘어갈 거다. 대표직도 당분간은 네가 맡는 게 좋을 것 같구나.”설우현은 환청이 들리는 줄 알고 귀를 의심했다. 패가망신하기로 소문난 그가 지금껏 모든 관리를 잘해온 큰형을 대신해 이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됐는데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는가?‘아버지가 무슨 자극을 받으신 건가?’제원에서 막 돌아온 그는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아버지,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농담치고는 설의종의 표정이 너무 엄숙한 데다가 설인아는 경호원 두 명에게 끌려갔고, 설기웅은 이마에 피를 흘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다.설우현은 곧 터질 듯한 폭탄을 안고 있는 느낌에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이 집안의 실질적인 권력자는 설의종이다. 만약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뜻을 거역한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버지가 말씀하신 게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형, 전 아버지를 믿어요. 제원에 간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을 눈여겨보라고 당부하셨어요. 처음에는 그 말이 이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제원의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서 여동생의 정보를 알아내길 바랐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이 일을 진세운 씨에게도 부탁했어요. 세운 씨도 사고를 당했으니 이번 일은 빼박아닌가요? 두 사람이 똑같이 실수할 리가 없잖아요.”설우현은 설기웅보다 냉정한 사람이다. 이로써 설인아를 싫어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때때로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은 건 사실이다.“형이 가족을 애틋하게 여기는 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제원에 있을 때 인아는 상식에 벗어나는 행동을 많이 했어요. 반 대표님이랑 혜인 씨가 잘 만나고 있는데 굳이 끼어들어서 훼방을 놓고, 심지어 형도 거기에 가담했잖아요.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요. 만약 반 대표님이랑 인아가 만나고 있는데 혜인 씨가 그 관계를 망치고 싶어서 안달 났다면 가만히 있었을 거예요? 우쭈쭈해 주는 건 좋은데 그것도 정도가 있어야죠. 오늘 밤 인아는 형의 손을 빌려서 우리 여동생을 죽인 거예요. 이 모든 사단이 다 형이 오냐오냐해줘서 일어났다는 걸 잊으면 안 돼요.”설기웅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그의 말에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설우현은 의식을 잃은 설인아를 바라봤다.“솔직히 지금 얘 목숨을 살려둔 것도 20년 동안 함께 지낸 세월을 염두에 두고 내린 결정이에요. 형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제 롤모델이었어요.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랄게요.”말을 마친 그는 곧장 자리를 떴다.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돌아왔는데 집안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었다.그는 바보가 아니다. 설의종이 오랫동안 두 아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누군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뜻했다.어쩌면 아직도 한 차례의 치열한 싸움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반승제는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세운아, 잠깐 만날래?”핸드폰 너머의 진세운은 웃고 있었다.“마침 할 얘기가 있었는데 잘됐네.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돌려 성혜인을 바라봤다.“혜인 씨, 승제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연락왔는데 직접 얘기해요.”옆에서 책을 읽던 성혜인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책을 꽉 움켜쥐었다.그녀는 반승제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왜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어쩌면 집착일 거라고 생각했다.“진 선생님, 전...”진세운은 핸드폰을 그녀의 손에 넘겼다.“제가 이따가 그쪽까지 데려다줄게요. 승제 만나고 싶다면서요.”눈살을 찌푸린 채 그의 말을 듣던 반승제는 담배를 쥐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지?’그러나 성혜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숨 쉬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워졌다.“혜인아?”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담배로 인해 화상을 입을 지경이 되었음에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핸드폰을 귀에 더 가까이 붙였다.“혜인?”성혜인은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밥 먹었어요?”반승제는 10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물었다.“반승우 별장에서 함께 보냈던 그 며칠 밤... 기억해?”반승제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곳까지 몰래 들어갔다. 비록 당시의 성혜인은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매일 밤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기억해요.”성혜인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왜요? 절 찾으러 올 거예요?”반승제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그 며칠 밤은 달콤하면서도 부끄러운 추억이었다.이런 말을 꺼냈을 때 예전의 성혜인이라면 반드시 우물쭈물하다가 변태라며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와 너무 다른 반응에 진세운이 수작을 부렸을 거라며 확실했다.반승제는 고개를 푹 숙였다.“응. 데리러 갈게.”성혜인은 미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회전 유리문 안으로 걸어갔다.그 시각 성혜인은 작은 포크로 앞에 놓인 디저트를 한입 베어먹고 있었다.그러다가 눈길을 사로잡는 훤칠한 남자가 다가오자 온몸이 굳어지더니 이내 손에 든 포크를 내려놓고 예의 갖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승제 씨, 왔어요?”반승제는 아무 말로 하지 않고 바로 진세운의 곁으로 가서 그의 멱살을 잡았다.‘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냐고!’