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구조 작업이 진행되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절망에 빠졌다.밟고 있는 진흙도 비가 와서 물컹한 상태였다. 윤혜인이 서 있는 곳이 점점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더는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곧 무너질 것 같았다.윤혜인은 손으로 넝쿨을 잡아당겼다. 꽤 탄탄한 것 같았다.마음을 단단히 먹은 윤혜인은 넝쿨을 손에 감고는 무게를 두 개의 넝쿨에 실으려 했다.그렇게 위로 올라가려는데 돌이 후드득 떨어졌다.밟고 진흙은 낙석에 의해 크게 갈라지고 말았다.윤혜인은 그대로 아래로 미끄러졌다.“아악.”윤혜인이 절규했다. 밟고 있던 곳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방법이 없었던 윤혜인은 이를 악물고 허공에 떠 있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발로 벽을 짚으려 했다.전에 곽경천이 암벽 등반할 때 같이 가서 놀아본 적이 있었지만 혼자 해본 적은 없었다.그저 전에 봤던 등반 동작을 떠올리며 조금씩 위로 타기 시작했다.다행히 몸이 가벼웠기에 넝쿨 두 개가 그녀의 무게를 이길 수 있었다.윤혜인이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고통을 참으며 위로 기어 올라갔다.희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지상과 겨우 두 걸음 남은 상태였다.순간.후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넝쿨 하나가 부러졌다. 나머지 하나로 그녀의 몸무게를 지탱하기엔 너무 무거웠다.마음이 급해진 윤혜인은 돌이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행동을 서둘렀다.후드득.갑자기 중력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머지 한 개도 끊어진 것이다.순간 윤혜인은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지면을 짚었다. 하지만 윤혜인이 잡은 건 곧 떨어질 것 같은 돌부리였다. 이제는 정말 나락으로 떨어질 일만 남은 것 같았다.엄습해 오는 두려움에 윤혜인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고 눈을 질끈 감았다.그때 손목이 누군가에게 단단히 잡혔다. 윤혜인은 돌벽에 부딪히며 떨어지는 걸 멈추었다.팔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전해졌다. 팔이 그대로 뜯겨 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윤혜인이 힘껏 고개
보고 싶었다는 말에 이준혁의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윤혜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더는 숨길 수 없었다.“너무 보고 싶었어요...”곧 죽을 마당에 내려놓지 못할 원망과 증오가 어디 있겠는가.끝내 윤혜인은 마음이 흔들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돌아온 후로 이준혁은 그녀에게 정말 잘해줬다.아무리 그녀가 과거를 내려놓지 못해 막무가내 화내고 때리고 투정을 부려도 그는 여전히 곁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지켜줬다.이 생각을 조금만 빨리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깨달았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윤혜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가볍게 말했다.“이준혁 씨, 이제 놔요...”윤혜인의 눈빛에 이준혁은 순간 두려워지기 시작했다.“내가 너 아무 일 없게 지켜줄 거야.”이준혁이 확고하게 말했다.윤혜인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에 입술에 하얀 이빨 자국이 남았다.“준혁 씨, 우리 같이 떨어질 수는 없잖아요.”윤혜인은 이렇게 말하더니 먼저 꽉 잡은 그 손을 떼려고 했다.“떼기만 해봐.”이준혁이 낮게 소리쳤다.그 바람에 이준혁의 몸이 앞으로 조금 더 미끄러졌다.“혜인아...”이준혁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아직 희망이 있어.”윤혜인의 눈빛은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더는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만약 지금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이준혁도 따라서 끌려 내려갈 것이다.윤혜인이 차가운 눈동자로 매섭게 쏘아붙였다.“이준혁 씨, 당신 정말 최악인 거 알아요? 놓으라니까요.”이준혁은 윤혜인이 일부러 그를 화나게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 말에 상처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이준혁이 씁쓸하게 웃었다.“최악이어도 어쩔 수 없어. 네가 좋은 걸 어떡하라고.”이준혁은 가느다란 팔목을 꽉 붙잡고 눈시울을 붉혔다.“벗어날 생각하지 마. 평생.”이때 바닥이 다시 붕괴했다. 이제 더는 두 사람을 지탱할 힘이 없어 보였다.많아도 겨우 1분일 것이다. 최악의 경우 1분도 채 버티지 못할 수도 있다.윤혜인은 더 잔인한 말을 생
