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마음이 한결 놓였다. 피로에 온몸이 무겁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그래도 해 뜰 때까지 이곳에 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유리 조각을 깨끗이 치워 방 안에 있던 쓰레기봉투를 집어 들고 보온 도시락도 잊은 채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또 한지은을 마주쳤다.조희준에게 얼마나 시달렸던 건지, 걷는 자세마저 어정쩡했다.물론 성혜인 역시 다친 발목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했다.성혜인을 발견한 한지은은 피식 웃었다. 비슷한 자세로 걸으며 야밤에 호텔을 빠져나가는 성혜인을 보고 있자니, 그녀가 떠올릴 수 있는 답안은 하나뿐이었다.‘고상한 사람처럼 굴더니, 몸이나 팔고 똑같은 여자였네.’엘리베이터 안. 한지은은 양손으로 팔짱을 낀 채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으며 픽 웃었다.“누구랑 있었어요? 고생 좀 했나 봐요.”무너지는 성혜인의 표정을 보니 꽤 고소했다. 그녀는 막말을 더 퍼부었다.“그분이 만족했겠는데요? 얼마 받았어요?”성혜인은 얼굴이 구겨졌지만 아무런 대답없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그대로 나갔다.그 모습에 화가 난 한지은이 큰 보폭으로 그녀의 뒤를 쫓아왔다.“오늘 밤 일은 모른 척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오늘 당신이 호텔에 온 일 다 불어 버릴 테니까! 어차피 둘 다 한 배에 탔는데, 무서울 게 뭐야!”한지은은 당당했다. 사실 성혜인이 조희준과의 일을 회사에 퍼뜨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성혜인도 은밀한 사생활을 들켰으니 두려움이 사라졌다. 하늘이 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바로 그때, 로비 안으로 들어오는 한 여자가 성혜인의 눈에 띄었다. 기가 꽤 세 보이는 여자였다.성혜인은 바로 몸을 돌려 한지은을 쳐다봤다.“조희준, 결혼한 거 알죠? 호텔에서 이렇게 뒹굴다가 부인에게 들키면 후폭풍이 상당할 텐데요.”한지은은 그녀의 말에 비웃으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집에 있는 여편네는 신경도 안 쓴다고 사장님이 그러셨어요. 저만 좋아한다고요. 질투해요? 하긴, 3년이나 같이
반승제는 손에 붕대를 감은 채로 BH그룹에 도착하자마자 윤선미를 만나게 되었다. 예전에는 안하무인이던 윤선미가 사뭇 달라진 태도로 반승제의 손을 바라보았다. “반 대표님, 손은 어쩌다가...”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대충 대답했다. “다쳤어.”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는 그대로 사무실로 들어갔다. 윤선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마침 이때 카운터에서 사람이 올라와 사무실의 문을 두드리려고 했다. 윤선미는 급하게 다가가 문을 두드리려는 사람을 막아 나섰다. “예약은 하고 들어가려는 거예요?”카운터의 여직원은 확실히 예뻤다. BH그룹의 직원답게 뭐 하나 빠지는 부분이 없었다. “선미 아가씨, 대표님 앞으로 선물이 도착해서 가져다드리는 참이었습니다.”그 말에 윤선미의 표정은 더욱 굳어져 바로 그 선물을 빼앗아 들었다. “내가 가져다드리면 돼요. 내려가서 카운터나 봐요.”살짝 조롱이 섞인 말이었지만 윤선미가 이러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고위층 사람들은 카운터를 지날 때 가끔 미소를 지어주곤 했다. 유독 윤선미만이 일반 직원임에도 불구하고 콧대를 세우며 지나가곤 했다. 카운터의 직원은 어쩔 수 없었다. 그저 말 한마디 더 붙일 뿐이었다. “대표님의 디자이너가 보낸 선물입니다. 어제 호텔에서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다네요.”윤선미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뭐? 호텔이요?”카운터의 직원은 귀청이 찢어질 것만 같은 윤선미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지만 굳은 표정의 윤선미를 보니 속은 통쾌해졌다. 사실 그녀도 제대로 된 속사정을 모르지만 일부러 말을 보탰다. “디자이너분이 대표님 방에서 무슨 물건을 망가뜨렸나 봐요, 어제 두 사람이 같은 방을 썼나 보죠.” 아무렇게나 뱉은 말이 진실이라는 것은 둘 중 아무도 몰랐다. 윤선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이를 갈았다. “저급한 년! 사람을 꼬실 생각밖에 안 하지.”윤선미는 손안의 커프스가 더럽게 느껴져 확 던져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반승제의 물건
