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심문하는 듯한 말투였다. 서주혁에게 무엇이라도 알아낸 것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고생스럽게 달려온 건데, 서주혁은 자신이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장하리는 차마 반승제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서주혁의 옷깃을 만지작거렸다.“대표님, 주혁 씨가 많이 다치는 바람에 기억을 잃었어요. 그래서...”장하리는 목까지 빨개져 마치 삶아진 새우 같았다.서주혁이 그녀를 품에 안고 달래며 등을 토닥였다.“저 사람이 해칠까 봐 그래요?”장하리는 온몸에 열이 났다. 그녀는 두 손으로 옷을 꼭 쥐었다.반승제는 심란하게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장하리에게 말했다.“주혁이 먼저 올라가라고 해요. 따로 할 말이 있어요.”장하리가 얼른 서주혁의 손을 잡았다.“주혁 씨, 대표님은 주혁 씨의 가장 친한 친구시고 주혁 씨가 걱정돼서 온 거예요. 제가 다 설명해 드릴 순 없지만 거짓말은 아니니까 안심하고 먼저 올라가요.”서주혁은 내키지 않았다.이 소위 말하는 친구라는 녀석의 생김새가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왠지 모를 위기감을 느꼈다.그러나 이 며칠간 장하리를 밤마다 괴롭혀 왔으니 바람피울 생각은 절대 못 할 것이다.서주혁은 일어나 그녀의 입에 입맞춤한 뒤 위층으로 올라갔다.장하리는 부끄러움에 머리를 더 숙였고 손바닥은 땀투성이였다.“대표님, 할 말이 무엇입니까?”장하리는 반승제가 자신과 서주혁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서주혁이 올라가는 것을 다 확인하고서야 그는 담배를 비벼 껐다.“관계는 하되 마음은 주지 마요. 주혁이는 절대 그쪽 사랑할 수 없으니까.”그의 말에 장하리의 몸이 굳어졌다. 얼굴의 핏기마저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했다.이 며칠간 서주혁에게 안겨서 관계할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처음에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서주혁이 자신에게 이리 대하는 것은 모두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을.그러나 점점 현혹되었다.그녀는 자신을 미워했으므로 마음을 너무 쉽게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자기도 모르게 점점 빠져들었고, 지금
모두 사실이었다. 이 오해의 심각성을 확실히 상기시켜 주어야만 나중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장하리는 마치 혈도가 찍힌 것처럼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문을 열고 나가는 반승제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서주혁과의 옛날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항상 무표정으로 모욕적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았었다.생리적인 면에서의 도움을 제외하고 서주혁이 장하리와 함께 한 이유는 단지 그녀가 속궁합이 잘 맞는 상대였기 때문이다.이는 서주혁이 본인의 입으로 직접 한 말이었다.서주혁은 다른 여자와는 관계를 맺은 적도, 맺으려고 시도를 한 적도 없었다. 여자에 대한 혐오가 뼛속 깊이 새겨졌으니까.그러나 장하리가 자발적으로 침대에 오름으로써 그의 전례를 깨뜨렸다. 그는 관계를 맺는 행위를 극도로 싫어했지만, 이미 해버린 김에 성욕 해결용으로 여러 번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이것이 서주혁의 진심이었다. 그러니 굳이 장하리에게 착한 척, 다정한 척할 필요가 있겠는가.소파에 몸이 뻣뻣해질 때까지 앉아 있었을 무렵, 서주혁이 내려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왜 그래요?”흐린 안색에 서주혁이 걱정했다.장하리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주혁은 그녀의 귀에 입을 맞추고 목에 두른 스카프를 풀었다.울긋불긋한 예쁜 자국들이 드러났다.서주혁이 오동통하게 부은 그녀의 입술을 보고 참지 못하고 또 뽀뽀하려 했다. 그러나 장하리가 급히 막는 바람에 손바닥과 입술이 닿았다.“주혁 씨, 저 이제 피곤해요.”하지만 그의 키스는 이미 파고들어 와 부드럽게, 젖는 줄 모르는 가랑비처럼 한순간에 장하리를 함락시켰다.그가 애틋한 얼굴로 바라보면 장하리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키스를 퍼붓다 짭짤한 맛이 느껴져 그가 몸을 일으켰다.언짢은 표정으로 눈을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가엾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하리 씨, 왜 그래요.”한참을 망설이던 장하리가 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이에 서주혁이 웃으며
반승제는 진세운을 의심하게 된 것만으로도 이미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의심들이 순식간에 타격을 받을 줄은 몰랐다.얽힌 실타래 같던 생각들이 조금 풀어지려는 찰나 더 엉켜버린 느낌이 들었다.“주소를 보낼 테니 여기로 와. 최근 네가 조사했던 사람들을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오기 전에 미행하는 사람이 있는지 잘 확인하고.”옛 친구가 그리웠던 온시환은 얼른 그러자고 대답했다.반승제에게 사고가 났을 때 온시환은 구체적인 상황을 모른 채로 갑자기 반승우와 함께 도주범의 신분으로 외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그는 서둘러 미행하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기 시작했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반승제가 보낸 주소로 향했다.중간쯤의 지점에서 온시환은 불안한 마음에 심지어 헬리콥터로 교통수단을 바꾸었다.헬리콥터는 아무래도 하늘에서 나는 것이므로 미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한 시간 후에야 두 사람은 선박 아래에서 만나게 되었다.늦가을이었으므로 노란 나뭇잎들이 바람 따라 아래로 흩날리고 있었다.온시환은 종래로 이런 모습의 반승제를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십몇 년을 함께 해온 친구들이 이렇게 생사가 갈릴 줄은 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승제야.”그가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주변에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온시환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반승제의 미간도 덩달아 찌푸려졌다.안색이 창백해진 온시환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몸이 굳었다. 분명 주의하고 또 주의하며 왔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반승제를 도망치게 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린 상황에서 어디 도망갈 곳이 있겠는가.게다가 이미 경찰이 출동해 온시환의 손에 수갑을 채운 상태였다.허락 없이 도주범과 통화에 심지어 고의로 모두를 속이고 도주범과 만나려 했다. 온시환은 반드시 조사를 받아야 했다.“얼른 도망가.”온시환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이었다.하지만 반승제는 아무런 말 없이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
