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심문하는 듯한 말투였다. 서주혁에게 무엇이라도 알아낸 것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고생스럽게 달려온 건데, 서주혁은 자신이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장하리는 차마 반승제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서주혁의 옷깃을 만지작거렸다.“대표님, 주혁 씨가 많이 다치는 바람에 기억을 잃었어요. 그래서...”장하리는 목까지 빨개져 마치 삶아진 새우 같았다.서주혁이 그녀를 품에 안고 달래며 등을 토닥였다.“저 사람이 해칠까 봐 그래요?”장하리는 온몸에 열이 났다. 그녀는 두 손으로 옷을 꼭 쥐었다.반승제는 심란하게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장하리에게 말했다.“주혁이 먼저 올라가라고 해요. 따로 할 말이 있어요.”장하리가 얼른 서주혁의 손을 잡았다.“주혁 씨, 대표님은 주혁 씨의 가장 친한 친구시고 주혁 씨가 걱정돼서 온 거예요. 제가 다 설명해 드릴 순 없지만 거짓말은 아니니까 안심하고 먼저 올라가요.”서주혁은 내키지 않았다.이 소위 말하는 친구라는 녀석의 생김새가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왠지 모를 위기감을 느꼈다.그러나 이 며칠간 장하리를 밤마다 괴롭혀 왔으니 바람피울 생각은 절대 못 할 것이다.서주혁은 일어나 그녀의 입에 입맞춤한 뒤 위층으로 올라갔다.장하리는 부끄러움에 머리를 더 숙였고 손바닥은 땀투성이였다.“대표님, 할 말이 무엇입니까?”장하리는 반승제가 자신과 서주혁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서주혁이 올라가는 것을 다 확인하고서야 그는 담배를 비벼 껐다.“관계는 하되 마음은 주지 마요. 주혁이는 절대 그쪽 사랑할 수 없으니까.”그의 말에 장하리의 몸이 굳어졌다. 얼굴의 핏기마저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했다.이 며칠간 서주혁에게 안겨서 관계할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처음에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서주혁이 자신에게 이리 대하는 것은 모두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을.그러나 점점 현혹되었다.그녀는 자신을 미워했으므로 마음을 너무 쉽게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자기도 모르게 점점 빠져들었고, 지금
모두 사실이었다. 이 오해의 심각성을 확실히 상기시켜 주어야만 나중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장하리는 마치 혈도가 찍힌 것처럼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문을 열고 나가는 반승제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서주혁과의 옛날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항상 무표정으로 모욕적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았었다.생리적인 면에서의 도움을 제외하고 서주혁이 장하리와 함께 한 이유는 단지 그녀가 속궁합이 잘 맞는 상대였기 때문이다.이는 서주혁이 본인의 입으로 직접 한 말이었다.서주혁은 다른 여자와는 관계를 맺은 적도, 맺으려고 시도를 한 적도 없었다. 여자에 대한 혐오가 뼛속 깊이 새겨졌으니까.그러나 장하리가 자발적으로 침대에 오름으로써 그의 전례를 깨뜨렸다. 그는 관계를 맺는 행위를 극도로 싫어했지만, 이미 해버린 김에 성욕 해결용으로 여러 번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이것이 서주혁의 진심이었다. 그러니 굳이 장하리에게 착한 척, 다정한 척할 필요가 있겠는가.소파에 몸이 뻣뻣해질 때까지 앉아 있었을 무렵, 서주혁이 내려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왜 그래요?”흐린 안색에 서주혁이 걱정했다.장하리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주혁은 그녀의 귀에 입을 맞추고 목에 두른 스카프를 풀었다.울긋불긋한 예쁜 자국들이 드러났다.서주혁이 오동통하게 부은 그녀의 입술을 보고 참지 못하고 또 뽀뽀하려 했다. 그러나 장하리가 급히 막는 바람에 손바닥과 입술이 닿았다.“주혁 씨, 저 이제 피곤해요.”하지만 그의 키스는 이미 파고들어 와 부드럽게, 젖는 줄 모르는 가랑비처럼 한순간에 장하리를 함락시켰다.그가 애틋한 얼굴로 바라보면 장하리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키스를 퍼붓다 짭짤한 맛이 느껴져 그가 몸을 일으켰다.언짢은 표정으로 눈을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가엾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하리 씨, 왜 그래요.”한참을 망설이던 장하리가 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이에 서주혁이 웃으며