성휘는 임남호를 증오했다. 이전에 임남호가 몇천만이나 되는 거래를 망쳐버릴 뻔했다. 그때의 성휘는 임남호가 저지른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돌아간 전처의 동생을 도와주려 했는데 상대가 은혜를 원수로 갚을 줄은 몰랐다. 성혜인이 임동원과 연락을 주고받는 것까지는 백번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다고 쳐도 임남호와 연락하는 것은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됐다. 성휘는 그저 성혜인에게 크게 실망했다. 성혜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성혜인은 성휘 앞에서 거짓말을 할 줄 몰랐다. 성휘가 이 일에 대해 알았으니 성휘에게서 돈을 빌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자기의 아버지였지만 성혜인은 돈이라는 단어를 꺼내기 어려웠다. 그리고 성휘의 간암을 떠올리니 힘이 탁 풀렸다. “아빠, 제가 그날 파티에 못 간 이유는 임남호 때문이 아니라 반승제 씨가 다쳐서 병원에 다녀오느라고 그랬어요.”성휘의 눈이 길게 찢어졌다. 반승제가 그날 밤 참가하지 않았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성혜인이 이런 일로 그를 속일 사람은 아니었다. 이런 거짓말은 건너 물어보기만 하면 탄로되기 쉬웠으니.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속이 나아진 느낌이었다. “임남호 때문이 아니라니 괜찮다. 그런 자식과 어울리지 말거라. 네 삼촌과도 적게 연락하고. 그 하진희도 썩 좋은 사람은 아니고, 임동원과 이소애는 또 그 애를 감싸기만 하니 언젠가는 기필코 일이 터지고 말 것이다.”성혜인도 그 관점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 16억이었다. 성휘의 기분이 좋아 보이니 이 김에 반승제의 선물을 사려고 하면 승낙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혜인이 입을 열기 전에 성휘의 핸드폰이 울렸다. 걸려 온 번호를 본 그의 눈에 싫증이 서렸지만 그대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인가.”핸드폰 한쪽의 이소애는 말을 더듬더니 겨우 입을 뗐다. “예전의 일 때문에 우리 집사람들을 싫어하는 것을 알지만... 방법이 없어서 연락드렸어요. 진희가 저번에 남의 차를 박는 바람에 16억을 배상하
최근 몇 년 들어 성혜인은 한 번도 성휘를 찾아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성휘도 계속 바빴기에 극히 드물게 이 일을 생각했다. 하긴 그의 곁에는 소윤, 성혜원, 그리고 성한이 있으니까.성혜인은 혼자서 일을 잘하고 있었다. 외숙모네의 16억만 아니면 그녀가 돈이 모자랄 일은 없었다.그녀는 단지 지난번 곤경에 처했을 때 성휘에게 요구한 돈이 회수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입술을 달싹였다.“아빠, 몸 잘 챙기세요. 전 오늘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래, 가보거라. 네가 여기에 오면 나를 화나게만 할 거야. 결혼했으면 결혼을 한 사람답게 행동해야지.”성혜인은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네.”라고만 대답하고 나간 뒤 병실의 문을 닫았다.엘레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성휘를 보러온 성혜원과 마주쳤다.성혜원의 낯빛은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눈빛에 생기가 보였다.“언니.”성혜인는 방금 성휘가 한 말이 떠올랐고 이 여동생이 분명히 성휘의 앞에서 쓸데없는 말을 많이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몸은 좀 괜찮아졌어?”“많이 좋아졌어, 언니. 아빠랑 또 싸운 거야? 안색이 안 좋은 거 같은데.”성혜인은 더 이상 이 주제를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나 대신 아빠랑 많이 얘기해줘.”성혜원은 얼굴이 굳어져 이내 대답했다. “응.”성혜인이 가고 그녀의 눈에는 웃음기가 사라지고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는 약간 내키지 않았다.원래는 파티에서 반승제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그는 파티에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밤새 실망하고 결국 또 병원에 와서 쉬게 되었다.그녀는 겨우 컨디션을 조절하고 그날 밤 제일 예쁜 드레스를 입었다.눈가에는 서운함이 드리워졌다. 서두르지 말아야 했다.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것이다.성혜인은 차에 탑승한 뒤 머리가 아파져 부동산 쪽에 연락해 전에 집을 구매하기 위해 마련했던 돈을 다시 환급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상대방은 정중한 말투로
