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에 주산응은 기가 찰 따름이었다.‘뭐? 개? 지금 내가 개라 이거야? 그래... 내가 이대로 넘어갈 것 같아?’피가 흐르는 입술을 막은 채 주산응이 고래고래 소리쳤다.“이 계집애가 지금까지 만난 남자만 몇 명인 줄 알아? 돈만 많으면 유부남도 만나는 애가 얘가. 지금 돈 좀 있으니까 그나마 옆에 있는 거지 조금만 수틀리면 바로 차버릴 거라고!”주산응의 선 넘는 말에 윤헤인이 분노했다.“닥쳐. 또 그렇게 헛소리 해봐. 그땐 진짜 신고할 거니까!”“헛소리? 저번에 병원에서 널 도와준 남자도 그렇고. 아, 저번에 남자랑 차에서 키스까지 하던 거 내가 똑똑히 봤어! 어느 남자가 너 같은 걸 아내로 맞이하겠어? 음탕한 계집애!”거칠게 핏물을 내뱉은 주산응이 욕설을 이어갔다.“하여간 너도 참... 남자 보는 눈이 점점 떨어져서 어떡하냐? 전에 남자는 10억 그냥 턱턱 내놓더만. 이 남자는 돈 한 푼 안 주네.”“1억이라니? 누가 그 돈을 줬단 소리야!”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숨길 게 있나 싶어 주산응은 말을 이어갔다.“전에 너랑 키스했던 그 남자 말이야. 이선그룹에서 일한다는 그 남자, 내가 회사까지 따라가서 네가 그 동안 길러준 은혜도 모르고 건방지게 군다고 하니까 바로 1억 보내주던데? 너 귀찮게 굴지 말라고 하면서.”그리고 배남준에게 눈을 돌린 그가 말했다.“어디 보자. 이쪽도 귀티는 좔좔 흐르는 것 같은데 왜 이러나 몰라.”“말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전 혜인이랑 그냥 친구입니다.”배남준이 주먹을 꽉 쥐었다.“에이, 남녀 사이에 친구는 무슨. 쟤랑 자고 싶다는 생각 한 번도 안 했어?”다른 건 몰라도 윤혜인의 외모만큼은 인정하는 주산응이었다.그 시골에서 자라면서도 고급스러운 미모와 몸가짐은 눈에 확 띨 정도로 남달랐으니 말이다.점잖은 배남준이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닥쳐!”한편, 윤혜인은 주산응의 한 말에 꽤 충격을 먹은 상태였다.‘이준혁이 주산응한테 돈을 줬다고... 나 귀찮게 하지 말라고? 어쩐지 병원
“어어!”주산응이 차 뒤편에서 소리 지르며 달려왔다. “머……멈춰!”그러건 말건 차는 멈출 기세 없이 앞으로 내달렸다.“쿵!”큰 소리가 울렸다.주산응은 볼품없이 넘어져,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다.극심한 고통에 눈물이 줄줄 나왔고, 흐릿한 시선으로 차를 확인하고 뒷걸음질했다.유리창이 서서히 내려왔다.윤혜인은 무표정으로 전했다. “아직도 할 말 있어?”주산응은 피떡이 되어 못 볼 꼴이 된 얼굴에, 더 이상 이 조그만 녀석에게서 좋은 꼴은 못 볼 것이라고 직감했다.“얼마 줄 건데?”윤혜인도 그와 똑같이 한 손을 척 들어 올렸다.주응산은 입꼬리가 떨렸다.그러나 그도 이 비밀은 윤혜인 말고는 흥미가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서는 한 푼도 못 받을 것이 눈에 생생했다.주응산은 두 눈을 딱 감고 입을 삐쭉하며 말했다. “그래그래! 오천이면 오천이지! 오천만 주면 내가 싹 다 알려줄게. 한마디 거짓말도 없이.”윤혜인은 그를 정신병자 보듯 흘겨봤다.그리고 시정했다.“내 뜻은 오백이라고.”“……!” 주산응은 말을 못이었다.그는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욕을 퍼부었다. “미친년, 어디 문제 있나, 그렇게 깎는 게 어디 있어!”윤혜인은 아무것도 안 들리는 양 담담히 계속 내뱉었다. “사백.”“……정신병 걸린 년, 진짜 심각하네!”윤혜인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이게 마지막이야.”“마지막은 무슨 마지막!” 주산응은 화병에 붉으락푸르락했다.반면 윤혜인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이백.”“……”어라? 주산응은 이상함을 눈치챘다.“수학을 돼지한테서 배웠나, 다음은 삼백 이겠지?”윤혜인은 느긋하게 답했다. “내가 내는 거니까 내 마음이지.”주산응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꿈 깨. 삼백이면 몰라도……”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엔진음이 울리며 차창이 닫혔다.주산응의 피 먼지가 붙은 얼굴은 삽시에 사색이 됐다.그는 미친 사람의 끝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판사판인 데다, 한번 뱉은 말은 무조건 실행했다.