물이다. 물이 있었다. 그러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윤혜인은 수영을 전혀 못 할 줄 알았는데 물에 떨어진 순간 익숙한 느낌과 함께 물 위로 떠 올랐다.하지만 이내 당황한 윤혜인이 어쩔 바를 몰라 하며 큰 소리로 불렀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물은 고요하기만 했다.겁에 질린 윤혜인이 심호흡을 하고는 물속으로 들어가 이준혁을 찾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내 윤혜인은 누군가에 의해 수면으로 건져졌다.이준혁은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이 참으로 매혹적이었다.그는 윤혜인을 안고 물가로 헤엄쳐 가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여기 있어.”윤혜인이 멈칫하더니 그를 품에 꽉 끌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당신 정말... 놀랐잖아요.”윤혜인은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무서워서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같이 뛰어내릴 생각을 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짜증이 치밀어오른 윤혜인은 이준혁의 어깨를 가볍게 때리며 원망을 쏟아냈다.“정말 미쳤어. 미쳤다고...”때리고 나서는 마음이 아팠는지 바보처럼 웃기 시작했다.“다행이에요. 무사해서 다행이에요...”이준혁은 아이처럼 울다가 웃는 윤혜인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힘껏 꼭 끌어안았다.“미치지 않았어.”잠깐 뜸을 들이던 이준혁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너를 잃었다면 정말 미쳐버렸을지도 모르지.”윤혜인은 무언가에 부딪쳐 구멍 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준혁은 복잡한 눈빛으로 윤혜인을 꼭 끌어안았다.윤혜인은 이준혁이 몸을 파르르 떨고 있음을 발견했다. 눈을 깜빡이며 생각해 봐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이내 깨달았다. 이준혁은 무서웠던 것이다.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약속해. 영원히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나는...”이준혁이 갑자기 그녀를 풀어주더니 어둡고 차가운 눈동자로 말했다.“약속해.”말투는 명령조였고 어딘가 화나 보이기도 했다. 아니, 매우 화나 있었다. 죽다 살아났으니 이제 따질 시간은
윤혜인도 의도한 행위는 아니었고 자기도 모르게 한 반응이었다.순간 곽아름을 대하던 방법으로 이준혁을 대한 것이다.달래기 어렵다면 제일 간단하고 직설적인 방법으로 사랑한다고 표현하면 된다.하지만 볼 뽀뽀를 했는데도 이준혁은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이에 윤혜인이 난감해졌다.‘설마 아직도 화난 건가?’어쩔 바를 몰라 하는데 이준혁이 고개를 숙이더니 갑자기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잠깐 멈칫하던 윤혜인이 손을 뻗어 그를 안으려는데 아까 떨어질 때 낙석이 이준혁의 등을 명중했던 게 떠올랐다.하여 자기도 모르게 그를 밀쳐내고는 상처를 물어보려 했다.하지만 몸을 꽉 묶여 있어 벗어날 수가 없었다.이준혁이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더니 말했다.“내가 미우면 밀어내.”윤혜인이 하려던 동작을 멈추고는 가만히 있었다.이준혁이 고개를 숙이더니 낮지만 매혹적인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혜인아, 사랑해.”순간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파르르 떨더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왜...”그녀는 사실 왜 이때 이 말을 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이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너한테 말해줄 기회가 없을까 봐 겁나. 나 너 많이 사랑해. 사랑을 나누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윤혜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감동해서든 아니면 미안해서든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다.“고마워요.”이준혁은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 윤혜인이라는 사람을, 그 마음을 가지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욕심스러워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그는 까만 눈동자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앞으로 절대, 다시는 내 옆을 떠나지 마. 알겠지?”오만하고 도도하기로 소문난 이준혁이 지금은 비굴하게 윤혜인에게 애원하고 있다.윤혜인은 코끝이 찡했다.사실 이준혁이 따라서 뛰어내린 순간 그녀도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전에는 항상 이 남자를 마약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건드려서도 시작해서도 안 된다고