하지만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성혜인의 말을 다 들었을게 뻔하다. 그녀는 갑자기 어색해졌다. 하지만 반승제는 그녀가 얘기하는 남편이라는 사람이 본인인 줄 모를 테니, 성혜인은 한숨을 돌리고 반승제의 상처를 관찰했다. 그래도 그녀를 위해 나서다가 칼을 맞은 것이니 예의상으로라도 안부를 물어야 했다. “반 대표님, 상처는 어떻게 되었나요?”그녀는 핸드폰을 거두고 급히 다가갔다. 임경헌이 반승제의 뒤에 서서 성혜인의 말투를 따라 했다. “저희는 연애결혼이라 서로를 엄청나게 사랑해요... 풉.”임경헌은 성혜인을 따라 하더니 그녀를 보고 웃음을 지었다. 성혜인은 자기가 한 낯간지러운 말이 이미 두 사람의 귀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았다. “못 볼 꼴을 보였군요.”임경헌은 성혜인의 혼인 여부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고고한 성혜인도 이런 얘기를 한다니 그녀의 남편을 확실히 사랑하는 모양이었다. 이전에 성혜인에게 여자친구 행세를 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을 떠올리니 마음속으로 죄책감이 들었다. “페니 씨, 저번에 여자친구 역할을 부탁한 거, 남편분이 화내지는 않겠죠?”성혜인의 입가가 바르르 떨렸다. 그 말이 웃기기도 하고 다른 마음이 있는 것도 같아서 그저 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에요.”임경헌은 눈썹을 까딱거렸다. “그건 또 모르죠. 남자는 의외로 이런 거에 잘 삐져요.”성혜인은 작게 마른기침을 했다. 이 화제를 더 이상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 또 반승제의 손을 보며 물었다. “상처는 왜 또 벌어졌어요?”반승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좁혀진 그녀의 미간은 반승제에 대한 걱정을 보여주는 듯했다. 성혜인은 그가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멋쩍게 혼잣말을 이어갔다. “오늘 저녁은 뼈해장국이라도 드셔야 겠어요.”임경헌은 의문스럽다는 듯 반승제와 성혜인을 번갈아 보았다. “무슨 국이요? 페니 씨, 제 사촌 형한테 끓여주실 것처럼 얘기하네요?”성혜인은 간단하게 사건들을 설명했다. 임경헌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바뀌
성혜인은 눈썹을 까딱거렸다. 더 보고 싶었지만 반승제는 사생활을 침범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게 뻔했기에 화면을 꺼버렸다. 하지만 윤단미는 또 문자를 보내왔다. 「승혜한테서 들었어, 결혼했다며. 네 아내한테는 정말 고마워. 내가 없을 때 널 챙겨주고 있으니까.」참 여우짓 같은 문자였다. 성혜인은 반승제를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자는 직감적으로 여우짓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 여자는 이런 여우짓을 좋아하지 않지만 남자들은 달랐다. 반승제가 좋아하는 스타일도 이런 사람이었다니. 성혜인은 머릿속에서 스치듯 지나간 생각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차 키와 핸드폰을 든 채 엘리베이터를 탔다. 반승제는 1층의 홀에서 성혜인을 기다리다 커다란 통유리 앞에 와서 섰다. 성혜인이 내려올 때 중간에 있는 커다란 기둥 때문에 반승제를 단번에 발견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반승제의 핸드폰이 자기 손에 있으니 그녀는 그저 습관적으로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반승제는 한 번에 엘리베이터에 탄 성혜인을 발견했다. 이미 10분 정도 기다린 그는 살짝 따분해져서 그녀의 방향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안에 있던 성혜원을 발견했다. 성혜원은 자신의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반승제는 이러한 노골적인 시선을 싫어했기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성혜원은 성휘가 배고프다는 얘기에 몸도 회복됐으니 내려와서 밥을 사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 남아서 성휘가 성혜인의 얘기를 하는 것도 듣기 싫었다. 하지만 신이 그녀에게 이러한 서프라이즈 선물을 주다니. 나가려던 그녀는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를 않았다. 반승제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나가려는 게 아닌가?” 반승제의 눈에 성혜원이 바로 그의 아내 성혜인이었다. 그래서 말투도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딱딱했다. 성혜원의 눈에 실망이 어렸다. 하지만 이내 천천히 다가가며 물었다. “반승제 씨,
차에 오른 그녀는 운전석에 앉았다.발목의 상처가 아직 조금 아프긴 했지만 거의 다 나았다.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없었다. 그로 인해 차 안의 분위기도 더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성혜인도 액셀을 밟지 않고 백미러로 그를 바라보았다.포레스트 펜션에 가는 걸까, BH그룹에 가는 걸까, 아니면 호텔로 가는 걸까?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여기 휴대폰입니다.”그녀는 반승제에게 핸드폰을 건넸다.반승제는 핸드폰을 받아 들고 핸드폰 화면에 뜬 두 개의 새 알람 소식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성혜인은 그가 메시지를 확인했는지는 보지 못했지만 반승제의 기분이 더 안 좋아진 것은 알 수 있었다.그와 직접 대화를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런 짜증.평소 반승제는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윤단미의 문자 하나로 그가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게 하다니.