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이구, 바보야!”정희월이 말한 바보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말하지 않았다. 강하랑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녀도 다그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정희월과 단지헌도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했다. 그래서 강하랑 또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었다. 그래서 지승현이 아무리 마음에 든다고 해도 강하랑이 싫다면 포기할 생각이다.더구나 강하랑은 이제 금방 집에 돌아오지 않았는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딸을 시집보낼 생각은 그녀도 당연히 없었다. 다른 도시로 가는 것은 더욱 안 됐다. 아
금방이라도 싸움이 불붙을 것 같은 분위기에 강하랑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지승우를 말려서면서 설명했다.“내가 승현 씨한테 도와달라고 해서 같이 온 거예요. 오늘 여러모로 도움 많이 받았거든요. 미안해요, 나는 승우 씨가 형이랑-”“형 아니거든요!”지승우는 처음으로 강하랑에게 화를 내면서 손을 뿌리쳤다. 세 사람이 한데 모인 좁은 병실 문 사이에서 밀려 나간 강하랑의 팔은 퍽 소리를 내면서 문틀에 부딪쳤다.갑작스러운 통증에 강하랑은 인상을 쓰면서 무의식적으로 팔을 감쌌다. 그 모습에 지승현과 지승우 둘 다 안색이 변했
강하랑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연유성 걱정을 그만하고 싶기는 하지만 꼬리에 꼬리를 문 상상은 아무리 기를 써도 멈출 수 없었다. 특히 사람들이 그의 얼굴에 남은 흉터를 바라보는 상상 속의 눈빛이 가장 끔찍했다.그녀는 생각하다 못해 한숨을 쉬면서 연고를 들었다. 연고라도 바르며 잠시 상상을 멈출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얇은 소매를 위로 거두자, 흉터로 가득한 팔이 드러났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그런지, 흉터는 더 이상 처음처럼 선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치지 않은 쪽 피부에 비해서는 여전히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흉터 사이
지승우는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그래서 또다시 언성을 높이려는데 지승현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꼴 보기 싫으면 밥이나 빨리 먹지? 네가 도시락 통을 비워야, 내가 갈 거 아니야.”지승우는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안경을 닦는 지승현을 바라보면서 피식 웃었다. 안경을 바닥에 던져 가루가 될 때까지 짓밟고 싶은 걸 애써 참으면서 말이다.‘재수 없는 새끼.’“야, 좋은 말로 할 때 사랑 씨한테서 떨어져라.”지승우는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지승현은 그를 곁눈질로 힐끗 보더니 안경을 다시 쓰면서 입꼬
연유성은 강하랑이 그런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그럴 줄 알았다고 악담을 퍼붓지도 않고, 오히려 그의 상처를 책임지고 치료해주겠다고 했다.하지만 떠나기 전에 남긴 그 말은 마치 날카로운 칼처럼, 얼마 남지 않은 그의 희망을 깔끔하게 도려냈다.그러니 연유성의 마음이 어떻든, 연유성과 강하랑은 다시 이어질 수 없다.정말 엎어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는 걸까?연유성의 머릿속은 강하랑이 떠나기 전 남긴 말로 가득했다. 지씨 형제 사이의 불화에는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병실에서 그들이 싸우는 것을 한참 동안 들었지만 그의 신경은 온
그때의 연유성은 어떻게 대답했더라.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연유성은 미간에 힘을 풀었다.그는 아마도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괜찮아. 원래 바보여서 바보가 될 걱정은 안 해도 돼.”정말 짖궂은 아이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하랑은 항상 연유성을 따라 쪼르르 쫓아다녔다.연유성의 웃음소리에 지승우가 시선을 돌렸다.타자를 멈춘 지승우가 의아한 시선으로 연유성을 쳐다보았다.“유성아, 너 괜찮아? 불에 뇌까지 데여서 열이 난 거야? 그래서 바보가 된 거야?”지승우의 목소리에, 연유성의 추억 회상은 그대로 끝이 났다. 고개를 젓고
강하랑은 지승우가 보내온 문자를 볼 사이도 없었다.그녀는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은 후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연유성의 병실에서 나온 강하랑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엘리베이터 앞까지 가자 그제야 지승현을 병실에 두고 왔다는 것이 떠올랐다.머리로는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멈춰서서 입원실의 복도에 아무렇게나 앉아 지승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저도 모르게 여러 가지 일들이 생각났다.멍한 시선으로 입월실 밖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강하랑의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사실 예전에도, 강하랑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엄청 신기한 감정이다.그 감정은 사람을 기쁘게 만드는 것이니까.귀여운 동물을 좋아하고, 창밖의 따스한 햇살을 좋아하고, 책으로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것을 좋아하고... 그리고 단지 이 사람이라서 좋아한다.강하랑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진지하게 지승현을 쳐다보았다.“승현 씨, 승현 씨가 얘기한 것처럼, 제가 아까 한 말은 확실히 순수한 마음이 아니었어요. 그저 걸어오는 승현 씨를 보고 잠깐 마음이 설렜던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승현 씨가 자꾸만 저를 도와줘서, 혹은 승현 씨가 매너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