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차를 우리고 과일까지 가져다주는 윤혜인을 바라보며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그녀가 깊은 잠에서 깬 지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윤혜인은 단 한 번도 이준혁을 언급하지 않았다. 아예 묻는 것조차 꺼렸다.이럴수록 보는 사람은 더욱 불안해져만 갔다.윤혜인이 차를 우려오자 곽경천이 말했다.“혜인아, 얘기 좀 할까?”윤혜인은 서류에 있는 익숙한 필체를 보는 순간 손을 잠시 멈췄다.그녀가 조용히 대답했다.“오빠, 내가 과일 깎아줄게.”분명 대화를 피하고 있는 것이었다.하지만 곽경천은 더 이상 그녀를 이렇게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그는 윤혜인의 팔을 잡아 소파에 앉히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아무것도 안 먹을 거니까, 일단 앉아봐.”조금 힘을 주었을 뿐인데 윤혜인은 균형을 잃고 자리에서 비틀거렸다.곽경천이 다급하게 무릎을 꿇고 말했다.“아팠어?”“아니.”윤혜인은 무표정하게 앉아있었다. 6개월도 안 지났지만 윤혜인은 벌써 종이 인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삐쩍 말라 있었다. 턱도 날카롭고 가는 것이 바람만 불어도 쓰러져버릴 것만 같았다.곽경천은 그런 윤혜인의 모습을 볼수록 더 마음이 아파졌다.“혜인아, 이건 걔가 너한테 남긴 거야.”윤혜인은 조심스럽게 서류 봉투를 열었다. “유서”라는 두 글자가 눈에 띄자 윤혜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얇은 종이 몇 장이었지만 그것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유서 작성인: 이준혁, 남 xx90년 12월 26일 출생...문현미에게 증여된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재산은 내 평생의 사랑 윤혜인에게 증여한다...곽경천이 유독 직설적인 사람이었던 탓에 어떻게 위로를 해주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말을 꺼냈다.“혜인아, 이선 그룹 안에서 누가 이준혁이 죽었다는 소문을 내고 다니나 봐. 내가 들은 데 따르면 내일 오전에 이천수가 기자회견을 열어서 이준혁의 사고사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하더라. 그리고 한구운을 이준혁이 있던 자리에 올릴 예정이래.”곽경천의 주먹이 무의식
한편, 이선 그룹 기자 회견 현장.이선 그룹 대변인이 검은색 정장 차림을 하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선 그룹에 대한 여러분들의 무한한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대표 이준혁 씨가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문에 관한 공식 입장을 발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대변인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이선그룹 대표 이준혁 씨는 12월 9일, 갑작스러운 사고사로 돌아가셨습니다.”믿지 않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면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젊고 유능한 이준혁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발언을 마친 대변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이선그룹 대행이사 이천수 씨의 발언이 있겠습니다.”검은색 정장 차림을 한 이천수는 비서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낯빛이 창백한 이천수가 울먹이며 말했다.“몸이 좋지 않아 더 자세한 상황을 설명할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준혁 대표는 제가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저의 곁을 떠날 거라고는…”눈물을 훔치는 이천수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눈시울을 붉혔다. 이천수가 말을 이었다.“비통한 심정을 잘 다스린 뒤에 공식적인 입장을 다시 발표할 생각입니다. 저의 아들 이준혁은 하늘나라로 갔지만 원지민의 배 속에는 이준혁의 아이가 있습니다. 원지민 씨는 온진 그룹의 대표직을 맡게 될 것이고 저희 이선 그룹과의 합작도 추진할 것입니다.”카메라가 원지민 쪽으로 돌아가자 원지민은 눈물을 흘렸다. 명품 검은색 원피스에 진주 모자를 쓴 원지민은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는 과부의 모습이었다.이천수는 한결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이사회에서는 이선 그룹의 발전을 위해 저의 아들 이구운에게 임시 대표직을 위임하기로 했습니다. 이구운은 월 스트리트 금융 기관의 고위직을 맡았었고 고학력 인재입니다. 또한 이준혁을 롤모델로 삼고 노력했기에 이구운은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고 이선 그룹에 무한한 영광을 안겨줄 것입니다!”뭇사람들은 기자 회견 현장이 갑자기 흐름이 바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천수는 가볍게 기침하고는 다시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기자들은 셔터를 눌렀다.“그게 무슨…”이천수는 윤혜인을 욕하려다가 기사가 날까 봐 도로 참았다.“내 아들의 체면을 지켜주려고 했지만 허무맹랑한 말을 들으니 어쩔 수가 없군요. 증거 자료를 함께 보시죠.”스크린에 이준혁이 운전하는 영상이 나타났는데 뒤에서 따라가던 보디가드가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각도였다. 조각처럼 빛나는 옆모습과 차분한 표정이 인상적이었다.윤혜인은 처음 보는 영상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영상은 일 분도 채 되지 않았고 이준혁의 차가 바다로 뛰어들면서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번졌다.펑!주훈은 낯빛이 하얗게 질린 윤혜인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사고가 난 뒤, 윤혜인은 여전히 이준혁이 살아있다고 믿었지만 그렇게라도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영상이 끝나자마자 이천수는 큰소리로 물었다.“이러고도 준혁이가 살아있다고 잡아뗄 건가?”윤혜인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지만 두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뜨더니 차갑게 말했다.