성혜인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첫사랑인가.“BH그룹으로 돌아가지.”그는 핸드폰을 옆에 간단히 던져놓고는 답장하지 않았다.성혜인도 애써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차를 몰고 BH그룹으로 가려고 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아주머니한테서 연락이 온 것이다.“혜인 아가씨, 반 회장님께서 갑자기 포레스트 펜션으로 오셨는데 지금 당장 반 대표님과 오시라고 합니다.”성혜인은 자신이 스피커폰을 안 켠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눈에 놀라움이 서렸다.반 회장님께서 포레스트 펜션에 가셨다니!그녀는 백미러로 또 한 번 반승제를 보았다. 반승제의 핸드폰도 울린 걸 보니 반 회장님께서 직접 그에게 전화를 거신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반승제는 발신자를 보고는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할아버지.”“승제야, 나 지금 포레스트 펜션에 있다. 너 손을 다쳤다고 하던데 좀 와서 보자꾸나.”“할아버지, 저 지금 BH그룹 긴급회의에 참석해야 해요. 아마 늦게 돌아갈 것 같습니다.”“급하지 않아, 기다리마.”반 회장님과의 전화를 끊은 후, 곧바로 아주머니 쪽에서도 전화를 끊었다.그 시각,
“반 회장님, 저랑 승제 씨 잘 지내고 있어요.”그녀는 나긋나긋한 말투로 얘기하며 차를 한잔 건넸다. “그것보다, 네 몸을 걱정해야 할 텐데.”반태승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입가의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반승제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사람 보는 눈은 있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 다 노력한다더니 진짜인 모양이었다. 알콩달콩한 부부를 생각하며 그는 그만 떠보고 차를 마셨다. “혜인아, 만약 겁도 없는 것들이 널 건드리면 봐줄 필요 없다. 승제한테 해결해달라고 하면 된다.”성혜인은 이 화제에 대해 더 말하기 어려웠다. 이러다가 거짓말이 탄로 날까 봐서였다. 한 시간 후, 그녀는 몸을 일으켜 국을 끓이러 갔다. “혜인아, 이런 일은 다른 사람을 시키면 된다. 왜 직접 하려고 하니.”“회장님, 이건 제가 승제 씨랑 약속한 것이라서...”그 말을 들은 반태승은 더욱 기뻐서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웃었다. 그리고는 반승제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떠났다. 성혜인은 직접 그를 배웅하고 차가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 선 채 멍을 때렸다. 유경아가 옆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성혜인은 유경아가 반태승의 앞에서 진실을 얘기하지 않은 것이 고마웠다. 유경아는 그것보다는 반태승의 건강을 더욱 걱정했다. 반태승은 돌아가는 길에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어 칭찬을 쏟아부었다. 이때의 반태승은 회의에 참여 중인 터라 미간을 살짝 좁혔다. 저번과 같이 칭찬받았다. 저번에는 큰 거래를 성사해서였지만 지금은 왜 칭찬을 받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승제야, 그럼 나는 먼저 돌아가마. 너희 사이를 방해하면 안 되지. 하지만 너 너무 바쁘다고 해서 혜인이를 챙겨주지 못하면 안 된다. 혜인이는 널 좋아해, 아니면 왜 너한테 자기를 바치겠어.”반태승은 말을 마치고 나서 홀로 웃더니 또 말을 이어갔다. “너 이 자식, 잘하고 있어.”반승제는 얼굴이 삽시에 굳었다. 도대체 그 여자가 반태승 앞에서 뭐라고 지껄인 것인지. 자기를 나한테 바치다니? 그는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
그러나 성혜인은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도우미에게 꽃병을 건네주고는 다시 설연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난 저녁 비행기를 타고 곧 남편과 함께 제원으로 돌아갈 거야. 다음에 널 만나게 될 땐 친구로 만났으면 좋겠네.”설연주는 당당하게 작별인사 한마디도 못 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당당한 성혜인에 비하면 그녀는 마치 평생 빛을 보지 못하는 도랑 속 쥐와 같았다.설연주는 심지어 성혜인의 말을 통해 자신의 비열함을 느꼈고 그 비열함은 차마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설연주는 성혜인의 눈을 거의 바라보지 못했다.혹여나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을 향한 원망과 역겨움을 눈치챌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솔직히 설연주는 성혜인을 진심으로 숭배하고 있었고 진심으로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미 진실을 알게 된 마당에 이제 와서 친구를 사귄다는 건 사치인 셈이다.