반승제는 진세운을 의심하게 된 것만으로도 이미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의심들이 순식간에 타격을 받을 줄은 몰랐다.얽힌 실타래 같던 생각들이 조금 풀어지려는 찰나 더 엉켜버린 느낌이 들었다.“주소를 보낼 테니 여기로 와. 최근 네가 조사했던 사람들을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오기 전에 미행하는 사람이 있는지 잘 확인하고.”옛 친구가 그리웠던 온시환은 얼른 그러자고 대답했다.반승제에게 사고가 났을 때 온시환은 구체적인 상황을 모른 채로 갑자기 반승우와 함께 도주범의 신분으로 외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그는 서둘러 미행하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기 시작했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반승제가 보낸 주소로 향했다.중간쯤의 지점에서 온시환은 불안한 마음에 심지어 헬리콥터로 교통수단을 바꾸었다.헬리콥터는 아무래도 하늘에서 나는 것이므로 미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한 시간 후에야 두 사람은 선박 아래에서 만나게 되었다.늦가을이었으므로 노란 나뭇잎들이 바람 따라 아래로 흩날리고 있었다.온시환은 종래로 이런 모습의 반승제를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십몇 년을 함께 해온 친구들이 이렇게 생사가 갈릴 줄은 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승제야.”그가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주변에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온시환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반승제의 미간도 덩달아 찌푸려졌다.안색이 창백해진 온시환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몸이 굳었다. 분명 주의하고 또 주의하며 왔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반승제를 도망치게 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린 상황에서 어디 도망갈 곳이 있겠는가.게다가 이미 경찰이 출동해 온시환의 손에 수갑을 채운 상태였다.허락 없이 도주범과 통화에 심지어 고의로 모두를 속이고 도주범과 만나려 했다. 온시환은 반드시 조사를 받아야 했다.“얼른 도망가.”온시환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이었다.하지만 반승제는 아무런 말 없이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
모두가 두 사람의 높은 신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기에 몸을 사리고 있었다.온시환은 다른 차에 끌려갔고 반승제는 여전히 원래 차에 있었다.자동차가 한 산비탈을 지날 무렵, 한 구간에서 갑자기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갑작스러운 안개에 모두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안개가 커브 길이 연달아 있는 곳의 대략 200여 미터를 덮고 있었으므로 자동차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잇달아 멈추어 섰다.총구가 반승제의 이마를 겨누었다.“이거, 당신 쪽 사람이 한 짓이죠? 수작 부릴 생각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방아쇠를 당겨버릴지도 모르니까.”말을 마친 남성은 반승제의 수갑 반대쪽을 자동차 난간에 고정했다.차 주변은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로 둘러싸였다. 모두가 알고 있듯 갑자기 특정된 구간에 안개가 몰린 것을 보아 분명 누군가 반승제를 구하기 위해 만든 것임이 분명했다.반승제를 이렇게 쉽게 놓쳐서는 안 되었다. 그렇다면 윗선 분들께 보고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하지만 총을 겨눈 남성이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을 때 갑자기 현기증이 느껴졌다.“쾅.”육중한 물건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에 반승제는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았고 곧이어 전기톱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누군가 전기톱으로 난간과 수갑을 절단한 것이었다.심인우는 쓰러진 사람의 호주머니를 더듬어 열쇠를 찾은 후 공손하게 수갑을 풀어주었다.“대표님, 괜찮으십니까?”반승제가 손목을 움직여보며 고개를 저었다.차에서 내린 그는 곧바로 온시환이 있는 차로 향했다.혼미한 정신상태로 앉아 있던 온시환이 코를 찌르는 냄새에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승제?”주변에 가득한 흰 안개와 쓰러져 의식을 잃은 사람들을 보고 온시환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위에서 총살하면 어쩌려고!”“시환아. 알려줘. 진세운을 의심했던 이유가 뭔데?”“전에 룸에서 내가 코끝에 점으로 농담 삼아 허세 부렸잖아. 그 이후에 재벌 2세 친구가 진세운 귓불에 작은 붉은 반점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온시환의 얼굴이 핏기 없이 창백해졌다. 