“이준혁 씨가 죽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요.”윤혜인은 목청을 높였다.“폭발하는 장면만 있고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고요.”이천수는 화가 솟구쳐 올랐다.‘차가 폭발했으면 그 안에 있던 사람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이준혁이 살아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이때 윤혜인이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한 증거를 내놓았다.“이준혁 씨는 사망한 게 아니라 실종된 거예요.”이천수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이 개같은 년이 일부러 저러는 것 같아.’경찰 측에서는 임세희가 도주한 뒤 복수하는 과정에서 이준혁이 사망했다고 하면서 사건을 급급히 종결했고 이천수는 사인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러고 나서 기자 회견을 열었는데 윤혜인이 실종 신고를 한 증거를 들고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이천수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헛소리하지 말고 나가! 종결된 사건이고 유가족이 사인까지 했는데, 이준혁과 이혼한 네가 무슨 자격으로 실종이니 뭐니 하는 거야!”이천수는 윤혜인
여론의 힘으로 조사할 시간을 더 늘일 수 있다고 믿었다. 윤혜인은 이천수를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이 회장님, 아들이 사고를 당했는데 슬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종 전에 찍힌 영상 화면을 공개하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윤혜인이 차갑게 웃었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친아들이 아닌 줄 알겠어요.”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수군거렸고 이천수가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천수는 사람들의 시선에 몸이 굳었고 윤혜인의 말에 식은땀이 흘렀다.이천수는 윤혜인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내 아들은 널 구하려다가 죽은 거야! 그런데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임신하고서 준혁의 유산을 차지하려고 하다니…”이천수는 사실을 왜곡했고 원지민을 가리키며 말했다.“내 손주는 원지민 배 속에 있으니 출생이 분명한 아이를 내세우지 말 거라!”윤혜인은 유전자 검사 결과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이건 공증을 마친 유전자 검사 결과예요.”이천수가 이를 부득부득 갈자 윤혜인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준혁 씨가 아직 살아있으니 엄연히 말하면 유산은 아니죠.”윤혜인은 이천수, 이구운과 원지민을 훑어보더니 차갑게 웃었다.“저는 준혁 씨의 재산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지켜주러 온 거예요. 원지민 씨 배 속의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 거예요.”기자들은 원지민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이준혁의 아이가 아닌가 보네. 재벌가의 일은 막장 드라마라니까.’원지민은 윤혜인을 노려보았다.‘임세희가 똑바로 처리했어도 저년이 죽는 건데… 죽어야 할 사람은 살아있고 살아야 할 사람이 죽었어.’이천수는 식은땀을 흘렸다.‘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 원지민 배 속의 아이가 이준혁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나의 입지에 영향을 줄 거야.’이천수는 이구운한테 눈짓하더니 다급히 기자 회견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고는 매체와 공식적인 입장을 정리하기 전까지는 오늘 일어난 일을 보도하지 않기로 약속했다.윤혜인은 이천수가 기자들을 입막음할 것까
“너 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어!”원지민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억울한 듯 눈물을 흘렸다.“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어떻게…”문현미가 입을 열었다.“나한테 준혁의 생물학적 견본이 있으니 유전자 검사를 다시 해보거라.”사실 문현미는 나오자마자 경찰에 신고하고 싶었지만 주훈이 만류했다. 약물을 과다복용한 사람의 말은 증언으로 인정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문현미는 원지민을 노려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이 악독한 년이 내 아들을 죽였어!’원지민은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괴롭힘당하는 연기를 했다.이천수가 재빨리 다가와 문현미한테 손찌검하려고 했다.“미친 여편네가 왜 여길 와서 난동을 부려!”이천수는 문현미가 미쳤다고 사방에 알리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 같았다. 주훈은 이천수의 팔목을 붙잡았고 문현미를 보디가드한테 맡겼다.“지금은 잠시 자리를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윤혜인도 자리를 뜨려고 하자 원지민이 쫓아와 말했다.“별 볼 일 없는 가문의 사람이 감히 원씨 가문과 이씨 가문을 상대하려고 하는 건가요?”윤혜인이 차갑게 웃었다.“원지민 씨는 이씨 가문 사람이 아니잖아요.”원지민은 주먹을 꽉 쥐더니 실성한 듯 웃었다.“당신이 뭐라고 떠들든지 상관없어요. 내 배 속의 아이는 이준혁의 아이가 틀림없다고요!”‘이준혁도 죽은 마당에 윤혜인과 정신이 나간 문현미가 뭘 어쩌겠어?’윤혜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원지민 씨, 보디가드가 죽었으니 다른 증거가 없다고 확신하는 건가요?”원지민이 눈썹을 치켜세웠다.“무슨 뜻이죠?”“원지민 씨가 저지른 일은 다 돌아가게 되어있어요.”윤혜인이 직설적으로 말했다.“당신이 임세희를 지시해 저를 죽이려고 했다는 증거를 꼭 찾아낼 거예요. 법의 심판을 받게 할 거라고요!”“법의 심판이라고요?”원지민은 깔깔 웃더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아, 정신 나간 문현미 사모님의 증언으로요?”윤혜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직 모르시나 본데 자주 연락하던 그