윤혜인은 주산응의 감춰지지 않는 욕심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빨리 말해.”주산응의 손아귀의 돈다발을 하나하나 다 세어보고 나서야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몇 년 전인가, 밖에서 술을 먹었어. 형부가 술집에 나를 데리러 온 거야. 돌아가는 길에 한 쓰레기통이 있었는데, 거기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린 거지. 한밤중에 얼마나 무섭던지. 형부보고 빨리 가자고 말했는데, 글쎄 형부가 기어코 가서 확인하겠다는 거야.나는 당연히 따라 안 갔지. 얼마 안 지나서 형부가 포대에 쌓인 아기를 꺼내더라고. 머리에는 물고기 잡을 때 쓰는 튼튼한 비닐봉지가 씌워져 있는 게, 딱 누군가가 이 애를 죽이려고 한 것 같았어.형부는 이 애를 데려갔는데, 마침 그 날 밤 집에 어린 손녀가 갑자기 열이 내리지 않아서 급성 뇌염으로 죽어버린 거야.우리 누나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서 이 딸 하나뿐이었는데, 혹여나 어르신이 충격받으실까 봐 형부가 이 애를 손녀딸인 거로 속이자고 한 거였어.”주산응의 말은 꽤 길었다. 윤혜인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그녀가 바로 그 이야기 속의 어린 아기였다……“난 다 말했어. 절대 거짓은 들어있지 않아. 그때 형부와 절대 어머니한테 들키지 않게 할 거라고 약속했었다고.”윤혜은의 양부, 바로 주산응의 형부는 주산응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은 한 자루의 양심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누나가 돌아간 뒤 형부는 아버지와도 같은 역할을 하며 집안을 지켜줬다.모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며 자기가 굶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굶기지는 않았다.형부는 요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좋은 사람이었다. 몇 년 전 교통사고로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이상한 사람들과 엮여 도박 놀음을 하러 다니진 않았을 것이라고 주산응은 생각했다.주산응이 돌아간 후.윤혜은은 아직도 충격적인 진실속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주산응이 말한 게 모두 사실이라면 당시 자신은 잃어버린 게 아니라 고의로 해코지당한 것이 아닌가!6살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가 누군가에게 해코지당할 정도로 나쁜 일을
잇따른 클락션 소리가 울려 퍼졌다.배남준은 거의 본능적으로 윤혜은을 끌어안아 뒤로 몇 발 물러섰다.하지만 그 차는 그들을 향해 온 것이 아니었다.차는 그대로 배남준의 검은색 밴을 들이받았다.“쾅!”극도로 큰 소리가 들려왔다.밴은 완전히 일그러졌으나 뒤의 차량은 큰 변화가 없었다.범퍼 빼고는 거의 손상을 입은 곳이 없었다.이도 주훈의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아귀는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전에 비슷한 일이 있은 뒤로 주훈은 무슨 일이 있던 대표에게 핸들을 쥐여주지 않았다.주훈이 직접 운전하면 그나마 힘 조절이 가능했기 때문이다.대표였다면 눈앞의 차는 이미 가루가 됐을지도 모른다……윤혜은은 머리가 아팠던 찰나에 또 충격을 받아버려 그만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완전히 배남준의 품에 기대었다.검은색 고급 외제 차의 문이 열렸다.광택이 나는 구두가 천천히 지면에 닿았다.남자는 한 손은 슈트 바지 주머니에 걸친 채 걸어왔다.올블랙의 슈트가 검은 먹과도 같이 엄숙한 분위기를 냈다. 몸짓에서 자연스레 스며 나오는 고귀한 분위기는 감춰지지 않았다.배남준은 기분이 상했다. 산에서 도를 닦는 승도 성깔이 있다고 하는데, 하물며 얼음 밭의 늑대 굴어서 자라온 그는 어떻겠는가.“이건 무슨 뜻이죠?”그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눈웃음을 지었다.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었으나, 그뿐이었다.이준혁의 검은 눈이 여인을 안고 있는 남자의 팔에 잠시 머물렀다. 차가운 시선으로 입꼬리만 씩 올리며 말했다. “실수로 차를 긁었네요.”배남준의 눈에는 더 힘이 들어갔다.왜 말이 통하지 않는 건가.이번은 차였지만, 다음은 사람을 칠게 아닌가!두 남자는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범 두 마리가 대치하듯 기세 흉흉하여, 누구 하나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그때, 윤혜은이 벌떡 일어나 얼굴을 굳혔다.“준혁 씨, 미쳤어요? 왜 여기 있는 거예요?!”순간 헛것이라도 보고 있는 줄 알았다.병원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에 나타난 것인가.이준혁은 먹먹