그렇게 설연주는 설우현이 두 사람을 찾아올 때까지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들에게 다가온 설우현은 설연주의 작품을 보며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못생겼어.”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린 설연주가 설우현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고 뺨을 맞기라도 한 듯 통증이 밀려왔다.이렇게 비열하고 음침하기 그지없는 인간일 뿐인데 감히 설우현에게 그런 마음을 품다니.어쩐지 오래 못 살 것 같더라니... 그녀 같은 사람은 지옥에 가야만 한다.하느님은 그녀에게 복수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내 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다시 설우현을 바라보았고 설우현은 그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마디 툭 내던졌다.“이따 밥 먹고 가.”그러자 설연주는 몰래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휴지로 슬쩍 닦아내며 탐욕스럽게 설우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왜 이 타이밍에 설우현 같은 도련님을 만난 거지?’운명은 정말 그녀를 농락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렇게 성혜인의 말대로 그녀는 저녁 비행기를 타고 제원으로 떠났고 설우현은 특별히 그들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연주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녀는 오번과 통화를 하며 문을 열어주기 위해 현관으로 향했다.그 결과 밖에 서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설우현이었고 그는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끼운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설연주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설연주는 순간 마법이라도 걸린 듯 무어라 말해야 할지, 설우현이 갑자기 이곳에는 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우현 오빠...”이어 설연주는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한편, 설우현은 담뱃불을 끄고 시선을 돌려 설연주의 몸을 쓱 바라보았다.긴장한 나머지 설연주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고 설우현이 과연 조금 전의 통화 내용을 들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그렇게 한참 후에야 설우현은 비로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혜인이가 너 보고 싶다네. 오후 비행기야.”설연주도 잇따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묵묵히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차가 설우현의 별장에 도착하고 설연주는 그제야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이 설우현의 여자친구가 아닌 성혜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거실에 도착해 보니 성혜은이 거실에서 게임을 하면서 놀고 있었고 그 옆에는 빈 스위치 하나가 놓여있었다. 설우현 본인이 사용하던 스위치로 보였다.한편, 성혜인은 설연주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말을 건넸다.“연주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설연주는 무의식적으로 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이미 스위치 앞으로 다가가 스스로 게임을 시작했다.결국,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성혜인을 따라 화원으로 들어섰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위해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었다.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처럼 분위기가 매우 화목해 보였지만 사실 설연주는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계속하여 안절부절못했다. 성혜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두