“준혁 씨, 등 안 아파요?”돌이 이준혁의 등에 떨어지는 걸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이준혁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까지 말이다.“아니. 안 아파.”이준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네가 무사한게 내게는 제일 좋은 약이야.”이준혁의 표정은 흠잡을 데 없었지만 윤혜인은 믿지 않았다.윤혜인은 기억이 생생했다. 그렇게 큰 낙석이라면 그 누구도 버텨내기 힘들 것이다.걱정됐던 윤혜인은 바로 이준혁의 옷을 벗기려 했다.“한번 봐봐요.”단추를 두 개 풀었는데 이준혁이 그녀의 손을 자기 가슴에 꾹 누르며 웃었다.“뭐가 그렇게 급해? 아니면 으스스한 곳 좋아해? 밖이 더 좋나?”윤혜인은 이준혁의 상처가 걱정되어 얼른 손을 빼려했다.“밖이면 뭐 어때서요?”이준혁이 눈썹을 추켜세웠다.“밖이면 보는 눈도 많은데 괜찮겠어?”윤혜인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네?”이준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정말 원하면 돌아가서 사람 없는 외딴 시골 하나 통으로 예약할게. 마음껏... 즐기게.”윤혜인은 순간 이준혁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두 사람은 아예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얼굴이 빨개진 윤혜인이 씩씩거리며 말했다.“누가 원한대요? 원하는 건 당신이겠죠.”“응, 난 원해.”이준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근데 곧 구조대가 도착할 거야.”추락할 당시 보디가드가 이미 그들을 찾아냈다.아까 헬리콥터가 지나가는 소리도 들었으니 아마 이 방향으로 오는 중일 것이다.그는 손으로 윤혜인의 볼을 꼬집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내 와이프를 다른 사람이 봐서는 안 되지.”윤혜인은 순간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정말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이준혁은 씩씩거리는 윤혜인을 보며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윤혜인이 무슨 생각하는지 그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숨만 쉬어도 얼굴이 창백해질 만큼 한 고통이 등에 난 상처가 심상치 않음을 그에게 알려주고 있었다.그래도 윤혜인이 걱정하는 게 싫어 줄곧 참고 있었다. 헬
갈비뼈 12대라니, 몸에 있는 갈비뼈를 다 세어봐도 고작 24대일 텐데 말이다.윤혜인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이송 차량에 같이 오른 윤혜인은 가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그녀를 구하지만 않았다면 이준혁도 이렇게 심각한 상처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그 낙석을 이준혁이 몸으로 받아내지 않았다면 윤혜인이 맞았을 것이다.아무리 산골짜기의 깊은 곳에 호수가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 심하게 부딪치면 헤엄쳐 올라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아까 왜 오랫동안 물속에서 나오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윤혜인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준혁이 어떠한 의지력으로 호수 깊은 곳에서 위로 올라왔는지 말이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를 끌고 호숫가로 향했다.이준혁이 그녀를 받쳐 든 동작이 왜 그리 어정쩡했는지도 이제야 알 수 있었다.‘얼마나 아팠을까.’40분 후.이준혁은 상급 병원으로 이송되었다.주훈은 소식을 듣자마자 서울에서 시병원으로 달려왔다.병실 안.이준혁은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채 링거를 맞았다.상황을 파악한 주훈도 겁이 났다.전에 난 상처도 채 낫지 않았는데 새로운 상처까지 더해진 것이다.아무리 무쇠 같은 몸이라 해도 이렇게 막 굴리면 버티지 못할 것이다.윤혜인은 아까 의사가 이준혁의 몸이 허약하다고 말한 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확실히 심각한 상처를 입은 건 맞지만 의사는 이준혁의 혈액 응집력이 부족하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윤혜인의 기억 속에 이준혁은 늘 건강했고 감기도 잘 걸리지 않았다.‘왜 갑자기 몸이 이렇게 안 좋아진 거지?’주훈이 나가려 하자 윤혜인이 얼른 뒤따라 나갔다.“주 비서님, 아까 의사 선생님이 준혁 씨 혈액 응집력이 안 좋다 그러던데 무슨 원인인지 알아요?”주훈의 안색이 변했다.김성훈은 원래 이준혁에게 주말에 외국에 있는 친구한테 피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안 될 것 같았다.혈액 응집력이 안 좋은 문제는 주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준혁이 제일 원하는 게 바로 윤혜인이 무사한 것일 테니 말이다.주훈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말투로 말했다.“윤혜인 씨,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 건 경각심을 높여서 자신을 보호했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그리고 대표님은 윤혜인 씨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긴장을 늦춘 적이 없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매번 모든 걸 다 바치지만 생색내는 걸 싫어하시기도 하고 혹시나 부담될까 봐 비밀로 한 것도 있어요. 하지만 윤혜인 씨한테만큼은 정말 진심이에요.”윤혜인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목구멍이 메어와 미칠 지경이었다.그녀는 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약간만 소리를 내도 눈물이 바로 떨어질 것 같았다.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일을 해주었고 그녀의 안전을 묵묵히 지켜주었다. 하지만 한 번도 그걸로 생색낸 적이 없었다.정말 바보 같은 남자였다.주훈이 자리를 비운 건 김성훈에게 연락하기 위해서였다.이준혁은 매우 건강한 사람이었는데 요즘 따라 몸이 눈에 띄게 나빠져서 너무 걱정되었다.