윤혜은은 기분이 언짢았지만, 트집 잡을 군데는 딱히 없었다.교활한 남자였다.주훈은 벌써 따로 차를 두 대 마련해 왔다. “배남준씨, 실례를 끼쳤습니다. 함께 가시죠.”배남준은 윤혜은을 보며 물었다. “같이 올 거야?”하지만 윤혜은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준혁이 말을 가로챘다. “한길이 아니니 제가 데려다주겠습니다.”윤혜은은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당신과도 같은 길이 아닌걸요.”배남준은 더 할 말이 있는 낌새였으나 주훈이 입을 열었다. “배남준씨, 안심하세요. 차는 충분히 있으니, 제가 꼭 아가씨를 집까지 바래다 드릴 겁니다.”윤혜은은 배남준의 차에 아직 처리하지 않은 돈과 서류들이 남아 있던 것이 떠올라 말했다. “남준 오빠, 먼저 가세요. 전 괜찮아요.”배남준은 신경이 쓰였지만 차 안에 가족과 연관된 기밀 문서들이 있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었기에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윤혜은에게는 이준혁도 있었기에 다른 건 몰라도 위험만큼은 없을 것이다.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당부했다.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윤혜은은 자신 때문에 배남준에게 적지 않은 일들을 떠안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순순히 응했다.곁에 서 있던 이준혁만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 힘을 풀었다.배남준은 그를 보며 전했다. “혜은이를 부탁드리겠습니다.”이준혁은 여전히 서늘한 눈길로 회답했다. “당연합니다.”두 사람의 대화에는 곁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칼바람이 서려 있었다.두 쌍의 눈 속의 거센 파도는 모두 윤혜은을 자신의 소유물인 양 감싸고 돌았다.배남준이 먼저 시선을 돌려 윤혜은을 따뜻하게 바라보고는 자리를 떴다.이준혁은 윤혜은을 바라보는 배남준의 시선을 주시하다, 또 한 번 심장이 찢기는듯한 기분이 들었다.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질 지경이었다.윤혜은은 주훈이 마련한 차가 도착하자 바로 빠른 걸음으로 올라타 문을 닫았다.이준혁이 오를 틈은 한치도 남기지 않았다.“서호 별장까지 가주세요.” 기사에게 전했다.기사는 대표를 두고 감히 먼저
남자가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을 본 윤혜은은 서늘한 얼굴로 차 문을 열려 했다.이준혁은 그 모습에 급히 불러세웠다. “혜은아, 아름이……”윤혜은은 나지막이 말하는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름이 오늘 많이 놀랐겠어. 아름이가 많이 걱정할까 봐 가보고 싶은데.”이 말에 윤혜은은 담시 멈칫했다.이준혁은 윤혜은이 아름이에게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아름이 보게 해줘. 매일 너희 앞에 나타나진 않을 거라고 약속할게. 그러니 오늘 밤만 보게 해줘, 제발.”남자의 낮게 떨리는 목소리는 자존감은 다 내려놓은 채 구질구질하게 빌기만 했다.문을 열려던 윤혜은의 손이 멈췄다.“혜은아, 부탁이야. 오늘만 아름이와 만나게 해줘.”이준혁의 그 잘난 얼굴이 시허옇게 질린 것을 보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약해졌다.하지만 그 정도로는 이미 차갑게 얼어붙은 그녀의 마음을 다 녹일 수는 없었다.자기가 당했던 그 상처들을 생각하면 일분일초가 고통스러웠다.그러나 아름이의 눈물범벅이 된 작은 얼굴을 떠올리면 별수가 없었다……약간의 고민 끝에 드디어 혜은은 손을 내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준혁은 그녀가 동의 했음을 알아차렸다.내심 기쁘면서도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다.아름이가 아니었더라면 일말의 기회라도 없었을 게 분명했다.서호 별장.혜은은 문 앞에 도착하고 바로, 홍 아줌마가 아름이를 안고 정원에서 거니는 모습을 보았다.그녀는 가끔 아름이의 등을 토닥여주며 작은 목소리로 달래고 있었다.그 모습에 혜은은 가슴이 아려와 곧장 달려가 이름을 불렀다. “아름아!”아름이는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엄마……”어린아이는 얼굴이 발그스레 했다. 아마도 오랫동안 울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긴 속눈썹이 바람에 말라 다 뭉쳐버렸었다. 가여운 것.혜은은 당장 팔을 뻗어 안아줬다.“아름아.”이준혁이 뒤에서 함께 이름을 불렀다.아름이는 그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 물었다.“아빠, 안 죽었네……”이준혁은 홍 아주머니 손에서 아름이를 안아 와, 웃으며
