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훈의 눈은 이미 우느라 다 빨개져 있었다.그는 손을 뻗어 윤혜인을 부축하며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무사히 집까지 모셔다드리라고 당부하셨습니다.”윤혜인은 매정하게 주훈의 손을 뿌리치고는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살려, 살려내라고요, 주훈 씨!”길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윤혜인은 더 히스테릭하게 변했다.“빨리 살려내라고! 폭탄 타이머 다 해제했잖아요! 숫자 멈췄잖아!”윤혜인은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음 이탈까지 내며 울부짖었다.“당신들, 당신들 빨리 저 사람 구하라고...”주훈의 얼굴 역시 눈물범벅으로 얼룩져 있었다.“사모님, 방법이 없습니다. 정말 아무 방법이 없어요...”방법이 없다...이 다섯 글자의 청천벽력이 윤혜인의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악!!!”윤혜인이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앞으로 뛰쳐나갔다.주훈은 그녀의 뒤에서 윤혜인을 꽉 붙잡으며 함께 흐느꼈다.“대표님도, 대표님도 다 아실 겁니다. 이건 대표님이 선택하신 거예요.”윤혜인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고통이 심장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마치 가슴이 베이고 데인 듯했다.알고 보니 처음부터 아무 방법이 없었다. 이준혁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을 택했다...[아름이한테 직접 사랑한다고 얘기해줘야죠.][안돼, 난 당신을 살려야겠어요.]처음부터 끝까지 이준혁은 단 한 번도 윤혜인과 같이 떠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그는 필사적으로 윤혜인을 살리려 했다...윤혜인은 심장에 큰 구멍이라도 뚫려버린 듯한 고통에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그 순간, 주훈의 휴대폰이 진동했다.그는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자마자 깜짝 놀라 소리쳤다.“대표님이세요!”주훈은 곧바로 스피커폰을 켜 전화를 받았다. 윤혜인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수화기에 대고 울고 웃었다.“준혁 씨, 장난 그만 쳐요. 제발. 부탁이에요....”윤혜인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남자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폭발의 여파가 사라졌다.윤혜인은 자신의 가슴 속에서 비명이 흘러나오는 기분이 들었다.“아악--!”윤헤인은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에 핸들에 머리를 박은 채 이성을 놓은 듯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사모님!”주훈이 불안한 표정으로 자동차 시동을 껐다.그 순간, 주훈의 몸도 떨리고 있었다. 그도 믿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자신의 대표가 남긴 부탁만은 지키고 싶었다.윤혜인의 목에서는 이미 다 쉰 쇳소리만 나왔다.“나 좀 데려다줘...”그녀는 온몸이 떨리는 탓에 운전도 제대로 할 힘이 없었다. 숨 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어떻게 가슴 좀 아프다고 사람이 죽을 것만 같을까?주훈은 윤혜인의 말을 바로 이해하고는 그녀를 차 뒷좌석으로 옮기고 차를 몰았다.5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바다가 있었다.윤혜인은 멍하니 새까만 바다만 뚫어져라 응시했다.여기였나?윤혜인은 차 문을 열었다. 내리기도 전에 두 다리의 힘이 풀려 땅바닥에 주저앉았다.“사모님...”주훈은 다급히 윤혜인을 부축하려 했지만 윤혜인은 그의 손을 뿌리치더니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으로 달려갔다.주훈은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은 채 윤혜인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바닷물 속으로 들어서자 주훈은 곧장 윤혜인을 붙잡았다.“사모님, 더 가시면 안 됩니다.”윤혜인의 목소리가 마치 연기처럼 거칠게 들려왔다.“왜? 왜요?”주훈의 몸이 떨렸다. 그도 힘겹게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저 차는 운전석을 떠나기만 하셔도 폭발하게 되어있습니다. 보안팀에서도 온갖 방법을 다 시도해봤는데, 유일한 방법은 대체물이 같은 무게여야 한다는 겁니다. 남은 시간이 겨우 5분이에요. 다른 도구를 이용할 방법이 없단 말이에요.”주훈도 결국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감정을 토해냈다.“대표님께서는 타이머를 멈추는 선택을 하신 겁니다. 사모님을 대신해서요...”윤혜인을 구하기 위해 이준혁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윤혜인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폭발로 검게 물들어버린 바