그럼에도 온시환은 믿어지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반승제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돌아가서 차에 있어. 윗사람들이 곧 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백 할아버지께서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줄거야. 그럼 다음에 보자.”다음을 기약함에도 그 다음이 언제일지 아무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온시환은 온몸이 굳어 그 자리에서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서 있었다.떠나던 반승제가 멀리에서 한마디 보탰다.“나중에 휴대폰 잘 봐봐. 혹시 도청 장치 같은 것이 또 붙어있는지. 진세운 그 자식 생각보다 똑똑한 녀석이야.”온시환은 여전히 아무 말하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보이지 않는 두려운 힘이 자신을 먹어 치우는 듯했다. 마치 자신이 거미줄에 걸린 나방같이 느껴졌다.자신이 거미줄에 걸린 줄도 모르고 발버둥 치는 멍청한 나방 말이다.그는 거미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갖지 못한 채 거미가 군침을 흘리며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만 있다.그 무기력함, 그 상실감은 누구도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반승제가 기선으로 돌아왔을 때 원진은 여전히 의자에 누워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그는 여전히 차가운 무표정의 얼굴이었는데 주변에 있던 경호원들은 그가 또 화를 낼까 두려워 모두 자리를 피해 있었다.반승제가 그에게 다가가 의자 다리를 툭 건드렸다.“다시 보내줘요.”눈을 천천히 뜬 원진이 입을 열었다.“여기가 어디라고. 혹시 당신 집 앞마당 정도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당씨 집안 아가씨 모시고 식사하러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갑자기 느긋해진 거죠? 당신이 전에 눈을 멀게 했던 놈 종적을 알게 되니 아가씨가 위험할까 봐 두려워진 거예요? 그래서 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거죠?”원진이 천천히 똑바로 앉더니 반승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그 새X가 어디에 있는지 안단 말이요?”그 사람은 원진의 둘째 형이며, 유일하게 포탄에서 운 좋게 탈출했던 사람이다.둘째 형은 임시로 다른 임무를 받
별장으로 돌아온 진세운은 소파에서 몸을 웅크리고 자는 성혜인을 발견했다.발걸음을 멈춘 그가 가볍게 성혜인을 흔들어 깨웠다.“혜인 씨?”잠을 자는 순간조차 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분명히 오랜 시간 잠을 잤음에도 성혜인은 잠이 물밀듯이 몰려왔다.“의사 선생님?”“왜 소파에서 자요? 편하게 위층 침대에서 자지.”잠에서 깬 성혜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하품하며 옆에 있는 휴대폰을 가리켰다.“선생님께서 준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는데 계속 받지를 않아서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생각하고 있었어요.”“아무 일 없을 겁니다. 오히려 혜인 씨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아, 그래요? 왜 그런지 잠을 잘수록 졸린 것 같아요.”말을 마친 성혜인은 또 소파에 기대어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잠에 들었다.진세운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용량은 얼마나?”“말씀하신 최대 용량입니다.”진세운이 천천히 손을 들어 성혜인의 눈앞을 휘적거렸다.성혜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더니 웃어 보였다.“왜 그래요?”“혜인 씨, 이것 좀 봐요. 혜인 씨가 이걸 주시하면...”...잠에서 깨어났지만 여전히 피곤했다. 이미 밤새 잠을 잤음에도 피곤함은 가셔지지 않았다.양미간을 꾹꾹 누르며 계단을 내려갈 때 진세운이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선생님, 오늘은 밖에 안 나가요?”“어젯밤에 일 다 해결해서 오늘은 쉬어요 되거든요.”성혜인은 소파 위에 놓였던 휴대폰을 가지고 반승제의 전화번호를 눌렀다.“혜인 씨, 승제 찾으면 무슨 말 하고 싶어요?”“함께 있어야죠.”“탈출 경로는 기억해요? 나중에 승제를 만나면 알려줘야 하니까요. 그래야 혜인 씨를 가뒀던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찾고 응징할 수 있죠.”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기억이 안 나요. 이미 시달리다 못해 정신상태도 말이 아니라서. 일단은 승제 씨와 연락하고 싶네요.”진세운이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신문을