설연주는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음식을 천천히 먹고 나니 운전기사가 그녀 옆에 다가와 서 있었다. 이는 분명 그녀를 재촉하고 있는 신호였다.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오직 그의 컴퓨터만 바라보고 있었다.설연주가 마음속으로 몰래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한번 설우현을 깊게 쳐다보고 나서야 설연주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기사의 뒤를 따랐다.그녀를 태운 차가 막 별장을 떠나려 할 때, 다른 차가 천천히 별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 순간, 설연주는 원인 모를 충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여자친구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섹시한 연상 스타일일까? 설우현은 그런 여자를 더욱 선호하니까.’설연주는 속눈썹을 드리운 채 창문을 열어보았다.하지만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차는 누가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창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었다.그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괜히 실마리가 드러날까 걱정되었던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차창을 다시 닫아버렸다.“가시죠.”운전기사도 다시 가속 페달을 밟았고 그렇게 설연주는 천천히 별장을 떠났다.오랜만에 다시 설준석의 별장에 돌아와 보니 이상하게 분위기가 어수선하게 느껴지고 무엇을 해도 흥미가 돋지 않았으며 설우현의 얼굴이 계속하여 눈앞에서 아른거렸다.수없이 많은 남자를 꼬시며 이용해 먹었지만 설연주는 단 한 번도 연애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줄곧 설연주의 이용수단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불쌍할 지경으로 적은 감정을 남자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하물며 그 상대는 설우현이다. 그녀와 같은 여자가 설우현에게 어울릴 수가 없는 법이다.설씨 가문의 도련님으로 금수저를 달고 태어나 평생 고생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우스우면서도 씁쓸해졌다.저녁이 되자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설연주 씨, 설강민이 두팔에게 끌려갔다고 합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온몸이 오싹해졌다. 설강민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낭패한 모습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평소 물 쓰듯 돈을 쓰던 술집에서 쫓겨나는 날이 있다니.그 순간, 설강민은 문득 설준석이 이 술집의 지분을 일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강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분명 그의 체면을 짓밟기 위해 아버지가 지시한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설준석에게 가서 사실대로 털어 넣고 돈을 갚아달라며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막상 이 지경이 되니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기며 더더욱 설준석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설강민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조금 전 또 20억 원을 빌렸으니 차라리 이 20억 원으로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게 나았다.다시 마음을 먹고 설강민은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한 채 현금 뭉치를 매니저에게 던져주었다.“지금 당장 가장 좋은 술을 가져오고 5명의 계집애를 데려와.”한 푼도 없을 줄 알았던 설강민이 뜻밖에도 600만을 들고 들어오니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그러자 설강민은 오히려 더욱 으스대며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아무리 초라해도 난 설씨 가문 일원인데 그깟 돈 하나 못 꺼내겠어?”돈을 받은 매니저는 바로 계집 몇 명을 설강민에게 보내주었다.아무리 돌이켜봐도 오늘 밤의 일은 생각할수록 더욱 화가 났다. 하여 설강민은 매니저가 보낸 여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양옆에 여자들을 껴안으며 오늘 밤 겪었던 울분을 풀어냈다.한편, 설연주는 구석에 서서 설강민의 모든 행동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다.룸을 떠나고 화장실에 간 설연주는 그제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최근에 열이 나며 심각하게 살이 많이 빠진 모양이다.그리고 오늘 밤 설강민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웃기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설연주가 쉰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설연주, 봤어? 저게 바로 네가 목숨을 바쳐서 구한 남자야.