윤혜인은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다.꿈속에서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끝도 없는 바다를 떠돌며 방황하고 있었다.바다는 매우 검었고 어둡고 추웠다. 단 한 줄기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윤혜인은 지쳤고 혼란스러웠고 무기력했다...매번 한계에 다다라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만 같던 때마다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혜인아...”주위는 암흑뿐이었다.하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뚜렷하게 들렸다.그 목소리에 다시 기운을 차인 윤혜인은 상류로 가기 위해 계속 앞으로 이동했다. 마침내 그녀의 앞에 한 줄기의 빛이 나타났다.윤혜인은 그 빛을 향해 헤엄쳐 갔다.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 있던 윤혜인을 깨웠다.천천히 눈을 떠보니 머리가 미친 듯이 어지러웠다.아직 흐릿한 시야에 크고 잘생긴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남자의 깊고 어두운 눈빛이 순식간에 그녀의 머리를 멍하게 만들었다.눈물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감정이 더는 주체가 되지 않았다.“준혁 씨...”윤혜인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이준혁은 윤혜인을 끌어안으며 말했다.“조심해.”윤혜인은 머리를 그의 품에 묻은 채 조심스레 이준혁을 힘껏 안았다.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았다.하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없었다.남자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살이 더 빠졌어? 밥 제대로 안 챙겨 먹었지?”윤혜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남자를 끌어안은 채 울고 또 울었다...남자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혜인아, 강해져야 해. 알겠지?”윤혜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녀는 강해지고 싶지 않다고, 당신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목구멍이 막혀버린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남자는 고개를 숙여 엄지로 윤혜인의 눈물을 닦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만 울어, 눈 다 부어서 호두 같잖아.”윤혜인은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수도꼭지라도 틀어놓은 듯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는 차를 우리고 과일까지 가져다주는 윤혜인을 바라보며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그녀가 깊은 잠에서 깬 지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윤혜인은 단 한 번도 이준혁을 언급하지 않았다. 아예 묻는 것조차 꺼렸다.이럴수록 보는 사람은 더욱 불안해져만 갔다.윤혜인이 차를 우려오자 곽경천이 말했다.“혜인아, 얘기 좀 할까?”윤혜인은 서류에 있는 익숙한 필체를 보는 순간 손을 잠시 멈췄다.그녀가 조용히 대답했다.“오빠, 내가 과일 깎아줄게.”분명 대화를 피하고 있는 것이었다.하지만 곽경천은 더 이상 그녀를 이렇게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그는 윤혜인의 팔을 잡아 소파에 앉히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아무것도 안 먹을 거니까, 일단 앉아봐.”조금 힘을 주었을 뿐인데 윤혜인은 균형을 잃고 자리에서 비틀거렸다.곽경천이 다급하게 무릎을 꿇고 말했다.“아팠어?”“아니.”윤혜인은 무표정하게 앉아있었다. 6개월도 안 지났지만 윤혜인은 벌써 종이 인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삐쩍 말라 있었다. 턱도 날카롭고 가는 것이 바람만 불어도 쓰러져버릴 것만 같았다.곽경천은 그런 윤혜인의 모습을 볼수록 더 마음이 아파졌다.“혜인아, 이건 걔가 너한테 남긴 거야.”윤혜인은 조심스럽게 서류 봉투를 열었다. “유서”라는 두 글자가 눈에 띄자 윤혜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얇은 종이 몇 장이었지만 그것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유서 작성인: 이준혁, 남 xx90년 12월 26일 출생...문현미에게 증여된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재산은 내 평생의 사랑 윤혜인에게 증여한다...곽경천이 유독 직설적인 사람이었던 탓에 어떻게 위로를 해주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말을 꺼냈다.“혜인아, 이선 그룹 안에서 누가 이준혁이 죽었다는 소문을 내고 다니나 봐. 내가 들은 데 따르면 내일 오전에 이천수가 기자회견을 열어서 이준혁의 사고사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하더라. 그리고 한구운을 이준혁이 있던 자리에 올릴 예정이래.”곽경천의 주먹이 무의식
한편, 이선 그룹 기자 회견 현장.이선 그룹 대변인이 검은색 정장 차림을 하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선 그룹에 대한 여러분들의 무한한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대표 이준혁 씨가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문에 관한 공식 입장을 발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대변인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이선그룹 대표 이준혁 씨는 12월 9일, 갑작스러운 사고사로 돌아가셨습니다.”믿지 않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면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젊고 유능한 이준혁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발언을 마친 대변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이선그룹 대행이사 이천수 씨의 발언이 있겠습니다.”검은색 정장 차림을 한 이천수는 비서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낯빛이 창백한 이천수가 울먹이며 말했다.