모두가 두 사람의 높은 신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기에 몸을 사리고 있었다.온시환은 다른 차에 끌려갔고 반승제는 여전히 원래 차에 있었다.자동차가 한 산비탈을 지날 무렵, 한 구간에서 갑자기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갑작스러운 안개에 모두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안개가 커브 길이 연달아 있는 곳의 대략 200여 미터를 덮고 있었으므로 자동차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잇달아 멈추어 섰다.총구가 반승제의 이마를 겨누었다.“이거, 당신 쪽 사람이 한 짓이죠? 수작 부릴 생각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방아쇠를 당겨버릴지도 모르니까.”말을 마친 남성은 반승제의 수갑 반대쪽을 자동차 난간에 고정했다.차 주변은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로 둘러싸였다. 모두가 알고 있듯 갑자기 특정된 구간에 안개가 몰린 것을 보아 분명 누군가 반승제를 구하기 위해 만든 것임이 분명했다.반승제를 이렇게 쉽게 놓쳐서는 안 되었다. 그렇다면 윗선 분들께 보고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하지만 총을 겨눈 남성이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을 때 갑자기 현기증이 느껴졌다.“쾅.”육중한 물건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에 반승제는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았고 곧이어 전기톱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누군가 전기톱으로 난간과 수갑을 절단한 것이었다.심인우는 쓰러진 사람의 호주머니를 더듬어 열쇠를 찾은 후 공손하게 수갑을 풀어주었다.“대표님, 괜찮으십니까?”반승제가 손목을 움직여보며 고개를 저었다.차에서 내린 그는 곧바로 온시환이 있는 차로 향했다.혼미한 정신상태로 앉아 있던 온시환이 코를 찌르는 냄새에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승제?”주변에 가득한 흰 안개와 쓰러져 의식을 잃은 사람들을 보고 온시환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위에서 총살하면 어쩌려고!”“시환아. 알려줘. 진세운을 의심했던 이유가 뭔데?”“전에 룸에서 내가 코끝에 점으로 농담 삼아 허세 부렸잖아. 그 이후에 재벌 2세 친구가 진세운 귓불에 작은 붉은 반점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온시환의 얼굴이 핏기 없이 창백해졌다. 그럼에도 온시환은 믿어지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반승제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돌아가서 차에 있어. 윗사람들이 곧 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백 할아버지께서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줄거야. 그럼 다음에 보자.”다음을 기약함에도 그 다음이 언제일지 아무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온시환은 온몸이 굳어 그 자리에서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서 있었다.떠나던 반승제가 멀리에서 한마디 보탰다.“나중에 휴대폰 잘 봐봐. 혹시 도청 장치 같은 것이 또 붙어있는지. 진세운 그 자식 생각보다 똑똑한 녀석이야.”온시환은 여전히 아무 말하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보이지 않는 두려운 힘이 자신을 먹어 치우는 듯했다. 마치 자신이 거미줄에 걸린 나방같이 느껴졌다.자신이 거미줄에 걸린 줄도 모르고 발버둥 치는 멍청한 나방 말이다.그는 거미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갖지 못한 채 거미가 군침을 흘리며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만 있다.그 무기력함, 그 상실감은 누구도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반승제가 기선으로 돌아왔을 때 원진은 여전히 의자에 누워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그는 여전히 차가운 무표정의 얼굴이었는데 주변에 있던 경호원들은 그가 또 화를 낼까 두려워 모두 자리를 피해 있었다.반승제가 그에게 다가가 의자 다리를 툭 건드렸다.“다시 보내줘요.”눈을 천천히 뜬 원진이 입을 열었다.“여기가 어디라고. 혹시 당신 집 앞마당 정도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당씨 집안 아가씨 모시고 식사하러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갑자기 느긋해진 거죠? 당신이 전에 눈을 멀게 했던 놈 종적을 알게 되니 아가씨가 위험할까 봐 두려워진 거예요? 그래서 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거죠?”원진이 천천히 똑바로 앉더니 반승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그 새X가 어디에 있는지 안단 말이요?”그 사람은 원진의 둘째 형이며, 유일하게 포탄에서 운 좋게 탈출했던 사람이다.둘째 형은 임시로 다른 임무를 받