‘도대체 그 주사와 관련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김성훈에게 다른 방법을 알아보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의사가 서울로 와서 혈액 검사를 해줄 수는 없는지 말이다.병실로 돌아온 윤혜인은 이준혁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보살폈다.저녁이 되자 그녀는 따듯한 수건으로 얼굴을 간단하게 닦아주었다. 그리고는 손에 든 수건으로 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을 조심조심 닦아주었다.지금까지 이준혁의 얼굴을 이렇게 자세히 뜯어본 건 처음이었다. 그는 속눈썹이 매우 길었다. 하여 매번 사람을 쳐다볼 때마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오뚝한 콧날과 조각 같은 이목구비, 이 남자는 정말 못생긴 데가 없었다.윤혜인은 수건으로 이준혁의 입술을 천천히 닦아줬다. 입술이 얇으면 정이 없다는데 이준혁은 예외였다. 그녀를 향한 애정 공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윤혜인은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이런 바보...”...소원은 일을 끝내자마자 육경한의 별장으로 향했다.여기서 지
육경한은 원래도 의심이 많았는데 지금 이 말은 이미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화들짝 놀란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당황함을 감추려 했다.육경한을 쳐다보는 소원의 눈매는 항상 매서웠고 이렇게 억울한 눈빛은 처음이었다. 등을 훤히 드러내놓고 있는 지금 소원은 왠지 모르게 청순하고 매혹적이었다.육경한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소원에 대한 갈망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저 눈빛...’소원은 저 휠체어만 아니었다면 이미 그는 그녀위로 올라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원이 눈을 부릅떴다.“왜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와요.”이렇게 말하며 지퍼를 올리려 했지만 중간에 걸려버린 지퍼는 올라가지 않았다.방법이 없었던 소원은 하는 수 없이 잠옷을 목에 둘렀다.감추려 할수록 드러나는 소원의 행동에 육경한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남의 방이라니?”육경한이 휠체어를 돌려 천천히 앞으로 다가오더니 소원 앞에 멈췄다.“여기 내 것이 아닌 게 어디 있어?”소원은 육경한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 뜻인즉 그녀가 그의 소유물이라는 뜻이었다.하지만 말로 지기 싫었던 소원은 빨간 입술로 비아냥댔다.“대표님, 망상도 병이에요. 얼른 치료받아요.”육경한은 딱히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승리를 거머쥔 듯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그는 어정쩡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정말 내가 안 도와줘도 돼?”말이 통하지 않는 남자였다.육경한은 소원이 무슨 말을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나왔다.“괜찮아요.”소원이 이를 악물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당장 나가요. 샤워할 거예요.”“같이 할까?”육경한이 말했다.“...”소원은 할 말을 잃었다. 낯짝이 저 정도로 두꺼운 사람은 처음이었다.“대표님, 저 좀 존중해주실래요? 다친 곳이 이젠 거의 다 나았나 봐요?”소원은 차가운 말투로 그가 저번에 스킨십하려 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었다.육경한은 오늘 예상외로 인내심이 좋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기다릴게.”소
“유진아, 네가 한 일들이 정말 많고 대단했어. 알아?”소원이 유진이를 다독였다.하지만 아들과 이렇게 가까이 이야기해본 적이 많지 않은 소원은 혹여나 말실수를 하거나 자신의 말이 유진이에게 너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됐다.다행히 유진이는 매우 똑똑했는지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저 알아요. 제가 틀린 건 없었고 앞으로도 나쁜 사람들 혼내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소원은 아들의 영리함이 대견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다음에는 더 조심하자. 제일 중요한 건 우리 안전을 지키는 거야. 나쁜 사람들을 잡는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자, 알겠지?”“네, 알겠어요, 엄마.”유진이는 말을 이었다.“엄마, 다음에 외할머니 뵈러 갈 때는 우리 같이 가요.”소원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너 외할머니 뵈러 갔었니?”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빠...”그러나 두 글자를 말한 후, 유진이는 소원이 기분 나빠할까 봐 얼른 말을 고쳤다.“그... 아저씨가 데려갔어요. 그 아저씨가 여기가 엄마의 엄마, 제 외할머니라고 알려줬어요.”소원의 마음은 복잡했다.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겠는 기분이 밀려왔다.육경한이 아들을 데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갔다니 뜻밖이었다.소원이 전미영을 찾아갔을 때마다 그와 마주친 적이 없었던 걸 보면 일부러 시간을 피해서 간 모양이었다.‘참 계산적이네.’유진이가 말했다.“외할머니는 말을 못 하시지만 저한테 웃어주셨어요. 제가 외할머니한테 말도 많이 걸었는데 계속 웃으면서 들어주셨거든요.”소원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응. 우리 유진이 정말 기특하다. 외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렸구나. 다음에는 같이 가자.”잠시 후, 유진이가 갑자기 물었다.“엄마, 저 언제 삼촌 볼 수 있어요? 저 삼촌이 너무 보고 싶어요.”서현재는 유진이의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함께하며 큰 위안과 즐거움을 준 사람이었다.유진이는 아직 어리지만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은 잊지 않았다. 오랫동안 못 본