“몸이 좋지 않아 더 자세한 상황을 설명할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준혁 대표는 제가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저의 곁을 떠날 거라고는…”눈물을 훔치는 이천수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눈시울을 붉혔다. 이천수가 말을 이었다.“비통한 심정을 잘 다스린 뒤에 공식적인 입장을 다시 발표할 생각입니다. 저의 아들 이준혁은 하늘나라로 갔지만 원지민의 배 속에는 이준혁의 아이가 있습니다. 원지민 씨는 온진 그룹의 대표직을 맡게 될 것이고 저희 이선 그룹과의 합작도 추진할 것입니다.”카메라가 원지민 쪽으로 돌아가자 원지민은 눈물을 흘렸다. 명품 검은색 원피스에 진주 모자를 쓴 원지민은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는 과부의 모습이었다.이천수는 한결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이사회에서는 이선 그룹의 발전을 위해 저의 아들 이구운에게 임시 대표직을 위임하기로 했습니다. 이구운은 월 스트리트 금융 기관의 고위직을 맡았었고 고학력 인재입니다. 또한 이준혁을 롤모델로 삼고 노력했기에 이구운은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고 이선 그룹에 무한한 영광을 안겨줄 것입니다!”뭇사람들은 기자 회견 현장이 갑자기 흐름이 바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천수는 가볍게 기침하고는 다시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기자들은 셔터를 눌렀다.“그게 무슨…”이천수는 윤혜인을 욕하려다가 기사가 날까 봐 도로 참았다.“내 아들의 체면을 지켜주려고 했지만 허무맹랑한 말을 들으니 어쩔 수가 없군요. 증거 자료를 함께 보시죠.”스크린에 이준혁이 운전하는 영상이 나타났는데 뒤에서 따라가던 보디가드가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각도였다. 조각처럼 빛나는 옆모습과 차분한 표정이 인상적이었다.윤혜인은 처음 보는 영상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영상은 일 분도 채 되지 않았고 이준혁의 차가 바다로 뛰어들면서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번졌다.펑!주훈은 낯빛이 하얗게 질린 윤혜인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사고가 난 뒤, 윤혜인은 여전히 이준혁이 살아있다고 믿었지만 그렇게라도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영상이 끝나자마자 이천수는 큰소리로 물었다.“이러고도 준혁이가 살아있다고 잡아뗄 건가?”윤혜인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지만 두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뜨더니 차갑게 말했다.“이준혁 씨가 죽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요.”윤혜인은 목청을 높였다.“폭발하는 장면만 있고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고요.”이천수는 화가 솟구쳐 올랐다.‘차가 폭발했으면 그 안에 있던 사람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이준혁이 살아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이때 윤혜인이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한 증거를 내놓았다.“이준혁 씨는 사망한 게 아니라 실종된 거예요.”이천수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이 개같은 년이 일부러 저러는 것 같아.’경찰 측에서는 임세희가 도주한 뒤 복수하는 과정에서 이준혁이 사망했다고 하면서 사건을 급급히 종결했고 이천수는 사인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러고 나서 기자 회견을 열었는데 윤혜인이 실종 신고를 한 증거를 들고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이천수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헛소리하지 말고 나가! 종결된 사건이고 유가족이 사인까지 했는데, 이준혁과 이혼한 네가 무슨 자격으로 실종이니 뭐니 하는 거야!”이천수는 윤혜인
여론의 힘으로 조사할 시간을 더 늘일 수 있다고 믿었다. 윤혜인은 이천수를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이 회장님, 아들이 사고를 당했는데 슬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종 전에 찍힌 영상 화면을 공개하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윤혜인이 차갑게 웃었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친아들이 아닌 줄 알겠어요.”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수군거렸고 이천수가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천수는 사람들의 시선에 몸이 굳었고 윤혜인의 말에 식은땀이 흘렀다.이천수는 윤혜인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내 아들은 널 구하려다가 죽은 거야! 그런데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임신하고서 준혁의 유산을 차지하려고 하다니…”이천수는 사실을 왜곡했고 원지민을 가리키며 말했다.“내 손주는 원지민 배 속에 있으니 출생이 분명한 아이를 내세우지 말 거라!”윤혜인은 유전자 검사 결과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이건 공증을 마친 유전자 검사 결과예요.”이천수가 이를 부득부득 갈자 윤혜인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준혁 씨가 아직 살아있으니 엄연히 말하면 유산은 아니죠.”윤혜인은 이천수, 이구운과 원지민을 훑어보더니 차갑게 웃었다.