원지민은 갈라진 목소리로 울부짖었다.“네까짓 게 뭔데 감히 날 평가해! 네가 아니었다면 이준혁은 날 사랑했을 거야!”원지민은 어릴 적부터 이준혁을 좋아했고 남장을 한 채 다가가기도 했었다. 여자인 것이 밝혀진 뒤, 아버지가 아들을 좋아한다는 핑계를 대며 설명했다.사실 원지민의 아버지 원정호는 사상이 개방적인 사람이라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상관없이 사랑해 주었다. 원정호는 아이를 더 가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을 뿐이다.설명한 뒤에도 이준혁은 원지민과 거리를 두었기에 원지민은 원정호의 핍박에 못 이겨 유학 가게 된 척하면서 동정심을 얻어내려고 했었다.원지민은 이준혁의 마음을 얻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곁에 남으려 했다. 해외에 있을 때도 이준혁의 근황을 조사했고 이준혁 곁에 임세희와 윤혜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이준혁이 임세희의 딱한 사정 때문에 보살펴 주었는데 그것이 이혼의 계기가 되어 존재감 없던 윤혜인은 자연스럽게 내쳐지게 되었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원지민은 윤혜인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지만 이준혁이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사랑한 사람이 윤혜인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원지민은 주먹을 꽉 쥐었고 눈에 살기가 돌았다. 이준혁의 벅찬 사랑을 받는 윤혜인을 죽여버리고 싶었고 질투심에 이성을 잃었다.원지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다 너 때문이야. 이 악독한 년!”“원지민 씨가 오해한 게 있어요.”윤혜인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제가 나타나지 않았었더라도 준혁 씨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을 거예요.”사랑이란 감정은 나타난 순서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었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처음부터 마음이 없었던 사람은 상대방이 무슨 짓을 해도 사랑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이다.그것을 외면하던 원지민은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미친 짓을 벌이고 다녔다.형사의 뒤에 있던 기자들이 몰려오더니 원지민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원지민은
서로 비난하며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수법이었을 뿐이다.원지민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윤혜인도 할 수 있다.결과적으로 언론은 그녀의 발언에 즉시 반응하며 몰려들었다.“곽혜인 씨, 방금 원지민 씨가 당신 아이의 아버지를 해쳤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의미인가요?”“곽혜인 씨, 좀 더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윤혜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손을 들어 그들을 무시하며 뒤돌아섰다.남은 건, 원지민의 분노에 질색한 얼굴뿐이었다....복도에서.몇 걸음 나아갔을까 누군가가 윤혜인을 불렀다.“윤혜인.”한구운이 천천히 다가오며 연민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유감이야.”그는 윤혜인이 헛된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이준혁은 이미 죽었고 이제 아무도 자신을 막을 수 없으니 말이다.그리고 한구운은 누구의 방해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윤혜인은 그에게 한마디도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차갑게 말했다.“비켜요.”하지만 한구운은 비키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윤혜인이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는 그녀를 붙잡았다.한구운은 비웃으며 말했다.“이선 그룹은 곧 내 것이 될 거야.”그러자 윤혜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맑은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한구운 씨,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겁니다.” “아직도 현실을 못 받아들이고 있나?”한구운은 그녀가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를 못마땅해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지금 내가 사생아라고 무시하는 거지? 이제 이준혁은 죽었어. 나는 더 이상 사생아가 아니야. 이선 그룹의 유일한 합법적인 후계자지!”눈빛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이준혁이 너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 나도 줄 수 있어!”윤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한 마디 한 마디 말했다. “준혁 씨는 안 죽었어요.”“혜인아, 제발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그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었을 거야. 왜 스스로를 속이려 하는 거야?”한구운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 곁으로 와. 이준혁이 너를 사랑했던