진세운은 흥미로운 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가볍게 웃었다.“뭐 하는 짓이야?”반승제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하얀 손이 그를 가로막았다.고개를 돌리자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성혜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진 선생님이 절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죽었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얼마나 난폭한지 알긴 해요?”반승제는 눈빛에는 의아함이 스쳤다.“승제가 널 구했다고?”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내쳤다.“자초지종도 모르면서 화부터 내는 건 진짜 별로네요. 승제 씨,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네요.”잔뜩 실망한 그녀의 모습을 마주하자 반승제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진세운을 뿌리치고 곧장 성혜인의 손을 잡았다.“혜인아, 나랑 가자.”그 시각 성혜인의 시선은 진세운을 향하고 있었다.“진 선생님, 괜찮아요?”진세운은 여유롭게 옷깃을 정리하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반승제의 시선은 그의 귓불에 떨어졌다. 왼쪽이랑 오른쪽 전부 다 확인해 봤지만 그가 찾으려는 붉은 점은 없었다.미간이 절로 찌푸려졌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꿈에 그리던 성혜인을 만났기에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뒀던 수많은 얘기들을 털어놓고 싶었다.넘칠듯한 그리움은 어느새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진세운은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괜찮아요. 승제 만나고 싶었잖아요. 얼른 같이 가요.”성혜인은 망설이고 있었다.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지 스스로도 몰랐으나 그저 진세운과 떨어지면 불안할 것 같은 느낌
반승제는 차에 올라탈 때까지 성혜인의 손목을 꽉 붙잡고 있었다.쾅!그는 있는 힘껏 차 문을 닫더니 곧바로 성혜인의 얼굴을 잡고 키스를 퍼부었다.하지만 성혜은 쭈뼛거리다가 끝내 고개를 돌려 그를 피했다.그 모습에 반승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는 두 손으로 운전대를 꽉 잡은 채 감정을 추스르려고 애를 썼으나 그럴수록 호흡이 점점 더 가빠졌다.반승제는 진세운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왜 갑자기 성혜인을 돌려보내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완벽하게 짜놓은 판에 걸려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조수석에 앉아 있던 성혜인은 앞을 바라보며 안전벨트를 꽉 쥐었다.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약물을 흡입하고 깊은 최면을 받은 성혜인은 안정감을 주는 진세운이 곁에 없자 점점 더 불안해졌다.반승제는 그녀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현재로선 지하 격투장을 가는 게 우선이다.하여 액셀을 끝까지 밟아 불과 3시간 만에 지하 격투장의 정문에 이르렀다.그는 성혜인을 품에 안은 채 조각상 앞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성혜인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목을 세게 껴안았다. 귀청을 찢는 듯한 비명소리와 굉음이 들려오자 불안함이 엄습해 오는지 반승제의 가슴팍에 머리를 파묻었다.반승제는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그렇게 어느새 그의 구역인 7층에 도착했다.성혜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압도되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곳을 옮겨놓은 듯 화려했다.반승제는 그녀를 옆에 있는 큰 소파에 앉히고 주저 없이 그 위로 올라탔다.“웁... 하지 마요.”숨이 막히는 키스에 무의식적으로 몸을 피하고 싶었으나 그럴수록 점점 더 깊은 심연에 빨려 들어갔다.반승제는 그녀를 품에 꼭 안은 채 한 시간 동안 몸 곳곳에 입을 맞췄다.입술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반승제는 그녀의 반응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꼈다.누군가를 사랑하는 때는 그 사람의 눈빛만 봐도 티가 난다. 예전의 성혜인이라면 그의 머리를 밀어내며 괴로워
성혜인은 반박하고 싶었다.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그가 돌아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며 한시도 걱정을 늦춘 적이 없다고 얘기하고 싶었으나 마치 딜레마에 빠진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를 사랑하고 싶지만, 머릿속은 무언가에 의해 방해를 받는 듯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순간 속이 울렁거린 성혜인은 연신 헛구역질했으나 전혀 토하지 못했다.머리가 아픈 것이 아니라 단지 두려움이 그녀를 삼켜버렸다. 심지어 반승제와 함께 있는 일분일초 매 순간 불안함을 느꼈다.반승제는 더 이상 그 눈빛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지 넥타이를 풀어 그녀의 눈을 가렸다.어둠이 닥치자 몸의 자극은 수천 배로 증폭되었다.“웁...”반승제는 두 번이나 했지만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성혜인을 품에 안은 채 카펫 위에서 맘껏 욕구를 풀었다.“승제 씨...”성혜인이 넥타이를 풀어달라며 애원할수록 반승제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어떤 느낌인지 잊었지? 내가 널 얼마큼 사랑했는지 다 떠올리게 해줄게.”“안 잊었어요. 기억하고 있다고요.”“혜인아, 너 변했어. 아무도 접근할 수 없던 가시 돋친 모습은 어디 가고... 왜 말 잘 듣는 애완동물처럼 길들여졌나고!”날벼락을 맞은 듯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성혜인은 말문이 막혀 입을 열 수 없었다.반승제의 땀방울은 그녀의 가슴에 떨어졌고, 목소리는 더없이 허스키했다.“네 탓이 아니야. 내가 반드시 다 돌려놓을 거야.” 성혜인은 단지 그의 테크닉이 괜찮다고 생각할 뿐, 별 반응이 없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새벽까지 관계를 나눴고 반승제는 그녀가 힘들지 않게 틈틈이 체력 보충할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를 품에 끌어안은 채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넥타이를 풀자 성혜인은 초점 풀린 눈으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고 머리카락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반승제는 두 볼이 발그레 달아오른 그녀의 모습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그러고선 넥타이를 코끝에 올려 그녀의 향기를 맡았다.그 행동을 본 성혜인은 얼어붙었고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