“저는 준혁 씨의 재산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지켜주러 온 거예요. 원지민 씨 배 속의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 거예요.”기자들은 원지민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이준혁의 아이가 아닌가 보네. 재벌가의 일은 막장 드라마라니까.’원지민은 윤혜인을 노려보았다.‘임세희가 똑바로 처리했어도 저년이 죽는 건데… 죽어야 할 사람은 살아있고 살아야 할 사람이 죽었어.’이천수는 식은땀을 흘렸다.‘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 원지민 배 속의 아이가 이준혁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나의 입지에 영향을 줄 거야.’이천수는 이구운한테 눈짓하더니 다급히 기자 회견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고는 매체와 공식적인 입장을 정리하기 전까지는 오늘 일어난 일을 보도하지 않기로 약속했다.윤혜인은 이천수가 기자들을 입막음할 것까
“너 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어!”원지민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억울한 듯 눈물을 흘렸다.“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어떻게…”문현미가 입을 열었다.“나한테 준혁의 생물학적 견본이 있으니 유전자 검사를 다시 해보거라.”사실 문현미는 나오자마자 경찰에 신고하고 싶었지만 주훈이 만류했다. 약물을 과다복용한 사람의 말은 증언으로 인정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문현미는 원지민을 노려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이 악독한 년이 내 아들을 죽였어!’원지민은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괴롭힘당하는 연기를 했다.이천수가 재빨리 다가와 문현미한테 손찌검하려고 했다.“미친 여편네가 왜 여길 와서 난동을 부려!”이천수는 문현미가 미쳤다고 사방에 알리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 같았다. 주훈은 이천수의 팔목을 붙잡았고 문현미를 보디가드한테 맡겼다.“지금은 잠시 자리를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윤혜인도 자리를 뜨려고 하자 원지민이 쫓아와 말했다.“별 볼 일 없는 가문의 사람이 감히 원씨 가문과 이씨 가문을 상대하려고 하는 건가요?”윤혜인이 차갑게 웃었다.“원지민 씨는 이씨 가문 사람이 아니잖아요.”원지민은 주먹을 꽉 쥐더니 실성한 듯 웃었다.“당신이 뭐라고 떠들든지 상관없어요. 내 배 속의 아이는 이준혁의 아이가 틀림없다고요!”‘이준혁도 죽은 마당에 윤혜인과 정신이 나간 문현미가 뭘 어쩌겠어?’윤혜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원지민 씨, 보디가드가 죽었으니 다른 증거가 없다고 확신하는 건가요?”원지민이 눈썹을 치켜세웠다.“무슨 뜻이죠?”“원지민 씨가 저지른 일은 다 돌아가게 되어있어요.”윤혜인이 직설적으로 말했다.“당신이 임세희를 지시해 저를 죽이려고 했다는 증거를 꼭 찾아낼 거예요. 법의 심판을 받게 할 거라고요!”“법의 심판이라고요?”원지민은 깔깔 웃더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아, 정신 나간 문현미 사모님의 증언으로요?”윤혜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직 모르시나 본데 자주 연락하던 그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
진아연의 죄는 이루 말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아직도 벌을 받지 않고 멀쩡하게 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소원은 진아연을 꼭 찾아내 벌받게 하고 진아연 뒤에 숨어있는 사람이 누군지 잡아내겠다고 다짐했다.‘그 배후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런 짓을 벌였는지도 알아내야 해.’소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안지영이 불안한 표정으로 옆방에서 건너오더니 소원에게 말했다.“언니, 우리 아빠... 아무 잘못 없는 거 맞아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지영 씨 아빠 살인범 아니에요. 지영 씨가 있으니까 삼촌이 무슨 결정을 하기 전에 늘 지영 씨를 생각하더라고요. 지영 씨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삼촌이 엄청 노력한 건 사실이에요.”안지영이 그제야 한시름 놓으며 아버지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했다.“언니, 언니도 하루빨리 아저씨 죽인 범인 찾아내길 바라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소원에게 남은 유일한 목표는 그 사람을 찾아내어 응당한 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소원은 미리 친구에게 연락해 지금 당장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게 했다. 안상철의 힘을 빌리면서 소원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든 두 사람을 보호해야 했고 최대한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국으로 잠깐 피신해 있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소원은 그 자리에서 나오며 강민혜에게 소식을 알렸다. 강민혜는 소원이 안상철을 믿은 것에 놀란 듯 보였다. 다만 오래전 일이라 별다른 증거가 없는 게 문제였다. 예를 들면 안상철이 소진용을 아래로 밀어버리는 장면에 대한 증거가 없었기에 안상철의 말만으로는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소원이 말했다.“나는 삼촌 믿어요. 오래 알고 지내기도 했고 오늘 얘기를 나누면서 느꼈는데 내가 예전에 알던 그 삼촌이 맞았어요.”소원이 안상철을 믿기로 한 원인 중 하나였다. 안상철은 소원을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고 결국 손을 대지 않았다. 딸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소진용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일 것