별장으로 돌아온 진세운은 소파에서 몸을 웅크리고 자는 성혜인을 발견했다.발걸음을 멈춘 그가 가볍게 성혜인을 흔들어 깨웠다.“혜인 씨?”잠을 자는 순간조차 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분명히 오랜 시간 잠을 잤음에도 성혜인은 잠이 물밀듯이 몰려왔다.“의사 선생님?”“왜 소파에서 자요? 편하게 위층 침대에서 자지.”잠에서 깬 성혜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하품하며 옆에 있는 휴대폰을 가리켰다.“선생님께서 준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는데 계속 받지를 않아서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생각하고 있었어요.”“아무 일 없을 겁니다. 오히려 혜인 씨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아, 그래요? 왜 그런지 잠을 잘수록 졸린 것 같아요.”말을 마친 성혜인은 또 소파에 기대어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잠에 들었다.진세운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용량은 얼마나?”“말씀하신 최대 용량입니다.”진세운이 천천히 손을 들어 성혜인의 눈앞을 휘적거렸다.성혜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더니 웃어 보였다.“왜 그래요?”“혜인 씨, 이것 좀 봐요. 혜인 씨가 이걸 주시하면...”...잠에서 깨어났지만 여전히 피곤했다. 이미 밤새 잠을 잤음에도 피곤함은 가셔지지 않았다.양미간을 꾹꾹 누르며 계단을 내려갈 때 진세운이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선생님, 오늘은 밖에 안 나가요?”“어젯밤에 일 다 해결해서 오늘은 쉬어요 되거든요.”성혜인은 소파 위에 놓였던 휴대폰을 가지고 반승제의 전화번호를 눌렀다.“혜인 씨, 승제 찾으면 무슨 말 하고 싶어요?”“함께 있어야죠.”“탈출 경로는 기억해요? 나중에 승제를 만나면 알려줘야 하니까요. 그래야 혜인 씨를 가뒀던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찾고 응징할 수 있죠.”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기억이 안 나요. 이미 시달리다 못해 정신상태도 말이 아니라서. 일단은 승제 씨와 연락하고 싶네요.”진세운이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신문을
진세운을 따라 차에 오르던 성혜인은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선생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요? 체감상 1분밖에 안 지난 것 같았는데.”알고 보니 벌써 두 시간이 지난 뒤였다.진세운이 안전벨트를 매라고 하곤 말을 보탰다.“혜인 씨는 요즘 푹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설기웅 만나고 돌아오면 좀 더 자요.”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꺼내 설의종에게 전화를 걸었다.“회장님, 사실 딸에 대한 단서는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설기웅 씨가 설인아 씨를 아끼잖아요. 지금 회장님과 함께 설기웅 씨를 만나고 싶어요. 방금 저도 설기웅 씨에게 연락해 두었으니 지금 바로 오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나중에 복수 당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럽니다.”설의종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 진세운을 만난 것이 고작 몇 시간 전이다.그때는 아무런 단서도 없다고 하다가, 이제 와서 이런 전화라니.전화를 끊은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위층에서 내려오는 설기웅을 바라보았다.설기웅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설의종이 입을 열었다.“누가 너더러 가문의 이름으로 반승제를 위협하라 했어?”“아버지, 인아를 그렇게 막 대하는데 오빠로서 당연히 복수해 줘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이제 금방 눈이랑 목이 회복되었는데 여전히 반승제 생각밖에 안 해요. 그러니 이 일의 원흉인 반승제가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 아닌가요?”“인아가 먼저 반승제를 건드렸다고 들었다.”설기웅의 얼굴은 차가웠다.“성혜인은 그런 짓 당해도 싸요.”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인아가 위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설인아는 최근 줄곧 방에 있었으며 종래로 거실로 내려온 적이 없었다. 그녀는 요즘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오늘 새벽 시력도 회복되었고 목도 조금 나아졌기에 말을 할 수 있게되었다.하지만 기뻐할 겨를도 없이 오빠가 진세운에게서 할 말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그 전에 설인아는 한 익명의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은 설의종이 친 딸을 찾기 위해 진세운을 찾았다는 것.설인아는 자
설기웅은 설인아를 안아 들고 위층으로 데려갔고 그 뒤는 나미선이 따랐다.계단 중간쯤 갔을 때, 나미선이 고개를 돌려 설의종을 향해 소리쳤다.“여보, 당신도 같이 올라와 봐요!”설의종의 표정은 매우 차가웠다. 이미 50대가 된 나이였지만 눈에는 늘 호수 같은 고요함과 차분함, 차가움이 공존해 있었다.“아니.”나미선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제가 뭘 잘못했나요? 점점 저한테 냉담한 것 같네요.”“하늘이.”“여보, 하늘이가 누구예요?”의혹투성이던 나미선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문득 여동생의 이름이 나하늘이었던것이 떠올랐던 것이다.“설마 나하늘 좋아하는 건 아니죠? 걘 가난한 작가와 사랑의 도피를 했었잖아요? 여보, 당신은 젊었을 때 그 아이를 좋아했고, 둘의 일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되면 결혼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죠. 하지만 설씨 가문 선조들이 그 아이에 대해 꿰뚫어 보고 당신과 함께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저와 결혼시켰어요. 그 아이가 당신을 포기한 건 걔가 안목이 없고 멍청해서예요.”설의종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그녀는 진실한 표정과 얼굴이었다.“여보, 다시는 그 얘기 안 하기로 약속했잖아요.”설의종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를 다독였다.연기력은 정말이지 여우주연상감이다. 한 치의 허점도 찾을 수 없는 명연기였다.이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설의종은 나미선의 눈빛부터 표정까지 조금의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다.그의 양미간이 찌푸려졌다....위층에서는 설인아가 오빠의 품에 안겨 펑펑 울고 있었다.“오빠, 진세운 씨 만나러 가지 마요. 그 사람은 못된 사람이에요. 이렇게 부탁할게요. 만약 정말 만나러 간다면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 준 약 절대 먹지 않을 거예요.”