설연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샤워를 마치고 다시 한번 세수를 마치고 나서야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러나 설우현은 이미 떠난 모양이었다. 말을 들어보니 아침 일찍 설기웅에게 불려가 두 아이를 돌보러 갔다고 한다.순식간에 할 일이 없어진 설연주는 그저 별장 안에 앉아 바깥에 활짝 피어있는 꽃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저녁, 방금 해열제를 먹고 다시 바라보니 정원에는 설우현의 차가 멈춰 세워져 있었다.그리고 설우현은 품에 꽃다발을 안은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다정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순간,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길이 멈칫하고 설연주는 먹고 있던 과일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설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설우현이 위층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 다시 꽃을 안고 외출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잠깐 고민해보던 설연주는 결국 다시 올라가 설우현에게 인사를 건넸다.“오빠, 데이트하러 나가요?”설우현은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몸은 좀 어때? 괜찮아졌어?”“네, 좀 나아졌어요.”그러자 설우현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액셀을 밟았다.설연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입을 여니 대체 뭘 물어야 할지도 몰랐다.같은 시각, 설우현은 이미 차를 몰고 떠났고 설연주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그녀조차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그때,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설강민이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 어떻게 그 20억을 갚을지 생각 중이라고 한다.“명목상이지만 설연주 씨 친오빠 진짜 너무 멍청한 것 같네요. 이렇게 간단한 사기극에도 속다니... 두팔이 빌려준 20억은 이윤이 이미 30억이 됐어요. 그런데 설준석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안 하고 도리어 두팔에게 또 대출을 받았다니까요. 그러니까 또 20억을 빌렸죠.”오번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웃음이 나왔다.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그럼 설강민은 지
설우현은 자신의 잡혀버린 소매와 설연주의 눈빛을 번갈아 보았다.한 치의 빛깔도 없이 캄캄하기만 했다.당황스러울 정도로 낭패한 그녀의 모습에 설우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나 어디 안 가. 물 따라올게.”“물 안 마셔도 돼요. 목 안 말라요.”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핏발이 보일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잠시 생각에 잠긴 설우현은 이내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설연주의 몸은 여전히 조금씩 떨고 있었고 설우현을 놓아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그때, 도우미 아주머니가 문밖에 찾아왔다. 설연주의 목소리가 워낙 날카로워 집 안에 있던 사람들도 전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러자 설우현은 침대 옆에 앉은 채, 도우미에게 말을 건넸다.“미지근한 물 한 잔과 해열제 한 알 주세요.”설연주의 열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정말 의사의 말대로 너무 긴장한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잠시 후, 도우미는 설우현의 말을 따라 재빨리 물을 가져다 놓고는 약을 설우현의 손바닥 위에 놓아주었다.이윽고 설우현은 설연주의 턱을 치켜들고 약을 먹여주었다.그러나 설연주는 입을 벌리고 있을 뿐 약을 삼키려 하지 않았다.몇 초간 머뭇거리던 설우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손끝을 그녀의 입에 넣고는 목 가장 깊은 곳에 약을 대었다.이에 설연주는 결국 마지못해 약을 삼키게 되었고 설우현은 또다시 물컵을 그녀 앞에 놓아두고 턱을 잡더니 천천히 물을 먹여주었다.물이 목구멍을 따라 흘러내리며 설연주는 저도 모르게 기침을 두 번 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막막하기만 했다.그렇게 물 반 컵을 마신 후에야 설우현은 물컵을 옆에 있는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이제 그만 자.”“오빠, 제발 가지 말아요.”설연주는 마치 가지 말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계속하여 그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하지만 설우현은 그녀의 그런 모습이 그저 웃겼다. 이제 정말 익숙해지기라도 한 걸까. 설우현이 정말 설연주의 오빠인지 아닌지도 아직 확실하