진아연이 소진용을 죽이려 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소진용의 죽음으로 육경한과 소원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만들고 소원이 아버지의 투신을 육경한이 건넨 파일때문이라고 생각해 육경한을 죽도록 원망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소원은 육경한을 죽이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들 테고 진아연은 어부지리로 육경한이 제일 사랑하는 여자가 되어 결국엔 육경한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다니, 진아연은 정말 뱀보다 더 잔인하고 독한 여자였다.사실 소원은 소진용의 죽음을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사업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다 겪었을 텐데 딱 봐도 흠집이 많은 계약서 때문에 옥살이할까 봐 투신자살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은 절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소원도 아버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기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 전미영까지 쓰러졌으니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마음이 잿더미가 된 소원은 좀비처럼 살면서 차분하게 정리할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숨을 쉬는 것조차 죄라고 생각했다.모든 걸 털어놓은 안상철은 그제야 홀가분해졌다. 마음의 짐을 떠안고 살면서 털어놓을 엄두를 내지 못한 건 결국 복수가 두려워서였다. 범인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면 계획을 알고 있는 안상철을 가만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범인이 안상철만 노린다면 안상철도 두려울 게 없었지만 돌봐야 할 딸도 있고 모셔야 할 어른도 있었기에 그들까지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묵혀뒀던 사실을 털어놓은 건 소진용에 대한 죄책감이 커서였지만 다 털어놓음으로써 안상철의 마음도 많이 편해졌다.소원은 이제 안상철의 처지를 알았고 안상철이 왜 진실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는지 이해했다.“삼촌, 지금 이대로 출국해서는 안 돼요. 너무 위험할뿐더러 지영 씨도 힘들 거예요. 내가 전화번호 하나 줄 테니까 그 사람한테 연락하면 무사히 출국할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 내
안상철은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살이 떨렸다.“아래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길래 대표님께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아까만 해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던 분이 왜 갑자기 뛰어내린 건지 의문이었죠.”안상철의 머릿속에 그 남자가 떠올랐다. 낯선 사람이었고 다급하게 현장을 벗어난 걸 봐서는 회사 직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안상철이 소진용의 죽음을 의심한 건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소진용의 컴퓨터가 켜져 있었는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영상이 아직도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이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 데 자살할 마음을 먹었다 해도 딸에게 불리한 동영상은 무조건 지우지 켜두고 갔을 리 만무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이 올라와 조사할 것을 대비해 딸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조치했을 텐데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이내 여기 있다가 발견되면 무조건 연루된다는 생각에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게 떠올라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USB를 빼서 사무실에서 나왔다.그 뒤로 시골에 숨어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고 소진용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숨어있다가 소식을 알아보러 나왔는데 신문 기사에 소진용이 자살했다고 적혀있는 걸 보고 이 사실이 이대로 묻혔음을 알게 되었다. 안상철은 기회를 노리고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안상철에게 외국 의사의 연락처를 보내줬다.소식이 잠잠해지자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수술하러 나갔지만 약간의 휴양 시간만 가지고 다시 귀국했다. 외국은 적응하기 힘들뿐더러 누구든 총을 소지할 수 있었기에 늘 안지영이 괴롭힘을 위험해질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고민 끝에 그래도 국내가 안전할 것 같아 안지영을 데리고 귀국한 것이다.그렇게 5년간 안정된 삶을 살면서 모든 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소원이 찾아오면서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아챘다.안상철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소원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