설인아의 눈에는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절대로 설씨 가문 공주님이라는 신분을 잃어서는 안되었다.성혜인은 가서 죽어버려야 한다.그녀는 꼭 성혜인을 죽게 할 것이다.설인아는 크게 심호흡했다. 이때 휴대폰이 진동했고 메시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바로 문을 나섰다.공지민은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한편 온시환은 집을 나서자마자 추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온시환은 침착하게 옷을 발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거실 한가운데에서 추지성은 한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온시환을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금세 흥미를 잃고 입맞춤을 멈췄다.“시환아?”추지성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온시환은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무시했다.추지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이만 가봐.”여인은 옷이 주워 입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자 추지성은 타올 하나만 걸친 채 태연하게 소파로 와서 앉았다.“야, 너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 좀 하고 와라.”온시환은 담배를 쥔 손이 축 늘어진 채 지쳐 보였다.추지성은 의아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공지민과 화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가 싶었다.“무슨 일이야? 아침에 전화로 자랑질하더니만. 아, 맞다. 너 점 다시 찍었더라? 확실히 점 있는 네가 낫다. 예전에 다른 여자들도 그 점이 좋아서 너한테 홀렸잖아.”온시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구은우의 죽음을 조사하려는 거였어.”추지성은 옆에 놓인 주스를 집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죽은 사람의 일을 왜 조사해? 이게 몇 년 전 일이냐. 다 끝난 거잖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난 가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돼. 남자라면 이미 새로운 연애 몇 번은 했을 텐데.”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봐봐. 주변에 아내 잃은 남자들 있지? 그놈들 지금 얼마나 잘 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근데 남편 잃은 여자들은? 평생 못 벗어나.”추지성의 가족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의 친누나는 난
공지민은 정말 지쳤다. 밤새 몇 번이나 잠들 뻔했지만 온시환이 계속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자신의 위에 엎드린 온시환을 바라봤다. 그의 볼은 붉게 달아올랐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끊임없이 떨어졌다.온시환이라는 이 나쁜 남자 몸매 하나는 참 잘 관리했다.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문득 생각했다. 그녀는 코끝에 점이 있는 온시환이 더 좋았다. 만약 점이 없었다면 그와 대화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온시환은 그녀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자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빌어먹을.’공지민이 이 점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다행히 다시 그 점을 되돌려 놨다.온시환은 그녀의 뒤통수를 붙잡고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속으로 흡수해 버리고 싶어 하는 듯했다.그날 공지민은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다.원래 아침에 일어나 사골국을 끓이려고 했지만 전날 밤 온시환의 끈질긴 괴롭힘에 결국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깨어났을 땐 창밖에 저녁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며 온시환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그래, 점 다시 찍었어. 신경 꺼. 쪽팔려도 내가 쪽팔려. 너랑 무슨 상관인데. 자꾸 그딴 소리하면 화낼 거야.”지난번 온시환이 점을 제거했을 때 많은 사람이 물었다. 그는 그냥 없애고 싶어서 없애는 거라며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말해 왔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점을 다시 찍자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궁금해했다.온시환은 아무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추지성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온시환은 그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다.사실 추지성이 온시환을 부추기지만 않았더라도 그와 공지민이 이렇게까지 어긋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추지성은 여전히 냉철했다.“지난번에 너희가 금방 헤어지고 네가 병원에 실려 갔을 때도 지민 씨는 한 번도 널 보러 오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돌아온 걸 보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나는 너희가 다시 잘되길 반