그러나 원지민이 원하는 것은 윤혜인의 목숨이었고 이천수가 노렸던 것은 이준혁의 목숨이었다.두 사람은 서로의 속셈을 알지 못한 채 협력했고 이젠 한구운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일은 벌어져 버린 후였다.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윤혜인의 손목을 풀어주며 낮게 말했다.“네가 겪은 일들 다 보상해줄게. 원지민을 당장 건드리진 못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그러자 윤혜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칼에 거절하며 한구운의 가슴을 밀치고 거리를 두었다.“필요 없어요. 한구운 씨,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난 당신과 함께할 생각 없어요. 친구조차 될 수 없으니 그만 미련을 버려요.”윤혜인의 거리낌 없는 거절에 한구운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그는 그녀를 강하게 잡아당겨 단번에 자신의 품에 안아버리고는 불타는 눈빛으로 말했다.“내가 포기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분노에 휩싸인 윤혜인은 힘껏 저항하며 소리쳤다.“놔요. 이거 놔요!”하지만 한구운은 그녀의 외침을 무시하며 마치 독이 묻은 듯한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혜인아, 내가 이선 그룹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면 너도 내 것이 될 수 있지 않겠어? 안 그래”한구운의 오랫동안 억눌렸던 감정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그는 가까이 다가가며 윤혜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서질 듯한 아름다움과 떨리는 입술이 더욱 한구운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듯했다.곧 한구운은 윤혜인의 허리를 더욱 세게 감싸며 집착하듯 속삭였다.“이준혁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그리고 너는 나의 여자가 될 거야.”뒤이어 한구운이 윤혜인의 입술에 다가가려 하자 윤혜인은 무릎을 꿇어 힘껏 그의 아랫배를 가격했다.“윽... 너!”한구운은 아랫배를 붙잡고 통증에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얼굴은 폭풍 전야처럼 어두워졌다.그러나 윤혜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을 털어내고 차분하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잘 찍었어요?”“네, 아주 선명하게요.”핸드폰을 든 주훈이 어둠 속에서 걸어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
소원이 육경한을 불러세우더니 따라서 나오며 병실 문을 닫았다.“현재 일은 내가 오해했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은 옳고 그름에 명확한 사람이었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허심탄회한 모습은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태도였다.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티가 나지는 않았다.“도와준 거 아니야.”육경한은 연적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았다. 소원도 더는 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본론으로 돌아왔다.“진아연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도 찾고 있어. 찾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줄래?”진아연이 잡혀들어가기 전에 물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만약 교활한 진아연을 그대로 들여보낸다면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게 뻔했고 베일에 싸인 배후의 지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직접 물어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응. 알겠어. 너는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찾고 있으니까.”진아연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기에 진아연을 찾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배후는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수단도 만만치 않았다.소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인데 무슨 일이 있든 직접 헤쳐나가고 싶었다.그때 소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민혜가 걸어온 전화였다.“소원 씨, 안상철이 죽었어요.”전화를 받자마자 강민혜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쿵.머릿속에서 뭔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삼촌이 왜?’소원의 계획대로라면 안상철은 지금쯤 안지영과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죽어버린 건지 의문이었다.‘지영 씨는...’소원이 얼른 물었다.“그러면 지영 씨는요? 딸은 어떻게 됐어요?”강민혜가 말했다.“딸은 안전한 상태지만 충격을 많이 받아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입을 열려 하지 않아서 경찰이 무슨 질문을 하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어... 어떻게 이런 일이...”소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안
그때 문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소원이었다.소원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육경한이 이 정도로 양보했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었다.“현재야...”“누나...”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네가 먼저 말해.”소원이 양보하자 서현재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누나, 그거 알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한 건 다 안정된 삶을 되찾고 누나랑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지금은...”서현재가 뜸을 들이더니 씁쓸하게 말했다.“지금은 그저 누나가 잘 있기만 하면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요. 언제든 누나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그 자리에 있을게요.”