소원이 무릎을 꿇자 충격을 받은 안상철이 입술을 뻐끔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지영아, 다른 방에서 나 기다려.”안지영이 가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아빠,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어요?”“말 들어.”안상철이 말했다. 안지영이 알면 자책할 게 뻔했기에 절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죄책감이라는 족쇄는 안상철이 평생 지는 걸로 족했고 딸만큼은 여생을 아무 부담 없이 즐겁게 지내길 바랐다. 만약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양심에 반하는 일을 했다는 걸 알면 안지영은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안지영은 안상철이 걱정되어 이렇게 물었다.“설마 소원 언니한테 무슨 짓 하려는 거 아니죠?”안상철이 그런 안지영을 보며 말했다.“아빠 못 믿어? 걱정하지 마. 아빠 절대 사람 죽인 적 없어.”이 말에 안지영은 청심환이라도 먹은 것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옆방으로 향했다. 이제 방안에는 소원과 안상철만 남았다.안상철이 앞으로 다가가 소원을 부축하더니 말했다.“소원 씨, 일어나요.”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나 삼촌 믿어요. 하지만 진실이 뭔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안상철이 입을 열었다.“소원이 예상이 맞아요. 대표님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거예요.”소원의 마음은 마치 무수히 많은 화살에 맞은 것처럼 너무 아팠다.‘아빠가 자살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거라니...’안상철이 그해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해 해산 회의를 하기 전에 어떤 여자가 저를 찾아왔어요. 돈은 섭섭지 않게 줄 테니 말하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말했죠. 무슨 일이냐 했더니 어떤 물건을 대표님께 보여드리면 된다고 했어요. 좋은 물건은 아니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준 테이프 안에는...”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영상이었어요. 남자가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소원 씨 얼굴이 아주 또렷하게 나왔더라고요. 나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하지만 지금은...안상철이 들고 있던 막대기를 놓으며 말했다.“가요.”소원을 보내주는 건 안상철이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 아니면 정말 소원을 쓰러트리고 강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상철은 어릴 때부터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소원이 생각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안상철이 말했다.“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찾아오지 마요. 다치고 싶지 않으면 얼른 가요.”소원이 입을 열었다.“삼촌, 난 그저 사실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제발 부탁이에요. 우리 아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과거 얘기가 나오자 안상철은 가슴이 철렁했고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지만 안상철도 결국 딸을 보호해야 하는 아버지였고 노인을 먹여 살려야 하는 아들이었기에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마음을 다잡은 안상철이 막대기로 소원을 가리켰다.“소원 씨, 5분 줄게요. 그래도 안 간다면...”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소원은 갈 생각이 없었다. 안상철이 이렇게 내쫓는다는 건 아직 양심을 완전히 말아먹은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그때도 딸을 살리기 위해 순간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피해자의 딸인 소원은 안성철을 용서할 수 없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로서 느끼는 무력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묵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삼촌,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소원이 꿋꿋하게 말했다.“기회를 줘도 제 발로 걷어차네요.”안상철이 손에 든 막대기를 흔들며 소원에게 달려들었다.“아악...”옆에 있던 안지영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며 안상철의 팔을 잡고 울먹였다.“아빠, 아빠... 제발 다른 사람 다치게 하지 마요...”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봤다. 지금 마음을 모질게 먹지 않으면 앞으로 더는 그녀를 보호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안지영이 울면서 말했다.“소원 언니가 나 살려줬는데... 이러면 안 되죠.”