하지만 택시 기사는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공지민이 내리려 할 때까지도 계속 말했다.“내가 보니까 그 남자 친구 참 괜찮아 보이던데. 뒤따라오는 저 차도 그 사람 거죠? 아무리 싸웠어도 아가씨 혼자 차 타고 가는 거 걱정돼서 저렇게 따라오는 거 아니겠어요?”공지민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차를 바라보았다.온시환의 차가 틀림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시급했다.집에 도착한 공지민은 곧장 인터넷에서 그 남자 배우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하지만 검색 결과는 이름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그의 가족에 대한 부분은 아예 생략돼 있었다.하는 수 없이 그녀는 예전에 알던 몇몇 기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혹시라도 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정보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공지민은 연예계에서 활동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인맥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사교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이번 조사가 더욱 쉽지 않았다.소파에 앉아 돈을 송금하며 기자들에게 의뢰했지만 돌아온 정보는 여전히 부족했다.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의 연락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마음이 초조해진 공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분명 실마리를 찾았지만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공지민의 시야에 여전히 아래에 서 있는 온시환의 차가 들어왔다.만약 온시환이의 능력이라면 이런 조사는 금세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고 집 문을 열었다.아래로 내려온 그녀는 온시환의 차 앞으로 걸어갔다.운전석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던 온시환은 공지민을 보자 깜짝 놀란 듯했다.공지민이 창문을 두드리자 그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시환 씨.”온시환은 그녀가 자신을 쫓아내려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코끝에는 예전과 똑같은 점이 다시 자리 잡고 있었다.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공지민은 남자의 말을 들으며 그를 부축했다. 남자는 술이 정말 많이 취했는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해도 다 대답했다.10억...엘리베이터가 한 층에서 멈췄을 때 공지민은 그를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남자는 자신의 방 카드를 꺼냈고 공지민을 향한 시선은 이미 노골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다.공지민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지만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그가 건넨 카드를 받아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손목을 잡아 막았다.뒤를 돌아보니 온시환이었다.온시환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그렇게 공지민은 그의 가슴팍에 부딪혔고 옆에 있던 남자 배우는 누군가 자신을 막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있다가 온시환의 얼굴을 보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온 작가님?”온시환은 공지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원래부터 이 남자와 뭔가 할 생각이 없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얼굴로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그의 감정은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을 때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공지민, 너 그렇게 절박해?”‘절박해’라는 말이 그의 목에서 걸리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려 했지만 너무 떨려 담배는 그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굴러갔다.공지민은 온시환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남자 배우와 관련된 조사에 쏠려 있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반드시 구은우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결심했다.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가자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온시환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아래층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모임 장소는 고급스러워서 촬영을 마친 여러 제작팀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오늘 밤에도 몇몇 팀이 이곳에 모여 회식을 하고 있었다.연예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온시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
구은우는 대학교 1학년 때 공지민과 사귀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놀러 갔다가 구은우가 파도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구은우는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진짜 죽었네.’온시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는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었지만 추지성이 그의 손 가까이에 있던 담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또 피우려고? 오늘 하루에 대체 몇 대나 피운 거야? 게다가 여긴 병원이잖아. 금연 구역이라고.”온시환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한편 추지성은 서류를 한 번 살펴본 뒤 감탄을 내뱉었다.“와, 운명도 참 잔인하네.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 같이 놀러 갔는데, 결국 한 사람이 사고로 떠나버리다니. 남겨진 사람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아마 끊임없이 생각할 거야. 그날 바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데 말이야, 구은우는 공지민이 가장 사랑했던 해에 떠났어. 그리고 그해는 구은우가 공지민을 가장 사랑했던 해이기도 했지.”구은우는 열여덟 살 공지민의 삶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이후로 누가 나타나더라도 구은우를 대신할 순 없었다.