시선을 축 늘어트린 육경한의 눈동자에 소원의 목에 올라온 닭살이 보였다. 입고 온 옷이 얇았는데 병원에서 에어컨을 너무 세게 튼 것이다.소원은 아주머니가 너무 걱정되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줘도 딱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줬다는 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전문가 회진은 3시간이나 지속되었고 토론으로 얻은 방안은 투석, 즉 피를 바꾸는 것이었다. 치료 과정이 꽤 오래 걸릴뿐더러 아주머니가 언제 깨어날지도 미지수였고 치료한다 해도 아주머니의 몸은 예전처럼 돌아가기 어려웠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생활 능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에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순간 방민아에 대한 원망도 극에 달했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방민아만 생각하면 정말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육경한에게 말했다.“난 아주머니 이렇게 만든 사람 절대 용서 못 해.”육경한은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난 절대 끼어들지 않을게.”“약속 못 지킬까 봐 그러지.”적어도 지금은 육경한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소원은 말을 가려서 했다. 유진을 지키려면, 서현재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내려면 일단 몸을 사려야 했다. 서진태는 소원이 봤던 사람 중에 제일 악독한 사람이었기에 서현재도 잘 지낼 리가 없었다.지금 상황을 해결하려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육경한밖에 없었다.육경한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더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유진이 내 아들이기도 해.”소원이 대꾸했다.“알면 됐어.”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니 소원도 일단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육경한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방민아의 상황은 절대 좋아질 수 없었다.간호조무사가 일단 두 사람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일단 여독을 말끔히 배출하고 투석을 시작해야 했기에 두 사람이 여기 남아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
사실 그게 더 무서웠다. 육경한이 소원을 위해 한걸음 크게 물러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사람은 영원히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방민아는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기 전에 절대 소원과 유진을 건드리지 않고 몸을 사렸을 텐데 말이다. 그랬다면 지금 행복하게 육경한과 결혼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방민아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지금 당장 이혼해요. 이혼만 해준다면 돈은 원하는 만큼 두둑이 챙겨주고 아이랑 떠날 수 있게 해줄게요. 어때요?”소원이 콧방귀를 뀌었다.“방민아 씨, 진심이에요? 설마...”소원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원하는 걸 얻고 나서 우리가 다시 눈엣가시라고 생각해 우리를 다시 찾아내거나 함정을 팔 수도 있잖아요.”방민아는 그녀의 생각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소원이 너무 싫었다. 소원과 유진은 정말 방민아가 잊으려 해도 자꾸만 거슬리는 눈엣가와도 같아 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육경한의 마음을 영원히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절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기에 방민아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절대 그럴 일 없어요. 약속한 거니까 변하지 않아요.”소원이 웃으며 말했다.“방민아 씨,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한 승낙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어요. 내가 방민아 씨를 믿을 일은 더더욱 없고요.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 최선을 다해 지킬 거예요. 돈도 많고 신분도 있는 방민아 씨가 이번에도 무사히 나올지 모르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요.”“아악. 내가 당신 죽여버릴 거야.”방민아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젊은 경찰이 방민아를 제압하더니 날카롭게 경고했다.“방민아 씨, 난동 그만 부리고 업무에 협조해 주세요. 첫 번째 경고에요.”무슨 일이 있으면 방씨 가문에서 대신 해결해 줬기에 방민아는 이런 상황에 놓인 적이 단