진세운을 따라 차에 오르던 성혜인은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선생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요? 체감상 1분밖에 안 지난 것 같았는데.”알고 보니 벌써 두 시간이 지난 뒤였다.진세운이 안전벨트를 매라고 하곤 말을 보탰다.“혜인 씨는 요즘 푹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설기웅 만나고 돌아오면 좀 더 자요.”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꺼내 설의종에게 전화를 걸었다.“회장님, 사실 딸에 대한 단서는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설기웅 씨가 설인아 씨를 아끼잖아요. 지금 회장님과 함께 설기웅 씨를 만나고 싶어요. 방금 저도 설기웅 씨에게 연락해 두었으니 지금 바로 오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나중에 복수 당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럽니다.”설의종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 진세운을 만난 것이 고작 몇 시간 전이다.그때는 아무런 단서도 없다고 하다가, 이제 와서 이런 전화라니.전화를 끊은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위층에서 내려오는 설기웅을 바라보았다.설기웅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설의종이 입을 열었다.“누가 너더러 가문의 이름으로 반승제를 위협하라 했어?”“아버지, 인아를 그렇게 막 대하는데 오빠로서 당연히 복수해 줘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이제 금방 눈이랑 목이 회복되었는데 여전히 반승제 생각밖에 안 해요. 그러니 이 일의 원흉인 반승제가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 아닌가요?”“인아가 먼저 반승제를 건드렸다고 들었다.”설기웅의 얼굴은 차가웠다.“성혜인은 그런 짓 당해도 싸요.”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인아가 위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설인아는 최근 줄곧 방에 있었으며 종래로 거실로 내려온 적이 없었다. 그녀는 요즘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오늘 새벽 시력도 회복되었고 목도 조금 나아졌기에 말을 할 수 있게되었다.하지만 기뻐할 겨를도 없이 오빠가 진세운에게서 할 말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그 전에 설인아는 한 익명의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은 설의종이 친 딸을 찾기 위해 진세운을 찾았다는 것.설인아는 자
설기웅은 설인아를 안아 들고 위층으로 데려갔고 그 뒤는 나미선이 따랐다.계단 중간쯤 갔을 때, 나미선이 고개를 돌려 설의종을 향해 소리쳤다.“여보, 당신도 같이 올라와 봐요!”설의종의 표정은 매우 차가웠다. 이미 50대가 된 나이였지만 눈에는 늘 호수 같은 고요함과 차분함, 차가움이 공존해 있었다.“아니.”나미선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제가 뭘 잘못했나요? 점점 저한테 냉담한 것 같네요.”“하늘이.”“여보, 하늘이가 누구예요?”의혹투성이던 나미선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문득 여동생의 이름이 나하늘이었던것이 떠올랐던 것이다.“설마 나하늘 좋아하는 건 아니죠? 걘 가난한 작가와 사랑의 도피를 했었잖아요? 여보, 당신은 젊었을 때 그 아이를 좋아했고, 둘의 일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되면 결혼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죠. 하지만 설씨 가문 선조들이 그 아이에 대해 꿰뚫어 보고 당신과 함께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저와 결혼시켰어요. 그 아이가 당신을 포기한 건 걔가 안목이 없고 멍청해서예요.”설의종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그녀는 진실한 표정과 얼굴이었다.“여보, 다시는 그 얘기 안 하기로 약속했잖아요.”설의종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를 다독였다.연기력은 정말이지 여우주연상감이다. 한 치의 허점도 찾을 수 없는 명연기였다.이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설의종은 나미선의 눈빛부터 표정까지 조금의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다.그의 양미간이 찌푸려졌다....위층에서는 설인아가 오빠의 품에 안겨 펑펑 울고 있었다.“오빠, 진세운 씨 만나러 가지 마요. 그 사람은 못된 사람이에요. 이렇게 부탁할게요. 만약 정말 만나러 간다면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 준 약 절대 먹지 않을 거예요.”설인아의 눈에는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절대로 설씨 가문 공주님이라는 신분을 잃어서는 안되었다.성혜인은 가서 죽어버려야 한다.그녀는 꼭 성혜인을 죽게 할 것이다.설인아는 크게 심호흡했다. 이때 휴대폰이 진동했고 메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