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었다.추지성은 이제는 공지민에 대해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온시환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공지민에게 그저 장난이었다고. 결국 장난이 과해져 자신은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는 가볍게 떠난 것뿐이었다.“그런데 시환아, 너 눈치챘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해가 네가 수술을 받았던 해랑 딱 겹쳐. 뭔가 운명 같지 않아?”온시환은 그런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적으로 웃었다.“남을 구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내버려두고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결국 구해줬다는 그 아이는 당일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짐승을 구하는 게
온시환은 그대로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정장에 먼지가 묻어 뿌옇게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꼭대기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이 그를 다시 끌어당기려 하자 온시환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지민아, 오늘 밤의 달 좀 봐.”공지민은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오늘 달은 분명 아름다웠고 내일 날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며 신중하게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지민은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공지민이 떠나는 것을 본 온시환은 당황해 급히 뒤쫓으려다 그만 술에 취한 상태로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으로 본 적이 없었다.그는 흙투성이가 된 정장차림으로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다리가 심하게 다친 듯 몇 번을 시도해도 실패하고 말았다.강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어느 정도 맑게 해주었고 그제야 그는 현실을 자각했다.‘이건 꿈이 아니야. 지민이가 정말 나를 보러 온 거야.’공지민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다쳤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병원에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나섰다.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온시환은 공지민의 손목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 같았다.공지민은 옆에 있던 의사에게 물었다.“얼마나 쉬어야 하나요?”“2주 정도는 안정이 필요해요. 당분간은 목발을 써야 할 거예요.”공지민은 병원 매점에서 목발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온시환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온시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공지민은 목발을
온시환이 집에 돌착했을 때도 서주혁의 팔을 붙잡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서주혁이 그를 떼어내면 온시환은 다시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지민아...”“난 정말 모르겠어. 왜 날 대체품으로 삼았어? 그렇게 구은우가 좋으면 그냥 그 사람 찾아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건데.”“내가 네 장난감이냐, 나는 당해도 싸다 이거야?”서주혁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창피해서 버리고 가버리고 싶었다.온시환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서주혁은 가정부에게 그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온시환의 집을 나섰다. 취한 사람과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서주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시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공지민이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황당했다. 경찰은 온시환이 음주 운전을 하다 적발되었으니 와서 그를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공지민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친구분을 데려가 주실 수 있을까요? 음주 운전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면 안 될까요?”“그분께서는 당신에게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도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했고요.”공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결국 경찰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고 평소의 산만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공지민은 경찰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온시환이 다시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는 보증을 하고 나서야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 살짝 당겼다.온시환은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그녀를 보고 꿈을 꾸는 줄 알았다.갑자기 꿈속 공지민의 얼굴이 사라질까 봐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지민아?”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차가운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대체 원하는 게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