소원은 출동한 경찰이 나이가 젊고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어 남자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얇은 걸 봐서는 여자였다. 그래도 방민아의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경찰 번호는 3210921, 아가씨,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경찰서로 연행하고 있으니 협조 바랍니다.”방민아가 코웃음 쳤다.“적법하면 체포영장 내놔요. 신고한다고 다 잡아가지 말고.”“그건 조사에 협조하면 다 밝혀질 일이에요.”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방민아의 손을 뜯어내려는데 손이 닿기도 전에 방민아가 막무가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건드리지 마요. 집행하는 척하면서 성추행하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젊은 경찰은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출동하면서 막무가내로 체포에 불응하는 사람을 많이 보기도 했고 경찰이 서비스 업종도 아니었기에 범죄자의 체면을 봐주거나 범죄자가 하자는 대로 해줄 리가 없었다.젊은 경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저기요, 아줌마, 자중하세요. 이 장면은 보디캠으로 전부 기록하고 있어요. 게다가 전 여자고요. 제 옷을 잡고 놓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방민아 씨입니다. 전 그저 제 옷을 잡은 손을 떼어내려 했을 뿐이고요.”아줌마라는 호칭에 방민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서울에서 내놓으라 하는 가문의 여식으로 살아온 방민아를 보는 사람마다 아가씨로 존칭했는데 이 경찰은 난동 좀 부린 거 가지고 바로 아줌마라고 불렀다. 아줌마는 방민아 같은 나이에 쓰일만한 호칭이 아니라 40에서 50대는 되는 여자들을 부르는 말인데 말이다.“아줌마라니. 예의라는 게 없어요? 죽고 싶어요?”방민아가 발악하자 젊은 경찰은 구겨진 제복을 툭툭 털며 말했다.“내 말 틀렸나요? 방민아 씨 말대로라며 나도 아줌마한테 성추행당했다고 할 수 있잖아요.”약이 잔뜩 올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방민아를 보며 소원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방민아 씨, 경찰이 무슨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방씨 가문 도우미인 줄 알아요?”방민아는 이런 상황을 만든 소원을 보며 걷잡을 수
육경한이 가자 유진은 소원을 데리고 시터가 남긴 약 찌꺼기를 찾으러 갔지만 주방은 말끔히 청소한 상태였고 시터가 쓰던 방에서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소원은 시터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에 보디가드를 찾아가서야 시터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몇 마디 묻지도 못했는데 쓰러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다 마침 경찰서에서 사람이 나온 걸 보고 방민아와 같이 경찰에게 넘겼다고 말했다.‘정녕 그 약이 뭔지 알아낼 방법이 없는 걸까?’그때 유진이 말했다.“엄마, 약 봉투를 찍은 적이 있는데 그 봉투로 무슨 약인지 알 수도 있지 않을까요?”소원은 너무 기쁜 나머지 유진을 안고 뽀뽀했다.“유진이 정말 너무 대단한데? 큰 도움이 됐어.”유진이 고개를 숙이며 수줍어했다. 유진은 차갑던 예전과 달리 많이 밝아진 것 같은 소원이 너무 좋아 손을 꼭 잡은 채 용기 내어 물었다.“엄마, 혹시 유진이가 미운 건 아니죠? 유진이가 나쁜 이모 말 들은 건 나쁜 이모의 약점을 잡기 위해서예요.”소원이 유진의 볼을 어루만지며 웃었다.“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 똑똑한 유진이가 알아서 자기를 지켜냈으니 엄마는 너무 뿌듯한걸?”소원이 자기를 미워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소원은 유진의 호루라기에서 뺀 메모리칩을 핸드폰에 꽂아 넣었다. 용량이 생각보다 컸고 유진도 많은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시간까지 표기되어 있었는데 이것으로 아주머니가 시터의 박해를 받았다는 건 충분히 입증할 수 있지만 방민아가 이 일에 가담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영상이 아니라 사진이었기에 오디오가 없어 방민아가 시터와 서 있는 것만으로 이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고 우길 수는 없었다. 제일 안전한 방법은 시터가 직접 방민아가 사주한 일이라고 인정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으로써는 시터의 마음을 돌리기 매우 어려워 보였다.일단 급선무가 아주머니를 구하는 것이었기에 일단 다른 건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뒤로 넘기던 소원은 원하는 사진을 발견하고 핸드폰으로 육경한에게 보내줬다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