순간 서현재는 능력이든 다른 부분이든 육경한과 비길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앞으로 몇 년간 피타는 노력을 거쳐 원하던 자리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육경한처럼 해탈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은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이기적이고 쪼잔해지고 질투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유진도 아이를 받아들였으니 소원이 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자꾸만 벼랑 끝으로 떨어졌지만 소원만 행복하다면 서현재로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소원은 그런 서현재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뱉은 건 결국 한마디였다.“현재 너는 나의 영원한 가족이야. 유진도 그렇고.”서로에게 위안이 되던 나날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서현재가 유진을 돌봐준 것도 소원은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든 앞으로든 서현재가 원하는 바를 이뤄줄 수가 없었기에 차라리 가족이라는 자리로 남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소원은 이미 서현재에게 다시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소원의 중점은 아이를 돌보는 것과 아버지가 만든 회사를 다시 일궈내는 것,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다.“누나, 나도 잊지 않을게요.”서현재는 이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병실로 돌아오는데 육경한이 침대맡에 앉아 깊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
서현재는 육경한이 그를 내쫓는다는 걸 알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아직 망하진 않았어요.”육경한은 그를 관심해 주는 게 아니라 그가 쫄딱 망해서 서울에서 더는 살 수 없기를 바랐지만 서현재도 유진의 아빠라는 말이 떠올라 톡 까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육경한도 유진의 아빠인 서현재가 너무 궁색해지는 건 싫었다.“서한 가문의 제일 큰 라이벌이 요즘 해성으로 실사하러 갔다고 들었는데.”육경한이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하자 서현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현재는 아직 모르는 소식이었다. 해성에서 새로 거론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때 라이벌 회사가 해성으로 간다는 같은 프로젝트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라이벌 회사라 같은 영업 범위였기에 경쟁하는 건 정상이지만 토론이 끝나가는 프로젝트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고마워요.”육경한이 콧방귀를 뀌었다.“약육강식인 세상에서는 승자가 왕이 되는 법이야. 능력이 부족한 건 다른 사람 탓해도 쓸모없어.”이 말은 서현재가 육경한이 했던 탄압을 복수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이었다. 육경한이 없었다면 서한 그룹이 흔들릴 때 다른 회사에서 서한 그룹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회사라도 떨어질 부스러기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서한 그룹은 완전히 가치를 잃은것도 아니었기에 기회를 노려 서한 그룹의 주문을 앗아간다면 체급을 늘이고 있는 회사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기회를 노리던 일부 회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 회사들에게 육경한과 경쟁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으니 말이다.물론 육경한의 실력도 서울을 제패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용하는 방식과 수단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 매우 힘든 것들이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는 3시간 만에 한 상장 회사를 파산하게 만든 적도 있으니 육경한을 건드린다는 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서현재도 숨 돌릴 시간이 있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
진아연의 죄는 이루 말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아직도 벌을 받지 않고 멀쩡하게 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소원은 진아연을 꼭 찾아내 벌받게 하고 진아연 뒤에 숨어있는 사람이 누군지 잡아내겠다고 다짐했다.‘그 배후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런 짓을 벌였는지도 알아내야 해.’소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안지영이 불안한 표정으로 옆방에서 건너오더니 소원에게 말했다.“언니, 우리 아빠... 아무 잘못 없는 거 맞아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지영 씨 아빠 살인범 아니에요. 지영 씨가 있으니까 삼촌이 무슨 결정을 하기 전에 늘 지영 씨를 생각하더라고요. 지영 씨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삼촌이 엄청 노력한 건 사실이에요.”안지영이 그제야 한시름 놓으며 아버지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했다.“언니, 언니도 하루빨리 아저씨 죽인 범인 찾아내길 바라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소원에게 남은 유일한 목표는 그 사람을 찾아내어 응당한 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소원은 미리 친구에게 연락해 지금 당장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게 했다. 안상철의 힘을 빌리면서 소원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든 두 사람을 보호해야 했고 최대한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국으로 잠깐 피신해 있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소원은 그 자리에서 나오며 강민혜에게 소식을 알렸다. 강민혜는 소원이 안상철을 믿은 것에 놀란 듯 보였다. 다만 오래전 일이라 별다른 증거가 없는 게 문제였다. 예를 들면 안상철이 소진용을 아래로 밀어버리는 장면에 대한 증거가 없었기에 안상철의 말만으로는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소원이 말했다.“나는 삼촌 믿어요. 오래 알고 지내기도 했고 오늘 얘기를 나누면서 느꼈는데 내가 예전에 알던 그 삼촌이 맞았어요.”소원이 안상철을 믿기로 한 원인 중 하나였다. 안상철은 소원을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고 결국 손을 대지 않았다. 딸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소진용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일 것