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소원은 안지영이 말한 주소로 향했다.지난번의 교훈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소원 혼자 갔다. 괜히 안상철을 놀라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혼자 가야 무언가라도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안지영이 보내준 장소는 꽤 멀리 있는 교외였다.안지영의 말로는 안상철이 안지영을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차를 타고 외진 변두리 작은 마을로 간 뒤 거기서 출발하려는 모양이었다. 물론 떠날 방법은 아주 많았다.소원이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교외에도 집이 몇 채 있었다.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폐교가 된 학교 안에 숨어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소원은 문 앞에 도착한 뒤 안지영이 말한 대로 뒤쪽 담장의 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학교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 곳곳에 잡초가 무성한 것이 그야말로 숨기 좋은 장소였다.소원은 교실 하나하나를 돌아다니며 확인했고 마침내 세 번째 교실을 찾았다.교실 안에는 키가 크지만 몸이 약간 구부정한 사람이 서 있었다. 소원은 그 사람이 안상철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안상철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다만 등이 살짝 구부러져 있는 것이 삶에 많이 짓눌린 듯했다.소원이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문을 두드리자 안상철이 즉시 경계 태세를 취하며 몸을 돌렸다. 손에 두꺼운 몽둥이를 쥔 채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안상철은 소원을 본 순간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는 소원이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어떻게...”소원이 먼저 말했다.“상철 삼촌, 오랜만이에요.”안상철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여기에 어떻게 온 거예요?”소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지영이 먼저 말했다.“내가 말했어요. 아빠, 내가 소원 언니를 불렀어요.”“지영아, 너 미쳤니?”안상철이 화를 내며 말했다.“내가 한 말 다 잊었니?”“안 잊었어요.”안지영이 흥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안 잊었기 때문에 소원 언니를 부른 거예요. 아빠가 나를 데리고 외국으로 가
주석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은 미열이 나는 것뿐이에요.”소원은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일단 미열이 있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주석훈은 소원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말했잖아요. 생사는 운명에 달려 있다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거예요. 소원 씨와는 상관이 없어요. 다 내 운명이니까 자책하지 마세요.”주석훈이 이렇게 말할수록 소원은 더욱 미안해져 조용히 한마디 했다.“주 변호사님, 그렇게 위로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제 책임이 크다는 거 알아요. 내가 갑자기 아프지만 않았어도 주 변호사님이 저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없었겠죠. 그러면 그 취객에게 물리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이미 일어난 일, 우리 같이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도해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주 변호사님에게 큰 빚을 졌으니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반드시 도울게요.”주석훈이 말했다.“내가 어떻게 말해도 소원 씨는 본인 책임이라고 생각하겠군요. 하하, 그럼 진짜로 문제가 생기면 소원 씨에게 부탁할게요.”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한 주석훈에 그나마 마음이 놓인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꼭이요!”이때 소원의 전화에 낯선 번호가 걸려왔다.문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소원이 물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계속 말하지 않으면 끊을게요.”소원이 장난 전화인 줄 알고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상대방이 말했다.“소원 언니...”소원은 깜짝 놀랐다.목소리만으로도 안지영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지난 며칠 동안 안지영의 집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강민혜가 말했다. 가족들이 집에만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그리고 안상철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아무래도 그들이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안상철이 눈치를 챈 것이다.소원이 아무리 초조해해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를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