그 말에 윤혜인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때로는 혈연관계를 정말로 믿어야 할 때도 있는 것 같았다.분명 아름이의 옆에도 꽤 남자가 많았다. 예를 들면 삼촌도 있었고 배남준 아저씨와 외할아버지도 있었다.이렇게 많은 어른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는데도 결국에는 이준혁과 가장 친해졌다.그런 친밀감은 나타난 것과 같았고 아무런 장벽도 없었다.정말 아름이의 심리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많은 이성의 관심을 받더라도 아빠의 사랑을 대신할 수 없는 것 같았다.심리 선생님의 말씀처럼 건강한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의 사랑이 있어야 했고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건강하게 클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들은 수많은 오해와 상처가 있는데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방 안에서 아름이는 오늘 밤 특히나 이준혁에게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아름이는 화장실에 갈 때를 빼고 손을 씻을 때도 이준혁의 품에 안겨 있었다.이준혁은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아름이를 바라보았고 진심으로 아름이와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윤혜인은 이준혁의 안색이 조금 좋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심지어 허리를 굽힐 때면 그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피를 토하고 실신한 뒤 그의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았다.하지만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아름이와 놀아주고 있었다.윤혜인은 앞으로 다가가 이준혁의 품에 안겨 있는 아름이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름아 너무 늦었어. 우리 이제 씻고 자야 해.”아름이는 한창 재밌게 놀고 있었기에 이준혁과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아름이는 이준혁의 목을 꽉 껴안고서는 애교 섞인 말투로 말했다.“엄마 오늘 밤 아빠도 여기서 자면 안 돼?”윤혜인은 아름이가 이른 부탁을 할 줄은 몰라 멈칫했고 이준혁은 옆에서 기대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하지만 그도 지금 자신의 안색이 얼마나 안 좋은지 몰랐다.그는 지금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이 창백했다.윤혜인은 심장이 빨리 뛰면서 익숙한 슬픔이 느껴
윤혜인은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이준혁의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을 보고 아무 말도 없이 그녀에게 물었다.“비서한테 오라고 했어요?”지금 이준혁의 상태로는 운전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이준혁은 멈칫하더니 이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말했다.“말했어.”윤혜인은 이준혁의 아름다운 미소를 보고 얼음물을 부은 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오해하지 말아요. 난 그냥 준혁 씨가 우리 집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사고가 생기면 내가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아서 데려다주는 거예요.”이준혁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잠깐 기다려요.”윤혜인은 몸을 돌려 잠옷을 아름이에게 가져다주었다.아름이는 욕실을 나와 문 앞을 지나가며 이준혁이 여전히 있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아름이는 바로 도우미의 손을 뿌리치고서는 이준혁을 향해 달려갔다. 아름이는 작은 입을 삐죽 내밀며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빠. 아름이 재워주면 안 돼요?”“아름아 아저씨는.”윤혜인이 다 말하기도 전에 이준혁은 이미 아름이를 품에 안았다.그는 고개를 들고서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조금만 더 아름이하고 있으면 안 돼?”윤혜인은 멈칫했지만 아름이를 실망하게 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아름이는 기뻐하며 작은 손으로 손뼉을 쳤다.“고마워 엄마. 아빠 내 방으로 가요.”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갔고 아름이는 동화책을 잔뜩 들고 와서 이준혁에게 건네주며 읽어달라고 했다.이준혁은 침대 옆에 앉아서 동화책을 펴 아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아름이는 너무 행복하고 잔뜩 신이 났는지 눈을 감은 채 여전히 속눈썹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이준혁은 아름이의 귀여운 움직임에 마음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아름이는 오늘 울다 지쳤는지 졸음을 참아 보려고 해도 무겁게 내려오는 눈꺼풀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다.‘너무 졸려. 너무 졸려.’아름이는 이미 잠에 들었지만 잊지 않고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아빠 사랑해요.”순간 이준혁은 가슴에 갓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