진아연이 소진용을 죽이려 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소진용의 죽음으로 육경한과 소원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만들고 소원이 아버지의 투신을 육경한이 건넨 파일때문이라고 생각해 육경한을 죽도록 원망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소원은 육경한을 죽이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들 테고 진아연은 어부지리로 육경한이 제일 사랑하는 여자가 되어 결국엔 육경한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다니, 진아연은 정말 뱀보다 더 잔인하고 독한 여자였다.사실 소원은 소진용의 죽음을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사업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다 겪었을 텐데 딱 봐도 흠집이 많은 계약서 때문에 옥살이할까 봐 투신자살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은 절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소원도 아버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기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 전미영까지 쓰러졌으니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마음이 잿더미가 된 소원은 좀비처럼 살면서 차분하게 정리할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숨을 쉬는 것조차 죄라고 생각했다.모든 걸 털어놓은 안상철은 그제야 홀가분해졌다. 마음의 짐을 떠안고 살면서 털어놓을 엄두를 내지 못한 건 결국 복수가 두려워서였다. 범인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면 계획을 알고 있는 안상철을 가만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범인이 안상철만 노린다면 안상철도 두려울 게 없었지만 돌봐야 할 딸도 있고 모셔야 할 어른도 있었기에 그들까지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묵혀뒀던 사실을 털어놓은 건 소진용에 대한 죄책감이 커서였지만 다 털어놓음으로써 안상철의 마음도 많이 편해졌다.소원은 이제 안상철의 처지를 알았고 안상철이 왜 진실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는지 이해했다.“삼촌, 지금 이대로 출국해서는 안 돼요. 너무 위험할뿐더러 지영 씨도 힘들 거예요. 내가 전화번호 하나 줄 테니까 그 사람한테 연락하면 무사히 출국할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 내
안상철은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살이 떨렸다.“아래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길래 대표님께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아까만 해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던 분이 왜 갑자기 뛰어내린 건지 의문이었죠.”안상철의 머릿속에 그 남자가 떠올랐다. 낯선 사람이었고 다급하게 현장을 벗어난 걸 봐서는 회사 직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안상철이 소진용의 죽음을 의심한 건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소진용의 컴퓨터가 켜져 있었는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영상이 아직도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이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 데 자살할 마음을 먹었다 해도 딸에게 불리한 동영상은 무조건 지우지 켜두고 갔을 리 만무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이 올라와 조사할 것을 대비해 딸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조치했을 텐데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이내 여기 있다가 발견되면 무조건 연루된다는 생각에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게 떠올라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USB를 빼서 사무실에서 나왔다.그 뒤로 시골에 숨어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고 소진용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숨어있다가 소식을 알아보러 나왔는데 신문 기사에 소진용이 자살했다고 적혀있는 걸 보고 이 사실이 이대로 묻혔음을 알게 되었다. 안상철은 기회를 노리고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안상철에게 외국 의사의 연락처를 보내줬다.소식이 잠잠해지자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수술하러 나갔지만 약간의 휴양 시간만 가지고 다시 귀국했다. 외국은 적응하기 힘들뿐더러 누구든 총을 소지할 수 있었기에 늘 안지영이 괴롭힘을 위험해질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고민 끝에 그래도 국내가 안전할 것 같아 안지영을 데리고 귀국한 것이다.그렇게 5년간 안정된 삶을 살면서 모든 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소원이 찾아오면서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아챘다.안상철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소원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