현재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과거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병에 걸린 적이 몇 번 없었는데 이젠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건강은 점점 악화하여가기만 했다.그저 평생 행복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가?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남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덩달아 마음이 약해진 오번도 다시 한번 그녀에게 당부해주었다.“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 하면 안 돼요. 이번에 설우현이 날 놓아준 건 전부 서주혁의 얼굴을 봐서였다고요. 다음부터는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까 가만히 있자고요. 어차피 지금 김현서는 두팔 쪽에 있고 설강민은 사채업자들한테 걸렸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빚은 졌다는 사실이 설준석의 귀에 들어갈 거예요.”찌릿찌릿 쑤시는듯한 통증에 설연주가 손을 들어 태양혈을 주물렀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설연주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오번 씨, 그거 알아요? 요즘 계속 꿈을 꾸는데 꿈만 꾸면 비싼 카펫 위에서 기어 다니는 내 모습이 보여요. 그래서 가끔 생각해요.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생활이 과연 현실일까? 갖은 노력을 다해 설씨 가문에 들어온 게 정말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였을까?”“설연주 씨...”“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아요. 전 저를 괴롭혔던 사람들이 모두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정승후는 이미 무너졌으니 다음은 설강민, 그리고 다음은 김현서, 마지막은 두팔까지...”오번이 미간을 찌푸렸다. 두팔을 상대한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두팔의 세력은 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강대했으니까.“이번에는 고마웠어요. 끝까지 저 지켜줬잖아요. 앞으로 다시는 설씨 가문에 손을 대지 않을 거니까 오번 씨도 계속 저한테 소식만 전해줘요.”“그래요.”전화가 끊기고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아무리 뒤척여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설우현도 언젠가 성혜인에게 생길뻔한 일이 그녀와 관련
남자가 전화를 한 상대는 오혜수였다. 지금 그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의 보스뿐이니까.전화를 받은 오혜수는 여전히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오번? 너 퇴직한 거 아니니? 왜 아직도 전화해.”오번은 남자의 암호명 순위일 뿐이다. 전에 오혜수의 곁을 따라다닐 때 해킹을 담당하며 얻은 암호명이다.그 후 제원시에서 미움을 사는 바람에 플로리아로 건너와 자신의 기술로 용돈 벌이를 하는 것이다.비록 전에 충분히 많은 돈을 벌어두었지만 돈이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으니 더 벌면 안될 것도 없었다.“보스, 이번에 저를 구하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주혁과 장하리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설우현 도련님께 잡혀 왔는데 번거로우시겠지만 도련님께 전화 좀 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오늘 당장 두 다리를 잃을 것 같습니다.”오번이 서주혁의 이름을 내뱉은 순간 설우현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 일이 서주혁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아하니 남자는 그저 서주혁이 대신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한편, 오혜수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서주혁을 알고 있는 건 맞지만 서주혁도 아직 장하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체면을 세워줄 이유가 없었다.“보스, 저를 구하지 않으면 오늘 정말 다리가 부러질 겁니다.”“닥쳐. 그러게 멀쩡히 잘 있는 설씨 가문을 왜 건드려?”오혜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 부잣집 자제들과 접점이 생기는 것이었다.그러나 오번 역시 상황이 급한지라 또 몇 번이나 거짓 울음을 터뜨리면서 꼭 구해주러 오라고 몇 번이고 당부한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전에 제원에 있을 때 장하리의 행방을 감추는 것을 도운 적이 있기에 지금 오번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장하리와 서주혁뿐이었다.설우현은 휴대폰을 낚아챈 뒤 바로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이 아닌 유심히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겁에 질린 오번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감히 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5분 후, 누군가가 설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